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자동의 김정길하면 몰라도 동자동의 김반장하면 모르는 이가 없다.

쪽방촌 청소에서부터 후원물품 도우미나 순찰을 도는 등

동네 반장처럼 바쁜 하루를 보내 붙여 진 이름이다.

 

2017, 11, 14 / 대부도에서 가진 아름다운 동행에서..

김정길(76)씨를 처음 만난 것은 6년 전이다.

음식 나눔이 있던 새꿈공원에서 만났는데, 뒤처리하는 모습이 남달랐다.

일을 돕는다기보다 자기 일처럼 열심히 하는 모습에 눈여겨 본 것이다.

그 뒤부터 행사가 있을 때는 물론, 가는 곳 마다 그의 모습은 빠지지 않았다.

 

2017,5,2 / 동자동 골목계단에서...

김정길씨가 동자동에 들어 온지는 39년째라 반 평생을 쪽방에서 보낸 셈이다.

공사 현장이나 음식점 등 막일로 전전하다 방세 싼 쪽방촌에 들어왔다는데,

봉사를 생활화하게 된 계기는 15년 전부터 교회에 나가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남을 돕는데 여생을 보내야 겠다는 생각으로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닥치는 대로 일을 도운 것이다.

 

2017년 6월5일 / 거리에서 이웃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그런 그가 작년 무렵, '케이비에스'와 '조선일보'에 연이어 소개되며,

갑자기 동자동 김반장으로 부상한 것이다.

 

2019, 5, 23 / 화담 숲에서 가진 동자동소풍에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옛 속담 처럼, 그의 봉사활동은 더 두드러질 수 밖에 없었다.

쪽방에서 내다버린 쓰레기에서부터 직장인들이 피우다 버린 담배꽁초에 이르기까지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는 골목입구가 아침이면 티끌하나 없이 말끔해졌다.

 

2017,5,8 / '동자동사랑방'에서 마련한 어버이날 잔치 정리하는 모습

만날 때마다 청소를 끝내고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마 쪽방상담소 문 열기를 기다리는 듯 했다.

 

매번 매점 가는 길이라 카메라들 두고 와 청소하는 사진 한 장 찍지 못했는데,

며칠 전에는 작정하고 내려와 쉬는 모습이라도 찍은 것이다.

 

 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나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낀다”는 김씨는

나와 비슷한 연배인데도 그가 10년은 더 젊어 보인다.

아마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습관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부디 건강 잘 지켜 오랫동안 좋은 일 많이 하길 바랍니다.

 

나선 김에 서울역광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노숙인도 다시서기에서 재활하는 이가 더러 있으나, 김반장 처럼 무보수의 봉사는 아니다.

 

힘없이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노숙인들이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몇 개월 전부터 지하도 입구에 새로 온 노숙인이 자리 잡았다.

갈 때마다 가부좌한 자세로 깊은 생각에 빠진 모습이 다른 노숙인과 달랐다.

책을 정갈하게 모아두고, 난간에는 조화까지 모셔 두었다.

책은 가까이 두지만, 한 번도 책 읽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첫 장에 펼쳐놓은 군자의 삶이란 제목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리고 상대의 말은 알아들어 반응은 하지만, 일체의 질문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름은 물론 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어 더 궁금했다.

 

거리로 내 몰린 노숙인이 어찌 온전한 정신을 가질 수 있겠나마는

정신질환자로 단언할 수도 없는 것이다.

 

아무쪼록 오갈 곳 없는 노숙인들을 한 곳에 정착시켜

더 이상 거리에서 죽는 노숙인이 없도록 해주길 간곡히 부탁드린다.

 

사진, / 조문호

 

 

쪽방·고시원은 되는데 천막은 안 되는 주거지원
주거지원 받더라도 생계로 천막 벗어나기 막막

 

지난 10일 용산역 뒤편에서 바라본 텐트촌의 모습. 나무가 무성히 자란 사이사이로 천막들이 보인다. © 뉴스1

(서울=뉴스1) 박동해 기자 

 

A(60)의 집에는 문이 없다. 입구 쪽 천막을 살짝 들추면 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사실 문만 없는 것이 아니라 지붕도 바닥도 벽도 없고 거실도 욕실도 화장실도 없다. 하지만 이곳을 A는 집이라고 부른다. 7~8평 되는 공간에 A는 손수 집을 만들었다.

 

상가 입주자 모집을 알리는 커다란 플래카드를 지붕 삼고 비닐하우스에서 사용하는 골조를 기둥 삼아 햇빛과 비를 막는 역할을 맡겼다. 천막 안 바닥에는 검은색 플라스틱 화물운반대(팔레트) 석장을 쌓아 땅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막았다.

 

천막 안 팔레트 위에 세워진 1인용 텐트가 그가 먹고 생활하는 안방이다. 텐트 안에는 그가 덮고 잤던 이불과 침낭이 정리되지 않은 채 놓여있다. 텐트 바로 앞 팔레트가 깔리지 않은 천막 안 땅바닥에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인 컵라면 용기가 놓여있다.

 

어두운 천막 벽면을 가득 메운 잡동사니들 중 사실 정리되어 보이는 것은 없었다. 천막 입구에는 언제 썼는지 모르는 스테인리스 숟가락 하나가 흙바닥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원치 않은 '이사'를 하기 전까지 그의 집은 열심히 정리한 흔적이 있던 곳이었다. 그는 이전 집에 살 땐 집 앞으로 오는 길도 매일 깨끗이 청소했다고 했다. 하지만 불과 2주 전까지 살던 천막 집이 허물어지고 불과 10m 떨어진 곳에 다시 천막을 지으면서 A는 짐을 정리하는 것을 미루고 매일 같이 술을 마셨다.

 

A의 집 옆에서 함께 천막를 치고 사는 이웃주민 B(68)"속상한 일이 있는지 A8~9일 내내 나오지도 않고 밥도 안 먹고 술만 먹었다"고 했다. 결국 A11일 새벽 술을 마시고 계단에서 미끄러져 병원 신세를 지게 됐다.

