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답답한 세상을 산지가 이년이 넘었으나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

다들 외출을 자제하며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으나 책은 잘 보지 않는다고 한다.

처음엔 책이 잘 팔린다는 이야기도 나왔으나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하기야! 나 역시 모르는 것은 인터넷에서 뒤져보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신문 한 장 보지 않는 판에...

 

지난 8일 오후 여섯시 무렵 정영신씨와 함께 ‘눈빛출판사’ 예술산책이 있는 ‘경의선 책거리’에 갔다.

부산에서 이광수교수가 올라 오셨는데, '눈빛출판사 이규상씨와 사진가 김문호씨도 와 있었다.

격리기간 중에 약속한 일이라 달력에 동그라미까지 쳐두고 기다린 날이었다.

 

모처럼 반가운 분을 여럿 만났는데, 전시장 아닌 책방에서 만나는 기분은 또 다르다.

새로 나온 따끈 따근한 사진집을 살펴보는 설레 임을 알랑 가 모르겠다.

초딩 때 방학 책 받아보는 그런 기분 말이다.

시인이며 무용평론가이고 서양화가인 고)김영태선생의 '초개일기'가 서거14주기를 맞아 나왔고,

마지막 사진집이 될지도 모르는 한정식선생의 ‘가을에서 겨울로’도 눈에 밟혔다.

 

힌두교사 깊이 읽기/ 이광수 지음 푸른역사/ 2만 5000 원

이광수교수로 부터 ‘푸른역사’에서 펴낸 ‘힌두교사 깊이 읽기’란 책도 한 권 선물 받았다.

그 책은 힌두교에 대한 모든 것을 밝힌 책인데, 불교를 제대로 알려면 힌두교부터 알아야한단다.

힌두교를 모르는 불교 공부는 반쪽짜리라는 말에 더 관심이 생겼다.

불교가 인도의 역사에서 태어나 항상 힌두교와의 상호관계 속에서 변화했기 때문이란다.

 

이광수교수는 정치평론에서부터 사진평론에 이르기 까지 다방면에 해박하지만,

국내 유일의 힌두교사 전공자로 부산외대에서 인도학을 가르치고 있다.

너무 많이 알아 구라나 글 빨이나 아무도 당할 자가 없다.

오죽하면 교수가 아니라 교주로 부르겠는가?

 

책 1부에서는 '힌두교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고,

2부는 힌두교 형성 과정의 역사를 통해 힌두교 기원을 찾았다.

힌두교가 체계화되고 불교가 발생하는 과정을 살펴 본 것이다.

3부에서는 힌두교가 세 가지 전통을 흡수 통합하는 과정과,

힌두교의 구동 장치로서 바르나(카스트)를 분석했다.

 

뒤이어 힌두교의 특징 중 하나로 꼽히는 관용 그리고 관용과 뗄 수 없는

박해와 개종이 힌두교에서 어떤 모습으로 전개되었는지를 구명했다.

30여 년의 연구를 통해 "힌두교가 형성되고 변화해 온 모습과 성격을

인도사의 흐름에 따라 역사학적으로 분석했다"고 한다.

"상상으로 그려진 힌두교에 힌두교 본연의 색을 입혔다“는

'푸른역사' 신간 ‘힌두교사 깊이 읽기’를 강력 추천한다.

 

그리고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는 경영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임대료가 비싼 ‘디지털미디어시티역’에 있는 지금의 사무실을 없애고 파주로 옮긴단다.

이제부터 사진집 출판도 엄선해 줄여나가야 할 처지라는 말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 사진의 대표출판사인 ‘눈빛출판사’가 이럴 진데 군소출판사야 어찌 버티겠는가?

책 사보지 않는 풍토는 사진집을 펴내야하는 사진가들에게 고스란히 되돌아간다.

다들 필요한 책들을 살펴보고, 이제부터라도 책보는 것을 생활화했으면 좋겠다.

 

길거리는 많은 젊은이들이 오갔지만, 책거리에 널린 책방을 찾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이규상씨 따라 ‘경의선’이란 술집을 찾아갔다.

다섯 명이라 두 테이블에 나누어 앉을 수밖에 없었지만, 모처럼의 정겨운 자리였다.

술도 담배도 자가 격리 후 보름 만에 맛보는 터라 입에 짝짝 달라붙었다.

 

고기 굽는 데는 따를 자 없는 김문호씨가 구운 삼겹살로 입 호강을 했는데,

술만 취하면 나이 값을 못하는 내 버릇은 여전히 고쳐지지 않았다.

어찌 육두문자를 거침없이 뱉을 수 있단 말인가? 요즘처럼 남자 수난시대에...

또 하나 신기한 것은 흡연자가 별로 없는 판에 네 사람 모두 골초라는 점이다.

밖에서는 피우고 안에서는 마시며 시간가는 줄 몰랐다.

 

이차로 간 ‘홍대포’집에서는 주량을 초과해 더 이상 마실 수가 없었다.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이 원수를 살아생전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술김에 간크게도 택시를 불러 세웠는데, 거침없는 말에 삐쳤는지 정동지 입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신이시여! 굽어 살피소서.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이주 동안의 자가 격리는 해제되었으나

코로나 확진자가 급속히 늘어나 도무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일상을 포기하고 방에 갇혀 있을 수만 없지 않겠는가?

 

지난 화요일 격리에서 벗어나 모처럼 동자동에 갔다.

차창에서 올려다 본 하늘 풍경이 한 가닥 희망 같았다.

구름을 뚫고 나온 햇살이 서광처럼 비쳤는데,

그 형상은 마치 인간의 간절한 기도처럼 보였다.

 

동자동에는 새꿈 공원 접시꽃이 정겹게 반겼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듯 '서울역쪽방상담소'에서 곰탕 준다는 벽보가 나붙었다.

마치 알고 찾아온 것 처럼 주는 시간까지 딱 맞았는데

배급 현장은 다른 때와 달리 줄이 길지 않았다.

 

하기야! 요즘 다들 방에서 잘 나오질 않아 모를 수도 있겠더라.

황춘화씨는 곰탕 솥 채로 주는 줄 알았는지 손수레를 끌고 나왔다.

