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XEL PIXIE

 

황규태展 / HWANGGYUTAE / 黃圭泰 / photography 

2021_0501 ▶ 상설전시

 

황규태_Pantheon of Kazimir Severinovich Malevich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71013i | 황규태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온라인 전시linktr.ee/MuseumNabita

 

블록체인 소셜 미디어 '피블(PIB)'은 전시 기획사 '나비타아트'와 함께 한국 현대사진의 거장 황규태(b.1938) 작가의 NFT ART 전시 『PIXEL PIXIE』를 최초로 기획 진행한다. ● 시각예술 분야에서 오래 활동해 온 전문가들이 모여 만든 이번 전시는, 메타버스 공간 '솜니움 스페이스'와 '크립토복셀'에서 동시에 열리며 황규태 작가의 NFT 新작품 총 36점이 공개된다. 인스타그램 @nabitamuseum에 게시된 링크로 접속하여 누구나 관람할 수 있고 작품 거래는 ▶ 오픈씨로 제공한다.. ● 앞으로 피블은 나비타아트와 협업하여 NFT ART가 마켓 플레이스에만 집중되지 않고 미술시장의 새로운 장르로 자리매김하여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디지털 콘텐츠에 최적화된 전시 기획과, 작품 비평, 교육, 아티스트 지원 등을 지속할 것이다.

 

 

황규태_PIXEL PIXIE展_솜니움 스페이스_2021(▶ 바로가기 / 사진_나비타아트)

 

 

픽셀의 세상 NFT ART, 픽셀 탐험의 선구자 황규태  "픽셀은 비트(bit)의 분열과 융합의 이합집산이 엮어내는 미개의 행성이다. 이 행성은 태양계를 훨씬 벗어난 탐미의 성간 어느 지점에 있다. 나는 이 알몸의 행성에 예술이라는 옷을 입혀놓고 그와 나는 은밀히 비밀결탁하면서 환희의 맨발로 춤을 춘다. 나는 오랜 세월 픽셀과 동거동침하면서 그가 보여주는 몸짓과 초월적 반응에 경의하고 있다. 그와 내가 추는 이 봄의 제전은 말레비치의 백년에 바치는 헌사이다." (황규태) ● 황규태 작가는 언제나 실험 사진의 최전방에서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1960년대에 이미 필름 태우기, 차용과 합성, 아날로그 몽타주, 이중 노출 등을 시도해 문제적 작가로 이름이 오르내렸다. 이후 1980년대부터 시작된 디지털 이미지에 대한 관심은 디지털 몽타주, 꼴라주, 합성 등의 다양한 실험으로 이어졌다. 그 긴 과정의 끝에서 작가는 디지털 이미지를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인 네모 모양의 작은 점들을 일컫는 '픽셀'을 발견했고, 그 기하학적 이미지들의 무한한 가능성과 시각적 유희에 매몰되었다. ● 마치 미래에서 온 편지처럼 20년 넘게 탐구한 황규태 작가의 픽셀 작업은 NFT ART의 최적화된 작품이라 할 수 있으며 비평 정신이 깃든 국내 최초의 NFT ART의 탄생일 것이다.

 

황규태_PIXEL PIXIE展_크립토복셀_2021(▶ 바로가기 / 사진_나비타아트)

 

 

『PIXEL PIXIE』 전시 구현을 위해 메타버스 두 곳 모두 새롭게 공간 디자인을 진행했다. NFT화 한 작가의 작품은 솜니움 스페이스에 16점, 크립토복셀에 20점이 설치되어 있으며 각 작품을 클릭하면 오픈씨로 연결된다.

 

작품 판매 수익금 일정 부분 NFT 작가 후원, 사회공헌 활동 추진 ● 황규태 작가의 작품이 판매된 수익금 일부는 NFT 작가들을 위해 쓰인다. 나아가 큐레이터와 미술 전문 평론가를 구성하여 전시를 기획하고, 메타버스 공간 지원, 작가 후원금 등 작품 활동을 하기 위해 필요한 환경을 제공하여 지속가능한 NFT ART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 피블

 

 

 

Vol.20210502f | 황규태展 / HWANGGYUTAE / 黃圭泰 / photography

 

주명덕展 / JOOMYUNGDUCK / 朱明德 / photography 

2021_0410 ▶ 2021_0627 / 월,화요일 휴관

 

주명덕_평창_젤라틴 실버 프린트_50.8×40.64cm_197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61110b | 주명덕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료 / 성인 4,000원 / 그 외 3,000원

매달 마지막주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 무료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화요일 휴관

 

 

닻미술관

DATZ MUSEUM OF ART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진새골길 184(대쌍령리 447-32번지)

Tel. +82.(0)31.798.2581

www.datzmuseum.org

 

 

