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경기 평택 안중장

“덤이 바로 정이고, 정 없는 장은 장이라 할수없지~”

골목골목 장이 들어서는 골목장…1·6일이 드는 날 열려
난전엔 앵두·오디 등이 다소곳이…
100개 노점갖춘 민속 5일장 개장 활기
주변에 평택항 있어 제철 해산물 많아

 

 

안중장은 경기 평택시 안중읍 안중리 안중버스터미널 주변에서 1일과 6일이 드는 날에 열린다. 이 장은 골목골목 장이 들어서는 골목장이다. 여름이면 나무가 무성하게 잎을 매달듯 장날이면 골목마다 울긋불긋한 파라솔 행렬이 장날임을 알린다.

 안중은 서해안 개발붐 덕분에 최근 활기를 띠기 시작했지만 이곳 장의 역사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오래됐다. 처음에는 안중 남쪽에 있는 현덕면 황산리에 장이 섰는데 인근에서 규모가 가장 컸다고 한다. 아산만을 가로지르는 방조제가 없던 그때, 보부상들은 만에 물이 빠지면 걸어서 황산리로 왔다. 수로와 육로의 교차점인 황산리 일대가 조선시대 보부상의 길목이 되자 이들의 왕래로 마을이 번잡해졌다. 그러자 마을 터줏대감인 정씨 일가가 장꾼들을 쫓아냈고, 삶의 터전을 잃은 보부상들이 북쪽에 있는 지금의 안중으로 장을 옮겼다고 한다.

 안중버스터미널 주변에 형성된 골목 난전에는 보기만 해도 탐스러운 앵두부터 보리수·복분자·오디에 청솔방울까지 이름표를 내걸고 할머니들 앞에 다소곳이 앉아 있다. 텃밭에서 따왔음 직한 호박과 마늘종은 싱그러운 초록을 뽐내고, 한창 물오른 매실의 향긋한 내음이 지나가는 여인네의 발길을 붙든다.

 해마다 매실청을 담근다는 신덕자 할머니(71)가 지난해에 비해 값이 너무 싸다며 매실을 고르자 사람들이 몰려든다. 매실을 파는 과일장수 김득수씨(52)도 해마다 생산량이 많아져 가격이 내리는 것 같다고 말한다. “매실에 우리 신체의 생존 에너지를 생성하는 물질이 많이 들어 있다는 정보가 알려지면서 찾는 사람이 많아지고, 그러면서 재배하는 사람도 너무 많아졌다”는 게 김씨의 이야기다.

 스물다섯 ‘꽃각시’ 시절에 장사를 시작했다는 김씨 할머니(76)는 올해로 51년째 직접 농사지은 것들을 안중장에 내다 팔고 있다. 반평생을 장에서 살다 보니 만나는 사람이 다 식구 같다면서 “여기가 살기 참 좋은 곳이여. 좋은 쌀도 많이 납니다” 하고 안중 자랑을 한다. 안중장에서 덤 많이 주기로도 소문난 김씨 할머니는 “덤이 바로 정이고, 정 없는 장은 장도 아니지” 하며 “땅이 주는 선물을 나누어 먹을 수 있으니 장이 참 좋다”고 덧붙인다.

 장터 한쪽에서는 물놀이로 더위를 쫓는 어린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인근에 현대·기아는 물론 외국의 완성차업체에까지 납품하는 자동차부품 공장들이 있어 다른 장보다 젊은 사람들이 많고 어린애들도 더러 나온다는 게 이유식 할머니(80)의 말이다. 이씨 할머니는 “농사짓기가 힘들어 장에 나온 지 31년이나 됐는데 그동안 돈도 못 벌고 몸만 늙어버렸다”면서, 지금은 오히려 농사짓던 그 시절이 그립다며 푸성귀 같은 초록빛 웃음을 건넨다.

 장터를 다니면 다닐수록 이런 생각이 든다. 전국 어디든 전통시장이 활성화되려면 현대적인 아케이드를 설치하는 일보다 제철 식재료를 비롯한 다양한 상품을 저렴하게 살 수 있도록 구색을 알차게 갖추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 이를 깨달았음인지 평택시도 기존의 안중전통시장 내에 100여개의 노점을 갖춘 민속 5일장을 개장하고 6월11일 개장식을 가졌다. 이제 장날이면 안중전통시장 일대가 더욱 활기를 띨 것이다.

 안중장은 또 평택항이 가까이 있어 싱싱한 제철 해산물도 많이 나온다.

 어물전이 몰려 있는 곳 옆에는 뻥튀기 가게가 있어 인근 어르신들의 사랑방 역할까지 한다. “뻥!” 하는 소리에 문득 든 ‘우리네 정을 뻥튀기 하면 그 크기가 얼마나 될까’ 하는 의문을 지나가는 바람에게 물어보며 발길을 돌린다.

 안중장 외에 평택에 서는 장은 서정장(2·7일), 안정장(3·8일), 송북장(4·9일), 통복장(5·10일) 등이 있다. 또 평택 송탄관광특구의 심장부인 신장쇼핑몰도 미군 부대를 기점으로 한 신장동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어 나라 안팎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33) 충남 공주 산성장  

 

 

“밤꽃 냄새에 홀려 반평생 장터 지켜유~”

200년전 형성…1·6일 드는 날에 열려
주변이 우리나라 최대 밤 생산지
밤으로 만든 국수·떡 등 음식 다양
호두 많이 나오는 ‘유구장’도 가볼만…
“덤 없으면 장이 아니어유. 저울 눈금대로 살게 되나유. 말 한마디에 덤도 주고 그러면서 살지유.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도 있지유.”

 박씨 할머니(78)는 밤꽃 냄새에 홀려 장터에 들었다가 반평생을 장 덕분에 버텼다고 한다. 충남 공주시 정안면 월산리 소랭이마을 산자락에 하얀 눈 내리듯 밤꽃이 피면, 박씨 할머니는 창문을 두드리는 비릿한 밤꽃 냄새에 잠을 설칠 때가 많았단다. 그러다 땡볕에서 기른 상추와 오이를 머리에 이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주 산성장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박씨 할머니는, 어수룩한 청상과부를 장터로 불러낸 것이 밤꽃 냄새라고 추억한다.

 박씨 할머니가 사는 정안면은 우리나라 최대의 밤 생산지로 6월에는 밤꽃축제도 열린다. 밤막걸리·밤국수·밤파전·밤떡을 자랑하는 할머니 목소리에도 밤꽃 향기가 배어 있다.

 200여년 전부터 형성돼 오늘에 이르는 공주 산성장은 1일과 6일이 드는 날이면 공주시 산성동 일대에 선다. 시외버스터미널을 중심으로 장이 열리는 이곳에는 장날이면 크고 작은 난전이 펼쳐지고, 사람들의 표정도 역동적이다.

 버스 정류장 앞에서 고무줄을 길게 늘어뜨려놓고 잡화난전을 차린 김씨 아저씨(67)가 사람들을 향해 외친다. “시방 못 사면 평생 못 사유. 천원이유, 천원~!” 그러자 버스를 기다리던 할머니들이 모여든다. 고무줄을 고르는 오달성 할머니(83)에게 어디에 쓰실 건지 용도를 물어봤더니 할머니 하시는 말씀. “장항아리 묶는 데도 쓰구유, 개미 지나가는 길에도 냅둬유. 장화 신고 밭에 갈 때 바짓단 내려오지 말라고 묶기도 허구만유.” 장터에서 검정 고무줄은 진열 방식이 독특하다. 그냥 툭 던져놓기만 해도 저절로 ‘디스플레이’가 되는 것이다. 마치 꿈틀거리는 생물처럼 짓밟히면서 존재를 드러내기도 한다.

 서해안 시대를 맞아 충남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공주는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교육과 박물관의 도시다. 세종특별자치시도 지척에 있어 자동차로 20여분이면 닿는다.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를 거쳐 원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선조들의 삶의 원형을 만날 수 있는 국립공주박물관은 무령왕릉의 모든 출토품을 전시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또한 계룡산과 금강의 청정 환경을 즐길 수 있는 ‘5도2촌마을’을 운영해 평일 5일은 도시에서, 주말 2일은 공주에서 체험활동을 할 수 있다.

