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마다 어머니가 다르다 -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을 위하여 ● "인간의 영혼이란 희생과 용기와 인내가 가능한 정신이다." (윌리엄 포크너) 정영신의 사진은 포크너의 이 아포리즘을 이렇게 번안한다. - 땅의 영혼이란 어머니의 희생과 용기와 인내가 낳은 정신이다. 이어 그의 사진은 내게 말한다. 땅마다 어머니가 다르다. 어머니마다 땅이 다르다. 땅마다 어머니 희생과 용기와 인내의 서사가 다르다. 어머니마다 땅의 노래가 다르다 그리하여 정영신은 땅마다/어머니마다 다른 사랑을 시대의 운명으로 보여준다.
정영신_대지에서 일하는 어머니(영암)_1987정영신_대지에서 일하는 어머니(진안)_1988
1980년대 후반부터 시골 오일장에서 운명의 표정을 읽어왔던 작가는 이제 장터 풍경의 내적 본질인 '어머니의 땅'으로 카메라시선을 옮겨 놓았다. 어머니들의 희생과 용기와 인내가 우리땅 영혼의 꽃으로 피어나는 곳이 장터이던 시대가 있었다. 이 땅의 땅마다 다른 영혼을 어머니마다 다른 꽃으로 피우던 시골 오일장, 그 장터가 시대의 운명을 다하도록 30여년 줄기차게 사진 작업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그는 시대 운명에게 선택받았다 하겠다. ● 오일장이 시대적 활기와 탄력을 그런대로 유지했던 1980년대, 우리 어머니들은 닷새마다 다가오는 장날이 있어 그 궁핍의 시대에도 살맛났다. 그가 온 나라 600여 곳의 오일장 운명의 표정을 포착하는 사이, 시골 오일장은 도시산업화의 물결에 밀려 하나둘씩 사라져갔다. 몇해 전 그가 연 사진전 「장날」에 나는 시 한수 올렸었지. ● 노인 한 사람이 사라지면/ 도서관 하나 사라진다는 말이 있다/ 눈은 나리는데/ 여기 얼마나 많은 도서관들이 장보따리 들고 줄지어 섰는가/ 도서관들의 눈빛이 도다리처럼 한쪽으로 쏠렸다/ 도서관들은 뭘 보고 있을까/ 뭘 기다리고 있을까/ 세상 구할 메시아? 다음 생애? 버스에 앉을 자리?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먼 섬으로 가는 통통배? 안방 아랫목? 두고 온 손주들? 떠나온 북쪽 고향?/ 눈이 나아리네♪ 깐소네 리듬타고/ 눈은 내리며 날리는데/ 춤추며 내리는데/ 희망버스는 아무래도 이 늙은 장터 버스정류장으로는 오지 않을 것 같다/ 마냥 눈은 내리는데/ 장터 하나 사라지면/ 수십 수백 도서관이 사라지고 마는데
정영신_어머니의 안뜰(강진)_1988
모든 사진은 모든 운명이 그러하듯 시대의 산물이다. 작가가 진정으로 아쉬워한 것은 하루가 다르게 퇴색하는 오일장 자체가 아니라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가는 농촌공동체의 운명이다. 농업은 기업화되더라도 지속되겠지만, 농촌공동체는 이미 소멸했다. 작가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을 강을 건넌 농촌공동체의 본명이 '고향'이다. 소설가이기도 한 작가는 장이 있는 유년의 풍경을 고향으로 향한 원초적 그리움으로 선명하게 글로 묘사하고 있다. ● ...... 집에 있는 소를 들로 끌고 나온 어머니, 내가 어렸을 적에는 소꼴을 먹이기 위해 소를 끌고 들로 나왔다. 소가 풀을 뜯어 먹는 시간에 구름과 이야기하고, 뒷산에 있는 아버지 무덤과 대화를 하다보면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갔다. 마을 앞 개울가 옆으로 가면 온갖 풀이 무성해 소 끈을 멀리 잡고, 소가 풀을 먹는 동안 땅위에 아버지 얼굴을 그리고, 한복을 곱게 입고 장에 간 엄마를 기다리다보면 어느새 해가 땅에 떨어졌다. 그때 소가 음메! 하며 아는 척하면 소를 끌고가 외양간에 넣었다 .......나락을 베고 난 논에 이삭 하나라도 떨어져 있는지 달이 환하게 뜨는 날은 온 식구가 논에 가서 벼 이삭을 주웠다. 난 검정고무신을 신고 도레미파솔라시도를 부르며 살포시 밟아가며 달빛에 비치는 논바닥을 훑으면 손 안에는 제법 나락이 쥐어져 있었다. 