다시, 집으로 ● 집은 우리의 삶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긴 하루를 보내고 돌아갈 수 있는 개인의 안식처이자 그 시작과 끝이 하나로 이어져 안심하며 머물 수 있는 곳, 삶의 흔적들이 몸을 이룬 그 곳은 한 사람의 고유한 존재방식입니다.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의 산과 들, 이웃과 함께 오가던 길, 집을 둘러싼 안과 밖이 서로 관계맺으며 세월을 따라 한 점에서 그 점을 둘러싼 우주로 점차 넓고 조화롭게 퍼져나갑니다. ● 우리들 대부분은 이 땅에 이어져 온 삶의 방식을 알기도 전에 현대 서구문명의 효율적이고 편리한 가치를 따라 살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들이 넘쳐나고 매일 바쁘게 쫒기는 우리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걸까요. 물질적 가치로 환산되는 집이 아닌, 우리의 본향은 어디일까요. "아침과 저녁에 수고하여 다같이 일하는 온식구가 한 상에 둘러서 먹고 마셔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 오래된 찬송가의 그 시절보다 우리는 과연 안녕히 더 잘 살고 있는 걸까요. ● 전시를 준비하며 찾아간 안동의 작업실에서, 오래전 한 지면에 실린 작가의 글을 읽었습니다. 선생님께서 50대에 쓰신 『무엇을, 누구를 위해』라는 제목의 글에는, '나의 사진들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사진가로서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하는 그의 공적인 소명의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변하지 않은 근원적인 질문,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오랜 질문이 그의 사진 속 말없는 풍경을 통해 다시 우리에게 되돌아옵니다.

 

 

주명덕_오대산_젤라틴 실버 프린트_50.8×40.64cm_1980
주명덕_안동_젤라틴 실버 프린트_40.64×50.8cm_1968
주명덕_하동_젤라틴 실버 프린트_40.64×50.8cm_1972
주명덕_삼척_젤라틴 실버 프린트_40.64×50.8cm_1971

 

선생님께서 긴 겨울을 지나 대동강 물이 녹는다는 우수 경칩에 안동 작업실의 물을 열고 사진 몇 점을 더 프린트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에게 암실은 사진가로서 가장 편안한 집입니다. 이번 전시에는 80년대 작가가 직접 인화한 초기 사진들과 바로 몇 주전 암실에서 새로 만든 프린트가 함께 있습니다. 전시를 위해 고른 사진들을 보며 언제 어디서 찍은 것인지 소소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십니다. 우리는 사진을 보지만, 이 사진들은 선생님의 발자욱이고 삶의 기억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 2021년 닻미술관의 첫 전시로 우리 땅에 닿은 빛의 기록자, 한국 현대사진의 아버지 주명덕 선생님의 『집』을 준비했습니다. 좋은 사진은 기억을 불러내고 그것을 기록한 이가 바라본 시선의 온도를 전합니다. 사진 속 집을 둘러싼 빛과 바람, 보이지 않는 공기에는 작가가 오래도록 지켜 온 이 땅과 사람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비록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마음만은 풍족했던 옛 삶의 모습이 담긴 그의 사진 속 『집』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주상연

 

 

주명덕_안동 임하면 내앞마을 의성김씨종택_젤라틴 실버 프린트_50.8×40.64cm_1971
주명덕_경주 양동 관가정_젤라틴 실버 프린트_40.64×50.8cm_1992
주명덕_익산_젤라틴 실버 프린트_27.94×35.56cm_1971
주명덕_안동_Gelatin Silver Print_40.64×50.8cm_1968
주명덕_안동_젤라틴 실버 프린트_35.56×27.94cm_1968

 

작가 소개 ● 주명덕 (朱明德, 1940~)은 1940년 황해도에서 태어나 1947년 3·8선을 넘어 서울에 정착하였다. 경희대학교 사학과 재학 시절 아마추어 사진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작가는 1966년 개최한 개인전 '포토에세이 홀트씨 고아원'이 큰 반향을 일으키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이후 1968년 월간중앙에 입사하여 본격적으로 활동한 그는 '한국의 이방', '한국의 가족', '명시의 고향' 등 다수 연작을 선보이며 기록 사진 세계를 구축한다. 이후 한국의 자연으로 주제를 점차 확장해나가며 기록성을 넘어 한국적 이미지에 대한 그만의 시선을 작품에 담아낸다. 한국 기록 사진의 전통을 통합하는 동시에 대상을 창조적으로 해석하며 현대적 의미를 확장한 그는 한국의 독보적인 1세대 사진작가로 평가받는다.

 

 전시연계 프로그램강연: "주명덕의 집 - 가족 사진의 힘" 강미현 예술학 박사일시: 2021년 5월 8일 오후 2시신청 방법 및 상세 내용은 닻미술관 홈페이지를 통해 별도 공지 예정입니다.

 

 

 

Vol.20210410b | 주명덕展 / JOOMYUNGDUCK / 朱明德 / photography

동자동 쪽방 사는 손행복씨가 한 달 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무리 가는데 순서가 없다지만 처음 만났을 땐

나보다 훨씬 건강했고 세 살이나 적었다.

 

행복하게 살라고 이름까지 행복으로 지었으나 그의 삶은 불행했다.

오죽하면 연고자를 찾지 못해 임종한지 한 달 만에 장례를 치루었겠는가?

 

정선 집이 불탄 일로 실의에 빠져 방구석에만 처 박혀

만나자는 사람이나 전화조차 기피하고 있었지만

손행복씨의 마지막 가는 길은 배웅하지 않을 수 없었다.

 

29일 아침 아홉시에 백제화장터로 간다기에 따라 나서기로 했다.

