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에 떠밀려 죽었다.

비정한 세상이 죽였다.

 

비참하도록 슬프게 죽었다

돈에 병든 사람이 사람을 죽였다.

 

아무도 울지 않았다.

사람이기를 포기했다.

 

"내 주검에 침뱉지마라"

 

‘2021홈리스추모제’에서...

사진, 글 / 조문호

수복호 사람들

 

김보섭展 / KIMBOSUB / 金甫燮 / photography 

2021_1222 ▶ 2021_1228

 

김보섭_수복호 사람들_젤라틴 실버 프린트_27.9×35.6cm_2006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토포하우스

TOPOHAUS

서울 종로구 인사동11길 6(관훈동 184번지)

Tel. +82.(0)2.734.7555

www.topohaus.com

 

이번 『수복호 사람들』에서도 김보섭은 그 강한 개성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끈끈한 바닷바람과 소금기가 진하게 밴 사람들의 냄새가 사진 전편에 무겁게 흐르고 있다. 그 짠 소금 냄새는 어쩌면 이들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의 고단한 삶의 냄새일지 모른다. 그들의 고단한 삶이 그의 영상을 무겁고 어둡게 만들어 준 것이겠지만, 하여튼 김보섭은 축축하고 어두운 곳에서 오히려 눈을 반짝이는 사진가라는 것이 이번 작품에서도 느껴진다. 결국 대상과 작가가 내면적으로 진하게 만난 것이다. 내면적 만남으로 대상과 작가는 둘이 하나가 되어 서로의 안으로 깊숙이 끌어 들인다. ● 김보섭의 사진이 이를 실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는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작업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 함께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류의식, 이들 사진에 진하게 배어 있는 것은 바로 이 동지적 동류의식이다. 그는 처음에 단순히 사진을 찍기 위해서 이 배를 탔고, 이들 아주머니, 할머니들과 어울렸을 것이다.

 

김보섭_수복호 사람들_젤라틴 실버 프린트_27.9×35.6cm_2006
김보섭_수복호 사람들_젤라틴 실버 프린트_27.9×35.6cm_2006

그러나 그들을 찍는 동안 이웃처럼, 친척처럼, 때로는 자기 누님처럼 느껴져 격의 없이 그들과 어울리고, 그 자신이 그대로 조개잡이가 되어 버렸다. 그와 대상이 구분이 되지 않는 경지인 것이다. 진한 소금 냄새가 거기에서 나온다. 격의가 없어야 이런 사진은 찍힌다. 몰입해야 이러한 영상은 나온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고단한 삶이 뿜어내는 후끈한 열기까지가 『수복호 사람들』에서는 느껴진다. 이들 사진에 그러한 것이 느껴지고 맡아진다는 것은 작가 김보섭이 뿜어내는 열정과 진정성이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다. ● 대상과 작가가 진정으로 발가벗고 만나고서야 이러한 영상은 맺힌다. 우선 작가가 빠져야 관객도 빠지는 법이다. 이러한 것을 솜씨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런 면에서 작가 김보섭은 솜씨가 좋은 사진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영상은 솜씨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솜씨는 외형은 만들 수 있을지 몰라도 깊은 내면을 드러내는 데까지는 미치기 어렵다. 작가의 열의 없이, 진정성 없이는 대상이 자기 속살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한정식

 

김보섭_수복호 사람들_젤라틴 실버 프린트_27.9×35.6cm_2006
김보섭_수복호 사람들_젤라틴 실버 프린트_27.9×35.6cm_2006
김보섭_수복호 사람들_젤라틴 실버 프린트_27.9×35.6cm_2006

한식구 같은 수복호 사람들 ● 지금부터 수복호를 타고 다닌 인물들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수보호의 선장이자 책임자인 최순기 님은 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책임지는 분이셨습니다. ● 그의 아내 유광복 님은 선장의 동반자이자 선원으로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사무장 최병국 님은 홀로 외아들을 기르는 어머니로 선장의 의여동생이며, 아주머니들의 리더 역할을 맡아 왔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오반장(박근숙) 님은 말을 조리 있게 하고 어떠한 것이든 빠르게 이해하였으나 이곳 저곳 참견하는 일이 많아서 아줌마들 사이에서 '칠득이 오반장'이라고 흉을 보던 것이 별명으로 굳어졌습니다. 차인애 님은 어린 자식들 때문에 배 떠날 시간을 잘 지키지 못해 별명이 '지각생'이 되었습니다. 그 밖에 순하다 해서 김순덕, 금자 엄마 김순오, 섭섭이 할머니 박선옥, 얼굴이 넓적한 넙순이 영배 엄마, 화수동의 꼬부랑 할머니, 뻐꾸기 할머니, 선장을 많이 도와주던 수열네, 작은 고모 최금순 등 여러 아주머니들이 매일 한 배에서 한 식구처럼 지내 왔습니다. 그들이 살던 곳은 만석동 일대와 북성동(똥마당)과 송월동 일대, 화수동과 그 외 인천 곳곳에 거주하였습니다. 그들은 지금은 철거되고 없지만 미로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판자촌에서 주로 생활하였습니다.