망태기에 가득 담겨진 이삭을 보며 온 식구의 웃음소리에 놀란 달빛은 우리동네 끝집 당골네 집을 건너 우리집 싸리문 앞에 데려다주고 홀연히 사라지곤 했다. ● 한폭의 수채화 같은 고향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기에 작가는 고향을 잃어버린 현대의 실향민에게 고향을 되찾게 해줄 방도를 끊임없이 열망했을 것이다. 불가능을 향한 열망만큼 작가혼을 불태우는 것은 다시없기에. 이 지점에서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장터사진을 스스로 재발견한다. 그간 발표한 사진은 장터풍물/풍경이 주류였는데, 이런 장터 사진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근원적 사진미학의 겉모습의 현상이었다는 걸 깨달았던 걸까. 장터를 찍으면서 부차적으로 찍었다고 생각했던 장꾼들이 장으로 나오기까지 이 땅과 한몸 되어 어울려 사는 일상의 풍경들이 근원적 사진미학의 눈을 작가의 내면 안쪽으로 열어젖힌 것이다. 그 안쪽 깊은 곳에서 '어머니의 땅'이라는 오래된 미래가 눈을 새롭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어머니의 땅'을 기록한 사진들은 작가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본질의 문을 열어젖혔다.
정영신_어머니의 안뜰(진도)_1988
오일장은 우리 땅 고유의 고향사람들이 주연으로 출연하는 삶의 연극무대다. 그 연극을 영상화한 작가의 작품에서 남녀 출연자들은 세상살이 그대로 적절히 조화를 이뤄 맡은 역을 소화하고 있다. 하지만 고향 일상의 연극무대에 오른 출연자는 거의 여성 그러니까 어머니들이나 그의 사진에서 남자는 겉모습의 '현상'이었고, 여자는 내면에 감추어진 '본질'이었다. 이 '어머니의 땅' 사진작업 시기는 1987년에서 1990년까지다. 그때 이미 근력 있는 남정네들은 대처의 노동시장으로 빠져나간 것이다. 오일장에 등장하는 젊은 남자는 땅 파먹고 사는 그 땅의 농꾼들이 아니라 거의 직업적인 장꾼인 타지 사람이다. 작가가 장꾼들의 일상에 눈을 뜬 1980년 후반만해도 우리의 고향들은 젊었건 늙었건 어머니들이 지아비와 다 큰 자식들은 '돈 벌러' 대처로 떠나보내고 남은 어린 자식을 먹이던 '어머니의 땅'이었다. 그리운 김광석노래 그대로 작가의 나이 서른즈음인데, 거기서 자신의 성장기와 일체화 되었던 고향 전남 함평의 젊은 어머니를 자신의 자화상으로 재회하는 순간, 누구보다 작가 자신이 과거로 되돌아간 평형세계의 마법에 전율하지 않았을까..... 그 타임머신 체험은 '어머니의 땅'을 이 땅의 모든 실향민들에게 되돌아갈 수 있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으로 '어머니의 땅'을 제시하자는 작가적 열망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나 또한 디지털시대의 실향민. 작가의 그 그리운 아날로그 시대의 정서에 바로 빙의되고 만다. ●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여, 여기로 오라! '어머니의 땅'으로 오라! 당신들의 고향을 되찾아 드리리다. ● 이 사진들은 제아무리 AI가 주도하는 디지털세상이 온다 해도, 어머니들이 있는 한 인간은 인간의 길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준다. 이 사진들이 소환하는 추억은 인간의 미래를 예언하고 있으므로. ● 나는 순간을 영원으로 붙잡아 놓는 예술/기술이 사진이라는 정의에 동의하지 않는다. 고정불변한다고 믿는 사진도 사실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사진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진은 보는 시선이 흐르는 시간을 따라 변하기에 변하는 시선을 따라 사진도 변 할 수밖에 없게 된다. 멀리 갈것 없이 당신의 옛 기념사진을 보라. 