 

그러나 모이기로 약속한 ‘동자동 사랑방’에 시간 맞추어 나왔으나,

사정이 생겼는지 먼저 가고 없었다.

 

마침 ‘서울역쪽방상담소’ 전익형실장이 찾아와 자기 차로 가자고 했다.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지, 하늘에서 눈물 같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백제화장터에는 ‘사랑방주민협동회’ 김정호이사장과 선동수간사장

조인형씨 등 여섯 명이 와 있었다.

 

시신은 별다른 장례절차 없이 바로 화장하는 줄 알았는데,

다들 ‘그리다’라는 추모공간에 모여 있었다.

 

서울시에서 무연고 빈민을 위해 마련해 둔 추모공간은 처음 보았는데,

세상을 떠난 박원순시장이 가난한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했더라.

 

공영장례장인 ‘그리다’는 연고 없이 돌아가신 무연고 사망자와

장례를 치루지 못하는 빈민들을 위해 서울시에서 마련한 빈소라고 한다.

 

장례의식을 진행하는 담당자 이야기로는 하루에 평균 두 명이 이용한단다.

 

그 곳에 영등포쪽방에서 온 장홍준씨 시신도 같이 안치되어 있었다.

 

다들 식순대로 예를 올리며 먼저 떠난 이를 추모했다.

 

조인형씨는 슬픔을 참지 못해 눈물을 훔쳤으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일 뿐, 고난의 세상을 떠난 자는 편안할 것이다.

 

가진 자는 죽음이 두렵겠지만 아무 것도 없는 빈손들은 홀 가분 할 것이다.

 

부디 차별 없는 평등의 세상에서 편히 잠드시길 빕니다.

 

사진, 글 / 조문호

 

TIMESCAPES

 

David Krippendorff_권순관 2인展 

2021_0420 ▶ 2021_0514 

 

권순관_THE RED SMOKE #1_180×150cm_2018

 

초대일시 / 2021_0420_화요일_04:00pm

기획 / K.P Gallery_Chiara Valci Mazzara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KP 갤러리

Korea Photographers Gallery

서울 용산구 소월로2나길 12(후암동 435-1번지) B1

Tel. +82.(0)2.706.6751

kpgallery.co.kr

 

 

Korea Photographers Gallery(이하 K.P 갤러리)는 David Krippendorff (미국)와 권순관 작가를 초청하여 『Timescapes』전을 4월 20일부터 5월 14일까지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국가와 문화, 사회 및 개인의 정체성에 대해 작업을 해오고 있는 두 작가의 작업세계를 통하여 시간의 흐름 속에서 경험되는 역사적 사건과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의미가 현대적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기획되었다.

 

David Krippendorff_Nothing Escapes My Eyes 2015_HD film_00:12:14
David Krippendorff_Nothing Escapes My Eyes 2015_HD film_00:12:14

유태계 어머니와 독일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성장하고 독일과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David Krippendorff는 본인이 경험했던 소속에 대한 질문들과 문화적 정체성의 혼란을 작품으로 이야기해오고 있는 작가이다. 이번에 소개되는 'Nothing Escapes My Eyes' 는 이집트 노예가 된 에티오피아 공주를 주인공으로 한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된 영상작품이다. 이 예술영화는 기존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강요받았던 공주의 정신 분열적 모습을 식민지 시대에 건립된 이집트 카이로의 오페라 하우스였던, 하지만 화재로 인해 지금은 주차장으로 변한 건물을 배경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동시에 소개되는 「Kali」는 힌두교 신화에 나오는 파괴의 여신 이름을 차용한 영상작품으로서 사회 권력에 의해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아랍인 여성 청소부의 분노와 복수에 대한 독백을 통해 현대사회가 지닌 억압, 착취 불의의 문제를 개인의 관점으로 이야기한다.

 

권순관_THE FACING MOUNTAINS_150×180cm_2018

한편 권순관 작가는 제주 4.3 학살이나 노근리 사건 등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희생된 사람들과 해당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주제로 사진, 설치 등의 다양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작업을 통해 숲으로 변해버린 학살이 진행된 현장과 당시 희생자들이 바라보았을 하늘과 파도의 모습을 역사적 관점에서 유추하고 과거의 기억이 여전히 우리 사회가 지닌 본질의 한 부분임을 이야기한다.

 

권순관_THE WAVE_225×180cm_2018

이번 전시의 제목 타임스케이프는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시간 함수를 뜻하는 물리학적 용어이다. K.P 갤러리는 이번 전시를 통해 시간, 또는 시대와 함께 이해되는 역사적 사건과 개인의 정체성이 유동하는 사회적 환경과 시간의 흐름 속에 고정되고 정지된 것이 아니라 지속해서 변화되는 다원적이고 유동적인 것이며 시점과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 David Krippendorff 는 독일 베를린에서 활동하며 비디오와 실험적 영상작업을 하는 작가이다. 베를린 태생의 작가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베를린대학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하였다. 그의 영화와 비디오작업은 미국 뉴욕미술관, 영국 ICA 런던, 독일 함부르크 미술관 등 세계 곳곳에 소개되었으며 Prague, Poznan, Tel Aviv, Asunción 비엔날레에 초대되었다. ● 권순관 작가는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하고 개인의 경험과 사회의 역사 사이에서 경험하는 혼란을 포착하는 작업으로 진행하고 있다. 2005년 대안공간 풀의 '새로운 작가', 2007년 5.18 기념재단으로부터 '올해의 사진가'상을 받았다. 성곡미술관, 아트센터나비, 대안공간 풀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부산비엔날레, 아르코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등 주요 미술 기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 K.P 갤러리

