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시영의 ‘낙성대 산다’ 사진전이 오는 27일까지 관악구청 앞 ‘가득갤러리’에서 열린다.

 

그는 거창한 무엇을 찾아나서지 않고, 가까이 있는 주변을 기록하는 사진가다.

대개의 사람들이 자기 주변에 있는 눈에 익은 것들에 소홀 하는 경우가 많다.

작품적 소재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함께 등 붙이고 사는 가족이나 터 잡고 사는 마을보다 잘 아는 게 어디 있겠는가?

잘 아는 것과 생소한 것 중에 뭘 찍어야 좋은지는 물어보나 마나다.

 

양시영은 자신이 사는 낙성대를 오래 동안 기록해 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사시사철 스치는 주변을 관찰하며 순간을 포착한다.

대상과의 교감을 이루기 위해 큰 소리 내지 않고 소곤소곤 말한다.

 

그래서인지 양시영의 사진은 보는 사람을 참 편안하게 만든다.

긴 세월동안 기록한 양시영의 낙성대 이야기는 이제 역사가 되어 켜켜이 쌓여간다.

사진 속에 사람 냄새나는 따뜻함과 멋도 풍긴다.

 

그는 힘든 사람들과 더불어 산다.

주변의 가난하거나 소외된 자를 돕는데도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는다.

동네 사람들에게 사진을 가르치며 함께 찍어왔다.

사진이 더불어 사는 방편인지도 모른다.

 

장애인 자립센터 사진반도 만들었다.

'사진으로 마을에서 놀기', '난곡난향 도시재생 별별사진' 등

이웃과 어울려 전시를 하며 함께 살아간다.

그래서인지 그의 사진에는 사람의 온기가 묻어난다.

 

요즘들어 여러가지 이유로 전시장에 잘 가지 않지만, 이 전시는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도 사진이지만, 작가의 성실하고 따뜻한 인간적 면모를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 나고 작품 나는 것이다.

 

이 전시는 27일까지 열리고, 월요일은 휴관이다.

‘가득갤러리’[02-877- 3348]는 관악구청 앞에 있다.

 

글 / 조문호

 

 

자유와 평화를 외쳤던 히피문화가 새삼 절실해 진다.

물질문명에 망가진 자연과 인간성을 되살리는 문제는 이 시대 절대 절명의 문제다.

 

돈에 밀려 최소한의 존엄마저 상실한 노숙인을 친환경적인 삶으로 안내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엄도 지키고 자연도 살리는, 도랑치고 게 잡는 일이다.

 

지난 주말의 서울역광장은 따스한 햇살따라 노숙인이 많았다.

인근 교회에서 제공한 텐트로 서울역 광장에 텐트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때 마침, 코로나에 감염되어 떠난 빈 텐트 하나가 끌려 나오고 있었다.

 

외환위기 직후, 인근 교회 빈터에 텐트촌이 잠시 생긴 적은 있지만

서울역 광장에 공공연하게 텐트가 설치된 것은 처음이다. 

‘다시서기 지원센터’ 건물 주변의 20개를 비롯하여

경의선 2번 출구와, 1호선 2번 출구 앞의 텐트를 합하면 35개나 된다.

오 갈 곳 없는 노숙인들의 바람막이와 쉼터 역할을 톡톡히 해 준다.

 

노숙인 확진자들에게 독립된 공간이 절실했다.

확진자들의 재택 치료 방침이 나왔을 때, 집 없는 노숙인은 해당될 수 없었다.

서울역 광장에 머물던 노숙인이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지만

병상 대기 순서에서 밀려 생활치료센터나 병원으로 이송되지 못했다.

노숙인들은 죽음조차 거리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가까운 용산역 부근에도 텐트촌이 형성되어 있다.

용산역 구름다리 밑 빈터에 노숙인 텐트가 들어선 것은 8년 전이다.

풀숲이 우거져 사람의 눈길조차 닿지 않는 그 곳에 노숙인30여명이 살고 있다.

 

[용산 텐트촌]

다른 노숙인 쉼터와 달리 이곳은 공동체 생활이 어느 정도 정착되었다.

먹고 자는 간단한 일이라도 노숙인 스스로 해결할 때,

자립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의지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밥은 얻어먹지 말고 해 먹어야 한다.

 

[용산 텐트촌]

가끔은 물질의 탐욕에서 벗어난 히피 정신의 노숙인도 만날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세상에서 밀려 난 사람과 스스로 택한 사람은 하늘과 땅 차이다.

그들은 한 곳에 오래 머물지도 않지만, 이치를 깨우친 도인처럼 여유롭다.

 

[용산 텐트촌]

사회에서 밀려 난 노숙인도 처음엔 절망의 늪에서 몸부림치지만,

흐르는 세월 따라 불안과 조급증도 서서히 사라지고 담담해 진다.

욕심 부릴 건덕지가 없으니. 무소유의 가치도 알게 된다.

그런 분들에게 삶의 가치를 안겨주는 일이 중요하다.

 

한 때는 물질문명을 기피한 히피운동이 바람을 탄 적도 있었다.

66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된 히피운동은 기존 사회 질서를 부정하고,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정신적 가치에 무게를 두었다.

 

['우드스톡' 음반 자켓에 사용된 사진/ 스크랩]

특히 69년 미국 뉴욕 주 설리반 카운티 베델에서 열린 ‘우드스톡’은 문화적 충격을 안겨주었다.

‘히피 그리고 자유와 평화‘라는 메세지를 내건 록 페스티벌 ’우드스톡‘에는

지미 헨드릭스, 레드 제프린, 제퍼슨 에어플레인, 산타나. 재니스 조플린, 멜라니 사프카,

존 바이즈, 알로 거스리, 라비쌍거, 조 카커 등 내노라 하는 세계적 뮤지션들이 대거 참석했다.

 

[우드스톡 사진 / 스크랩]

약 50만명이나 되는 어마 어마한 사람들이 몰려

삼박 사일 동안 야외에서 자유롭게 축제를 즐겼으나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았다.

해피 스모그 자욱한 기적의 향연장이라는 뒤늦은 소식과 현장사진에 입이 쩍 벌어졌다.

가보지 못해 안달하던 청춘의 회한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지배 문화에 저항하고, 반전 운동을 상징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우드스톡 사진 / 스크랩]

히피라는 어원은 여러 가지로 추측하나 해피에서 나왔다는 설이 가장 타당성 있어 보인다.

아쉽게도 돈에 병든 기존 질서에서 히피문화는 뿌리 내릴 수 없었다.

그 잊혀 가는 히피문화가 새삼 떠오른 것은 빈민들의 주거문제도 절실하지만,

날로 심각해져 가는 환경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다시 불을 지필 필요가 있다.