 

김보섭_수복호 사람들_젤라틴 실버 프린트_27.9×35.6cm_2006
김보섭_수복호 사람들_젤라틴 실버 프린트_27.9×35.6cm_2006

이렇게 어렵게 살면서 만석동(팽이부리)의 만석부두에서 배를 타고 굴을 따기 위해 물때시간에 맞추어 모였습니다. 하루하루 고된 몸을 이끌고 굴을 땄고, 때론 배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밤늦게까지 작업하였습니다. ● 이를 '묵세기'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살아온 흔적인 아주머니들의 주름 잡힌 얼굴과 거칠어진 손과 발은 한국의 어머니들로, 자기 몸을 희생하여, 자식들을 배고프지 않게, 또 자신보다 나은 삶을 살게 하기 위해 열심히 가르치겠다는 신념으로 살아온 훈장인 셈입니다. ● 1960년대에는 선박의 입.출항 신고가 없어서 자그마한 배에 수십 명을 태우고 위험을 무릅쓰면서 굴을 따러 다녔습니다. 배가 헐어 물이 스며들기고 하였는데 많이 스며들면 교대로 물을 퍼내곤 하였습니다. 기계도 낡았기 때문에 고장도 자주 나곤 하였습니다. 기계가 고장 나면 가마니로 돛을 만들어 섬으로 피신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때를 지나고 많은 선박을 거쳐 지금의 수복호가 되었습니다. ■ 최영식

 

Vol.20211222a | 김보섭展 / KIMBOSUB / 金甫燮 / photography

 

지난 주말 포항 장기장 가는 길에 울산 태화장에 들렸다.

 

태화장은 30년 전까지 울산일대에서 가장 컸던 울산장의 흔적을 가장 많이 간직한 장이다.

 

옛 울산장은 상설시장인 중앙, 성남, 우정시장으로 쪼개졌다가 대형마트 출현으로 시들해졌다.

이 틈새를 파고들어 생겨난 것이 바로 태화 오일장이다.

 

10년 전에 생겨 점차 규모를 키워오다, 이제 근동에서 가장 큰 오일장이 되었다.

큰 광장이 없는 태화장은 장날이면 찻길가와 골목 전부가 장터로 변한다.

대로나 이면 도로를 가리지 않고 빈터만 있으면 물건을 펼쳐놓았는데,

시장 중앙에서 300나 떨어진 동강병원까지 뻗쳐 있었다.

 

태화장은 주변에 아파트 단지가 많아 다른 재래시장의 손님이 줄어드는 것과 대조적으로 갈수록

시장 규모가 커지고 있다는데. 가는 날 역시 사람이 너무 많아 주차할 곳은 물론 발 디딜 틈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곳에도 체온을 체크하거나 손 소독하는 곳도 없었다.

더구나 비좁은 시장 길에 자리 잡은 음식점엔 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먹었다.

아무리 먹고 사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이러다 생사람 잡을까 걱정된다.

 

함께 간 정동지는 사람들에 떠밀려 비좁은 시장 길을 헤집고 다녔으나,

난 외곽을 맴돌며 정동지의 촬영이 끝나기만 기다려야 했다.

동지를 사지로 내몰고 망 보는 격이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물산이 풍부했던 울산의 옛 정취를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옛 태화루를 끼고 있어 고풍스런 멋도 간직하고 있다.

 

좁은 길을 가다 부딪쳐도 시비 거는 사람 없고, 길이 막힌다고 재촉하는 이도 없었다.

 

아지매! 좀 팔았소? “밥은 뭇는기요?” 정감 깃든 인사들이 오 간다.

초짜로 보이는 오징어 장수는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오징어요를 외친다.

허리 아픈 할머니는 굽은 허리를 펴지도 못한 채 손님 맞는다.

 

코로나만 아니라면, 오일장의 진면목을 맛볼 수 있는 장이다.

태화장은 5일 10일에 선다. 