 

권순관_THE RED SMOKE #2_180×150cm_2018

 

권순관_THE VALLEY OF THE DARKNESS #7-1_240×180cm_2016
David Krippendorff_Kali 2017_HD film_00:08:57
David Krippendorff_Kali 2017_HD film_00:08:57

On the occasion of the duo exhibition Timescapes, David Krippendorf and SunKwan Kwon present pieces which are related to a multidimensional treatment of time implied by the use of different media and by a different approach to the narrative, content and concept at the base of the conceivement of the works. ● Both worlds of references are intertwined by immediate narratives together with meta- narratives, questioning themes such as injustice, identity, loss and sense of belonging, as in Krippendorf's works, as well as the barriers between silence and awareness and photography as a way of healing personal wounds as in the pieces by SunKwan Kwon. ● Timescapes is a moment fixed in time and simultaneously a continuum flow which develops through photography and video. The exhibition title refers to a time-based idea: in physics it is a function of time that is dependent on the position of the observer: it relates the pieces of the two artists by affinity through the complexity and multi layered narrative of their artistic production but also by initiating a discourse which involves different positions and time lengths, approaches, experiences of the observer in front of the video works or before the photographic pieces. ● On the occasion of the show the public is invited to move towards, observe, stand still, follow a narrative, immerse in a story. The two artists are offering a wide perspective of meanings and tales to be discovered; they tell them differently, nevertheless they profoundly address social issues, stories and accounts poetically yet strongly elaborated through their chosen media and deeply elaborated within their creative process. ● David Krippendorff is a german artist, video- and experimental filmmaker. Born in Berlin, he grew up in Rome IT and studied art at the University of Fine Arts in Berlin DE, where he graduated with a masters degree in 1997. His works, films and videos have been shown internationally, a.o. at New Museum NY, USA, ICA London UK, Hamburger Kunsthalle, Hamburg, DE, Museum on the Seam Jerusalem. He has participated in four Biennials (Prague, Poznan, Tel Aviv, Asunción). He lives and works in Berlin. ● SunKwan Kwon is a korean artist, lives and works in Seoul. Holds a BFA at Sangmyung University and an MFA at Korea National University of Art. His works have been shown nationally and internationally, a.o. at Seoul Museum of Art, Goeun Museum of Photography of Busan, Art center NAbi and in the frame of various exhibition programs, residencies and biennials in China, Philippines, Poland and Australia.

 

 

Vol.20210420d | TIMESCAPES-David Krippendorff_권순관 2인展

온 종일 정신 나간 사람처럼 천장만 바라보고 누웠다.

먹기도 싫고, 컴퓨터도 싫고, 자다 깨다만 반복한다.

 

가끔은 정선 집이 불탄 것을 잊고 일 할 것을 생각하다

뒤늦게 정선에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이르면 힘이 쫙 빠진다.

 

난, 정선 집에 많은 것들을 가져 쪽방에 살아도 항상 마음은 부자였다.

다 태우고 모든 걸 잃었으니, 쪽방사람과 똑 같은 동격이 되었다.

 

관리인 정씨가 꼼짝을 하지 않으니, 방문을 열어보고 어디 아프냐고 묻는다.

그때 사 일어나 몸을 추스르고 밖으로 나갔다.

 

아무런 생각도 목적도 없이 뚜벅뚜벅 공원으로 걸어갔다.

모든 것은 그 풍경에 그 풍경이고 그 얼굴에 그 얼굴이었다.

 

강씨는 보자마자 사진 찍어달라며 포즈부터 취한다.

혼자 술 마시던 정씨는 혀 꼬부라진 소리로 반색한다.

 

술 한 잔 하라는 권유를 마다하고, 역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서울역광장은 노숙자와 비둘기의 천국이다.

 

노숙자는 사람에게 얻어먹고, 비둘기는 노숙자에게 얻어먹는다.

무소유의 삶을 누리는 공존의 장이다.

 

노숙자 지은이가 짐을 끌고 어디로 가고 있었다.

차도 건너 편 외딴 곳에 둥지를 만들어 놓았더라.

 

짐이 많아 치우라는 역무원 등살에 피신한 것 같았다.

터줏대감 가오인지, 그는 항상 짐을 쌓아놓고 산다.

 

나를 보고 멀리서 달려와 손을 치켜들고 포즈를 취해 준다.

똥색인 내 얼굴을 살피더니, 무슨 걱정 있냐고 묻는다.

 

가진 것 없는 노숙자들은 아무런 걱정이 없다.

이젠 나도 가진 게 없으니 걱정할 것 없는데, 아직 미련이 남았나보다.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간다는 말이 새삼 실감난다.

 

사진, 글 / 조문호.

 

“아! 너무 허무하다.” 모든 게 한 순간이구나.