당신 나이 먹은 만큼 사진속의 당신은 세월을 거슬러 한해 한해 한 살씩 더 어려지고 있지 않던가. 사진미학의 진정한 가치는 불변이 아니라 이처럼 우리의 시선을 시간까지 거슬러 올라 '변화'시키는 그 흐르는 시간에 따라 사진도 변화한다는 나의 사진 상대성이론에서 찾아야 한다. ● 그의 카메라 시선은 꾸밈이 없다. 어머니의 땅만큼이나 자연스럽다. 작품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없다. 브레송이 강조하는 소위 '결정적 순간'을 기다리지도 찾지도 않는다. 그런 자연스러운 자세/태도가 피사체의 자연스러움을 이끌어내 가장 자연스런 사진이 그의 카메라 시선에서 나오게 한다. 그 '무기교의 기교'가 제대로 발휘된 정영신의 사진을 먼저 본 뒤, 애송하는 김종삼 시인의 「묵화」을 다시 소환한다. 물 먹는 소 목덜미에 /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 이 하루도 / 함께 지났다고 / 서로 발잔등 부었다고 / 서로 적막하다고 「묵화」의 풍경은 버릇이 된 내 오랜 질문도 소환한다. ● 오늘 하루를 함께 지낸 소 잔등이 더 부었을까? 할머니가 된 어머니의 하루가 더 적막했을까? 또 묻는다. 발잔등 부은 소의 적막은 어머니가 위로해 주는데, 발잔등 부은 어머니의 적막은 누가 위로해주는가? 그때 나는 듣는다. 그 오랜 질문에 정영신 사진의 답을.
정영신_어머니의 안뜰(해남군 옥천면)_1988
어머니의 땅! ● 그의 사진은 어머니와 땅과 사랑이 동의어라고 알려준다. 모든 목숨이 사랑으로 한몸된 어머니와 땅에서 나왔다고 증언한다. 어머니 사랑을 기억하듯 땅의 사랑을 기억하라 되새긴다. 그의 사진은 다른 게 아니다. 땅과 한몸된 어머니의 영혼을 감촉하게 만든다. 그 어머니 영혼의 육신인 땅을 맨발로 밟아보게 한다. 이보다 더 소중한 일이 어디 있으랴. 우리는 누구든 어머니의 자식이니, 이 사진들은 '어머니의 땅'에 그려진 우리들의 근원적인 자화상일 수 밖에. ● 1980년대 후반 해남 강진 영암 등지에서 찍었지만 1950년대 후반 경북 청도의 내 고향 마을을 보여주는 그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남들은 곤히 잠든 한밤중에 이름 없는 어느 혹성에 패인 행성 충돌구덩이를 세고 있는 어떤 천문학자의 무용한 열정이 떠오른다. 도대체 그는 그 충돌구덩이 숫자를 세서 뭘 하겠다는걸까?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 그런 천문학자가 있듯, 사라져가는 장터와 그 장터 어머니들의 귀가길을 따라가 그 어머니의 땅을 줄곧 찍어온 사진가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아직 구원의 희망이 남아 있다는 믿음까지 안긴다. ● 암묵지暗黙知라는 말이 있다. 경험으로 체화되었다지만 겉으로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 지식 또는 지혜를 뜻한다. 이 땅 어머니들이 그 암묵지의 표상이라고 정영신의 사진은 알려준다. 결코 드러나지 않는 이 땅 어머니의 암묵지를 시간의 흐름에 덧씌워 보여주므로. 이 시점에서 정영신 사진은 꽃으로 피어난다. 아름답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꽃을 피우지 않은 어머니가 어디 있으랴 어디엔들 꽃이 피지 않으랴 어느 땅인들 자식을 꽃 피우지 않은 어머니가 있으랴 세상은 땅과 어머니와 자식 꽃이 있어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으로 돌아가며 꽃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정영신_어머니의 외출(구례)_1988
