오래 전 노숙인 남씨가 인력시장에서 퇴짜 맞고 뱉은 하소연이다.

“씨발~ 노숙하는 놈은 사람 취급도 안 하네.

폐품은 재활용이라도 하는데, 폐품보다 못한 거 아이가?“

억장 무너지는 자학의 말이었지만 맞는 말이다.

 

지난 겨울 서울역에 코로나 확진자가 90명이나 쏟아질 때 남씨도 실려 갔으나

아직 감감소식인걸 보니 아마 고행의 여정을 끝낸 것 같다.

갖가지 지병에다 먹은 것조차 없으니, 살아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부디 저승에서나마 폐품이 아니라 사람대접 받고 살기를 바란다.

 

서울역광장에서 방황하는 노숙자를 바라보는 대부분의 시선은 부정적이다.

“멀쩡한 놈들이 일 안하고 빈둥거린다‘고 나무라지만,

배운 기술도 없는데다 제대로 먹지 못해 힘도 쓰지 못한다.

거기다 행색마저 지저분하니 누가 일을 맡기겠는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이들을 위안하는 것은 오직 술 뿐이다.

술을 얻기 위해 구걸하고, 술이 취해 정신 놓는 일이 반복된다.

술마신 자는 노숙인 쉼터를 비롯해 어디에도 받아주지 않는다.

언제 올지 모르는 천국행 열차를 기다리며, 지옥 언저리를 맴돈다.

 

지난 주말의 밤 늦은 서울역 광장은 평소보다 한산했다.

대우빌딩의 화려한 네온사인이 무색했다.

더러는 패잔병처럼 쓰러져 잠들었고, 몇몇은 가로등아래 둘러 앉아

세상 뒤엎을 음모라도 꾸미는 것 같다.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화요일 '케이티'에서 식료품을 나누어 준다는 벽보가 나붙었다.

'케이티'는 오래전부터 동자동 쪽방촌을 지속적으로 후원해 온 고마운 기업이다.

 

'케이티'에서 시설을 제공하고 서울시에서 운영비를 대는 ‘돌다리골 빨래터’를 만들어

세탁기 없는 쪽방빈민들의 세탁문제를 해결해 주었고, 겨울철에는 외투를 나누어주는 등 좋은 일을 많이 해왔다.

 

삼년 전에는 KT 황창규 회장과 박원순 서울시장이 요리사 모자를 쓰고 나온 적도 있었다.

주민들에게 ‘수박화채‘를 퍼 주고, 소방호스로 공원 주변에 물을 뿌리기도 했다.

일손 도우려 나선 게 아니라 잠간동안 사진기자들 모델 노릇을 자처한 쇼다.

 

케이티 황창규 회장과 박원순시장이 도로에 물을 뿌리고 있다. / 2018년 8월 5일 

그 당시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정치적인 쇼하지 말라고 나무란 적이 있었는데,

세상을 떠난 지금에 이르니 송구한 마음이 앞선다. 비서들이 짜놓은 일정에 따랐을 뿐일텐데...

고향 후배라 좀 잘 했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의 지적이지만, 착한 양반이 얼마나 서운했을까?

 

자선을 알리고 싶은 것을 탓할 필요야 없으나, 비참해지는 당사자 입장도 생각해야 한다.

코로나 때문에 사람 만나는 자체를 피하는 데다, 더구나 무더운 여름날 줄 세워 생색내는 짓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먹을 것을 줄 세워 나누어 주는 형태는 가난한 사람들 길들이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 동안 줄 세워 주는 것을 꾸준히 지적하며 시정을 요구했으나 ‘서울역쪽방상담소’는 마이동풍이었다.

하기야! 주는 측에서 줄 세우는 것을 원한다면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라는 전염병이 창궐하자 줄 세우는 것을 자제하며,

시간 날 때 찾아가는 배급이 자리 잡아 가는 중에 또 다시 재연된 것이다.

 

주민이 천명이 넘는데, 준비한 식료품이 700개뿐이라 선착순으로 준다는 것은 변명에 불과했다.

동자동 사정을 훤히 아는 '케이티'에서 300개가 아까워 적게 가져왔겠는가?

여름철이라 문 닫힌 쪽방도 많지만, 바깥출입을 하지 않아 벽보를 못 보거나

몸이 불편한 분들이 많아 700개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은 알고 한 짓이다.

