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부터 10월 27일까지 전남 여수시에 주둔하던 14연대의 군인 2,000여 명이 중위 김지회, 상사 지창수 등 남로당 계열 군인을 중심으로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무장 반란을 일으켜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전남 동부 지역의 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반란군에 의해 경찰 74명을 포함해 약 150 명의 민간인이 살해 당했고, 정부측 진압 군경에 의해 2,500여 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했다. 이승만 정부 수립 2개월 만에 일어난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은 철권 통치와 반공주의 노선을 강화했다.
여수중학교 교감 송욱 때문에 많은 어린 학생들이 좌익화 되었다. 골수 좌익화된 여학생이 시내에 진입한 국군들을 유혹해서 허벅지에 숨겨둔 총신을 짧게 자른 칼빈소총으로 사살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진 뒤에 많은 어린 여학생들이 용서 없는 죽임을 당했다.광양 1948년 10월. 경찰은 반란군에 쫓겨 후퇴하면서 가둬두고 있던 좌익 사상범 용의자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갔다. 서울대 법대를 다니다 고향에 내려와 은신하고 있던 김영배(당시 21세)도 그런 희생자들 중 하나였다. 그의 가족들이 광양과 순천의 경계에 있는 덕내리 골짜기에서 아들의 시신을 찾아내 거두고 있다. / 이경모사진1948년 10월 여순사건 사진. 반군과의 교전에서 희생된 경찰공무원 남편의 시신을 찾아 나선 아낙네. / 이경모사진반군에 의하여 살해된 양민의 시신 앞에서 애통하는 부녀자들.
여수시내 수색중 저항하다가 체포된 어린 여학생들.1949년 1월, 벌교 주민들이 호남지구 반도귀순촉진위원회 벌교지부가 게시한 귀순 촉구 공고문을 읽고 있다포로가 된 반군 동조 부녀자들.진압군에 저항할 의사가 없음을 양손을 들어 보여주고 있는 주민들.여수순천반란 진압과 좌익숙군의 핵심인물들 - 악질 친일파 백선엽, 이후락, 김창룡등머리의 흰 띠는 반란군과의 구별을 위해서 표시한 것이나 일부 국군 토벌대 [광주주둔 4연대-14연대의 모체]가 반란군과 합류해서 아무런 구별의 의미가 없어졌다.
지휘관 잘못만나는 바람에 얼떨결에 공비화된 전 14연대 소속 국군들.미군 고문관에게 호소하고 있는 부녀자들.국군이 처형한 좌익들, 웃옷을 벗기고 총살했다.여수 시내수색에서 체포된 통비분자들- 김지회가 지휘하는 일천여명의 주력은 이미 여수를 빠져나가 지리산으로 도주했다.작전수행중 주먹밥으로 한끼를 때우는 국군병사.왼쪽 등을 보이는 자는 토벌여단의 지휘관 송호성,. 앞은 경찰서장 [또는 도경정보과장,] 그 오른쪽은 군산에서 내려온 12연대 백인엽 소령.국군이 작전을 펼치는 동안 불안한 주민들...쫓기는 자 가운데 내 식구와 친지가 있다..국군이 여수를 탈환한 후 원인모를 큰 불이 났다. 경계근무중인 국군.재판장으로 향하는 반군 동조자들과 그 가족들.질의응답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반란군으로 의심되는 좌익분자색출 작업중.여순사건 희생자 주검 앞에서 아낙네가 가족을 찾고 있다.1951년 12월. 전남 담양에서 생포된 빨치산 / 이경모사진
빨치산이 생겨난 배경
일제에 빼앗긴 주권을 되찾고자 다양한 독립운동 세력들이 나타났는데,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항일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공산주의를 받아들였다. 1917년 러시아에서 레닌의 볼세비키 혁명이 성공한 후 러시아 공산당은 ‘세계 식민지 민족 해방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25년 박헌영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 나라를 이끌어갈 뚜렷한 조직이 없는 상태에서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었고, 북조선에는 북조선분국을 두게 되었다. 이들은 노동자, 농민, 도시 일반 근로자들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이익을 옹호하고 서민생활을 급진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투쟁한다고 선동하였다. 당시 우리나라 국민들 78%가 공산주의 사상을 선호하고 있을 정도로 공산주의는 해방 이후 나라의 주도권을 선점하였다.
한편 한반도는 일제의 패망과 함께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에 따라 남과 북이 갈라져 서로 다른 이념과 사상을 가진 정권이 탄생하였고, 극심한 혼란과 대립의 격랑을 겪게 된다.
빨치산의 시발점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안이 가결되었다. 남한의 우익세력은 반탁을, 박헌영을 중심한 좌익 세력은 찬탁을 외쳤고, 이후로 남한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좌우의 이념대립이 시작되었다.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1946년 7월, ‘테러는 테러로, 피는 피로써 갚자.’는 폭력전술, 이른바 ‘신전술’을 채택하면서 각종 반정부활동을 전개해나갔다.
1946년 9월 23일 공산당은 흉흉한 민심을 선동하여 부산을 시작으로 전국 철도노조의 총파업을 일으켰고,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약칭 : 전평)의 주도하에 대구 10.1 폭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삽시간에 서울을 비롯한 남한 전체에 미군정에 반대하는 시위가 퍼져나갔다.
미군과 경찰이 주동자들을 체포하고 수배하자, 이들은 태백산과 소백산으로 숨어들어 우리나라 빨치산의 시작인 ‘야산대(野山隊)’를 만들었다. 뒤에 이들은 ‘구(舊)빨치산’이라 불렀다.
1948년 2월 7일, 남한만의 단독선거 5.10 선거를 반대하기 위해 남로당은 당원 30만명을 동원하여 전국적으로 전쟁을 방불케 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남로당은 경찰이 빠르게 진압한 것에 놀라 앞으로의 5.10 선거 반대투쟁은 육지에서 떨어져 진압이 어려운 제주도에서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1948년,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수립함을 목적으로 제주 4.3 사건을 일으킨다. 1947년 가을부터 무장폭동을 준비하고 있던 인민유격대는 전면적인 무력투쟁을 펼쳤다. 육군본부에서는 제주 폭동 진압을 위해 여수 14연대에 진압 출동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을 받은 14연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와 김지회 중위, 홍순석 중위의 주도로 남로당 50여명이 반란을 일으킨다. 반란군들은 여수 시내에 있던 6백여 명의 좌익 세력과 합류하여 여수 시내의 양민들을 학살하고,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에 군 좌익 세력뿐 아니라 지방 좌익 세력과 동조자들이 가담함으로써 그 세력은 여수에서 순천까지 확대되었다. 사건 발생 8일 만에 국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일부 반란군은 백운산을 경유, 지리산 일대로 도주하여 빨치산 부대를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산을 타고 북한과 연락하면서 수년동안 정부에 계속 저항했다. 입산 이후 전술을 장기 항전으로 결정하고, 월동을 위하여 흩어져 지내기로 하였다. 반란군은 근거지를 전전하면서 구례, 곡성, 광양, 무주, 장수, 남원, 거창, 산청, 함양, 진주, 하동에 출몰하여 관공서 습격, 방화, 약탈, 살해, 납치 등의 만행을 자행하였다. 이 지역의 민간인들은 낮에는 ‘대한민국 치하’에 살고, 밤에는 ‘반란군의 치하’에서 생활해야 하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빨치산의 재조직
1950년6.25전쟁이 일어나고 국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게 되었다.그러나1950년9월,낙동강 방어선에서 국군의 반격이 시작되고,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단행된 한국국과 유엔군의 총반격 작전에 의해 전선이 급속하게 북으로 이동하였다.이에 따라 퇴로가 막혀 미처 후퇴하지 못한 북한군 낙오부대와 패잔병들의 상당수가 각 지역의 산악 지대로 잠적하여 그 곳에서 지방 빨치산 부대들과 합세하였다.