 

10여년 전부터 A가 천막을 치고 살아온 공터 주변에는 20여개의 비슷한 천막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천막들이 즐비한 이곳을 사람들은 '텐트촌'이라고 부른다. 용산역 뒤편에 자리 잡고 있어 '용산역 텐트촌'이라는 지명이 붙었다.

 

지난 10일 용산역 텐트촌 한쪽에 쓰레기가 가득 쌓여있다.© 뉴스1

이 텐트촌으로 향하는 길은 하나뿐이다. 용산역 3번 출구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달주차장' 입구에 다다랐을 때 다시 왼쪽으로 향하면 지상으로 향하는 고가가 나오는데 이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왼편에 텐트촌으로 향하는 콘크리트 계단이 보인다. 계단 바로 옆에는 큰 오동나무가 텐트촌으로 가는 이정표 역할을 한다.

 

2000년대 중반부터 20여명의 주민이 이 마을에 살고 있지만 누구 하나 땅을 가지진 못했다. 마을 주민들은 주로 용산역 인근에서 노숙을 하던 이들로 각자의 사연은 제각각이지만 거리를 떠돌다 갈 곳이 없어서 지낼 곳을 찾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됐다.

 

최근 이들이 마지막 보루로 생각하고 있는 이 텐트촌의 공간 일부가 잘려 나가는 일이 있었다. 용산역과 주변 고급 호텔을 잇는 공중보행교를 새롭게 짓는 공사가 시작되면서 2개의 천막이 철거된 것이다. AB는 이번 공사로 원래 살았던 천막이 헐려 텐트촌 안쪽으로 이동해 다시 천막을 쳤다.

 

지자체와 공사를 진행한 시행사는 사전에 철거를 공지했고 천막 이동을 위한 편의도 제공했다고 밝혔지만, A'사전에 아무런 합의도 없이 다짜고짜 포클레인을 가지고 와 철거를 진행했다'고 열을 냈다.

 

​ 용산역 - 서울드래곤시티 공중보행교 위치도 ( 용산구 제공 ).©  뉴스 1

A는 시공사 측에서 '밥이라도 사먹으라'5만원을 준 것이 전부였다며 "우리 같은 거지들은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하겠지만 그래도 살게는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A는 천막을 다시 쳐주겠다는 시공사 측에 제안도 거절하고 공사 구역에서 텐트촌 안쪽으로 10여미터 자리를 옮겨 직접 다시 천막을 쳤다.

 

지난 3월 공중보행교 공사가 시작될 당시부터 '홈리스행동' '빈곤사회연대'와 같은 시민단체들은 철거가 예정된 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에 대해 이주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다. 이들은 주민들이 아무런 준비 없이 거주공간을 옮기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했지만 결국 A는 별다른 준비 없이 다시 천막을 짓고 살아가게 됐다.

 

그나마 최초에 철거될 예정이었던 천막이 3개동에서 2개동으로 줄어들면서 철거 대상에서 제외된 C(72)는 천막을 지키게 됐다.

 

시민단체들은 국토교통부훈령인 '주거취약계층 주거지원 업무처리지침'을 내세우며 공사가 진행되기 전에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나서 주민들의 주거지 마련에 나서야 했다고 지적한다.

 

이 지침은 '최저주거기준에 미달하는 거주지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건설·매입·전세임대주택 거주를 지원하기 위해 마련됐다. 해당되는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쪽방, 고시원, 비닐하우스, 노숙인시설, 컨테이너, 움막, PC, 만화방 등의 최저주거기준에 미달하는 곳에서 3개월 이상 주거를 했음이 확인돼야 한다.

 

용산구청은 텐트촌 주민이 3개월간 천막에서 실거주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해당 주거지원 사업의 신청을 받아 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 때문에 구청은 주민들에게 노숙인 지원 사업을 통해 고시원이나 쪽방에 3개월 정도 거주를 하고 이후에 주거취약계층을 위하 주거지원 신청할 것을 안내했다.

 

지난 4일 용산역 텐트촌에 있던 주민 A의 천막이 철거되고 있다. © 뉴스1

10년간 이곳에 살았던 D(62)는 본인이 직접 나서 주거지원을 신청해 보려고 했지만 '천막'은 지원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답을 들었다며 "고시원, 쪽방 이런 데서 3개월 이상 살아야 매입임대든 전세든 조건이 된다는 데 여기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그는 비슷하게 열악한 실정인 텐트촌 사람들이 왜 이런 지원을 받을 수 없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시민단체들은 이런 지자체의 입장에 대해 '소극 행정'이라고 비판한다. 서울시와 소방당국 등에서 텐트촌 거주민을 위한 상담과 안전 점검들을 지속적으로 해왔고 거주민 명단도 작성하고 있기에 이를 통해 3개월 이상 거주 사실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시민단체들은 쪽방이나 고시원 자체가 이미 '비정적 주거형태'인 만큼 텐트촌의 주민들을 다시 쪽방이나 고시원으로 보내는 것 또한 주거 상향이라고 볼 수 없다고 했다. 실제 이번 공사과정에서 텐트가 헐릴 뻔했던 C의 경우 용산역 인근에 고시원을 마련해 거처를 옮겼지만 영 적응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있는 것도 불편하고 눈치가 보여 밥을 먹기도 힘들다"며 하루 웬만한 시간은 나와 지낸다고 했다. C는 고시원을 얻은 뒤에도 텐트촌으로 나와 자신의 천막이 잘 있는지 살피고 텐트촌 사람들과 시간을 보냈다.

 

지난달 14 일 용산역 텐트촌 주민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용산구청에 적절한 주거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 뉴스 1

용산구는 이런 상황에 대해 '주거지원 대상에 대해 자체적으로 임의적 판단을 하기 어렵다'며 해당 지침을 제정한 국토교통부 측에 지난 4월 유권해석을 요청했지만 아직까지 답이 오지는 않았다고 했다. 용산구는 유권해석에 대한 답이 오면 그에 맞게 조치를 하겠다는 방침이다.