선착순으로 준다는 것은 줄 세워 사진찍기 위한 하나의 핑계일 뿐이었다.

 

많은 독지가들이 빈민들을 돕고 있지만, 이처럼 광고하며 돕지 않는다.

대표적인 분으로 두산그룹의 박용만회장을 꼽을 수 있다.

그 분은 내가 오기 전인 5년 전부터 매주 ‘가톨릭사랑평화의 집’에서 실시하는

도시락 장만에 직접 앞치마를 두르고 일손을 도와왔다,

지금은 창신동 산 꼭대기에 직접 주방을 만들어 홀로 사시는 노인을 돕고 있다.

일주일에 두번식 반찬을 만들어 드리고 계절마다 이불을 걷어 세탁해 드리는 등 남 모르게 자선을 베푼다.

 

처음 박회장의 봉사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기자 근성이 발동해 사진을 찍어 블로그에 올린 적도 있었다.

그만한 온정의 뉴스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 내용을 내려달라는 연락을 받았는데, 오히려 자선을 노출시킨 내가 부끄러웠다.

 

그리고 몇 개월 전부터 화요일마다 쪽방에 도시락을 전해주는 젊은이들이 있다.

어디서 보내 준다는 말도 없이 사람 있는 쪽방에만 전해 줘 고맙게 받아 먹었는데,

다른 경로를 통해 알아보니 가수 임영웅씨가 보내는 도시락이라는 것이다.

자선이란 이처럼 생색내지 않고 마음에서 우러나 돕는 것이 아니겠는가?

 

얻어먹는 주제에 매번 잔소리 해대는 것도 이젠 지겹다.

자선을 광고하기 위해 빈민들을 줄 세우는 이런 구태가 아직까지 재연되고 있다는 사실이 슬프다.

 

지난 26일 밤은 너무 더워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늦게서야 일어났는데, 얼마나 물을 많이 들이켰는지 밥 생각도 없었다.

건물 관리하는 정씨가 오늘 식료품 나누어 준다며 사람 몰리기 전에 빨리 받아오라고 귀뜸해 주었다.

하기야! 이 더운 날 줄서서 기다리는 일이 예삿일은 아닐 것이다.

 

정해진 배급시간 보다 30분이나 빨리 갔으나 이미 줄은 골목까지 뻗어 있었다.

더위도 더위지만, 행여 코로나 감염자라도 생길까 걱정스러웠다.

주는 측도 마음에 걸렸는지, 다른 때는 당사자가 아니면 대리수령은 할 수 없으나, 

그 날은 주민등록증만 가져오면 대리수령도 가능했다.

그렇다면 선착순이라는 줄 세우기의 의미가 없지 않은가?

 

그나저나 대신 받아 주는 사람도 손수레 없이는 가져갈 수 없었다.

작은 생수 20병까지 함께 주니 노인이 들기에 무리였다.

여름철에는 라면 같은 부식보다 생수가 더 반가운 품목이라 다들 낑낑거리며 받아갔다.

노인들이 높은 층까지 들어 올리려면 수십번은 쉬어야 할 것이다.

 

다들 속은 상하지만 아무 말 없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느 노인은 쪽방상담소 직원에게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해댔다.

본인 소유의 집도 있는 사람이 빈민으로 위장해 배급을 타 갔다는데, 그게 들통 나 거절당한 모양이다.

아무리 공짜가 좋다지만, 가진 사람이 더 무섭다는 것을 실감했다.

 

다들 몸에 베인 익숙한 자세로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는데,

‘케이티’ 유니폼을 입은 직원 한 사람은 받는 장면을 정면에서 사진 찍고 있었다.

더운 날 줄 세워 식료품 나누어 주는 것이 그렇게 자랑하고 싶었을까?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구시대적인 줄 세우기로 기업 홍보를 하려는가? 

어느 부서의 바보같은 임원 잔머리인지 모르지만, 뭐 대주고 빰 맞는 짓이다.

'케이티' 얼굴에 똥칠하는 짓은 이제 집어치우라.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금요일 서초동 한정식 선생 댁을 방문했다.

선생의 연락을 정영신씨가 받았는데, 찾아 뵌 지가 석 달이 넘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정선 집에 불이 나 정신없이 쫓아다니다 보니 세월 가는 줄 몰랐던 것 같다.