 

시골에는 객지로 떠나버린 빈 마을이 도처에 늘렸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골짜기가 더 좋다

지자체와 환경부, 복지부가 협력하여, 특정지역에 히피 촌을 만들어 보자.

먼저 가난한 예술가들과 자연을 사랑하는 환경운동가들이

지자체 도움을 받아 스스로의 낙원을 만드는 것이다.

 

오갈 곳 없는 노숙인이나 빈민부터 입주하는 것이 순서지만, 처음엔 갈 사람이 없을 것 같다.

외지로 쫓아낸다는 선입견 때문인데, 좋은 환경만 마련된다면 누가 마다하겠는가?

원시적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석기시대로 돌아가자는 말은 아니다.

대기오염의 주범인 자동차와 석유를 사용하지 않고 친환경적인 주거공간을 만들어,

농약이나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는 등, 작은 일에서부터 하나하나 바꾸어 가는 것이다.

 

한 두 사람이 살 수 있는 조그만 움막과 토굴, 그리고 약간의 텃밭을 제공받아

서로가 협력하는 공동체를 끌어가도록 하는 것이다.

질서와 행정을 돕는 공무 차량과 대중교통 외에는 차량 출입도 제한하고,

대중교통도 인근 읍 소재지까지만 운행하면 된다.

 

돈맛에 병든 사람은 생각도 못할 일이지만,

얽매이는 곳 없는 사람이라면 나서 볼만한 일이다.

잘만 가꾼다면 낙원이 따로 있겠는가?

원시의 삶을 지향하는 예술혼들이 마을 곳곳을 장식하고,

아무나 따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주렁주렁 열린,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그런 낙원 말이다.

 

그리고 친환경적 소재로 알려진 대마도 이곳부터 개방하여 활용하자.

어차피 대마의 실체가 알려져 더 이상 막기는 어려운 상황이 아니던가?

나무를 베지 않고도 얼마던지 종이와 밧줄을 만들 수 있고,

에너지 자원에서부터 인체에 유용한 약제에 이르기 까지

수많은 효능을 가진 신비의 약초로 검증된 지 이미 오래다.

기득권을 가진 재벌 농간에 정치적으로 놀아 난 통탄할 일이었다.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을, 표 잃을까 눈치 보는 정치인들 보면 속이 뒤집어진다.

 

아마 히피 촌이 제대로만 만들어 진다면 세계적 명소가 될 수 있다.

유명세가 바람직한 일은 아니나, 제2 제3의 히피촌으로 확대할 수 있는 것이다.

물질문명에서 해방된 빈자들의 낙원을 만드는 꿈같은 일을 현실로 바꾸는 일이다.

 

사진, 글 / 조문호

 

 

 

2020년 1월부터 609일간 서울시 무연고 사망자 1216명

영등포 경인로 9명, 엇비슷하게 가난했고 아팠지만 서로를 몰랐던 단절된 삶

 


최근 몇 년간 무연고 사망과 고독사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노년층뿐 아니라 20~50대 청장년층에서도 늘어나는 추세다. 무연고사와 고독사의 원인이 되는 빈곤, 관계 단절, 우울, 고립감 등을 더 이상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 다뤄야 하는 이유다. 영국과 일본은 국가 차원에서 이 문제에 대처한다. 영국은 2018년 ‘외로움부’를 설립해 담당 장관직을 신설했고, 일본도 2021년 고독·고립 문제 담당 장관직을 만들었다.

한국에서도 2021년 4월부터 ‘고독사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이 시행됐다. 보건복지부가 5년마다 고독사 실태조사를 하고 고독사 예방 기본계획을 세우도록 했다. 정부는 2022년 초 실태조사에 착수할 계획이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고립과 단절 문제가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뒤늦은 감이 있다.
무연고 사망과 고독사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고독사는 가족, 친척 등 주변 사람과 단절된 채 홀로 사는 사람이 혼자 임종을 맞고 일정한 시간(통상 3일)이 흐른 뒤에 주검이 발견되는 죽음을 말한다. 무연고 사망이란 연고자가 없거나, 연고자를 알 수 없거나, 연고자가 있지만 주검 인수를 거부·기피하는 경우를 뜻한다. 연고자는 부모, 자식, 형제자매 등만 인정된다.

<한겨레21>은 2020년 1월부터 2021년 8월까지 609일 동안 공영장례를 치른 서울 무연고 사망자 1216명에 관한 자료를 분석했다. 서울시 무연고 사망자의 공영장례를 지원하는 나눔과나눔의 도움을 받아, 무연고 사망자의 연령과 주거지, 사망 원인 등을 다각도로 살폈다. 6개월여 서울 영등포와 동자동 쪽방촌을 찾아다니며, 무연고 사망자들의 가족과 지인을 만났다. 공영장례가 치러지는 서울시립승화원을 여러 차례 방문하며 살아 있을 때 잘 보이지 않았고 죽고 나서야 무연고 사망자라는 숫자로 기록된 이 ‘투명인간’들의 지난 삶의 퍼즐을 모으고자 했다. 이들이 투명인간이 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이 드러나야, 정부와 사회가 무연고 사망자에 대한 실효성 있는 대책을 세울 것이라고 판단했다.

제1384호에서는 무연고 사망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서울 영등포구 쪽방촌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이들의 삶을 추적했다. 코로나19로 사회적 고립이 심해지면서 지난 1년간 무연고 사망자가 크게 증가한 추세, 2020년 무연고 사망자 665명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도 분석했다. 관련 보도는 다음호 제1385호에서도 이어진다. 1인 가구 증가 등으로 무연고 사망이 더는 우리 일상과 멀리 있지 않은 현실, 앞서 대책을 마련한 영국과 일본의 사례 등을 깊이 있게 다룰 예정이다._편집자주



환한 햇빛이 작은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왔다. 무연고 사망자 허일남(66)이 살았던 서울 영등포구의 쪽방은 눈이 시릴 정도로 볕이 잘 들었다.


영등포구 무연고 사망자 134명

허일남의 생애 마지막 거처는 일세 5천원짜리 3.3㎡(한 평) 쪽방이다. 텔레비전이 있는 방은 일세 8천원, 없는 방은 5천원이다. 그의 방엔 텔레비전이 있지만 켜지지 않아 방값을 5천원만 냈다. 볕은 눈부셨지만, 방은 엉망이었다. 여닫이문 위쪽 유리는 다 깨져서 밖에서도 방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구겨진 신문과 이불, 먼지와 담배꽁초 등이 어수선하게 뒤엉킨 채, 빈방은 방치돼 있었다. 허일남이 많이 아파 경기도 군포의 요양병원으로 옮겨간 뒤 이 방에 들어온 주민이 작은 화재를 내는 바람에 이렇게 엉망이 됐다. 엉망이 되어버린 방의 모습은 허일남의 삶과 겹쳐 보였다. 그는 2019년 12월 요양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사인은 패혈증이었다.

