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단체 연합 “약자와의 동행은 허구” 비판

 

오세훈 서울시장이 약자와의 동행을 강조하며 노숙인 쪽방촌 지원방안을 공개한 가운데 관련 시민단체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라며 서울시를 향해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사진은 2022홈리스주거팀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헤랄드경제/ 이영기 기자]

 

[헤럴드경제=김용재·이영기 기자]

 

오세훈 서울시장이 ‘약자와의 동행’을 강조하며 노숙인 쪽방촌 지원방안을 공개한 가운데 관련 시민단체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라며 서울시를 향해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노숙인·쪽방촌 관련 시민단체 연합인 ‘2022홈리스주거팀’은 12일 서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서울시의 노숙인·쪽방촌 관련 현실적인 지원방안과 오 시장과의 면담을 촉구했다.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활동가는 “오 시장이 취임 후 첫 행선지로 창신동 쪽방촌을 찾고 3대 지원방안을 발표했지만 현재 쪽방주민들이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엔 미흡하다”며 “쪽방이라는 물리적 환경의 개선이 필요하다. 약자와의 대화 없는 약자와의 동행은 허구다”라고 비판했다.

 

서울시가 발표한 3대 지원방안은 ▷쪽방주민 무료식사 지원 동행식당 운영 ▷노숙인 급식확대 ▷쪽방촌 에어컨 설치 및 여름용품 지원 등이다. 열악한 주거환경으로 인해 폭염에 고스란히 노출된 사람들을 위한 대책이지만, 2022홈리스주거팀은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12일 오전 서울시청 정문 앞에서 열린 ‘노숙인·쪽방 주민을 위한 3대 지원방안 비판 및 오세훈 서울시장 면담 요청 기자회견’. 사진 출처 : 뉴스클레임(https://www.newsclaim.co.kr) 김동길 기자

홈리스행동은 전날 입장문을 내고 오 시장의 3대 지원방안과 관련해 “홈리스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미흡하다”라며 “폭염대책은 쪽방의 물리적 환경 개선 없이 불가능하다. 적정 면적의 임대주택 제공을 지속 요구해왔으나 이번 대책에 언급은 없었다”고 했다.

 

이들은 근본적인 주거환경 개선을 요구 중이다. 쪽방촌을 공공주택지구로 지정해 임대주택 등을 빠르게 공급하고 개발 과정에서 주거민들이 외면받지 않도록 세부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종만 양동쪽방주민회 부위원장은 “현재 1인 최소 생활 면적 기준인 14㎡는 2021년 기준”이라며 “서울시에 18㎡으로 올려달라고 여러 차례 건의했고 선거 때도 직접 말했지만, 답변을 받지 못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김영국 동자동공공주택사업추진주민모임 위원장 역시 “동자동 쪽방촌은 공공주택지구로 발표는 됐지만, 실제로 지구지정은 이뤄지지 않아 거주민들이 속만 끓이고 있다”며 “정치권이 하루 빨리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아르노 피셔_동베를린의 사진가

Arno Fischer_A Photographer in East Berlin

아르노 피셔展 / Arno Fischer / photography 

 

2022_0623 ▶ 2022_0821 / 월요일 휴관

 

아르노 피셔_뉴욕 New York_27×40cm_1984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주최 / 성곡미술관_독일국제교류처

기획 / 마티아스 플뤼게

협력 / 주한독일문화원

 

진행

성곡미술관 / 이수균(학예연구실장)

윤현정(학예연구사)_황수진_이시연(학예인턴)

행정운영 / 김윤지(팀장)

기술 / 김혁주(소장)

독일국제교류처 / 알렉산더 리제브스키

 

입장료 / 일반(만 18-64세) 10,000원

청소년(만 13-17세) 7,000원 / 어린이(만 4-12세) 5,000원

만 65세 이상, 장애인, 국가유공자 8,000원

 

도슨트 / 매일 02:00pm, 04:00pm(주말 포함)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입장마감_05:30pm / 월요일 휴관

 

성곡미술관

SUNGKOK ART MUSEUM

서울 종로구 경희궁길 42(신문로 2가 1-101번지) 1,2관

Tel. +82.(0)2.737.7650

www.sungkokmuseum.org

 

성곡미술관은 독일 사진사의 상징적 인물인 아르노 피셔(Arno Fischer, 1927~2011)의 개인전을 개최한다. 동독 출신인 피셔의 이번 전시는 베를린 장벽이 건설되기 직전인 1953년부터 장벽이 무너진 1989년을 거쳐, 피셔가 세상을 떠난 2011년까지 그의 전 생애를 아우르는 회고전으로, 젤라틴 실버프린트 117점과 폴라로이드 66점으로 구성된다. ● 베를린 베딩(Wedding)에서 태어난 피셔는 패턴 제작 목공 견습생으로 시작해 조각가가 되기 위해 1947년부터 6년간 동서 베를린에서 조각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사진을 접하고, 곧 조각 학교를 중퇴했다. 그는 카메라를 메고 자신의 고향인 베를린의 구석구석을 탐험하며 약 7년 동안 동서 베를린의 평범한 일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 습작 같은 사진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베를린의 생생한 모습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베를린의 동서 분단 이후 그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아르노 피셔는 1950년 본격적으로 사진가 일을 시작했고, 1966년부터 그의 동반자이자 사진가인 지빌레 베르게만(Sibylle Bergemann, 1941-2010)과 함께 28년간 거주한 그들의 12번지 쉬프바우어담 아파트는 새로운 예술의 토론장이 되었다. 그는 당시 가장 혁신적인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헬무트 뉴튼, 로버트 프랭크, 바바라 클렘, 엘렌 아우어바흐와 같은 국제적 사진가들을 초대해 진정한 인간의 자유에 관해 토론하며 그들을 선도했다. 또한 그는 라이프치히, 베를린, 도르트문트의 대학에서 교육자로서 사진과 디자인을 가르치며, 동서독의 3세대 사진 예술가들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아르노 피셔_서베를린, 5월 1일, 티어가르텐 West Berlin, 1 May, Tiergarten_27×40cm_1959

아르노 피셔의 사진은 대부분 처음부터 끝까지 독일민주공화국(GDR) 시기와 맞물려있다. 작가는 1950년대 '분단된 베를린의 사진'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는데, 특히 동서 베를린의 사회, 문화, 정치적 상황을 기록한 사진은 '베를린 상황'이라는 타이틀로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GDR의 여성패션 잡지 '지빌레(Sibylle)'의 일원으로 일하며 패션 사진에도 큰 관심을 보였고, 여행 사진가로도 일하며 뉴욕, 아프리카, 인도에서 찍은 사진 시리즈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이번 전시는 '베를린 상황', '패션', '뉴욕', '여행' 과 노년의 자신의 집 정원을 찍은 폴라로이드 연작인 '정원' 등 총 5개 파트로 구성된다. ● 이 전시는 독일국제교류처 주최로, 사진 역사학자이자 피셔와 절친한 사이였던 마티아스 플뤼게(Matthias Flügge)가 기획을 맡았다. 피셔의 사진은 독일의 전쟁, 분단과 통일을 모두 목격한 예술가의 눈에 비친 '독일인'과 '독일 문화'의 생생한 증언이자 굳건한 삶의 기록으로 지난 역사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역사적으로, 그리고 예술적으로도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예술가이자 교육자로서 자신의 삶과 예술을 굳건히 지켜온 피셔의 작품은 여전히 분단국으로 남아있는 우리에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사회적, 정치적 이념을 뛰어넘은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보통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도 겹쳐 보이며, 그의 사진이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사진예술이 우리의 일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리라. 디지털 프린트에 익숙한 우리 눈에 작가의 손으로 프린트한 '진짜 사진'의 맛을 즐길 수 있는 특별한 기회이기도 하다. ■ 성곡미술관

 

아르노 피셔_뉴욕, 스태튼 아일랜드 선착장 New York, Staten Island Ferry_27×40cm_1978

아르노 피셔의 사진  "위대한 것은 많으나 인간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 (소포클레스, 안티고네) ● 아르노 피셔는 종종 '가장 유명한 무명 사진가'로 묘사된다. 그런데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누군가에겐 알려지고, 다른 누군가에겐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20세기 후반의 사진사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진가로서 아르노 피셔의 중요성을 알고 있으며, 그의 사진은 동독을 뛰어넘어 최고의 존경을 받는다. 그는 삶의 대부분을 동독에서 보냈고, 사진 작업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다. 사진이 온전한 예술 매체로 인정받지 못했던 시절에 그는 사진 그 자체의 특성과 함께, 사진이 고유한 예술 장르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을 이어갔다. 그런데도 피셔는 늘 그의 작품을 전시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198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는 동베를린에서 자신의 첫 회고전을 열었다. 그 무렵 그의 전 작품 세계가 완성되었고, 라이프치히 미술대학에서 영향력 있는 교수로서도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그는 지성인으로서 정치, 경제, 종교 등 모든 기성의 권력에 맞서는 아방가르디스트였다. 오늘날에는 드물지만, 비교적 늦게 대도시로 부상한 베를린에는 지난 2세기 동안 피셔와 같은 예술가들이 넘쳐났다. 피셔는 가식적이지 않고, 대의에 헌신적이며 역경에 쉽게 굴하지 않는, 지혜롭고 풍부한 공감 능력을 갖춘 예술가였다. 그의 사진에서 엿볼 수 있듯, 피셔의 유머에는 삶의 지혜가 배어 있다. 그러나 피셔의 유머 감각과 멜랑콜리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서, 그의 사진은 항상 멜랑콜리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작품은 순간을 포착하며, 동시에 삶의 덧없음을 환기시킨다. ■ 마티아스 플뤼게

 