 

어제 오전 7시 무렵, 녹번동 정영신씨로 부터 전화를 받았다.

정선 만지산 집에 불이 나 모든 게 타 버렸다는 비보였다.

 

그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설마, 누군가 빨리 오라는 장난 전화를 했겠지”라고 위안했으나

부리나케 정동지를 만나 정선으로 떠난 것이다.

 

연락에 의하면 밤1시 40분 경 옆집에서 불이 나

우리 집으로 옮겨 붙었는데, 원인은 누전이란다.

옆집 한씨가 전기기술자인데, 누전으로 불났다는 건 이해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 집은 동강 변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옛집이 아니던가?

동강 댐이 무산되어 주민들에게 주택건설비를 지원할 때

동강 변에 있던 집들은 모두 헐려나가며 국적불명의 주택이 들어섰다.

 

집만 아니라 그 안에는 동강 사람들의 삶의 변천사가 담긴 자료는 물론,

긴 세월 수집해둔 소중한 사진자료들이 차곡차곡 보관되어 있었다.

한 달에 두 번씩 정선 갈 때마다 새로 생긴 자료들을 챙겨가

정선 집은 자료 창고나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부엌 헛간을 개조해 암실과 작은방까지 만들어 두었으나

방은 물론 암실 기자재 위에도 숱한 짐이 쌓여 창고가 되어버린 것이다.

 

가장 큰 걱정거리는 그 곳에 남겨 둔 필름 박스였다.

필름 박스 두 개 중 한 개는 스캔받기 위해 녹번동으로 옮겼지만,

한 개는 만지산 집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자동에 들어 간 이후 몇 년 동안 필름박스를 손도 대지 못했다.

그 일만 끝냈다면 나머지 것과 바꾸어 필름 이미지는 건졌을 것이다.

 

그 집에는 동강자료 뿐만 아니라 나는 물론 정영신씨가 전시한

수 많은 사진 작품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스캔된 이미지야 다시 만들면 되겠지만 사라진 이미지는 어쩌냐?

 

그리고 둘 만의 작품만 아니라 다른 작가들의 그림이나 도자도 있었다.

강용대 그림에서부터 초창기의 강찬모 그림과

수안스님, 최울가, 이존수, 신동여, 이청운작가 등 십여 점이 보관되어 있었고

나를 그려 준 박재동선생 그림을 비롯한 초상화도 여러 점 있었다.

그리고 통도사에 계신 수안스님께서 방문하여 ‘몽암’이라는 현판까지 달아주셨다.

꿈의 암자라고 이름 지었는데, 결국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정선 만지산에 도착하니, 옆 집 두 채와 우리 집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포크레인만 불탄 현장을 지킬 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화재 규명은 물론 불탄 필름 흔적이나 피해 자료를 찾아야 하는데,

왜 포크레인이 현장에 들어 와 헤집어 놓았을까?

한 쪽에선 불씨가 남았는지 연기가 피어오르고, 굶주려 지친 개들만 여기 저기 퍼져 있었다.

 

불탄 잔해를 살펴보니 그동안 아무리 찾아도 없었던

90년도 만든 ‘전농동588번지’ 전시 팜프렛 잔해도 보였다.

그렇지만 건져낼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윗만지 창수네 집으로 올라갔다.

고사리 꺾던 이선녀씨는 하던 일을 제쳐두고 술상부터 차렸다.

마음을 위안해 줄 게 술 밖에 더 있겠는가?

 

막걸리가 몇 잔 들어가니 한결 마음이 편하더라.

들려준 바에 의하면 동네사람들이 밤잠을 설쳤고, 소방차가 일곱 대나 동원되었단다.

다들 산으로 번지지 않도록 막았을 뿐, 속수무책이었다고 한다.

 

누전이란 것은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더니, 아니란다.

어제 손님 네 분이 윤인숙씨 집에 와 묵었는데, 늦도록 고기 구워 술을 마셨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은 불씨가 살아나 옮겨 붙은 것으로 추정한단다.

 

불난 집 이야기에서 웃기는 이야기로 불이 옮겨 붙었다.

살러 온 색시마다 도망쳤다는 뱃사공 유춘식씨 이야기에서부터

한 밤중 일 치던 내외가 석유병을 들기름으로 착각해

거시기에 불이 붙은 비화 등 배꼽 잡을 옛날 이야기들이 나왔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이선녀씨가 따 놓은 두릅을 두 보따리나 챙겨주었다.

두릅 값으로 신사임당 한 장을 꺼내주었더니, 감동적인 말을 했다.

“인정을 돈으로 계산하지 말자”는 거다.

 

마을 이장 처럼 항상 보살펴주는 최연규씨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다들 불난 집에 와 있단다.

 

 

내려 가보니, 동내 사람들이 술 한 잔 마시며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이야기했다.

나야 보험이라고는 자동차 보험 밖에 없지만, 옆집도 화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요즘 집 공사 중이라 현금을 칠백만원이나 두었는데, 그 것까지 홀랑 태웠다는 것이다.

보상 받기 위해 잿더미를 뒤적거려 이백만 원 정도의 흔적은 찾았다고 한다.

 

자칫했으면 생사람 잡을 뻔 했더라.