 

다만 텐트촌 주민들은 주거지원이 되더라도 과연 이곳을 떠나 잘 살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주거비 지원이 된다고 하더라도 당장 일을 할 수 없으니 다른 부수적인 비용들을 감당하기 어렵고 10년 이상 용산역 주변에서만 생활하다 보니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서 살아가기도 힘들다는 것이다.

 

기초생활수급자로 인정을 받거나 65세를 넘겨 기초노령연금이라도 받으면 사정이 좀 낫지만 텐트촌 주민 중에는 이에 해당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특히 안형진 홈리스행동 활동가는 몸이 아파 근로를 하기 힘든 노숙인들의 경우에도 병원에 가기가 어려워 이를 증명할 수가 없고, 근로능력이 있다고 판단 받으니 정부 지원을 받기 힘든 경우가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A는 뇌전증을 앓고 있어 주기적으로 발작 증세를 보이고 있다.

 

한편 텐트촌 주민들은 마을 쪽에 더 가까운 보행교가 완성되면 이곳을 지나는 시민들에게 텐트촌이 더 잘 노출될 것이고, 철거를 요구하는 민원이 늘어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더불어 텐트촌이 자리 잡고 있는 '용산 정비창 부지'는 대규모 개발 사업이 예고된 곳이라 개발 과정에서 텐트촌이 유지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서울시는 올해 안에 용산정비창 부지 개발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본격적인 사업 추진에 나설 방침이다.

 

 

 

 

 

 

 

 

 

용산역 철도정비창 빈터에도 사람이 산다.

15년 전부터 노숙인이 하나 둘 모여들어, 속칭 ‘용산역 텐트촌’으로 불리는 곳이다.

지금은 20여명의 노숙인이 공동체 생활을 한다.

 

이곳은 용산역과 고층 호텔 사이의 빈터로, 숲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는 곳이다.

땅거미처럼 숨어있어 들어가는 입구조차 찾기가 쉽지 않다.

용산미군기지 개발 계획의 한 카드로 거론되는 곳이기도 하다.

 

금싸라기 같은 서울 요지에 문패도 없는 텐트를 쳤지만,

전기와 수도가 공급되지 않으니 짐승우리나 다름없다.

텐트도 공공이 해야 할 일을 인근 교회에서 지원했다.

가끔 사회단체에서 온정의 손길도 보내주지만, 추위와의 싸움은 피할 수 없다.

 

처음엔 이슬이라도 피할 수 있는 텐트가 생겨 좋아했으나,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더란다.

노숙할 때는 그런 걸 느끼지 못했는데, 바늘구멍에서 황소 같은 바람이 들어 와

온 몸은 물론 얼굴까지 파묻고 산단다.

 

박씨는 요즘 일거리를 못 구해 하루종일 텐트에서 지낸다.

그 흔해빠진 핸드폰이나 티브이도 없으니, 먹고 싸는 시간외는 하루 종일 이불 속에서 딩군다.

희망이나 재기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허무한 망상으로 시간 죽인다.

 

용산역 텐트촌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언젠가는 봄이야 오겠지만, 날씨 따라 걱정도 따라온다.

주민들의 민원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화장실은 물론 음식찌꺼기 버릴 곳도 없으니, 어찌 냄새가 나지 않겠는가?

 

용산구청 청소과 담당자에 부탁한다.

‘용산역 텐트촌’에 쌓인 쓰레기부터 좀 치워다오.

재활용 분류까지 해둔 쓰레기를 구청에서 수거하지 않으니,

악취에 시달려야 하는 주민들이 어찌 그냥 두고 보겠는가?

 

이제 노숙인에 대한 편견과 혐오의 시선도 거두어다오.

그들의 삶에도 저마다의 까닭이 있다.

 

그들도 사람이다.

같은 국민이며 이웃이고 가족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여성 노숙인은 왜 화장하고 담배 필까

 

단비뉴스 / 최유진기자

 

“저리 가세요! 내가 살벌해지지 않을 수가 없어.”

짙은 화장을 한 채 담배 연기를 내뿜던 노미숙(가명∙48) 씨가 버럭 화를 낸다. 옆에 앉은 한 남성 노숙인 때문이다. 담뱃재를 털면서 노 씨는 “난 나이 많아서 괜찮으니까 당신 걱정부터 하라”며 “곧장 집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등을 떠민다.


▲ 지난 8일 여성 홈리스 노미숙 씨는 지하철 서울역 13번 출구 ‘따스한 채움터’ 앞
거리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란히 앉아 그가 보는 거리 모습을 담았다. ⓒ 최유진


지난 8일 오후 3시 무렵 지하철 서울역 13번 출구 앞 거리에서 노 씨를 만났다. 하루 세끼를 무료로 먹을 수 있는 ‘따스한 채움터’가 있는 곳이다. 그는 일주일에 사나흘은 아침 7시부터 종일 급식소 근처에서 지낸다. 배식시간이 되면 밥을 먹고 셔터를 내린 가게 앞이나 한적한 골목길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그는 “(급식소에) 가까이 있어야 사람 몰리기 전에 빨리 먹고 나온다”며 “날이 추워져서 낮에 볕 쬐고 (배식) 기다리는 것도 얼마 못한다”고 말했다.


▲ 서울역 인근 무료급식소 ‘따스한 채움터’ 입구에는 배식 일정과 이용자 준수∙조처사항이 게시돼 있다.
노 씨는 매주 사나흘은 이곳에 찾아와 하루 세끼를 먹는다. ⓒ 최유진



“여럿이 자는 데는 안 가”

“지금은 길에 있기 딱 좋지. 해가 참 좋다니까. 겨울은 정말 너무 싫어.”

노 씨는 겨울이 무섭다. 추운 날씨에 해가 일찍 저물어 벌벌 떨면서 긴 밤을 지새야 하는 탓이다. 날씨가 춥지 않은 여름에는 바깥에서도 잠을 이룰 수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겨울로 접어드는 시기부터는 그냥 밤을 새는 것이지 잠을 잘 수가 없다. 옷을 껴입고 종이 포장박스로 냉기를 막아 보지만 살을 에며 파고드는 냉기를 피할 수 없다. 밤은 왜 그리 길기만 한지, 벌벌 떨며 이제 새벽이 됐겠지 하면 겨우 자정이 지났을 뿐이다.