이들은 새로운 비정규전을 위하여 조직을 개편하고,국군과 유엔군의 후방지역 교란 활동을 계속하였다.비정규전 부대의 규모는38도선 이북 지역에 약10,000명, 38도선 이남 지역에 약15,000명 정도였다.지리산은‘빨치산의 왕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 세력과 규모가 대단했으며,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은 빨치산들에게는 전설적인 영웅이었다.
빨치산의 최후
빨치산으로 인한 피해가 계속되자, 1950년 10월 빨치산 소탕을 위해 11사단을 창설하였다. 1951년 3월에는 3개 사령부를 신설하였고 11월 26일에는 백야전사령부를 설치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전개하였다.
이 작전을 거친 후 빨치산은 대폭 감소하였다. 이때 빨치산은 큰 타격을 받아 대부분 사라지거나,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하산하여 자수하는 자가 많았다. 당시 빨치산 중에는 수많은 양민이 섞여 있었는데, 그들은 이념에 동조한 것이 아니라 강제로 끌려갔거나 가족을 만나기 위해 그들과 행동을 같이 한 것이었다.
1953년 7월 휴전 이후 빨치산은 이현상을 탄핵, 사살했으며 그의 사후 지리산의 빨치산은 완전히 와해의 길로 접어들었다. 빨치산들은 지리산과 덕유산 등을 떠돌며 산짐승 같은 생활을 하다가 총에 맞아 죽고, 병으로 죽고, 얼어 죽고, 굶어 죽어갔다. 매년 겨울을 보내고 나면 그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1963년 11월 12일 새벽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의 체포로 지리산의 빨치산은 모두 사라졌다.
학교 창고에서 반란군의 사격으로 집단 총살된 시체가 쓰러져 있다. 창고벽에 무수히 나 있는 총탄 자국이 당시의 상황을 말해준다 여순반란 사건 첫날 400여명의 우익인사와 가족이 학살당했으며, 이틀 동안 여수 경찰서에서만 경찰관 59명, 경찰관 가족 40명이 학살당했다인적 끊어진 시가지에 쓰러진 우익인사. 며칠이 지났건만 좌익들 눈이 무서워 아무도 치우지 못했다.1948년 10월 전남 여수와 순천에서 벌어진 여순 반란사건 진압을 위해 광주 토벌사령부에 내려간 박정희(왼쪽) 소령이 송호성 사령관(담배 문 이)과 협의를 하고 있다. 박 소령은 서울 복귀 뒤 남로당 군사책의 혐의로 숙군작업에 걸려들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극적으로 살아났다.
1948년 10월 숙군 작업이 펼쳐지기 직전 박정희의 모습이다.
여순사건 발발 이후 이승만 정부는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를 변화시켰다. 하나는 반공주의를 강화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분법적 사회구조이다. 반공주의는 누구나 쉽게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분법적 사회구조는 무엇일까. 모든 것을 옳거나 그름으로 판단했다. 옳음의 기준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세력은 모두 ‘적’이 되었다. 그런 개연성이 있는 사람마저 ‘적’으로 간주했다.
‘적’으로 간주한 국민은 타도의 대상이었다. 여기에는 모든 국가 권력이 동원되었다. 그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이 탄생하였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조문에 어울리지 않는 사회 변화에 국민들도 빠져들었다. 이승만 정부의 왜곡된 세뇌는 여순사건 자체를 거부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게 했다. 여순사건을 말하는 것은 ‘용공주의자’이며 ‘빨갱이’이며 ‘적’이었다.
이러한 사회 변화는 오롯이 이승만 정부에만 있었던 것일까. 아니다. 박정희 군사정권에서 더 고착화되었다. 세간에 박정희가 여순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는 말은 사실이다. 이를 감추기 위해 박정희는 ‘빨갱이’ 탄압에 더 열을 올렸다고 한다. 그중 여수에서 풍문으로 전해지는 것은 박정희와 이우헌의 관계다.
이우헌은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된 인물이다. 1963년에 있었던 제6대 국회의원 선거는 박정희가 5.16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이후 처음 실시한 국회의원 총선거이다. 부연설명하자면, 당시 여수지역구에는 유경식(1911년생)과 이우헌(1902년생)이 민주공화당 공천을 신청했다. 유경식은 여수에서 유명했던 제중의원 원장으로 의사였다. 지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유경식이 공천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뜻밖에 이우헌이 공천을 받았고,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박정희와 이우헌의 관계가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지역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를 옮겨보면, “1948년 여순사건 발발 당시 박정희가 14연대 대위였으며, ‘반란’의 주모자로 쫓기던 중 이우헌이 집에 숨겨주어 살아났다. 그리고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보은차원에서 이우헌을 공천했으며,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지역 전체에 퍼져 있는 풍문이다.
박정희가 여순사건 진압작전에 참여하여 언론에 노출된 것은 평화일보가 유일하다. 그리고 호남지구 작전참모로서 작전회의를 하는 사진도 남아 있다. 그런데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 기자회견이 보도된 다음 날인 11월 11일 박정희가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서울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박정희가 사형을 언도받고 백선엽 등의 구명운동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다시 풀려났다는 사실은 잘 알려졌다.
육군참모총장 송호성 장군과 Col. Hurley B. Puller 여수-순천 상대역
송호성 장군은 함경도 함주에서 출생했다.함경도 흥남에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1913년에 보성전문학교를 중퇴하고 중국으로 건너가서 중화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보정군관학교(保定軍官學校)[2]를 졸업하고 중국군에서 기병대대장, 연대장, 사단장 등을 역임했다.
