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는 너무 더워 방문을 열어놓고 잤더니, 온 몸이 떨려 일찍 잠을 깨야했다.

날씨마저 변덕스러운 우리나라 정책 같다.

 

감기가 걸렸는지, 연신 터지는 재채기에 코로나 환자로 의심받지 않을까 걱정된다.

라면 국물로 속 데우고 밖으로 나갔다.

 

골목 곳곳에는 빈민들의 시름이 깊었다.

복에 없는 쪽방촌 재개발이란 수레는 바람 빠진 바퀴 같다.

살지도 않는 악덕 건물주들의 반발로 국토부에서 지구지정에 손을 놓은 것이다.

 

열 받은 이씨의 푸념에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왜 가만있는 사람들, 간에 바람 들게 하나?

차라리 몰랐다면 속 뒤집어지는 이런 일은 없을 것 아니가?

우리가 아파트로 옮겨 살면 몇 년을 더 살겠나?

죽고 나면 다시 가져 갈 집을 생색만 내면서...

 

듣고 있던 박씨도 한마디 거들었다.

씨바~ 우리 사는 데가 방이 맞나? 개집도 그런 집은 없다.

요즘 개는 사람을 끼고 살지, 그런 곳에서 살지도 못한다.

방에 물이 세거나 전기가 나가도 모른다는 놈들이 방세는 하루를 넘기지 않고 현금으로만 챙겨간다.

쪽방에 우글거리는 바퀴벌레나, 그 돈 벌레들이나 다를 게 뭐있나?

차라리 폭탄이라도 터트려 다 같이 죽고 싶다

 

분위기가 살벌해져 사랑방조합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랜만에 만난 선 간사는 입구에서 담배를 피웠고,

김 이사장은 보지도 않는 게시판에 소식지를 붙였다.

커피 한 잔 얻어 마시며, 그간의 소식을 살펴보았다.

 

동자동 공공주택사업 중단에 빈민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곳은 이곳 뿐이다.

 

가진 자 편인 새 정부가 들어서며 재개발이 불투명해지자

대통령인수위 사무실과 용산집무실을 쫓아다니며 지구지정 촉구에 목소리를 높였으나,

소귀에 경 읽기다.

 

동자동은 빈민들을 위해서라기보다, 재개발하지 않을 수 없는 곳이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민간개발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삶을 포기한 막장 사람들이 그냥 쫓겨나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토부와 서울시는 가진 자 눈치 보지 말고, 계획대로 추진하라.

 

새꿈공원으로 자리를 옮겼더니, 낯선 젊은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불이 빗물에 젖어, 물침대에 누워 자는 노숙인도 있었다.

 

주민들의 사랑방 노릇 하던 휴게실은 '서울역쪽방상담소'가 옮겨가며 문 닫은 지 오래다.

 

아는 사람도 쉴 곳도 없는 새꿈공원이 왠지 낯설어보였다.

 

'친절한 은자씨' 만이 난간에 올라 마릴린 먼로같은 풍만한 육체미를 자랑하고 있었다.

 

다시 무거운 몸을 끌고 돌아왔다.

 

가파른 계단을 타고 4층까지 오르자니 숨이 막혀 몇 번을 쉬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를 삶, 오르는 김에 옥상까지 올라갔다.

 

떨어져 죽기위해 올라간 것이 아니라, 삶의 흔적을 돌아보기 위해서다.

 

화려한 서울 한 복판에 아직도 꾀죄죄한 자취들이 남아 있었다.

아니, 오히려 사람사는 냄새가 났다.

 

옆 건물 옥상을 지키던 개가 안 서러운 듯 바라보고,

불청객에 놀란 비둘기 한 마리가 후 두둑 날아갔다.

   

사진, / 조문호

 

 

지난 현충일 자정 무렵 서울역광장에 나가보았다.

오전에는 비가 내리며 날씨가 오락가락하더니, 밤에는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날씨 탓인지, 서울역광장은 두 세사람만 웅크려 잘 뿐 평소와 달리 한적했다.

 

노숙인들이 머무는 지하도로 내려가니, 십여명의 노숙인이 자고 있었다.

때마침 지하도 맞은편에서 서울역희망지원센터직원들이 몰려나왔는데,

지하도에 머무는 노숙인보다 더 많은 인원이었다.

 

노숙인에게 빵 봉지를 하나씩 나누어주며 지나갔는데, 나 한데도 빵 봉지 하나를 안겨 주었다.

봉지 안에는 두유 하나 빵 두 개, 마스크 한 개가 들었는데, 그 속에 편지 형식의 안내문이 접혀 있었다.

 

보호시설과 쉼터를 안내하며 말소된 주민등록을 복원시켜 기초생활수급을 돕겠다고 적혀 있었다.

가족관계가 정리되지 못해 해당되지 않는 노숙인도 많겠으나 더러 구제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두사람도 아니고 직원들이 밤늦게 떼거리로 몰려나온 걸 보면. 노숙인 구제에 관한 지시가 내린 것 같았다.

조금만 신경 쓰면 될 일을 왜 여태 방치했을까?

아무튼, 모든 노숙인에게 도움주어 길에서 죽는 사람은 없기를 바란다.

 

빵 봉지를 챙겨들고, 다시 쪽방으로 올라갔다.

날씨가 더울 때는 쪽방 문을 열지만, 날씨가 쌀쌀해 다들 문을 닫아 놓았다.

유독 삼층 서씨 방문만 열려있어 들여다보니, 사람은 없고 온갖 잡동사니만 늘려 있었다.

잠잘 곳이 없을 정도로 빼곡한데, 내방처럼 조그만 목침대를 만들어 주면 좋겠더라.

침대 밑을 책장으로 사용하는 대신, 찬장으로 활용해도 되지 않겠나?

 

서울역쪽방상담소도 줄 세워 물건 나눠 주는 일에만 신경 쓰지 말고,

쪽방 공간을 조금이라도 넓게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목공 사업을 추진하라.

그리고 정부는 중단된 동자동 재개발 사업을 조속히 추진하여 빈민부터 구제하라.

 

사진, / 조문호

 

 

 

녹번동 사모님으로 부터 지령이 떨어졌다.

1일부터 3일까지 볼일이 많아 녹번동에 대기하라는 것이다.

당장 먹을 것 걱정 할 필요도 없는데다, 노닥거릴 상대가 생겨 반가웠다.

보따리 챙겨 갔더니, 예고도 없이 불화가 장춘씨가 나타났다.

그동안 왜 소식을 끊었냐고 물었더니,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단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눈물을 쏟아냈다.

생전에 모친께 모질게 한 욕설을 후회하며 슬피 울었다.