남성 노숙인들은 추위를 피하려고 없는 돈으로 소주라도 한 병 사 마시고 잠이 들지만 그것도 잠시, 술기운이 떨어지면 잠이 깬다. 여성 노숙인은 그럴 수도 없어 해 지고 새벽까지 열 서너 시간을 추위와 싸우며 견뎌야 한다. 그렇게 밤을 새고 나면 온 몸이 망가진 듯 쑤시고 아프다. 노 씨는 “(겨울에)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며 “돈 없어서 찜질방 같은 곳도 가기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겨울이 와도 차라리 떨며 밖에서 지내지 ‘응급 잠자리’는 가지 않을 거라고 고집한다. 노숙생활을 시작할 무렵 일시 보호시설을 찾았다가 불쾌한 일을 당해서다. 불쾌한 정도면 괜찮은데 위험한 곳이 많다.

“요 근처에 여자만 자는 방도 있고, 잘 수 있는 데는 꽤 있지. 근데 나는 여럿이 같이 자는 데는 안 가. 차라리 길에서 잘 거야. 여자 방에 갔더니 험한 꼴 안 당하려면 할머니랑 끌어안고 자래. 싫다고 홀에 있는 카우치(couch)에서 잤지. 근데 남자 셋이 돌아가면서 옆에 와서는 이상한 소리 내고… 그게 완전 성희롱이지.”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어 다시는 가지 않는다고 했다. 길거리나 지하도 등도 불안하긴 하지만 그나마 도망이나 칠 수 있어 한데서 자는 것이 편하다는 얘기다.


▲ 서울역 광장에 누워있는 남성 노숙인들.
노 씨는 이곳 광장에서 떼 지어 술 마시던 남성 노숙인들에게 거북한 농담을 들은 이후
다시는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 최유진


거리에서도 쉼터에서도 불안한 여성 노숙인


▲ 서울역 광장 한쪽에 서울특별시립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가 있다.
사회복지 전문가들이 거리상담(아웃리치), 응급구호, 일시보호시설 연계 등을 지원한다. ⓒ 최유진


“여자들은 ‘다시서기센터’에 들어가기도 하는데… 한 네다섯 명? 남자에 비해서는 적지. 근데 나는 그냥 돈 생기면 찜질방이나 PC방으로 가. 애들이 많잖아. 일단 덜 무섭고....”

노 씨는 맞은 편에서 쳐다보는 남성 노숙인들 거동을 살피며 속삭였다.
“진하게 화장하고 담배도 피우면 (남자들이) 쉽게 못 보는 것 같아. 못 피우는 담배를 그래서 입에 물고 있는 거야. 조금 남은 돈으로 일주일에 한 번은 목욕탕 가서 씻고 화장을 하지.”

그는 “PC방도 이상한 사람 오긴 하는데 조용한 데 자리잡으면 잘 만하다”며 “이제 돈 좀 벌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담배를 피우다 말고 손을 털었다. 저녁 6시가 다가오자 ‘따스한 채움터’로 향했다. 그를 지켜보고 서있자 가라는 손짓을 계속했다.

“옷 넣을 봉지 하나도 사야 한다니…”

“친척 집이 멀긴 한데, 갔다 오긴 했어요. 계속 있기가 그러니까 그런 건데, 갈 곳이 있긴 있는 거죠. 여기 내가 왜 있냐면, 그냥 편하니까 있는 거예요. 나도 애도 있고, 학교도 다녔고 지금 잠깐 이렇게 된 거지. 친척 집에 가면 되는데, 여기가 편해요.”


▲ 서울교통공사는 철도안전법 제48조 ‘역 및 열차 내 노숙행위 금지’에 따라
역 안에 노숙인이 다른 시민에게 피해를 줄 경우 퇴거 명령을 내린다. ⓒ 최유진


젊은 남녀들이 쌍쌍이 손잡고 거리를 거닌다.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는 와중에 어디선가 드르륵 바퀴 끄는 소리가 요란하게 다가온다. 낡아 다 떨어진 캐리어와 빵빵한 비닐봉지를 이고 다가오는 한 여인이 있다. 사람들은 힐끗 눈길을 주고서 이내 분주히 제 갈 길을 간다. 일부는 눈살을 찌푸리며 대놓고 외면하기도 한다. 그는 젊음의 거리에서 철저히 이방인이다.

지난달 중순 서울 성균관대 입구 사거리에서 김성아(가명∙42) 씨를 만났다. 그는 거리에서 생활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오래 씻지는 못했다는 고백을 들으며 노숙 기간을 그저 짐작해볼 수밖에 없었다. 비닐봉지 안에 무엇이 들었냐고 묻자, “친척이 겨울 잠바 몇 개 챙겨준 걸 갖고 다닌다”고 했다. 낮에는 따뜻한데 새벽녘으로는 추워서 이불 대용으로 갖고 다닌다는 거였다. 그는 “요즘은 편의점에 가도 봉지를 돈 주고 사야 된다고 하는데 큰일”이라며 “(봉지가) 찢어질 것 같아 튼튼한 가방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날이 추워지면 다시 친척 집에 갈 것이라고 했다.


▲ 지난달 성균관대 입구 사거리에서 만난 김성아 씨가 늘 갖고 다니는 보따리.
비닐봉지에는 친척집에서 얻은 겨울 외투가 들어있다. ⓒ 최유진


쓰레기장 옆 ‘안전 잠자리’

김 씨는 마로니에공원 ‘어딘가’에서 잔다고 했다. 그는 “공원에 행사가 많으니까 심심하지 않다”며 “음악을 자주 들을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근데 거기도 생각보다 남자들이 많이 자는 것 같은데... 내가 어디서 자는지 알면 어떡해? 일단 친척집 가기 전까지는 임시로 있어야지, 임시로.”

