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월요일 오후엔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오면 쪽방 거지는 걱정할 것 없으나 길거리 사는 거지는 지랄 같다.
이불 삼은 종이 박스도 젖어버리지만, 몸 젖는 것보다 마음 젖는 것이 더 서럽다.
노숙인들이 비 오는 날, 술을 더 많이 마시는 이유다.
다들 비 피할 곳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누군가 랩처럼 비닐을 몸에 감고 버티는 자도 있었다.
깡다구로 버티는 것일까? 아니면 움직일 기력조차 없는 것일까?
무슨 천형의 죄를 지었기에 이 지경으로 살아야 할까?
그래도 지은이는 우산을 하나 챙겨들고 서울역광장을 돌아다녔다.
똑같은 노숙자지만 지은이는 낙천적으로 산다.
한 번도 화를 내거나 불평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 옷이 그 옷이지만 나름대로 바꿔 입어가며 멋을 엄청 부린다.
만들어 주기로 한 시진을 준비하지 못해 일부러 눈 마주치기를 피했으나
멀찍이서 보고 다가와 사진 찍어달라며 포즈부터 취해준다.
다음엔 꼭 사진을 뽑아오겠다고 변명했더니,
밀린 사진이 석 장이라며 찍은 회수까지 기억했다.
지하도를 건너오니,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사람이 인사를 한다.
그는 마스크 쓴 나를 알아보는데,
나는 마스크도 쓰지 않은 그를 왜 기억하지 못할까?
치매 환자라며 이름이 뭐였더라고 머리를 조아리니,
‘박완호예요 박완호’라며 어이없어한다.
그런데, 자칭 ‘인사동 광대’라는 자가 서울역엔 어떻게 진출했나?
하기야! 나 역시 인사동 찍사가 서울역 부근에서 놀지 않는가.
서울역광장은 거지들의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동자동으로 건너와 공원에 갔더니, 젖은 땅에 앉아 여럿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누군가?
근 일 년 가까이 종적을 감추었던 유정희가 나타난 것이다.
너무 반가워 젖은 자리에 끼어 앉았는데, 그동안 감방에서 몸조리하고 왔단다.
싸움판에 끼어 덤터기를 썼다는데, 폭력전과 별까지 달았다며 씁쓸해한다.
사진사용 동의서를 받기 위해 일 년 가까이 서류를 갖고 다녔는데
원고 마감하고 나서야 나타났다며 안타까워했더니,
“형님! 우리 사이에 그런 게 뭐 필요합니까?”라며 오히려 섭섭해한다.
나 역시 그의 말처럼 찍힌 사람들에게 사인받으러 다니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만약 찍힌 사람이 고소를 해도 이왕 단 별, 몇 개 더 단다고 나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출판사 등 제삼자에게 줄 피해를 고려해야 한다는 주위의 충고를 외면할 수 없었다.
노숙하는 친구들은 머무는 곳이 일정치 않아 만나지 못하면 부득이 사진을 뺄 수밖에 없었다.
출감기념으로 소주 두 병 사 와서는 빗물에 칵테일해 마셨다.
그런데, 건너 자리에 있던 상일이가 내 옆으로 옮기더니 말을 붙인다.
다들 나에 대한 호칭을 형이나 어르신 아니면 사진작가라 붙이는데, 이 친구만 늘 사장님이라 부른다.
“야~ 배도 안 나오고 이래 삐적 말라빠진 사장이 어딧노?”라며 싫어해도 자기는 그 말이 편하단다.
오래전 상일이가 나온 사진을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었는데,
아는 친구가 그 내용을 찾아주어 보았다는 것이다.
결론은 어려운 처지를 알려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일반인들은 노숙하는 친구를 범죄자처럼 피하지만,
이야기를 해 보면 다들 심성이 착한 사람들이다.
이 야박한 세상에 착하게만 사니 밀려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은 한 자리에서 끝장을 보지만, 몸이 축축해 더 마실 수가 없었다.
쪽방에 올라와 옷부터 갈아입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찍은 사진들을 정리하는 중에 반가운 전화가 걸려왔다.
가짜 미투로 독박 쓴 전 서울시립미술관장 최효준씨가 쪽방을 방문하겠다는 것이다.
달짝한 복분자 술을 한 병 사왔는데, 부족한 알콜 농도는 복분자로 보충했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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