함경도 함흥에서 성장한 그는 대한독립군에도 투신한 적이 있으며 1942년 한국광복군에 들어가 제5지대장을 지냈다. 광복군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무력이었던 만큼, 해방 이후 김구계열로 분류되었다.
대한독립군 시절 홍범도, 김원봉 등과는 대립하는 등 독립운동 역사의 비극을 겪기도 한 있는 그는 광복군 훈련처장을 거쳐 광복군 지대장을 역임하였다.
1946년 12월 대한민국 육군의 전신인 조선경비대 초대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가, 정부 수립후 조선경비대가 대한민국 국군으로 확대·개편되면서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대한민국 육군 창군 주역의 한 사람이다.
1946년에 귀국하여 광복군 출신으로는 드물게유동열이 미군정의 통위부장에 임명된 후 국방경비대에 들어갔고, 1946년 12월 13일부터 만주군 출신이었던 원용덕의 뒤를 이어 국방경비대 육군총사령관을 지냈다.
1948년 6월 15일부턴 국방경비대 총사령관을 겸직하기도 했으며 정부수립 후 초대 육군총사령관을 역임했다. 그러나 사령관이 된 후 보여준 군사적인 능력은 그 평가가 매우 좋지 않다 .
광복군에서 참모장으로 송호성과 함께 복무한 이범석은 반공적이지 못한 인물이라고 여겨 엄청 싫어했다. 사실 이범석과는 광복군 시절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고 정적이었다는 연구가 있다.
송호성의 배경은 유동열이었으며 이범석은 기존 임정 세력과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이범석은 광복군 시절에도 총사령관 지청천과 사이가 좋지 않아 참모장에서 지대장으로 보직을 바꿨었고 광복 이후에는 김구 보다는 이승만과 더 가까웠다.
그러나 최근들어 그 평가에 대해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는데, 이는 아래 여순반란사건을 참조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국군의 광복군계의 송호성의 등용은 광복군계 중용을 통한 군의 정통성 확립과 광복군의 중국군 계를 끌어안기 위함이었다.
1948년 12월 10일, 이응준·채병덕·김홍일·손원일과 함께 국군 최초의 준장이 되었다.
반란에 대한 책임으로 토벌사령관에 임명된 송호성은 광복군 출신으로 평소 군내에서 비주류였다. 반군에 대한 만주군 출신 지휘관들의 강경 진압방침과 달리 송호성은 온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당시 강경한 진압작전을 주장하고 실행한 인물들은 이승만-채병덕-김백일, 백선엽, 백인엽, 송석하로 이어지는 세력이었다. 초기진압작전의 주도권은 이미 송호성에서 김백일, 백선엽으로 넘어갔다. 훗날 송호성이 부정적으로 평가된 것은 이 같은 태도와 그의 납북사실 때문이었다.
이범석은 송호성이 아닌 지휘체계상의 지휘를 받는 군인들과 직접 협의하였다. 반군토벌전투사령부는 육군본부 작전참모 부장 정일권 대령, 정보국장 백선엽 중령, 정보과장 김점곤 소령 등이 참모로서 사령관을 보좌하면서 진압작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은 국방부 장관 이범석과 직접협의하며 진압작전을 실질적으로 지휘하였다.
국방경비대를 기른 아버지 송호성 등은 가능하면 희생을 작게 하며 은밀하게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다. 송호성은 확성기를 가지고 반란군의 총탄이 쏟아지는 최전선에 나가 "나의 사랑하는 조국의 청년애국장병들이여! 총을 버려라! 국방군끼리 싸울 때는 아니다. 지금이라도 늦지않았다! 나의 생명을 걸고 제군의 죄는 묻지 않겠다!"라고 울면서 반란장병들에게 호소했다.
송호성은 진격하는 도중 여수 북방 약 8km 지점의 미평리 근처에서, 매복 중이던 반란의 주역 지창수 부대의 집중 사격을 받는다. 이때 송호성은 반란군의 기습에 고막이 터진다.
육군 총사령관 직위에서 밀려난 이후에는, 통위부 차장(1948년 6월), 1949년 3월 호국군 사령관, 육군 제5사단장(1949년 5월 12일), 1949년 7월 12일을 기하여 육군 제2사단장(육군 태백산지구 전투사령관 겸임), 1950년 2월 참모학교를 수료하고, 1950년 5월 12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예편, 이후 1950년 6월 10일 청년방위대 고문단장을 역임하였다.
김구의 측근으로, 김구의 암살과 함께 권력에서 밀려나며 1950년 5월 12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강제 예편되었다. 한국 전쟁 발발 직후, 한강 인도교 폭파로 인해 남하하지 못하고, 납북되었다.
1953년 인민군 해방전사 여단장을 지냈고,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을 지냈다. 1956년 5월 중순 송호성은 재북인사로서 내각청사에서 김일성주석의 접견했으며 또 1957년 10년에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으로 활동하뎐 중 김일성주석을 다시 만나 조국통일에 앞장서 달라는 당부를 받았다.
그는 1954년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혀1958년 평남 양덕으로 유배되었고, 1959년 뇌출혈로 사망했다. 김일성 주석은 그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르도록 하였고, 조국의 평화적통일을 위한 애국의 길을 걸은 그를 기려 조국해방 45돐이 되는 때에 조국통일상을 수여하였다.
광양 백운산 1948년 11월 공비가 됐다가 다시 붙들려 온 과거의 동료 전우들을 진압군이 감시하고 있다.1948년 10월 여수서국민학교 교정. 사태진압에 나선 국군들이 반란폭도와 양민을 가려내기 위해 주민들을 한곳에 모아 놓았다. 오른쪽 대열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부역혐의자로서 이들중 89명이 11월 1일 처형되었다. / 이경모사진이경모 사진이경모 사진이경모 사진이경모사진이경모 사진
1948년 2월 7일
남조선노동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이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이른바 '2·7 구국투쟁'을 전개.
/ 1948년 2월 26일
유엔 임시총회에서 미국측의 '가능지역 총선거안'이 가결, 남한은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해 5월 10일 단독 총선거를 치르기로 결정.
/ 1948년 4월 3일
제주 4·3사건 발생. 미군이 진압 개시.
/ 1948년 5월 4일
현지 모집 인원과 광주4연대에서 차출된 병력 800여 명으로 여수 14연대가 창설.
/ 1948년 10월 1일
여수14연대 연대장 오동기 소령이 혁명의용군 사건으로 구속.
/ 1948년 10월 19일
여수14연대 중 1개 대대가 제주 4·3사건 진압을 위해 여수항에 집결. 남조선노동당 일원 지창수가 병기고와 탄약고를 장악하고 반대자 3명을 사살하며 부대를 장악.