그는 “누가 날 따라다니지 않는지 걱정된다”며 “(캐리어가) 너무 시끄러워서 그런 것 같다”고 우려했다. “쓰레기장 옆에 있으면 (사람들이) 잘 다가오지 않아 해코지를 안 할 것 같다”며 “그래서 잠바 싸매고 쓰레기봉지 옆에서 잔 적도 있다”고 말했다.


▲ 지난 7월 신대방역에서 만난 여성 홈리스 박한이(가명) 씨는 가방 세 개를 갖고 여러 지하철역을 돌아다닌다.
공책에는 ‘남구로 월세 뺏겼다’는 내용이 반복해서 적혀 있다. ⓒ 최유진


남에게 피해 안 주려 해도 씻을 곳 없어

지난봄 서울 서초역 인근 한 커피전문점에서 겪은 일이다. 여자화장실을 가려던 사람들이 문을 열어보고는 곧장 자리로 되돌아왔다. 화장실에는 티슈에 물을 적신 채 발을 닦고 있는 한 여성이 있었다. 한참 뒤 그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바닥에는 머리카락 한 움큼이 뭉쳐 있었는데, 그가 쓸어 모아 놓은 것이었다. 그에게 궁금증이 생겼다. 마음 편히 씻을 곳은 없는지 묻고 싶었다. 봉지에 양말을 챙겨 넣는 그를 붙잡았다. 커피 한 잔 하시겠냐는 물음에, 그는 소리쳤다.

“여기 아니면 어디 가라고? 씻을 데가 없어.”
묵직한 책가방을 메고서, 빨랫감을 담은 봉지를 들고서 그는 급히 사라졌다. 아무것도 묻지 못했지만, 괜히 그를 도망치게 만든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 지난 3월 을지로입구역에서 만난 여성 홈리스 김미영(가명) 씨에게 어디서 씻는지
물었지만 “몰라”가 대답의 전부였다. ⓒ 최유진


전국 여성노숙인 2900여명, 거리에도 120여명

보건복지부의 ‘2016년도 노숙인 등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여성 노숙인은 전체 노숙인의 25.8%로 전국에 2,929명이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그중 거리노숙인은 6.4%로 128명이다. 이 실태조사 결과에는 찜질방, PC방, 만화방 등에서 쪽잠을 청하는 이들은 포함돼 있지 않다.

사람들은 노숙인을 보면 “어쩌다 저 지경까지 됐누” 하면서 노숙인을 은근히 탓하는 듯한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노숙인들도 좋아서 거리로 나앉지는 않았다. 오죽하면 집에서 나와 거리를 떠돌고 있을까?

서울역에서 만난 여성 노숙인 노미숙 씨는 한때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일했다. 이후 학원을 운영했다. 서울 강남에 오피스텔을 갖고 있을 정도로 수입이 좋았다. 그러다 사업이 잘 안돼 실패했다. 이유를 물었지만, 그는 답하지 않았다. 사업 실패하고 오갈 데 없어 나왔는데, 노숙 생활을 한 지 몇 개월 되지 않았다고만 밝혔다.

노숙인 쉼터나 보호센터 봉사자나 관리자들 말을 들어보면 노숙인들이 홈리스가 되는 과정은 일정한 패턴이 있다고 한다. 당연히 잘살던 사람들이 노숙인이 되는 일은 별로 없고, 대체로 서민이나 중산층 가장들이 은퇴하거나 사업에 실패해서 거리로 나앉는 경우가 많다. 정년퇴직이나 명예퇴직을 하고 생계유지를 위해 퇴직금을 식당이나 자영업에 투자해 경험부족과 경기부진으로 실패하고, 그걸 살려보려고 집까지 담보로 잡혀 다 날리고 홈리스가 된다는 것이다. 집이 없어지면 자녀들은 가까운 친척집에 맡기거나 아내와 함께 처가에 맡기고 가장인 본인은 어디에도 갈 데가 없어 거리로 나앉는다는 것이다.

남성 노숙인들은 이런 과정을 거쳐 홈리스가 되는 반면 여성 노숙인들은 경우가 좀 다르다. 노 씨처럼 사업실패로 홈리스가 되는 사례도 있지만 돌볼 사람이 없거나 돌보아야 할 사람들이 내팽개쳐 거리로 나앉은 이가 많다. 여성홈리스 12명을 인터뷰해 제작한 다큐영화 <그녀들이 있다>를 보면, 가정폭력을 피해 나온 이도 있고, 미혼모로 살다 생계가 한계에 이르러 나온 이도 있다. 더 심각한 것은 당장 보호가 시급한 정신질환자들이 상당수에 이른다는 점이다.

강민수 종교계노숙인지원민관협력네트워크 간사는 "노숙 생활이 오롯이 개인 책임만은 아니기도 하다"며 "알코올중독까지 이른 건 개인을 탓할 수도 있겠지만 저마다 사연을 들어보면 사업 실패나 가정불화, 사별 등 가슴 아픈 이유들이 있다"고 말했다.

"남성 홈리스는 자발적으로 집에서 나오는 경우도 많다. 이를 개인 선택이니 전적으로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들의 생명까지 위험해진다. 실제로 거리에서 돌아가시는 분들을 너무 많이 봤다. 어떻게 미리 손 쓸 수 있었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구구절절 사연을 재고 따지기보다 생명을 일단 살리고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당장 보호 필요한 정신질환자도 많아

복지부 조사결과를 보면 여성 노숙인의 47.6%가 조현병, 우울증, 알코올중독, 약물중독 등 정신질환으로 진단을 받은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요양시설의 여성 노숙인들은 80% 이상이 정신질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7월 신대방역에서 만난 여성 노숙인 박한이(가명) 씨도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 그는 지하철 플랫폼에 앉아서 끈임없이 무언가를 노트에 메모하고 있었는데 자세히 가서 보니 ‘남구로 월세 뺏겼다’는 내용을 반복해서 적고 있었다. 취재를 위해 만난 여성 노숙인 중에도 상당수가 정신적으로 스스로를 보호하거나 방어할 수 없는 상태에 있어 당장 보호가 필요한 상태에 있다. 노숙인의 개인적인 책임도 없지 않지만 우리 사회의 안전망이 구멍 나고 고장 난 것도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드러나고 있다.