오는 순서대로 봉지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는데,

내용물을 확인하지 못했으나 제법 묵직했다.

 

공원엔 곰탕 준다는 공지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들은 밥보다 술이 더 고팠던 모양이다.

다들 수시로 나눠 줘 그런지, 그 고마움을 잘 모른다.

당연히 주는 것으로 길들어 버린 것이다.

 

나 역시 처음에는 얻어먹기 위해 줄서는 것이 창피했지만,

이젠 안 주면 기다려질 정도로 뻔뻔스러워 졌다.

최소한 어디서 누가 주는지는 알아야 고마워 할 것 아닌가?

이게 가난한 사람들 길들이는 게 아니고 무엇인가?

 

방에 올라와 봉지를 열어보니 일회용 곰탕과 입회용 백반,

일회용 김치가 각각 네 봉지씩 들어있었다.

밥해먹기 어려운 주민들이 간단히 끼니를 해결할 수 있도록 배려했는데,

나흘 동안 매 한 끼씩 보신할 수 있는 최고의 먹거리였다.

 

덕분에 아침을 겸한 점심식사를 맛있게 해결했다.

누가 베푼 온정인지 모르나 고맙게 먹었다.

그러나 빈민들에게 밥 한끼로 안주하게 하는 것보다

자립하도록 이끄는 것이 진정 돕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들 기초생활수급자라 그 정도의 음식은 사 먹을 수 있다.

우린 거지가 아니라 사람이고 싶다.

 

사진, 글 / 조문호

 

모두 버린다

물건도 사람도 쓸모 없어면 다 버린다

쳐 먹고 싼 똥처럼 쉽게 버린다

 

가족이 버렸고, 친구가 버렸고, 세상이 버렸다

 

혈혈단신 밀려 나 정처없이 떠 돈다

 

모진 목숨, 다 버려도 목숨만 못 버린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0일 세종대왕 영능과 명성왕후 생가가 있는 여주장에 들렸다.

코로나 자가 격리로 묶이기 전에 나선 마지막 나들이였다.

 

정오 무렵 여주장에 도착했는데, 한적한 시골장과는 달리 장터는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여주장은 1980년대부터 중앙시장이라 불리다, 2016년 문화 관광형 시장 육성 사업에 따라 여주한글시장으로 바뀌었는데,

입구에 설치한 장터이름이 세종장인지 한글장인지, 된장인지 고추장인지 헷갈렸다.

 

어느 지역을 가나 고유의 장터이름을 두고 왜 엉뚱한 이름으로 바꾸는지 모르겠다.

그 지역을 말해주는 여주장보다 더 친근하고 알기 쉬운 이름이 어디 있는가?

 

여주장이 여주한글시장으로 변신한 뒤, 곳곳에 한글을 형상화한 조형물과

세종대왕을 소재로 한 벽화가 들어섰지만, 한글과 장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상인들 말에 의하면 장사에 전혀 도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비가 올 듯한 후덥지근한 날씨였는데, 길에서 벌이는 행인의 신경전이 더 짜증나게 만들었다.

시장 길이라 차량이 줄을 잇지만, 어떤 남정네가 차를 못 가게 막고 선 것이다.

약 30분이나 버티고 있어 장꾼들이 수습하려 나섰으나 운전자의 고집도 만만찮았다.

차에서 내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면 해결될 일을 끝까지 내리지 않았다.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없는 길이라 누가 잘못했는지 모르겠으나, 둘 다 똑 같았다.

더구나 승용차 안에는 어린이와 여인도 타고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의 눈총을 받는 게 부끄럽지 않았을까?

차안은 시원할지 모르나 교통정리까지 해가며 땡볕을 지켜 선 남정네의 모습이 측은해 보였다.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얄팍한 자존심 싸움에 많은 행인들만 불편을 겪어야 했다.

결국 경찰이 개입하여 두 사람을 연행해 가는 것으로 막을 내렸지만,

자기밖에 모르는 인정머리 없는 세태의 전형이 아닐 수 없었다.

 

장터에서 벗어나 여주 명성로에 있는 명성황후 생가를 찾아갔다.

개화정책을 주도하다 쥐새끼 같은 왜놈들 칼에 무참히 살해된 명성황후의 어린 시절을 엿보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명성황후 생가는 태어나서 8살 때까지 살던 집이라고 한다.

숙종 13년(1687)에 지어진 집인데, 당시 건물로는 안채뿐이란다.

1996년 안채가 수리되며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함께 지어져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내부 구조는 큰방, 작은방, 대청마루, 부엌, 광, 사랑채, 별당채 등 모두 13칸의 아담한 건물이었다.

대문인 일주문과 정침이 있는 등 전형적인 조선후기 사대부 가옥구조였다.

 

생가 옆에 '명성황후탄강구리비'(명성황후가 태어난 옛 마을)라 쓴 고종의 어필비가 명성황후가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 옆에는 인현왕후의 아버지며 명성황후의 6대조 할아버지인 민유중의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도 있었다.

거북이 모양의 기단석 몸통을 가졌는데, 특이한 것은 용 형상을 한 머리가 그곳으로부터 150m 지점에 있는 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명성황후(1851-1895)는 경기도 여주에서 민치록의 외동딸로 태어나 9세에 부모를 여의고 1866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16세에 왕비가 된 후 대원군과의 불화가 지속되자 반대원군 세력을 규합, 탄핵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으로 이어진 일련의 사건 한 가운데 있었다.

명성황후는 3국 간섭으로 일본의 대륙침략 기세가 꺾이자 친러 성향으로 굳혔는데,

명성황후 세력을 일본의 조선 병합에 가장 큰 장애로 여겼던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일으킨 을미사변에 의해 무참히 시해 당한 것이다.

 

1895년 10월 8일 오전 7시 경복궁에 일본군 140여 명과 낭인들이 나타나 궁궐수비대와 총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총격전이 한창일 때 은밀히 궁궐의 담을 넘은 한 무리의 칼잡이들이 건청궁으로 진입했는데.

그곳에는 고종의 침전인 곤녕전과 명성황후의 침전인 옥호루가 있었다.