 그래도 공주 땅 자연과 사람의 진면목을 알게 하는 것은 역시 장터다. 자연은 모든 것을 내어주고 다시 거두어간다. 씨앗 한 톨이 흙과 만나는 시간과 그 이후 벌어지는 일들이야말로 자연이 만들어내는 예술임을, 장터 마당에 가면 어렵지 않게 배우게 된다. 장터는 또 사람과 사람의 중심에 서 있다. 이곳에 가면 걸어다니는 시간을 볼 수 있다. 장터에서 만난 더벅머리 총각과 순박한 시골 처녀를 백발의 촌로로 만든 것도 시간이다.

 시대적 환경 변화와 상관없이 43년 동안 시계 고치는 일만 해온 박영철씨(72). 멈춰버린 시계를 장날 하루에 스무개에서 서른개 정도 고친다고 한다. 요즘은 휴대전화가 시계 역할을 대신해 시계 고치는 곳이 점점 없어지고 있지만, 박씨는 오히려 옛날보다 요즘 들어 찾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정직하게 해주니까 단골이 많아지지유. 홍보가 별건가유. 오로지 입소문 하나로 되는 거지유.” 박씨는 말하는 중에도 쉬지 않고 시계를 고친다. “40년이 넘다 보니께유, 믿고 오는 사람이 많아유. 장날이면 누가 보냈다고 손님들이 찾아오는 맛에 홀려 나도 모르게 장에 나오게 되구먼유.” 박씨의 손끝 사이로 늦은 봄바람이 한움큼 바르르 떨고 지나간다.

 공주에는 산성장 외에 고랭지 무와 호두가 많이 나오는 유구장이 3일과 8일에 선다. 유구읍에서는 8월 초순이면 우렁각시축제도 열린다.

(30)부산 구포장


 

부산 최대 5일장, ‘구포국수’ ·가축시장 유명
만세운동·한국전쟁 추억 ‘오롯’

 





장터에서 봄소식을 전하는 것은 봄꽃이 아니라 봄나물이다. 겨우내 얼어있던 땅을 작디작은 새싹으로 비집고 나와 찬바람을 견뎌낸 것들이다. 달래와 냉이를 비롯한 온갖 봄나물이 난장에서 얼굴을 내밀며 웃고 있다.

 선산을 가꾸며 산나물과 약초를 캐는 박기성 할아버지(76)는 장에 나와 이것저것 파는 것도 좋지만 사람들 만나는 것이 더 좋다고 한다. “이기 사는 재미 아이가. 장에 나오마 살맛이 난다카이.” 박씨 할아버지는 “자연이 보물창고”라며 손수 캔 칡 한쪽을 내준다.

 우리 조상들은 봄이 오면 매운맛이 나는 갖가지 나물을 희고 검고 노랗고 붉고 파란 다섯 가지 색으로 맞춰 오신채(五辛菜·매운맛이 나는 다섯 가지 채소로 만든 생채 요리)를 해 먹었다고 한다. 봄을 맞은 구포장은 그 오신채를 통째로 차려놓은 듯 날것 그대로의 싱싱한 봄나물 냄새가 가득하다.

 1919년 3월29일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구포장(부산 북구 구포동)은 1972년부터 상설시장이 됐다. 하지만 지금도 오일장의 명성이 더 높아 3일과 8일로 끝나는 장날에는 계절 따라 나오는 온갖 농수산물과 이를 사고파는 사람들로 걸어 다니기도 힘들 정도다.

 장에 들어서면 가축 골목을 시작으로 채소·과일 골목, 수산물 골목, 의류 골목, 약재 골목, 먹거리 골목이 있을 뿐 아니라 주택을 낀 골목에는 농산물 보따리를 갖고 나온 할머니들이 난전을 펼쳐놓아 과거와 현재가 마주 서 있는 것 같다. 구포가 낙동강 입구의 요지에 자리해 예부터 각종 물산의 집산지였기에, 지금도 장날이면 김해·양산·밀양·창원뿐 아니라 경북·전남 지역에서도 숱한 장돌뱅이들이 몰려온다.

 구포장은 조선 시대에는 이 일대 물류의 중심지였다. 장이 처음 들어선 17세기에는 곡물이나 가축, 소금, 수공업품 등을 물물교환으로 거래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는 피란민들이 장터에서 싼값에 먹을 수 있었던 ‘구포국수’가 유명해졌다. 구포국수는 그 시절 추억이 가미된 맛이라고 한다. 하기야 어떤 이는 ‘맛의 절반은 추억’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주택가 골목길에 선 난전으로 들어서자 양산시 물금읍에서 온 최해식 할아버지(84)가 직접 농사지은 연근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팔고 있었다.

 “이거 무마(먹으면) 치매도 안 걸리고 머리도 조아집니더. 연근 좀 사 가이소.”

최씨 할아버지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연근 자랑에 열을 올린다. 젊었을 때는 아는 사람 만날까 봐 숨고 싶을 때가 많았다는 최씨 할아버지. 지금은 천원짜리 하나를 팔더라도 진심을 다한다며, 그런 마음으로 정직하게 장사하다 보니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며 웃는다. 그러면서 연근을 사 가는 강씨 할머니(76) 봉지에 잘생긴 놈을 하나 골라 덤이라며 넣어준다. 요즘 제철인 연근은 비타민C와 비타민B가 많아 피부미용과 해독에 좋단다.

 구포장은 부산에서 가장 큰 장이다. 매년 10월 말이면 ‘정이 있는 구포시장 장터축제’도 열린다. 주택가 골목에서 신문지 한 장 깔고 난전을 펼치고 있는 할머니들 앞은 봄을 사고파는 사람들로 북적거려, 사람 사는 냄새와 더불어 따뜻한 정이 장터에 가득하다. 가장 유명한 가축전에서는 삶과 죽음이 한자리에 놓여있는 것도 더러 볼 수 있다. 연신 죽어가는 가축의 속내야 어찌 알까마는 삶의 무상이 느껴지는, 조금은 스산한 풍경이다.

 42년째 떡을 팔고 있는 주씨 할머니(81) 쟁반 위에는 ‘천원’이라는 굵은 글씨가 떡과 함께 얌전히 앉아 있다. 떡을 참 잘 썬다는 말에 할머니는 “한석봉 엄마가 살아 와도 내보다는 못할 끼다”라며 옛날에 장바닥에서 불렀던 노래를 들려준다.

 “낙동강 칠백리에 배다리 놓아놓고 물결 따라 흐르는 행력진 돛단배에 봄바람 살랑살랑 휘날리는 옷자락 구포장 선창가에 갈매기도 춤추네.”

 구포장 외에 부산에서 열리는 오일장은 오시게장·하단장·월내장(2·7일), 사덕장·녹산장(1·6일), 덕두장·좌천장(4·9일), 송정장(5·10일) 등이 있다.

장터순례(28)강원 고성 거진장

 

거진항서 10분 거리…“싱싱한 도치·대게 팔아요”
인근엔 북녘 볼수있는 통일전망대
덩달아 관광객 사시사철 붐벼
상인들 새벽녘 항구서 작업한 해산물
장터로 건너와 내다 팔아

 


 강원 고성은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남북교류 1번지’로 불리며 활기가 넘쳤었다. 군 전체가 남북으로 나뉘어 있는 데다 절반가량은 군사지역이지만, 북녘이 그만큼 가까운 까닭에 금강산 관광의 통로 구실을 했던 것이다.

 금강산 관광 중단으로 한때 주춤했던 고성이 요즘 동해안 관광명소로 이름을 얻고 있다. 금강산이 보이는 현내면의 통일전망대는 사시사철 실향민들과 관광객들이 찾는 장소인지라 거진장도 덩달아 잔칫집처럼 웅성댄다.

 “고향과 가장 가까운 이곳에 자리 잡은 지도 벌써 60년이 넘었수다. 처녀 때 피란와서 이젠 할망구가 다 됐어. 살아생전 고향 땅이나 한번 밟아보고 죽는 게 소원이드래요.”