/ 1948년 10월 20일
지창수를 중심으로 한 반란군이 여수 읍내로 진격해 관공서와 주요기관 장악하고 이어서 순천을 점령.
/ 1948년 10월 21일
반란군이 남원·구례·보성을 장악. 친일파를 처단하고 인민재판을 열어 경찰과 우익인사들을 처형.
정부, 광주에 반란토벌사령부 설치.
/ 1948년 10월 22일
반란군이 여수·순천·고흥·보성·광양·구례·곡성 지역 전체를 장악.
정부군, 여수·순천 지구에 계엄령을 선포. 순천으로 진격하여 저녁 무렵 전역을 탈환.
/ 1948년 10월 24일
정부군, 여수 전역 탈환.
/ 1948년 12월
이승만 정부, 국가보안법 제정.
/ 1949년 2월
여수·순천 지구 계엄령 해제.
/ 1949년 4월
여수 반란군 주도급 인물 모두 사살.
/ 1949년 9월
이승만 정부, 대통령령으로 '대한민국 학도호국단 규정'을 공포. 중고등학교에 학도호국단 창설.
자하미술관은 플래티넘 프린트 기법을 통해 한국과 스페인, 두 나라의 문화를 새로이 기록하는 이태제 작가의 개인전 『My World(s)』을 2022년 4월 1일부터 5월 1일까지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오늘 날 개인의 기원과 사회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스스로를 현시대의 유목민이라 칭하며 한국과 해외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이태제는 스페인의 문화 정체성과 작가 본인의 문화적 위치, 상호 관계와 영향을 사진 작품을 통해 조망한다. ● 플래티넘 프린트는 감광 물질에 최종 인화물과 동일한 사이즈의 네거티브를 밀착 인화해 흑백 인쇄물을 얻는 19 세기 전통적인 사진 프로세스며 천년 이상 변색 없이 보존되는 유일한 수공 인화 기법이다. 사진 발명 초기에 만들어진 이 기법은 다른 사진 기법과 달리 인화 과정에서 붓 등을 이용하여 작가의 손길을 거치며 풍부한 계조로 표현의 폭이 넓다. 이 과정으로 각각의 결과물이 정확히 동일하지 않고 고유의 예술적 가치가 돋보인다. 이태제 또한 이 프로세스를 통하여 섬세한 빛의 농도, 깊이 있고 입체적인 표현의 작품을 완성한다. ● 이번 전시는 「갈리시아」시리즈를 통해 '삶'을 반영하는 스페인 전통문화에 집중하였다. 작가는 이베리아반도의 켈트 시대 전통 '라파 다스 바스타스(Rapa das bestas)'를 사진으로 담아내며 역동적인 야생마와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소개한다. 매년 여름 스페인 북부 사부세도 (Sabucedo) 지역에서 맨손으로 야생마를 이발하는 셀틱 시대 갈리시아 전통문화를 담은 사진들은 스페인의 종교, 문화 그리고 자연을 오롯이 담아낸다. 그러나 이번 작품들은 단순한 기록이 아닌 한 문화 안에서 '천국', '연옥', '지옥'의 의미를 되짚어보고 삶의 경이로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 이태제의 작품은 포토에세이 혹은 다큐멘터리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한다. 작가의 시선이 닿은 피사체의 모습에는 '삶', 혹은 '죽음', 그 모든 과정을 바라보는 스페인의 문화적 시각과 스페인과 한국 그 모두에 속한 작가의 세계관이 반영된다. 이번 전시를 통하여 인상과 표현의 한계 뛰어넘어 한 나라의 문화 속 그리고 개인의 연대기 속 삶의 의미를 돌아보는 기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자하미술관
특이하게 작은 체구로 거칠고 험한 갈리시아의 산과 대서양의 냉혹한 바람을 맞서 질주하는 갈리시아 토종마 '까발로 갈레고' (Cabalo Galego)의 기원은 셀타족이 이베리아 반도에 이주해 터전을 잡은 기원전 6 세기에서부터 시작된다. ● 평소 마을 울타리 밖에서 자유롭게 방목되어 생활하는 '까발로 갈레고'들을 여름이면 마을 내부로 몰아와 병든 말을 식별하고 맨손으로 이발과 소독, 구충을 진행 한 후 산과 들로 돌려 보내는 '라파 다스 베스타스' (Rapa das bestas)는 셀타족 후예들만의 전통의식이자 문화로 1977 년갈리시아의 무형예술자산으로 등재 되었다. ● 수 천년 이라는 시간을 역행하며, 갈리시아의 작은 마을 사부세도 주민들은 지금도 매년 여름 마을의 가장 연장자와 8 살 꼬마 아이가 함께 섞여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마을을 떠나 대도시에서 살고 있는 젊은이들도 여름이면 사부세도로 돌아와 각자 맡은 역할을 준비하고, 몇 주간에 걸쳐 험하고 거친 산을 거슬러 올라간다. ● 아로이따도르 (Aloitador)라고 불리는 숙련된 기술자가 말의 머리를 잡고, 다른 한명은 꼬리를 잡아 말의 움직임을 맨손으로 저지한 후 갈기와 꼬리털을 자른다. 말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는 것이 목적인 그들은 자신의 상처와 부상을 감내하며 긴장과 충돌 속에서 삶과 죽음, 자연과 인간, 생존과 공존의 경계를 넘나든다. ● 나는 2019 년부터 갈리시아에 체류하며 셀타족 고대 마을과,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대물림 해 내려오며 몇 천년 간 이어져온 그들의 전통, 그리고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관찰해 왔다. 현 시대의 유목민으로 삶의 대부분을 모국이 아닌 타지에서 셀타족 후예를 배우자로 맞아 살아온 나는 이 작업을 통해 전통과 함께하는 삶의 경이로움, 개인과 민족의 정체성,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공존에 대한 의미를 돌아보고자 한다. ● 천 년 이상 변색과 변함없이 보존 가능한 19세기 전통 프로세스이자 현존하는 수공 인화 기술상 가장 풍부한 표현 범위를 지닌 플래티넘 프린팅에는, 이들의 삶과 유산에 대한 존경과 이 다음 천년 세월을 넘어 전통과 방식이 계승되고 보존 될 수 있기를 염원하는 나의 마음을 담았다. ■이태제
이태제의 포토에세이 '공존'-과거를 품은 '갈리시아'의 현재●1."사진을 수집한다는 것은 세계를 수집하는 일이고, 그것은 순간적인 현실의 포착이며, 사진기란 무엇인가를 발견하려는 가치에 있어서 이상적인 눈일 수 있다. 또한 사진을 찍는 행위는 피사체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이고, 세계와의 일정한 관계에서 자기를 참여시키는 것을 의미한다."(수잔 손탁의 '사진이야기'참조) 확실히 사진은 세계의 단편이자 실재의 축소판이면서 확대와 수정이 가능하다. 무엇보다 사진은 '그 때, 거기에 있었다는 것'에 대한 현실기록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이러한 기능이자 가치가 전제된 사진의 숙명은 그 대상, 그 순간이 담긴 한 장의 사진이라는 점을 전제한다. 이러한 아날로그 사진을 이태제는 스페인 갈리시아(Galicia) 지역의 전통문화를 21세기 유목민의 시선으로 포착한다. 유제비율에 따라 차가운 톤과 따뜻한 톤으로 풍부한 표현과 뛰어난 보존성을 가진 고전적인 방법인 백금인화(Platinum print)로 완성한다. ● 현재, 그가 살고 있는 스페인 북서부지역의 '갈리시아'는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유산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옛 시가지'가 있는 곳이다. 순례의 종착지이기도 한 이곳에는 로마네스크와 고딕 그리고 바로크 양식까지 품은 대성당(Santiago de Compostela)이 자리하고 있다. 1) "갈리시아의 역사는 이베리아 반도의 정점이 기원전 3000년부터 발생했지만, 갈리시아의 땅(고고학적 유적, 고분, 고인돌 등)에서는 기원전 4300년 전의 거석의 흔적들이 복잡하게 흩어져 있는 곳이다. 이 시기로 부터 발굴된 Montes de Taboexa의 Parada암각화에 말의 형상이 있었다. 사부세도(Sabucedo) 지역에는 다른 유사한 암각화도 현존한다. 바로 그곳에 「Rapa das Bestas」라는 갈리시아 셀타족 선조들의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2)