백순이 가깝도록 집에서 편안하게 사시다, 고통 없이 돌아가신 것은 고마운 일이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딸이 먼저 갔다면, 남은 엄마 마음은 어떻겠냐?며 위안했다.

이제 잔소리할 사람은 없으나, 그 텅빈 외로움은 어떻게 채울까?

 

그 날은 밤을 세워가며 사모님을 끌어안고 지낸 것이 아니라, 티브이를 끌어안고 용썼다.

지방선거 투표 결과를 지켜보며, 민심이란 것은 바람같은 것이라는 것을 재실감했다.

 

다음 날부터 정동지가 케이비에스 방송국에 인터뷰하러 간다기에 여의도도 가고,

한정식 선생 문병하러 서초동 요양원에 들리는 등 곳곳을 돌아다녔다.

인사동에서 공덕동으로, 공덕동에서 동자동으로, 시키는데로 기사의 소임을 다했다.

길은 밀려 다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으나, 영양가 없는 소리해가며 히히덕거렸다.

제발 아는 체 하지마라는 사모님의 난처한 웃음을 뒤로 넘겨가며...

 

그런데, 자가용 기사들의 제일 큰 애로점을 꼽는다면

언제 일이 끝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기다려야 하는 무료함일 것이다.

그렇지만 혼자 노는데 이골나 무료할 틈이 없다.

핸드폰이 고물이라 페북은 볼 수 없으나, 주머니에 카메라가 있는 것이다.

 

장미가 만발한 벤취에서 힘없이 앉은 노인의 외로운 하소연도 듣고,

인사동 거리를 살피거나, 옆방 김씨 자는 모습을 훔쳐보는 등, 한가할 틈이 없다.

가는 곳마다 시간은 오래걸리지 않았지만 여의도 인터뷰는 시간이 지체되어

주차장 공원을 돌아다니며 기암괴석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즘 개는 똥을 먹지 않지만,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옛 말이 딱 맞다.

돌맹이까지 풍만한 여인의 알 몸으로 보이니 이 일을 어쩌랴!

 

이야기하다 보니, 오래전 세상을 떠난 패션사진가 이창남씨가 생각난다.

한 때는 우리나라 패션사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잘 나갔다.

 

훌륭한 누드모델을 구하기 위해 미국 신문에 구인 광고를 낼 정도로

이방인 누드에 빠져 미국 대륙을 횡단하고 다녔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벌거벗은 인간을 노래한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이라는 당연한 이치지만, 세상의 주목은 받지 못했다.

아니, 운이 따르지 않았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우리나라 광고의 시대적 흐름이나 세대교체에 일거리도 점차 잃게 된 것이다.

돈 버는 족족 작업에 쏟아부어 남은 것도 없겠지만, 문제는 아내의 반역이었다.

미국에서 촬영하고 돌아오니, 아내가 말도 없이 이사를 간 것이다.

 

나중엔 아내가 운영하는 동대문시장 옷가게에 물건 실어주는 일을 돕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만나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문제는 그 무렵에 이창남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결심한 속내야 어찌 알겠냐마는 한 작가의 삶의 비애를 목도하는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업보가 아니라, 돈이 원수다.

부디 저승에서나 돈에서 해방되어 즐겁게 사시길 바랍니다.

 

괜히 조기사 신세타령에 이창남씨 이야기가 나와 짠해지네.

조기사야 사모님 모시는 걸 즐기지만, 아마 그는 힘들게 모신 것 같다.

 

누가 뭐래도 난 축복받은 인생이 틀림없다.

평생 하고 싶은 일 해가며 꼴리는대로 살았으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

돈이 없어도 전혀 불편하지도 않다. 역설로 없어서 더 편하다.

돈 많으면 저승 갈 때 택시라도 태워준다더냐?

 

그러나 단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아들 햇님이 문제다.

십여년동안 정의당에서 약자의 권익을 위해 일해 왔는데, 가장으로서 생계는 책임져야 할 것 아닌가?

,생계난과 약자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직접적인 방법은 구의원이 되는 길 뿐이었다.

거대 양당의 공천만 받으면 사기꾼도 당선되는 정치판 사정을 익히 알았으나,

4년 전 지방선거에서 근소한 차이로 낙선한 것을 지켜보며 희망을 가진 것이다.

다시 4년동안 주민을 위해 최선을 다했으니, 올해는 당연히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선거결과는 참담했다. 4년전 지방선거보다 더 적은 지지를 받아 할 말을 잃어 버렸다.

 여덟 명이 출마한 은평 라선구는 민주당에서 두명 공천하고 국민의 힘에서 두명 공천했는데,

민주당에서 두명 당선되고 국민의 힘에서 한 명 당선된 것이다.

4위도 국민의 힘에서 가져갔으니, 결국 5위로 밀려 난 셈이다.

 

투표 결과는 사람 위주가 아니라 당이 좌지우지했다.

한 예로 지난번 민주당 공천으로 당선된 오모 후보가 이번엔 공천을 받지못해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고작 오백여표를 얻어며 순위에서 한 참 밀려나 버렸다.

낙선한 아들의 실망감보다, 후원하고 지지해 주신 분들 뵐 면목이 없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거대양당의 공천을 받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인 것이다.

주민을 위해 열심히 일하거나, 평등이나 정의같은 건 아무 소용 없었다.

민심과 표는 떠도는 바람과 같을 뿐이었다.

 

머리 아픈 선거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아들 놈은 젊기나 하지만, 늙은이가 바쁘게 사는 것은 다들 이해하지 못한다.

 돈도 벌지 못하면서 혼자 바쁜, 나 역시 믿기질 않았다.

몸이 변덕을 부릴 때는 죽는 날을 예견할 정도로 힘들어 하지만

자꾸 거짓말이 되어, 이제 정동지도 믿지 않는다.

 

툭! 손만 대면 넘어갈 것 같으나, 한번 물면 죽어도 놓지 않고,

무슨 일을 벌이면 날밤을 까더라도 해치워야 잠이 온다. 일편 단심 민들레다.

대개의 노인들이 공짜 지하철 타고 다니며, 

탑골공원에서  장기판 훈수나 두는 현실에, 할 일이 많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감히, 카메라와 대마를 내려주신 신의 은덕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무관세음보살~

 

사진, / 조문호

 

 

지난 3일 오후 무렵, 한정식 선생님이 요양 중인 '서초요양병원'을 찾아갔다.

이일우씨가 페북에 올린 선생님 근황에 편지만 가능하다는 것은 알았으나, 무작정 찾아간 것이다.

요즘은 거리두기가 완화되어 양해를 구해서라도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사진 한 장 남기고 싶었다.

 

샤워하신다기에 기다렸더니 힐체어를 타고 나타나셨다.