 

돌아오는 길에 태화 강변을 거니는 호젓한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사진, / 조문호

 

 

 

..

지난 주말은 정영신 동지의 생일이었다.

인사동 전시를 마무리한터라 어디든 여행이나 가자고 했더니, 작심한 듯 포항 장기장에 가잔다.

 

포항 장기장은 전국장터 목록에 빠져있어 유일하게 가보지 않은 오일장이란다.

문화유적이 많은 장기면의 장터가 빠졌다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 곳에는 장기읍성과 뇌성산성을 비롯하여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서원이 많은 곳이다. 

죽림서원, 삼명서원, 덕림서원, 서산서원이 있고, 

향교와 척화비, 석남사지, 고석사 석불좌상 등 문화재가 많다.

 

모처럼의 장거리 여행이기도 하지만, 일에서 해방되어 날아갈 것 같았다.

새벽 일찍 출발해 정오 무렵에서야 현장에 도착했는데, 텅 빈 장터가 반겼다.

마치 피난 간 마을처럼 사람이라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장터였다.

 

어렵사리 만난 노인에게 “장이 왜 안서냐?”고 물었더니, 

아침에 몇 사람 나왔으나 이내 끝났다는 것이다. 

노인들만 남은 면소재지 장이라 장터의 기능을 잃은 지 오래된 것 같았다.

 

새로 지은 장터 앞에는 장의사가 버티고 있어 을씨년스러웠다. 

한 세기나 지난 것 같은 오래된 고물차가 장터 곳곳에 있었고, 

점포들도 외부는 깔끔하게 정리되었으나,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마치 유령의 마을 같았다. 

아마 문화유적을 찾는 관광객들을 위해 외관정비와 시설 보수는 했으나 

늙은이만 남아 장터 기능은 물론 살기조차 힘들 것 같았다.

 

옛날에는 유배지이기도 했으니, 외딴 곳에 젊은이들이 살고 싶겠는가?

장기장은 찍을 것이 없었으나, 지척에 있는 유적이라도 돌아보기로 했다.

 

장기면 읍내리에 있는 장기읍성은 둘레가 1,440미터고, 

옹성과 치성을 비롯하여 네 개의 우물과 두 개의 연못인 음마지가 있고, 

성 안쪽에는 향교와 동헌터가 남아 있었다.

 

여진족의 해안 침입에 대비하여 쌓은 토성으로 현종 2년에 축성되었는데, 

세종 21년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돌 성으로 개축된 후 군사기지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유교의 대가인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이 귀양살이 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송시열을 기리는 죽림서원이 세워져 글 읽는 마을이 되었으나 

오로지 군사기지로서의 역할을 다한 고장이라 할 수 있다.

 

장기향교도 가까이 있었으나 문이 굳게 잠겨있었다. 

담장을 돌며 내부를 살펴볼 수밖에 없었는데,

맞배지붕 겹처마 5칸으로 된 대성전에는 18현의 위패를 봉안해 두었다고 한다.

당우로는 팔작지붕 홑처마에 7칸으로 된 명륜당, 내삼문, 외삼문, 주사 등이 있었다.

 

모두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중건되었다고 한다.

뇌성산성이나 고석사 석불좌상도 찾아 보고 싶었으나,

울산의 기와장인 오세필씨를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이 다가와 갈 시간이 없었다.

 

지방 촬영 때는 일체 지인을 만나지 않지만, 오래 전부터 한 번 오라는 연락에 정동지가 약속해 두었단다.

그래서 일박이일의 촬영일정을 잡은 것이다.

 

약속 장소인 울산 남창까지는 2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였다.

남창마을 입구에 도착하니 오세필씨를 비롯하여 한양현씨와 양산에 있는 공윤희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세필씨 따라 그가 운영하는 기와공장을 거쳐 ‘송화정’으로 갔는데, 그날따라 정기휴일이라고 했다.

형님이 운영하는 곳이라 일할 분을 불러낸 모양인데,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더욱 송구스러운 것은 정동지가 좋아하는 감성돔까지 횟집에서 장만해 왔는데,

너무 과분한 대접이라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 날이 정영신씨의 생일이란 말은 하지 않았으나, 최고의 생일만찬이 아닐 수 없었다.

 

바닷가에서 커피를 마신 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L모텔에 여장을 풀었다.

공윤희씨가 숙소에 공수해 온 술과 안주로 밤늦도록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들 반가웠고 고마웠어요.

 

사진, 글 / 조문호

 

 

정영신의 장날전이 돈의문박물관마을작가갤러리에서 지난 16일 개막되었으나

전염병 때문에 별도의 개막식은 생략되었다.

