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다섯 번째 애마 코란도 밴을 기어이 떠나보내고 말았다.
3년 전 350만원에 사들인 애첩인데, 그동안 병원비만 몸값의 배가 들었다.
고속도로에서 애 먹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건만, 그래도 떠나보내고 나니 서운하다.

지난 6일 정영신씨의 장터사진전 준비하러 떠나는 춘천으로 따라 나섰다.
변속이 되지 않아 혼난 경험이 있는 정영신씨가 불안해했으나,
그 문제는 스스로 해결 방법을 찾았다며 안심시켰다.
크러치가 밟혀 올라오지 않으면 발등으로 끌어 올리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춘천 가는 국도의 가평 무렵에 이르러 차에서 타는 냄새가 났다.
그러더니 얼마 가지 못해 시동이 꺼져 버렸다.
다시 시동을 걸어 출발하기를 몇 차례 하였으나, 결국 퍼져 버렸다.
약속시간이 늦어버린 정영신씨는 남의 차 구걸해 먼저 보내고,
멈춰선 차를 견인시켜 갔더니, 엔진헤드를 바꾼다며 수리비 80만원을 내란다,

장례 날만 기다리는 차에 80만원이나 쳐 바를 수 없었다.
디젤 노후차 폐차에 지급하는 환경지원금도 움직이는 차에 한해서란다,
뒤늦게 돌아 온 물주 정영신씨와 의논해 울며 겨자 먹기로
고물 값 40만원 받고 춘천폐차장에 넘겨 버렸다.
차에 실린 짐 꾸러미를 챙겨 돌아오는 마음은 찹찹했다.
그동안 속을 많이 섞였지만, 전국 장터를 돌아다니며 정들었던 차다.
같이 끝내자고 했으나 결국 먼저 가버렸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애마에 얽힌 추억이 너무 많다.
제일 처음 애마를 만난 건 1982년도 였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버린 사우 윤재성씨의 '포니2'를 100만원에 산 것이 시작이다.
그 때는 드라이브에 재미를 느낀 초짜라 아무나 차를 태워주던 시기였다,

어느 날 인사동에서 모령의 여인을 만나 차 한 잔 하는 자리에서 
갑자기 그 녀가 겨울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다.
‘얼씨구나’ 하며 차에 태워 변산 바닷가로 출발했다.
막상 겨울바다에 도착하여 바닷가를 거닐었으나, 추워 오래 견딜 수가 없었다.
차 때문에 술도 마실 수 없어 그냥 돌아와야 했다.

밤늦은 무렵의 한가한 고속도로라 신나게 달렸는데, 앞에서 화물차가 걸리 적 거렸다.
추월하느라 폐달을 힘껏 밟았는데, 추월하고 보니 내리막길이었다.
“아차! 죽었다” 싶었다. 차가 공중에 붕 떠 핸들을 꽉 움켜잡았는데,
순간적으로 판단한 것이 가드레일에 의지해 미끄러지는 방법 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절묘하게 가드레일을 들이 받아 100미터 넘게 끌려가서야 차가 멈춰 섰다.

분명 기적이었다.


치명상을 입기 쉬운 옆자리 여인도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았다,
차에서 내려 보니 오른쪽 바퀴는 둘 다 날아 가버렸고, 휠만 쭈그러져 있었다.
견인차를 기다리는데, 고속도로 순찰차가 닥아 왔다.
망가진 차를 보더니, 가드레일 망가진 곳을 찾기 위해 두 번이나 돌아다녔으나 멀쩡했다,

하늘이 보살폈다“며 순찰하는 이가 구시렁거렸다.

대전 변두리 어느 정비공장에 차를 맡기고 가까운 여관에 들어 갔는데,
뜻밖의 뜨거운 밤을 보내는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살이 끼여 이런 꼴을 당하니 살을 풀어야 한다는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 뒤로 연락 끊긴 하루 밤 풋사랑이지만, 잊을 수 없는 인연이었다.