허일남이 살던 쪽방에서 가깝게는 10m, 멀어도 150m 남짓 떨어진 근처 쪽방에 살다가 무연고 사망한 이가 9명에 이른다. 2020년 1월부터 2021년 8월까지 서울시 무연고 사망자 공영장례를 치른 1216명의 주소지를 일일이 입력해, 같은 주소지에서 숨진 이들만 따로 뽑아낸 결과다. 서울 영등포구 경인로1 2층짜리 쪽방 건물에 2명, 경인로2 4층 건물에 3명, 경인로3과 4의 건물에 각각 2명씩 같은 주소지에서 살다가, 차츰차츰 하나둘 세상을 떠났다. 이들 9명은 어딘가 닮아 있었다. 가난했고, 몸과 마음이 아팠고, 술을 마셨다. 물이 낮은 곳에 고이듯, 빈곤과 질병이 쪽방들에 고였다. 9명 모두 기초생활수급자였다. 사회적 관계망도 단절됐다.

‘서울 영등포구 경인로’로 주소가 시작되는 영등포 쪽방촌에는 이들 9명처럼 가난, 질병, 관계 단절, 알코올중독 등 바닥의 삶을 버텨내는 ‘투명인간’들이 모여 산다. 쪽방은 ‘약 0.5~1평 규모의 작은 방으로 보증금 없이 일세나 월세를 내는 무허가 숙박시설’을 뜻한다.1 1970년대 성매매집결지와 여인숙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영등포 쪽방촌에는 현재 67개의 쪽방 건물이 있다(2020년 말 기준). 그 안에 벌집처럼 쪽방 531개가 들어차 있고, 거주하는 이는 500명 안팎이다. 남성이 75%, 여성이 25%다. 기초생활수급자는 63%에 이른다.2 이곳의 평균 월세는 22만원이다. 단열과 난방은 물론이고 위생상태도 매우 열악하다. 쪽방 건물의 약 70%는 건물 등기부등본도 없는 무허가 건물이다. 쪽방 주인인 토지소유자들은 외부에 살면서 건물 관리인에게 전세로 건물을 임대해주고, 관리인은 쪽방 주민들에게 월세나 일세로 방을 빌려준다. 서울 쪽방 주민들의 월평균 소득은 70만3천원이고, 연락 가능한 가족이 없는 이가 66.4%에 이른다. 5~15년 거주한 주민(42.8%)이 가장 많고, 15년 이상(28.1%), 5년 미만(26.3%) 거주자가 그 뒤를 잇는다.2

서울시 무연고 사망자 공영장례를 지원하는 나눔과나눔이 2020년 1월부터 2021년 8월까지 서울의 25개 구청에서 받은 공문을 정리한 자료를 보면, 609일 동안 무연고 사망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자치구는 영등포구(134명)다. 무연고 사망자 10명 중 1명(11%)은 영등포구에서 나왔다. 영등포 쪽방과 함께 종합지원센터, 임시보호시설 등 노숙인 지원 시설이 모여 있는 영향으로 보인다.

그들 삶의 퍼즐 조각을 모아보면,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았던 무연고 사망자 삶의 실태가 어떠했고, 어떤 사회적 대책이 필요한지 어렴풋이나마 그려볼 수 있을 듯했다. 영등포 쪽방촌에서 이웃으로 살았던 ‘투명인간들’ 9명 삶의 자취를 따라가보기로 한 이유다.






이탁영(53)이 살았던 영등포구 경인로4 쪽방 복도. 그는 이 복도 맨 끝 왼쪽 방에서 살았다.


허일남 어릴 때부터 무너져내린 인생


허일남의 삶도 처음엔 그가 살던 쪽방처럼 밝은 볕과 함께 시작됐다. 그는 삼대독자 집안에서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귀한 아들을 얻었다는 의미로 ‘한 일’(一)자를 넣어 아들 이름을 손수 지었다. 영관급 장교인 아버지와 생활력 좋은 어머니가 꾸린 서울 종로 집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그의 시작은 행복했다.


행복은 길지 않았다. 아버지는 엄격했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허일남에게 천자문을 가르쳤다. 허일남은 아버지가 무서웠다. 아버지가 뭐라고 하면 알고 있던 것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틀리면 손찌검이 이어졌다. 영조가 아끼던 아들 사도세자를 뚜렷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잡았듯, 아버지도 허일남을 잡았다. 어린 허일남은 크게 주눅들었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면 아내와 허일남을 두드려 팼다. 허일남의 둘째 여동생 허수영(62)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맞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퇴근해서 귀가하는 저녁이 되면 불안에 떨었어요. 또 폭력이 시작될 테니까.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란 존재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강한 아버지가 없어지지 않을 거 같으니까 내가 사라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만큼 스트레스가 심했어요. 내가 그 정도였으니 피해 당사자였던 오빠는 오죽했겠어요.”


지옥에서도 시간은 흘렀다. 성인이 된 허일남은 군복무를 마쳤다. 밥벌이를 시작했다. 20대 중반이던 1980년대 초 한창 ‘말죽거리 신화’ 개발 붐이 일던 서울 강남에서 부동산업에 뛰어들어 돈을 벌기도 했고, 남대문시장에서 옷 도매 일도 했다. 성악을 전공한 여성과 연애도 했다. 하지만 다시 지옥이 도래했다. 이번 지옥은 피해자였던 허일남 스스로 만들었다. 허일남도 술을 마셨다. 음주 뒤엔 난폭해졌다. 애인을 때렸다. 이를 본 허수영은 “무서웠다. 아버지를 다시 보는 것 같았다”고 했다.


알코올중독의 부정적 결과 중 하나는 대를 잇는 중독의 세대전이 현상이다. 음주 지속과 중독 과정에서 삶이 서서히 붕괴돼간다. 일상 붕괴는 건강 악화는 물론 직장에서의 위기, 가족 갈등과 해체, 사회관계 고립 등 다양한 영역에서 발생한다.3 1980년대 후반 이후 허일남은 “막 살았던 것 같다”(허수영).