숨이 막혀 일어나니 연기가 차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돈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팬티 바람으로 튀 쳐 나갈 수밖에 없었단다.

천만다행인 것은 그날 밤 바람이 한 점도 없었다는 점이다.

불이 산으로 옮겨 붙었다면 대형 산불로 번질 가능성이 많았다.

동원된 소방관들도 불이 윗쪽으로 번질 것을 대비해 포진했지만,

일방통행인 만지산 길에 물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진화가 더 더뎠다고 한다.

 

늦게 불붙은 우리 집은 소방관들이 조금만 빨리 출동했어도 옮겨 붙지 않았을 거고,

물 공급만 원활했어도 자료의 반이라도 건져낼 수 있었다고 한다.

산불이나 마찬가진데, 소방헬기는 왜 동원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동강 댐으로 시끄러울 때 왔으니, 어언 이십 오년의 세월이 훌쩍 넘었다.

환경 사진가들이 만지산에 둥지 틀고 물고기나 곤충, 들꽃 등 각자 전문분야를 기록했는데,

난, 동강 변에서 살아 온 사람들의 삶을 기록한 것이다.

지금 불탄 집이 그 당시 캠프로 사용했던 집이다.

 

2000년, 동강 사람들의 눈물겨운 이야기를 담은 ‘동강 백성들’ 사진 산문집과

조해인시인의 ‘어라연 뱃사공 이해수씨’라는 동강 시집이 나올 무렵에는

‘동강주민을 위한 굿마당’을 옛 귤암분교에서 열기도 했다.

 

김명성씨가 주동이 된 ‘창예헌’ 예술가들이 버스 몇 대에 나누어 타고 찾아 와

밤늦도록 주민들과 어울렸는데, 이원창 사또 나리께서 늦게 나타나는 바람에

좁은 도로가 마비되는 등 조용했던 동네에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다.

 

그 무렵은 다들 동강 댐 찬성하는 주민들을 나쁜 놈으로 몰아세웠다.

댐을 만들라는 목소리를 낼 수 밖에 없는 속 사정은 일언반구도 없이

여론몰이 하는 형태는 지금의 기레기나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환경운동연합’과도 반대의견을 낸 것은 사람이 살아야 동강도 살수 있다는 말이다.

 

빚에 쪼들려 물에 투신하거나 농약먹고 자살하는 등

동강 사람들이 여럿 죽어나가자 주민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

명동성당 앞에 진을 쳤는데, 날씨마저 얼마나 추웠는지 모른다.

그 당시 충무로에 있던 ‘현대사진가회’ 강의실을 비워 귤암리 노인들을 모셔놓고

밤 세워 전단지 만들고 보도자료 보내느라, 사진단체 사무실이 동강사람들 전진기지가 되었다.

이틀 날 ‘문화일보’ 사회면에 동강주민 살리라는 사회면 특집기사가 실린 것이다.

 

주민대표 이영석씨를 비롯한 몇 명이 김대중 대통령 호출로 청와대에 불려갔다.

피해주민에게 주택자금 지원과 부대시설을 지원하기로 약속받는 등 난제를 해결했다.

그 때 출판한 ‘동강환경사진집’과 ‘동강 백성들’ 산문집으로 환경단체 프로젝트는 끝났지만, 

두메산골사람들’과 '산'을 주제로 사람과 자연 환경을 찍으며 혼자 눌러 앉았다.

 

그 곳은 자연 환경도 아름답지만, 절처럼 마음이 편안해 떠나기 싫었다. 

몇 년 지난 후 프로젝트에 같이 참여한 사우가 그 집을 자기가 사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울며 겨자 먹기로 빚내어 사게 된 것이다.

그 많은 짐을 옮길 곳도 없었지만, 하던 작업이 끝나지 않아서다.

오죽했으면 역마살이 끼어 한군데 오래 정착하지 못하는 버릇을 알아

돌아가신 어머니까지 만지산에 묻었겠는가?

 

20년 전 평당 팔만원에 400평을 샀다.

당시의 시세가 평당 만원정도 했으니, 바가지도 그런 바가지가 없었다.

 집도 밭에다 지은 무허가 농가였다.

문제는 한 집이었던 옆집을 다른 사람에게 잘라 팔며 절집 같이 고요한 만지산의 낙원도 끝나버렸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거나 지나치는 사람들로 정동지가 정선 집에 가기 싫어했다.

욕실도 없고 화장실도 멀리 떨어져 있어 밖에서 목욕을 하거나 소변을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예 우리 집 마당을 주차장으로 사용하며 들락거리니, 나 역시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옆 집은 한 때 대학로에서 카페를 운영 했다는 박진기씨가 살았으나

땅 살 형편이 못 되자 미국 사는 친구를 끌어들여 사도록 부추긴 것이다.

옛 말을 믿을 수는 없으나, 그 집에 우환이 생긴 원인은 집 구렁이 때문이 아닌가도 추정된다.

 

2002년 여름, 우리 집 모퉁이에 팔뚝 굵기의 능구렁이가 똬리 틀고 있었다.

최종대씨가 얼른 잡아 옆집 부엌의 빈 장독 속에 넣어둔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옆집은 최종대씨 장인인 이관옥씨가 오가면 사용한 집인데,

이튿 날 뱀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고 한다.