이들은 궁내부대신 이경직을 살해하고 궁녀와 환관 40여 명을 닥치는 대로 살해한 뒤, 옥호루에 있던 명성황후를 무참히 살해하여 시신을 불태운 것이다.

 

명성황후 생가 맞은편에는 명성황후 기념관이 있었다.

그 곳에는 명성황후와 고종의 어진 을 비롯하여·같은 시기에 활약한 여흥 민씨들의 유물과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명성황후의 친필과 시해당시 사용한 일본도(복제품)와 시해장면을 재현한 매직비젼 영상물 등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각종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일본 낭인들이 사용했던 칼집에는 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베었다”라고 적혔는데,

명성황후의 시해 암호명이 ‘여우사냥’이라는 것이다.

그 날의 참상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다.

 

한 가지 의문점으로 남는 것은 명성황후의 정확한 사진이 없다는 점이다.

당시는 신문물이 들어와 초상사진을 찍기 시작할 무렵이라 고종을 비롯한 대부분의 왕손 사진이 남았으나 유독 민비 사진만 불분명한 것이다.

일부 기록에 의하면 얼굴에 마마 자욱이 있어 사진 찍기를 꺼렸다고도 하고, 가름한 계란형의 얼굴에다 콧날이 오뚝 선 미인이라는 상반된 기록도 있었다.

조선을 방문했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대면록은 이러했다.

 

“민씨는 첫눈에도 예사로운 여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매가 날카롭고 매서웠으며 두뇌회전 또한 기민해 보였다.

성격도 대단히 차분하고 냉철하게 느껴졌다. 왕비는 마흔 살을 넘긴 듯 했고 퍽 우아한 자태에 늘씬한 여성이었다.

머리카락은 윤이 나는 흑단이었고 피부는 투명하여 진주빛을 띠었다. 눈빛은 차갑고 예리했으며 반짝이는 지성미를 풍기고 있었다”

 

일부 기록에 의하면 왜놈들이 사후에 사진을 모두 불태웠다는 설과,

시해 중 아무도 민비의 얼굴을 몰라 더 많은 궁녀를 무참히 살해했다는 상반된 설이 있는데,

어쩌면 정적에 대비해 사진을 찍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왜놈의 만행에 대한 분노를 삭이며 여주 능서면에 있는 영릉(英陵)을 찾았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가 합장된 최초의 합장릉으로 조선의 왕릉 중 풍수지리상 최고의 명당이란다.

영릉 묏자리 덕에 조선 왕조의 국운이 100년은 더 연장되었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다.

원래 영릉은 헌릉 서쪽 대모산(현 서초구 내곡동)에 있었는데, 세종의 능이 조성될 때부터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지관들이 강력하게 능 자리를 옮기자고 권했지만 세종은 "다른 곳에서 복지를 얻는다지만 선영 곁에 묻히는 것만 하겠는가?"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고 한다.

 

일단 세종의 고집대로 능이 조성되었으나 예종 때 천장한 곳이 지금의 영릉자리다.

그 묏자리는 본래 이인손의 묘택이었다고 한다.

당시 여러 지관들이 천장 장소로 여러 곳을 추천했는데도 굳이 우의정을 지낸 공신의 묘를 택한 진짜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천하의 명당이기도 하지만, 광주 이씨의 기를 잘라내기 위해서라는 말도 따랐다,

 

어떻던 최고의 명당자리에 세종과 소헌왕후 심 씨 합장릉인 지금의 영릉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2개의 격실 사이에 48센티미터의 창을 뚫어 왕과 왕비의 혼령이 통하게 만들어 합장릉의 의도를 더욱 분명하게 했다고 한다.

 

합장릉 봉분 둘레에 12면으로 꾸민 돌난간을 둘렀으며 난간 석을 받치는 동자 석주에는 한자로 십이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했다.

 

봉분 능침 주변의 석양과 석호는 서로 엇바꾸었고, 좌우로 각각 2쌍씩 8마리가 밖을 향해 능을 수호하는 형상이었다.

 

봉분 앞 중계에는 문인석 1쌍, 하계에는 무인석 1쌍을 세우고 문무인석 뒤에는 각각 석마를 배치하고 있었다.

 

세종은 우리 장례문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중국 풍습에 따른 수레에서 상여로 바꾼 것이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아 어깨에 메는 상여가 좋다."며 대중화를 꾀했다.

상여는 매우 과학적인 원리에 의해 만들어졌다.

폭이 1미터도 안 되는 좁은 논두렁을 지나갈 때 양쪽의 상여꾼들은 각각 발을 좁은 길의 벽에 붙이면서 한 발 한 발 지나갈 수 있는 것이다.

경사진 산비탈은 물론 아무리 좁은 길도 지나갈 수 있는 것은 역삼각형 피라미드 형태를 취해 힘을 분산시켜 통과하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이 자랑하는 지게 원리와 비슷한 것이다.

 

세종대왕은 안으로는 훈민정음을 창제했으며, 밖으로는 6진을 개척해 국토를 확장하는 등 조선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다진 최고의 군왕이었다.

 

묘역 인근의 세종대왕동상 주변에는 세종 16년 장영실, 김빈 등이 왕명을 받아 만든 물시계 자격루를 비롯하여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관측하던 장치 혼천의, 측우기, 조선 시대에 사용하던 해시계 앙부일구 등 많은 발명품들이 전시되어 세종대왕의 위업을 자랑하고 있었다.

 

여주는 조선의 화려한 위업과 비참한 운명을 함께 간직한 곳이었다.

 

사진, 글 / 조문호

 

]

지난 일요일 여주장터 다녀오는 길에 수원 화성에 들렸다.

‘사진공간 움’을 운영하는 홍채원 관장과 정영신 동지가 만나는 자리에 따라갔다.

네비 지시 따라 수원화성 창룡문 동일치 부근에 갔더니 ‘이백’이라는 카페가 있었다.

 

수원화성 앞에 이런 멋진 사진전문 갤러리 카페가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문 연지가 일 년이 되었다는데, 사진만 좋아하지 우물 안 개구리인 셈이다.

그 흔한 사진잡지 한 권 보지 않으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사진가 홍채원씨가 반갑게 맞아주었는데, 이백 카페의 실내장식이 독특했다.