아르노 피셔_마를레네 디트리히, 모스크바 Marlene Dietrich, Moscow_빈티지 프린트_37×25cm_1964

1. 베를린 상황 ● 아르노 피셔만큼 황폐한 대도시 베를린의 문화적·정치적 상황을 예리하게 관찰해 밀도 높은 사진으로 담아낸 작가는 찾아볼 수 없다. 피셔는 당시 절망과 새로운 시작에 대한 희망 그리고 현실과 프로파간다 사이를 오가던 시대정신을 섬세하게 포착했으며, 특히 개인과 사회의 간극에 관심을 가졌다. 1953년부터 피셔는 '공화국 탄생일', 즉 동독 건국일 행사를 비롯한 서독의 추방자 모임과 같은 다양한 정치적 시위나 집회에 참석하며, 약 10년 동안 동서로 분단된 베를린의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피사체를 놀이공원, 스탈린 거리를 따라 늘어선 공사장, 서독의 '경제 기적'으로 과시적 소비 행위를 즐기던 쿠어퓌르스텐담 거리에서 찾아냈다. 여기서 피셔는 치밀하게 짜인 화려한 장면보다는, 연출이 실패로 돌아가 그 실체가 있는 그대로 드러난 변두리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2. 뉴욕 ● 아르노 피셔는 1978년과 1984년 두 번에 걸쳐 뉴욕을 여행한다. 두 번째 뉴욕 여행에서 피셔는 방대한 양의 사진을 찍었으며, 당시 촬영한 사진들을 엮은 『뉴욕. 풍경』사진집은 1988년이 되어서야 출간되었다. 하이너 뮐러가 쓴 사진집의 서문은 '인류가 저지른 막대한 실수 중 하나인 뉴욕은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장소이다. 세상에 위대한 것이 제아무리 많다 해도, 사람보다 위대한 것은 없다.'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피셔의 사진들은 종말론을 연상시키는 뮐러의 관점을 따르지 않았다. 피셔는 뉴욕이라는 대도시가 품고 있는 사회 상황을 사진에 고스란히 담고 있을 뿐, 그는 어떠한 편견에도 사로잡히지 않았다. 그는 시간을 들여 대상을 간결하면서도 정교하게 관찰했으며, 그렇기에 감탄과 열광이 사진에 묻어 있으나 그 감정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다. 또한 피셔는 다양한 인상 가운데 자신의 선택적 시선을 통해 작업을 선별해냈다. 이렇게 탄생한 사진은 피사체와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친밀감을 느끼게 만드는 '스트리트 포토그래피'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3. 여행 ● 『길가에서』는 아르노 피셔가 여행 중에 찍은 사진을 전시하기 위해 지은 제목이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이 길가의 여정은 동구권 국가들이 주를 이루었으나, 서유럽과 인도, 아프리카 등을 비롯한 여러 국가를 포함한다. 피셔는 이 보도 사진들을 잡지에 실을 뿐만 아니라 『폴란드의 수도』(1974), 『레닌그라드』(1981), 『뉴델리, 올드 델리』(1983)와 같은 도시의 인상적인 풍경을 담아 일련의 사진집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피셔는 여행 사진을 찍을 때도 마찬가지로 대상을 지각하는 창조적 매개체로서 사진을 활용한다는 자신의 원칙을 따랐으며. 이국적인 묘사나 그림 같은 풍경으로 비치는 것을 가급적 멀리했다. 그럴수록 피셔는 예리한 관찰자이자 이야기꾼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그는 사람과 그들의 일상적인 삶과 경험을 무엇보다 우선시했기에, 이들이 촬영된 장소는 그에게 있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아르노 피셔_동베를린, 쇠네펠트 공항 East Berlin, Schönefeld Airport_빈티지 프린트_40×30cm (출처_지뷜레 1968, 1월)

4. 패션 ● 1962년 아르노 피셔는 동독 여성 패션잡지 '지빌레'를 통해 자신의 새로운 작품을 선보인다. '지빌레'는 당시 동독의 문화적인 열망에 부응하는 몇 안 되는 동독 잡지 중 하나로, 그는 패션 사진을 찍을 때도 여전히 자신의 작업 방식을 고수했다. 피셔는 사람들에게 친숙한 장소로 나가 멋진 옷을 걸친 여성 모델들을 세워두고 촬영을 진행했다. 주로 전쟁의 흉터가 남아 있는 잿빛 거리나 광활한 광장, 베를린의 공업 지대에서 촬영했으며, 심지어 재난 지역인 비터펠트 화학 공장을 배경으로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들은 이상적인 모습을 연출하기에 적합한 장소는 아니었다. 이상적이라고 하기에 피셔의 패션 사진 속 모델은 현실 속 모습보다 조금 더 우아하고, 그들의 옷차림은 평소 거리에서 보던 차림새보다 조금 더 아름다워 보일 뿐,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사진이었다.

 

5. 정원 ● 1978년 아르노 피셔와 그의 아내 지빌레 베르게만은 베를린에서 북쪽으로 약 70km 떨어진 곳에 소박한 농가를 구입한다. 둘은 그곳에서 정원을 가꾸었으며, 그 후로 이곳은 식물이 무성하게 자라는 예술가의 정원으로 거듭났다. 피셔는 정원 한 모퉁이에서 언제나 SX 70 폴라로이드로 식물과 뿌리의 부분, 돌, 각종 공구와 가구 같은 평범한 것들을 담아냈다. 성장과 소멸의 영원한 순환이라는 주제는 피셔가 약 30년에 걸쳐 찍은, 날짜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무수히 많은 폴라로이드 사진에 반복해서 나타났다. 2007년 폴라로이드 필름 제작이 중단되어 정원 연작을 마쳐야 했을 때, 그는 이 사적인 사진들을 일부 선별하여 공개했다. 그는 촬영 시점이나 사진의 순서를 고려하지 않은 채 폴라로이드를 세 장씩 묶어 '삼면화'를 제작했으며, 이후 정원 사진은 많은 곳에서 전시되었고, 책으로도 출판되었다. ■  

 

 특별 강연회: 박상우(서울대학교 미학과 부교수)

 강연1: 스트레이트 포토그래피의 역사  

   7월 9일 (토) 2PM 성곡미술관 2관

 강연2: 독일 사진의 역사  

   7월 16일 (토) 2PM 성곡미술관 2관

Sungkok Art Museum presents a photography exhibition of Arno Fischer (1927-2011), an East German photographer and an iconic figure in the history of German photography. Covering his entire career as a photographer, from 1953, before the Berlin Wall was built, through 1989, the year of the Berlin Wall's fall, to 2011, the year of his death, the exhibition introduces over 180 photographs including several vintage prints and Polaroid pictures. ● Born in Wedding, Berlin, Fischer began as an apprentice carpenter training in skills such as wood patternmaking, and then studied sculpture at art schools in both East and West Berlin for six years from 1947 with the aim of becoming a sculptor, before he discovered photography and dropped out of art school. He then explored every corner of his hometown Berlin with his camera, capturing scenes of everyday life in East and West Berlin in his photographs over a period of around seven years. Later, when Berlin was divided into East and West, the pictures that he had taken for practice became recognized for their historical value, since they encapsulated vivid images of Berlin in the immediate aftermath of World War II. ● After earnestly starting his career as a photographer in the 1950s, he spent the next 28 years from 1966 with his partner, photographer Sibylle Bergemann, hosting gatherings of innovative artists to discuss new art in the couple's apartment at Schiffbauerdamm 12. Fischer was always the one to lead such discussions, which involved many photographers from the GDR and around the world, such as Henri Cartier-Bresson, Helmut Newton, Robert Frank, Barbara Klemm, and Ellen Auerbach. Furthermore, Fischer taught photography and design as a professor at universities in Leipzig, Berlin, and Dortmund, which greatly influenced three generations of photographers in both East and West Germany. ● Throughout most of his career, Fischer's photographs featured life in East Germany, or the German Democratic Republic (GDR). In the 1950s, he began to gain recognition with his photographs of a divided Berlin, which became well-known as a series of photographs titled Situation Berlin that documented the social, cultural, and political situation in both East and West Berlin. Fischer later showed an interest in fashion photography by working for Sibylle, a women's fashion magazine in the GDR, while also building a reputation as a travel photographer through works depicting faraway locations such as New York, Africa, and India. As such, this exhibition consists of five parts, each themed after Situation Berlin, fashion, New York, travel photography, and Polaroid photographs that captured the garden of his house in his later years. ● This exhibition is hosted by ifa(Institut für Auslandsbeziehungen), a representative organization for international cultural relations founded to promote German culture around the world, curated by Matthias Flügge, a historian of photography who was also a close friend of Arno Fischer, and in collaboration with the Goethe-Institut Korea. As a vivid testimony to the vibrance of the German people and German culture as witnessed by an artist who experienced both the division and reunification of Germany, Fischer's photographs certainly breathe life into the history of a bygone era. His works may also be particularly evocative for the Korean people, who continue to live under national division, finding parallels in Fischer's legacy of fighting for his life and artistry as a photographer and educator throughout Germany's turbulent history. His photographs subtly resonate with modern viewers and allow them to empathize with ordinary people captured in the photographs, who sought to live their ordinary lives beyond the boundaries of social and political ideologies. This is truly demonstrative of the close and inalienable connection between photography and our everyday lives. As we find ourselves inundated with digital images in the modern age, the exhibition also represents a special opportunity for us to experience and appreciate "real photographs" hand-printed by the artist himself. ■ Sungkok Art Museum

ARNO FISCHER'S IMAGES ● "Many are the wonders, and none more wondrous than man" (Sophocles, Antigone) Arno Fischer has occasionally been described as 'the best known unknown photographer'. But what does that mean? Known to whom? Unknown to whom? And why? Anyone reasonably familiar with the history of photography in the second half of the 20th century is aware of Arno Fischer's significance, and his work commands the utmost respect well beyond the confines of East Germany. Most of his life Fischer has worked and taught in the GDR. At a time when photography was seen as a medium of limited artistic value, he campaigned tirelessly for the recognition of photography as an artistic genre in its own right and with its own character. But for all this, he has always been strangely reluctant to exhibit his work. It was not until 1985 that he agreed to a first retrospective exhibition in East Berlin. By that time the bulk of his oeuvre was complete, and Fischer, a professor at the Leipzig Academy, was far more than just an influential teacher. Then as now he was an authority, an independent mind, intellectually on the left and therefore inclined to mistrust all powers, be they political, economic or religious. A rarity these days, Fischer is the kind of artist that used to crop up time and again in the belated metropolis Berlin over the last 200 years: unpretentious, completely devoted to his cause and not easily deterred by adversity, worldly wise and full of empathy for people. His sense of humour is tinged with wisdom, and every once in a while we catch a glimpse of it in his pictures. Yet, humour and melancholy are but two sides of the same coin, and Fischer's photographs always seem suffused with an aura of melancholy. They capture the moment, but they also evoke the transience of life. ■ Matthias Flügge

1. Situation Berlin ● More than any other photographer, Arno Fischer succeeded in finding highly atmospheric and acutely observed images for the cultural and political situation of the ravaged metropolis of Berlin. With great sensitivity he captured the spirit of the era, oscillating as it did between depression and hope for a new beginning, reality and propaganda. He was particularly intrigued by the rift between the individual and society. From 1953, for a period of almost ten years, he took pictures in the eastern and western sectors of the divided city. He attended political demonstrations and rallies such as those accompanying the 'Birthday of the Republic' in the East as well as a meeting of expellees in the West. He found his subjects on fairgrounds, on the building sites along the Stalin Boulevard and on the Kurfürstendamm, where the West German economic miracle began to flaunt the joys of consumerism. Fischer tended to steer clear of carefully orchestrated pomp and circumstance, focusing instead on the fringe of events, where the careful staging peters out and masks are dropped.