몇 개월 만에 찾아뵙게 되었는데, 무척 수척해 보였다.

 

세상에! 살다 살다 이런 문병은 난생처음이다.

마치 교도소 면회 간 것처럼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핸드폰으로 통화하는 것이다.

문제는 귀가 어두워 말 끼를 알아먹지 못하는 데 있다. 뭐라고? 잘 안들려..”

할 수 없어 종이에 글을 써 보였다. 드시고 싶은 것 없습니까? 사 올게요

그때서야 필요 없다며 손을 내 저으신다.

이런 식이니, 선생의 건강 상태나 생각을 물어볼 여지가 없었다.

 

서로 안 서러운 눈길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는데, 평소 선생님께서 정영신을 너무 좋아하셨다.

그러나 이 화적 같은 놈하고 살고 있으니, 미칠 노릇 아니겠는가?

애인이란 말을 버젓이 하셨으나, 차마 손 한번 잡지 못했다.

얼마 전엔 이런 일도 있었다. 내가 동자동에 들어가기 위해 정영신과 이혼한 것을 두고,

내 쫒지, 왜 만나냐?”는 말을 했다기에 한동안 삐쳐 찾아가지도 않았다.

본래 소인배라 너그럽지 못하지만, 삐침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이제 선생님을 몇 번이나 더 뵐 수 있을지도 모르기에,

정동지와 다정하게 손잡은 사진 한 장 남기고 싶었다.

사진도 사진이지만, 선생님께서 정력이 되살아나

혈기 충전하여 퇴원하는 그런 기적이 일어날지 어찌 알겠는가?

 

그러한 은밀한 작전은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다른 환자와 달리 선생님께서는 백신을 한 번도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을 만나지 못하니 감옥이나 다름없을텐데, 사모님이 계신 집에 가고 싶어 하신다.

아들과 며느리가 당연히 알아서 하겠지만, 집에서 휠체어로 생활하게 하면 안 될까?

 

부디 강건한 모습으로 다시 뵐 수 있기를 빕니다.

 

사진, / 조문호

 

편지로 소식 전할 분을 위해 요양원 주소를 남깁니다.

서울시 서초구 반포대로 9길 42번지 '서초요양병원' / 전화 02-521-0251

(06709) 한정식

 

 

다들 투표는 하셨는지요?

귀찮기도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 하지 않을 것이라고요? 

안 됩니다. 기어이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해 주십시오.

왜 우리가 동네 살림 꾼 뽑는 데, 정치 논리에 휘말려야 합니까?.

 

사실, 요즘 정치 판 돌아가는 것 보면 간이 뒤 집어진다.

국민의 힘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꼴페 짓으로 정의당 망하는 것을 똑똑히 보고도, 그 짓으로 망했다.

 

이제 거대 양당이 판치는 정치는 끝내야 한다. 이번 지방 선거부터...

내가 추측키로는, 경기지사는 김동연, 서울시장은 오세훈에 무게 두지만,

투표는 참신하고 젊은 권수정을 찍었다. 누가되던 일 잘 할 후보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의 손발이 되어 줄 기초 의원 수준 좀 높여야 한다.

범법자도 공천만 받으면 당선되는 이런 투표가 어디 있나? 단단히 살펴 보고 찍자.

오늘 저녁 좋은 결과 기다리며, 막걸리나 한 잔 하자.

 

본 이야기는 며칠 전 쪽방 찾아 온 '서울예종' 학생들이다.

요즘은 동자동 소식과 노숙인 사진들을 가급적 포스팅하지 않는데,

일주일 전에 쪽방에 학생들이 찾아온 것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방송영상과에 재학 중인 김극렬 군이

학교 과제로 동자동을 조사하여 발표하게 되었다고 했다.

아마,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다 인사동 사람들블로그에 게재된

동자동 쪽방 사람들 기사들을 본 것 같았다.

 

블로그에 올린 6년간의 자료들을 살펴 보아 찾아올 필요야 없었지만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하겠다는 것이다.

페북 메시지로 여러 차례 일정을 조율하다 지난 23일로 했는데,

김극렬군을 비롯해 네 사람이 찾아왔더라.

동자동 새꿈 어린이공원에서 만났으나 찻값 아끼려 쪽방에 올라갔는데,

 다섯 명이 들어가니 쪽방이 꽉 찼다.

아마 쪽방 생기고 처음으로 많은 사람이 들어왔을 것이다.

 

그런데, 학생들이 무슨 돈이 있다고 선물까지 사 왔을까?

롤 케익은 옆방 사람과 맛있게 나누어 먹었으나,

홍삼 액기스는 차마 먹을 수가 없었다.

보약 먹으면 죽을 때 힘들게 죽는다는데...

 

차마, 블로그에 올리지 못했던 이야기만 들려주었는데,

학생들이 너무 덥다고 해서, 올해 처음으로 선풍기도 켜 보았다.

나야 늙어서 더위를 별로 느끼지 못하지만, 피가 뜨거운 학생들 생각을 미처 못했다.

 

서둘러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별 도움도 줄게 없었다.

아무튼, 빈민들 삶에 관심과 애착을 가져주어 고맙다.

졸업하여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 평등사회의 투사가 되어주길 바란다.

 

사진, / 조문호

 

 

 

서울

 

주명덕展 / JOOMYUNGDUCK / 朱明德 / photography 

2022_0520 ▶ 2022_0530

 

주명덕_광화문_젤라틴 실버 프린트_1965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옵스큐라

OBSCURA

서울 성북구 성북로23길 164

www.obscura.or.kr@obscura_seoul

 

 

한국 사진사의 1세대인 주명덕은 사회적 다큐멘터리작업인 『포토·에세이 홀트씨 고아원』(1966) 전시로 전후한국 사회에서 외면했던 혼혈고아 문제를 처음 세상에 알렸다. 이 전시의 자료를 정리하여 출판된 것이 『섞여진 이름들』(1969)이다. 『서울』은 1969년 주명덕의 첫 책을 비롯하여 신간 『SEOUL』(옵스큐라, 2022)까지 작품집 40여 권과 글을 모아 그의 작품 세계전반을 살펴볼 수 있는 아카이브 전시이다. ● '서울'은 주명덕에게 평생의 일기와도 같은 소재이다. 한국의 온 지역과 공간, 자연, 여러 인물을 통해 작품세계를 펼쳐 나간 주명덕의 방대한 작업들이 있지만, '서울' 작업은 60여 년간의 작업 흐름을 그대로 축약해 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대 초기 매그넘, 유진 스미스, 윌리엄 클라인 등에 영향을 받은 습작에서 시작하여 1960~70년대 자신만의 언어로 사회적 다큐멘터리를 열어 나갔다. 2000년대 도시정경과 추상적 미학을 담는 장년기 작업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서울은 끝없는 피사체였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SEOUL』은 주명덕 작업은 서울의 기록과 그의 미학적 흐름을 담은 작품집이다.