집 구렁이를 잡아서 안 된다는 옛말이 생각나 늘 마음이 꺼림직 했다.

 

이번에 불난 발화지점이나 사람 죽은 방도 그 부근이었다.

비록 그 일 때문은 아니겠지만, 우환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 집을 산 성수씨가 어느 날 술이 취해 부얶 방에 들어가다 깨진 방문 유리에

동맥이 찔려 죽는 변을 당하는가하면, 처음 잠깐 살았던 박진기씨도 아내와의 불화로

집에서 석유를 몸에 붓고 불을 붙여 자살한 것이다.

 

성수씨가 갑작스런 변을 당하자 아내가 무서워 못살겠다며,

이사 가려고 급히 집을 내놓았는데, 그 집을 산사람이 이번에 불 난 윤인숙씨다.

세상을 하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구렁이를 잡은 최종대씨도 나이에 비해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어지는 우환이 우연치고는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우리 집은 일찍부터 ‘사진 굿당’이란 이름을 내걸고 여러 가지 일을 벌였다.

산삼 심는 ‘농심마니’ 팀들을 초대하여 만지산에 산삼을 심었고,

사진굿당 앞 서낭당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때로는 굿당 축제에 무세중씨나 정선 무당을 모셔 와

밤 세도록 징소리 울리며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굿판을 벌이기도 했다.

 

일 년에 한 번씩 축제를 연 것도 동강사람들 자료관으로 자리잡기 위해서였다. 

타지의 예술인들을 불러 모아 수시로 놀이판을 만들어 문화적 역량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동강과 사람들에 대한 숱한 자료들을 모아 왔으나, 그 꿈은 순식간 화마에 휩쓸려가고 말았다.

 

우연치고는 근래에 생긴 일들도 예사롭지 않았다.

여지 것 그 집을 전혀 손대지 않았던 것은 돈도 없지만,

집 자체를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불편함을 토로하는 정동지의 불만을 깔아뭉갠 것이 미안할 뿐이다.

 

그런데, 보름 전 느닷없이 옆집에서 우리 집에 신식차양을 달아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호의를 거절할 수도 없었지만, 좋아하는 정동지를 보며 어찌 반대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다음 주에 정선군청에 들어갈 작정으로 구체적인 기획안까지 만들어 두었다.

그 집에 보관된 동강자료는 물론 집 자체를 정선군에 넘겨주기 위해

실무자를 만나 손 털 계산을 한 것이다.

 

또 하나는 인사동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기 위해 몇 년 동안 손대지 않고

쳐 박아 둔 녹번동 필름박스를 정리하기로 작정했다는 점이다.

그 필름을 스캔 받은 후 정선 필름과 바꾸어왔다면 이미지는 살아남지 않았겠는가?.

한꺼번에 일어난 이 일련의 갑작스런 변수들이 화재와 연관은 없었을까?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 지 걱정이 태산 같다.

아무래도 윗만지산의 마지막 우환은 내 차례가 될 것 같다.

이년 쯤 후에는 동자동 쪽방 일도 마무리 될 것으로 여겨진다.

재건축이 끝나 다들 한 곳에 머물게 되면 더 이상 할 일은 없다.

그 때쯤 집터에 오두막 지어 살다 만지산에 뼛가루를 뿌리게 할 예정인데, 뜻대로 될지 모르겠다.

 

동네 주민들이 위로 차 여럿이 모여 술잔을 돌렸으나

예전부터 살던 주민은 최연규 내외와 김순배씨 뿐이었다.

 

다들 낯설거나 안면 정도 있었는데, 술 마시는 분위기가 무거워 노래 한 곡 불렀다.

그런데, 웃기려 불렀던 성냥공장 노래마저 노동가처럼 비장감이 뚝뚝 흘렀다.

 

“만지산 성냥공장

성냥 만드는 아저씨

하루에 한 갑 두 갑

낱 갑이 열두 갑

바지 밑에 감추고서

정문을 나오다

바지 밑에 불이 붙어

자지털이 다 탔네

만지산 성냥공장

아저씨는 백자지 백자지“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지난 일요일은 아산의 문화 공유공간 ‘마인’으로 전시 보러 가는 날이었다.

 정영신씨와 오래 전 약속한 일인데, 가는 길에 미술평론가 최석태씨를 태웠다.

 

그런데, 구로에서 그를 만나고 부터 차 안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앉자마자 시작된 구라는 도착할 때까지 잠간도 쉬지 않았다.

아는 게 많고, 하는 일이 강의라 달변가인 줄이야 알았지만, 이 정도인지는 몰랐다.

재벌 집안의 더러운 내막에서부터 모르는 게 없었다.

이야기에 빠져 고속도로에서 뒷걸음질 치기까지 했다.

 

이 정도면 조선 최고의 구라로 꼽을 만 했다.

여지 것 백기완, 방동규, 황석영선생을 조선의 3대 구라로 꼽았는데,

얼마 전 백기완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시지 않았는가?

그 빈자리에 추천해도 전혀 손색없는 조선 최고의 구라였다.

 

듣다보니, 금세 아산에 도착했는데,

김선우씨를 비롯하여 김온 군과 양햇살 양이 반겨주었다.