2. New York ● In 1978 and 1984 Arno Fischer travelled to New York. The second trip yielded a substantial body of work, which was eventually published in 1988 in the book New York. Ansichten ('New York. Views'). The introduction by Heiner Müller ends with the words: 'Before we die, we should see New York, one of the great errors of the human race. MANY ARE THE WONDERS, AND NONE MORE WONDROUS THAN MAN.' Müller's apocalyptic perspective finds no echo in Fischer's photographs. Inevitably the pictures capture the enormous social contrasts that characterise the city. But Fischer had no preconceived agenda; his unhurried, succinct and keenly observed pictures bear witness to his sense of wonder and his fascination, but never let it take centre stage. Fischer screened the wealth of impressions through the filter of his selective gaze. The resulting pictures are street photography in the best sense of the term – detached and familiar in equal measure.

3. By the Wayside ● 'By the Wayside' was the title of an exhibition of pictures taken during Arno Fischer's travels. From the 1960s, his journeys took him to many different countries, chief among them those of the Eastern Bloc, but also Western Europe, India and Africa. Fischer not only published reportages in magazines but also a series of striking illustrated books: Poland's Capitals (1974), Leningrad (1981) and New Delhi, Old Delhi (1983). Abroad, as at home, he stayed true to his principle of using photography as a creative medium of perception, largely eschewing the exotic and the picturesque in favour of subtle observation and narrative. Arno Fischer's overriding concern has always been for people, their everyday life and basic experiences, which renders the location of the shots almost irrelevant.

4. Fashion ● In 1962 the magazine 'Sibylle' began to offer Arno Fischer a new platform for his work. Sibylle was one of the few magazines in the GDR that lived up to its cultural aspirations. Arno Fischer remained true to his individual styles even when he worked on fashion shoots. He photographed women wearing clothes at locations that were familiar to the audience: the grey streets with their war-scarred facades, the vast squares and the industrial zones of Berlin, he even shot in the disaster area of the Bitterfeld chemical plant. These locations did not lend themselves to staging pictures of unattainable ideals; they were real, even if the women were a little bit more elegant, their clothes a little bit more beautiful than what met the eye in the street every day.

5. The Garden ● In 1978 Arno Fischer and Sibylle Bergemann acquired a modest farm house some seventy kilometres north of Berlin. They planted a garden which has since grown into a prolifically exuberant artist's garden. Here, in his corner of paradise, Fischer has always worked with a Polaroid SX 70 camera. The pictures focus on the unspectacular: details of plants and roots, stones, tools and furniture. The eternal cycle of growth and decay became the leitmotif of the countless undated pictures taken over a period of some thirty years. Not until 2007, when Polaroid film finally went out of production and the series had to come to an end, did Arno Fischer exhibit a selection of these highly private pictures. Ignoring their chronological context, Fischer arranged them into triptychs that have since been widely exhibited and published in a book. ■  

 Lecture Programs   PARK Sang Woo(Associate Professor of Aesthetics, Seoul National University) Lecture 1: Concerning: Straight Photography   On Saturday 9 July 2022 at 2PM / Sungkok Art Museum Building2 Lecture 2: A History of Photography in Germany   On Saturday 16 July 2022 at 2PM / Sungkok Art Museum Building2

 

Vol.20220623c | 아르노 피셔展 / Arno Fischer / photography

검은 깃털 Shades of Furs

노순택展 / NOHSUNTAG / 盧純澤 / photography 

 

2022_0622 ▶ 2022_0717 / 월요일 휴관

 

노순택_검은 깃털 Shades of Furs #CGC2401_오쇠리 Osoe-ri_Ed. 1/9_ 장기보존용 잉크젯 안료 프린트_162×108cm_2016

 

노순택 홈페이지_suntag.net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학고재 본관

Hakgojae Gallery, Space 1

서울 종로구 삼청로 50

Tel. +82.(0)2.720.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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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고재 오룸Hakgojae OROOMonline.hakgojae.com

 

아아 오오 우우 * ● 노순택의 사진을 이해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느낄 때면, 2004년 그의 첫 개인전과 더불어 출간된 동명의 책인 『분단의 향기』를 펼쳐보곤 한다. 이 작고 어두운 책은 실로 분노와 절망과 울분과 조소로 가득하다. 아스팔트 바닥에서 서로의 손을 잡고 어깨걸이를 하며 버티는 이들, 확성기를 들고 그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위협하는 이들, 갑각류처럼 동그란 헬멧을 쓴 채 방패와 곤봉을 들고 까맣게 몰려드는 젊은이들, 텅 빈 눈으로 그들을 응시하는 노인들, 그리고 이제는 어디에 떠다니고 있는지 모를, 그때의 축축한 열기와 함성들. ● 즉 『분단의 향기』는 작가 노순택을 구성하는 일종의 유전자 지도와도 같다. 한 사진가의 손과 발, 눈과 입, 머리카락과 얼굴이 어떤 모습으로 마구 웃자라게 될 것인지, 그 뒤엉킨 덩어리가 어떻게 '작가 노순택'이라는 기묘한 이름을 얻게 될 것인지, 그리고 그가 특유의 긴 한숨을 내쉬며 걸어갈 좁고 구부러진 길의 풍경은 어떠할지에 대한 대략의 이정표가 이 책에는 있다. 예를 들어 세 개의 작은 연작으로 구성된 책의 두 번째 부분인 『아이들은 열네 살이었다』에 등장하는 두 소녀의 영정 사진은, 훗날 노순택이 『망각기계』에서 집요하게 찍는 광주 망월동 구묘역에 방치된 시민군의 영정들에 가닿을 것이다. 매향리 들판에서 벌어지는 주민들과 전경들의 긴장감을 찍은 사진은 대추리의 강제진압 장면으로 훨씬 잔혹하게 도래할 것이다. 이 책의 지면에는 『붉은 틀』, 『얄읏한 공』, 『비상국가』 등 훗날 그의 여러 문제작으로 자라날 가능성을 지닌 몇 장의 사진들이 마치 흩뿌려진 씨앗들처럼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 물론 날것의 사진 몇 장을 대면한 우리가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작가 자신에게도 가능하지 않다. 단지 우리는 짙은 안개가 드리운 과거와 현재라는 시공간 안에서 불완전한 주름과 뿌리들을 더듬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 허수경, 「저 나비」, 『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사, 1992.

 

노순택_검은 깃털 Shades of Furs #CGK1001_키갈리 Kigali_Ed. 1/9_ 장기보존용 잉크젯 안료 프린트_108×162cm, 108×72cm_2016

노순택은 처음부터, 대체로, 어둠에 관심이 있었다. ● 『분단의 향기』가 말해주지 못하는 일들도 물론 적지 않다. 이를테면 지금 우리가 머무르는 이 세계에서 노순택이 맡은 배역 같은 것이다. 이곳에서의 그는 사진가로서는 처음으로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했으며, 국내외에서 크고 작은 전시에 참여하고 여러 비엔날레에 이름을 올린 작가다. 한때는 이런 이름들을 그의 정신과 성취에 대해 주어진 어떤 트로피처럼 설명하려 하기도 했었다. 그가 지녀 온 첨예한 정치성과 독특한 미학적 성취를 동시대 미술관이 인정하여 그를 주목하고, 순순히 자리를 내어주었다는 식이었다. ● 분명 이런 말에는 일정량의 진실이 깃들어 있다. 과연 동시대 미술의 세계가 그렇게 정직하고 투명한 것인지를 묻는 순박한 질문을 피해갈 수 있다면 말이다. 이런 가설은 특히 거리에서 생산된 수많은 이미지들 중에서 유독 이 뒤틀린 사진들이 미술관과 비엔날레를 잇는 수로에서 아주 잘 흘러다니고 있는지 설명하고 싶을 때 잘 들어맞는 것이기도 하다. 즉 이후의 노순택이 찍어낼 사진들이 다큐멘터리 사진들의 가장 진화된 형태라는 언술은, 그의 작업과 사진 일반에 대해 쏟아지는 적지 않은 질문에 대한 잠정적인 답을 제공한다. ● 예를 들어 노순택이 보여주었던 놀라운 기예가 있다. 수천수만 대의 카메라가 존재했을 2016년 촛불집회의 현장에서 오직 그만이 찍어내는, 다른 이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이미지들이 있었다. 다른 카메라들이 만들어낸 것들은 대체로 아주 뜨겁거나 너무 차갑거나 했고, 대체로 어렵지 않게 분류가 가능했다. 하지만 노순택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리듬으로 낮고 빠르게 움직이며 괴이하게 뒤틀린 시간의 단면들을 날카롭게 베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사진 속에는 하얗게 빛나는 플래쉬 불빛에 맞은 이들이 웃는 듯 우는 듯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채로 동결되어 있었고, 프레이밍은 지나칠 정도로 빠르고 정교했다. ● 이런 괴이한 이미지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역량은, 아마 노순택이 지닌 불안과 모순이 그에게 내린 착란에서 나왔을 것이다. 『분단의 향기』를 작업할 무렵, 그는 몇몇 글에서 '간단한 사실과 명확한 예측'이라는 표현을 쓰곤 했다. 이를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다. 이 끈질기고 순박한 농투성이들의 삶을 파괴하는 것은 무엇인가? 분단이다. 분단을 핑계로 고삐에서 풀려난 국가 폭력이다. 그 배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미국이다. 혹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열강들의 역학 관계다. 이것은 적지 않은 근거를 지닌 '간단한 사실'이다. 이를 막지 못하면 폭력은 지속될 것이다. 이것이 '명확한 예측'이다. 그러나 이후의 노순택은 점점 '간단함'과 '명확함'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지난 십여 년간 그의 글을 지배하는 구절과 단어는 대략 이러하다. '사라지는 확신, 피어오르는 의문', '불협화음', '석연치 않음', '모순', '머뭇거림'.

 

노순택_감 Black Persimmon #CHM1201_삼송리 Samsong-ri_Ed. 1/9_장기보존용 잉크젯 안료 프린트_54×81cm×2_2017

『검은 깃털』은 어떤 어둠에 대한 연작이다. 이 어둠은 검은 비단처럼 아름답거나 지느러미처럼 우리를 부드럽게 휘감지 않는다. 그저 날카롭고 예리한 파편으로, 무엇을 찍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의미의 공백으로 프레임에 자리한다. 찍힌 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중인지 사진을 보는 우리는 알 수 없다. 즉 이것은 노순택의 작업 중에서도 가장 석연치 않고, 모순적이며, 모호하다. ● 사실 어둠과 실루엣이 주는 낯선 시각적 쾌감을 좋아하는 이들은 대체로 아마추어 사진가들이다. 작업노트에 그가 여과 없이 썼듯이, 『검은 깃털』은 작가 노순택이 뿌리내리고 있는 곳이 아마추어 사진의 토양이지 동시대 미술의 영토가 아니라는 것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즉 사진적 기예에 감탄하는 것은 사실 아마추어 사진의 태도다. 이 말은 물론 아마추어 사진이나 노순택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다. 사진의 역사는 언제나 아마추어들의 욕망과 기술적 성취에 의해 견인되어 왔다. 이 아마추어들은 카메라라는 기계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 아아 하는 이들이며 때로는 그 이미지에 홀려 오오 우우 하는 이들이다. ● 『검은 깃털』은 자못 미술 전시장의 풍습에 익숙한 척하는 우리가 사진이 동시대 예술이 되기 위해 잘라서 버려야 한다고 믿던 허망한 사진적 기예의 무더기다. 이는 역광이 성립할 것인지에 대한 빠른 노출 판단, 정밀하고 날렵한 포커싱과 프레이밍, 그럼에도 잘 되지 않은 장면에 대한 후보정까지 포함한다. 동시대 미술관에 자신의 자리가 있는 작가 노순택이 그 무망한 기술들을 가장 능란하게 구사하는 모습은 왠지 우스꽝스럽지만 한편으로는 청량하고 즐겁다. 그도 우리도 결국 아아 오오 우우 하는 이들 사이에서 비롯한 것이다. ● 역설적으로 『검은 깃털』과 『분단의 향기』를 포개어보는 것은, 노순택의 윤곽을 조금 더 정교하게 그려보는 데 유효한 듯하다. 어쩌면 지금 노순택을 이해하는 것은, 그를 경유하여 사진이 지닌 이상한 속성들을 이해하고 싶어 했던 몇 년 전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노순택은 가장 명확한 정치성을 지녔던 초기작인 『분단의 향기』에서도 끊임없이 카메라를 돌려서 어둡고 모호한 실루엣을 함께 카메라에 담으려 한다. 오십칠 쪽의 전경들이나, 구십삼 쪽의 미군들이나, 백오십칠 쪽의 알 수 없는 여성이 그 좋은 예다.