 

조해인, 김수길, 백승호, 장경호, 곽명우, 최석태, 손귀현씨 등

몇몇 지인들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찾아와 전시를 축하했다.

 

인사동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겨 오붓한 뒤풀이를 마련했다.

전시는 내년 1월 23일까지 열린다.

 

 

 

요즘 느닷없는 ‘인사동 이야기’ 사진전 준비하느라 똥줄이 탄다.

며칠동안 정신없이 지내다 액자를 맡긴 이제사 한시름 놓았다.

 

뭐보다 머리가 아픈 건 그 많은 사진에서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였다.

오늘의 인사동을 말할 수있는 '묵시록'에 걸맞는 이미지를 골라

흑백으로 바꾸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 건 아니다 싶었다.

 

흑백으로 전환하면 사진의 리얼리티를 훼손하기도 하지만,

그 장면에 따른 컬러의 독특한 분위기가 사라져서다.

다시 스트레이트한 본래의 사진으로 바꾸었더니, 훨씬 감이 좋았다.

이제 사진자료들을 정리하여 알리는 일만 남았다.

 

돈 버는 일을 이렇게 열심히 했더라면 강남에 아파트라도 한 채 생겼을까?

돈을 우습게 여긴 스스로의 업이니 누굴 탓하랴 마는 평생 해온 일에 후회는 없다.

 

이제 정부에서 주는 돈으로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으니, 또 다시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점점 힘들어지는 것을 보니, 일을 줄여야 할 때는 된 것 같다.

 

모처럼 컴퓨터 앞에 앉아 지난 이야기라도 끌적일 여유가 생긴것이다.

 

며칠 전에는 일손이 잡히지 않아 바깥 나들이를 했다.

'동자동 사랑방'에 커피 한잔 얻어 마시러 갔더니,

회의 중인지 사람들이 많아 새꿈공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낙엽을 머리에 이고 고독을 씹던 가을남자 이대영씨가 반겨주었다.

혼술을 즐기는 이씨가 그 날따라 분위기에 쏠렸는지 술 잔을 권했다.

 

그렇게 시작된 술자리는 짹짹이 아낙의 술 공수로 한 병 두병 늘어 갔는데,

영등포에서 동자동으로 이사오기로 한 차씨 아주머니의 등장과

눈 먼 권관수씨 등 술꾼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권씨는 기자들이 몇 명 찾아와 인터뷰를 하고 갔다며 떠벌렸다.

현금을 안 주고 통장에 넣어준다고 불평 했지만, 인터뷰료 들어 올 건수 생겼다는 자랑인 셈이다.

 

요즘 케이비에스에서 연말 특집 제작한다며 동자동을 헤집고 다니는 모양이다.

오전에는 내방에도 찾아와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갔다.

아무튼, 빈민들의 현실이 알려져 희망을 갖고 살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으면 좋겠다,

 

눈먼 권씨는 소주를 패트병에 담아 가슴에 품고 다니며 마신다.

담배 한 가치는 항상 귀에 꼽고 다니는데, 어디 떨구었는지 담배 찾느라 여기 저기 더듬었다.

 

귀가 밝아 비둘기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섭하는 판에

잠바 속으로 담배 떨어지는 소리는 왜 못 들었는지 모르겠다.

 

낙엽이 떨어지는 공원의 술상은 어느 술상보다 멋졌다.

 

"하나님! 전기세 많이 나가니 에어컨 좀 꺼 주세요"라고 이씨가 허공에 외쳤다.

날씨가 점차 쌀쌀해 진다는 소리다.

 

 박씨는 뭐가 그리 눈에 거슬리는지 낙엽 떨어지기가 무섭게 쓸어담았다.

지저분해서가 아니라 소일거리로 하는 일이라 말릴 수도 없었다.

 

권씨는 보이지도 않으면서 짤짤이나 고스톱만 하면 딴다고 자랑질이다.

 

본격적인 추위가 몰려오면 다들 방에 처박혀 살아야하니,

오늘이 가을의 마지막 술상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봄이야 다시 오겠지만, 동자동의 봄은 언제 오려나?

 

사진, 글 / 조문호

 

 

돈의문박물관마을에서 정영신의 장날’ 사진전이 오늘부터 열립니다.

 

장날사진전은 년 말까지 열리기로 되어 있으나, 전시가 연기되어 한 달 더 연장 될 확률이 많아 볼 수 있는 시일은 넉넉합니다.