이태제_Into the light, (TJL0019GAL001) Galicia_ ed. 5_아르쉐 플래틴에 플래티넘 팔라듐_76×56cm_2019
2.21세기 첨단과학의 시대에 코로나19 팬데믹이 찾아왔다. 누구나 겪었을 공포감이지만, 갈리시아의 역병에 대한 전설이 깊이 새겨진 곳에서 느낀 인류의 재앙은 이태제의 경우 어린 시절 읽었던 일타 스님이 쓴 『윤회와 인과응보 이야기:시작도 끝도 없는 길』에 대한 두려운 기억과 죽음에 대한 불안 심리가 겹쳐 지옥과 연옥 천국에 대해 깊이 사유하는 시간이었다고 한다. 코로나 초기 텅 빈 도로와 닫힌 점포를 보면서 누구나 경험했던 공포의 순간이었다. 과거를 품은 갈리시아의 현재, 그 속에서 '공존'의 의미는 작가의 도전적인 삶의 변화에서 수백 년 이어 온 전통문화를 탐구하는 중요한 계기였을 것이다. 첨단 과학의 시대에 불어 닥친 바이러스의 재난 속에서 이태제는 '과거를 품은 갈리시아의 현재'라는 지점에서 전통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 14세기 인류 역사상 최악의 흑사병으로 유럽인구의 절반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 이 역사적 사건이후 19세기까지 페스트가 산발적으로 유행하면서 인류는 인구 분포 뿐 아니라 정치, 종교, 사회, 문화,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바이러스와의 전쟁으로 트라우마를 겪으며 변화해 왔다. ● 코로나 팬데믹으로 모든 것이 멈춘 시기에 시작한 이태제의 전통프로세스사진에 대한 글을 인용해 본다. "「모든 것이 잿빛으로 변한 날 (Covid19)」 락다운 기간 동안 태제는 파인아트 전통 프로세스 작업의 첫 시작을 개시했다. 도시에서 가장 오래되고 겸손하며, 삶의 에너지로 가득 찬 분주한 동네가 고립되고 버림받은 느낌, 그리고 시간이 마비된 잿빛 공간으로 변해 버렸다. 마치 공포 영화처럼 비현실적인 시기에 이태제는 카메라와 노트 그리고 연필로 무장하고 방황하는 시인의 시선에서 자신의 강제적 침묵을 기록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3)3)
1941년 칼로타잎(Calotype)을 발명한 영국의 폭스 탈보트(Henry Fox Talbot)가 사진기를 '자연의 연필'이라고 했던 것처럼, 이태제는 노트와 연필에 아날로그사진 그리고 21세기코로나와 16세기 역병이 휩쓴 갈리시아의 전설이 겹치는 장소에서 현재를 통해 과거를 본다. '비판적이면서도 낙관적인 이태제의 시선'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승화시킨 백금인화지에 전통문화인 '라파 다스 베스타스' 의식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사진에 담는다. ● 이번 한국에서의 첫 개인전인 "「갈리시아」 시리즈는 이베리아반도의 셀타시대 전통 '라파 다스 베스타스'를 통해 '천국', '연옥', '지옥' 의 개념을 탐구한다. 피사체와 대상의 선택으로, 때로는 인상과 표현의 경계를 넘어 내 작업은 사진가로서 그리고 현 시대의 유목민으로서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에 대한 기록이다."(작가와의 인터뷰) ● 이태제의 이번 전시는 산에 방목한 채로 살고 있는 말들을 몰아 맨손으로 털을 깎는 지역전통의식 (또는 전통문화)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자연과 인간, 삶과 죽음, 전통과 현대, 개체와 집단뿐 아니라, 나와 너,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등에 대한 관계 속에서 카메라 렌즈 너머를 통해 '21세기 유목민의 눈으로 보고 감각하는 순간을 포착한 사진들이다. ● "갈리시아의 전통문화 그리고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에 투영되는 것은 바로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문화에 대한 나의 인식이 어떻게 전통문화와 야생마의 개체 혹은 군집 속에 투사되고 있는지, 청소년시기에 타문화 속에서 느낀 것은 노력했지만 그 문화에 녹아들지 못했고 또한 한국에서도 동화되지 못했다. 어느 곳에서도 동질감을 느끼지 못하는 디아스포라(diaspora)의 삶, '마치 내 자신이 투명인간'처럼 생각되었다."(작가와의 인터뷰)
이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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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나의 사진작업은 처음 픽토리얼리스틱(pictorialist)한 것이었는데, 야생마 작업에서는 스트레이트(straight)에 가깝게 촬영했다. 초기사진에서 그림은 사진처럼 그리고 사진은 그림처럼 등 사진의 가치 혹은 피사체의 의미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이처럼 이태제는 사진예술을 하면서 기법과 주제의 관계뿐 아니라, 사진이 지향하는 것과 또 현장성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방법적 고민을 했다. ● 스페인의 전통문화를 담은 사진은 자신의 정체성 혹은 그 너머 전통에 대한 감각의 객관화를 통해 현재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다. 이 찰나의 순간에 포착한 이미지는 인화의 과정을 통해 스페인속 이민족인 셀타족의 전통 '라파 다스 베스타스(Rapa das Bestas)'의 흐름의 부분과 전체의 풍경을 담았다. 이 문화는 오래 전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말 사육방식을 따르는 의식이다. 산에서 방목된 말들은 가축화 된 말과 달리 야생성을 유지하도록 풀어 놓고, 1년에 한번 털을 깎아서 갓 출산한 망아지와 새로 확인된 개체의 낙인을 찍는 전통 사육방식이다." ● 「연옥Limbo」은 이번 개인전 포스터로 손과 닿을 듯 참나무 덩굴은 마치 천지창조 혹은 뱀과 하와의 상징성을 담고 있는 듯 상상을 해 본다. 「ao curro」는 야생말을 다루는 두 세대인 현재와 미래를 보게 한다. 「구원」은 돌과 마른 나뭇가지가 맑고 고요한 수면에 서로를 비춘다. 야생마를 몰거나 탄 「Aloitador」는 양치기에 대한 은유적 단상에 빠져본다.