그 당시는 종합보험만 가입했기 때문에 바퀴와 휠만 교체하고 끌고 가야했다.
그 뒤 전주에 갈 일이 있었다. 바디가 찌그러지고 심지어 오른쪽 문이 잠기지 않아
끈으로 칭칭 묶은 차에다 전시할 사진을 잔뜩 실고 갔더니
화가 류휴열씨와 도예가 한봉림씨가 기가 막혔는지,
어떻게 이런 차로 전주까지 올 수 있냐고 놀려댔다.

그런 수모를 당한 포니가 어느 날 화염에 휩싸여 장렬하게 전사했다.
어느 날 ‘환경관리공단’에서 실시한 환경사진공모전 심사를 위해 집을 나섰는데,
출근 시간에 걸려 차가 꼼짝을 않았다.
시간은 촉박한데, 고물차는 열 받아 엔진에서 연기까지 나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어 변두리에 세워두고 지하철로 내려갔다.

그런데, 일 마치고 돌아왔더니 그 자리에 차는 없고 그을린 흔적만 있었다.
주변 사람에게 물어 보니 내가 빠져나가는 순간 차에 불이 붙었고,
그 뒤 소방차가 출동하여 불을 껐는데, 불탄 차는 견인해 갔다고 했다.
환경사진 심사장에서 자연생태사진만 지겹도록 보고 왔는데,
이게 환경고발감이다 싶었다. 어떻게 이런 아이러니가 있을 수 있나?

그 뒤로 티코를 구입해 한 2년 동안 타고 다녔는데, 사고 한 번 없는 괜찮은 차였다.
덩치가 작아 잘 빠져 다니는데다 주차하기도 편했다.
그런데 휴지조각처럼 접힌 사고차량을 본 후로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서 큰 맘 먹고 갤로퍼 숏 바디 신형을 사기로 했다.
92년산 차 값이 1,900만원이었는데, 36개월 활부로 구입한 것이다.
그 무렵은 ‘이미지 라이프’라는 사진취재대행업을 할 땐데,
두 세군데 사보에 일해 주는 것으로 간신히 끌어가야 했다.
주 고객층인 잡지사들이 워낙 영세하다보니, 일을 맡길 사정이 아니었다.

그런데, 차 뽑은지 두 달도 되지 않아 대형 사고를 내고 말았다.
부여에서 사진행사가 있어 고속도로를 탔는데,
휴게소에서 아주 섹시한 여인을 보게 된 것이 원인이었다.
다시 운전대를 잡았지만 그 여인이 아른거려 견딜 수 가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그 여인을 생각하며 딸딸이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속도감에 더해 쾌감도 무르익어 갔다.

 

흔들어도 적당히 끝내야 하는데, 그게 되지 않았다.
갑자기 사정되어, “어~어~”하다 나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밟아버린 것이다.
‘찌이익~“ 차가 미끄러져 급정거하자, 갑자기 ’쾅‘하며 뒤통수를 쳤다.
뒤 따라 오던 2,5톤 화물차가 들이 받은 것이다.
급히 풀 묻은 거시기를 집어넣고 내려갔는데, 터럭기사가 발발 뛰었다.
왜 세웠냐고 캐묻는데, 어떻게 그 이야기를 할 수 있겠나?


좀 있으니 경찰이 달려와 안전거리 미확보라며 피해자를 나무랐다.

교통법규도 웃기는 짜장면이다.
내차는 뒷문이 박살났고 뒷 차는 앤진 룸에서 연기가 났지만, 둘 다 운행에는 지장이 없었다. ` 

서로 각자 수리하기로 합의했으나, 떠나가며 그 기사가 다시 물었다. 
”전방에 아무 것도 없었는데, 왜 세웠어요?“라기에
”미안합니더마는 그거는 죽어도 말 못합니더~“

그래도 2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찰을 기록하는데도 크게 기여한 차다. 

‘한국불교미술대전’이란 일곱 권짜리 화집은 나왔으나, 출판사인 ‘한국색채문화사’가 부도나 원고료도 받지 못했다.