 

노순택_검은 깃털 Shades of Furs #CHL0401_서울 Seoul_Ed. 1/9_ 장기보존용 잉크젯 안료 프린트_162×108cm_2017

하나의 연작이 되어 도래한 『검은 깃털』을 보기 전에는 첫 책의 곳곳에 삽입된 검은 실루엣들이 그저 독자에게 잠깐의 쉴 구멍을 제공하는 매체 사진가의 습관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검은 깃털』의 존재로 인해 『분단의 향기』가 지닌 구조는 더욱 명료하고 단단해진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것은 몸에 덕지덕지 글자들을 붙인 나이 든 해병대원의 사진으로 시작해서 (작가가 백령도에서 찍었다고 주장하는) 알 수 없는 실루엣으로 끝나는 책이다. 즉 노순택은 처음 시작하는 순간부터 '간단하고 명확한' 것과 '석연치 않고 모순된' 것에 함께 끌리는 사진가였으며, 아마추어 사진의 기예를 통해 이 두 가지를 묶어내려 했던 듯하다. ● 즉 『검은 깃털』은 노순택의 한쪽 경계에 해당하는 작업이다. 반대쪽 경계에는 『애국의 길』이나 『붉은 틀』처럼 비교적 명료하고 정치성이 강한 연작들이 놓인다. 노순택은 이 경계들 사이에서 진동하면서, 정교한 사진적 기술과 섬세하게 단련된 손놀림을 통해 자신의 작업이 지닌 의미를 복잡하게 교란한다. 즉 『붉은 틀』을 대면했을 때조차도 우리는 작가가 북한의 아리랑 집체극을 멋있다고 생각하는지 징그럽다고 생각하는지 쉽게 식별할 수 없다. 『애국의 길』에서도 노순택이 제시하는 사진 이미지만으로 우리는 그가 거리의 늙은 우파들을 우스꽝스럽게 여기는지 연민하는지를 알아내기란 어렵다. 그저 그 이미지에 비친 자기 자신의 욕망과 두려움만을 발견하게 될 뿐이다. 『검은 깃털』 역시 마찬가지다. 이 어둠 안에 놓인 정치적 비판 의식을 찾아내고 싶어 하는 우리는 사진 이미지 속을 오래도록 헤매게 될 것이다. ● 이것은 꽤 긴, 장기전의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아 오오 우우 하던 우리들은 앞으로의 노순택의 작업을 궁금하게 생각해 왔다. 고통스럽지만 충분히 뜨겁지 않은 현재와, 두렵지만 지나치게 딱딱하게 굳어진 미래 사이에서 그는 어떤 작업을 할 수 있고, 할 것인가? 『검은 깃털』은 그 걱정스러운 질문에 대한 급조된 대답이 아니라, 어둡고 오래된 실마리와 같다. ■ 김현호

 

노순택_검은 깃털 Shades of Furs #CIF1601_바르샤바 Warsaw_Ed. 1/9_ 장기보존용 잉크젯 안료 프린트_162×108cm_2018

내 몸에 난 털들이 깃털이라면, 나는 더 가벼워질까. 깃털이라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슬퍼 말라 스스로를 타이른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끝내, 가벼워진 채로 흩어지고 말테니까. ● 시각매체 중 가벼움의 순위를 매긴다면 사진은 몇 위일까. 맨 앞이 아닐까. 빠르다. 게다가 경박하다. 더할 나위 없이 가볍다. 버튼 한 번 누르는 것으로 (아마도) 8할이 결정된다. 얇은 종이 위에, 두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입자들이 표면에 달라붙어 명암과 형상을 이룬다. 회화의 발명가를 아는가. 조각은? 음악은? 문학은? 사진은 발명가와 발명 시점을 특정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매체다. 젊다. 발명되자마자 크게 환영받았다. 자신이나 가족의 초상을 소유하는 행위가 곧 계급의 반영이던 시대에 사진술은 회화와 비교할 수 없는 저렴함으로 빠르고 쉽게 이미지의 독점을 무너뜨렸다. 장삼이사도 귀족을 흉내 낼 수 있는 시대를 열었다. ● 하지만 사진술은 똑같은 이유로 비난 받았다. 화가의 손을 무력감에 떨게 했지만, 인간의 손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기계에 손을 빌려준 짓에 불과했다. 손은 인간정신의 반영일진대, 기계 따위에 얹혀가는 손이라니, 그 따위가 무엇이란 말인가. ●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였던 샤를 보들레르는 사진을 "산업적 광기"라 부르며 그것이 예술을 넘보려는 시도에 독설을 뱉었다. "사진이 자신의 동맹군이라 할 어리석은 대중의 힘을 빌려 예술의 자리를 차지하고, 결국 예술을 망칠 것"이라 경고했다. 그에게 사진은 "언감생심 예술을 넘볼 게 아니라, 예술과 과학의 겸손한 시녀"로 돌아가야만 하는, 주제파악이 필요한 도구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사진은 "기억의 아카이브에 들어가기를 희망하는 시간의 희생물들, 사멸해 갈 수밖에 없는 모든 소중한 것들, 망각 속으로 부서져 가는 모든 폐허들, 책들, 판각들, 원고들을 보존케 하는" 역사의 비서가 될 것이었다. ● 그랬던 보들레르도 사진기 앞에 다소곳이 앉아 렌즈를 응시했으니, 우리는 그를 "시간의 희생물"이라 불러야 할까, "사멸해 간 소중한 것"이라 불러야 할까. 보들레르의 얼굴은 보존되었다. 사진이라는 시녀에 의해 보존되었다. 덕분에 우리는, '나를 바라보는 보들레르'와 시공을 넘어 눈맞춤 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사진술은 예술을 간보고, 깔보고, 심지어 예술 자신이 되었다. 회화를 변질시킴으로써, 새로운 회화사를 쓰게 했다. 과학과 산업과 예술의 경계를 무디게 했다. 이제 사진 없는 현대미술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으니, 이로써 예술을 망친 셈인가. 지금 당신은 밥숟가락 뜨는 횟수보다 사진기 단추 누르는 횟수가 더 많은 하루를 살고 있다. 대단한 낭비가 아닌가.

 

노순택_좋은 살인 reallyGood murder #CGJ2401_Ed. 1/9_오산 미공군기지. 전략폭격기 B1B랜서 Osan U.S. Air Base. Strategic bomber B1-B Lancer_ 162×108cm_2016

낭비를 걱정한 사람이 있었다. ● 사진이 발명되기 딱 80년 전, 루이 15세 통치시기 프랑스 재정장관에 임명된 그는 계속된 전쟁으로 궁핍해진 나라곳간을 채우기 위해 골몰했다. 두 가지 방법을 썼다. 하나는 증세였다. 단지 더 걷는 게 아니라, 별의 별 세금을 만들어냈다. 신선한 공기를 주신 국왕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야 하는 '공기세'는 살아있다면 피할 수 없는 세금이었다. 오래 전 사라진 '창문세'의 부활도 모색했다. 또 하나는 긴축이었다. 극단적인 절약을 강조했다. 심지어 그림의 재료는 검은 물감 하나로, 형상은 윤곽이면 충분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이름이 형식이 된 사람, 에띠앙 실루엣. 반년 만에 물러난 단명 장관이었으나 사람들은 그를, 그의 정신머리를 오래 기억했다. 실루엣이라는 이름은 '안 좋은 것의 모든 것, 싸구려 비지떡'의 대명사로 널리 쓰였다. 오늘날엔 '검은 윤곽'이나 '밝은 배경 앞 검은 그림자'의 조형스타일을 뜻하는 말로 통한다. 사진에서 실루엣은 '역광사진'으로도 불린다. ● 사진에서 '역광'은 가급적 피해야 할 조건처럼 여겨진다.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역광은 물체의 상을 흐리게 하므로 가능한 피해 촬영하는 것이 좋다"고 안내되어 있다. 하지만 광원이 렌즈 축을 따라 직접 들어오지 않거나, 광원을 피사체 뒤로 가릴 수 있는 경우, 상의 윤곽은 뚜렷해진다. 이때 피사체의 세부는 그 안에 묻히고 갇힌다. 사람사진의 경우 중요한 세부는 얼굴과 표정인데, 역광사진은 그걸 가림으로써 누가 누군지 알 수 없게 한다. 누군지 알 수도 없는 사진을 대체 왜 찍는단 말인가. 고로 역광을 피하라는 '무난한 사진의 평범한 원칙'은 옳을 것이다. 전문가들은 세부를 섬세하게 표현하는 것이, 인화지가 담아낼 수 있는 어둠과 밝음의 스케일을 11단계로 나눈 '존 시스템'에 입각한 풍부한 계조의 사진을 만드는 것이, 당신이 추구해야 할 '파인아트 프린트의 정석'이라 말한다. '올바른 돌'은 이 얼마나 무거운가. ● 역광 사진엔 농담이 없다. 아니 농담만 있을 뿐, '농담 사이'가 없다. 흑백으로 몰아붙이다 회색을 버리는 우를 저지른다. 극단주의자의 화법일까. 극단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면서도 극단주의자들의 아무 말 대잔치에 환호하는 세상사의 풍경은 동서고금에 널려있다. 오늘 우리의 세계를 움직이는 질서가 아닌가. 어쩌다 우리는 극단주의에 매료되었을까. 뻔뻔하기 짝이 없는 극단주의의 매력과 마력은 연구대상이다. 그것에 빠져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도. ● 농담(濃淡) 없는 사진, 역광사진은 진부할까. 가끔은 질문이 대답이 된다. ● 광원을 향해 서고, 그 사이에 너를 두고, 너가 드리운 그늘에 나를 둔다. 셔터를 연다. ● 세부가 어둠에 묻혔다 해서, 세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깃털이 윤곽에 갇혔다 해서, 무게가 달라진 것도 아니다. ■ 노순택