‘홈리스’와 ‘노숙인’은 같은 뜻이 아니다. ‘노숙인 등 복지 및 자립지원에 관한 법률’에 ‘노숙인 등’은 “상당한 기간 동안 일정한 주거 없이 생활하는 사람, 노숙인시설을 이용하거나 상당한 기간 동안 노숙인시설에서 생활하는 사람, 상당한 기간 동안 주거로서 적절성이 현저히 낮은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다. 한자 뜻 그대로 보면 ‘노숙인(露宿人)’은 이슬 맞으며 자는 사람이다.

강민수 간사는 “(노숙인에 비해) 홈리스는 집이 없는 사람, 즉 쪽방이나 고시원 같은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까지 확장하는 개념”이라고 말했다. 노숙인만이 아니라 홈리스 지원정책이 생겨야 주로 PC방에서 잠을 해결하는 노미숙 씨 같은 사람에게도 혜택이 돌아갈 여지가 생긴다.

그러나 서울시 홈리스 정책은 노숙인을 위한 정책이라기보다는 일반인들이 불편해하고 거리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거리노숙인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소개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시, 지난해 노숙인 1,045명 임시 주거 지원…82.4% 노숙 탈출’. 2018년 2월 7일자 서울시 보도자료 제목이다.

‘2018 홈리스추모제’ 주거팀은 “서울시가 (노숙인 탈출에 그치지 말고) 더 나은 주거로의 상향 이동을 위한 후속 지원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노숙인을 거리에서 임시주거로 옮기는데 중점을 두지 말고, 임시시설 거주기간을 최소화하고, 임시거주하는 동안에도 노숙인들이 최소한 사람답게 안전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숙인을 위한 정책’을 마련하라는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국가가 어쩔 수 없이 거리로 내몰린 홈리스들을 위한 종합적이고 안정적인 보호시스템과 제도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지적이다.

편집 : 김정민 기자



쪽방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좁은 공간에서 티브이를 끼고 산다

세상을 내다보는 유일한 통로지만, 마약에 가까운 중독성이 있다.

요즘은 티브이가 온통 코로나 바이러스 겁주는 방송 뿐이라

쪽방 사람들은 방에서 꼼짝도 않는다. 말 잘 듣는 착한 백성들이다.



난, 티브이 중독성에 등 돌린 지 오래되었지만, 페북은 더 심했다.

가진 자들의 비인간적인 모습을 티브이보다 더 상세히 보게되니 

사람 좋아하는 인간이 사람에 대한 혐오감이 생길 정도다.

오죽하면 사람 만나기가 싫어 핸드폰을 꺼 놓거나, 방에 갇혀 있을 때가 더 많겠는가?



지난 10일 녹번동에서 어울려 마신 후유증에 몸이 말이 아니다.

그 다음 날 소주 석 잔에 맛이 가 진땀까지 흘리며 빌빌거렸으나, 술과 원수지기는 싫다.

아껴 오래 먹어야겠다.

그 날처럼 온종일 어울려 코가 비틀어지게 마실 기회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있겠는가?

또 하나의 추억으로 남았으니, 죽어도 고다.



요즘은 아무 생각 없이 천정만 쳐다보는 시간이 제일 편하다.

예전엔 하루 종일 쪽방에 갇혀 사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나도 동화되어 가는 것 같다. 아니 동화가 아나라 편했다.

방에서 담배를 피우던 딸딸이를 치던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잖은가? 

그러니 독신자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난 12일은 비가 부슬부슬 내려 또 술 생각이 났다.

술병이 나서 골골거리는 형편인데도, 정말 대책 없는 인간이다.

그렇지만 혼 술은 절대 안 마신다. 라면을 끓여 속이나 풀었다.

 


밖에는 날씨가 포근해, 마치 봄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동네를 돌아다녔으나, 술 마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술은 핑게일 뿐, 사람들 만나 살아가는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동자동은 마치 민방위 훈련하듯 조용했다.

할매의 고함소리도 술꾼들의 술주정도 들을 수 없었다.



전 날도 누군가를 기다리던 이남기씨만 만났을 뿐이다.

아무도 없는 공원에 혼자 누워있는 사람도 있었다.

무슨 고민이 있는지, 고독을 즐기는지,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동자동에서 아는 사람 만나기가 어려워졌다.



지난 9일은 동자동에 사람이 없어 서울역으로 갔다.

토요일도 아닌데, 무슨 집회를 하는지 소란스러웠다.



문정권을 저주하는 문구로 뒤덮인 봉고차에서 흘러 나오는 확성기소린데,

엄청난 소음으로 주민들을 괴롭히는 이런 짓은 제재할 수 없는 것인가?



마스크를 쓰고 술은 어떻게 마실 것인지, 막걸리 가진 천씨가 약 올렸다.

‘한 잔 줄까? 말까?’ 술잔도 없잖아~



그런데, 서울역에도 노숙자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다들 ‘다시서기’에서 티브이나 보는 줄 알았는데,

‘천국과 지옥은 분명히 있다’는 텐트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따뜻한 커피 한 잔 나누어 주며, 예수 믿으라는 설교가 한 창인데,

예수님 찾으면 전염병이 얼씬도 안하는 갑다.

다들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설교를 들었다.

한 장뿐인 마스크는 걸레나 마찬가지라, 안 쓰는 게 낫다.



양지바른 곳에서 죽치는 몇몇 거사들이 있을 뿐, 서울역도 한산했다.



이제 곧 전염병이 물러나며 따뜻한 봄날이 찾아 올 것이다.

다들 방에서 나와 슬슬 몸이나 풀자.

동자동의 봄을 찾자.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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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점염병에 주눅 들어 갇혀 살지만 감옥살이는 이제 싫다.
기다리는 사람도 반기는 이도 없지만 쪽방에서 벗어나는 것이 맘 편하다.
불편한 몸이지만 서울역 주변을 돌아다니다 구경거리 있으면 구경하고
힘에 부치면 어디서나 눈 감으면 된다.