전시장에서는 레나의 ‘멀리 나아가는 평행선들의 집합’이라는 제목의 사진전이었는데,

상상을 초월한 전시가 통념을 뒤집은 공간에서 열리고 있었다.

 

사진전 보다 카페 실내공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요즘 집 지을 생각에 부쩍 실내 디자인에 관심이 많아서다.

카페 장식이 도예가 공방이나 개인전처럼 보였는데, 사진 전시공간과의 분명한 구분이 필요했다.

 

사진전은 작가 스스로의 감정을 쏟아 낸 전시였다.

성의 정체성 등 약자의 울분을 갖가지 방법으로 표출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사진을 기반으로 한 설치나 비주얼 아티스트였다.

 

인형의 머리, 물감과 알약이 범벅된 마네킹 사진, 휴지를 찍은 희멀건 사진 등 대개가 낯설었다.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거나 알지만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불편한 현실을 보여주는 전시라 그런지 작품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불편했다.

의도한 불편이었다. 작가를 만난 적은 없으나 사회적 문제점을 자신만의 어법으로 고발하는 작가정신이 돋보였다..

 

홍채원관장 이야기로는 후암동 ‘KP갤러리’에서도 전시를 한 적이 있다는데, 어떤 전시였을까?

그 곳에서 열리는 전시는 대부분 보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작품이라면 이주용씨를 비롯한 세 작가가 참여했던 “충돌하는 이미지”에서 보여 준 이진경의 자학적인 검정비닐 초상사진 뿐이다.

 

욕망이 만들어 낸 고통 받는 인간의 모습을 상징했는데, 아마 이름만 다르지 같은 작가인 것 같았다.

 

그런데, 레나의 전시는 25일까지 열리는데, 갑작스런 코로나 자가 격리에 걸려 꾸물대다 포스팅이 늦어졌다.

그리고 촉박한 일정에 수락하지 않아 다행이지 다음 전시에 정영신씨가 하게되었다면 어쩔 뻔 했나? 꼼짝도 할 수 없는 형편인데...

 

‘사진공간 옴’의 다음 전시는 홍채원씨 전시로 결정된 것 같은데, 어떤 내용일지 기다려진다.

그 곳에 놓인 홍채원씨 사진 한 점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좁은 골목에서 김장하는 풍경을 부감으로 찍었는데,

공중을 쳐다보며 손을 치켜든 어린이 모습이 무슨 절규처럼 다가왔다.

 

언제 개막될지 정확한 날자는 모르지만, 다들 기대하시라.

 ‘홍채원 사진전, 개봉박두!’

 

사진, 글 / 조문호

 

장흥은 많은 문인과 학자를 배출한 지역이다.

기행가사의 효시로 통하는 ‘관서별곡’을 지은 기봉 백광홍이 장흥에 살았고,

임금이 중심을 잡고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만언봉사'를 상소한 존재 위백규도 장흥사람이다.

소설가 이청준, 한승원, 송기숙도 장흥사람이라 장흥을 '문향'이라 부른다.

 

지닌 토요일 정동지와 ‘정남진 토요시장’이 열리는 장흥에 갔다,

도착하니 점심 때라 장마당이 식당 같았다.

할머니들이 장에 소풍 나온 것 같은 정겨운 풍정이었다.

 

정동지는 밥 먹으라는 인사에 기다린 듯 달라붙어 쌈을 싸 먹었다.

장돌뱅이 수 십 년에 장꾼들에게 꼽사리 끼이는 게 몸에 베어버렸다.

더러 아는 장꾼을 만나면 죽은 사람 만난 것 처럼 반가워한다.

“아이구! 어찌까이~ 이리 와보랑께~ 뽀짝 와바야~ 한나도 안 늙었네”

가까이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신세타령을 풀어놓는다.

 

장터에는 할머니들이 옹기종기 모여 몇 되지 않는 손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매실이나 양파 등 집에서 키운 야채를 가져와 펼쳐놓았지만, 파리만 날렸다.

 

그 중 어물전에 손님이 많았다. “영감 밥상에 자반이라도 한 손 놓아야제!”

사람이 줄어들어 변해가는 오일장이지만, 아직은 노인들의 유일한 탈출구다.

한 노인는 반주로 마신 술이 과했는지, 쉼터 바닥에 누워버렸다.

 

장흥의 마동욱씨 전화를 받고서야 장터에서 벗어났다.

가는 길에 교촌리 장흥천도교당부터 들리기 위해서다.

장흥천도교당은 목조전통한옥인데, 왠지 왜색 분위기가 풍겼다.

 

정면 5칸, 측면2칸의 팔작 기와지붕으로, 개축할 때 정면 입구에 포치형을 덧단 형태로 만든데 다

거무스름한 나무색갈이 주는 이질감인 것 같았다.

 

대청의 중앙후면에는 제단을 두었고, 전면에는 유리창으로 된 네쪽 합문과 쪽마루를 두었는데,

‘성화회실’, ‘사무실’, ‘응접실’이라 쓴 글씨체가 둔탁했다.

 

장흥천도교당은 교당 건물로서 몇 개 남지 않은 건축물이라는 점과

독립운동을 한 인물들과 연계된 공간구조라 중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구조양식의 변형은 전통한옥이 개화기 여러 문화와 변용되면서

만들어진 근대화 과정의 대표적 표상이라고도 한다.

 

이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옥당리 효자송을 찾아갔다.

밭을 가로지르는 농로 옆에 자리 잡았는데, 나무 높이가 12m로 가슴높이에서 세 갈래로 갈라져 넓게 퍼져있었다.

나무 나이는 150년이란다.

 

옛날 효성이 지극한 위씨가 어머니를 위해 심은 나무라고 한다.

뙤약볕에 앉아 아들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어머니가 안 스러워

그 곳에 곰솔을 심어 어머니가 쉴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옥당리 효자송 맞은편을 바라보니 궁전 같은 이상한 요새가 버티고 있었다.

가보니, 2012년 SBS 드라마 '신의' 세트장으로 사용한 ‘전관대’라고 적혀 있었다.

인적 끊긴 천관대는 잡초만 무성했다.