 

노순택_남풍리 남일당 남지피 Nampung-ri Namildang Nam-GP (南-知彼)_ 안성-용산-DMZ_Ed. 1/9_좌대에 8폭 사진 병풍_180×480cm_2019

Ah-ah Oh-ah Ooh-ooh * ● Whenever I find it uneasy to understand Noh Suntag's photography, I open the book Smells like the Division of the Korean Peninsula, a book published along with his eponymous first solo exhibition in 2004. This small, dark book is indeed full of anger, agony, despair, and mockery. The people on the asphalt, bracing themselves by holding hands and locking arms: those with the megaphone, yelling and threatening them: young people wearing round shellfish-like helmets swarming in black with shields and cudgels: the elderlies gazing at them with empty eyes: and what is now unknown where to be floating around ─ the moist heat and shouts of the time. ● Thus, Smells like the Division of the Korean Peninsula is almost like a sort of genetic map that makes up the artist Noh Suntag. The book includes a rough signpost to how an individual photographer's hands and feet, eyes and mouth, hair and face will overgrow, as well as how such an entangled cluster will be given the strange name of 'the artist Noh Suntag.' The book also guides us to the landscapes of the narrow, bent road that he will take with his characteristically long sigh. For example, in the book's second chapter, which is composed of three small series, the funerary portraits of the two deceased girls will reach those of the deceased citizen soldiers left unattended at the old cemetery in Mangwol-dong ─ which Noh Suntag later persistently captured in Forgetting Machines. The photographs that capture the tension between the village people and the police at Maehyang-ri will become crueler through the scenes of violent repression at Daechu-ri. On the papers of this book, a few photographs potent of later becoming his controversial works ─ such as Red House, the strAnge ball, State of Emergency ─ are placed, quite carelessly, as if scattered seeds. ● Even if we confront a few raw photographs, we surely cannot fully understand their meaning. Such is not even possible for the artist himself. What we could only do is fumble for the imperfect wrinkles and roots within the time and space of the clouded past and present. So, just like this. ● Noh Suntag has been interested in the dark, from the beginning and overall. ● Of course, the matters that Smells like the Division of the Korean Peninsula cannot tell are not so trivial. Such, so to speak, would be the role that Noh Suntag is to play in this world of our presence. Here, he was the first to receive the Korea Artist Prize as a photographer and an artist who widely participated in national and international exhibitions, adding his name to numerous biennales. People once referred to these names as a trophy awarded to Noh Suntag's spirit and achievements. It was said that contemporary art museums acknowledged his acute political insight and unique aesthetic achievements so that they paid attention to him and conformingly made way for him. ● There is a certain amount of truth within these words; only if the naïve question of 'whether the contemporary art world is so honest and transparent' can be avoided. This hypothesis is especially suitable for explaining how such distorted photographs, among the numerous images created in the streets, are flowing through the channels between museums and biennales. Thus, the statement that Noh Suntag's future photography will be the most evolved form of documentary photography provides a temporary answer to many questions regarding his work and photography in general. ● For instance, Noh Suntag has shown remarkable techniques. On the ground of the 2016 Candlelight Vigil, where hundreds and thousands of cameras would have been present, he captured the distinctive images which only he could take. Those produced by other cameras were mostly too hot or too cold and easily classifiable. Yet, Noh Suntag, moving low and fast at his own pace, seemed as if he was slicing off the uncannily distorted fragments of time. In the photographs, the people hit by the white flares of the flash are frozen with mysterious faces of joy or tears, while the framing was extremely rapid and sophisticated. ● The competence to create such uncanny images may be based on Noh Suntag's confusion deriving from anxiety and ambiguity. When he was working on Smells like the Division of the Korean Peninsula, he used the expression of 'the simple truth and precise prediction' in some of his writings. Here is a rough summary: What is it that destroys these farmers' persistent and innocent lives? Division. It shall be the state violence unleashed with the excuse of the division. Who is behind all this? The United States. Otherwise, it shall be the power dynamics centered around the United States. These are 'the simple truth' with some evidence. If we cannot stop it, violence will continue ─ and this is the 'precise prediction.' However, Noh Suntag later appears to gradually lose such a sense of 'simplicity' and 'precision.' For the past decade, his writings' dominant phrases and vocabularies have roughly been: 'loss of confidence,' 'arising doubts,' 'dissonance,' 'uncertainty,' 'ambiguity,' and 'hesitance.' ● Shades of Furs is a series about a certain kind of darkness. Such darkness is neither as beautiful as black silk nor as tender as the touch of fins. It merely stays as a sharp and acute fragment, like a void that captures the unidentifiable inside the frame. Looking at the photographs, we cannot discern who they are or what they are doing. Therefore, these are the most uncertain, dubious, and ambiguous among the works of Noh Suntag. ● In fact, those fond of the unfamiliar visual pleasures of darkness and silhouette are mostly amateur photographers. As he frankly wrote in the artist's statement, Shades of Furs clearly reveals that the artist Noh Suntag takes root in the ground of amateur photography and not of contemporary art. In short, to marvel at photographic techniques is the attitude of amateur photography. My words do not intend to demean amateur photography or Noh Suntag, but it is the other way round. The history of photography has always been driven by the aspirations and technical achievements of the amateurs. These amateurs are those who say 'Ah-ah' at the beauties that the camera captures, and those who are lured by such an image and go 'Oh-oh Ooh-ooh' at times. ● Shades of Furs is quite a pile of vain photographic techniques that we ─ who pretend to be familiar with the customs of exhibition spaces ─ have believed as something that should be cut and thrown away for photography to become contemporary art. Such includes quick judgment on whether the exposure of the certain backlighting will work properly, precise and sharp focusing and framing, and post-processing of the scenes still in need. Seeing the artist Noh Suntag, who has his place in contemporary art museums, fluently making full use of these hopeless techniques is somehow funny but also refreshing and delightful. He and we, after all, originate from those who say 'Ah-ah Oh-oh Ooh-ooh.' ● Paradoxically, it would be valid to overlay Shades of Furs and Smells like the Division of the Korean Peninsula to trace the silhouette of Noh Suntag delicately. Perhaps, it shall be more important to understand Noh Suntag now than wanting to understand the strange properties of photography through him as we did a few years ago. Even in his early work Smells like the Division of the Korean Peninsula, which was expressively political, he ceaselessly turned the camera around to capture the dark, ambiguous silhouettes. The police on page fifty-seven, the U.S. soldiers on page ninety-three, and an unknown woman on page one hundred and fifty-seven would be some good examples. ● Before seeing Shades of Furs as a series, I thought of the black silhouettes inserted here and there throughout his first book simply as the photographer's habit to give the viewers a breathing space for a moment. However, due to the presence of Shades of Furs, the structure of Smells like the Division of the Korean Peninsula has become much more articulate and solid. Roughly speaking, it is a book that begins with a photograph of an old marine with letters sticking on him (which the artist claims to have photographed at Baengnyeongdo) and ends with unidentifiable silhouettes. Hence, from the beginning, Noh Suntag has been a photographer attracted to what is both 'simple and precise' and 'dubious and ambiguous.' Furthermore, he attempted to bound these two together through the techniques of amateur photography. ● In other words, Shades of Furs is a work that corresponds to the one end of Noh Suntag. At the other end would be his comparatively obvious and political series. Oscillating in between these opposite ends, Noh Suntag complicates and disrupts the meaning of his works through his sophisticated photographic techniques and nimble fingers. Therefore, even when confronting Red House, we cannot easily discern whether the artist finds North Korea's Arirang Mass Games spectacular or repulsive. In Paths of Patriotism, just with a glimpse of the photographic image he presents, it is difficult for us to determine whether Noh Suntag regards the old rightists in the streets as ridiculous or sympathetic. We merely discover our desires and fears reflected in the image. The same is true for Shades of Furs. Eager to find a sense of political criticism placed within this darkness, we will wander inside the photographic image for long. ● At the same time, such refers to the possibility of a quite lengthy, protracted war. We who used to go 'Ah-ah Oh-oh Ooh-ooh' have always been curious about Noh Suntag's future works. In between the present ─ which is painful but without much heat ─ and the past ─ which is fearful but congealed ─ what kind of photographs can he capture, and will he capture? Shades of Furs is not a rushed answer to these concerns but rather a dark, old clue. ■ Kim Hyunho

* Heo Su-gyeong, 'Butterfly', Alone To A Distant House (Seoul: Moonji Publishing, 1992).