 

오랜만에 뵈어 그런지 안색이 좋아지셨다. 

전에는 삶에 대한 의욕이 없었는데, 삶의 의지가 느껴졌다.

또 하나 외형상 달라진 것은 제자 이일우씨가 사 주었다는 지팡이를 짚고 나섰다.

 

그 날은 가까운 식당들을 두고 자동차로 이동해 ‘늘봄’이란 고급 식당으로 안내했다.

얇게 자른 생고기에 야채를 곁들어 먹는데, 처음 먹는 음식이라 입 맛에 맞지 않았다.

 

선생께서도 귀가 어둡지만 나 역시 귀가 어두운 편이라

정영신씨가 통역을 해 주었는데, 선생께서 맛이 어떠냐?고 물었단다.

“촌놈이라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고 답했는데, 정영신씨가 통역을 잘 못했다.

“아주 맛있다‘고 말해버린 것이다. 이 건 무슨 죄목으로 다스려야 할지 모르겠다.

 

그 날 반가운 소식도 전해 주었다.

작년 가을에 발간한 한정식선생의 산문집 ‘마구간 옆 고속도로’가 세종도서에 선정되었단다.

그리고 새로 나온 사진집 ‘가을에서 겨울로’도 선물하셨다.

일전에 경의선 책거리에 있는 눈빛출판사 ‘예술산책’에서 얼핏 보기는 했으나

다시 한 번 꼼꼼히 살펴볼 수 있었다.

 

사진이 주는 울림이 선생의 오랜 주제였던 ‘고요’보다 큰 것 같았다.

 

일 년 전 사진을 보여 줄 때만해도 스물 장으로 사진집을 만드는 것이

무리인 것 같았으나 기우에 불과했다. 사진은 량이 아니라 질이었다.

 

대부분의 사진집을 보면 쓸데없는(마음에 들지 않는)사진이 많아 대충 보게 되는데,

엄선된 사진은 한 장 한 장 꼼꼼히 살펴볼 수 있어 사진의 의미를 읽을 수 있었다.

 

책에 게재된 사진이라고는 열여덟 장뿐이고 글도 많지 않았다.

 

“가을이어서 쓸쓸한 게 아니라, 쓸쓸해서 가을임을 느낀다.

그리하여 내게는 봄도 가을이었다. 봄만 아니라 여름도 가을이고,

심지어 가을조차도 가을이었다.“

 

이 말이 선생의 글이고 마지막에는 경허스님 시로 대신했다.

 

“홀연히 생각하니 도시 몽중이로다

천만고 영웅호걸 북망산 무덤이요

부귀 문장 쓸데없다. 황천객을 면할 손가

오호라 이내 몸이 풀끝의 이슬이요 바람속의 등불이라“

 

짧은 글이지만 선생의 심정을 대변한 것으로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가을에서 겨울로’사진집 가격은 3만원이다.

한정식 선생의 마지막사진집이며 소량 한정본이라 소장할 가치가 높다.

 

사진을 보니 아옹다옹 다투고 욕심 부리며 살지만, 다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법문같았다.

 

사진, 글 / 조문호

 

지긋지긋한 더위와 싸워야 하는 폭염이 연일 이어지고 있다.

후덥지근한 바람을 되돌리는 선풍기소리 조차 짜증스럽다.

요즘 같은 더위의 쪽방은 대개 자물쇠가 잠겨있거나 방문을 열어놓고 있다.

 푹푹 찌는 찜통에서 탈출하여 어디선가 노숙하고 있을 것이다.

 

쪽 팔려 노숙은 안 한다는 맞은 편 김응수씨만 곰처럼 버티고 있었다.

코로나만 아니면 지하철이라도 탔으면 좋겠으나, 사람 접촉이 싫어 안 나간단다.

옆방의 최완석씨는 길 모퉁이에 자리 잡았더라.

이런 더위에는 정해진 거처도 없는 노숙자가 상팔자다.

 

몇 년 전에는 쥐가 천장 전선을 갉아 먹어 정전된 적이 있었는데,

더운 바람이라도 돌리는 선풍기가 작동 안 하니 잠시도 견딜 수 없었다.