 

한 때 ‘사상의학 체험랜드’로 바뀌어 한방의학이 필요하거나 농촌 숙박체험을 원하는 이들에게 시설을 제공해 주기도 했다는데,

찾는 이가 없어 점차 폐허화 되어가고 있었다.

 

건물은 마치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음산한 분위기였는데,

풀숲에서 기어 나오는 뱀을 보고서야 발길을 돌렸다.

사람이 살지 않아 자연은 살아있었다,

 

다음에는 장동면 만수리 천관산 자락에 자리 잡은 `해동사`를 찾아갔다.

해동사는 국내 유일의 안중근의사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매년 음력 3월이면 제향을 지낸다.

 

장흥 죽산안씨가 안중근 의사 후손이 없어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1955년 만수사 부지에 안중근의사 사당을 건립했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해동명월(海東明月)이라는 휘호를 받아 해동사로 이름하게 되었단다.

장흥의 죽산 안씨들이 장흥과 아무 연고도 없는 순흥 안 씨의 안중근 의사 사당을 세운 것은

민족과 대의를 생각하는 장흥사람들의 높은 정신을 볼 수있는 대목이다.

 

사당 내부에는 안중근 의사 영정 2점과 친필유묵 복사본이 보관되어 있었다.

안중근 의사 의거 숭모와 추모 열기가 뜨거워지면서 해동사를 찾는 발길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장흥군은 안 의사 숭모 열기를 감안해 2021년까지 70억 원을 투입해 해동사 주변을 역사교육 현장으로 만드는

역사관광 자원화 사업을 추진하느라 주변일대가 한창 공사 중이었다.

 

장흥에 가면 꼭 가보아야 할 사찰은 보물이 숲을 이룬다는 ‘보림사’다.

신라 선문구산 중에서 제일 먼저 개산한 가지산파의 중심 사찰로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 말사다.

 

신라 헌안왕의 권유로 이 산에 들어온 체징이 터를 잡아 860년에 창건하여 가지산파의 중심사찰로 발전시켰는데,

한국전쟁으로 소실되기 전까지는 20여 동의 전각을 갖춘 대찰이었다고 한다.

공비들이 이 절을 소굴로 사용하다 도주하기 전에 불을 놓아 대웅전을 비롯한 대부분의 전각이 불타고, 천왕문과 사천왕·외호문만 남았다고 한다.

 

16세기 초에 제작된 이 사천왕상은 천왕문에 안치된 목조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세밀한 기법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높이 사고 있다.

전체적인 균형감과 활달한 율동감이 탁월한데, 사천왕상이 일반적으로 긴 칼을 들고 있는 것과 달리 양손에 짧은 칼을 잡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오른쪽에는 호화롭게 장식된 보관을 쓴 동방 지국천왕이 성난 표정으로 있다,

갑옷과 천의를 입은 건장한 체구에 오른손으로 칼자루를 잡고 왼손은 칼끝을 받쳐 들고 있다.

북방 다문천왕은 높직한 보관을 쓰고 미소를 띤 인자한 모습이다.

비파를 들고 있는 선비형의 눈썹과 긴 턱수염이 부드러운 인상을 풍기는데,

발아래에는 힘에 겨운 듯 고통스러워 하는 악귀가 왼쪽다리를 받쳐 들고 있다.

왼쪽에는 남방 증장천왕과 서방 광목천왕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보림사 사천왕 4위의 신체 구조는 팔꿈치에서 손가락까지만 변화가 있을 뿐 거의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것은 목조사천왕상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특징 중의 하나다.

팔뚝처럼 신체의 강건함을 강조하려는 듯 다리 자세에서도 두툼한 질량감을 드러낸다.

 

그 외의 중요문화재로는 국보인 보림사 삼층석탑 및 석등과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있고,

보물로는 동부도와 서부도, 보조선사창성탑, 보조선사창성탑비 등이 있다.

 

남·북 삼층석탑 및 석등은 870년 경문왕이 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건립한 원탑이다.

석탑의 구조는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세우고 그 위에 상륜을 얹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이다.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상층기단이 큰 데 비해 하층기단은 좁게 구성되었다.

탑신부의 폭에 비하여 우주의 폭이 가늘고 옥개석 낙수면도 얇아 가냘픈 느낌을 준다.

 

상륜부는 노반,·복발,·앙화,·보륜,·보개,·보주 순으로 각 부의 부재를 모두 갖추고 있는데,

앙화석까지는 양쪽 탑이 같은 수법을 보이고 있으나 남 탑의 보륜은 삼륜, 북 탑은 오륜이 장식되어 있다.

이처럼 상륜이 완전하게 남아 있는 것은 퍽 드문 예라고 한다.

 

석등 역시 전형적인 신라석등이다.

지면에는 네모난 지복석과 지대석이 차례로 놓여 있고, 지대석 위에는 3단의 8각 하대석 받침이 마련되었다.

하대석은 높은 받침과 복련석으로 구성되었는데, 받침 측면에는 안상이 조각되었고 복련석에는 연판이 조각되었다.

 

이 탑은 탑 속에서 발견된 탑지에 의하여 확실한 건탑 연대를 알 수 있어 다른 석탑의 건립연대를 추정하는 데 하나의 기준이 되는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또한 석탑과 석등 모두 온전한 형태로 남아 귀중한 복원자료가 되고 있다.

 

보림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도피안사철조비로자나불상과 더불어 통일신라 말기의 대표적인 불상이다.

지금은 광배와 대좌를 모두 잃어버리고 불신만 남았는데, 이 불상 왼쪽 어깨 부분에 여덟 줄의 불상 조성기가 음각되어 있다. 

머리 부분이 몸집에 비하여 크게 보인다. 머리와 불신의 비율이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비슷한데. 육계가 비교적 큼직하며 얼굴은 달걀형이다. 편편한 콧잔등과 가늘고 긴 눈, 사다리꼴의 두드러진 인중, 작은 입 등으로 보아 상당히 추상화된 경향을 보인다. 당당한 자세와 가슴, 팽창된 체구 등 건장한 불신을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로 상체가 약간 움츠러든 위축된 느낌이라 긴장감과 탄력성이 다소 줄어들었다. 이처럼 당당하게 보이면서도 해이해 보이는 선의 특징은 도식적이고 기하학적인 묘사와 더불어 9세기 후기 불상 양식의 선구적인 면을 보여준다. 이러한 양식이 발전하여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나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같은 9세기 후기 조각 양식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보림사 보조선사탑비통일신라시대의 고승 보조선사 지선의 탑비로서, 그가 입적한 뒤 4년 만인 884년에 사리탑과 함께 조성되었다.