 재수없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이 딱 맞다. 거금 삼천만원이나 되었는데...

그 때 기록한 불교에 관한 슬라이드 필름이라도 남아있으니, 다행이다 싶다.

그 뒤 또 한 번 사고를 쳤다.
도예가 신동여씨가 영주에서 전시를 열 때다.
전시가 끝나고 봉화 수식으로 모두들 자리를 옮겼는데,
얼어붙은 내리막 시골길에 미끄러져 논바닥에 전복되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그 차에는 신동여씨를 비롯하여 지금은 열반한 적음스님과 산중에서 수행중인 도호스님,
불화가 장춘씨가 탔는데, 난 대롱대롱 안전벨트에 거꾸로 메 달려 있었다.

간신히 내려 손전등으로 뒷좌석을 비추어보니 정말 가관이었다.
집에서 먹기 위해 사온 막걸리와 술안주 만들려던 밀가루 봉지가 흩어져
적음스님 얼굴을 뽀얗게 뒤덮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도 ‘중 살려~“라며 농담을 지껄이고 있었다.
도호스님은 머리에 이상이 생겼다며 헛소리를 해대고,
적음스님은 팔이 부러졌다며 낑낑거렸으나 모두 술이 약이었다.
차를 버려둔 채 집으로 몰려가 술만 졸라 축냈다.  

그런데, 이튿날 적음스님 팔에 진짜 문제가 생겼다.
골절로 팔에 깁스를 하였고, 입원하지 않는 조건으로 보험금도 좀 탔다.
보험금 받는 날 적음스님 더러 술 한 잔 사랬더니, 그 대답이 걸작이다.
“문디 코구중에 마늘을 빼먹지...”

그 차는 15년 동안 25만킬로를 같이 뛰었는데,
어느 날 일산 길가에 멈추어 서서 더 이상 같이 못 살겠다고 버텼다. 어찌하랴?

 

헤어지고 새로 만난 애마는 그보다 덩치가 큰 갤로퍼였는데, 일단 조가 잘 맞았다.
사진전에 필요한 자재를 실고 산골마을을 돌아다닌 순회전도 열심히 도와주었고,
아파트에 버려진 장롱까지 차 지붕에 실어 정선으로 옮겨 날랐던 것이다.
정영신씨와 전국 장터를 돌아다니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그도 눈 내린 평창 시골길에서 미끄러져 개울에 전복되어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나에겐 상처하나 입히지 않은 열녀다.

그 고마운 년도 몇 년전 천상병선생 기일 날 의정부 산소 가는 길가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가 떠나며 내게 붙여 준 년이 엊그제 폐차시킨 코란도였다.
착한 마누라가 있으면 악처도 있듯이, 코란도는 나에게 악처나 마찬가지다.
얼마나 속을 많이 섞였던지 꼴도 보기 싫지만 어쩌겠는가?
그래도 내가 데리고 놀며 정들었는데...

더 이상 악연을 만들지 않아야 하는데,
살아있는 동안은 그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이제 세상을 함께 떠날 진짜 애마를 만나고 싶다.

사진, 글 / 조문호

 

 

 

 

 






완주의 왈패 한봉림이가 화두를 보내왔다.

작은 영웅들의 동네 인사동’, 우리 그들을 만난다.”로 글을 쓰란다.

생각해 보니, 인사동을 풍미한 많은 걸물들이 떠오르더라.

 

더러는 저승사자한테 붙들려가기도 했지만,

대개 변두리에 처박혀 구멍 파느라 두문불출하고 지낸다.

인사동만 바람난 줄 알았더니, 그들도 바람났나보다.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 중광스님은 그래 그래 놀다 가셨고,

별만 줄 창 그리던 강용대, 체류냄새 풀풀 풍기며 낄낄거리던 사진기자 김종구,

어디엔들 이 한 몸 머물 곳 없으랴산문집으로 폼 잡던 땡초 최영해,

민중미술 그림판을 좌지우지한 사단장 김용태, 인사동 밤안개 여 운,

성질 더러운 콧수염 사진쟁이 김영수 등 많이도 잡혀갔다.