20년 가까이 단절의 세월이 흘렀다. 2000년대 중반쯤 허수영은 오빠의 연락을 받았다. 50대 초반이 된 허일남은 서울의 한 알코올중독 전문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병원에서 꺼내달라”고 했다. 허수영은 “오빠가 거기에 있는 게 좋겠다”고 답했다. 그러자 허일남이 “이가 빠졌으니 치과 치료를 좀 받게 해달라”고 했다. 허수영은 치료 비용을 부담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뒤론 소식을 알지 못한다. 허수영은 “선하고 성실했던 오빠가 부모를 잘 만났으면 잘 살았을 텐데…”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스크랩 / 한겨레21 / 글 김규남 기자 / 사진 박승화 기자





<한겨레21>이 서울 무연고 사망자 1216명에 대한 기록을 담은 인터랙티브 페이지를 열었습니다. 주소창에 remember.hani.co.kr을 입력해주시면 인터랙티브 사이트로 연결됩니다.

 

"옆 방에 확진자" 방치된 쪽방촌

홍 부총리 아들 전화 한통에 '특실' 입원
종로 쪽방촌 확진자 "10일 째 방치"…치료 격차 만연
고시원에서 '재택 치료' 중인 확진자와 같은 화장실 사용

취약 거처에선 치료는커녕 기본적 생존권조차 위협

 

박종민 기자

CBS노컷뉴스 임민정 기자

 

최근 들어 길거리와 이른바 '쪽방촌' 그리고 고시원 등 비적정 거처에서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들이 자가격리가 불가능한 공간에 방치되고 있어 큰 문제다.

 

위중증 환자와 병상대기 환자 숫자가 역대 최고치를 찍는 상황에서 노숙인 지원단체 등은 지난달 이후 서울 쪽방촌, 고시원 등에서만 확진자 170여명이 나온 것으로 집계했다.

얼마 전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아들이 전화 한통으로 서울대병원 특실에 2박 3일간 입원할 수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비적정거주자들은 코로나 확진을 받고도 치료 받을 공간조차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평상시에도 의료시설 이용이 어려웠던 저소득층들은 코로나 19로 인해 '치료 격차'를 더욱 실감하고 있다. 어떤 계층에 속하는지가 건강하게 살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생존의 양극화 현상'이 코로나 시대에 들어 더욱 짙어지고 있다.

한 명 걸리니 옆방도 '우르르' 감염

 

서울 용산구 동자동의 쪽방촌에 위치한 A고시원. 고시원 곳곳엔 손 소독제와 동사무소에서 빌려왔다는 분무형 소독기가 자리했다. 확진자가 나온 이후 해당 고시원은 수시로 소독하는 게 일상이 됐고 입주자들은 먹고 씻는 일상을 빼앗겼다. 임민정 기자


서울 용산구 동자동의 쪽방촌에 위치한 A고시원. 스물여섯 명이 거주하는 해당 고시원에선 확진자가 9명 나왔다. 한바탕 코로나 바이러스가 휩쓸고 간 고시원에는 음성 판정을 받은 일부 입주자들이 남아있었다. 확진자 1명도 고시원에 남아 재택 치료를 받고 있었다.
 
확진자가 방 안에서 재택 치료 중임에도 화장실을 공동으로 이용하는 탓에 음성을 받은 이들도 감염 위험에 노출돼 있었다. 비닐장갑을 끼고 도시락을 옮기고 있던 고시원 사장 김모(61)씨는 "위험하니 가까이 오지 말고 아무것도 만지지 말라"며 주의를 줬다.

고시원 곳곳엔 손 소독제와 동사무소에서 빌려왔다는 분무형 소독기가 자리했다. 확진자가 나온 이후 해당 고시원은 수시로 소독하는 게 일상이 됐고 입주자들은 먹고 씻는 일상을 빼앗겼다.

A고시원 4층에 거주한다는 김모(42)씨는 "1층 사는 사람이 처음 걸렸다"며 "여기 공동 주방에서 밥먹고 얘기하다 1, 2, 3층까지 다 퍼졌다"고 답했다.

고시원 2층에 사는 김모(63)씨는 "밀접접촉자와 확진자가 옆방에 있어 불안하지만 어떡하겠느냐"며 "그게 현실인데 피할 수 없다. 방법이 없다"고 체념한 표정으로 답했다.

서울 용산구 동자동의 쪽방촌에 위치한 A고시원. 고시원 곳곳엔 손 소독제와 동사무소에서 빌려왔다는 분무형 소독기가 자리했다. 확진자가 나온 이후 해당 고시원은 수시로 소독하는 게 일상이 됐고 입주자들은 먹고 씻는 일상을 빼앗겼다. 임민정 기자&amp;nbsp;

 

A고시원 확진자들은 방에서 대기하다가 증상이 악화하자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했다. 그 전까지는 사실상 좁은 방안에서 방치됐던 셈이다.

이들은 코로나 상황에선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고시원 대표는 "지금은 어디든 아프면 안 된다. 큰일 난다. 병실도 없다"고 강조했다.

코로나 확진자가 연일 늘어나자 주민들의 경계심도 더해졌다. 동자동 쪽방촌 주민 원모(59)씨는 "저쪽 골목에 있는 집에서 감염자가 3명이나 나왔다. 동네가 난리가 났다"라며 손을 내저었다

이어 인근 고시원에서 확진자가 여럿 나왔다고 전하자 "전혀 몰랐다"며 "좁은 데서 서로 모르고 있다가 전염됐구먼"이라며 혀 끝을 찼다.

박승민 동자동 사랑방 활동가는 "코로나가 퍼지고 쪽방촌 주민들이 외부 사람을 꺼려한다"며 "고시원도 그렇고 동네에 개인 화장실이 있는 곳은 단 한곳도 없다. 밀접접촉자와 확진자가 어쩔 수 없이 같은 화장실을 쓴다"고 전했다.

이어 "심각성을 인지한 역학 조사관들이 거주지가 쪽방이라고 하면 우선순위로 방을 배치하려고 하지만 환자가 워낙 폭증하는 상황이라 빨리한다고 해도 늦다"라고 전했다.

"확진됐는데도 나몰라라"…취약거처 살펴야

 

서울 종로구 돈의동의 또 다른 쪽방촌. 지난달 40명에 달하는 확진자가 발생한 이곳에선 확진자가 10일 가까이 쪽방에 방치되기도 했다. 쪽방촌 곳곳에 '마스크 미착용 시 출입 불가'란 안내 문구가 붙어있었다. 임민정 기자&amp;nbsp;


지난 10일 찾은 서울 종로구 돈의동의 또 다른 쪽방촌. 이곳도 코로나19에 잠식된 상황은 비슷했다. 지난달 40명에 달하는 확진자가 발생한 이곳에선 확진자가 10일 가까이 쪽방에 방치되기도 했다.

쪽방촌 곳곳에 '마스크 미착용 시 출입 불가'란 안내 문구가 붙어있었고 외부인을 경계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폐지 줍는 일을 하는 한 60대 쪽방촌 주민은 "확진자가 많이 나와서 집에 있을 수 없다"라며 "옷 갈아입고 잘 때만 잠깐 머문다"라며 불안해했다.