아니마Anima(칼융이 정립한 개념으로 자식 마음속에 남긴 어머니의 지대한 영향)으로서의 그의 사진이 내제 들려준 내밀한 고백이다. ● 어머니와 땅이 한 몸으로 어울려 아니마의 꽃을 피우던 그 아름다운 시간도 흘러갔다. 지금도 흘러간다. 앞으로도 흘러갈 것이다. 그렇게 흐른다 해도 시간에는 목적지가 없다. 시간은 목적지 없는 보이지 않는 공간이다. 흘러가야만 하는 이유도 없다. 시간은 도대체 어디로 왜 흐르는 걸까. 정영신의 사진은 이유 없이 목적 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사유다. 그가 파악한 '어머니의 땅'의 시간은 의미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반反 역사로서 자연 그 자체이므로. 소멸운명으로 오히려 아름다와지는 우연이 아니라 (이해나 인식을 초월한) 필연이므로. '어머니의 땅'의 시간은 발견의 대상이 아니라 사진의 기억으로 전환시킬 창조의 대상이 되므로. 그리하여 그는 유년시절 고향에서 체험한 '어머니의 땅'의 시간을 그로부터 20여년의 시간이 흐른 1980년대 후반에 이 남녘땅에서 다시 체험하며 그 시간을 누구나 되돌아갈 수 있는 고향의 갈망으로 길러낼 수 있었다. 사람이 자연과 하나 되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필연인 '어머니의 땅'의 시간! 거기가 언제 어디든 유년의 시간으로 되돌아 갈 수 없다는 필연 또한 소멸운명에 아름다움을 더해간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시간을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다면, 그 흘러가버린 시간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불멸이 될 수 있다. 이 지점에 모든 사진가들이 품은 예술의 열망과 마찬가지로 사진가 정영신의 소명의식이 닻을 내린다. '어머니의 땅'도 모든 존재의 소멸운명을 피할 수 없지만, 정영신의 사진이 있어 그 추억의 시간은 시간이 흐를수록 시간이 흐른 만큼 오히려 더 가까이 가까이 '어머니의 땅'을 잊지 않는 가슴속으로 다가가게 되므로. ● 잘 알려진대로 이상향의 라틴어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다는 뜻이다. 유토피아가 존재할 수 없는 까닭은 이상향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차원의 언어인 때문이다. 돌아갈 수 있는 공간과는 달리 돌아갈 수 없는 시간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이상향이다. 정영신의 사진은 동심으로 뿌리내렸던 그 '어머니의 땅'의 시간이 사실은 유토피아의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그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 없기에, 그 '어머니의 땅'의 시간은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향의 절대에 가까워지며 꿈에라도 돌아가고 싶은 유토피아로 자라난다고 말해준다. 더불어 그의 사진은 놀랍게도 그 유토피아의 시간으로 되돌아갈 도리까지 알려준다. ●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이전에 '어머니의 땅'을 기억하라고. 죽음까지 그 '어머니의 땅'에서 나왔다고. 거기가 어디든 '어머니의 땅' 유년의 기억을 놓지 않는한 당신만의 유토피아를 당신만은 놓치지 않을 수 있다고. 그 유토피아의 시간으로 되돌아갈 기억장치/메모리 칩이 바로 이 '어머니의 땅'이라고. ■ 박인식
사람보다 짐승이 더 사랑받고, 사람보다 돈을 더 우러러보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 재물 지상주의에 밀려나 가족에게 버림받고 거리를 헤매는 노숙인들이 많습니다. 더러 사업 실패로 밀려난 사람도 있으나 어릴 때부터 가난하게 살다 노숙의 길로 들어선 사람도 있습니다. 부모에 의해 가난이 대물림 되었기에 대부분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제대로 먹지 못하니 운신조차 힘들어 술로 위안하며 아무도 가보지 못한 천국행 열차를 기다립니다.