원인을 못 찾아 낑낑대다 하는 수없이 노숙을 하게 되었는데,

맞바람이 통하는 건물 입구에 자리 깔아 너무 시원했다,

 

그러나 칼잠 자는 습관으로 귀를 땅바닥에 붙여 누웠더니

자동차 바퀴 구르는 소리가 시끄러워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노숙자들이 그 시원한 장소를 탐하지 않는 이유를 알았다.

시멘트 바닥에서 잠들어 그런지 그 이튿날 근육통으로 혼이 나,

다음부터 절대 노숙은 하지 않았다.

노숙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더워도 팬티만 걸치고 화장실 물을 뒤집어 써가며 방에서 버텨낸다.

이런 날은 녹번동에서 개기는 게 좋지만, 그 곳은 컴퓨터가 없어 일을 못한다.

사실은 컴퓨터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다 마지막 지하철을 놓친 것이다.

그의 컴퓨터 중독에 가깝다.

 

더위나 식힐 겸 서울역광장으로 나갔다.

자리 잡고 누운 이도 있지만, 광장을 오가며 시간 보내는 자가 더 많았다.

유독 정씨만 성경책을 들여다보고 뭘 옮겨 적고 있었는데,

노트에는 씨알이 될만한 성경구절이 깨알처럼 적혀 있었다.

 

어두워 눈 버린다며 밝을 때 보라고 말했으나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보고 또 보았는지 성경에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했다.

젊을 때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으면 고시라도 붙었겠다고 농담 했더니 빙그레 웃는다.

네가 어찌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알겠냐?는 투다.

 

겨울은 쪽방, 여름은 노숙이라 듯이 요즘은 노숙하기 딱 좋은 계절이다.

그러나 마음대로 눕지도 못하고 계단에 웅크려 자는 여인도 있었다.

무슨 사연으로 거리에 내 몰렸는지 모르지만, 안 서러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산다는 게 도대체 무엇이던가?

김씨는 무슨 꿈을 꾸는지 얼굴을 씰룩거리며 자고,

천씨는 어디 아픈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침이 오면 또 다시 더위와 싸워가며 밥 한술 얻어먹고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들을 구할 수는 없을까?

 

요즘 뉴스에는 기본소득이니 어쩌니 나팔 불어 대지만,

거리에 내 몰린 노숙인의 생존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는 정치인이 없다.

국민을 존중하는 게 아니라 표를 존중하는 더러운 정치꾼들에게 무슨 기대를 한단 말인가?

누구의 노랫말처럼, 잠자는 하늘 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 조율 한번 해 주세요

 

사진, 글 / 조문호

 

 

서울역 광장을 배회하는 노숙인 중에는

세상에서 밀려 난지 얼마 안 된 초보도 끼어있다.

 

아직 세상에 미련이 많아 대개 지하도 구석에서 핸드폰이나 충전하며 시간 보낸다.

어떤 이는 담배 생각에 서울역광장 흡연구역을 맴돌며 담배구걸도 한다.

아무리 담배가 피우고 싶어도 수두룩한 재떨이 꽁초는 손도 안 댄다.

 

그런 초보들은 잠깐 보이다 이내 사라진다.

어딘가 비빌 구석이 생겼거나 일당 주는 일거리 따라 전전할 것이다.

간혹 영등포역이나 사람 많이 모이는 파고다공원 등지를 떠돌다

다시 서울역으로 돌아오는 노숙인도 있다.

 

하루가고 한 달 가는 세월 따라 그들도 하나하나 바뀔 수밖에 없다.

체납된 요금으로 핸드폰도 버리게 되고 등짐도 단출해진다.

그러나 그들이 즐겨 찾는 것은 밥보다 술이다.

 

채움 터에 가면 끼니는 해결할 수 있으니 술을 사기위해 구걸을 한다.

술이 모든 근심걱정을 사라지게 해 주는 마약으로 둔갑한 것이다.

노숙 생활이 알콜 중독자를 양산시킨다.

 

어제는 오전 여덟시 무렵 거리에 나왔다.

낯 시간은 가는 놈이나 있는 놈이나 만나는 것 자체가 짜증스러워서다.

동자동 새꿈공원엔 몇몇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거나 아침부터 술을 마셨다.

서울역광장도 술 마시지 않으면 대부분 누워있었다.

 

아직 코로나 검사받을 시간이 되지 않았으나, 대기 줄은 점차 길어지고 있었다.