이 비는 비신과 귀부,·이수를 모두 갖춘 완전한 형태로 남은 유적인데, 이수 중앙에 “가지산보조선사비명”이라는 글이 적혀 있다.

비를 받치고 있는 귀부는 얼굴이 용머리처럼 변하였으며, 조각의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사납게 보인다.

등 뒤에는 육각의 귀갑문이 등 전체를 덮고 있으며, 등 가운데 구름문과 연꽃을 돌린 비좌를 두어 비신을 받치게 했다.

이수 아래는 구름문을 조각하고 비제의 좌우에 대칭적으로 승천하지 않은 용을 조각하였는데, 조각수법이 훌륭하다.

이 비는 9세기 말경의 석비양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당시 조형수준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란다.

 

그리고 40미터 위쪽에는 보조선사탑이 자리잡고 있었다.

부도는 높은 8각 지대석에 가장자리를 따라 낮은 모난 받침을 마련하여 세웠는데, 기단부는 상대석,·중대석,·하대석으로 구성되었다.

하대석은 상하단 모두 8각인 것이 확실하나 파손이 심하여 그 윤곽이 분명하지 않으나,

하단은 각 면에 안상이 있고 상단에는 사자상을 조각한 흔적이 남아 있다.

옥개석의 추녀는 길게 뽑지 않고 탑신에 비해 단출한 느낌이 들도록 폭을 좁게 하여 전체적으로 이 부도가 늘씬하고 세련되어 보인다.

탑신석은 유난히 넓고 크며, 8각의 각 면에는 모서리기둥이나 대접받침 등이 모각되어 목조가구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탑신 여덟 면에는 문비형을 모각하고 그 좌우에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는데 갑주가 화려하다.

사천왕상은 각기 광배와 대좌를 갖추고 있으며 몸 좌우로는 천의가 휘날리고 있다.

창과 탑을 든 북방 다문천상을 제외하면 모두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다.

 

이 부도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탑신에 새겨진 사천왕상이다.

염거화상탑에서 사천왕이 처음 등장한 이후 고려 초까지 대부분의 탑신에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사천왕은 부처님을 호위하는 신중으로, 선사의 묘탑인 부도에 사천왕이 등장한 것은 선사를 부처와 같이 동등하게 생각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부도의 조성연대는 880년경으로 추정된다.

이 때는 왕실의 후원을 입어 선승들의 부도와 탑비가 활발하게 만들어지며 예술적으로 뛰어난 부도가 만들어지던 시기였다.

보조선사탑은 이 시기 조형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전의상암지 석불입상은 제암산 중턱의 의상암으로 전해지는 폐사지에 있던 것을

1975년 인근 장흥교도소 정문 앞에 옮겼다가, 1994년 보림사 경내로 모셔온 불상이다.

석불입상은 광배와 불신을 한 돌에 새겼는데, 광배는 상당 부분 파손된 상태이다.

민머리에 커다랗고 둥근 육계가 솟았으며, 얼굴은 원래 둥글고 온화한 모습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보수된 지금의 이목구비는 여성적이다. 체구가 아담하고, 각부의 균형과 비례감이 좋고 조각기법도 우수한 편이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어 엄지와 둘째손가락을 둥글게 맞대었으며, 왼손은 손목 아랫부분이 깨어져 원형을 알 수 없는 상태다.

 

그 외 유적으로는 장흥읍 건산리에 청동기시대의 주거지가 있는데, 곳곳에서 석기 등이 출토되고 있다.

천관산과 억불산 주변에는 고인돌이 수백 기나 되며, 특히 관산읍 방촌리에는 한곳에 100여기가 무리 지어 있다.

산성으로는 장흥읍 건산리의 중녕산고성, 용산면 계산리와 안량면 수양리에 걸쳐 있는 학성,

관산읍의 성산리에 석남산성, 방촌리와 외동리에 회주산성과 천관산성 등이 있다.

 

사진, 글 / 조문호

 

장흥의 마동욱씨는 고향이 좋아 장흥만 찍어 온 사진가다.

젊은 시절 교도관으로 근무하기도 했으나 사진에 미쳐 고난의 길에 빠져들었는데,

미쳐도 고향과 함께 미쳐 천만다행이었다.

 

고향을 찍은 사진가로는 장흥에서 제일 먼저 사진관을 차린 강수의 선생도 계셨다.

10여 년 전 9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 분의 고향에 대한 애착도 남달랐다.

사진기억들을 모아 ‘사진으로 보는 장흥 100년사’를 펴내기도 했다.

 

그 뒤를 이어 반평생동안 고향과 사진에 미쳐 사는 이가 이번에 마을창고를 사진창고로 만들려는 마동욱씨다.

장흥은 지역 사진가들의 고향사랑이 남다른 지역이었다.

 

다들 고향을 잃은 실향민처럼 살기에, 그의 고향사랑이 더 가슴 시린 것이다.

고향이란 태어난 땅에 대한 애착에 앞서 그 곳에서 함께 살았던 사람일 것이다.

그가 보여 준 장흥사진에는 장소성을 드러낸 사진이 주종을 이루지만 결국은 함께 살아 온 이웃에 있었다.

 

그동안 ‘정남진의 빛과 그림자’, ‘그리운 추억의 고향마을’, ‘탐진강의 속살’, ‘하늘에서 본 장흥’,

‘고향의 사계’, ‘하늘에서 본 보성’, ‘아! 물에 잠긴 내고향’, ‘월평-월평마을120주년’,

‘장흥파 각 문중재각’등의 고향에 대한 사진집만 수없이 펴냈다.

다들 팔리지 않는 사진집을 저렇게 만들어 어쩔 것인가 걱정했으나 어렵사리 헤쳐 나갔다.