 

주명덕_서울展_옵스큐라_2022

옵스큐라의 기획전시 『서울』에서는 구하기 힘든 1970~80년대 출판된 주명덕의 책을 직접 볼 수 있다. 『명시의고향』(성문각,1971), 『정읍 김씨집』(열화당, 1976), 『韓国の空間 한국의 공간』(구용당, 일본, 1985) 등이다. 그 중 『韓国の空間 한국의 공간』은 월간중앙에 재직하며 발표했던 '한국의 이방, 한국의 가족, 은발의 한국인, 명시의 고향, 한국의 메타포, 국토의 서정기행', 총 6개의 시리즈를 담은 책으로 1970년대 시대성을 담아 한국의 뿌리를 국제적으로 선보인 주명덕의 작업을 한눈에 볼 수 있다. ● 주명덕 작품론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의 작업노트와 인터뷰 일부를 정리한 아카이브를 볼 수 있다. 1969년 주명덕의 첫 책에 남겼던 작가로서의 굳은 다짐을 적어 놓은 노트, 2000년 작업실에서 소탈하게 밝힌 작품 변화 과정의 인터뷰, 70대 작가로서의 감사와 소망 등 다양한 방식으로 관람객을 맞이한다. 전시는 오는 5월 30일까지 옵스큐라에서 열린다.

 

주명덕_서울展_옵스큐라_2022

주명덕(朱明德, 1940~)은 황해도 안악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문과대학에서 사학을 수학하였다. 1966년 서울 중앙공보관에서 『포토·에세이 홀트씨 고아원』으로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68년부터 1973년까지 『월간 중앙』 사진기자이자 편집기획자로 활동하였다. 1979년부터 도서출판 시각을 운영하며 사진 작업과 다양한 출판 기획활동을 하였다. 1960년대 홀트씨 고아원, 미군기지촌 용주골, 인천의 중국인촌을 주목한 한국의 이방, 서울 시립아동병원 시리즈를 1970년대에는 한국의 가족, 지적 장애우 복지시설인 중앙각심학원, 서울 청운요양원과 서울 시립양로원, 서울 시립아동보호소, 미군기지촌 운천 등을 통해 사회적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였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한국의 공간, 명시의 고향, 한국의 장승 등 한국의 전통적인 공간과 건축의 아름다움을 담아내는 작업을 하였다. 1980년대부터는 자연과 도시를 주제로 작업하였으며 설악산, 오대산, 지리산, 한라산, 장미, 연꽃 등의 소재를 통해 '검은 풍경' 연작을 선보였다. 한국사진역사 전시 운영위원장(1998), 사단법인 민족사진가협회 회장(1999-2003)과 제1회 대구사진 비엔날레 조직위원회 위원장(2006)을 역임하였다. 2010년 문화예술부문 파라다이스상을 수상하였다. ■ 옵스큐라

 