뜨거운 햇살에 쫓겨 옮겨가기 직전의 서울역광장 풍경이었다.

 

뜻밖의 노숙인을 만났다, 가구점하다 마누라에게 쫓겨 났다는 박씨를 일년 만에 만난 것이다.

너무 반가워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라며 노래까지 불렀다.

습관적으로 카메라를 꺼내다가 사진 찍지 말라는 손사래에 얼른 집어넣었다.

사진 찍히는 것을 유달리 싫어했던 걸 깜빡 잊어버린 것이다.

 

 

별 어려움 없이 살았으나, 동료와 아내가 배신했다며 울분을 터트린 적이 작년 봄이었다.

이젠 모든 근심 걱정을 버렸는지 처음 만났을 때보다 얼굴이 편해보였다.

행색은 더 구질구질해 졌으나 그 것은 노숙인의 계급장에 불과하다.

 

그동안 영등포역에서 지냈는데, 고향 친구를 우연히 만났단다.

반가움도 잠시 뿐, 경계하는 눈빛에 속이 많이 상했다고 한다.

행여 소문 퍼트려 누가 찾아올까 걱정되어 서울역으로 옮겨왔다고 했다,

그 사이 담배는 끊었고, 술도 서서히 줄여가고 있단다.

 

이 지경으로 만든 동료와 가족에 대한 미움도 이제 사라졌고,

돈에 대한 집착까지 사라지니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법정스님의 무소유란 말을 옛날에는 비아냥거렸으나, 이제 사 가치를 알겠다고 한다.

돈이 있으면 돈에 대한 욕심이 더 생기는데,

아무것도 없으니 돈에 대한 욕심이 사라지더라는 것이다.

육신은 불편해도 마음은 편하다며, 세상이치를 환갑이 되어서야 깨우쳤단다.

 

아는 절집에 가서 일이나 도와주고 여생을 보낼 것이라며 웃는다.

자리 잡으면 연락해 달라며 처음으로 전화번호를 적어 주었다.

 

사진, / 조문호

 

 

 

인사동에서 전혀 다르게 접근한 두 가지의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전쟁지역이나 소외지역을 기록한 성남훈의 “부유하는 슬픔의 시”와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알리는 한희준의 “플라스틱2”가

인사동 ‘KOTE’ 3층과 '갤러리 라메르' 1층에서 각각 열리고 있다.

 

둘 다 사진전이지만, 전자는 발로 뛴 다큐멘터리사진이고

후자는 머리로 만든 파인아트 사진이라는 것이다.

 

사진적으로 접근한 성남훈의 사진과는 달리 한희준은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았다.

사진과 회화, 설치미술을 넘나드는 혼종의 방식을 택한 것이다.

 

사진 개념이 확장되어 구분하는 자체가 고리타분한 생각이겠지만,

엄밀히 말해 한희준의 사진은 사진이 아니라 미술의 영역이다.

 

어떤 접근법이 더 바람직한가는 아무도 모른다.

내가 볼 때는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다.

 

다큐사진가 성남훈의 ‘부유하는 슬픔의 시’는

지난 10일부터 오는 29일까지 인사동 복합문화공간 KOTE 3층에서 열린다.

 

이 전시에는 성남훈의 대표적 사진으로 꼽히는 집시소녀 사진도 있었다.

프랑스 사진에이전시 ‘라포’ 소속 사진가로 일할 당시에 촬영한 사진들로,

20여년에 걸쳐 세계의 수많은 분쟁지역과 소외지역을 찾아다니며 유민들의 부유하는 삶을 기록해 왔다.

 

코소보, 보스니아, 르완다,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레바논, 우즈베기스탄,

인도네시아, 에티오피아, 우간다, 페루, 발칸반도 등을 찍은 사진에서 일부를 보여준다.

난민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을 살펴보면 한숨과 탄성이 절로 나온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서 난민들의 고통을 온 몸으로 껴안으며 찍었다.

따뜻한 인간애에 휩싸여 더러는 서정적이고 시적인 느낌까지 든다.

 

세계 여러 나라의 전쟁지역이나 소외지역을 찍은 사진 외에도

제주 4.3사건을 주제로 한 “붉은 섬”도 새로이 선보였다.

제주의 아름다움에 감춰진 4.3사건이라는 역사적 아픔을 찾아 나선 것이다.