쪽방촌 어귀에서 만난 70대 김모 할머니는 "11월쯤 주민 한 명이 밖에서 담배꽁초를 주워 피운 뒤로 아팠다"며 "모르고 있다가 요양보호사가 먼저 확진되고 같이 살던 주민 2명 감염됐다. 그 바람에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고 했다. 김 할머니는 마스크 2장을 겹쳐 쓰고 있었다.

주민들은 감기와 같은 유사 증상만 보여도 퇴거를 종용받고 있다고도 했다. 쪽방에서 5년째 거주 중인 60대 한 주민은 "체온이 조금만 올라가도 그냥 코로나라고 소문을 낸다"라며 쪽방촌 분위기를 전했다.

이어 "원래 근처 노인회관에서 밥을 줬는데 이제는 그것마저 끊겼다"라며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고 답했다. 쪽방촌 주민들은 감염 위기 탓에 방 안에 있을 수조차 없었고 끼니를 챙기기 위해서라도 밖으로 나와야 했다.

간밤에 눈이 내렸다.

며칠 전에는 노숙인이 거리에서 얼어 죽었다.

코로나 감염이 두려워 합숙소를 기피해서다

요즘 들어 노숙인과 쪽방촌 사는 빈민들 확진자가 늘어나고 있다.

없는 자에게 코로나는 더 가혹하다.

 

난, 송년회 술타령하다 정초부터 헤매고 있으나

잘 곳이 없어 생사를 헤매는 노숙인들도 많다.

 

서울역 광장엔 밤새 내린 눈이 서서히 녹고 있었고, 노숙하는 분은 몇 명 보이지 않았다.

서울역 ‘다시서기센터’에 들어가 몸을 녹이는데, 조해인씨로 부터 전화가 왔다.

 

'제주에서 변순우씨가 올라와 ‘응암동콩나물국밥’에 있다"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핸드폰이 꺼져버렸다.

금방 방전되는 고물 핸드폰이라 공짜 폰으로 바꾸라지만, 그냥 쓴다.

밖에 나올 때만 사용하는데, 솔직히 없는 게 편하다.

 

응암동 콩나물국밥집으로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변순우씨도 모처럼 왔지만, 전화가 끊겨 오해할 소지가 있었다.

갔더니, 변순우, 조해인씨 외에 김수길씨도 있었다.

그 사이 소주를 여섯 병이나 깠더라.

 

변두리시인에게 무슨 변수가 있었던 걸까?

만난 지가 한 오 육년은 된 것 같은데, 더 젊어보였다.

30여년을 동생처럼 지냈으나, 멀리 떨어져 살다 보니 어떻게 사는 지도 모른다.

근황을 묻고 싶었지만, 사는 게 다 그렇지 별것 있겠나?

 

팔 년 전에는 정동지의 제주 장터 탐방 길에 들려 신세도 졌다.

항상 윗사람에게 싹싹하고 아래로는 의리를 챙기는 정 많은 친구다.

 

그런데, 모처럼 제주에서 출두하신 변사또 신년 하례연에

수청들 기생이 없다니! 세상이 변해도 너무 변했다.

 

낯 술에 취해 노래방 가자는 이야기까지 나왔으나 갈 수 없었다.

고질병으로 헉헉거려가며 정초부터 악쓸 수야 없지 않은가?

 

새해 첫 만남이었으나, 방석집 추억을 곱씹으며 물러나야 했다.

다들 새해에도 재미있는 일 많기를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여성 노숙인은 왜 화장하고 담배 필까

 

단비뉴스 / 최유진기자

 

“저리 가세요! 내가 살벌해지지 않을 수가 없어.”

짙은 화장을 한 채 담배 연기를 내뿜던 노미숙(가명∙48) 씨가 버럭 화를 낸다. 옆에 앉은 한 남성 노숙인 때문이다. 담뱃재를 털면서 노 씨는 “난 나이 많아서 괜찮으니까 당신 걱정부터 하라”며 “곧장 집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등을 떠민다.


▲ 지난 8일 여성 홈리스 노미숙 씨는 지하철 서울역 13번 출구 ‘따스한 채움터’ 앞
거리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란히 앉아 그가 보는 거리 모습을 담았다. ⓒ 최유진


지난 8일 오후 3시 무렵 지하철 서울역 13번 출구 앞 거리에서 노 씨를 만났다. 하루 세끼를 무료로 먹을 수 있는 ‘따스한 채움터’가 있는 곳이다. 그는 일주일에 사나흘은 아침 7시부터 종일 급식소 근처에서 지낸다. 배식시간이 되면 밥을 먹고 셔터를 내린 가게 앞이나 한적한 골목길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그는 “(급식소에) 가까이 있어야 사람 몰리기 전에 빨리 먹고 나온다”며 “날이 추워져서 낮에 볕 쬐고 (배식) 기다리는 것도 얼마 못한다”고 말했다.


▲ 서울역 인근 무료급식소 ‘따스한 채움터’ 입구에는 배식 일정과 이용자 준수∙조처사항이 게시돼 있다.
노 씨는 매주 사나흘은 이곳에 찾아와 하루 세끼를 먹는다. ⓒ 최유진



“여럿이 자는 데는 안 가”

“지금은 길에 있기 딱 좋지. 해가 참 좋다니까. 겨울은 정말 너무 싫어.”

노 씨는 겨울이 무섭다. 추운 날씨에 해가 일찍 저물어 벌벌 떨면서 긴 밤을 지새야 하는 탓이다. 날씨가 춥지 않은 여름에는 바깥에서도 잠을 이룰 수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겨울로 접어드는 시기부터는 그냥 밤을 새는 것이지 잠을 잘 수가 없다. 옷을 껴입고 종이 포장박스로 냉기를 막아 보지만 살을 에며 파고드는 냉기를 피할 수 없다. 밤은 왜 그리 길기만 한지, 벌벌 떨며 이제 새벽이 됐겠지 하면 겨우 자정이 지났을 뿐이다.

남성 노숙인들은 추위를 피하려고 없는 돈으로 소주라도 한 병 사 마시고 잠이 들지만 그것도 잠시, 술기운이 떨어지면 잠이 깬다. 여성 노숙인은 그럴 수도 없어 해 지고 새벽까지 열 서너 시간을 추위와 싸우며 견뎌야 한다. 그렇게 밤을 새고 나면 온 몸이 망가진 듯 쑤시고 아프다. 노 씨는 “(겨울에)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며 “돈 없어서 찜질방 같은 곳도 가기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겨울이 와도 차라리 떨며 밖에서 지내지 ‘응급 잠자리’는 가지 않을 거라고 고집한다. 노숙생활을 시작할 무렵 일시 보호시설을 찾았다가 불쾌한 일을 당해서다. 불쾌한 정도면 괜찮은데 위험한 곳이 많다.