If the hairs on my body were feathery furs, would I be lighter? Hope they were furs, but even if they were not, I coax myself not to be sad. All living things will, in the end, scatter away in lightness. ● If visual media were ranked according to their lightness, where would photography be? At first, I presume. It is quick, shallow, and extremely light. A single press of a button decides (perhaps) more than three-quarters. Contrast and shape are formed upon a thin paper, of which the surface is attached with particles without a trace of thickness. Are you aware of the inventor of painting? What about sculpture, music, and literature? Photography is hardly the only media that can specify its inventor and the time of invention. It is relatively new. It was eagerly welcomed as soon as it was invented. When the possession of self or family portraits reflected one's social class, photography – with its incomparable cheapness to painting – quickly and easily broke the monopoly of the image. It opened up a new era where the common crowd could imitate the nobility. ● However, photography was blamed for the same reason. Despite making the painter's hand tremble in helplessness, it was not 'created' by the human hand but only lent a hand to the machine. Provided that the hand is a reflection of the human spirit, what on earth is such a hand living off the machines. ● A poet and an art critic Charles Baudelaire referred to photography as "Industrial Madness," making blistering remarks on its attempt to encroach upon the domain of art. He warned, "If photography is allowed to supplement art in some of its functions, it will soon have supplanted or corrupted it altogether, thanks to the stupidity of the multitude which is its natural ally." For him, photography was "to return to its true duty, which is to be the servant of the sciences and arts." It was a tool that had to know its own place. Only then, photography was to "rescue from oblivion those tumbling ruins, those books, prints and manuscripts which time is devouring, precious things whose form is dissolving and which demand a place in the archives of our memory," as if a secretary of history. ● Yet, as this Baudelaire had posed before the camera, gazing into the lens, shall we call him "whose time is being devoured" or "whose precious form is dissolving?" The face of Baudelaire was preserved – by a servant called photography. Thanks to it, we can make eye contact with the 'Baudelaire looking at myself' beyond time and space. Despite his warnings, photography questioned and belittled art, even becoming art on its own. By degenerating painting, photography has written a new history of painting. It blurred the boundaries between science, industry, and art. Now that contemporary art has become incapable without photography, did we corrupt art, after all? At this very moment, you are living a day with people pressing the shutter more often than the number of spoonfuls of rice they take. What a huge waste. ● There was one who worried about waste. ● Eighty years before photography was invented, the French finance minister under Louis XV deeply pondered how to replenish the national economy, which had been deprived due to the continuing war. He employed two methods. The first was to increase taxation. It was not simply about raising taxes, but he created all sorts of taxes. The 'air tax,' which was obligated to the King for his offerings of fresh air, was an unavoidable type of tax for those alive. The revival of the long-gone 'window tax' was even considered. Another method was to implement a retrenchment plan. He emphasized extreme frugality. A single black paint was sufficient for a painting material, and an outline was enough for a shape. While Étienne de Silhouette – whose name became a form – resigned from his short tenure as minister, people remembered him and his mindset. The name 'Silhouette' was widely used as a byword for 'things perceived as inferior or cheap.' Nowadays, the term is understood as a formative style that shows 'a dark outline' or 'a dark shadow against a brighter background.' In photography, the silhouette also refers to 'backlight photography.' ● 'Backlight' in photography is regarded as a condition to be avoided if possible. The Standard Korean Language Dictionary also writes, "The backlight obscures the image of the object, so it is recommended to avoid it in photoshoots." However, when the light source does not directly enter the camera axis or can be hidden by the subject, the figure's silhouette comes into focus. At this moment, the details of the subject are buried and confined within. For instance, while the significant details in portrait photography would be the face and expression, backlight photography conceals such and disguises who is who. Why would you ever take a photograph that is unidentifiable? The 'common rule of ordinary photography' to avoid the backlight would be proper, indeed. ● To express the details delicately: To make a photograph abundant of gradation based on the Zone System that divides the visible scale of light and dark into 11 zones: The experts say that these are the qualities of the 'fine art prints by the book.' How thick and heavy would this 'book' be? ● There is no light and shade in backlight photography. No, there is only light and shade without what is 'between light and shade.' Stampeded into black and white, a mistake is made of abandoning gray. Perhaps it is the way an extremist speaks. While warning of extremism, the worldly landscape that raves about the extremists' rambling of nonsense is at all times and all places. Is it not the order that moves our world today? How come we have become attracted to extremism? The shameless charm and enchantment of extremism shall be a subject of study – for us to not fall into it and become a monster. ● A photograph without light and shade. Is it bland, the backlight photography? At times, the question becomes the answer. ● Standing toward the light source, placing you in between, I set myself under your shadow. I open the shutter. ● Because the details are buried within the dark, it is not that the details were never there. Because the feathery furs are confined within the silhouette, it is not that their weight has changed. ■ Noh Suntag

 

Vol.20220622a | 노순택展 / NOHSUNTAG / 盧純澤 / photography

 

 

 

[한겨레S] 커버스토리
동자동 쪽방촌의 불안한 미래

공공임대 절반 넘는 ‘공공개발’ 발표한 지 1년4개월이 넘었지만
민간개발·규제완화 요구하는 토지주 압박에 지구 지정조차 못해
“개발돼도 쫓겨나지 않고 이웃끼리 좋은 환경서 산다 좋아했는데…”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 한 주민의 방. 대체로 1평 남짓한 이 동네 쪽방의 평균 월세는 23만4천원이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7일 오후, 초여름 볕이 쨍쨍한 한낮인데도 방은 어두웠다. 아니, 이곳을 ‘방’이라 부르는 게 정당할까. 얼핏 봐선 뭔지 가늠이 되지 않는, 오래된 식당 건물 옆 쪽문을 여니 성인 한 명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는 좁은 통로가 보였다. 6~7m 남짓 되는 통로 왼쪽으로 식당 뒷문, 2층으로 향하는 계단, 공용 화장실, 식당 창고, 그리고 그 ‘방’이 꾸역꾸역 뭉쳐 있었다. 3.3㎡(1평)를 조금 넘을 듯한 크기의 공간은 작은 싱크대와 미니냉장고, 철 지난 이불만으로도 발 디딜 틈이 없었다. 1층이지만, 싱크대 위로 난 창으론 해가 거의 들지 않았다. 싱크대는 물이 나오지 않아, 덩그러니 자리만 차지할 뿐이었다. 나무로 된 방문은 손잡이가 떨어져 나가 잠기지 않았다. 김선근(63)씨는 여기서 7년째 살면서 매달 월세 26만원을 낸다고 했다. 3층짜리 이 건물엔 이런 방이 7~8개쯤 된다.
 
방이라 불러도 되는 걸까
 
서울의 관문인 서울역 맞은편, 늘어선 고층 빌딩 뒤쪽 동자동엔 이런 쪽방 1163개가 건물 67동에 밀집해 있고 현재 1083명이 살고 있다(서울시 ‘2020년 서울시 쪽방 건물 및 거주민 실태조사’, 이하 실태조사). 건물 한 동을 쪼개 들어찬 방이 평균 17.4개, 다른 쪽방촌 주민들도 김씨와 사는 환경이 별로 다르지 않다. 이에 정부는 지난해 2월5일 “전국 최대 서울역 쪽방촌”을 “명품 주거단지로 재탄생”시키겠다며 ‘서울역 쪽방촌 주거환경 개선을 위한 공공주택 및 도시재생사업 추진계획’(이하 공공주택사업)을 발표했다. 하지만 현실은, 자칫하면 깨질 것 같은 유리잔 같다.동자동 쪽방촌에 들어온 지 24년 된 김정길(76)씨의 방은 월세가 25만원이다. 크기는 김선근씨네와 비슷하지만, 그가 사는 방엔 싱크대가 없는 대신 작은 현관이 있다. 신발, 세숫대야 같은 생활용품 사이로 음료수, 즉석밥, 도시락, 양념 같은 식료품과 냄비, 그릇 등을 쌓아뒀다. 위경화증이 있어 부드러운 음식을 먹어야 하는 그는, 밥에 뜨거운 물을 부어 불린 ‘죽’을 자주 먹는다. 조리하기 불편한 환경은 다른 집들도 마찬가지다. 실태조사에서 취사장을 갖춘 건물은 32.8%에 그쳐, 쪽방촌 주민 대부분은 방 안에서 휴대용 가스버너를 사용한다. 그나마 있는 취사장에도 설치된 수도꼭지의 수는 평균 2.6개에 불과하다. 산술적으로만 보면, 주택당 평균 16.2명에 이르는 거주 인원이 2.6개의 수도꼭지를 나눠 쓰는 셈이다.

 

동자동 쪽방촌 한 골목에 7일 오후 노인들이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하지만 정작 김정길씨를 괴롭히는 건 따로 있다. 그는 “쥐랑 바퀴벌레 때문에 돌아버릴 것 같다”는 말을 신경질적으로, 수십 차례 반복했다. “밤마다 천장에서 쥐들이 쿵쿵대며 축구를 하는 통에 너무 힘들다. 화가 나서 효자손으로 천장을 치면 잠깐 조용하다가 다시 뛰어다닌다. 바퀴벌레는 수도 없이 나온다.” 층간소음에 시달려도 예민해지기 마련인데 쥐들이 내는 소리라니, 예민해지지 않는 게 이상했다. 실제로 한국도시연구소가 동자동 쪽방촌 주민들을 상대로 2020년 1월 실시해 발표한 ‘비주택 거주자 주거지원 희망 수요조사’(이하 수요조사) 결과를 보면, 주민들이 건강에 가장 위협을 느끼는 요소로 추위·더위(65.1%)와 쥐·해충(64.3%)이 엇비슷하게 가장 많이 꼽혔다(복수응답).이와 관련해, 건강세상네트워크 등이 2012년 내놓은 ‘동자동 쪽방 주민 건강권 실태조사’에선 쪽방 주민의 주관적 기대수명이 당시 한국 남성의 평균 수명(77.3살)에 못 미치는 74.3살로 조사된 바 있다. 연구진은 “돈이 없어 필요할 때 의료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뿐만 아니라, 열악한 주거환경이 주민들의 건강을 명백히 해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부분 최저주거기준 이하의 열악한 쪽방에서 생활하고 있고 주거비 비중이 높으며 돈이 없어 쫓겨날까 봐 걱정한다. 또한 식비 부족, 열악한 구강 건강, 부엌 시설 미비로 인해 영양 상태가 부실한 경우가 많다. 이것만 보아도 동자동 쪽방 주민은 건강권이 아닌, 기본적인 인간의 존엄성도 보장받고 있지 못하는 현실을 알 수 있다.”이 조사를 벌인 지 10년이 지났지만, 쪽방촌 주거환경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건물은 세월의 흐름만큼 더 낡았고, 당시 55.2살이던 주민의 평균 나이는 2018년 59.7살로 올라갔다. 실태조사에서 주민 가운데 고혈압, 당뇨, 관절염, 우울증 같은 지병이 있다는 이는 82.5%에 이렀다. 주민 김영국씨는 “여기 대부분 집이 지은 지 60년을 넘었고, 방은 한 평도 안 돼서 누우면 꽉 찬다. 물도 새고, 햇빛 안 들고, 냄새나고, 주거환경이 말 그대로 비참해서, 안 아픈 사람도 여기 와서 살면 아프게 된다. 그래서 1년이면 죽는 사람이 40명이 넘는다”며 “가진 게 없으니까 그냥 여기서, 죽지 못해 사는 것”이라고 했다.
 
주거급여 노리는 ‘빈곤 비즈니스’
 