1948년 4.3사건 후, 7년 7개월 동안 3만 명에 가까운 주민들이 무고하게 희생되었지만,

유가족과 희생자들이 겪었던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못한 채 남아있기 때문이다.

 

성남훈의 사진은 온몸으로 부딪히며 찍은 사진이라

작품이 주는 울림이나 여운이 만든 사진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 와 다른 방법으로 접근한 한희준은 심각한 환경문제를 들고 나왔다.

그가 만든 사진 아닌 이미지는 카메라 없이 만든 ‘플라스틱2’다.

7월19일까지 인사동 ‘갤러리 라메르’ 1층 전시실에서 열린다.

 

초창기 인화방식인 검 프린트, 시아노타입 프린트에서부터

플라스틱 병에 흙과 에폭시를 혼합하는 등 표현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그리고 인화지에 인화하는 기존 틀에서 벗어나 헝겁, 유리, 한지 등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다양한 재료와 방법을 활용해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알리는 사회적 접근이라는 점에서는 다큐의 골격을 유지하나

표현방법에서는 기록사진의 객관화를 버리고 주관적 방법을 택한 것이다.

플라스틱은 잘 분해되지 않아 지구의 재앙이 된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지난 번 보여 준 ‘플라스틱1’에서는 세계 명소에서 나오는 생수병을 찍어,

좋은 생명수를 오염의 근원인 프라스틱 병에 담아 마시는 모순을 풍자하기도 했다.

이젠 한걸음 더 나아가 플라스틱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형상화하거나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차용하였다.

 

프라스틱 물병의 뒤틀린 형상으로 인체가 허물어지는 경각심을 깨우거나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시아노타입의 푸른 빛깔은 마치 영혼이 떠도는 것 같다.

죽음을 상기시키며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 이미지는 영상이 아니라 완전한 추상화다.

인지의 영역에서 벗어나 사유의 측면을 강조하였다.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면에서는 높이 평가되지만,

그 대신 사진의 기록성과는 결별한 것이다.

 

그렇지만 방법론에 고민하며 표현 방법을 확장해 간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겠다.

아무래도 대중에게 오염의 심각성을 인지시키는 데는 직설적인 사진에 미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온몸으로 부딪히며 찍은 성남훈의 사진에 따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사진에 바친 세월이 성남훈씨에 미치지 못해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노력에 따라서는 한 장의 이미지로 더 큰 울림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이 추구하는 진정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누구처럼 시대적 유행 따라 가느라 오랜 세월 일구어 온 자신의 색깔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한희준의 '플라스틱2'를 보고 나오니, 이층에서 또 다른 단체전이 열린다는 정보를 주었다.

'흑백사진 연구회'라는 동아리의 사진전인데,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어떤 이가 지도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같이 사진이 아니라 미술로서의 접근이었다.

자칫 겉 멋에 취해 허송세월할까 걱정되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예술이란 유행도 아니고 재미도 아니라는 점이다.

지도하는 자의 지시에 따를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이 우선되어야 하고,

초지일관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정성에 있다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며 밀려오는 슬픔은 사진은 돈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작업도 돈 따라 가는 것 같았다. 예술 작업을 돈 벌려고 하는 것이던가?

제일 경계하야 하는 것이 모든 것을 망치는 돈인데...

 

사진, 글 / 조문호

 

포토마가 주최하는 제2FNK PHOTOGRAPHY AWARD 순수부문 수상자 초대전인

손은영의 밤의 집2’가 지난 12일 평창동 금보성아트센터에서 개막되었다.

 

오후 여섯시에 시상식이 있다기에 사람들을 피해 한 시간이나 빨리 갔는데,

일찍부터 사진가들이 여럿 와 있었다.

 

작가 손은영을 비롯하여 주최측인 '포토마' 하춘근대표, '갤러리 브레송' 김남진관장,

사진가 엄상빈, 정영신, 김영호, 곽명우씨 정도는 알겠는데,

다들 마스크 때문에 잘 모르겠더라.

 

빨리 빠져 나오려고 사진부터 돌아보았는데,

지난 번 보여 준 밤의 집보다 좀 더 정형화 된 것 같았다.

 

어둠이 깃든 집의 구조가 마치 집들의 초상사진처럼 존재를 드러냈다.

