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 여섯줄 편지를 쓰며 

                                          - 한봉림 형님에게 -



고마웠습니다 - 貳 주일 전 떠나오면서도 예술
만 이라고 눈물 휑했던, 낮달 같았던 형의 눈빛
말없이 긴 의자 떨리면서 마주 잡았던 큰 손의 의미
당일에서야 알게 되었던 구순 맞이 어머님을 다순히
그 가을 뜰 앞에서 뫼시고, 울산 세필형에게 조촐한
홍삼 하나 마련하며 그나마 몇 사람 고이 절할 제 -
어느 때라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믿었던 인사동 삼십년
조문호형의 사랑도 지치는가, 겨울 문턱이 차갑습니다.

어제는 이십수년 알은 척 생면부지 괴롭히면서 안하무약
사무실로 찾아들며 서툴지라도 예술이라는 자기우선
부끄러운 것도 생존이었다며 생떼 쓰고, 당신이니까 당신이라서
여전히 보태고 또 보태여야만 한다며, 꽥꽥대며 발악하는
반복되는 인사동 夜車 급류인생
침 뱉고 싶고 불끈 때려주고 싶은 여기까지를, 그래도
꿈이었을까 실소처럼 참아보며, 오늘은 국립중앙박물관
고려불화 칠백년의 해후를 보았습니다

대자대비 아미타삼존불 좌하단 서 있는 구렛나루 가섭을 보면
일천구백 팔십년, 추적추적 비 맞고 서있던 겨울 인사동
삼십년만 속절없이 되돌아오고
잊지 못할 십년 전 전남 완도 김신용형 치자나무 향기
신지도에 부서지던 명사십리 모래, 詩처럼 처용처럼 놀다가 간 종남산장
가을이 와도 부서지지 않던 그 형형했던 눈빛 당신은
그날 - 평생 모아왔던 宋 백자 그 모든 도공의 간직을 고스란히
국립 중앙 박물관에 소문 없이 기증하고

허허 - 그 雪白 같았던 따뜻한 마음 이후 미욱한 아우는
한시라도 코끝 찡했던 형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라서
봉두난발 다시 살아난 저 가섭의 깨어있는 염화미소를
차마 계면쩍어 답장조차 십년이 흐른 것입니다


오십 여섯이 되어 오십 여섯 명쯤
인사동 別별을 만났을까요
흩어져버린 백 팔명 - 천살·지살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제야 도리천 씻겨가는 파란 江이 서럽습니다

승천하기 어려운 예술가의 땅이라지요
큰 사랑을 만날 수 없었기에 피곤함만 호적처럼 침묵하고
돌아 갈 곳이 내내 먼 길처럼 공허하여도
우리 모두 버려지는 것도 아닌데

다시 기억하자면,
이청운형의 기역자집의 연가와
가난했던 고아원 뒷산 역경의 염소 떼를 몰고 -
부산 초량 김신용형의 힘찬 짐꾼 출발과
끝내 양보해 버린 양동 울린 지게 하나
세상이 차마 격해, 화가 박광호의 생선 눈빛 좋아하던
김종구형의 빛바랜 데모사진 한 장쯤
우리가 갖고 싶었던 희망 같은 것이었지만

스물 여섯 제 가슴 속에 품었던 젊은 황명걸님의 한국의 아이는
그토록 가고 싶었던 평양같은 여행길 걷지 못했고
식자공 ‘나의 길’ 민영님의 부러진 다리는
한탄강 엉겅퀴 꽃을 끝내 부르지 못했지만
다만, 무세중님의 돈암동 겨울산비탈 기어가며 오열했던 이무기의 슬픔은
옆자리 버스 동반한 사모곡 소리인생 김벌래님 눈시울을
소리 내어 붉히자 - 우리는 참 아름다웠습니다
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이 삶입니까?

구름 저편 천상병님의 문등이 가시나 목순옥은
꿈마저 외상 빚을 갚고 싶었던 것이기에
우리는 도착하여 늦도록 설렁탕집 만수옥에서
소주를 붓으며 씁쓸히 감격했다는 것입니다

봉림형 - 이제 남겨진 몇 줄 편지 속에 그 날 못 다한 십년 쯤 텅 비울까합니다
도무지 창예헌의 샛강으로 말입니다 기국서의 불후의 명작 ‘관객모독’과 신진 여류
영화감독의 데뷔작 ‘엠블란스’를 밤사이 지켜내느라 얼굴 긁힌 형의 서리맞은 봉두 백발
질려 쏘아보던 형수님의 면전을 다시는 부끄러운 불초의 아우였지만
초겨울에도 따뜻했던 봄 완산 종남산 꽃마당을 왠종일 머무르고 싶었던 것입니다
애절하게 끊어지지 않는 인사동의 노래 ‘봄날은 간다’를 누군가 소리 없이 선창할 때
우리는 1982년 완행열차 타고 야간상경 했던 조문호형의 ‘이별의 부산 정거장’을
다 같이 합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천십년 십일월
1955년생 김명성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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