 행여 바람에 실린 고향 냄새라도 맡을 수 있을까 해 높은 지대에 집을 마련했다는 김동선 할머니(86)의 오래된 습관 하나는 고향 하늘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할머니는 60년째 생선을 말려 거진장에 내다 팔고 있다. 처음에는 생선을 머리에 이고 이 마을 저 마을로 떠돌아다니며 장사했다고 한다.

 거진장은 고성군 거진읍 거진리에서 1·6일에 열린다. 장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우리나라 최북단에 위치한 거진항이 나온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명태잡이로 유명해 ‘명태의 고향’으로도 불렸다. 명태가 귀해진 지금은 그 빈 자리를 다른 생선이 넘보고 있다.

 요즘 동해안에서 많이 잡히는 겨울 생선 중 하나가 도치다. 도치는 아귀·물메기와 함께 ‘못난이 삼형제’로 꼽힐 만큼 못생겼다. 위급한 일이 생기면 공처럼 웅크려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데, 이곳 사람들은 ‘심퉁이’란 별명으로 부르며 즐겨 먹는다. 암컷은 시큼한 김치를 넣어 알탕으로 요리하고, 수컷은 데쳐서 숙회로 먹는다고 한다.

 거진항에서 도치를 고르던 최씨 할머니(78)가 죽왕면에 있는 왕골마을 자랑을 한다.

 “왕골마실에 한번 가봐. 집집마다 다른 항아리굴뚝이 있어 구경꾼들이 많아.”

 왕골마을은 양근 함씨와 강릉 최씨의 집성촌으로, 북방식 전통한옥의 원형과 함께 600여년의 세월을 지켜오고 있다. 집마다 다르게 쌓은 굴뚝 위에 항아리가 얹힌 것이 특징이다.

 해가 떠오르는 거진항의 아침은 너무도 정겹다. 잡은 생선을 배에서 내리고 경매에 붙이느라 아수라장이지만, 치열한 삶이 아름다운 시(詩)로 재탄생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것은 새도 마찬가지다. 먼저 날아든 갈매기 한 마리가 신호를 보냈는지 갈매기들이 순식간에 손수레 옆으로 날아든다. 도치를 사러 나왔다는 박순덕 할머니(85)는 “먹이 찾아 갈매기들이 날아드는 것 보믄 사람이나 똑같은 기래요. 나도 묵고 살라고 반평생 동안 죽자 살자 이곳에 나오니께” 하며 웃는다.

 대게 작업이 한창인 곳에서 일손 빠른 외국인을 만났다. 인도네시아에서 1년 전에 왔다는 라스니까씨(38)는 한국말도 드문드문 잘해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다.

 “한국 사람들 참 친절하게 잘해 줍니다. 그렇지만 두고 온 가족이 보고 싶어 바다를 향해 소리도 질러보고, 고향 노래도 불러 본답니다.”

 말끝을 흐리는 라스니까씨 어깨 위로 아침 햇살이 살포시 내려앉는다.

 거진항과 거진장은 따로가 아니라 하나다. 거진항에서 대게 작업을 끝낸 허씨 할머니(70)가 손수레 가득 대게를 싣고 거진장으로 건너왔다. 새벽녘에는 거진항에서 대게 꺼내는 작업을 하고, 장이 서면 장터로 와 대게를 내다 판다.

 허씨 할머니는 열아홉에 시집와서 지금까지 거진항과 거진장을 오가며 살고 있단다. 대게 색깔에 맞추었는지 할머니의 옷과 장화 모두 붉은색이다. 젊어 보인다고 했더니 할머니 입이 귀에 걸린다. “방금 잡은 대게가 만원에 일곱 마리!” 하는 목소리도 쩌렁쩌렁 울린다. 평생 일손을 놓은 적이 없다는 할머니는 즐겁게 일하는 것이 젊게 사는 비결이라며 멋진 포즈로 한마디 건넨다.

 “빨간 옷 입고 빨간 대게 파는 할머이 잊지 말래요.”

 고성에는 이 밖에도 진부령 용대리 황태덕장으로 유명한 간성읍에 서는 간성장(2·7일)이 있다.

사진가 정영신의 장터순례(27)충북 괴산장

 


뻥튀기집 앞 순서 기다리는 할머니들 수다 삼매경

600년 전통자랑…충북서 가장 커
지역에서 직접 키운 농산물만 파는
토요일 ‘할머니 장터’ 눈길

 

난장 끝머리 뻥튀기집 앞에 늘어선 줄. 할머니들이 추위와 지루함도 잊은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위 사진)

2004년 괴산장을 방문했을때 본 뻥튀기 기계.(중간 사진)

장터 체험에 나선 어린이들로 순식간에 화사해진 괴산장.(아래 사진)

 

 

 

 “남들이 도와줘 장사헌 것이지 혼자 한 것이 아니구먼유.”

 55년 동안 괴산장터를 지키고 있는 백명희 할머니(88)의 철물점은 지금 3대가 함께 하고 있다. 스물다섯살에 혼자되어 장삿길로 들어섰다는 백씨 할머니가 말을 잇는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말이 있지유? 장사는 때로 밑지기도 허구먼유. 남자들 상대하면서 안 싸우려면 밑지고도 팔아야 해유. 나중엔 단골이 되지만유.”

 새마을운동으로 온 동네가 떠들썩하던 시절, ‘와랑와랑’ 돌아간다고 해 ‘와랑기계’라 부르던 탈곡기와 ‘새끼 꼬는 기계’인 제승기(=새끼틀)는 사람들이 줄 서서 사갈 만큼 잘 팔렸다고 한다. 지금은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지만 1970년대 무렵에는 농촌에서 가장 필요한 기계였다고 한다.

 “그땐 100원만 있으면 오징어 10마리를 살 수 있는 시절이었어유. 돈은 귀했지만 서로 정도 많고, 사람 맘들이 참 순했지유. 지금 사람들은 무조건 소리부터 내지르고 참질 않네유. 사람들 맘은 늘 그대로 있어야 되는데 세월 따라 자꾸 변해가는구먼유.”

 철물점이 사랑방 역할까지 하는지 이야기하는 사이에도 장에 나온 사람들이 백씨 할머니를 찾아왔다. 불정면에서 온 김씨(68)는 인사차 들렀다고 한다.

 “아버지 때부터 단골집이어유. 이 집 어르신을 보고 가야 장에 온 것 같구먼유.”

 이렇게 사람과 사람이 정을 나누며 사는 모습을 장터에 가면 쉽게 만날 수 있다.

 600년 전통을 자랑하는 괴산장은 충북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에 선다. 3일과 8일이면 읍내 시계탑 로터리를 지나 도로 양쪽으로 길게 노점이 늘어선다. 도로를 경계로 장옥이 설치된 곳은 상설시장이고, 그 반대쪽이 오일마다 한번씩 펼쳐지는 난장이다. 충북에서 가장 크다는 장답게 나오는 물건 종류만도 수를 헤아리기가 힘들다. 산처럼 쌓아놓은 과일이며 채소와 수산물, 잡화 등이 사람들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한편에서는 종류별로 과자를 잔뜩 바구니에 담아놓고선 “맛보는 건 공짜”라고 외쳐대는 장꾼의 소리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든다. 입구에 펼쳐진 가축전은 장터 체험에 나선 어린이들로 소란스럽다. 어린이들이 강아지와 노는 것을 보니 마치 작은 동물원에 온 것 같다. 아이들이 철망 안에 오밀조밀 드러누운 강아지를 만지자 강아지가 부스스 일어나 귀를 쫑긋 세운다. 그 모습에 아이들이 짓는 말간 웃음이 햇살에 퍼져 나간다.

 난장 끝머리 뻥튀기집 앞에는 이름표를 단 깡통과 올망졸망한 보자기들이 50여개나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농번기가 끝난 겨울 장터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뻥튀기집이 가장 바쁘다. 튀기는 곡물의 종류가 다양해지면서 뻥튀기가 노인들의 ‘참살이(웰빙) 주전부리’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지루함도 아랑곳 않고 이웃 마을 친구와 이야기 나누는 재미에 푹 빠져 있는 기삼녀 할머니(78)를 만났다. 할머니는 마을 자랑을 해달라는 말에 기다렸다는 듯 신이 나 대답한다.