쪽방촌 주민들은 이런 열악한 환경을 개선해 달라고 집주인에게 아무리 요구해도 들어주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동자동 쪽방촌 주민 자조조직인 ‘동자동 사랑방’의 정대철 사업이사는 “전기고 수도고, 고장 나서 뭐 하나 고쳐달라고 하면 집주인은 그냥 나가라고 한다. 따박따박 월세는 받아가면서 집수리는 안 해준다”고 했다.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의 한 건물 옥상. 낡은 지붕을 천막과 플라스틱 슬레이트, 나무판자 등으로 덮어두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실태조사를 보면, 동자동 쪽방촌 주민의 평균 거주 기간은 10.3년으로 주민의 95.7%가 월세로 산다. 평균 월세는 23만4천원이고, 보증금은 없다. 한편, 주민의 74.6%가 기초생활 수급자고 평균 수급비 69만1천원이다. 백광헌 동자동공공주택사업추진주민모임 부위원장은 “수급비가 매달 20일에 들어오는데, 다음달 10일만 돼도 돈이 없다. 방값 27만원을 주고 나면 58만원 정도 남는데 전화요금, 전기료 같은 공과금이 8만원, 담뱃값이 15만원 든다. 요새 밥 한 끼가 1만원이 넘는데, 남은 돈으로 친구 만나 서너번 밥 먹으면 금세 돈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화장실 하나를 10가구가 쓰는 이런 건물에서 집주인들이 주거급여를 노리는 것”이라고 덧붙였다.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엔 생계급여, 주거급여, 의료급여, 교육급여 등이 있는데, 각각 지급 기준과 규모가 다르다. 이 가운데 1인 가구 생계급여는 올해 월 소득이 58만3444원(기준 중위소득의 30%) 이하일 때 58만3444원을 지급받는다. 1인 가구의 주거급여는 월 소득이 89만4614원(기준 중위소득의 46%) 이하일 때 최대 32만7천원(서울 기준)을 받는데, 임대차계약서에 명시된 방세가 이보다 낮으면 그만큼만 받을 수 있다. 주목할 대목은, 주거급여에 따라 쪽방촌 월세가 올랐다는 점이다. 박승민 동자동사랑방 활동가는 “2015년 주거급여가 생기면서, 그 전에 15만원 선이던 월세가 30만원 가까이로 다 올랐다. 그나마 월세에 공과금이 포함된 경우는 좀 낫지만, 그렇지 않은 곳도 많아 주민들의 부담이 더 크다”고 지적했다.쪽방촌 건물주의 월세 운영이 빈곤의 고착화를 유도하는 ‘빈곤 비즈니스’로 비판받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착취도시, 서울>(이혜미 지음, 글항아리 펴냄)은 쪽방촌에 실거주하지 않는 건물주가 쪽방 월세로 매달 수백만~수천만원의 현금 수입을 올리는 구조를 생생히 밝혀낸 바 있다. 건물주의 70%가량은 쪽방촌이 아닌 곳에 살고, 강남에 거주하는 부유층도 적지 않다. 또한 건물주 가운데 20% 안팎은 여러 채의 건물을 보유한 것으로 파악됐다. 하지만 계약을 하고 월세를 받아가는 이는 집주인이 아니라 고용된 관리인이기 때문에, 쪽방촌 주민들한테선 “집주인 얼굴은 본 적도 없다”는 말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건물주로선, 낡은 건물을 수리하지 않아도 싼 방에 들어오려는 ‘수요’는 늘 있고, 수급자를 세입자로 들이면 주거급여만큼의 월세를 안정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데다 세금마저 안 내도 되는 현금 수입이 ‘쪽방촌 임대 사업’이다. 주민들이 “집주인은 무조건 월세가 들어오니 수급자를 좋아한다. 사람이 죽어나가도 금세 수급자를 들여 월세 받아가기 바쁘다”고 볼멘소리를 하는 덴 이유가 있는 셈이다.
 
공공주택 꿈에 부풀었지만
 
정부도 이런 문제를 알고 있다. 2020년부터 잇따라 쪽방촌을 공공주택특별법에 따른 공공개발 방식으로 재정비할 계획을 내놓은 것도 이 때문이다. 국토교통부는 2020년 1월20일과 4월22일, 서울 영등포 쪽방촌과 대전역 쪽방촌의 공공주택사업 추진계획을 각각 발표했다. 공공주택특별법은 공공주택지구로 지정된 구역에 공공임대 35% 이상, 공공분양 25% 이하 등으로 공공주택을 절반 이상 짓도록 규정하고 있다. 민간 재개발의 경우 공공임대 의무 비율이 15%(서울 기준)에 불과한 데 비춰보면, 공공주택 비중을 크게 늘린 것이다.
 
지난달 11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 집무실 인근에서 동자동 쪽방촌 주민들이 공공주택지구 지정을 촉구하는 결의대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또한 정부는 재개발로 세입자가 쫓겨나지 않도록, 사업 진행기간 동안 쪽방촌 주민들에게 임시 이주 공간을 제공하고 이후엔 공공임대주택을 제공하는 ‘선(先)이주, 선(善)순환’ 대책도 내놨다. 이 때문에 주거권 운동단체 등에선 이런 변화가 ‘용산 참사에 대한 정책적 속죄’라는 평가도 나왔다. 어쨌든 영등포 쪽방촌은 2020년 7월17일, 대전역 쪽방촌은 다섯달 뒤인 12월7일 공공주택지구로 지정됐다.이런 분위기 속에 정부가 지난해 2월5일 동자동 일대 4만7천㎡를 같은 방식으로 개발하겠다고 밝히자, 쪽방촌 주민들은 꿈에 부풀었다. 특히 공공임대주택을 전체 주택의 절반 이상인 1250호(전체 2410호, 공공분양 200호, 민간분양 960호) 짓겠다는 계획은 단순 수치로 볼 때 현재 쪽방촌 주민 대다수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백광헌 부위원장은 “여기 살던 사람이 임대 아파트 갔다가 되돌아오는 경우가 제법 된다. 이 동네에선 동자동사랑방에서 커피도 마시고, 왔다 갔다 하며 정드는 사람도 많은데, (연고가 없는) 다른 동네 임대 아파트에 가면 외롭고 수급자라고 무시당하니 그런 것”이라며 “생각도 못 했는데 갑자기 정부가 여기를 공공개발하겠다고 해서 전부들 꿈을 갖게 됐다. 쫓겨나지 않고 비슷한 이웃들끼리 좋은 환경에서 살 수 있게 됐다고 다들 좋아했다”고 말했다.
 
부딪치는 욕망들
 
하지만 주민들의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고 있다. 정부 계획대로라면 공공주택지구 지정은 지난해 말까지 완료됐어야 하고, 올해는 지구계획과 보상계획이 나와야 한다. 하지만 올해가 절반 가까이 다 지나도록 공공주택지구 지정은커녕, 그 이전 단계인 중앙도시계획위원회 심의조차 감감무소식이다. 사유재산 침해를 주장하는 건물주들이 공공개발에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는 탓이다.공공개발에 반대하는 건물주들은 정부 발표 한달 남짓 뒤인 지난해 3월18일 ‘서울역 동자동 주민대책위원회’ 창립총회를 열었다. 당시 보도자료에서 이들은 “소유주 70~80%가 반대의견서를 모아 (정부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말엔 국토부에 민간개발 정비계획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이들이 요구하는 핵심은 민간개발을 할 테니, 공공개발에 적용하기로 한 용적률 확대(250%→700%)와 고도제한 완화(6~18층→40층)를 똑같이 민간개발에 적용해 달라는 것이다. 동자동 일대는 2000년대 중반 이후 여러 차례 민간개발이 추진됐지만 주민 반발, 사업성 부족 등의 이유로 번번이 좌초됐는데, 이들은 그 원인이 ‘개발 규제’에 있다고 본다. 오정자 주민대책위원장은 “집수리 안 해주는 문제만 갖고 얘기하는데, 이 지역이 개발된다는 얘기를 듣고 누가 돈 들여서 수리를 하겠나. 지난해엔 용산구의 새로운 정비 용역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정부가 주민 동의도 없이 갑자기 공공개발 계획을 발표한 것”이라며 “명백한 사유재산 침해”라고 주장했다. 이어 “정부는 쪽방 분들을 위한 개발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이 뭘 원하는지도 조사해보지 않았다. 공공개발처럼 규제를 풀어주면, 우리는 민간개발을 하더라도 쪽방을 더 좋게 지어줄 계획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동자동 쪽방촌 한 건물의 공용 화장실. 이 건물에 거주하는 7명이 화장실 1개를 함께 쓴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공공개발에 찬성하는 건물주들도 있다. 이들은 오는 14일 대통령실이 있는 서울 용산구 삼각지역 앞에서 집회를 열어 동자동 쪽방촌 공공개발 추진을 촉구할 예정이다. 이들의 이해관계는, 공공개발에 반대하는 건물주와는 다르다. 조재형 ‘서울역 쪽방촌 주민대책위’ 총괄본부장은 “그분들은 토지주의 다수가 민간개발을 원한다고 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소유 면적으로 보면 (쪽방촌의) 반이나 될까 말까 할 정도인데, 선동에 가까운 행동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공공개발을 요구하는 토지주는 대체로 소유한 땅이 넓고, 동자동에서 30~40년씩 산 사람도 있다. 반대하는 쪽엔 작은 규모의 지주가 많고, 대부분 민간분양권을 받고 싶어 한다. 민간분양권을 받으려면 주거용 건물에 실거주를 해야 하는데, 대부분 외부에 살면서 차익을 실현시키려는 투기세력이다 보니 공공개발에 반대한다”는 것이다.이들의 욕망은 쪽방촌 주민들의 욕망과도 다르다. 조재형 총괄본부장은 “공공개발이냐 민간개발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사업수지 분석을 해 보니, 동자동은 여건상 공공주택지구로 지정되는 게 용적률, 건폐율, 고도제한뿐만 아니라 공사비, 세입자 명도·이주비, 각종 금융비용 등에서 토지·건물 소유주에게 훨씬 실익이 컸다”며 “사유재산을 지키고, 쪽방 주민의 주거복지에 헌신한 토지주에게 보상해줄 수 있는 게 동자동 공공개발”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거주민, 세입자, 토지 등 소유자 세 축이 모두 피해가 없는 범위 안에서 공공개발에 찬성한다”며 ‘정당한 보상’을 요구했다.사업에 책임을 진 국토부는 소유주들을 핑계로 좌고우면하고 있다. 국토부 관계자는 “땅값이 비싼 도심 한복판에서 추진하는 사업이라 다른 데보다 소유주들의 반대가 워낙 심하다. 찬성하는 소유주도 있다. 양쪽 의견을 다 듣고 설득하는 작업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있다”고 말했다. 또 “반대 쪽이 제출한 정비계획안은 서울시와 용산구에 승인권이 있어 그쪽에서 검토 중”이라며 “국토부는 그 계획안에 쪽방 주민들의 이주대책이나 구제대책이 적절하게 마련돼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이동현 홈리스행동 상임활동가는 “국토부의 이런 태도 자체가, 공공개발 계획을 바꿀 수 있다는 신호를 소유주한테 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를 통해 권력이 교체됐다는 점도 주민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다. 김호태 전 동자동사랑방 대표는 “시장에 이어(계획 발표 당시는 권한대행 상태) 중앙정부까지 바뀌니까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걱정된다. 하지만 공공개발은 현 정부가 아니라도 ‘정부’가 하기로 한 것 아니냐”며 “없는 사람들 농락하지 말고, 약속을 지키라는 게 우리의 요구”라고 말했다.
 