이젠 면역이 되었는지 피부가 무뎌졌는지 춥지도 않다.
모든 게 마음 하나 놓으면 편안해진다.
차라리 잠들어 저승 간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냐마는
세상만사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사가 아니더냐?




통행에 방해 된다 나무라지도 말고, 불쌍하다고 휠체어를 밀지도 마라.
어차피 혼자 떠돌 수밖에 없는 나그네 길 아무도 간섭마라.
꿈에라도 할미를 만나고 싶고, 날 버린 자식 손이라도 잡고 싶다.
인생은 일장춘몽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이남기씨는 올해로 예순 아홉인데, 나보다 네 살 적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술을 좋아해도 점잖게 마신다는 것과 동자동에 들어온지가 20년이 넘은 고참 이란 것 정도다.




지난 2일 ‘새꿈어린이공원’에 나가보니, 공원은 한적했다. 날씨가 추워 다들 방콕하는 것 같았다.

잘 안 가는 다방에 들어갔는데, 그 곳은  ‘동자희망나눔센터’에 있는 찻집이다.

본래 목욕탕 자리를 서울시에서 매입해 쪽방주민 편의시실로 사용한다. 
'서울역쪽방상담소' 사무실과 회의실, 샤워시설을 비롯해 차도 파는데, 쪽방 주민이면 천원에 마실 수 있다.

주민들이 커피 뽑는 다방 마담 역활을 하지만, 싱겁 떨다간 바로 미투다.
난, 자판기 스타일이지만, 여기서도 옛날 다방커피 맛은 볼 수 없다.

괜히 신년이라 천원짜리 폼 한 번 잡아본 것이다.




“아지매~ 달달한 다방 커피 한 잔 말아주이소” 했더니, 대뜸 ‘라떼’면 되겠어요?라고 물어왔다.

라뗀지 로똔지도 모르면서 그냥 달라 했다.

커피 한잔 시켜놓고 그대 오기만 기다리니, 마침 이남기씨가 들어왔다.
이 친구는 커피 마시러 온 게 아니라 화장실 사용하러 왔는데, 차 한 잔 하라며 불러 앉힌 것이다.




콧물이 대롱대롱 매달려, 감기에 좋은 따뜻한 레몬차나 마셨으면 좋으련만, 좋아하지도 않는 커피를 시켰다.
기자근성이 슬슬 발동해, 이남기씨의 살아 온 인생사를 캐묻기 시작했다.



이남기씨는 전라도 나주에서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양친 밑에 태어나,
어렵사리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 때부터 인생의 쓴 맛을 보기 시작했는데, 84년도에 무작정 상경했단다.




이발소에 들어가 머리나 감겨주다, 어쩌다 이발 기술을 배워 밥이나 얻어먹고 살았는데, 
그 곳에서 나와 공사판 노가다로 전전하다 목수 일을 배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상살이는 만만치 않았다. 하루 일당으로 간신히 살아가는 그에게 갑자기 불운이 닥친 것이다.
어느 날 공사판에서 일하다 떨어져 팔목이 부러졌다고 한다.

더 억울한 것은 사고로 보상받은 돈이 고작140만원이란다.
더 이상 일할 처지가 못되어, ‘희망여인숙’에 거주하다 동자동에 들어 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일찍부터 수급자로 간신히 입에 풀칠하고 살았는데, 초창기의 수급비란 쥐꼬리만 했다.

힘들게 사는 쪽방 살이의 유일한 낙은 술 뿐이었는데, 쪽방살이에 길들고, 술에 길들어 산지가 어언 20여년이 넘어버렸다.
빈민들 사는 게 다 비슷비슷하지만, 더 안타까운 것은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아직 총각딱지를 못 떼었다는 것이다.
사내로 태어나 여인네 품속을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하냐? 아니, 그건 인간으로 태어나 죄악에 가깝다.




조용조용 신세타령하던 이씨가 갑자기 정치이야기에서 돌변하기 시작했다.
고함을 지르며 얼마나 욕을 해대는지, 찻집에서 쫓겨 나와야했다.
정치인에 대한 불신이 하늘을 찔렀는데, 테러도 마다할 듯 분노했다.
인간적인 노무현 대통령까지 욕하는 걸 보니, 일종의 배신감 같은 것이 작용한 듯 싶었다.
보수정권에서야 기대하지도 않았겠지만, 진보정권이 들어서면 나아질까 나름으로 혼신을 다한 것 같았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을 거쳐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까지 맞았으나, 빈민들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치하는 놈들은 다 똑같은 인간”이라며 정치에 대한 불신이 증오에 가깝도록 깊어진 것 같다.




쫓겨나와 공원으로 가니, 원종훈씨가 술판을 벌여놓았더라. 막걸리 한 잔에 분노를 다독이는 이남기씨가 안쓰러웠다.
분통 터트리게 된 구체적인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으나, 다시 노발대발 할 것 같아 그만 두었다.



하기야! 이남기씨 삶에 비하면, 나는 잘 살았던 것이다.
좋은 부모 밑에 태어나 남부럽지 않게 공부도 했고, 하고 싶은 것 하며 꼴리는 대로 살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정치나 세상에 대한 불만이 많아 씨팔 조팔하는데, 그야 오죽하겠나?




문재인 대통령과 국회의원들께 간곡하게 부탁드린다.
정부 예산에서 눈곱만큼만 떼어내도 어렵게 사는 사람들 다 보살필 수 있다.
정치도 돈도 모두 사람 생존에 우선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새해부터 바람막이조차 없어 비닐 덮어쓰고 벌벌 떠는 홈리스가 거리에 늘렸다.
제발, 서민들 민생에 신경 좀 써주었으면 고맙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이삼헌씨가 위령무를 추고 있다.


연고 없이 세상 떠난 이를 추모하는 ‘홈리스 추모제’가 지난 동짓 날, 서울역광장에서 열렸다.


