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수복호 사람들』에서도 김보섭은 그 강한 개성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끈끈한 바닷바람과 소금기가 진하게 밴 사람들의 냄새가 사진 전편에 무겁게 흐르고 있다. 그 짠 소금 냄새는 어쩌면 이들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의 고단한 삶의 냄새일지 모른다. 그들의 고단한 삶이 그의 영상을 무겁고 어둡게 만들어 준 것이겠지만, 하여튼 김보섭은 축축하고 어두운 곳에서 오히려 눈을 반짝이는 사진가라는 것이 이번 작품에서도 느껴진다. 결국 대상과 작가가 내면적으로 진하게 만난 것이다. 내면적 만남으로 대상과 작가는 둘이 하나가 되어 서로의 안으로 깊숙이 끌어 들인다. ● 김보섭의 사진이 이를 실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는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작업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 함께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류의식, 이들 사진에 진하게 배어 있는 것은 바로 이 동지적 동류의식이다. 그는 처음에 단순히 사진을 찍기 위해서 이 배를 탔고, 이들 아주머니, 할머니들과 어울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찍는 동안 이웃처럼, 친척처럼, 때로는 자기 누님처럼 느껴져 격의 없이 그들과 어울리고, 그 자신이 그대로 조개잡이가 되어 버렸다. 그와 대상이 구분이 되지 않는 경지인 것이다. 진한 소금 냄새가 거기에서 나온다. 격의가 없어야 이런 사진은 찍힌다. 몰입해야 이러한 영상은 나온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고단한 삶이 뿜어내는 후끈한 열기까지가 『수복호 사람들』에서는 느껴진다. 이들 사진에 그러한 것이 느껴지고 맡아진다는 것은 작가 김보섭이 뿜어내는 열정과 진정성이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다. ● 대상과 작가가 진정으로 발가벗고 만나고서야 이러한 영상은 맺힌다. 우선 작가가 빠져야 관객도 빠지는 법이다. 이러한 것을 솜씨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런 면에서 작가 김보섭은 솜씨가 좋은 사진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영상은 솜씨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솜씨는 외형은 만들 수 있을지 몰라도 깊은 내면을 드러내는 데까지는 미치기 어렵다. 작가의 열의 없이, 진정성 없이는 대상이 자기 속살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한정식
한식구 같은 수복호 사람들● 지금부터 수복호를 타고 다닌 인물들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수보호의 선장이자 책임자인 최순기 님은 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책임지는 분이셨습니다. ● 그의 아내 유광복 님은 선장의 동반자이자 선원으로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사무장 최병국 님은 홀로 외아들을 기르는 어머니로 선장의 의여동생이며, 아주머니들의 리더 역할을 맡아 왔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오반장(박근숙) 님은 말을 조리 있게 하고 어떠한 것이든 빠르게 이해하였으나 이곳 저곳 참견하는 일이 많아서 아줌마들 사이에서 '칠득이 오반장'이라고 흉을 보던 것이 별명으로 굳어졌습니다. 차인애 님은 어린 자식들 때문에 배 떠날 시간을 잘 지키지 못해 별명이 '지각생'이 되었습니다. 그 밖에 순하다 해서 김순덕, 금자 엄마 김순오, 섭섭이 할머니 박선옥, 얼굴이 넓적한 넙순이 영배 엄마, 화수동의 꼬부랑 할머니, 뻐꾸기 할머니, 선장을 많이 도와주던 수열네, 작은 고모 최금순 등 여러 아주머니들이 매일 한 배에서 한 식구처럼 지내 왔습니다. 그들이 살던 곳은 만석동 일대와 북성동(똥마당)과 송월동 일대, 화수동과 그 외 인천 곳곳에 거주하였습니다. 그들은 지금은 철거되고 없지만 미로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판자촌에서 주로 생활하였습니다.
이렇게 어렵게 살면서 만석동(팽이부리)의 만석부두에서 배를 타고 굴을 따기 위해 물때시간에 맞추어 모였습니다. 하루하루 고된 몸을 이끌고 굴을 땄고, 때론 배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밤늦게까지 작업하였습니다. ● 이를 '묵세기'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살아온 흔적인 아주머니들의 주름 잡힌 얼굴과 거칠어진 손과 발은 한국의 어머니들로, 자기 몸을 희생하여, 자식들을 배고프지 않게, 또 자신보다 나은 삶을 살게 하기 위해 열심히 가르치겠다는 신념으로 살아온 훈장인 셈입니다. ● 1960년대에는 선박의 입.출항 신고가 없어서 자그마한 배에 수십 명을 태우고 위험을 무릅쓰면서 굴을 따러 다녔습니다. 배가 헐어 물이 스며들기고 하였는데 많이 스며들면 교대로 물을 퍼내곤 하였습니다. 기계도 낡았기 때문에 고장도 자주 나곤 하였습니다. 기계가 고장 나면 가마니로 돛을 만들어 섬으로 피신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때를 지나고 많은 선박을 거쳐 지금의 수복호가 되었습니다. ■최영식
‘장날’ 사진전은 년 말까지 열리기로 되어 있으나, 전시가 연기되어 한 달 더 연장 될 확률이 많아 볼 수 있는 시일은 넉넉합니다.
정영신의 장터사진은 잘 아시겠지만, ‘돈의문박물관마을’에서 열리는 ‘장날’전은 또 다른 재미가 있습니다.
장터의 다양한 장면들이 퍼즐처럼 벽면을 채웠는데, 오랜 추억을 슬슬 불러일으키며 바쁘게 살아가는 일상에서 지난날을 돌이켜 볼 수 있는 시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가능하면 자녀분이나 손자들과 함께 가면 우리 정서를 일깨워 주는 유익한 자리가 되리라 여겨집니다.
장옥전경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도 있고,
옛날 장터에서나 볼 수 있던 손저울이나 됫박 등도 진열되어 있습니다.
연세가 지긋한 분은 아득한 추억이 모닥불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를 것이고,
젊은 세대에게는 온고지신의 자리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곳에 가면 정영신의 ‘장날’전만 열리는 것이 아니라전각전도 오늘 개막되고,곳곳에 볼거리가 많습니다.
저 역시 이전에는 '돈의문박물관마을'을 잘 몰랐습니다.
한양도성 서쪽 성문 안 첫 동네인 새문안 동네를 보존 또는 재현했는데, 백년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미로 같은 골목길도 정겹고 곳곳에 볼거리와 체험 공간도 많았습니다.
마을 구경은 물론 늦가을의 향취를 맛보는 시간도 됩니다.
주말에는 방문객이 많아 휴관일인 월요일을 제외한 평일에 들리는 것이 꼼꼼하게 살펴보며 여유 있게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요즘 ‘장날’ 전시 때문에 다른 일은 손도 못 대고 있습니다.
일주일 후에 열릴 ‘인사동이야기’사진전은 아직 프린트도 못한 상태입니다.
마음은 편치 않아도 잘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정영신의 장터 사진전은 전국 각지에서 여러차례 전시를 한바 있으나 작품저장 창고나 마찬가지였던 정선집 화재로 모두 소실되어 '돈화문박물관마을' 작가갤러리에 맞추어 새로 제작했는데, 요즘은 판넬제작을 액자집에서 만들어 주질 않더군요. 돈도 되지않으면서 일이 많아 그런 모양인데, 액자 값에 가까운 금액을 치루고서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위치는 정동길 따라 올라가면 '경향신문사'가 있고 그 건너편 대로 건너 강북삼성병원이 보입니다. 강북삼성병원 바로 옆, 행촌동으로 넘어가는 좁은 골목길 건너편이 돈의문박물관마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