 

김명성, 노광래, 전활철, 최일순 등 몇몇은 인사동에 남았지만,

소설이 안 팔려 작가폐업술집 낸 배평모는 풍기 갔고,

인사동만 나오면 인사불성 된다는 사기꾼 한봉림은 완주 있고,

품팔이 노동자 시인 김신용은 골병들어 소래있고,

부산의 파아란 바다를 그리워하던 이청운은 병원에 갇혀 산다.

 

막사발처럼 사는 상투꾼 김용문은 터키에 돈 벌러 갔는데,

대처승인지, 시인인지, 사기꾼인지 헷갈리는 신동여는 영주 살고,

임진각에 바람개비 날린 털보 김언경은 단양 살고,

떠돌이 유목민  최울가는 어디 있는지 정처 없고,

술버릇 지랄 같은 장경호는 남양주서 독수공방 기다린다.

 

날씨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게 인생인지 모르지만,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나.

노세노세 늙어 노세, 죽고 나면 못 노나니...” 이 말 참 명언이다.

이 봄 가기 전에 인사동서 경노잔치 한 판 벌이자.

함양 호랑이 이목일이가 인사동서 잔치한다니, 떡 본 김에 제사지낼까?

다음달 27, 인사동의 갤러리M’이란다. (회비20,000원)

 

제목은 거창하게 작은 영웅들의 동네로 시작해 놓고,

글이 삼천포로 빠져 경노잔치 사발통문이 돼 버렸네.

지정곡은 싫어하는데다, 본디 글쟁이가 아니고 사진쟁이니,

너그러이 양해 바란다.

 

사진,/ 조문호




아래 사진들은 23일의 인사동거리다.






 

완주시 소양면 대흥리 474번지 소재의 종남산 자락에 자리잡은
현대도예가 한봉림선생의 도예 작업실에  새로 단장한 한옥 팬션이 문을 열었다.

 

이곳은 주변 자연경관도 절경이지만, 넓은 마당 곳곳에 선생의 도예작품들이 널려있어,
"님도 보고 뽕도 따고", "도랑치고 게 잡는" 일거양득의 환상의 휴식공간이다.

그리고 군불 때는 온돌식 한옥에다 서양식 화장실과 주방까지 있어
한옥의 정겨움과 양옥의 편리함을 두루 갖춘 팬션이기도 하다.

한봉림선생은 원광대 미술대학 학장과 중국 경덕진 도자대학의 고문교수로 계셨던,
전주 문화계 맹주로서 "상대를 찾지 못해 주먹을 볼 때마다 미안하다"고 하는 호걸이시다.

이곳 팬션에 가면 평생을 일궈 온 한봉림 선생의 예술세계를 두루 접할 수 있는데,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직접 작가를 만나, 한 수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도 얻게 된다.

숙박비를 비롯한 자세한 내용은 다시 알려드리겠으나, 직접 문의해도 된다.

[한봉림 선생 연락처 : 010-3673-7687]

 

 

 

 

 

 

 

 

 

 

 

 

 

 

 

 

 

 

 

 

 

 

 

 

 

 

 

 

 

 

 

 

 

 

 

 

 

 

 

 

 

 

 

 

 

 

 

 




 

 

 

 

지난 15일, 완주 소양면에 작업실이 있는 도예가 한봉림씨를 만나러 갔다.

친구 생각나면 훌쩍 떠날 수 있는 것도, 이젠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이런 저런 일에 목매여, 자유롭게 살아본 지가 오래되었다.

 

한옥 팬션을 지었으니 한 번 오라는 연락에도 차일피일 미루었더니,

팬션 홍보에 필요한 사진이 필요하다며 오라고 했다.