이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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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제는 사진을 통해 야생마에 대한 보호와 속박의 관계, 공존의 의미란 무엇인지, 길들이는 것은 무엇지고, 관습과 교육의 방향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자문한다. 인류가 저마다의 문화 공동체로 살아가면서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의 경계, 그 너머를 보는 사진의 눈과 손이 가 닿는 곳은 어디인지. 작가는 한국과 스페인의 전통문화를 사진으로 담고 또 19세기 사진발명 초기 전통기법으로 전통과 현대의 공존, 과거의 시간을 통해 현존을 본다. ● 이처럼 이태제의 사진에세이는 유제를 혼합해 블랙에서 화이트까지의 다양한 음영, 블랙에서 적갈색까지 계조와 은염 인화물에서는 얻을 수 없는 섬세하고 풍부한 색을 조율한다. 그리고 다양한 중간 톤에서 어두운 톤으로 디테일을 살리고, 깊이 있고 섬세한 하이라이트로 생생한 입체감을 담는다. 많은 시간과 공정이 필요한 백금인화를 고집하는 이유일 것이다.
이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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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제는 광고학을 전공하고 글로벌 광고회사 디렉터(Executive Creative Director)로 소위 잘나가던 삶을 그만두고 사진예술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어쩌면 인생에 있어서 가장 변화가 필요한 시기는 절정의 시간과 간절한 순간이 교차가능한 시기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누구나 쉽게 변화를 선택할 수는 없다. 이 작가는 변화를 택했다. 그리고 그 길을 가기 위해 정식으로 사진교육을 받고 점점 사장되어 가는 전통프로세스 사진에 몰두하고 있다. ● 사진촬영을 위해 피사체를 보고 느끼고 감각하는 것, 그 순간은 현재인 동시에 과거일 것이다. 현재는 지각되는 순간 이미 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진은 기억의 존재와 시간의 관계를 풀고자 시작한 도전이 담겨져 나 혹은 너와의 조우가 가능한 기억들, 이태제의 포토에세이에 담긴 시선일 것이다.
이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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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사진의 의미란, 눈과 손이 가 닿는 감각적 통합이자, 렌즈너머에서 귀환해 과거를 품은 현재의 순간포착이다. 그렇다면, 이 현재의 순간포착과 사진의 관계란 무엇일까? 그것은 사진이 재현시키는 무수한 이미지가 단 한번인 것, 즉 실존적으로 되풀이 될 수 없는 것이자, 구체적인 대상이 전제된 것이다. '순수한 지시적 언어'인 사진은 대상물과의 부동성, 보는 눈과 보여 지는 대상과의 겹쳐짐이다. 그러나 지각할 수 없는 이원성, 렌즈 너머를 보고 포착하는 찰나의 순간, 그 사물 그 순간의 선택은 물체에 대한 빛의 작용으로 광학장치를 통한 이미지의 형성이다. 피사체의 화학적 반응의 결과는 모든 사진에 존재하는 과거의 귀환이자 순간 포착을 통한 불변의 시간성을 갖는다는 것이다.(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참조) 이처럼, 이태제의 사진 에세이는 자신의 정체성 혹은 그 렌즈너머의 감각의 객관화, 이미 과거가 된 현재의 귀환 혹은 불변의 순환을 향한 자기현시, 이 귀환 혹은 순환의 시간은 전통과 현대, 과거와 현재, 타자와 자아가 결합되는 순간을 만나고 감각하는 시간, 인화과정 속에 녹아 있다. ■김옥렬
* 각주
1) 638년 예루살렘이 칼리프 오마르에게 함락된 뒤 그리스도교들은 성도 예루살렘으로 순례길을 떠나기를 망설였다. 예루살렘이 순례지로서 쇠퇴함에 따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성지 순례가 800년경에 시작되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이베리아 반도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한 전도자 위대한 성 야고보의 묘지가 있는 곳이다. 사도 성 야고보의 유골이 안치된 이곳은 11~13세기의 대성당을 중심으로 로마네스크, 고딕, 바로크 양식으로 지은 건물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의 구 시가지는 세계에서 가장 잘 보존된 중세 도시로 순례지의 종착지로 스페인의 기독교가 이슬람교와 벌인 국토회복운동의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도시다.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됨. 홈페이지 참조 (유네스코와 유산 / heritage.unesco.or.kr)
3) (Ramon Justo Domenech Cimas), 위의 글 중에서. "1567년 갈리시아 전역을 휩쓴 역병은 사부세도의 성문 까지 도착했다. 전설에 따르면 마을의 두 수녀가 역병을 퇴치하는 대가로 수호자인 성 로렌조에게 암말 두 마리를 제물로 바쳤고, 역병에서 낳아 산으로 풀려난 암말들은 현재의 갈리시아 토종마인 Garañones로 건강히 번식하여 개체수를 늘려갔다고 한다. 이후 말들은 현재까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주교에 속하고 자유롭게 산과 들을 누비지만 상당수는 주인이 있다. 사부세도 마을 주민들은 오늘날까지 매년 여름 산에서 말들을 풀어주는 의식을 계속 이어오고 있다. 이 Rapa das Bestas의 의식은 그 이후로 변경되지 않고 지역 본당 교회에 보관된 '1682년의 서'에 처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오래된 이야기는 1847년 유언장에 말의 재산권 상속을 위한 기록으로 등장해 있다. Alfonso X el Sabio 전 스페인왕은 아랍인들에 대한 스페인 재정복에서 갈리시아 말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마지막 개체수 조사에서는 약 600 마리의 말이 14개 무리로 나뉘었지만, 이 숫자는 이 지역의 늑대 개체 수가 증가함에 따라 크게 감소하고 있다. 1969년 행사의 오래된 전통문화의 성격이 회복되어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고, 1970년, 84세의 여성이 5개의 작업장의 존재를 증명했고, 이를 토대로 귀중한 민족지학적 정보가 회복되었다. 1977년 이 의식과 축제는 갈리시아의 "무형 예술 자산"으로 등록된 "국가 관광 관심사"로 명명되었다.