주명덕_서울展_옵스큐라_2022
주명덕_서울展_옵스큐라_2022

해석자의 심미안: 주명덕의 『서울』  1. 『서울』은 주명덕이 반세기 동안 도시 서울을 기록한 작업을 정리해서 보여준다. 1960-70년대의 작업을 모은 1부와 2000년대 이후의 작업을 정리한 2부는 한눈에 보아도 확연히 구분되는 차별성을 갖는다. 60-70년대는 주로 인간에, 2000년대 이후는 주로 도시 공간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으며, 카메라 워크와 작업 형식에도 큰 차이가 있다. ● 1960-70년대의 서울은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된 도시의 복구와 급속한 개발이 동시에 진행되던 시기다. 따라서 전쟁의 상흔과 전통의 흔적, 개발의 생채기가 도시 곳곳에 뒤죽박죽 섞여 있다. 실상 1960년대는 주명덕의 작업여정에서 소위 '습작의 시기'에 가깝다. 작가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홀트씨고아원』전(1966)과 비슷한 시기의 작업이지만 명료한 문제의식과 완성도 높은 형식을 취한 이 포토에세이와 달리 60년대의 서울작업에서 작가는 자신이 배워 온 다양한 사진의 문법들을 적용, 실험하고 있다. 여기에는 1950년대에 전쟁 직후의 '생활상'을 진솔하게 담아내고자 했던 생활주의사진이나 리얼리즘사진의 유산도 미미하나 남아있고, 서양의 사진화보 잡지를 통해 광범위하게 배포되던 포토저널리즘이나 다큐멘터리 사진의 영향도 보인다. 나아가 60년대 「현대사진연구회」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학습'했던 조형주의 사진의 형식적 요소도 섞여있다. 구도와 빛의 처리, 기하학적 형태를 찾아내어 '조형성'을 강조하기 위한 의식적인 관점의 선택 등이 그 예다. 말하자면 60년대의 서울 작업에서 주명덕은 자신이 배웠던 대부분의 사진 형식을 자유롭게 시도하고 있다. 그만큼 다양한 시각이 혼재돼 있다는 뜻이다. ● 1970년대로 진입하면서 주명덕은 기획 취재 형식으로 분명한 주제를 설정하여 서울에 접근한다. 1970년대의 서울 작업에는 『월간중앙』에 발표했던 「한국의 가족」 연작이 주로 포함돼 있다. 이 연작의 주제는 60년대부터 진행된 산업화와 개발로 빠르게 해체되어 가는 한국의 가족제도다. 전통적인 대가족제는 농촌사회의 극히 일부에만 남게 되고 급속한 도시화 과정에서 핵가족제가 보편적인 가족형태로 자리 잡게 됐다. 또한 무분별한 도시계획과 신도시 개발의 와중에서 터를 잃고 쫓겨나는 가족도 생겨났다. 이 급격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가족들은 묵묵히 희망을 갖고 일상을 살아간다. 주명덕이 기록한 1960-70년대 서울의 모습은 전쟁과 개발, 산업화라는 미증유의 격변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충실한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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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00년대 이후의 서울에 대한 작업은 1960년대 이후 줄곧 그의 사진 스타일을 지배해 왔던 '전통적인' 다큐멘터리 방식과 차별성을 갖는다. 초기 작업에 해당하는 「섞여진 이름들」에서부터 「한국의 가족」, 「한국의 이방」, 「한국의 공간」 등에서는 절제 있고 엄격한 중립적 시각이 사진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는 그가 일찍이 사진을 '사실과 기록'의 관점에서 수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시각은 대부분의 작업에서 일관되게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 태도가 그의 작업을 '시각적 보고서'의 차원에만 머무르게 하지는 않는다. '주관적'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주관적 기록의 바탕에는 그만의 고유한 심미적 시선이 깔려있다. ● 2000년대의 도시 사진이 기존 작업과 갖는 눈에 띄는 차이는 기록의 관점에서 진행했던 기존 작업의 스타일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 있다. 우선 역동적인 촬영 시점과 앵글의 선택이 눈에 띈다. 나아가 초점이 맞지 않거나 흔들린 이미지도 많아 이 작업에서 정보가치는 크게 중요치 않아 보인다. 또한 의도적인 중첩과 반영 효과를 자주 활용하고 있어 촬영 목표에 집중하고 있지 않다는 인상마저 풍긴다. 서울이라는 도시를 효율적으로, 즉 객관적 정보를 담고 있는 사진으로 기록할 의도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왜 이런 방식을 취한 것일까? 도시 사진을 모아 2008년 대림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제목은 도시정경(都市情景)이다. 정경(情景), 요컨대 도시가 불러일으키는 정서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마음의 풍경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말하자면 도시가 자신에게 불러일으키는 감흥을 사진으로 옮겨낸 셈이다. ● 실상 주명덕의 기존 작업에는 역사가나 사회학자의 '탐구적' 태도가 깔려있었다. 「섞여진 이름들」에서는 한국전쟁에 관한 거대담론이 미처 보지 못했던 혼혈 고아 문제를 예리하게 들추어냈고, 「한국의 가족」에서는 근대화라는 문명사적 전환기에 한국의 가족제도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유형별로 정리했다. 「한국의 공간」은 급격히 진행된 '서양식' 근대화 과정에서도 굳건히 남아있는 우리 공간의 전통적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 모든 작업에서 그는 절제와 배려의 자세를 유지했다. 인간에 대해서는 휴머니즘과 존중의 태도를, 공간에 대해서는 과장과 수사를 멀리하고 대상에 충실하고자 했다. 그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주명덕의 심미적 시선 바탕에 깔려있는 윤리적 태도이기도 하다. ● 그런데 이제 도시정경에 와서 그런 태도에 변화가 생겼다. 이 변화는 시기적으로는 1990년대에 와서 구체화된 「잃어버린 풍경(Lost Landscape)」에서부터 이미 시작됐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자연을 보여주는 이 작업의 시각적 특징은 사진 전체가 온통 어둡고 검은 톤으로 덮여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검은 풍경'이다. 이 작업에서 본래의 나무와 풀, 산이 갖고 있는 형태는 어둠에 묻혀 간신히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시각적 특성만을 놓고 본다면 서양 모더니즘 회화에서의 모노크롬이나 한국의 단색화와 비견될만하다. 이런 특징은 1970-80년대의 작업과 비교할 때 형식주의의 차원에서 눈에 띄는 큰 변화다. 주명덕은 이 작업의 바탕에 깔려있는 의도를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조국이 갖고 있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전통,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소박한 마음을 내 사진을 통하여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린 세대들에게 남겨보려는 작업을 계속해 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기록'에서 출발했으나 그 의도는 조국 산천의 아름다움과 사람들의 소박한 마음을 사진으로 표현하는 데 있다. 그것을 '잃어버려' 보지 못하는 세대에게 자신의 심미적 시선을 통해 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할 수 있겠다. '검은 풍경'은 결국 그의 주관적 시선, 심미적 시선이 드러나는 모습이다. 여기서 나무의 형태나 톤이 본래의 그것과 얼마나 일치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그렇게 본다는 사실만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검은 풍경' 역시 정경, 즉 자연이 그에게 불러일으키는 정서를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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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렇다면 도시는 그에게 어떤 정서를 불러일으켰을까? 첫째, 역동성과 긴장감이다. 역동성은 어떻게 표현될까? 통상적인 눈높이 시점을 대신하여 로우 앵글로 쳐다보는 방법이 있다. 그리고 실제 고층빌딩으로 가득 찬 서울에서 건물의 모습 전체를 보려면 올려다보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고개를 쳐들고 빌딩을 보면 하늘이 함께 보이고, 인공구조물 옆으로 배치된 자연을 가장한 거대한 가로수도 병치 상태로 시야에 들어온다. 그러나 그 모습은 자연과 인공이 서로 노려보는 형태로 적대적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 ● 둘째, 반영과 중첩. 도시정경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요소로 작가의 시선을 유달리 잡아끈 모습이다. 실상 현대 도시 건축에서 유리가 건축자재로 활용되는 비중은 매우 높다. 빽빽이 가득 찬 폐쇄적인 건축물의 공간 구조에서 막힌 시야를 열어주는 방법은 유리의 투명성에 의존하는 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리의 투명성은 현대미술에서, 예컨대 미래파 작가들에게는 가장 전형적인 현대적 시각경험을 제공하는 수단이었다. 실제 도시 바깥으로 나가면 인간의 거주 공간에서 시야가 막힐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유리는 투명성만 가진 물질이 아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 맞은 편 이미지의 반영도 있고 굴절도 있다. 따라서 유리는 투명한 건너편 이미지와 보는 자의 편에서 유리 표면에 반사된 이미지의 중첩 효과를 만들어낸다. 이 효과는 비현실적이기도 하고, 기이하거나 몽환적이기도 하며, 놀랄 만큼 아름답거나 괴기스럽기도 하다. 어쨌든 일상에서 만나는 평범한 시각적 경험과 크게 다르다. 그리고 그 효과는 보는 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우연히 찾아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우연을 카메라로 포착하는 것은 순전히 작가의 의지에 달려있다. ● 반영과 중첩을 통해 주명덕의 시선을 잡아끈 이미지는 대부분 광고 포스터에 등장하는 서양의 모델들이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대체로 패션, 악세사리, 화장품 등의 광고 모델로 추정된다. 