 

나도 정선에 오래 살아봤기에 친구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아무리 천하의 비경과 예술을 끼고 살아도, 외로우면 소용없는 것이다.

마음 맞는 벗들이 들락거려야 사람 사는 맛이지...

 

나는 멀리 떠나게 되면, 아직도 어린애처럼 밤잠을 설치는 버릇이 있다.

밤새도록 눈 한번 붙이지 못한 채, 정오를 넘겨서야 완주에 도착했는데,

차 소리와 개 짖는 소리에도 인기척이 없어 동네 마실 나간 걸로 여겼다.

혼자 돌아다니며, 주변 풍경들과 설치된 도예작품을 찍은 것이다.

 

도깨비들이 놀다 간 듯한 작품들과 이야기도 나누었고,

살랑거리는 바람에 실어 마음의 편지를 띄워 보기도 했다.

한 두 시간 놀다보니, 그때서야 잠이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늙은 누렁이가 지켜보는 가운데, 흔들의자에 기대어 잠들어버렸다.

 

그런데 갑자기 친구가 나타나 “방안에 있었는데, 언제 왔냐?”는 것이다.

차에 둔 핸드폰도 꺼낼 겸, 동네 가게에 막걸리 사러 나왔단다.

이제 일도 대충 끝내고 술 마실 일만 남았는데, 이 친구 선견지명은 있어 보였다.

 

단골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막걸리를 마시며 이런 저런 한담을 나누었다.

30여 년 전 한봉림교수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소설가 배평모씨 때문인데,

사우디에서 귀국하던 날 전주에 내려왔던 이야기를 비롯해

귀가 간지럽도록 그 친구이야기를 했는데, 갑자기 전화를 걸어 바꿔 준 것이다.

 

오랜만에 통화한 친구 목소리에 대고 반갑다는 표현을 더럽게도 내뱉었다.

"야이 인간아~ 아직 안 죽었나? 엄청 명은 질기네!"

 

모두들 기력이 딸리니 술을 아껴 마시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술로 저승 간 친구가 하나 둘이 아니니, 쪼잔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친구 집으로 돌아오니 모친께서 거실에 나와 계셨다.

아직 건강하신 모습을 뵈니 너무 반가웠다.

거동도 불편하지 않고 아직 기억력도 좋으신것 같았다.

 

그러나 다음 날 잡힌 약속으로 일찍 자리에 누워야 했다.

새벽일찍 잠에서 깨어났으나, 마음이 바빠 작업실도 들리지 못한 채 줄행랑 쳤다.

작업실 촬영한다는 핑계로 다시 한 번 들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새집도 지었으니, 여럿 어울려 지신이라도 한 번 밟을 작정이다.

 

사진,글 / 조문호

 

 

 

 

 

 

 

 

 

 

 

 

 

 

 

 

 

 

 

 

 

 

 

 

 

 

 

 

 

 

 

 

 

 

 

 

 

 

 

 

 

 

 

 

 

 

 

 

 

 

 

 

 

 

오십 여섯줄 편지를 쓰며 

                                          - 한봉림 형님에게 -



고마웠습니다 - 貳 주일 전 떠나오면서도 예술
만 이라고 눈물 휑했던, 낮달 같았던 형의 눈빛
말없이 긴 의자 떨리면서 마주 잡았던 큰 손의 의미
당일에서야 알게 되었던 구순 맞이 어머님을 다순히
그 가을 뜰 앞에서 뫼시고, 울산 세필형에게 조촐한
홍삼 하나 마련하며 그나마 몇 사람 고이 절할 제 -
어느 때라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믿었던 인사동 삼십년
조문호형의 사랑도 지치는가, 겨울 문턱이 차갑습니다.