힘들어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함께 해 온 이웃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돈은 못 벌었지만, 계속 일할 수 있는 발판은 깔아놓은 셈이다.

 

오래 전 인사동에서 열린 그의 전시 개막식에 몰린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지역 국회의원은 물론 장흥사람들이 먼 전시장까지 얼마나 많이 왔는지, 마치 장흥사람들 총 동창회하는 것 같았다.

그의 사람에 대한 진정성과 정치성을 동시에 알아 챈 것이다.

 

저렇게 하려면 그동안 고향사람들에게 얼마나 베풀었겠는가?

그의 사람 사랑은 고향사람에 거치지 않고 사진판에서도 마찬가지다.

지인들 전시만 열리면 먼 길을 마다하고 찾아 와 축하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는데,

오히려 축하 받는 당사자가 송구스럽다니까... 그의 타고 난 천성인 것 같았다.

이럴 때 생각나는 유행가 구절이 있다. “정이란 무엇인가?”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오래 전 ‘정남진의 빛과 그림자’란 사진집을 보내주면서다.

두꺼운 판형의 사진집이었는데, 처음엔 아름다운 풍경이나 찾아다니며 찍는 작가협회에 속한

전형적인 아마추어로 여겨 제대로 보지도 않고 처박아 두었다.

한 마디로 흑사리 쭉지로 본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고향사랑에 대한 집착을 알고서야 달리 보였다.

어떤 이는 그의 사진이 비슷비슷한 사진이  많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도 하지만,

누가 뭐래도 그건 강남 스타일이 아니라 마동욱 스타일이라는 것이다.

바로 사진보다 마음을 주고받은 사람에 있다.

 

나 역시 사람이 좋아 사람을 찍지만, 살다보면 생각이 다르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일로 등 돌릴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

초지일관 아우르며 포용하기란 마음에서 우러나는 정 없이는 쉽지 않은 것이다. 그는 언제나 사진보다 사람이 먼저다.

 

그는 장흥지역의 300여 마을을 드론으로 촬영하여 '하늘에서 본 장흥'을 펴내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영암지역 600여곳을 찍었고 최근에는 강진 지역으로 확대해 사진 작업을 한다는데, 펴낸 사진집을 펼쳐보니 마치 지적도를 보는 것 같았다.

한 편으로는 우리나라 전역을 떠돌며 지도 작성에 평생을 바친 고산자 김정호선생의 대동여지도가 생각나기도 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겠는가?

 

이젠 집 부근의 문 닫은 새마을창고를 빌려 사진창고가 아닌 보물창고 만들 야심찬 작전을 짜고 있었다.

 

지난 토요일, 정남진 토요시장 가는 길에 마동욱씨 만나러 평장마을로 찾아갔다.

작년 11월, 평장마을 ‘새마을’ 창고에서 ‘우리 마을로 간다’는 장흥마을문화제를 열었는데,

아직까지 철수하지 않았다며 한 번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아서다.

 

정남진 토요시장에서 정동지와 열무비빔국수로 요기를 하고 전시가 열리는 평장마을 창고를 찾아갔더니

마동욱씨가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넓은 창고공간 벽에 크고 작은 사진자료들이 빼곡이 전시되어 있었다.

 

금안, 대반, 덕제, 송산, 순지, 평장 등 여섯 개 마을을 기록한 전시회에는

마동욱씨를 비롯하여 문충선, 서선미, 류은숙씨 등 네 명의 지역 사진가가 참여하고 있었다.

전시된 사진 한 장 한 장에는 긴 세월 마을을 지키며 고단한 삶을 살아온 어르신들의 애환이 배어 있었다.

점차 사라져가는 마을의 역사를 문 닫은 새마을창고에서 보여 준 의미 있는 전시였으나,

힘들게 살아온 지역민들의 이야기만 텅 빈 창고에 메아리처럼 번졌다.

 

이 전시를 계기로 새마을창고를 전시장으로 활용할 앞으로의 계획도 말했다.

지자체 도움을 얻어 지역 자료관을 겸한 전시관으로 만들 것이란다.

천장 높은 창고의 특성을 활용한 구조설계도 좋아야 겠지만, 앞으로의 운영안도 풀어야 할 숙제였다.

얼마 남지 않은 주민 이외의 외지인들을 끌어드리려면 전시나 행사 기획력이 탁월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원한 냉커피나 한 잔하자며 집으로 안내했는데, 가보니 새로 지은 집이었다.

오래 전 가본 집이 아니라 대출받아 새로 지었다고 했다.

아담하고 편리해 보여 얼마나 들었냐고 물었더니, 1억이나 들었다는 답에 깜짝 놀랐다.

요즘들어 건축비에 부쩍 관심이 많은 것은 정선 집지을 생각 때문이다. 다들 자재비보다 인건비가 더 무섭다며 집짓기 힘들다고 했다.

 

그리고 ‘광주교도소’사진집을 출판한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촬영을 끝내고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다는데, 그는 교도관으로 근무한 이력이 있어

어떤 사진가보다 교도소 구조물의 의미를 제대로 나타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일었다.

 

이사한 것도 모르고 빈손으로 찾아 갔는데, 마동욱씨 부인은 냉장고에 숨겨둔 짱아치를 꺼내 주었다.

저렇게 안팎에서 챙기니 사람들이 꼬이지 않겠는가? 남편이 돈을 벌지 못하니 아내가 식당에 일하러 나간단다.

한 곳에 미쳐 사는 남편을 둔, 새까맣게 타 버린 아내의 심정을 난들 어찌 모르겠는가?

 

기념사진이라도 한 장 찍자며 마당에 불러 세웠더니,

마동욱씨 표정에 아내를 향한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묻어났다.

고향사진은 마동욱씨가 찍었지만, 아내 같은 든든한 후원자가 있어 가능했던 합작인 셈이다

부디 힘을 합쳐 사진창고가 아닌 장흥의 보물창고를 만들길 바랍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전북 진안에 있는 '공동체 박물관 계남정미소'에서 김지연의 ‘봄날은 간다’ 사진전이 열렸다.