모델의 포즈와 표정, 메이크업 등을 「도시정경」의 작가가 선택한 것이 아니기에 그 여성들의 모습은 일반적인 광고 전략의 프로토타입을 따르고 있다. 이른바 스테레오타입으로서의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의 여성들인 셈이다. 이 '매혹적인' 여성 모델의 이미지가 도시에 넘쳐난다는 것은 그 이미지가 도시 군중의 정서에 부합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60년대 이후 한국이 걸어 온 '서양식' 근대화 과정을 꾸준히 기록해 온 작가의 눈에 이 모습은 어찌 보면 당연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자본주의의 고도화에 따른 필연적 결과이기도 하다. 이렇게 서양의 자본주의가 '제작한' 여성 이미지는 서울이라는 실제 도시와 중첩을 통해 섞여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도시정경」은 형식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과거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 ● 셋째, 자연과 문화의 혼합. 여기에 해당하는 이미지는 도시의 담벼락과 바닥에 덮여있는 페인트칠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훼손되면서 만들어 낸 추상적 형태를 보여준다. 잿빛 콘크리트를 덮기 위한 페인트칠이나 복잡한 도시에서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위해 곳곳에 새겨 놓은 각종 기호들은 풍화와 침식이 진행되면서 예기치 않았던 형태로 변형된다. 문화적 행위가 자연의 위력과 섞이면서 만들어낸 뜻밖의 이미지인 셈이다. 그리고 그 형태는 대체로 추상 이미지로 귀착한다. 그런데 작가는 왜 이 '하찮은' 벗겨진 페인트, 혹은 '남겨진' 페인트의 형상에 주목했을까? ● 아마도 도시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이미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도시는 수많은 군중들 간 소통의 효율성을 위해, 도시 보존과 재생을 위해, 콘크리트의 잿빛을 감추기 위해 끊임없이 페인트를 부어댄다. 그리고 그 행위는 구체적 형상을 목표로 삼지 않기에 '대충' 이루어진다. 자연의 훼손도 같은 방향으로 진행된다. 지우고 삭제할 요소를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게 '변형된' 형상, 결국 새로 '생성된' 형상은 어떠한 구체성도 띄지 않는다. 추상 이미지로 남게 되는 것이다. 결국 도시는 이렇게 탄생한 무수한 추상 이미지로 뒤덮여 있다. 도시가 구축과 훼손, 재생의 메커니즘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한 추상 이미지는 계속해서 변형과 생성을 거듭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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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다른 한편으로 작가가 이 추상 이미지에 관심을 갖게 된 데는 '새로운' 작업, 즉 기존의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진작업을 해보고자 하는 욕망이 바탕에 깔려있는 것 같다. 이 문제는 작가의 기나긴 사진작업의 여정과 한국 사진의 역사적 맥락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주명덕의 초기 작업이 시작되던 1960년대는 1950년대 이후 한국사진의 '주류'로 자리 잡은 생활주의 사진의 영향이 여전히 남아있던 시기다. 생활주의는 현실의 삶을 진솔하게 기록하자는 리얼리즘 정신에 입각하여 전개된 사진운동이다. 주명덕이 '사실성', '기록성'을 사진의 본질적 미학으로 수용하게 된 데는 이런 맥락이 깔려있다. 이 시기 한국사진에 리얼리즘만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소위 모더니즘 사진을 지향하는 다른 시도들도 존재했으나 성과는 미약했다. 생활주의로 대표되는 리얼리즘 사진도 한계에 봉착해 있었다. 생활주의는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분명 사진가들에게 새로운 미학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특히 해방 이전의 이른바 '살롱사진' 전통에 익숙해 있던 사진가들에게 한국전쟁의 참상은 사진이 리얼리즘 정신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각성을 불러일으켰던 측면이 있다. 그러나 생활주의는 공모전이라는 제도의 한계를 넘지 못했고, 따라서 형식의 정형성에 갇히거나 편협한 주제에 매몰되어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주명덕이 「섞여진 이름들」에서 보여주었던 포토에세이 형식이나 이후 잡지사진에서 시도했던 기획 취재 형식의 다큐멘터리 작업은 이처럼 생활주의와 리얼리즘 사진이 봉착했던 한계를 넘어 기록의 언어를 폭넓게 확장시킨 뛰어난 성과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작가의 '심미적 기록'은 하나의 스타일로 굳어갔다. ● '사실성'과 '기록성'에 대해 초기부터 작가가 가졌던 신념은 결국 사진은 필연적으로 구체적 대상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진의 속성을 수용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사진의 '예술성'은 바로 그 속성에 있다는 사진 고유의 미학에 대한 인정으로 귀결됐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생활주의와 리얼리즘을 거쳐 오랫동안 한국사진의 규범으로 작용해왔다. 그런데 이 규범에 따르면 사진은 구체적 대상과 분리될 수 없기에 사진가는 형상의 '제작'에 개입할 수 없다. 현대미술이 형태의 추상을 다양한 방식으로 탐구하는 동안 사진은 현실에 존재하는 구체적 형상만을 다룰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기록'에 의존해서 사진의 추상을 얻어내는 것은 불가능한가? 실상 「잃어버린 풍경」의 모노크롬에 가까운 '검은 풍경'도 일종의 추상이다. 나무와 풀의 구체적 형상이 검은 톤에 묻혀 간신히 모습을 드러내는 이 작업에서 추상을 향한 시도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검은 풍경'을 온전한 추상으로 보기는 어렵다. 어찌됐든 나뭇잎이나 나뭇가지와 같은 구체적 형상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화면에서 사물을 몰아내지 않는 한 추상은 구현되지 않는다. ● 「Abstract」 연작에서 주명덕은 본격적으로 추상의 문제와 대면한다. 이 작업을 통해 작가는 '기록'의 방법론을 포기하지 않고도 추상을 얻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본다.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담장이나 도로 바닥에 묻어있는 페인트 자국에 가까이 다가가면 쉽게 추상이 나온다. 하나의 사물이 다른 사물이나 주변 배경으로부터 분리되는 순간 자신의 고유한 구체적 형상은 힘을 잃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Abstract」가 보여주는 각각의 이미지가 어떤 사물인지 알 수 없다. 요컨대 무엇을 찍었는지, 어디서 찍혔는지, 본래의 온전한 형태는 어떠했는지 알 수 없다. 그 이미지들은 때로 추상표현주의 회화에 자주 등장하는 그리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잭슨 폴록의 드리핑 기법을 활용하여 물감을 뿌려놓은 올오버(All over) 페인팅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외에도 현대 추상미술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다양한 붓질의 형태들이 있다. 그런데 「Abstract」의 추상 이미지는 작가가 직접 그리거나 제작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공의 '협업'을 통해 저절로 형성된 것이다. 작가는 그 이미지를 '단지' 포획했을 따름이다. 어떤 포획인가? ● 일상의 시각으로 도시의 담장이나 길바닥을 볼 때 「Abstract」의 이미지처럼 추상화된 형태가 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인간의 눈은 우선 전체를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전체의 일부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부분으로서의 사물을 본다. 이렇게 지각된 사물은 구체적 형태를 지니게 마련이다. 추상적 형태가 지각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따라서 작가는 「Abstract」 작업의 추상 이미지를 관심을 갖고 찾아다녔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전체에서 부분을 떼어내서 보는 면밀한 관찰과 주의 깊은 시선이 요구된다. 나아가 카메라라는 기계장치의 강제성에 부합하여 그 부분을 '어떻게' 떼어낼 지도 결정해야 한다. 면의 분할과 비례도 고려해야 하고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점과 얼룩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화면에 담아낼 지도 결정해야 한다. 결국 「Abstract」에서의 포획은 추상 화가들이 화면을 구성하는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차이는 있다. 사진에서 성공적인 포획이 이루어지려면 이미 주어진 전체 이미지의 결정 구조에 작가의 시각을 개입해야 하는 난제를 해결해야 한다. 적당한 타협이 필요한 것이다. 전체를 변형시킬 수는 없기에 효과적인 추상의 효과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프레임 구성에 면밀한 주의와 고도의 판단이 요구된다. 「Abstract」는 그런 종합적 판단과 심미안의 합작품이다. ● 「도시정경」과 「Abstract」는 주명덕의 전체 작업 여정을 놓고 볼 때 새로운 시도에 해당한다. 초기 작업에서부터 줄곧 '기록'의 관점을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도시 사진에 나타나는 파격은 그런 점에서 변화를 상징한다. 「Abstract」 작업도 그렇다. 그의 관심은 더 이상 기록의 구체성에 있지 않다. 그러나 이런 변화가 이전 작업들과의 단절을 뜻하지는 않는다. 작가는 도시를 다시 보고자 했을 뿐이다. 분명 1960-70년대의 서울과 2000년대의 서울은 다르다. 말하자면 그는 서울을 이전에 비해 훨씬 역동적이고 변화무쌍한 도시로 해석했을 따름이다. 즉 2000년대의 도시 작업에 나타나는 '파격'은 자연스런 결과다. 그런 점에서 주명덕의 도시는 '기록자'의 시각에 '해석자'의 시각이 맞물려 나온 작업이라 할 수 있겠다. ■ 박평종