전시장은 오밀 조밀 정겹게 꾸며 놓았더라.

 

쉬거나 일하며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좋은 공간이었다.

책장에는 ‘눈빛’의 예술산책 서고를 옮겨 놓은 듯 반가운 책이 많았다.

 

오히려 벽에 걸린 모듬전 스타일의 내 사진이 챙피했다.

물론 내가 정한 사진이 아니라 정해 준 사진을 만들어 보냈지만,

다양한 사진이라 잡화상 같았는데, 공감할지 모르겠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에게 조언하던 최석태씨 지적도 따랐다.

이런 사진보다 정영신의 아산장 같은 사진이

지역민에게 더 친숙하다는 것이다. 옳은 지적이었다.

그 외에도 문화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런데, 젊은 친구들이 깜짝 이벤트를 준비했단다.

숨겨 둔 캐잌과 오래된 함지와 재봉틀을 가져왔다.

 

축하받아야 할 자리는 아니지만, 졸지에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정영신씨에게는 함지와 재봉틀을 주는 등, 송구스럽기만 했다.

 

아산 온천동 상가 1층에 있는 ‘마인’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유공간인데,

여지 것 여러 차례 공간을 빌려 주었는데, 반응이 좋았단다.

시일과 시간만 예약해 둔다면 저렴한 비용으로

같이 일하거나 어울릴 수 있는 좋은 장소였다.

 

사진집이나 좋은 책들을 골라 볼 수 있고 커피도 내려 마실 수 있었다.

음식을 조리하는 주방도 있어 모든 걸 한 자리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구입할 책은 무인시스템으로 결제되도록 만들어 놓았다.

업무 협력은 말할 것도 없고, 친구들 끼리 생일잔치 하기도 좋았다.

 

개방전 마지막 날이라 전시 보러 온 김종우선생을 만나기도 했다.

오찬으로 육회비빔밥도 얻어먹었는데, 돈만 있다면 내가 사고 싶었다.

 돈도 없고 쓸 곳도 없지만, 돈은 이럴 때 필요한 것이다.

어찌 지역문화를 위해 애쓰는 젊은이들에게 밥 한 끼 사주지 못할망정, 주머니를 털게 한단 말인가?

 

그 곳에서 기획, 추진하는 일이 또 있다고 했다.

사람 사는 따뜻한 이야기가 있는 동네잡지도 만든단다.

공중파나 주류언론에서 다루지 않는 이야기,

인문적 사유와 삶의 철학이 담긴 이야기로 꾸민다고 한다.

머지않아 ‘마인’에서 하는 일이 전국적으로 확대될 것이 점쳐졌다.

 

아쉽지만,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최석태씨도 할 일이 있지만,

아산으로 이사 간 신학철 선생 댁을 방문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아내를 떠나보내고 아산으로 이사 간지 일 년이 넘었으나

그동안 한 번도 찾아뵙지 못했기 때문이다.

코로나를 핑계 삼았지만, 마음 한 구석은 늘 걱정이었다.

더구나 낯선 동내에 지은 큰 작업실이 얼마나 허전하겠는가?

 

최석태씨의 안내로 꼬불꼬불 시골 길로 들어갔는데,

동네 사람들은 새로 지은 집이 공장 같다지만, 내가 볼 땐 박물관 같았다.

신학철 선생은 지난 번 백기완선생 장례식장에서 뵌 후 처음이었다.

 

그런데, 반가운 소식부터 전해주었다.

옆에서 수족처럼 도와주는 분이라고 소개했는데,

‘동학혁명실천시민행동’ 대표로 계신 이요상씨였다. 너무 고맙고 반가웠다.

십 여년 아내 간병으로 혼자 끓여 먹는 것이 생활화되긴 했지만,

제대로 음식을 만들어 드실 수 있었겠는가? 이제 한 시름 놓게 되었다.

 

작업실에는 신학철선생 작품 DB작업 하러‘나무아트’ 김진하관장도 있었다.

그런데, 작업 중인 작품의 위용에 압도되었다.

아직 미완성이지만 전체적인 메시지가 강열했다.

 

그동안 팔려 나간 작품을 찍어둔 조그만 사진도 펼쳐 놓았고,

옛날 교편 잡던 시절의 제자 작품도 보여주었다.

작업 진척이 늦어 전시를 일 년 연기했다는 말씀도 하셨다.

 

서고와 작업실 곳곳을 보여 주었는데, 이전 아파트와는 비교도 못 할 작업장이었다.

이젠 천장이 높아 대작 그리는데 전혀 지장이 없겠더라.

 

밖으로 나가 옥상으로 올라갔는데, 사방이 전원 이었다.

위쪽에는 낮은 산능선이 병풍처럼 둘러 싸 있었는데,

집 가까이 밭은 신학철 선생께서 일구는 텃밭이라 했다.

이웃사람들이 거들어 할 일이 없다지만, 그래도 농사는 농사다.

 

이요상선생게서 서울 갈 약속이 있다기에 먼저 일어났지만,

남은 여생이나마 행복했으면 좋겠다.

 

코로나 끝나는 날, 제대로 된 집들이 한 번 해야지...

부디 훌륭한 대작이 태어날 산실이 되길 바랍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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