“요 근처에 여자만 자는 방도 있고, 잘 수 있는 데는 꽤 있지. 근데 나는 여럿이 같이 자는 데는 안 가. 차라리 길에서 잘 거야. 여자 방에 갔더니 험한 꼴 안 당하려면 할머니랑 끌어안고 자래. 싫다고 홀에 있는 카우치(couch)에서 잤지. 근데 남자 셋이 돌아가면서 옆에 와서는 이상한 소리 내고… 그게 완전 성희롱이지.”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어 다시는 가지 않는다고 했다. 길거리나 지하도 등도 불안하긴 하지만 그나마 도망이나 칠 수 있어 한데서 자는 것이 편하다는 얘기다.


▲ 서울역 광장에 누워있는 남성 노숙인들.
노 씨는 이곳 광장에서 떼 지어 술 마시던 남성 노숙인들에게 거북한 농담을 들은 이후
다시는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 최유진


거리에서도 쉼터에서도 불안한 여성 노숙인


▲ 서울역 광장 한쪽에 서울특별시립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가 있다.
사회복지 전문가들이 거리상담(아웃리치), 응급구호, 일시보호시설 연계 등을 지원한다. ⓒ 최유진


“여자들은 ‘다시서기센터’에 들어가기도 하는데… 한 네다섯 명? 남자에 비해서는 적지. 근데 나는 그냥 돈 생기면 찜질방이나 PC방으로 가. 애들이 많잖아. 일단 덜 무섭고....”

노 씨는 맞은 편에서 쳐다보는 남성 노숙인들 거동을 살피며 속삭였다.
“진하게 화장하고 담배도 피우면 (남자들이) 쉽게 못 보는 것 같아. 못 피우는 담배를 그래서 입에 물고 있는 거야. 조금 남은 돈으로 일주일에 한 번은 목욕탕 가서 씻고 화장을 하지.”

그는 “PC방도 이상한 사람 오긴 하는데 조용한 데 자리잡으면 잘 만하다”며 “이제 돈 좀 벌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담배를 피우다 말고 손을 털었다. 저녁 6시가 다가오자 ‘따스한 채움터’로 향했다. 그를 지켜보고 서있자 가라는 손짓을 계속했다.

“옷 넣을 봉지 하나도 사야 한다니…”

“친척 집이 멀긴 한데, 갔다 오긴 했어요. 계속 있기가 그러니까 그런 건데, 갈 곳이 있긴 있는 거죠. 여기 내가 왜 있냐면, 그냥 편하니까 있는 거예요. 나도 애도 있고, 학교도 다녔고 지금 잠깐 이렇게 된 거지. 친척 집에 가면 되는데, 여기가 편해요.”


▲ 서울교통공사는 철도안전법 제48조 ‘역 및 열차 내 노숙행위 금지’에 따라
역 안에 노숙인이 다른 시민에게 피해를 줄 경우 퇴거 명령을 내린다. ⓒ 최유진


젊은 남녀들이 쌍쌍이 손잡고 거리를 거닌다.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는 와중에 어디선가 드르륵 바퀴 끄는 소리가 요란하게 다가온다. 낡아 다 떨어진 캐리어와 빵빵한 비닐봉지를 이고 다가오는 한 여인이 있다. 사람들은 힐끗 눈길을 주고서 이내 분주히 제 갈 길을 간다. 일부는 눈살을 찌푸리며 대놓고 외면하기도 한다. 그는 젊음의 거리에서 철저히 이방인이다.

지난달 중순 서울 성균관대 입구 사거리에서 김성아(가명∙42) 씨를 만났다. 그는 거리에서 생활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오래 씻지는 못했다는 고백을 들으며 노숙 기간을 그저 짐작해볼 수밖에 없었다. 비닐봉지 안에 무엇이 들었냐고 묻자, “친척이 겨울 잠바 몇 개 챙겨준 걸 갖고 다닌다”고 했다. 낮에는 따뜻한데 새벽녘으로는 추워서 이불 대용으로 갖고 다닌다는 거였다. 그는 “요즘은 편의점에 가도 봉지를 돈 주고 사야 된다고 하는데 큰일”이라며 “(봉지가) 찢어질 것 같아 튼튼한 가방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날이 추워지면 다시 친척 집에 갈 것이라고 했다.


▲ 지난달 성균관대 입구 사거리에서 만난 김성아 씨가 늘 갖고 다니는 보따리.
비닐봉지에는 친척집에서 얻은 겨울 외투가 들어있다. ⓒ 최유진


쓰레기장 옆 ‘안전 잠자리’

김 씨는 마로니에공원 ‘어딘가’에서 잔다고 했다. 그는 “공원에 행사가 많으니까 심심하지 않다”며 “음악을 자주 들을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근데 거기도 생각보다 남자들이 많이 자는 것 같은데... 내가 어디서 자는지 알면 어떡해? 일단 친척집 가기 전까지는 임시로 있어야지, 임시로.”

그는 “누가 날 따라다니지 않는지 걱정된다”며 “(캐리어가) 너무 시끄러워서 그런 것 같다”고 우려했다. “쓰레기장 옆에 있으면 (사람들이) 잘 다가오지 않아 해코지를 안 할 것 같다”며 “그래서 잠바 싸매고 쓰레기봉지 옆에서 잔 적도 있다”고 말했다.


▲ 지난 7월 신대방역에서 만난 여성 홈리스 박한이(가명) 씨는 가방 세 개를 갖고 여러 지하철역을 돌아다닌다.
공책에는 ‘남구로 월세 뺏겼다’는 내용이 반복해서 적혀 있다. ⓒ 최유진


남에게 피해 안 주려 해도 씻을 곳 없어

지난봄 서울 서초역 인근 한 커피전문점에서 겪은 일이다. 여자화장실을 가려던 사람들이 문을 열어보고는 곧장 자리로 되돌아왔다. 화장실에는 티슈에 물을 적신 채 발을 닦고 있는 한 여성이 있었다. 한참 뒤 그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바닥에는 머리카락 한 움큼이 뭉쳐 있었는데, 그가 쓸어 모아 놓은 것이었다. 그에게 궁금증이 생겼다. 마음 편히 씻을 곳은 없는지 묻고 싶었다. 봉지에 양말을 챙겨 넣는 그를 붙잡았다. 커피 한 잔 하시겠냐는 물음에, 그는 소리쳤다.