이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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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EXIST', Photo-essay by Teyé-The Present of Galicia Embracing the Past●1."To collect photographs is to collect the world. Photographs are to capture momentary reality. In terms of the value of discovering something, the camera can be the ideal eye. Also, the act of taking a photograph is to make the subject one's own, and it means to engage oneself in a certain relationship with the world." (See On Photography by Susan Sontag) ● Unquestionably, photography is a fragment of the world, a miniature version of reality as well as can be enlarged and modified. Above all, photography is valuable as the record of the reality of 'being there at that time.' The nature of photography which is presupposed by this function and value makes a premise that photography is what contains the object and the moment. Teyé takes these analog photographs of the traditional culture of the Galicia region in Spain from the perspective of the 21st-century nomad. According to the emulsion ratio, he completes the platinum print, a traditional technique with abundant shade and hue expression and excellent preservation. ● In Galicia, in northwestern Spain where Teyé lives, is the 'Old Town of Santiago de Compostela' that was designated a UNESCO World Heritage Site. The city has the Cathedral of Santiago de Compostela built with the moods of Romanesque, Gothic, and even Baroque as the destination of the Catholic pilgrimage route since the 9th century.1) "Although the history of Galicia began at the peak of the Iberian Peninsula in 3000 BC, in the territory of Galicia (archaeological sites, tombs, dolmens, etc.), traces of megalithic stones dating back to 4300 BC are intricately scattered. There were the horse figures on the Parada petroglyphs excavated from this period in Montes de Taboexa. Other similar petroglyphs exist in the Sabucedo area. It is where the tradition of the Galician Celta ancestors, 'Rapa Das Bestas', continues until these days." 2)
2.In the era of advanced science in the 21st century, the COVID-19 pandemic has come. It is a fear that anyone would have experienced. In the case of Teyé who experiences this disaster in a place deeply engraved with the legend of Galicia's plague, however, it is time to contemplate hell, purgatory, and heaven. Because he has the anxiety of death and childhood fearful memories of the book, The Story of Samsara and Karma: A Road Without a Beginning or End written by Buddhist monk Ilta. It was a moment of panic that anyone experienced as encountering empty roads and closed stores in the early COVID-19 catastrophe. "Coexistence" in present Galicia which embraces the past, must be a significant opportunity to explore the traditional culture that has continued for hundreds of years in the artist's challenging life transition. In the era of high technology while the sweep of the virus disaster, Teyé attempted to produce artworks refreshingly recognizing traditional culture at the point of "the present of Galicia embracing the past." ● In the 14th century, about half of the European population died of the worst plague. After this historical tragedy, as the plague spread sporadically until the 19th century, mankind has changed not only in population distribution but also in politics, religion, society, culture, and economy. Human has been traumatized by the war against viruses. I cite an article about photographs by Teyé who started them at a time when everything stopped due to the COVID-19 pandemic. " 「The Day Everything Turned Gray (COVID-19)」: Under lockdown, Teyé began his first artwork on the traditional process of Fine Art. The oldest, modest, and bustling neighborhood of the city full of life's energy turned into an isolated, abandoned, and frozen timed gray space. In unrealistic times like Luis Buñuel's movies, Teyé set out on his way to document his forced silence from the gaze of a wandering poet armed with cameras, notebooks, and pencils." 3) ● Just as Henry Fox Talbot of the UK, who invented Calotype in 1941, considered cameras as the "pencil of nature," Teyé looks at the past through the present in the place where traditional photographic process, notebooks, pencils, and 21st-century COVID-19 overlapped with the legends of Galicia in which 16th-century plague swept away. 'His critical and optimistic view' captures the culture of 'Rapa das Bestas' in a conventional way through Platinum printing. With this artisanal process by his hands, he sublimates what he witnessed. ● "The 「Galicia Series」, my first solo exhibition in Korea, explores the concepts of Heaven, Purgatory, and Hell through 'Rapa das Bestas', one of the traditions from the Celta era in the Iberian Peninsula. My artwork is a record of my journey to find myself as a photographer and as a nomad of the present age. Sometimes it is beyond the boundaries of impression and expression and the choice of the subject and object." (Interview with Teyé) ● His exhibition follows the flow of local traditional consciousness (or traditional culture) that the villagers herd horses living grazed in the mountains to shave them with bare hands. With the relationship between nature and human beings, life and death, tradition and contemporary, individuals and clusters, you and I, what is invisible and visible, etc., his exhibition has the photography capturing "the moments of seeing and feeling with the eyes of nomads in the 21st century." "The traditional culture of Galicia and the untamed wild horses reflect me. I couldn't figure out how my perception of this culture projects into traditional culture and the individual wild horse or herd. In my youth, I couldn't blend what I felt into a different culture. Neither did I assimilate in Korea. Life of a diaspora, there is no sense of homogeneity regarding anywhere, makes me feel like an invisible man." (Interview with Teyé)
3."Though my early photographs were Pictorialist, for the photographs of wild horses, I took an approach of Straight Photography. In my early stage, I struggled with the issues like the value of photography, the meaning of a subject, or painting-like photos and photo-like paintings." Likewise, Teyé pondere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echnique and the subject. He had questions regarding the various methodology to represent the relationship between what photography aims for and it's practice on field. ● Through the objectification of one's identity or of sensibilities about tradition beyond, photographs containing traditional Spanish culture are the time to face the present self. The image captured at the moment shows the entire landscape and the flow of the conventional 'Rapa das Bestas' of the tradition of the Celta people, an ethnic group in Spain. The long history ritual the Celta people follow is about the traditional breeding of horses. Unlike domesticated horses, the Celta people release horses to graze in the mountains, shave them once a year, and brand new foals and newly identified horses. It is their traditional breeding horse method." ● 「Purgatory :Limbo」 the main poster of this exhibition, presents the oak vine with a hand about to touch it, as if the image symbolizes snakes and Hawwāh. 