동자동 쪽방촌의 한 방문에 붙어 있는 공공주택사업 촉구 포스터.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1900년 서울역이 문을 연 이후 동자동은 주택가와 상가가 밀집한 지역이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이 서울역과 용산구에 집중되면서 폐허가 됐다. 전후엔 피난민과 빈민이 몰려들어 판자촌을 이뤘고, 집창촌도 형성됐다. 서울역과 그 유동 인구를 따라 형성된 상권에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도시빈민 밀집 지역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1970년대에 들어선 정부의 단속으로 판자촌이 철거되고, 성매매업소 다수가 여관, 여인숙으로 바뀌면서 지금의 쪽방과 유사한 형태의 주거지가 됐다. 외환위기 뒤인 2000년대 이후엔 노숙인과 하층 노동조차 구하기 힘든 사람 등 “사회에서 구조적으로 버려지는 인구집단”이 모여든 공간으로 변했다. 그렇게 동자동이 변해가는 동안에도, 부동산 투기와 개발의 욕망은 멈추지 않았다.(정택진, <동자동 사람들>, 빨간소금)동자동 공공개발은 이 ‘버려진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존엄을 되찾아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림 그리는 게 취미이자 특기인 김선근씨가 말했다. “공공주택에 갈 수 있으면 아휴, 감사하죠. 인물화, 추상화, 풍경화, 그림 그리는 게 내 특기니까, 거기서 살면 훨씬 더 많이, 잘 그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김정길씨가 이어받았다. “나도 그렇고, 주민들도 그렇고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몰라요. 하룻밤이라도 쥐 없고 바퀴벌레 없는 데서 자고, 그 집에서 죽고 싶어요.”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동자동의 김정길하면 몰라도 동자동의 김반장하면 모르는 이가 없다.

쪽방촌 청소에서부터 후원물품 도우미나 순찰을 도는 등

동네 반장처럼 바쁜 하루를 보내 붙여 진 이름이다.

 

2017, 11, 14 / 대부도에서 가진 아름다운 동행에서..

김정길(76)씨를 처음 만난 것은 6년 전이다.

음식 나눔이 있던 새꿈공원에서 만났는데, 뒤처리하는 모습이 남달랐다.

일을 돕는다기보다 자기 일처럼 열심히 하는 모습에 눈여겨 본 것이다.

그 뒤부터 행사가 있을 때는 물론, 가는 곳 마다 그의 모습은 빠지지 않았다.

 

2017,5,2 / 동자동 골목계단에서...

김정길씨가 동자동에 들어 온지는 39년째라 반 평생을 쪽방에서 보낸 셈이다.

공사 현장이나 음식점 등 막일로 전전하다 방세 싼 쪽방촌에 들어왔다는데,

봉사를 생활화하게 된 계기는 15년 전부터 교회에 나가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남을 돕는데 여생을 보내야 겠다는 생각으로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닥치는 대로 일을 도운 것이다.

 

2017년 6월5일 / 거리에서 이웃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그런 그가 작년 무렵, '케이비에스'와 '조선일보'에 연이어 소개되며,

갑자기 동자동 김반장으로 부상한 것이다.

 

2019, 5, 23 / 화담 숲에서 가진 동자동소풍에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옛 속담 처럼, 그의 봉사활동은 더 두드러질 수 밖에 없었다.

쪽방에서 내다버린 쓰레기에서부터 직장인들이 피우다 버린 담배꽁초에 이르기까지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는 골목입구가 아침이면 티끌하나 없이 말끔해졌다.

 

2017,5,8 / '동자동사랑방'에서 마련한 어버이날 잔치 정리하는 모습

만날 때마다 청소를 끝내고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마 쪽방상담소 문 열기를 기다리는 듯 했다.

 

매번 매점 가는 길이라 카메라들 두고 와 청소하는 사진 한 장 찍지 못했는데,

며칠 전에는 작정하고 내려와 쉬는 모습이라도 찍은 것이다.

 

 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나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낀다”는 김씨는

나와 비슷한 연배인데도 그가 10년은 더 젊어 보인다.

아마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습관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부디 건강 잘 지켜 오랫동안 좋은 일 많이 하길 바랍니다.

 

나선 김에 서울역광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노숙인도 다시서기에서 재활하는 이가 더러 있으나, 김반장 처럼 무보수의 봉사는 아니다.

 

힘없이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노숙인들이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몇 개월 전부터 지하도 입구에 새로 온 노숙인이 자리 잡았다.

갈 때마다 가부좌한 자세로 깊은 생각에 빠진 모습이 다른 노숙인과 달랐다.

책을 정갈하게 모아두고, 난간에는 조화까지 모셔 두었다.

책은 가까이 두지만, 한 번도 책 읽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첫 장에 펼쳐놓은 군자의 삶이란 제목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리고 상대의 말은 알아들어 반응은 하지만, 일체의 질문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름은 물론 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어 더 궁금했다.

 

거리로 내 몰린 노숙인이 어찌 온전한 정신을 가질 수 있겠나마는

정신질환자로 단언할 수도 없는 것이다.

 

아무쪼록 오갈 곳 없는 노숙인들을 한 곳에 정착시켜

더 이상 거리에서 죽는 노숙인이 없도록 해주길 간곡히 부탁드린다.

 

사진, / 조문호

 

 

페이스북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DESIGNERSPARTY’에서 올리는 우리나라의 오래된 기록사진 때문이다.

 

난생처음 보는 희귀 사진을 어떤 통로로 구하는지는 모르나,

대개 외국 종군기자나 선교사들이 찍은 사진이었다.

더러 찍은 자가 밝혀지지 않은 사진도 많았다.

 

어제 올라온 일련의 사진들은 전쟁을 겪는 고단한 삶의 장면이 많았다.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의 모습에서는 차마 눈을 떼지 못하겠더라.

 

그래서 어린이 사진 몇 장과 시대적 배경을 알 수 있는 전쟁 사진 몇 장을

‘DESIGNERSPARTY’에서 스크랩하여 색 농도와 크기만 조절했다.

공교롭게도 골라낸 사진 모두가 찍은 사진가가 밝혀지지 않았다.

 

기록된 바로는 50년에서 53년 사이의 한국전쟁 때 사진으로

부산의 부암동이나 감만동에서 찍은 것으로 적혀있었다.

 

여태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넝마주이 사진은 본 적 있으나,

미군들이 버린 음식쓰레기를 줍는 어린이들 모습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땟국물이 베여 새까만 옷을 입은 순박한 모습에 코끝이 찡했다.

 

당시 국내에선 컬러필름이 보급되지 않아 흑백필름만 사용하던 시절인데,

외국인들이 찍은 컬러사진은 생생한 현장감을 더했다.

두 소년이 꺾어 든 진달래꽃이나 소녀들이 입은 치마저고리 색깔이 너무 예뻤다.

 

그 어린이들이 지금은 70대 후반이나 80대 초반쯤 되었을 텐데,

내게는 몇 살 많은 형님이나 누나뻘 되는 연배다.

더러 돌아가신 분도 계시겠지만, 노인이 된 당사자가 본다면 그 감회가 어떻겠나?

 

비정한 야만의 시대라 그때를 잊고 사는지 모르지만,

한국전쟁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비극이고,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악몽이다.

더 슬픈 것은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는 데 있다.

 

다시 전쟁이 터진다면 죽음과 멸망뿐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이들이 겪어야 할 비참함이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이 순간에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이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다.

 

우크라이나 난민 어린이들에게 작은 힘이나마 구호의 손길을 보내자.

 

/ 조문호

 

 

동자동 ‘모리아교회에서 사랑의 짜장면 나눔 잔치를 열었다.

 

쪽방촌이라 음식 나누는 자리가 잦지만, 짜장면은 또 다른 별미다.

 

어린 시절 먹던 짜장면 맛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긴 세월 먹어도 질리지 않는 게 짜장면이다.

 

지난 14일 정오 무렵, ‘식도락에 도시락 얻으러 갔더니,

줄 선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이기영씨만 국밥을 먹고 있었다.

 

이씨가 짜장면 주는 공원으로 가라는 것을 보니,

짜장면 나눔이 있어 도시락은 준비하지 않은 것 같았다.

 

새꿈공원으로 가보니 짜장면 냄새가 진동했다.

현장에서 면을 뽑아 삶아 주는 봉사원과,

줄을 서거나 짜장면 먹는 주민들로 공원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 번잡한 곳에서 누워 자는 노숙인도 있었다.

아무리 사는 게 귀찮은지 모르나, 한적한 곳으로 좀 옮겨주면 안 되나?

이런 노숙인 때문에 다른 노숙인까지 욕 먹인다.

 

3년 전에는 모리아교회 예배당에서 짜장면 나눔 행사가 있었다.

그때는 곧바로 주지 않고 예배당에 모아 기도한 후 먹게 했다.

시간도 지체 되었지만, 면이 불어 굳어버린 것이다.

 

목사더러 '베풀고 욕먹는 자선'이라며 나무라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금방 솥에서 건져낸 면을 비벼 먹으니 너무 맛있었다.

 

그 맛을 천천히 음미하느라 이빨 빠진 사이로 면을 걸어 쪽 빨았더니 콧 잔등을 치네.

쪽 팔릴 것이야 없으나 휴지가 없다.

 

그 날 긴 줄을 섰지만, 배식이 빠르니 금방 차례가 돌아왔다.

곱배기와 보통이 있었으나 대부분 보통을 찾았다.

짜장면은 맛도 맛이지만, 오랜 향수 때문일 것이다.

 

한 끼의 배를 채우기에 앞서 다들 소풍 나온 분위기였다.

좋은 자리 만들어 준 모리아교회에 감사드린다.

 

사진, / 조문호

 

 

붓과 종이, 열 번째

얼터네이티브 검프린트 사진 그룹展 

 

2022_0611 ▶ 2022_0625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박승환_김예랑_이완희_석은미_최시내

김성환_이경수_김유진_이홍순_홍혜전

구승범_최재웅_이명준_유희영_한옥란

 

기획 / 갤러리 한옥란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한옥란

HAN OK RAN

서울 종로구 안국동 110번지

 

'붓과 종이, 열 번째'전시는 15명의 사진작가로 구성된 신구대학교 평생교육원 얼터네이티브 사진(Alternative Photography)그룹전시입니다. 이번 전시는 안국동 '갤러리 한옥란'에서 6월 11일~ 25일까지 진행되며, 검프린트(Gum Bichromate Print), 플래티늄 & 팔라듐 프린트(Platinum & Palladium Print) 기법으로 제작된 30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 갤러리 한옥란

 

박승환_What's in your bag : 누구의 가방 #1_검프린트_40.6&times;50.8cm_2022
김예랑_TULIP_검프린트_40.6&times;50.8cm_2022
이완희_Untitle #1_검프린트_40.6&times;50.8cm_2022
석은미_품다 #1_검프린트_40.6&times;50.8cm_2022
최시내_#1_검프린트_20.5&times;25.5cm_2022
김성환_L'or violet de Provence 01_검프린트_22.5&times;50.5cm_2022
김유진_Untitle #1_검프린트_50.8&times;40.6cm_2022
이홍순_추상과 유토피아 1_검프린트_62&times;52cm_2022
홍혜전_Behind the Dress #1_검프린트_50.8&times;40.6cm_2022
최재웅_Dreaming #1_검프린트_50.8&times;50.8&times;40.6cm_2022
구승범_Finding Wonderland_검프린트_50.8&times;40.6cm_2022
이명준_Cereal_검프린트_50.8&times;40.6cm_2022
유희영_Bottle Series 22_검프린트_ 50.8&times;40.6cm_2022
한옥란_Untilte_플래티늄-팔라듐 프린트_40.6&times;50.8cm_2021

 

Vol.20220611c | 붓과 종이, 열 번째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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