“여기 아니면 어디 가라고? 씻을 데가 없어.”
묵직한 책가방을 메고서, 빨랫감을 담은 봉지를 들고서 그는 급히 사라졌다. 아무것도 묻지 못했지만, 괜히 그를 도망치게 만든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 지난 3월 을지로입구역에서 만난 여성 홈리스 김미영(가명) 씨에게 어디서 씻는지
물었지만 “몰라”가 대답의 전부였다. ⓒ 최유진


전국 여성노숙인 2900여명, 거리에도 120여명

보건복지부의 ‘2016년도 노숙인 등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여성 노숙인은 전체 노숙인의 25.8%로 전국에 2,929명이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그중 거리노숙인은 6.4%로 128명이다. 이 실태조사 결과에는 찜질방, PC방, 만화방 등에서 쪽잠을 청하는 이들은 포함돼 있지 않다.

사람들은 노숙인을 보면 “어쩌다 저 지경까지 됐누” 하면서 노숙인을 은근히 탓하는 듯한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노숙인들도 좋아서 거리로 나앉지는 않았다. 오죽하면 집에서 나와 거리를 떠돌고 있을까?

서울역에서 만난 여성 노숙인 노미숙 씨는 한때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일했다. 이후 학원을 운영했다. 서울 강남에 오피스텔을 갖고 있을 정도로 수입이 좋았다. 그러다 사업이 잘 안돼 실패했다. 이유를 물었지만, 그는 답하지 않았다. 사업 실패하고 오갈 데 없어 나왔는데, 노숙 생활을 한 지 몇 개월 되지 않았다고만 밝혔다.

노숙인 쉼터나 보호센터 봉사자나 관리자들 말을 들어보면 노숙인들이 홈리스가 되는 과정은 일정한 패턴이 있다고 한다. 당연히 잘살던 사람들이 노숙인이 되는 일은 별로 없고, 대체로 서민이나 중산층 가장들이 은퇴하거나 사업에 실패해서 거리로 나앉는 경우가 많다. 정년퇴직이나 명예퇴직을 하고 생계유지를 위해 퇴직금을 식당이나 자영업에 투자해 경험부족과 경기부진으로 실패하고, 그걸 살려보려고 집까지 담보로 잡혀 다 날리고 홈리스가 된다는 것이다. 집이 없어지면 자녀들은 가까운 친척집에 맡기거나 아내와 함께 처가에 맡기고 가장인 본인은 어디에도 갈 데가 없어 거리로 나앉는다는 것이다.

남성 노숙인들은 이런 과정을 거쳐 홈리스가 되는 반면 여성 노숙인들은 경우가 좀 다르다. 노 씨처럼 사업실패로 홈리스가 되는 사례도 있지만 돌볼 사람이 없거나 돌보아야 할 사람들이 내팽개쳐 거리로 나앉은 이가 많다. 여성홈리스 12명을 인터뷰해 제작한 다큐영화 <그녀들이 있다>를 보면, 가정폭력을 피해 나온 이도 있고, 미혼모로 살다 생계가 한계에 이르러 나온 이도 있다. 더 심각한 것은 당장 보호가 시급한 정신질환자들이 상당수에 이른다는 점이다.

강민수 종교계노숙인지원민관협력네트워크 간사는 "노숙 생활이 오롯이 개인 책임만은 아니기도 하다"며 "알코올중독까지 이른 건 개인을 탓할 수도 있겠지만 저마다 사연을 들어보면 사업 실패나 가정불화, 사별 등 가슴 아픈 이유들이 있다"고 말했다.

"남성 홈리스는 자발적으로 집에서 나오는 경우도 많다. 이를 개인 선택이니 전적으로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들의 생명까지 위험해진다. 실제로 거리에서 돌아가시는 분들을 너무 많이 봤다. 어떻게 미리 손 쓸 수 있었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구구절절 사연을 재고 따지기보다 생명을 일단 살리고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당장 보호 필요한 정신질환자도 많아

복지부 조사결과를 보면 여성 노숙인의 47.6%가 조현병, 우울증, 알코올중독, 약물중독 등 정신질환으로 진단을 받은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요양시설의 여성 노숙인들은 80% 이상이 정신질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7월 신대방역에서 만난 여성 노숙인 박한이(가명) 씨도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 그는 지하철 플랫폼에 앉아서 끈임없이 무언가를 노트에 메모하고 있었는데 자세히 가서 보니 ‘남구로 월세 뺏겼다’는 내용을 반복해서 적고 있었다. 취재를 위해 만난 여성 노숙인 중에도 상당수가 정신적으로 스스로를 보호하거나 방어할 수 없는 상태에 있어 당장 보호가 필요한 상태에 있다. 노숙인의 개인적인 책임도 없지 않지만 우리 사회의 안전망이 구멍 나고 고장 난 것도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드러나고 있다.

‘홈리스’와 ‘노숙인’은 같은 뜻이 아니다. ‘노숙인 등 복지 및 자립지원에 관한 법률’에 ‘노숙인 등’은 “상당한 기간 동안 일정한 주거 없이 생활하는 사람, 노숙인시설을 이용하거나 상당한 기간 동안 노숙인시설에서 생활하는 사람, 상당한 기간 동안 주거로서 적절성이 현저히 낮은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다. 한자 뜻 그대로 보면 ‘노숙인(露宿人)’은 이슬 맞으며 자는 사람이다.

강민수 간사는 “(노숙인에 비해) 홈리스는 집이 없는 사람, 즉 쪽방이나 고시원 같은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까지 확장하는 개념”이라고 말했다. 노숙인만이 아니라 홈리스 지원정책이 생겨야 주로 PC방에서 잠을 해결하는 노미숙 씨 같은 사람에게도 혜택이 돌아갈 여지가 생긴다.

그러나 서울시 홈리스 정책은 노숙인을 위한 정책이라기보다는 일반인들이 불편해하고 거리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거리노숙인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소개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시, 지난해 노숙인 1,045명 임시 주거 지원…82.4% 노숙 탈출’. 2018년 2월 7일자 서울시 보도자료 제목이다.

‘2018 홈리스추모제’ 주거팀은 “서울시가 (노숙인 탈출에 그치지 말고) 더 나은 주거로의 상향 이동을 위한 후속 지원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노숙인을 거리에서 임시주거로 옮기는데 중점을 두지 말고, 임시시설 거주기간을 최소화하고, 임시거주하는 동안에도 노숙인들이 최소한 사람답게 안전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숙인을 위한 정책’을 마련하라는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국가가 어쩔 수 없이 거리로 내몰린 홈리스들을 위한 종합적이고 안정적인 보호시스템과 제도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지적이다.

편집 : 김정민 기자

해마다 년 말이 되면 빈민을 돕는 온정의 손길이 이어진다.

그러나 온정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부작용이 따른다.