「ao curro」 brings us to the present and future of two different generations handling Galician wild horses. The Stones and dry branches reflect on the surface of clear and calm water in 「Salvación」. In front of 「Aloitador」, who rides Galician wild horses, we can fall into metaphorical and piecemeal thinking for a shepherd. ● With his artworks, Teyé asks himself what coexistence means, what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rotection of and binding on wild horses is, what taming is, and where we should direct customs and education. He inquiries about where the boundaries of what invisible and visible are, while human lives in their cultural communities. Teyé would like to know where the camera lens reaches beyond those boundaries. He captures the traditional culture of Korea and Spain in his photographic essays, and with a classical technique from the invention of photography dating back to early 19th century, he explores the existence through the coexistence of tradition and contemporary and past times. ● Furthermore, by blending own emulsions, his photographs coordinate various shades from black to white, gray from black to reddish-brown, and delicate and rich tones we cannot obtain from Gelatin silver prints. Teyé's work represents details from the various middle tones to dark ones and emphasizes a vivid three-dimensional effect with profound and delicate highlights. It must be these level of expressions that make him insist on Platinum printing process, which requires a lot of time and efforts. ● Although Teyé majored in advertising and worked as an executive creative director in a global advertising companies, he decided to become a Photographer during his successful life. Perhaps the time people need a critical change in their life is the time that intersects life's peak and the moment of desperate desire. However, everyone is hardly able to choose to change. Teyé is the one who made the transition. To follow his new path, Teyé has been educated in photography institution and is focusing on the traditional photographic processes that gradually becoming obsolete. The moment to look, feel, and perceive a subject for photography is not only the present also the past. It is because at the same time we grasp the present, it turns into the past. Therefore, as his photography contains the challenge to handle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existence of memory and time, the photo by Teyé are the gaze of his photo essay that is the memory of possible encountering with me and you. ● Above all, the meaning of photography is the sensory integration that the eyes and hands reach. It is also the capture of the present moment embracing the past. Then, what is the relation between catching the moments and photography? What the photograph represents is the very event that cannot be existentially repeated, and specific objects are a prerequisite. A picture, a 'genuine directive language,' is the overlap between the object and the eyes to perceive it and the dissimilarity. However, the formation of an image occurs with the imperceptible duality, the moment you capture while looking through a camera lens, and the choice of the very moment and the object. It is due to the optical device with the effect of lights on an object. The chemical reaction of the subject results in the return to the past, which occurs in all photographs. It has the immutable property of time through instantaneous capture (see Camera Lucida by Roland Barthes). ● Likewise, the photo essay by Teyé is an objectification of his identity or the sensibilities beyond the lens as well as a return to the present already becoming the past or self-revelation towards an immutable cycle. This time of return or cycle is his photo essay which is the time to perceive and is in the middle of traditional photographic process by encountering the very moment the past and the present, convention and contemporary, and others and selves combine. ■Okreal Kim
* footnote
1) After Jerusalem fell to Caliph Omar in 638, Christians hesitated to go on a pilgrimage to the Holy City, Jerusalem. As Jerusalem declined as a pilgrimage site, pilgrimage to Santiago de Compostela began around 800. Santiago de Compostela is home to the graveyard of St. James the Greater who spread Christianity on the Iberian Peninsula. The remains of the apostle St. James are enshrined here, where buildings built in the Romanesque, Gothic, and Baroque Styles are gathered around the cathedral in the 11th and 13th centuries. The old city of Santiago Compostela is the world's best-preserved medieval city, the final destination of the pilgrimage site, and it is a symbolic city of Spanish Christianity's national restoration movement with Islam. UNESCO registered it as a World Heritage Site in 1985. (seeheritage.unesco.or.kr)
2) (Ramon Justo Domenech Cimas, Comissário. A Coruña, December, 2021)
3) (Ramon Justo Domenech Cimas), in the above article "In 1567, the plague that swept through Galicia reached the gates of Sabucedo. According to legend, two nuns in the village sacrificed two mares to their guardian Saint Lorenzo in return for fighting the plague, and mares that were born during the plague and released into the mountains are Garañones, the native Galician horse. Since then, the horses have belonged to the Archbishop of Santiago de Compostela and freely roam the mountains and fields, but many have their owners. The residents of Sabucedo continue the ritual of releasing horses in the mountains every summer. Since then, people in Galicia have kept holding 'Rapa das Bestas'. Although its first record is in the Book of Fabrica in 1733, which the local main church retains, its execution was held before the record.Another record is in the will of 1847 as a record for the inheritance of the horse's property rights. Spanish King Alfonso X el Sabio also mentioned the importance of the Galician horse in the reconquest of Spain from the Arabs. In the last census of the horses, there were about 600 horses in 14 groups, but this number has significantly declined as the wolf population increased in this region. In 1969, the Spain government officially recognized 'Rapa das Bestas' under the restoration of old traditional cultural property. In 1970, an 84-year-old woman proved the existence of five workshops, and valuable ethnographic information was restored based on her investigation. In 1977, this ritual not only acknowledged as a 'National Tourism Interest' but also registered as Galicia's 'Intangible Artistic Property'.
엄효용 작가의 시간은 느리게 간다. 쏟아지는 비도 보슬비가 되고 존재감 없는 나무도 어느새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의 렌즈안에서는 어떠한 대상도 느리게 관찰된다. 작가가 관찰한 대상의 순간들은 우리로 하여금 시간을 느끼게 하고, 흐릿했던 대상들은 존재감을 드러낸다. 시간을 느리게 쓰는 작가의 세상은 우리에게 어떤 새로움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엄효용_grapefruit_코튼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80×60cm_2010엄효용_inside and outside #1_코튼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100×75cm_2011엄효용_inside and outside #4_코튼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100×75cm_2011
이번 전시는 시간을 천천히 쓰는 작가 엄효용이 보는 세상을 보여주고 있다. 관람객들은 엄효용의 눈을 통해 일상의 것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고 일상에 묻혀서 안보이는 것들을 찾게 되거나 평범한 순간들이 다르게 보이기도 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사진 전시이다.
엄효용_무심서로 벚나무 봄_코튼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48×36cm_2020엄효용_문지리 535 아레카 야자_코튼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45×60cm_2022엄효용_벽초지 수목원 스카이 로켓 향나무_코튼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45×60cm_2022엄효용_봉강가술로 메타세쿼이어 가을_코튼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48×36cm_2020
나는 엄효용작가의 개인전 BLUR를 통해 작가의 관찰 방식을 관람객들에게 전달하고자 전시 제목부터 전시가이드를 제시하였다. 작가의 프레임 안에 일상은 반복적인 관찰을 통해 나온 중첩된 이미지이다. 그리하여 중첩은 시간을 표현하고 반복적인 이미지들은 시간을 포함한 하나의 대상이 되었다. 관람객들의 반복된 일상의 흐릿함을 엄효용 작가의 사진에서 또렷한 일상으로 찾을 수 있다.
관람객은 작가의 중첩된 이미지를 통해 시간을 느끼고 흐릿한 이미지가 우리의 시선을 머물게 하여 더 자세히 보게 하는 작가의 의도를 통해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천천히 감상해보자. 우리의 흐릿함을 작가의 또렷한 관찰로, 작가의 흐릿함을 우리의 또렷한 관찰로 작가와 소통하기를 바란다. ■강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