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번동 사모님으로 부터 지령이 떨어졌다.

1일부터 3일까지 볼일이 많아 녹번동에 대기하라는 것이다.

당장 먹을 것 걱정 할 필요도 없는데다, 노닥거릴 상대가 생겨 반가웠다.

보따리 챙겨 갔더니, 예고도 없이 불화가 장춘씨가 나타났다.

그동안 왜 소식을 끊었냐고 물었더니,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단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눈물을 쏟아냈다.

생전에 모친께 모질게 한 욕설을 후회하며 슬피 울었다.

백순이 가깝도록 집에서 편안하게 사시다, 고통 없이 돌아가신 것은 고마운 일이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딸이 먼저 갔다면, 남은 엄마 마음은 어떻겠냐?며 위안했다.

이제 잔소리할 사람은 없으나, 그 텅빈 외로움은 어떻게 채울까?

 

그 날은 밤을 세워가며 사모님을 끌어안고 지낸 것이 아니라, 티브이를 끌어안고 용썼다.

지방선거 투표 결과를 지켜보며, 민심이란 것은 바람같은 것이라는 것을 재실감했다.

 

다음 날부터 정동지가 케이비에스 방송국에 인터뷰하러 간다기에 여의도도 가고,

한정식 선생 문병하러 서초동 요양원에 들리는 등 곳곳을 돌아다녔다.

인사동에서 공덕동으로, 공덕동에서 동자동으로, 시키는데로 기사의 소임을 다했다.

길은 밀려 다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으나, 영양가 없는 소리해가며 히히덕거렸다.

제발 아는 체 하지마라는 사모님의 난처한 웃음을 뒤로 넘겨가며...

 

그런데, 자가용 기사들의 제일 큰 애로점을 꼽는다면

언제 일이 끝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기다려야 하는 무료함일 것이다.

그렇지만 혼자 노는데 이골나 무료할 틈이 없다.

핸드폰이 고물이라 페북은 볼 수 없으나, 주머니에 카메라가 있는 것이다.

 

장미가 만발한 벤취에서 힘없이 앉은 노인의 외로운 하소연도 듣고,

인사동 거리를 살피거나, 옆방 김씨 자는 모습을 훔쳐보는 등, 한가할 틈이 없다.

가는 곳마다 시간은 오래걸리지 않았지만 여의도 인터뷰는 시간이 지체되어

주차장 공원을 돌아다니며 기암괴석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즘 개는 똥을 먹지 않지만,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옛 말이 딱 맞다.

돌맹이까지 풍만한 여인의 알 몸으로 보이니 이 일을 어쩌랴!

 

이야기하다 보니, 오래전 세상을 떠난 패션사진가 이창남씨가 생각난다.

한 때는 우리나라 패션사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잘 나갔다.

 

훌륭한 누드모델을 구하기 위해 미국 신문에 구인 광고를 낼 정도로

이방인 누드에 빠져 미국 대륙을 횡단하고 다녔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벌거벗은 인간을 노래한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이라는 당연한 이치지만, 세상의 주목은 받지 못했다.

아니, 운이 따르지 않았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우리나라 광고의 시대적 흐름이나 세대교체에 일거리도 점차 잃게 된 것이다.

돈 버는 족족 작업에 쏟아부어 남은 것도 없겠지만, 문제는 아내의 반역이었다.

미국에서 촬영하고 돌아오니, 아내가 말도 없이 이사를 간 것이다.

 

나중엔 아내가 운영하는 동대문시장 옷가게에 물건 실어주는 일을 돕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만나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문제는 그 무렵에 이창남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결심한 속내야 어찌 알겠냐마는 한 작가의 삶의 비애를 목도하는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업보가 아니라, 돈이 원수다.

부디 저승에서나 돈에서 해방되어 즐겁게 사시길 바랍니다.

 

괜히 조기사 신세타령에 이창남씨 이야기가 나와 짠해지네.

조기사야 사모님 모시는 걸 즐기지만, 아마 그는 힘들게 모신 것 같다.

 

누가 뭐래도 난 축복받은 인생이 틀림없다.

평생 하고 싶은 일 해가며 꼴리는대로 살았으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

돈이 없어도 전혀 불편하지도 않다. 역설로 없어서 더 편하다.

돈 많으면 저승 갈 때 택시라도 태워준다더냐?

 

그러나 단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아들 햇님이 문제다.

십여년동안 정의당에서 약자의 권익을 위해 일해 왔는데, 가장으로서 생계는 책임져야 할 것 아닌가?

,생계난과 약자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직접적인 방법은 구의원이 되는 길 뿐이었다.

거대 양당의 공천만 받으면 사기꾼도 당선되는 정치판 사정을 익히 알았으나,

4년 전 지방선거에서 근소한 차이로 낙선한 것을 지켜보며 희망을 가진 것이다.

다시 4년동안 주민을 위해 최선을 다했으니, 올해는 당연히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선거결과는 참담했다. 4년전 지방선거보다 더 적은 지지를 받아 할 말을 잃어 버렸다.

 여덟 명이 출마한 은평 라선구는 민주당에서 두명 공천하고 국민의 힘에서 두명 공천했는데,

민주당에서 두명 당선되고 국민의 힘에서 한 명 당선된 것이다.

4위도 국민의 힘에서 가져갔으니, 결국 5위로 밀려 난 셈이다.

 

투표 결과는 사람 위주가 아니라 당이 좌지우지했다.

한 예로 지난번 민주당 공천으로 당선된 오모 후보가 이번엔 공천을 받지못해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고작 오백여표를 얻어며 순위에서 한 참 밀려나 버렸다.

낙선한 아들의 실망감보다, 후원하고 지지해 주신 분들 뵐 면목이 없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거대양당의 공천을 받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인 것이다.

주민을 위해 열심히 일하거나, 평등이나 정의같은 건 아무 소용 없었다.

민심과 표는 떠도는 바람과 같을 뿐이었다.

 

머리 아픈 선거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아들 놈은 젊기나 하지만, 늙은이가 바쁘게 사는 것은 다들 이해하지 못한다.

 돈도 벌지 못하면서 혼자 바쁜, 나 역시 믿기질 않았다.

몸이 변덕을 부릴 때는 죽는 날을 예견할 정도로 힘들어 하지만

자꾸 거짓말이 되어, 이제 정동지도 믿지 않는다.

 

툭! 손만 대면 넘어갈 것 같으나, 한번 물면 죽어도 놓지 않고,

무슨 일을 벌이면 날밤을 까더라도 해치워야 잠이 온다. 일편 단심 민들레다.

대개의 노인들이 공짜 지하철 타고 다니며, 

탑골공원에서  장기판 훈수나 두는 현실에, 할 일이 많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감히, 카메라와 대마를 내려주신 신의 은덕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무관세음보살~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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