동자동 조인형씨가 추모제단에 국화를 헌화하고 있다.

정부에서 사망자 전수조사에 손을 놓고 있어, 빈곤 활동가들이 집계한 올 해 사망자만 166명이란다.
실제론 서울에서만 300명 이상이 죽어가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추모제단


동자동 쪽방에 거주한 열여덟 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영정사진도 남기지 못한 채, 이름만 남겼다.


추모객들

거리에서 죽은 노숙자는 시신이라도 제 때 수습되었지만,
방안에서 외롭게 죽어 간 사람은 시신 섞는 악취로 알게 되었다.


동자동 송병섭씨가 연영철씨에 대한 추모글을 읽고 있다.

동자동에선 가파른 계단에 굴러 떨어져 죽은 두 사람 외에는 대부분 술 때문에 죽었다.

독약인줄 알지만 이승에 무슨 미련이 있겠는가?


동자동 조인형씨가 잘가라고 손을 흔들고 있다.

서둘러 떠난 그들을 기억하러 서울역광장에서 열리는 추모제에 갔다.
무대 앞 현수막엔 올해 죽은 홈리스 이름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꼼꼼이 살펴보니, 아는 분도 여럿 있었다.
더구나 연영철씨는 옆방에 살던 후배가 아닌가.
4층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떨어져 척추를 다쳐 전신이 마비되었는데,
돈이 없어 수술시기를 놓쳐 병원에서 고생만하다 올 여름 세상을 떠났다.


연영철씨가 입원한 중앙병원에 병문안 간 정선덕씨 2018. 4

병문안은 여러차례 갔지만, 서둘러 화장해 장례를 지켜보지 못했다.
살아 생전 더 따뜻하게 손잡아 주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방문 앞에 앉은 연영철씨. 2017. 9

요리사 출신이라며, 언제가 맛있는 음식 한 번 만들어 대접하겠다는 말을 여려차례 했지만,

재료도 주방도 없는 쪽방에서 뭘 한단 말인가?


방에서 식사하는 연영철씨. 2018, 7

유달리 연예인들과 미녀들을 좋아해, 비좁은 방안에는 캘린더의 미녀사진을 덕지덕지 붙여 놓았다.
이제 부질없는 미련일랑 다 버리고 홀연히 먼길 떠나셨네요.


사진가 노은향씨가 보낸 내의를 전달받는 연영철씨. 2017.12


당신이 좋아하는 가수 정태춘씨가 불러 준 ‘서울역 이씨’는 잘 들었는가요?
부디 모든 것 잊고 편히 잠드소서!


가수 정태춘씨가 홈리스추모제에서 '서울역 이씨'를 부르고 있다.


그 옆에는 지난 달 심장마비로 죽은 정용성씨의 영정사진도 있었다.
착하기 그지없는 녀석인데,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어미는 어쩌라고 혼자 가버렸는가?



처음 만났을 땐, 사진만 찍으면 돈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몇 번은 주었으나, 사진인들이 길들인 버릇 같았다.
그 이후부터 있어도 못 준다고 했더니, 더 이상 손 내밀지 않았다.


방안에 앉은 정용성씨. 2018, 9

항상 말은 없지만 잔정이 많아 만나기만 하면 배시시 웃었다.
술자리를 같이 하면 안주도 먹으라며 사과조각을 쥐어주기도 했다.
어머니와 술친구가 되어 어지간히 술에 쩔어 살았는데,
옥탑방으로 오르다 수 없이 넘어져 상처 아물 날이 없었다.


아래 층에 사는 정재헌씨가 살아 온 이야기를 나누다 설움에 북받쳐 울고 있다.

좌로부터 황춘화. 정용성, 정재헌씨 2018, 10


그런데 이 녀석은 나이가 아들 햇님이 또래인데, 날더러 늘상 행님이라 부른다.
하기야! 어미를 옆에 두고, 아버지라 부를 순 없지 않은가?


정용성씨 어머니 황춘화씨, 2019, 5


젊은 나이에 장가는 커녕 세상 맛도 모르고 갔으니, 더 슬픈 것이다.
갑작스럽게 죽어 장례를 치루고서야 알게 되었다.
빈소에서 아들 죽음이 실감나지 않았는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뒤늦게 만나서는 아들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을 바가지로 쏟아냈다.


2017년 11월 동자동 추석잔치에서,,,

운다고 떠난 자식이 돌아 올 수 있겠냐마는 얼마나 가슴이 미어터지겠는가?
죽은 자식보다 황춘화씨가 더 걱정이었다.
이제 옥탑방에서 살지 말고 낮은 층의 작은 방으로 옮기라고 부탁도 했다.




그런데, 죽은지도 몰랐던 전경희씨의 영정사진도 있었다.
한 동안 보이지 않아 잊었는데, 올 2월 심장마비로 죽었단다.
2년 전 대부도의 ‘아름다운 동행“에 함께 한 적도 있었다.
식당 벽에 붙어 있는 술 광고 속의 미녀를 보며 “이쁜 여자 보니 춘정이 동한다”고 너스레를 떨었더니,
”젊을 때 바람께나 피웠겠다“며 꼬리웃음 치던 모습이 눈에 선한다.


대부도 기념관에서 김정심씨와 기념사진 찍는 전경희씨, 2017.11

그 외 신기식, 이삼석, 최상섭씨를 제외하고는 동자동 살았지만, 모두 낯설더라.
평소 바깥 출입은 않고 방안에서만 살았다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좌우지간, 모르는 분을 포함하여 비명에 간 166분의 이름 앞에 고개 숙였다.


홈리스 야학 합창단이 '떠나가는 배'를 부르고 있다.


부디 아무런 원망말고, 그냥 팔자가 사나워 먼저 떠난다고 여기세요.

이 더러운 세상, 더 살아 무슨 영광을 보겠습니까?

고생스런 이승을 마무리하였으니, 저승에선 잘 산다는 믿음 하나로 위안 삼으시길...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조문호합장



추모객들이 서울역 주변을 행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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