2019, 2 / 서울역 지하도
그들은 영양 결핍과 만성적인 수면 부족으로 여러 질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무슨 천형의 죄를 지어 짐승보다 못하게 살다 길에서 죽어야 하며, 죽음을 방관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방관보다 더 슬픈 것은 노숙인들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선입니다. ‘젊은 놈들이 일 안 하고 술만 마신다’지만 신체적 장애가 있거나 정상적인 삶을 유지하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2017, 3 / 동자동
대개 인간적이거나 마음 여린 사람들이 생활전선에서 쫓겨나게 되는데, 가면 갈수록 물질문명에 밀려나는 능력 없는 자들은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잘 살수록 빈부의 격차가 커져 절대 빈곤자는 계속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이제 국민들의 공감 아래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책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그들을 구제하는 것은 줄 세워 밥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어 쪽방이라도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2018,5 / 동자동
그들은 빈민들에게 주는 기본적인 혜택마저 별의별 까다로운 규제에 걸려 소외되고 있습니다. 삶의 고통을 잊기 위해 술로 연명하며 죽음을 재촉합니다. 한국인 평균수명이 81세라지만, 노숙인의 평균 수명은 48세로 한 해에 거리에서 죽어가는 무연고자가 300명을 넘습니다. 서울역광장에 머무는 노숙인 최씨는 “차라리 코로나에 걸려 죽는 편이 낫겠다.”고 말합니다.
2017,12 / 서울역광장
쪽방 사는 빈민들도 추위나 비를 피할 곳만 있을 뿐이지, 그 비참함은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춥거나 더운 비좁은 쪽방 공간은 차지하고라도 공동화장실을 사용하려면 아침부터 줄을 서야 합니다. 식기마저 지저분한 화장실에서 닦아야 해 위생이란 말은 사치스런 말일 뿐입니다. 옆방에 살던 멀쩡한 사람이 가파른 계단에서 넘어져 목숨까지 잃는 것도 목격했습니다.
2018,5 / 동자동
빈민들을 줄 세워 나누어 주는 것도 불편하지만, 정치인들은 빈민들을 이용하는 자선 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얻어 먹어려고 줄 서는 것이 비참하고 부끄러웠으나, 세월이 지나니 서서히 길들어 갔습니다. 줄 세우지 말고 시간 날 때 찾아가도록 해 달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사회적 거리두기로 사람 모이는 것 자체를 제한하지 않습니까? 동사무소에서 할 일을 ‘쪽방상담소’란 별도의 조직을 두어 강제하는 것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2017,1 / 동자동
정작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가파른 계단의 손잡이 설치나 수시로 합선을 일으키는 오래된 전선의 정비는 물론 짐 둘 곳이 없어 다리도 펼 수 없는 쪽방에 선반을 만들어주는 등 꼭 필요한 일은 나몰라라 합니다. 물론 방세 받는 건물주들이 할 일이나 시설보수란 어림반푼어치도 없고, 방세가 한 달만 밀려도 쫓아냅니다. 월세도 현금으로만 꼬박꼬박 받아 탈세를 밥먹듯 하는 악덕건물주들은 왜 단죄하지 못합니까?
2016,10 / 동자동
그러나 쪽방에 사는 빈민들은 절반이 기초생활수급자라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 염려는 없지만, 길에서 사는 노숙인의 비참한 삶은 눈 뜨고 못 볼 지경입니다. 줄 세워 나누어 주는 식료품 배급마저 그들은 받을 수 없습니다. 정부는 물론 세상이 포기한 버려진 사람들입니다. 빈민들을 위한 복지라는 말은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2021, 1 / 서울역광장
저는 5년동안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안타까운 사연을 기록해 왔습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쪽방촌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살아 남기 위해 온 것이라 제대로 된 카메라도 없습니다. 똑딱이 카메라 하나 달랑 챙겨 온 것은 일기처럼 나의 생활 주변을 기록하기 위해서입니다. 연필처럼 항상 주머니에 지니고 다니며 가감 없이 보이는 대로 찍었습니다. 주관이 개입되는 글을 보완하는 장치로서 말입니다. 그 동안의 이야기를 듣고 사진으로 남긴 것이 이번에 펴낸 ‘노숙인, 길 위에 살다’ 포토 에세이 집입니다.