 

Vol.20220522a | 주명덕展 / JOOMYUNGDUCK / 朱明德 / photography

해마다 어버이날이 다가오면 선물도 나누어 주고 꽃도 달아준다.

 

그러나 잊고 사는 가족만 더 그리워지게 만든다.

 

조화 한 송이로 마음 달래며, 나누어 준 도시락으로 허기를 채운다.

올 해는 동자동 사랑방에서 꽃을 달아주며 떡과 음료를 나누어 주었다.

 

해마다 어버이날과 추석이 다가오면 주민들을 불러 모아 새꿈공원에서 잔치를 벌였으나,

전염병에 발목 잡혀 이 년 동안 한 번도 잔치를 열지 못했다.

 

올해는 그나마 규제가 풀려, 찾아 다니며 꽃이라도 달아줄 수 있었던 것이다.

 

어버이날 며칠 전에는 '서울역쪽방상담소'에서도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

라면, 샴푸, 면도기 등의 생필품이었으나, 줄 세우는 관행은 여전했다.

 

당일에는 등불교회에서 도시락을 50개 준비해 왔으나, 공원에 나온 주민이 몇 사람 없었다.

 

도시락 하나 얻어 돌아오니, 아래층 박씨 방의 짐을 끌어내고 있었다.

몸이 아파 돌봄이 필요한 요양원에 갔다지만, 가져갈 짐은 없고 다 버려야 할 짐 뿐이었다

 

이제 다시 돌아오기 어렵다. 그곳은 저승 대기소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또 한사람 사라지는 것이다.

 

늦은 시간 녹번동에 들렸더니, 정동지 조카 심지윤이가 꽃다발을 사 들고 왔더라.

좋아하는 정동지 모습보니,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부추전에 술 한 잔 마시며 어버이날을 자축했다.

 

사진, / 조문호

 

 

쪽방·고시원은 되는데 천막은 안 되는 주거지원
주거지원 받더라도 생계로 천막 벗어나기 막막

 

지난 10일 용산역 뒤편에서 바라본 텐트촌의 모습. 나무가 무성히 자란 사이사이로 천막들이 보인다. © 뉴스1

(서울=뉴스1) 박동해 기자 

 

A(60)의 집에는 문이 없다. 입구 쪽 천막을 살짝 들추면 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사실 문만 없는 것이 아니라 지붕도 바닥도 벽도 없고 거실도 욕실도 화장실도 없다. 하지만 이곳을 A는 집이라고 부른다. 7~8평 되는 공간에 A는 손수 집을 만들었다.

 

상가 입주자 모집을 알리는 커다란 플래카드를 지붕 삼고 비닐하우스에서 사용하는 골조를 기둥 삼아 햇빛과 비를 막는 역할을 맡겼다. 천막 안 바닥에는 검은색 플라스틱 화물운반대(팔레트) 석장을 쌓아 땅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막았다.

 

천막 안 팔레트 위에 세워진 1인용 텐트가 그가 먹고 생활하는 안방이다. 텐트 안에는 그가 덮고 잤던 이불과 침낭이 정리되지 않은 채 놓여있다. 텐트 바로 앞 팔레트가 깔리지 않은 천막 안 땅바닥에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인 컵라면 용기가 놓여있다.

 

어두운 천막 벽면을 가득 메운 잡동사니들 중 사실 정리되어 보이는 것은 없었다. 천막 입구에는 언제 썼는지 모르는 스테인리스 숟가락 하나가 흙바닥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원치 않은 '이사'를 하기 전까지 그의 집은 열심히 정리한 흔적이 있던 곳이었다. 그는 이전 집에 살 땐 집 앞으로 오는 길도 매일 깨끗이 청소했다고 했다. 하지만 불과 2주 전까지 살던 천막 집이 허물어지고 불과 10m 떨어진 곳에 다시 천막을 지으면서 A는 짐을 정리하는 것을 미루고 매일 같이 술을 마셨다.

 

A의 집 옆에서 함께 천막를 치고 사는 이웃주민 B(68)"속상한 일이 있는지 A8~9일 내내 나오지도 않고 밥도 안 먹고 술만 먹었다"고 했다. 결국 A11일 새벽 술을 마시고 계단에서 미끄러져 병원 신세를 지게 됐다.

 

10여년 전부터 A가 천막을 치고 살아온 공터 주변에는 20여개의 비슷한 천막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천막들이 즐비한 이곳을 사람들은 '텐트촌'이라고 부른다. 용산역 뒤편에 자리 잡고 있어 '용산역 텐트촌'이라는 지명이 붙었다.

 

지난 10일 용산역 텐트촌 한쪽에 쓰레기가 가득 쌓여있다.© 뉴스1

이 텐트촌으로 향하는 길은 하나뿐이다. 용산역 3번 출구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달주차장' 입구에 다다랐을 때 다시 왼쪽으로 향하면 지상으로 향하는 고가가 나오는데 이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왼편에 텐트촌으로 향하는 콘크리트 계단이 보인다. 계단 바로 옆에는 큰 오동나무가 텐트촌으로 가는 이정표 역할을 한다.