선물을 전해주기 위해 줄 세우는 것은 빈민을 길들이는 나쁜 관습이다.

물건을 얻기위해 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당사자의 자괴감을 한번 생각해 보았는가?

그 쪽팔림이 싫어 줄서지 않는 사람도 많다.

그리고 하루 전에 붙인 벽보를 보고 줄을 서야하니

몸이 아파 밖에 나오지 못하는 분은 주는 것조차 모르고 지나칠 때가 많다.

정작 구호품이 필요한 분은 혜택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전해주는 물품들은 중복되거나 당장 필요 없는 물건이 많아 좁은 방에 쌓아두는 불편도 따른다.

‘공짜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속담처럼 무조건 받고 보는 나쁜 관습에 길들어 점점 뻔뻔해진다.

항상 당당하지 못하고 주는 갑의 눈치를 살피게 되는 것이다.

 

쪽방 사는 몇 년 동안 주구장창 물고 늘어진 게 빈민들 줄 세워 길들이지 말라는 문제였다.

줄 세울 때 마다 SNS에 까발려 담당 실장과 불편한 관계가 되었지만,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사실 일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공원에 쌓아놓고 줄 세워 주는 것이

빠른 시간에 처분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일 것이다.

그 많은 물건을 사무실에 들여 보관하는 일도 만만찮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로나가 확산되며 가급적 줄세우는 것을 자제 하는 듯 했으나,

지난 년말 나눔에는 물품 부피가 커서 그런지 다시 재연되었다.

 

지난 24일 오전11시부터 동자동 새꿈공원에서 전기장판과 생필품을 나누어 준다는 벽보가 나붙었다.

30분쯤이나 지나서야 공원에 나갔는데, 이미 주민들이 선 줄은 돌고 돌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공원에는 나누어 줄 물품 박스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먼저 받은 분 물품 박스를 확인해 보니 컵라면 열 개에다 된장과 고추장이 담겨 있었다.

가벼운 컵라면 부피에 된장 무게를 보탠 빛 좋은 개살구였다.

전기장판은 해마다 나누어주는 품목이라 남아돈다.

 

줄서기를 포기하고 사진만 몇 장 찍고 돌아갔다.

두 시간쯤 지난 뒤 다시 공원에 가보니 그 길었던 줄과 많은 물건들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몇몇 사람만 남아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예년과 달리 받아야 할 분들의 신분이 전산화되어

주민등록증을 등록기에 대면 확인되므로 나누어주는 시간이 대폭 줄어든 것이다.

 

그러나 필요한 물품이 필요한 사람에게 골고루 나누어질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고쳐지지 않는 것은 온정을 보내는 방법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적은 돈이지만 현금을 개인별 구좌에 입금시켜 주는 것이 가장 편리한 방법이지만,

상품을 현금으로 바꿀 수가 없다, 그리고 현금은 가급적 지양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가난으로 고생한 사람들이라 습관적으로 돈을 쓰지 않는다.

먹는 것까지 아끼는 그 꼬불치는 습관은 고칠 수가 없는 것이다.

죽고 나면 아무 쓸데없는 돈을 누굴 위해 이불밑에 묻어둔단 말인가?

 

제일 좋은 방법은 보내 온 구호물품 일체를 관할 푸드마켓으로 보내

정기적으로 필요한 물품을 골라가게 하거나, 아니면 상품권으로 나누어 주는 것이다.

그럴려면 무엇보다 온정을 보내주는 분들의 생각부터 바뀌어야 한다.

번거롭게 선물 꾸러미를 준비할 필요도 없이 상당의 현금을 동사무소에 기부하면 된다.

 

줄세우는 관습을 고민하다 어저께는 지인 모임에서 그 문제를 꺼냈다.

경영학을 전공하는 조준영 교수께 좋은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어쩔 수 없단다.

상품의 다량구매로 기업끼리 상부상조하기도 하지만,

전해주는 물건의 부피에 따라 받는 사람 기대도 부풀 수밖에 없으니, 상대적으로 덩치가 커진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줄 세우는 문제는 기어이 끝내야 한다.

길들이는 일제의 잔재를 세상이 바뀐 지금까지 답습할 수야 없지 않은가?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어서라도 기부하는 방법에 대한 의식의 대전환이 시급하다.

 더 이상 없는 사람 쪽팔리게 하지마라. 

 

사진, 글 / 조문호

 

``

40년 가까이 인천의 어제와 오늘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사진가 김보섭씨의 ‘수복호사람들’이 인사동 ‘토포하우스’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 22일 전시가 시작되었으나 24일 정오 무렵에서야 갈 수가 있었는데,

전시장은 사진계 마당발 곽명우씨가 지키고 있었다.

 

만석동의 굴 따는 할머니들 이야기를 담은 사진집 '수복호 사람들'에 실린 작품들을

10여 년 만에 다시 볼 수 있었는데. 그때의 감동이 밀려왔다.

 

김보섭씨의 사진들은 끈끈한 바닷바람과 소금기 밴 사람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고단한 삶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간애가 사진 전면에 가득하다.

 

사진에 등장하는 사람과 사진가는 따로 가 아니라 서로를 깊숙이 끌어 안았기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따뜻한 정감을 일게 했다.

 

물때에 맞추어 만석부두를 떠나는 수복호를 따라 나선 작가는

사진에 앞서 그들의 고달픈 삶에 주목하게 된다.

 

고된 몸을 이끌고 굴을 따며 때론 배에서 새우잠을 자가며

밤늦게까지 일하는 모습에 어찌 마음이 편할 수 있겠는가?

 

주름 잡힌 얼굴과 거칠어진 여인네들의 손발은

스스로를 희생하며 자식들을 키워 온 우리의 어머니였다.

그 안타까움과 애절한 마음이 사진에 그대로 전이되어 감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김보섭씨는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사진에 담는 사진가다.

"어릴 때 조개 캐던 갯벌이 콘크리트로 뒤덮인 도시로 변해가는 것을 보면서

사진으로나마 정겨웠던 옛 모습을 보존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오래전 김보섭씨의 사진전을 보고 쓴 이광수교수의 비평 한 단락으로 마무리하겠다.

“자신의 고향인 인천에서 사라져 가는 공간의 모습은 가족이나 동네 혹은 일터를 구성하는 여러 하위문화의 이모저모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그런데 각 사진 한 장 한 장은 사진 미학적으로 볼 때 매우 뛰어난 물성(物性)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단순한 자료라고 폄하할 수도 없다.

그의 인물과 정물 이미지는 매우 잘 다듬어진 시어(詩語) 하나, 하나와 같다. 둘이 섞이면 시어로 기록한 민족지가 된다.”

 

이 전시는 28일까지 열린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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