어제는 이십수년 알은 척 생면부지 괴롭히면서 안하무약
사무실로 찾아들며 서툴지라도 예술이라는 자기우선
부끄러운 것도 생존이었다며 생떼 쓰고, 당신이니까 당신이라서
여전히 보태고 또 보태여야만 한다며, 꽥꽥대며 발악하는
반복되는 인사동 夜車 급류인생
침 뱉고 싶고 불끈 때려주고 싶은 여기까지를, 그래도
꿈이었을까 실소처럼 참아보며, 오늘은 국립중앙박물관
고려불화 칠백년의 해후를 보았습니다

대자대비 아미타삼존불 좌하단 서 있는 구렛나루 가섭을 보면
일천구백 팔십년, 추적추적 비 맞고 서있던 겨울 인사동
삼십년만 속절없이 되돌아오고
잊지 못할 십년 전 전남 완도 김신용형 치자나무 향기
신지도에 부서지던 명사십리 모래, 詩처럼 처용처럼 놀다가 간 종남산장
가을이 와도 부서지지 않던 그 형형했던 눈빛 당신은
그날 - 평생 모아왔던 宋 백자 그 모든 도공의 간직을 고스란히
국립 중앙 박물관에 소문 없이 기증하고

허허 - 그 雪白 같았던 따뜻한 마음 이후 미욱한 아우는
한시라도 코끝 찡했던 형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라서
봉두난발 다시 살아난 저 가섭의 깨어있는 염화미소를
차마 계면쩍어 답장조차 십년이 흐른 것입니다


오십 여섯이 되어 오십 여섯 명쯤
인사동 別별을 만났을까요
흩어져버린 백 팔명 - 천살·지살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제야 도리천 씻겨가는 파란 江이 서럽습니다

승천하기 어려운 예술가의 땅이라지요
큰 사랑을 만날 수 없었기에 피곤함만 호적처럼 침묵하고
돌아 갈 곳이 내내 먼 길처럼 공허하여도
우리 모두 버려지는 것도 아닌데

다시 기억하자면,
이청운형의 기역자집의 연가와
가난했던 고아원 뒷산 역경의 염소 떼를 몰고 -
부산 초량 김신용형의 힘찬 짐꾼 출발과
끝내 양보해 버린 양동 울린 지게 하나
세상이 차마 격해, 화가 박광호의 생선 눈빛 좋아하던
김종구형의 빛바랜 데모사진 한 장쯤
우리가 갖고 싶었던 희망 같은 것이었지만

스물 여섯 제 가슴 속에 품었던 젊은 황명걸님의 한국의 아이는
그토록 가고 싶었던 평양같은 여행길 걷지 못했고
식자공 ‘나의 길’ 민영님의 부러진 다리는
한탄강 엉겅퀴 꽃을 끝내 부르지 못했지만
다만, 무세중님의 돈암동 겨울산비탈 기어가며 오열했던 이무기의 슬픔은
옆자리 버스 동반한 사모곡 소리인생 김벌래님 눈시울을
소리 내어 붉히자 - 우리는 참 아름다웠습니다
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이 삶입니까?

구름 저편 천상병님의 문등이 가시나 목순옥은
꿈마저 외상 빚을 갚고 싶었던 것이기에
우리는 도착하여 늦도록 설렁탕집 만수옥에서
소주를 붓으며 씁쓸히 감격했다는 것입니다

봉림형 - 이제 남겨진 몇 줄 편지 속에 그 날 못 다한 십년 쯤 텅 비울까합니다
도무지 창예헌의 샛강으로 말입니다 기국서의 불후의 명작 ‘관객모독’과 신진 여류
영화감독의 데뷔작 ‘엠블란스’를 밤사이 지켜내느라 얼굴 긁힌 형의 서리맞은 봉두 백발
질려 쏘아보던 형수님의 면전을 다시는 부끄러운 불초의 아우였지만
초겨울에도 따뜻했던 봄 완산 종남산 꽃마당을 왠종일 머무르고 싶었던 것입니다
애절하게 끊어지지 않는 인사동의 노래 ‘봄날은 간다’를 누군가 소리 없이 선창할 때
우리는 1982년 완행열차 타고 야간상경 했던 조문호형의 ‘이별의 부산 정거장’을
다 같이 합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천십년 십일월
1955년생 김명성 올림


전주에서 가진 가을여행은 무세중, 김벌레씨의 예술세계에 빠지는 좋은 시간을 만들었습니다.
무세중선생의 행위예술과 이기선씨의 살풀이를 보았고, 김벌래선생의 소리인생에 얽인 이야기들로 여흥을 즐겼습니다.