 

사진가 김지연씨가 ‘계남정미소’를 구입하여 박물관 겸 전시관을 열었다는 소식을 접한 지가 어언 15년의 세월이 흘러버렸다. 그곳에서 수많은 전시소식들이 들렸으나 연이 닿지 않아 그런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전시는 지난 5월30일까지였지만 전시를 철수하지 않아 볼 수 있었는데, 난처한 것은 전주에서 쉬는 분을 불러내야하는 불편을 끼쳐야 했다. 이렇게라도 보지 않는다면 죽기 전에 ‘계남정미소’ 가보기란 틀린 것 같았다.

 

가는 길에 여산장 갈 계획도 세웠지만, 일요일 장터는 가나마나였다. 전 날 퍼마신 피로감에 차에서 정신없이 자고 일어나니, 여산장의 명물이라는 장터 짜장면 집으로 안내했다. 정오 무렵 진안 마령면에 있는 ‘계남정미소’로 출발했는데, 전주에서 떠난 김지연관장도 같은 시간에 도착했다.

 

고색창연한 양철지붕의 정미소를 보니 아련한 추억이 떠올랐다. 사진전 제목처럼 봄날은 무정하게 가버렸지만, 옛날 고향 정미소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시끄러운 컨베이어 벨트 소리 끊긴 정미소에 음악을 울렸던 그 청춘의 시절이...

 

문 닫은 정미소를 음악실로 개조했으나 시골에서 음악실 찾을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겠는가? 기껏해야 시골학교로 발령받은 선생들뿐이었다. 주말이면 부산을 비롯한 외지에서 찾아오는 친구들만 붐볐는데, 음악실인지 술집인지 분간 되지 않았다.

 

결국 모두가 잠든 한 밤중에 트럭을 불러 삼천장이나 되는 엘피판과 오디오를 싣고 부산 하단의 ‘에덴공원’이라는 손님 많은 낙원을 찾아 야반도주 한 것이다. 오디오 다칠까 친구와 짐칸에 웅크려 세찬 겨울바람을 맞았던 고생도 이젠 그리움으로 변해버렸다.

 

 

김지연씨가 보존해 온 ‘계남정미소’는 지역문화의 숱한 기억을 간직한 보물창고였다. 근대유산과 마을 공동체문화를 접목시켜 주민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전시장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오래된 결혼사진이나 이발관, 구멍가게, 퇴역 병을 찍은 '할아버지는 베테랑' 등 사라져가는 마을의 유산을 수집하거나 기록해 왔다. 방앗간에서 정미소로 정미소에서 도정공장으로 변해 온 시골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15년 동안 지켜 온 것이다.

 

진안 계남면에 있던 쓰러져가던 정미소가 지역에 바람을 일으키며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기까지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가장 보람을 느낀 일이 스스로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한 개인의 인생이 소중한 작품으로 재평가 받던 기억이란다.

 

한 때 문을 닫았다 다시 열었다지만, 외진 곳이라 칠십대인 김지연관장 혼자 관리하기는 한계가 있었다. 전주에 있는 갤러리 ‘서학동사진관’까지 운영하려니 얼마나 바쁘게 살았겠는가? 거리조차 만만찮은 두 곳을 운영하기란 힘에 부치는 것 같았다.

 

자치단체마다 지역문화를 살리려는 노력과 투자가 더해지고 있는 현실에, 운영의 어려움에 처한 ‘계남정미소’를 진안군에서 왜 방관하는지 모르겠다. 성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문화유산조차 문을 닫아야 하는가? 전시 지원은 차지하고라도 최소한 상근할 수 있는 인력지원은 해 주어야 할 것 아닌가? 그 곳까지 찾아가 문이 열려 있지 않다면 누가 두 번 다시 찾겠는가?

 

고즈넉한 ‘정미소’ 분위기에 걸맞은 김지연씨의 ‘봄날은 간다’ 초상전도 일조했다. 술만 취하면 눈물콧물 짤아가며 청승스럽게 불러대던 그 노래 제목이 아니던가?

 

전시된 사진들을 살펴보니 애잔한 노인들의 초상사진에서 한 시대상을 읽을 수 있었다. 시커멓게 그슬린 피부와 거친 손 마디마디가 훈장처럼 빛났다. 단정하면서도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자세나 각자 다른 어색한 손의 위치도 흥미로웠다.

 

대개 연로하여 이제 세상을 떠난 분도 더러 있을 것이니, 마을 역사의 주역들이 박물관에 소장된 거나 다를 바 없었다. 정말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사진전이었다. 흔히들 찍어주는 노인 영정사진에서 전신을 찍은 초상 작품으로 진화한 전시였다.

 

차 한 잔 나누며 그동안의 하소연을 들었는데, 이제 김지연씨도 지친 것 같았다. 주민들조차 공간의 가치를 몰라주니, 무슨 힘이 나겠는가? 나 역시 문화의 가치를 몰라 배타적인 시골사람들을 겪어보았기에 누구보다 이해되었다. 뜨락에 열린 빨간 보리수 열매조차 애처로워 보였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전국 정미소를 기록해 둔 김지연씨의 사진을 주축으로 정미소의 모든 것을 소장한 '정미소박물관'으로 재정비하여 마이산과 연계한 관광코스를 만들었으면 좋겠더라. 주차장과 부대시설은 물론 당장 소화전부터 비치해야 할 것 같았다. 진안군에서 파견한 직원이 상근하여 월요일 휴관일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관람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김지연씨가 없다면 누가 관리할 것인가?

 

많은 그리움을 남겨두고 전주에 있는 갤러리 ‘서학동사진관’으로 옮겼다.

마침 그곳에서 전시 한 김학량의 ‘짱돌, 살구씨, 호미’ 전시가 끝나는 날로 작가가 작품을 철수하고 있었다.

 

그곳은 지역문화를 위해 온 힘을 쏟아 부었던 김지연씨의 애착과 한숨이 배어있는 공간이었다. 다들 돈 벌기 위해 눈이 벌겋게 설치는데, 돈 되지 않는 일에 수십 년을 바쳐 온 한 사진가의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늦게나마 뜨거운 성원을 보내며, 좋은 결실 있기를 바랍니다.

 

 

사진, 글 / 조문호

 

김지연 사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