 “우리 동네 입구에 800년이나 된 느티나무가 있구먼유. 그 느티나무 덕분에 가뭄도 없고 큰물도 들지 않아 모두가 잘 살고 있네유.”

 괴산은 영험한 느티나무가 유난히 많은 고을이다. 느티나무를 뜻하는 ‘괴(槐)’자를 써 괴산(槐山)이라 하는 것도 그래서라고 전해지고 있다.

 괴산장은 3년 전부터 3~11월이면 토요일마다 ‘할머니 장터’를 열고 있다. 괴산에 사는 할머니들이 직접 농사지은 우리 농산물만 파는 장이다. 토요일장에 나온다는 신현자 할머니(77)는 봄에서 여름까지는 씀바귀를 비롯한 각종 나물, 한여름이면 대학찰옥수수와 배추 모종, 가을이 되면 곡물과 콩이 많이 나온다며 자랑을 한다.

최근 괴산장은 ‘산막이시장’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산막이 옛길’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져 이름을 고쳤다고 하는데, 상인들은 아직도 ‘괴산장’이라고들 부른다. 옆에서 장돌뱅이 인생만 20여년이라는 박씨(59)가 한마디 던진다.

 “내용이 바뀌어야 되지유, 이름만 바뀌면 어쩐대유.”

 괴산장 외에 괴산에서 열리는 장은 사과가 많이 나오는 연풍장(2·7일), 목도막걸리를 생산하는 목도장(4·9일), 전국 으뜸의 고추 산지로 유명한 청천면에서 열리는 청천장(5·10일)이 있다.

 

 

 

 

 

농촌과 도시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유성장은 충청남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5일장이자 전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장이다. 그리고 ‘삶의 질’을 최우선으로 내세우는 국제도시로서의 면모도 갖춰,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진 곳이 바로 유성이다. 유성장 주위에는 온천장과 계룡산 등의 관광지가 있는데다 교통마저 편리해 외지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유성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온천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온천으로 많은 신혼부부들의 신혼여행 코스이기도 했다. 많은 유성온천에 대한 이야기 중 백제 때 이야기는 아직도 전설처럼 남아 있다.

 

  •  ‘어느 날 한 어머니가 전장에서 다쳐 돌아온 아들을 위해 약을 구하러 돌아다니고 있을 때, 날개를 다친 학 한 마리가 뜨거운 물이 흐르는 곳에서 몸을 비비고는 곧바로 하늘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엄마는 약 대신 그 물을 떠다가 아들에게 발라주었는데, 신기하게도 상한 아들 몸의 상처들이 거짓말처럼 아물었다는 것이다. 그 후부터 ‘뜨거운 물이 나오는 유성’의 온천 효능이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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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성장에서 평생을 살아온 박순임(86세) 할머니 말로는 원래 유성장이 5일과 10일에서는 장이었는데, 장날마다 비가 내려 4일과 9일로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마침 유성장을 찾아간 날도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박씨 할머니는 토종탱자와 모과를 펼쳐놓고 몸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이렇게 움직거려야 덜 추워유,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허지유, 보기 좋게 진열해 놓아야 더 잘 팔려유.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고 하지만 못생겨도 차 맹글어 먹으면 감기에 이보다 좋은 약이 없다우.

     

  • ” 비가 내려 따뜻한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길가 난전에서 장사하는 할머니 옆에 쪼그려 앉아 모과를 촬영했더니 “할망구나 모과나 못난 것들만 찍는다.”며 옛이야기까지 들려주신다. “옛날에는 소시장도 있었다우.

    정월 보름날에는 줄다리기를 했고, 7, 8월 달에는 풍물패들이 난장에서 질펀하게 놀았지유~ 세월이 참 많은 걸 변하게 허는구먼유~ 지금도 옛날 그때 장터가 그리워유~.” 그 옛날 짚신을 신고, 등 짐을 지고, 밤새 걸어 장을 찾던 장꾼들이 사라진 대신 지금은 트럭에 갖가지 물건들을 싣고 다니며, 장 서는 곳을 찾아다니는 장돌뱅이들의 시대가 됐다. 기동력이 좋으니 사람이 많이 모인다는 정보만 있으면 전국 어디든 찾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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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정지역 무주에서 왔다는 박해수(54세) 씨는 농사지은 호박을 싣고 와 트럭 위에서 탑을 쌓듯 정성을 들인다. 무너지면 다시 올리기를 반복해 보는 사람이 더 아슬아슬하다. 수직으로 서 있는 호박을 보던 할아버지가 “그 호박 한번 잘 생겼네, 젤 큰 놈은 얼마나 한 대유?”, “말만 잘하면 꽁짜로도 줘요.” 박 씨의 거침없는 말솜씨에 사람들이 꼬여든다. “차가 있으니 먼 데 있는 장도 다녀유~ 충청도는 물론 전라도와 경상도까지 안 가는 곳이 없지유. 아무리 인심이 삭막하다 해두 아직 옛날 인심이 그대로 남아 있는 장도 많구먼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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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루도 쉬지 않고 장터를 찾아다닌다는 박 씨의 너스레와 함께 난로 위에 얹어놓은 고구마 냄새가 모락모락 피어올라 지나치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사람과 사람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자리가 있기에, 고구마 한 쪽이라도 나눌 수 있는 정이 남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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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성장은 1916년 10월에 개설되어, 대전 유성구 장대동 일대에서 열린다. 대전은 물론 인근 지역인 옥천, 공주, 연기, 조치원, 금산, 논산, 무주에서까지 장을 보러온다. 장 규모가 크다 보니 장옥주변 공터와 골목까지 장이 들어선다. 장대동사무소 뒤편에는 가축장이 열리고, 그 안쪽으로 어류, 채소류, 의류, 식기류 좌판이 쭉 늘어서 있다. 유성의 특산물로는 구즉마을의 묵, 학하리 고구마, 세동 상추, 유성배가 유명하다.

     

  • 처음에는 곡식이 많이 거래되었으나 지금은 고추와 마늘이 더 잘 팔린다고 한다. 또한 유성장에서 맛볼 수 있는 먹거리로는 보리밥과 팥죽, 잔치국수가 있다. 선비가 머무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유성(儒城)’은 우리나라의 중심지다. 1973년 5월부터 대덕연구단지가 자리를 잡으면서 대덕연구개발특구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곳에 모인 지성들이 우리나라 과학기술을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관광과 첨단과학 도시 유성의 글로벌화’란 기치를 내걸고, KAIST와 함께한 국제화거리를 유성의 명물로 만들어 가고 있다. 국제화거리는 외국인과 내국인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다문화 장소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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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학도시’ 유성은 천혜의 온천을 내세워 해마다 ‘유성온천문화축제’도 연다.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방치되어 온 유성온천은 1907년 유성에 정착하게 된 일본인들에 의해 개발되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유성온천을 찾는 절반 이상의 손님이 온천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이었다고 한다. 그 후 대전역이 생기고,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각지의 우리나라 사람들도 찾아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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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터에는 비가 오는 날씨 탓인지 손님들이 적었다. 장꾼들만 난로 옆에 삼삼오오 모여들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장날만 되면 교통이 너무 번잡하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복합터미널쇼핑몰까지 생긴다고 혀서, 모두들 걱정이 많아유~ 가뜩이나 장사도 안 되는데….” 장날이면 구암역 주변과 유성농협, 유성고속버스터미널과 시외버스터미널 주변 도로가 교통체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데, 여기에 복합쇼핑몰이 들어선다는 이야기에 모두들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시골장터에 오면 특색 있는 물건들은 무엇이든 다 구입할 수 있어야 된다는 등, 장사 안 된다고 아무거나 갖다 팔면 못쓴다는 등, 이런 저런 이야기가 나오자 장씨(52세)가 한마디 거든다. “장사꾼끼리도 서로 상부상조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뱁인디, 좀 팔린다 하면 너도나도 갖고 나오니께 문제지, 눈에 돈만 보이고 상도덕이 없어지고 있구먼유~” 유성장옥 안에서는 지난 8월부터 노인 일자리 사업의 하나로 ‘참 조은기름’ 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참기름과 들기름을 생산하고 있다.
    유성장에서 거래되는 참깨와 들깨들을 모아 압착하는 방법으로 기름을 짜서 시세보다 싸게 판다고 한다. 유성시장 안의 백세두부집에서 파는 어르신들이 짠 참기름과 들기름에는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할머니들의 손맛이 더해져 고소한 냄새를 장터에 풍기며 시장의 건강한 먹거리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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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옷을 입고 대파와 호박순을 팔고 있는 오명근(87세) 할아버지는 공주에서 오셨다. 직접 대파농사를 지어 싸게 팔고 있지만 사가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오 씨 할아버지는 할멈하고 같이 장사한 지가 50년이 되어간다고 한다. 할머니가 보이지 않아 물었더니 “할망구 잔소리 듣기 싫어 떨어져 장사해유. 이쁜 여자 손님에게 덤을 줘도 잔소리 안 하니 좋구먼유~ 자~ 대파 드려유~ 복 받으려고 싸게 파니 한 단씩 사가유~.” 