마당에는 장작불을 에워싼 농심마니들의 노래소리가 메아리치고, 공방에서는 김상현씨를 비롯한 젊은 뮤지션들의 연주가 흥겨웠고,
잔디밭에는 송상욱씨와 이계익씨의 기타와 아코디온 소리가 중늙은이들을 즐겁게 하였습니다.
세팀으로 나누어진 놀이판 덕에, 왔다 갔다하며 바쁘게 놀았습니다.

이른 새벽까지 이어진 여흥은 좋았으나, 그날 밤은 유난히도 사건 사고가 많은 잔치였습니다.
북극곰이라는 영화사를 운영하는 임정하씨가 취해 넘여져 앰블란스에 실려갔고, 기국서씨의 꼬장도 여전했습니다.
한봉림씨의 얼굴을 활켜 깊은 상처를 남겼는데, 마치 표범을 활키는 들개의 형상이었습니다.
오래 남을 한봉림씨 얼굴의 손톱자국처럼, 그날의 해프닝들도 추억으로 남아 오래동안 회자될 것입니다.

이틑날 아침에는 농심마니들이 종남산에 산삼을 심었습니다.

제문을 쓰는 박인식씨, 피리부는 김정남씨, 춤추는 이기선씨,
구순을 맞은 한봉림 모친에게 예를 올리는 모습, 그리고 이계익선생의 그림 그리는 모습,
음유시인 송상욱씨와 뮤지션 김상현씨의 기타치는 모습 등
잔치에서 있었던 이런 저런 기념사진들이 세월이 지나가면 또 하나의 작은 역사로 남아 우리를 추억하게 할 것입니다.

 

 

 

 

 

 

 

 

 

 

 

 

 

 

 

 

 

 



전주문화계 맹주 도예가



학력 : 서울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졸업
서울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졸업
경력 : 중국 경덕진 도자학원 교환교수
원광대학교 미술대학 학장
국제도예캠프 6회 개최
현, 원광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사)우리문화텃밭 '創. 藝. 軒' 운영자문위원

작품경력
76- 개인전 15회
79 제7회 중. 일 국제도예전 /일본 나고야
제4회 공간대상(도예상)우수상
82 한국 도예의 단면전(한미수교100주년 기념/문화공보부 주최)재외한국문화원 특별전시/뉴욕, LA, 파리
82-91 현대미술초대전 /국립현대미술관
83 한. 영. 독 수교 100주년 기념전 /런던
83-98 한국현대도예가회전
84 올림픽주경기장 개장기념 한국현대도예전 /올림픽주경기장 특별전시실
86 한국 현대 미술의 어제와 오늘(국립현대미술관개관기념전) /국립현대미술관
88 제24회 서울올림픽기념 세계현대미술제,한국현대미술전/국립현대미술관
88 동서현대도예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93 예술의 전당 개관기념 현대미술전 /예술의전당 미술관
94 한국현대도예 30년전 /국립현대미술관
95 한국현대도예 50인전 /서울갤러리
96 건학 50주년 기념 홍익대학교 동문 미술 초대전. 한국현대미술 현재와 미래전 /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97 서울국제도예 비엔날레 /서울시립미술관
99 세계현대공예의 오늘, 국제초대작가전 /99청주 국제공예 비엔날레,청주 예술의 전당

'인사동 정보 > 인사동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정숙(문학평론가)  (0) 2013.03.11
이청운(서양화가)  (0) 2013.03.11
송상욱(시인)  (0) 2013.03.11
한정식(사진가)  (0) 2013.03.11
(고)김벌레(음향전문가)  (0) 2013.03.1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