 

정영신의 장터사진은 잘 아시겠지만, 돈의문박물관마을에서 열리는 장날전은 또 다른 재미가 있습니다.

 

장터의 다양한 장면들이 퍼즐처럼 벽면을 채웠는데, 오랜 추억을 슬슬 불러일으키며 바쁘게 살아가는 일상에서 지난날을 돌이켜 볼 수 있는 시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가능하면 자녀분이나 손자들과 함께 가면 우리 정서를 일깨워 주는 유익한 자리가 되리라 여겨집니다.

 

장옥전경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도 있고,

옛날 장터에서나 볼 수 있던 손저울이나 됫박 등도 진열되어 있습니다.

 

연세가 지긋한 분은 아득한 추억이 모닥불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를 것이고,

젊은 세대에게는 온고지신의 자리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곳에 가면 정영신의 장날전만 열리는 것이 아니라 전각전도 오늘 개막되고, 곳곳에 볼거리가 많습니다.

 

저 역시 이전에는 '돈의문박물관마을'을 잘 몰랐습니다.

한양도성 서쪽 성문 안 첫 동네인 새문안 동네를 보존 또는 재현했는데, 백년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미로 같은 골목길도 정겹고 곳곳에 볼거리와 체험 공간도 많았습니다.

 

마을 구경은 물론 늦가을의 향취를 맛보는 시간도 됩니다.

 

주말에는 방문객이 많아 휴관일인 월요일을 제외한 평일에 들리는 것이 꼼꼼하게 살펴보며 여유 있게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요즘 장날전시 때문에 다른 일은 손도 못 대고 있습니다.

일주일 후에 열릴 인사동이야기사진전은 아직 프린트도 못한 상태입니다.

마음은 편치 않아도 잘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정영신의 장터 사진전은 전국 각지에서 여러차례 전시를 한바 있으나 작품저장 창고나 마찬가지였던 정선집 화재로 모두 소실되어 '돈화문박물관마을' 작가갤러리에 맞추어 새로 제작했는데, 요즘은 판넬제작을 액자집에서 만들어 주질 않더군요. 돈도 되지않으면서 일이 많아 그런 모양인데, 액자 값에 가까운 금액을 치루고서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위치는 정동길 따라 올라가면 '경향신문사'가 있고 그 건너편 대로 건너 강북삼성병원이 보입니다.
강북삼성병원 바로 옆, 행촌동으로 넘어가는 좁은 골목길 건너편이 돈의문박물관마을입니다.

 

시간 나시면 '돈의문박물관마을'에서 열리는 장날보러 가세요.


사진, / 조문호

 

 

노숙인 들이 제일 힘들어하는 시기가 한겨울보다 갑자기 추워지는 이때다.

갈아입을 방한복은 물론 내복조차 없으니, 온종일 바들바들 떨며 지낸다.

 

세상살이 고달프다지만, 노숙인보다 더한 사람이야 있겠는가?

추위를 이기려고 술을 찾게 되고, 술이 술을 마셔 다들 제 정신이 아니다.

술 때문에 노숙인 임시대피소에도 들어갈 수 없는데,

저러다 길에서 얼어 죽지 않을까 걱정이다.

 

요즘 들어 노숙하는 이들의 새로운 풍속도가 생겼다.

노숙의 길로 들어 선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은

다 버려도 못 버리는 것이 바로 핸드폰이다.

어디 연락할 곳이 있어서가 아니라 게임에 중독되어서다.

 

그러니 핸드폰을 꺼트리지 않으려면 충전할 곳이 필요해

충전 연결코드가 있는 지하도 요소요소에서 온종일 죽치는 것이다.

그런데, 핸드폰 사용료는 어떻게 마련하는지 모르겠다.

 

그들이야 지하도에 머물러 추위도 덜한데다,

알콜에 중독되어 술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노숙인 보다 백배 낫다.

다들 자리 뺏기지 않으려고 한 자리에서 버텨

지나칠 때 마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도대체 밥도 먹지 않고 화장실도 안 갈까?

 

하기야! 페이스북에 중독되어 하루 종일 핸드폰을 끼고 사는 세상에

그들인들 핸드폰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죽음의 골자기로 내몰린 노숙인을 걱정하는 정치인들은 왜 없을까?

복지공약을 밥 먹듯 쏟아내는 대선후보들이

노숙인들의 추위를 보살피려는 아량은 왜 베풀지 못할까?

당사자들 표야 없겠지만, 나라도 그런 후보에게 한 표 줄 것 같다.

 

사진, 글 /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