    • 멀리 떨어져 장사하고 있는 신현분(81세) 할머니는 장날마다 딸과 외손녀를 만나 온천하는 재미가 더 쏠쏠하다고 자랑한다. 3대가 장날마다 만나 온 지도 5년째란다. 한때 유성장에서 곡물 장사를 했다는 신 씨 할머니는 “세상 모든 게 변해도 장바닥만은 그대로 있구먼유~.” 할머니 눈에는 옛날 장사하던 모습이나 물건은 물론 인심마저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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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터에 가면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좋다. 하찮은 이야기에도 같이 웃고 같이 걱정해주는 정겨운 이웃이 많아 좋다. 장터에는 물건만 파는 곳이 아니라 그곳 사람들의 생활 이야기와 삶의 자취까지 함께 진열되어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철따라 옷을 바꿔 입는 자연을 마중하듯 사람들은 장터로 모인다.

       

     


     

     

     

     

     

     

    “앗따! 월하네는 잠도 안자고 나왔능갑네, 어짜쓰까 영감이 할매들 잠 안 자고 나와뿐게 일찍 서두르라고 해샀드만, 많이 기둘려야 짜것는디….” 임피에서 나온 이씨(76세) 할머니가 줄지어 선 푸대 앞에 들깨자루를 내려놓는다. 이른 아침부터 방앗간에는 기름을 짜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오는 순서대로 놓아둔 자루가 바뀔세라, 지키고 앉아 있는 할머니들 표정이 사뭇 진지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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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다리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임피 인물 자랑 좀 해 달랬더니 “내 이름이 뭔지 알어 이끝례여, 하도 자식을 낳싼게 끝례라고 지었다는구먼. 울 동네서 내가 인물이여 노래 잘 허지, 김치 맛나게 담그지, 자식 잘 키웠제. 이만허면 인물 났제이.” 이씨 할머니 입담에 무겁게 가라앉은 잿빛 하늘이 벗겨지듯 할머니들 얼굴에 화색이 돈다. 지나가는 사람 발만 멍하니 쳐다보던 할머니들의 말문이 하나둘 열리기 시작한다. “요새 걷는 것이 유행인지 우리 동네 근처에 구불 길이 생겨갔고 사람들이 솔찬히 왔사드만. 주말에는 절에서 점심도 공짜로 준다고 헙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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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산은 바다와 강이 만나는 도시다. 군산에서 즐기자는 슬로건인 ‘구불 길 군산도보여행’은 일곱 개의 스토리 구불 길이 있다. 비단 강 길을 시작으로 구불7길이 새만금 길이다. 시간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소리를 따라 걷다 보면 곳곳에 남긴 전설이나 역사의 흔적, 그리고 편안한 자연을 품에 안을 수 있다. 또한 ‘자연과 인간의 아름다운 동행’을 테마로 마련된 ‘2013 군산세계철새축제’가 겨울에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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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산에서 유일하게 남은 오일장이 대야장(전북 군산시 대야면 산월리)이다. 끝자리 1일과 6일이 들어간 날에 서는데, 전라선이 지나는 요충지라 시골에서 직접 재배한 채소부터 군산 앞바다에서 잡은 싱싱한 수산물까지 없는 게 없다. 큰길 따라 양쪽으로 줄지어 장이 들어선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500평이 넘는 장옥을 지었으나 상인과 장돌뱅이들이 길거리로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장이 옮겨지게 되었고, 기존의 장옥은 폐쇄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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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통이 좋아 군산, 김제, 익산, 전주 상인들뿐만 아니라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정읍, 고창, 충남 서천에서도 온다고 한다. 장사꾼들이 모여드니 사람들도 모이는 것이다. 장날이면 곡물, 생선, 젓갈, 채소류 등과 각 지역 특산품들이 나오지만 대야장의 명물은 무엇보다 묘목이다. 큰 도로가에 대봉감이 줄렁줄렁 달린 감나무가 수직으로 서 있어 가까이 가보았다. 감나무 잎이 싱싱해 감이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상은 테이프로 붙여 놓은 것이었다. 농장을 직접 운영하면서 장날만 나온다는 김씨(67세)는 나무는 가을에 심어야 봄에 뿌리를 내리기 때문에 땅이 얼기 전에 심어줘야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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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를 약속받은 땅이 군산이라고 한다. 시간이 일을 만들어내듯 지금도 새만금간척사업은 진행 중이다. 군산항은 일제강점기 때 호남평야의 미곡수출항으로 크게 성장했다. 군산시를 에워싸고 있는 옥구읍 이름을 풀어보면 물 댈 옥(沃)자에 개천 구(溝)자다. 개천에 물을 댄다는 뜻이다. 이제 개천에 물을 대는 현실이 눈앞에 펼쳐지게 되었다. 새만금간척사업은 고군산군도와 비안도를 거쳐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를 잇는 33km의 바다방조제를 쌓아 서울 여의도의 140배 규모의 토지를 조성하는 대단위 간척사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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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년 전인 1904년 대야면 지경리에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된 지경장이 대야장으로 이름만 바뀌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대야면에서 장 구경나온 장기봉(73세) 씨는 대야에서 나오는 쌀이 국내 최대 규모의 농산물 품평회에서 장관상을 받은 ‘큰 들의 꿈’이라며 쌀 자랑에 열을 올린다. “나락은 잡종 없이 혈통을 잇어간께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고 안 헙디여, 사람도 똑같은 것 보믄 쌀이 사람을 맹근당께. 글고 벼꽃은 봤는지 모르겄네, 요것이 오전 10시에서 12 사이에 딱 한 번 펴는디 당체 부지런 떨어야 볼 수 있당께.” 요즘은 오히려 잡곡이 부자들의 음식이 되어가지만 쌀은 우리가 살아가는 힘의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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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의원 앞에서 할머니들이 펼쳐놓은 난장에는 산과 들, 밭에서 가을걷이를 끝낸 작물들이 사람들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검정 쌀이 되박에 얌전히 담겨져 있고, 무 여덟 개가 북처럼 다소곳이 기다리는 모습은 마치 녹두 위에 올려진 참기름병이 지휘만 하면 자연의 음악이 연주될 것만 같은 풍경이다. 나포에서 온 박순자(75세) 할머니가 “선유도 구경 왔는갑네, 군산 온 게 볼거리가 많지라우.”
      군산하면 선유도가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선유도(仙遊島)는 이름 그대로 풀어도 ‘신선이 노니는 섬’이다. 얼마나 아름답기에 신선도 머물다 간다고 했을까. 선유도를 포함한 고군산군도는 16개의 유인도와 47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졌는데, 자연이 창조한 천혜의 해상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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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게 늘어서 있는 장터에는 밀고 다니는 수레꾼 장돌뱅이가 많았다. 손수레 위에는 여인네들이 김장철에 사용할 수 있는 갖가지 재료들이 실려 있다. 청각과 남새우, 김장 봉투와 고무장갑, 고무줄 같은 잡화까지 손수레 가득 싣고 나와 여인네들이 많은 곳을 찾아다닌다. 청각과 남새우를 파는 장옥례(67세) 씨는 바구니 안에서 톡톡 튀는 남새우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할머니와 눈이 마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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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매요, 맑고 깨끗한 물에서만 산다는 남새우사다 아욱국 끓여 잡사 봐, 소고깃국보다 맛나.” 죽산리에서 나온 김다분(85세) 할머니가 “시계 고치는데 2만 원이나 써 뿌려 오늘은 못 사것구먼, 도란장에도 오제.”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얼굴이 신용이었는데 지금은 외상으로 달라는 사람도 없는 듯하다. 생선가게에서 잠시 쉬는 김씨 할머니께 대야장의 옛날이야기를 부탁했다. “참말 옛날이 좋았제이, 소 새끼가 지 엄니 졸졸 따라 가기도 허고, 국밥집에서 밥 먹다가 사돈도 맺고, 동지 지나 문 길가에 자리 깔고 토정비결 봐주는 사람 옆에 붙어서 귀를 세우고 듣고 그랬제. 그 뭐시냐 동백기름 맨드르하게 볼르고 양복 입고 폼재며 어슬렁거리던 사람들도 있었당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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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선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는 이씨(67세) 좌판에서 봉지 열어주는 봉사를 하고 있다는 할머니가 참견한다. “소시장 있을 때는 여그 장이 볼만했어라, 사람이 많이 모인께 벼라별 사람들이 다 왔어, 소 판 돈으로 투전판 벌이다가 돈 잃고 술주정 부리고, 소 헐하게 폴았다고 한잔, 잘 폴았다고 한잔, 국밥집에는 이쁜 새악시도 있었당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삶의 터전이었던 장은 우리나라 근대사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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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화장 끝머리에는 집에서 만들어온 도토리묵을 맛보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드는 박씨(75세)가 도토리묵 자랑에 열을 올린다. 임피에서 온 문말자(88세) 할머니는 마늘과 콩을 팔고 있다. “집에 있기 갑갑혀서 콩 쪼까 갖고 왔는디 당체 시세를 모르겄어, 마늘은 얼마에 폴아야 쓰까? 오늘 사람구경 많이 했승께 남는 장사했제.” 수줍게 웃으며 아쉬운 듯 말을 이어간다. “서로 필요한 것끼리 바꿀 때가 좋았어라, 장사허는 사람들은 농사를 안 진께 모다 바꾸고 그랬어, 임피아짐 오늘은 뭣 갖고 나왔소? 함서 아는 체하고들 그랬는디, 시방은 모다 남이나 마찬가지여, 옛날 생각하믄 안 되는디 그때 생각나서 한 번씩 나오믄 중국산이냐, 농사진 것이냐 물어봤싸, 사람 말을 안 믿고 자꾸 물어싸….”