 

2000년대 중반부터 20여명의 주민이 이 마을에 살고 있지만 누구 하나 땅을 가지진 못했다. 마을 주민들은 주로 용산역 인근에서 노숙을 하던 이들로 각자의 사연은 제각각이지만 거리를 떠돌다 갈 곳이 없어서 지낼 곳을 찾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됐다.

 

최근 이들이 마지막 보루로 생각하고 있는 이 텐트촌의 공간 일부가 잘려 나가는 일이 있었다. 용산역과 주변 고급 호텔을 잇는 공중보행교를 새롭게 짓는 공사가 시작되면서 2개의 천막이 철거된 것이다. AB는 이번 공사로 원래 살았던 천막이 헐려 텐트촌 안쪽으로 이동해 다시 천막을 쳤다.

 

지자체와 공사를 진행한 시행사는 사전에 철거를 공지했고 천막 이동을 위한 편의도 제공했다고 밝혔지만, A'사전에 아무런 합의도 없이 다짜고짜 포클레인을 가지고 와 철거를 진행했다'고 열을 냈다.

 

​ 용산역 - 서울드래곤시티 공중보행교 위치도 ( 용산구 제공 ).©  뉴스 1

A는 시공사 측에서 '밥이라도 사먹으라'5만원을 준 것이 전부였다며 "우리 같은 거지들은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하겠지만 그래도 살게는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A는 천막을 다시 쳐주겠다는 시공사 측에 제안도 거절하고 공사 구역에서 텐트촌 안쪽으로 10여미터 자리를 옮겨 직접 다시 천막을 쳤다.

 

지난 3월 공중보행교 공사가 시작될 당시부터 '홈리스행동' '빈곤사회연대'와 같은 시민단체들은 철거가 예정된 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에 대해 이주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다. 이들은 주민들이 아무런 준비 없이 거주공간을 옮기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했지만 결국 A는 별다른 준비 없이 다시 천막을 짓고 살아가게 됐다.

 

그나마 최초에 철거될 예정이었던 천막이 3개동에서 2개동으로 줄어들면서 철거 대상에서 제외된 C(72)는 천막을 지키게 됐다.

 

시민단체들은 국토교통부훈령인 '주거취약계층 주거지원 업무처리지침'을 내세우며 공사가 진행되기 전에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나서 주민들의 주거지 마련에 나서야 했다고 지적한다.

 

이 지침은 '최저주거기준에 미달하는 거주지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건설·매입·전세임대주택 거주를 지원하기 위해 마련됐다. 해당되는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쪽방, 고시원, 비닐하우스, 노숙인시설, 컨테이너, 움막, PC, 만화방 등의 최저주거기준에 미달하는 곳에서 3개월 이상 주거를 했음이 확인돼야 한다.

 

용산구청은 텐트촌 주민이 3개월간 천막에서 실거주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해당 주거지원 사업의 신청을 받아 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 때문에 구청은 주민들에게 노숙인 지원 사업을 통해 고시원이나 쪽방에 3개월 정도 거주를 하고 이후에 주거취약계층을 위하 주거지원 신청할 것을 안내했다.

 

지난 4일 용산역 텐트촌에 있던 주민 A의 천막이 철거되고 있다. © 뉴스1

10년간 이곳에 살았던 D(62)는 본인이 직접 나서 주거지원을 신청해 보려고 했지만 '천막'은 지원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답을 들었다며 "고시원, 쪽방 이런 데서 3개월 이상 살아야 매입임대든 전세든 조건이 된다는 데 여기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그는 비슷하게 열악한 실정인 텐트촌 사람들이 왜 이런 지원을 받을 수 없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시민단체들은 이런 지자체의 입장에 대해 '소극 행정'이라고 비판한다. 서울시와 소방당국 등에서 텐트촌 거주민을 위한 상담과 안전 점검들을 지속적으로 해왔고 거주민 명단도 작성하고 있기에 이를 통해 3개월 이상 거주 사실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시민단체들은 쪽방이나 고시원 자체가 이미 '비정적 주거형태'인 만큼 텐트촌의 주민들을 다시 쪽방이나 고시원으로 보내는 것 또한 주거 상향이라고 볼 수 없다고 했다. 실제 이번 공사과정에서 텐트가 헐릴 뻔했던 C의 경우 용산역 인근에 고시원을 마련해 거처를 옮겼지만 영 적응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있는 것도 불편하고 눈치가 보여 밥을 먹기도 힘들다"며 하루 웬만한 시간은 나와 지낸다고 했다. C는 고시원을 얻은 뒤에도 텐트촌으로 나와 자신의 천막이 잘 있는지 살피고 텐트촌 사람들과 시간을 보냈다.

 

지난달 14 일 용산역 텐트촌 주민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용산구청에 적절한 주거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 뉴스 1

용산구는 이런 상황에 대해 '주거지원 대상에 대해 자체적으로 임의적 판단을 하기 어렵다'며 해당 지침을 제정한 국토교통부 측에 지난 4월 유권해석을 요청했지만 아직까지 답이 오지는 않았다고 했다. 용산구는 유권해석에 대한 답이 오면 그에 맞게 조치를 하겠다는 방침이다.

 

다만 텐트촌 주민들은 주거지원이 되더라도 과연 이곳을 떠나 잘 살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주거비 지원이 된다고 하더라도 당장 일을 할 수 없으니 다른 부수적인 비용들을 감당하기 어렵고 10년 이상 용산역 주변에서만 생활하다 보니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서 살아가기도 힘들다는 것이다.

 

기초생활수급자로 인정을 받거나 65세를 넘겨 기초노령연금이라도 받으면 사정이 좀 낫지만 텐트촌 주민 중에는 이에 해당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특히 안형진 홈리스행동 활동가는 몸이 아파 근로를 하기 힘든 노숙인들의 경우에도 병원에 가기가 어려워 이를 증명할 수가 없고, 근로능력이 있다고 판단 받으니 정부 지원을 받기 힘든 경우가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A는 뇌전증을 앓고 있어 주기적으로 발작 증세를 보이고 있다.

 

한편 텐트촌 주민들은 마을 쪽에 더 가까운 보행교가 완성되면 이곳을 지나는 시민들에게 텐트촌이 더 잘 노출될 것이고, 철거를 요구하는 민원이 늘어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더불어 텐트촌이 자리 잡고 있는 '용산 정비창 부지'는 대규모 개발 사업이 예고된 곳이라 개발 과정에서 텐트촌이 유지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서울시는 올해 안에 용산정비창 부지 개발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본격적인 사업 추진에 나설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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