2020,3 / 동자동
이 책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죽음에 내몰린 노숙인들의 삶이 조금이라도 개선되고, 쪽방촌 악덕 건물주들의 방해로 머뭇거리는 쪽방촌 재개발이 하루속히 이루어져, 빈민들의 삶이 좀 더 안전하고 편안한 여생을 보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20,10 / 동자동 새꿈공원
다른 나라에서도 못하는 부랑자 구제를 우리가 선진적으로 해결합시다. 빈민들을 위한 제도적 장치는 정치인들 몫이므로, 이 책을 정치인들이 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어딜 가나 밥 먹여주고 잠 재워주는 환경을 만드는 대신, 노숙은 못하도록 단속해야 합니다. ‘사람이 먼저다’는 문대통령이 내세운 기치가 빈말이 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이숲출판사’에서 발간한 조문호 포토 에세이집 ‘노숙인, 길에서 살다’가 오는 9월 하순경 출판됩니다.
책 발간에 맞추어 오는 9월23일부터 10월4일까지 인사동 ‘유목민’ 골목 담벼락에서
현수막전과 함께 책 사인회를 개최하오니 많은 관심 바랍니다.
오 갈 곳 없는 빈자들의 삶이 조금이라도 개선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사인회 일자 : 2021, 9월 25일과 10월2일,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장소 : 인사동16길, 현수막 전시장 앞
아래는 이광수교수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다큐멘터리 사진 안에는 온갖 다양한 역사학자, 철학자, 사회과학자, 이야기꾼, 인문학자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루카치도 들어 있고, 헤이든 화이트도 들어 있고, 긴즈버그도 들어 있고, 푸코도 들어 있는데...그 중 압권은 레비 스트로스로 봅니다. 참여관찰이지요. 대상 속으로 들어가되, 그들 속에서 공기와 같이 보이지도 느끼지도 못한 채 하나로 융화되는 거지요. 거기서 어떤 사진가는 까르띠에 브레송 같이 표현을 하고, 어떤 사진가는 로버트 프랭크 같이 표현을 하고 어떤 사진가는 유진 리차즈같이 표현을 하지요. 사진가 조문호는 레비 스트로스 같이 참여관찰을 하는 사진가이면서, 브레송이나 프랭크같이 스케치나 장면 포착과 같은 방법을 택하지 않습니다.
조문호는 브레송이나 프랭크와는 다른 사진을 찍지만, 그렇다고 리차즈같이 자극적이고 감각적인 사진을 찍지도 않습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우리 눈이 보는 그대로 찍습니다. 대상이 마음 문을 열 때까지 카메라를 들지 않는 건 리차즈와 같지만, 사람의 눈을 맞추고 셔터를 누르거나 그게 아니다 싶으면, 그 사람을 감춰줍니다. 오로지 모든 초점은 그 대상, 사람에 있습니다. 카메라도 그저 그런 똑딱이, 화려한 이론도 없이... 그저 사람을 존중하는 사진을 찍습니다. 조문호가 현장에 들어가는 것은 사진을 찍으러 들어간 게 아니고, 그들과 함께하러 들어가는 겁니다. 사진은 삶을 함께하는 하나의 방편입니다. 사진이 종이고 사람과 함께 하는 삶이 주라는 이야기입니다.
5년간의 참여관찰 - 관찰보다는 참여에 방점이 있습니다 - 로 찍은 그 사진이 곧 나옵니다. 동자동 사람들을 담은 '노숙인 길에서 살다' (이숲출판사)... 한국 사진사에 큰 족적이고, 이정표가 되리라고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