     

    • 요즘 장터에서 많이 듣는 이야기다. 각 장터에는 팔 물건이 있을 때만 나오는 지역 원주민들이 있다. 그들은 손수 농사진 것만 갖고 나오기 때문에 경운기와 오토바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중간도매상이 물건을 빼앗아 흥정에 들어가는 경우를 종종 본다. 싸게 사려는 도매상과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는 농민들은 몇천 원 때문에 언성을 높이기도 한다. 그들은 이른 봄부터 땅을 일구어 씨앗에서 곡식이 나올 때까지, 자연과 시간이 빚어낸 한 톨의 농산물도 허투루 하지 않고 소중하게 다룬다. 흙과 함께 살아가는 농민들의 삶의 흔적들이 흥건히 고여 있는 곳이 시골장터다.

     

     

     

     


     

    정영신 글.사진 / 눈빛 / 2012년 8월

     

     

     

     

     

     

     

     

     

     

     


    살아온 날을 사진으로 되짚다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38] 정영신, 《한국의 장터》(눈빛,2012)

     


    - 책이름 : 한국의 장터
    - 사진·글 : 정영신
    - 펴낸곳 : 눈빛 (2012.8.1.)
    - 책값 : 29000원

     


    (1) 시골 저잣거리


    저녁 여덟 시가 살짝 넘은 구월 한복판, 시골은 바야흐로 깜깜합니다. 어느 집에서고 말소리 하나 새어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몇몇 집은 이무렵에도 텔레비전 켜 놓은 불빛이 바깥으로 살짝살짝 퍼집니다.


    모처럼 두 아이가 일찌감치 잠들어 우리 집도 조용합니다. 하루 내내 아이들과 부대끼느라 나도 지쳐 아이들 곁에서 드러눕고 싶지만, 내 마음은 아이들이 잠든 틈에 무언가 글을 끄적이거나 책을 읽고 싶습니다. 아직 어린 아이들하고는 함께 보기 어려운 영화 〈책 읽어 주는 남자〉를 보기도 합니다.


    이러다가 술 한잔 생각이 납니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밤길을 자전거를 타고 면소재지에 다녀오기로 합니다. 자전거 앞등과 뒷등을 환하게 밝힙니다. 사람 발자국도 자동차 바퀴자국도 없는 고요한 시골길을 자전거로 달립니다. 자전거로 달리니, 자전거가 바람 가르는 소리만 가득합니다. 아니, 들판에서 풀벌레 노래하는 소리가 훨씬 크게 울려퍼집니다. 풀벌레 노랫소리 사이로 자전거가 지나가는데, 어느 풀벌레도 자전거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아니, 모든 풀벌레가 자전거를 따사로이 품습니다. 그래 반갑구나 씩씩하게 달리렴, 하는 듯한 노랫소리입니다. 나는 밤길 시골길 논길을 자전거로 천천히 달리면서 밤노래를 듣습니다.


    면소재지 가게에 닿습니다. 보리술 한 병과 막걸리 한 병을 삽니다. 면소재지 가게 앞에 면내 고등학교 아이들 너덧이 앉았습니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먹지 않고 마시지 않으면서 가게 앞에 앉은 채 저희끼리 이야기를 나눕니다. 다시 자전거를 몰아 집으로 돌아갑니다. 면내 고등학교 교실에 불이 밝습니다. 그렇구나, 구월 한복판이지, 이곳 아이들도 입시나 취업을 맞딱드렸겠구나, 이 가운데 몇몇 아이들이 교실에서 몰래 빠져나와 가게 앞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구나, 이 아이들은 무슨 꿈을 이야기할까, 교실에서 밝힌 불빛을 받으며 늦게까지 수험공부를 하는 시골 아이들은 무슨 꿈을 생각할까.


    군내버스 한 대 마주 달려옵니다. 이 늦은 때에도 버스가 있네, 하고 생각하다가, 읍내에서 저녁 여덟 시 반에 면내를 거쳐 지죽마을 바닷가까지 가는 막버스라고 떠올립니다. 읍내 고등학교를 다닐 지죽마을 아이들은 이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테지요.


    아이들은 알까? 아이들은 느낄까? 자전거를 달리며 생각합니다. 시골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자라며 시골에서 학교를 다니는 줄 아이들은 알거나 느낄까 궁금합니다. 이 아이들은 시골에서 태어난 보람을 얼마나 누리는지 궁금합니다. 도시에서 태어나지 못해 여느 도시처럼 온갖 물질문명과 문화시설을 못 누리는 삶을 안타까이 여길는지 궁금합니다.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고등학교를 마친 뒤부터는 도시로 가서 다시는 시골로 안 돌아오겠다고 다짐할는지 궁금합니다.


    .. 한 할머니는 이름도 성도 없는 무지렁이라며 한사코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 (90쪽)

     

     

     

     


    면내에서든 읍내에서든 학교옷 입은 아이들을 봅니다. 이 아이들은 하나같이 수험공부에 바쁩니다. 어느 아이라 하든, 고흥군에는 대학교가 없으니 고흥군에 남아 젊은 나날을 보내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느 아이라 하든,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이웃 도시 순천이나 광양이나 여수에 가든, 또는 전남 광주에 가든, 아니면 대전으로 가든, 또는 부산으로 가든, 아니면 서울까지 가든, 되도록 커다란 도시로 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 도시이든 고흥 시골마을을 한 번 떠나면, 다시는 고흥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전남 고흥군 도화면에는 고등학교 한 곳 있습니다. 이곳에는 아직 백 명 넘는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는데, 이곳 아이들이 해마다 졸업식을 하고 보면, 고3이던 아이들은 거의 모두 썰물처럼 고흥 바깥으로 나갑니다. 대학교를 가든 일자리를 얻든 더 큰 도시로 나가요. 이제부터 시골내기 아닌 도시내기가 돼요.