이전에는 어렴풋이나마 집에서 인적, 즉 사람의 체취가 감지되었으나,

이번에는 자로 잰 듯 수평과 수직으로 그려 진 구조물이

독특한 저마다의 색깔에 의해 마치 무대세트처럼 다가왔다.

 

의도된 작위였다.

점점 각박해지고 규격화되어가는 현대인들의 삶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촬영할 때부터 모든 것이 계산되어 있었다.

마땅한 집을 찾아내어 화면 구성에서 색조에 이르기까지...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받은 손은영씨, (손은영씨 페북에서 옮겼다)

촬영 후 후보정을 통해 또 다른 분위기의 집으로 바꾼 것이다.

사진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다시 말해 기록의 예술에서 표현의 예술로 재탄생한 것이다.

 

이번에 발행된 손은영의 '밤 의집2' 사진집 표지 (손은영씨 페북에서 옮겼다)

우리전통가옥은 초가 능선처럼 어딘가 곡선이 있으나

서구의 건축들은 대개 직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령 같은 수직의 아파트가 점령한 현실에서 본 집의 형태는

옛날 달동네 집이나 마찬가지다.

 

포근한 인간의 정서가 풍기는 달동네를 대신하여

경제성장으로 발전한 삭막한 오늘의 달동네인 것이다.

시대성이 담긴 주택사의 한 단면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적인 기록의 가치보다

작가의 주관에 따라 예술사진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 예술사진 또한 시대적 달동네를 조명하는 기록의 한 축이기도 하겠다.

 

작가는 오랜 나날을 밤에는 찍고 낯에는 후보정하며 올빼미처럼 작업했다.

다시 말해 밤에는 사진 찍고 낯에는 그림을 그린 것이다.

색의 조화는 물론 창에 백열등 불빛을 삽입하는 등 미적 요소까지 끌어들였다.

 

사진들은 도식적이면서도 서정적이었다.

도식적인 형태가 정형화되긴 했으나

포근한 색감과 직선의 미가 어울려 관능적으로 다가왔다.

 

사진 속은 잠잠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 날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미에 대한 작가의 감수성과 조형감각이 돋보였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듯, 21일까지 열리니 구경 한 번 하시라.

 

사진, / 조문호

 

허승범의 몽마(夢魔)는 현대인들의 무의식 속에 잠재된 불안과 욕망을 무서운 꿈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누구나 악몽에 시달려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무서운 뭔가에 쫓기다 깨어 나 잠 못 이룬 밤이 있었다.

그건 인간의 정신적 불안과 삶의 통증, 그리고 억눌린 욕구가 뒤엉켜 꿈에 나타났을 것이다.

작가는 그 악몽의 이미지를 형상화하여 인간성 상실로 치닫는 도시문명의 현실을 풍자, 비판하고 있다.

전시는 오는 17일까지 후암동 KP갤러리에서 열린다.

 

 

몽마(夢魔) / The Unconscious Mind

 

허승범展 / HURSEUNGBEOM / 許丞範 / photography.installation 

2021_0708 ▶ 2021_0717 / 일,공휴일 휴관

 

허승범_The Unconscious Mind Series, 생명의 즙_100×100cm_2021

 

초대일시 / 2021_0708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KP 갤러리

Korea Photographers Gallery

서울 용산구 소월로2나길 12(후암동 435-1번지) B1

Tel. +82.(0)2.706.6751

www.kpgallery.co.kr

 

 

Korea Photographers Gallery(이하 K.P 갤러리)는 허승범 작가의 사진전 『몽마(夢魔) / The Unconscious Mind』 전을 7월 8일부터 7월 17일까지 개최한다.'몽마(夢魔)' 는 밤중에 자고 있는 사람을 습격하여 악몽을 꾸게 한다는 악마를 뜻하는 한자어이다. 이번 전시에서 허승범 작가는 본인과 주변인들이 꾸었던 악몽들에 착안하여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집단적 무의식 속에 내재된 어두운 상념의 그림자이자 억눌린 욕망과 욕구들을 사진, 영상작업을 통해 소개한다. 그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거듭된 우리 사회가 급속히 이룩한 산업화와 문명화 이면에는 해소되지 못한 개인의 억눌린 욕구와 욕망들이 존재하며 이는 무의식에 침잠하여 꿈을 통해 발현된다고 이야기한다. K.P 갤러리는 『몽마(夢魔) / The Unconscious Mind』 전시를 통해 정신적 불안과 압박, 스트레스를 억누르며 쉼 없이 달려가는 우리들이 삶을 돌아보고 무의식에 침잠하여 꿈을 통해 발현되는 현대인의 삶과 모습을 돌아보고자 한다. ■ KP 갤러리