    그런데, 이 아이들이 고3을 마치고 도시로 가기 앞서를 헤아리면, 아직 고흥에 남아 시골내기로 지낼 적조차 참말 시골내기인지 도시내기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시골내기라면 ‘먹고 입고 자는 곳이 시골’이라는 뜻이 아니라, ‘일하고 놀고 살아가는 나날이 시골’이 되어야 걸맞아요. 흙을 만지고, 흙을 누리며, 흙을 아끼는 삶일 때에 비로소 시골내기입니다. 주민등록 주소지가 시골이라서 시골내기이지 않아요.


    한가을 바쁜 일철에 푸름이나 어린이는 들판에 없습니다. 겨울이 끝나고 새봄이 찾아들어 바쁜 일철에 푸름이나 어린이는 들판에 없습니다. 어린이나 푸름이 모두 저희 학교에서 중간시험이든 기말시험이든 치르느라 바쁩니다. 아이들은 ‘시험공부’로 바쁘고, 어른들은, 이 가운데 늙은 어른인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들판에서 흙을 만지느라 바쁩니다.


    면소재지 장날이든 읍내 장날이든, 장마당을 이루는 사람은 모두 할머니와 할아버지요, 장마당에서 무언가 장만하는 사람 또한 으레 할머니와 할아버지입니다. 장이 서든 말든, 아이들은 초등학생이건 고등학생이건 학교에 있습니다. 아이들 모두 학교에서 시험공부만 합니다. 일요일이나 토요일에 장날이 끼더라도, 아이들은 가까운 도시로 놀러가지, 면소재지 장터나 읍내 장터를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젊은 어버이는 자가용을 몰아 커다란 마트에서 물건을 사거나 이웃 순천으로 물건을 사러 가지, 읍내 장터나 면내 장터에서는 물건을 사지 않습니다.


    젊은 어버이는 몸은 시골에서 살지만, 삶은 시골내기가 아닙니다. 시골에 주민등록 주소를 두지만, 삶은 도시를 바라보는 흐름이기에, 이 흐름에 맞추어 ‘젊은 어버이와 함께 살아가는 아이들’은 처음 태어날 적부터 ‘주소지만 시골일 뿐 삶은 도시내기’로 지냅니다. 이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될 적에 ‘시골을 벗어나 도시로 가서 살고 싶다’는 말을 하거나 꿈을 꾸는 모습은 너무 마땅합니다. 이 아이들은 비록 시골에서 산다 하지만, 마음이 온통 도시내기예요. 이 아이들은 ‘주민등록 주소지’까지 도시가 되고 싶어요. 시골마을 들일이나 바닷일은 해 본 적이 없고, 시골마을 앞메나 뒷메를 오른 적이 없으며, 시골마을 이웃 할매나 할배랑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운 적이 없어요. 아이들은 시골내기로 보이지만, 손전화나 컴퓨터로 도시 아이들하고 사귀어요. 겉차림은 시골학교 아이들이지만, 속알맹이는 도시학교 수험생일 뿐이에요.


    우리 집 두 아이를 데리고 면내 우체국이나 가게를 들를 때이든, 이 아이들과 읍내 저잣거리를 돌아다닐 때이든, 어디에서고 아이들을 마주하기 어렵습니다. 시골에서조차 아이가 태어나면 일찌감치 보육원과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차근차근 보냅니다. 시골에서도 아이들은 보육시설에 들어가 영어를 배웁니다. 보육시설 시간이 끝나면 방과후학교나 방과후학원 같은 데에 갑니다. 시골마을이라서 시골아이답게 마음껏 뛰놀며 클 터전이 아닙니다. 시골마을에서 아이를 낳는 분들 스스로 아이하고 하루 내내 함께 들판에서 일하고 놀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한결같이 도시바라기로 클밖에 없습니다.

     

     

     

     

     

     

     

     

     

     

     

     

     


    (2) 살아온 날을 되짚는 사진


    소설을 쓰는 정영신 님이 내놓은 사진책 《한국의 장터》(눈빛,2012)를 읽습니다. 1980년대 끝무렵과 1990년대 첫무렵 한국땅 골골샅샅 장터 사진이 깃들고, 이때부터 스무 해를 건너뛰어 2010∼2012년 사이 한국땅 골골샅샅 장터 사진이 어우러집니다.


    사진책을 넘기며 자꾸 궁금합니다. 정영신 님 사진에서 1990∼2010년은 무엇일까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아니, 정영신 님은 소설을 쓰는 분이지만, 이에 앞서 ‘당신 집에서는 여느 어머니’이지는 않을까 싶습니다. 정영신 님이 아이를 낳아 돌보았는지 아닌지까지는 책날개 해적이에 안 적혔기에 모릅니다. 다만, 사내가 스무 해를 가로지르며 사진을 찍을 때하고, 가시내가 스무 해를 가로지르며 사진을 찍을 때에는 사뭇 달라요.


    .. 장터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다 보면 다양한 삶을 보게 된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것 같다 … 어느 날은 할머니가 찢어진 고무신을 갖고 나와 때워 달라고 했는데, 고치는 값이나 새로 사는 값이나 같다고 했다가 혼쭐이 났단다. 할머니는 몇 백 원이면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고향을 찾아가듯이 오일장을 찾았다면 고향과 같은 색깔을 만날 것이다 .. (24, 66, 387쪽)


    나는 사내이지만 집일을 도맡습니다. 우리 집 두 아이는 옆지기와 내가 함께 마주하고 서로 돌보며 살아갑니다. 이제껏 집에서 아이들 기저귀를 얼마나 빨았는지 모릅니다. 아이들 똥오줌을 날마다 만지고, 아이들 밥을 날마다 차리며, 아이들한테 자장노래를 불러 주고, 아이들이랑 복닥복닥 씨름을 합니다.


    나는 내 삶을 서운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제아무리 남녀평등이라 하지만, 정작 집일을 즐겁게 맡는 사내는 몹시 드뭅니다. 부부가 맞벌이라 할 적에도 집일은 으레 가시내가 한다고 하는 한국이에요. 명절이 되어 차례상이나 제사상을 차릴 적에 언제나 가시내만 부엌에 들어가는 한국이에요. 이 나라에서는 가시내가 소설을 쓰고 사진을 찍기란 참 빠듯합니다. 글도 쓰고 사진도 찍는 사내는 꽤 있을 텐데, 집일을 도맡고 아이를 돌보며 글쓰기와 사진찍기를 나란히 하는 사내는 얼마나 있을까요.


    언뜻 보기에는, 집일을 안 하고 아이를 안 돌보며 ‘겨를이 넉넉해’야 글쓰기와 사진찍기를 잘 할 만하다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일을 도맡고 아이를 돌보는 사내로 살아오며 돌아보면, 집일을 늘 하고 아이를 언제나 돌보는 사이, 내 눈썰미와 눈길과 눈빛이 차츰 거듭나요. 나는 ‘기록’을 하려고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지 않아요. 나는 문화를 꽃피우려는 글을 쓰지 않아요. 나는 예술을 빛내려는 사진을 찍지 않아요. 나는 내 ‘삶’을 좋아하기에 글을 쓰고 사진을 찍어요. 나는 내 ‘삶’을 사랑하고 싶으며 아끼고 싶어서 글을 쓰고 사진을 찍어요.


    집에서 으레 아이들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아이들과 부대끼는 삶을 글로 써요. 마땅한 노릇이에요. 나는 집에서 살아가니까요. 곧, 정영신 님이 이 나라 장터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글을 쓸 수 있었다 한다면, 정영신 님한테는 장터 이야기가 ‘기록’이 아닌 ‘삶’이었으리라 느껴요. 정영신 님이 ‘사진기를 손에 쥐’기 앞서 누린 삶을 되짚는 사진입니다. 정영신 님이 ‘연필을 손에 쥐’기 앞서 보낸 삶을 톺아보는 글입니다.