 

허승범_The Unconscious Mind Series, 사람들_120×80cm_2021
허승범_The Unconscious Mind Series, 낮잠_60×90cm_2021

거듭된 과학기술의 발전을 토대로 급속히 이룩한 산업화와 문명화는 분명 우리들에게 편리한 삶을 제공한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인류의 발전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미래를 앞당기려는 우리들의 노력은 가시적인 측면에서 충분히 성공했다고 할만하며, 더 큰 성공을 갈망하는 인간의 욕망은 세상을 발전시키는 동력이다. 하지만 급속한 변화에 따른 현대 문명의 빠른 속도감은 우리들의 삶에 적잖은 부작용을 이야기한다.

 

허승범_The Unconscious Mind Series, 사람들_120×80cm_2021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만남보다는 온라인상으로 건조한 안부를 주고받는 데 익숙해졌다. 한 개인이 도시라는 거대한 조직의 요소로 작동하게 함은 개인의 존재적 결핍을 야기하며 우리들의 가치를 군중 속의 익명으로 제한한다.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무한 경쟁시대에 낙오되지 않기 위해 우리들은 정신적 불안과 압박, 스트레스를 억누르며 쉼 없이 달려가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가 바쁘고 시간에 쫓기며 살아가다 보니'쉼'이란 단어는 사치이자 낙오자들의 넋두리로 전락해버렸다.

 

허승범_The Unconscious Mind Series, 친구_80×120cm_2021

강퍅해진 현대사회의 해소되지 못한 개인의 억눌린 욕구와 욕망들은 무의식에 침잠하여 꿈을 통해 발현된다. 학자들의 꿈 해석에는 이견이 있지만 명백한 공통점은 꿈을 통해 우리들의 무의식의 상태를 성찰한다는 것이다. 깨고 나면 희미해지는 대부분의 꿈과는 달리 악몽은 우리들 기억 속에 트라우마가 되어 현실의 스트레스를 매개로 언제든 다시 찾아온다.

 

허승범_The Unconscious Mind Series, 날고기_120×80cm_2021

나는 나와 주변인들의 꾸었던 악몽들을 소재로 사진을 찍었다. 우리들은 현대인의 악몽이 던지는 메시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악몽은 현대의 집단적 무의식이 보내는 어두운 상념의 그림자이자 억눌린 욕망과 욕구들의 분출구이다. 환부에 느껴지는 통증처럼 악몽이 우리들에게 보내는 신호는 경고에 가깝다. 화려한 도시의 페르소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몽마는 어쩌면 멈출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바이러스이지 않을까? 현대사회에 증가하는 자살률과 정신질환 발병률은 몽마의 강한 전염력을 증명하고 있다.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사이코 패스적 범죄가 난무하는 현실 속에서 과연 우리들의 내면은 안전한가?

 

허승범_The Unconscious Mind Series, 친구_80×120cm_2021

큰 배에 타고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하차 방송이 나오고 사람들은 하나 둘 출입구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간 들고 있던 유리로 된 물병을 떨어트렸다. 물병은 데굴데굴 굴러서 여기저기 부딪혔지만 깨지기 전에 잡을 수 있었다. 그때 갑자기 무슨 일이 있는지 배 안의 상황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배 밖에선 어떤 무리의 시위소리와 총성이 들렸고 배 안의 사람들은 공포에 떨기 시작했다. 총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시위대는 출구 쪽 문 앞에서 배 안으로 진입하려 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나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들고 있던 물병을 주시했다.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분명 공포에 떨고 있었지만 차분히 물병을 열어 물을 마시려 했지만 손이 떨려 병을 열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여기저기 도망치는데 나는 꼼짝없이 그곳에서 물병을 여는 시도를 반복할 뿐이었다. (악몽노트 중에서) ■ 허승범

 

 

Vol.20210709d | 허승범展 / HURSEUNGBEOM / 許丞範 / photography.installation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