     

     

     

     

     

     

     


    .. 차들이 다니지 않았던 오래전 어린 시절의 장터를 상상해 본다. 사람들은 현대식 의복도 아닌 허름한 옷차림에 짐 보따리를 이고 지고 나와, 공터에 보따리를 풀어 놓았을 것이다 … 도계에서 왔다는 박씨(67) 아주머니는 마땅히 살 것도 없지만, 사람이 보고 싶으면 장에 나온다고 한다 … 할머니들이 살아가는 유일한 소일거리는 농산물을 갖고 나와 장에서 친구를 만나는 일이다 .. (60, 83, 408쪽)


    사진책 《한국의 장터》를 읽으며 1990∼2010년 사이 사진이 거의 비었네, 하고 느끼다가는, 앞으로 2020년이 되거나 2030년이 된다면, 2010∼2012년 사이에 바지런히 찍은 사진이 많이 실렸기 때문에, 오늘(2012년)을 돌아보는 뒷날(2020년대나 2030년대) 사람들한테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겠구나 싶어요.


    오늘 쓰는 글은 어제를 돌아보며 모레에 누리는 글이에요. 오늘 찍는 사진은 어제를 되짚으며 모레에 누리는 사진이에요.


    디지털사진은 찍은 그 자리에서 사진을 살펴볼 수 있다지요. 그러나, 사진기 화면으로 사진을 살필 뿐, ‘사진 누리기’는 하지 않아요. 사진을 누리는 일이란, 사진을 찍은 그 자리에서 하지 않아요. 사진을 찍고 한참 지나고서야 비로소 사진을 누려요. 사진을 찍든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오늘 삶을 가장 빛내기에 사진도 찍고 글도 쓰며 그림을 그리지만, 오늘 삶을 가장 빛내며 일군 사진·글·그림은 모레와 글피를 맞이하며 살아갈 기운이 새로 솟도록 이끌어요.


    즐겁게 어제를 돌아봐요. 즐겁게 지난해를 생각해요. 즐겁게 그러께를 되짚어요. 즐겁게 지난 옛일을 아스라이 떠올려요.

     

     

     

     

     

     

     


    .. 장사하는 사람들은 나이와 상관없어 자유롭다. 보자기 위에 콩대 몇 개 갖고 나와 팔고 있는 할머니들도 여든이 넘는 사람들뿐이다 … 한편 도화장은 농촌의 현실을 읽을 수 있는 시골장의 모습 그대로다. 장에 나오는 사람들이 자동차 대신 경운기를 끌고 나오고, 장 보는 사람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뿐이다 … 제주할망들은 또 다른 우리 엄마들을 이야기한다. 물질을 하고, 밭농사를 짓고, 남은 시간에는 장터에 나와 온갖 것을 팔아 가정경제를 살리고 자식을 교육시킨다. 이 땅의 엄마들이 있기에 산업이 발전해 가고 경제가 살아나고 농촌이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 (149, 238, 459쪽)


    좋아하는 삶을 사진으로 찍을 때에, 이 사진을 그러모은 사진책을 펼치면서 ‘참 좋구나’ 하고 느낍니다. 예쁘장한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면, 이 사진을 그러모은 사진책을 펼칠 때에 ‘그림이 그럴싸하구나’ 하고 느낍니다.


    누군가는 ‘참 좋구나’ 하고 느낄 사진을 즐깁니다. 누군가는 ‘그림이 그럴싸하구나’ 하고 느낄 사진을 즐깁니다. 어느 사진을 즐기든 이녁 마음입니다. 어느 사진이 더 돋보이지 않고, 어느 사진이 덜 떨어지지 않습니다.


    내 아이들을 사진으로 담으며 ‘즐거운 하루’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내 아이들을 사진으로 옮기며 ‘멋스럽거나 예쁜 모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버이마다 아이들을 어떻게 마주하느냐에 따라 아이들을 찍는 사진이 달라집니다.


    내 아이들을 찍는 사진이니까, 더 값지거나 더 비싼 장비를 갖추어서 사진을 찍어야 할까요. 아마, 누군가는 이렇게 하겠지요. 내 아이들을 찍는 사진이기에, 언제라도 손전화를 꺼내어 사진을 찍는 분도 있겠지요. 내 아이들 살아가는 모습이기에, 늘 가슴에 살포시 담아 언제라도 가만히 떠올리며 이 아이들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곱게 그리는 분도 있겠지요.

     

     

     

     


    .. 농촌 사람들은 땅이 주는 질서를 지키고 있다. 봄에는 씨를 뿌리고, 여름에는 물과 햇빛과 공기와 더불어 키우고, 가을이면 거둬들인다 … 여인들에게 있어 땅은 보물창고다. 온갖 씨앗에 수많은 비밀을 담아 봄이 되면 땅이라는 보물창고에 시간을 심어 넣는다 … 읍내에서 학교 다니는 아들을 국수집에 데려가 곱빼기 국수를 먹이고 차를 태워 보내면서도 여인은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 장날이다 .. (315, 345, 373쪽)


    예전에 사진기가 없을 무렵, 어버이는 누구나 아이들 모습을 가슴으로 담았습니다. 따로 사진기로 사진을 안 찍었어도 아이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마음속에 아로새겨서, 언제라도 그립게 떠올렸습니다.


    한국땅 장마당을 지키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가운데 ‘당신이 장사하는 모습’을 스스로 사진으로 찍어 건사한 분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어쩌면, 어느 할머니 할아버지도 당신 장사하는 모습을 사진 한 장으로도 안 찍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진작가들만 장마당을 돌며 당신들을 사진으로 더러 찍었겠지요.


    그런데, 장마당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예순 해 앞서 일을 환하게 떠올려요. 쉰 해 앞서, 마흔 해 앞서, 서른 해 앞서, 당신들이 지키는 장마당이 어떤 모습이었는가 그림으로 알뜰히 떠올립니다. 따로 사진기라는 기계를 쓰지 않았고, 따로 사진작품이라는 예술이나 문화를 빚지 않았으나, 당신들은 이야기를 일구었어요. 이야기를 일구는 나날을 사랑으로 누렸어요.


    장마당에서 사진을 찍거나 글을 쓰는 이들은 바로 ‘할머니 이야기’를 가만히 살펴보며 사진을 얻습니다. ‘할아버지 이야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글을 얻습니다.


    집에서 아이들을 사진으로 찍을 때에도 ‘아이들 이야기’를 찬찬히 돌아보면서 사진을 얻어요. 아름답다는 멧자락을 올라 사진을 찍을 때에도 ‘멧자락 이야기’를 가슴으로 시나브로 느끼며 사진을 얻어요. 우리들은 늘 이야기를 사진으로 되살립니다. 우리들은 늘 이야기를 사진꽃으로 다시 피웁니다. 우리들은 늘 이야기를 사진빛으로 다시 그립니다.

     

     

     

     


    .. 장이 이미 폐쇄되었는데도 난장을 펼쳐 놓고 장사를 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반평생을 장터에서 살았는데 장은 없어져도 장바닥은 남아 있다며, 사람이 있는 한 장에 나온다는 여든다섯 살 된 할머니도 있었다 .. (477쪽)


    이 나라 장터를 두루 돌아다녀도 두툼한 사진책 한 권 나옵니다. 여든다섯 할머니 이야기를 가만히 듣거나 사진으로 빚어도 사진책 한 권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남들을 살필 것 없이 나 스스로 내 하루를 차근차근 짚을 적에도 내 발자국을 사진책 한 권으로 엮을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살아온 날을 되짚는 사진입니다. 살아온 날은 웃음일 수 있고, 눈물일 수 있습니다. 살아온 날은 즐거움일 수 있으며, 괴로움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시원함이요 때로는 고단함입니다. 어느 때에는 망설임이요 어느 때에는 씩씩함입니다. 모든 모습이 실타래처럼 얽히고 이어지면서 삶이 이루어집니다. 삶이 이루어질 때에 책 하나 태어납니다. (4345.9.14.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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