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따! 월하네는 잠도 안자고 나왔능갑네, 어짜쓰까 영감이 할매들 잠 안 자고 나와뿐게 일찍 서두르라고 해샀드만, 많이 기둘려야 짜것는디….” 임피에서 나온 이씨(76세) 할머니가 줄지어 선 푸대 앞에 들깨자루를 내려놓는다. 이른 아침부터 방앗간에는 기름을 짜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오는 순서대로 놓아둔 자루가 바뀔세라, 지키고 앉아 있는 할머니들 표정이 사뭇 진지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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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다리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임피 인물 자랑 좀 해 달랬더니 “내 이름이 뭔지 알어 이끝례여, 하도 자식을 낳싼게 끝례라고 지었다는구먼. 울 동네서 내가 인물이여 노래 잘 허지, 김치 맛나게 담그지, 자식 잘 키웠제. 이만허면 인물 났제이.” 이씨 할머니 입담에 무겁게 가라앉은 잿빛 하늘이 벗겨지듯 할머니들 얼굴에 화색이 돈다. 지나가는 사람 발만 멍하니 쳐다보던 할머니들의 말문이 하나둘 열리기 시작한다. “요새 걷는 것이 유행인지 우리 동네 근처에 구불 길이 생겨갔고 사람들이 솔찬히 왔사드만. 주말에는 절에서 점심도 공짜로 준다고 헙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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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산은 바다와 강이 만나는 도시다. 군산에서 즐기자는 슬로건인 ‘구불 길 군산도보여행’은 일곱 개의 스토리 구불 길이 있다. 비단 강 길을 시작으로 구불7길이 새만금 길이다. 시간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소리를 따라 걷다 보면 곳곳에 남긴 전설이나 역사의 흔적, 그리고 편안한 자연을 품에 안을 수 있다. 또한 ‘자연과 인간의 아름다운 동행’을 테마로 마련된 ‘2013 군산세계철새축제’가 겨울에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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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산에서 유일하게 남은 오일장이 대야장(전북 군산시 대야면 산월리)이다. 끝자리 1일과 6일이 들어간 날에 서는데, 전라선이 지나는 요충지라 시골에서 직접 재배한 채소부터 군산 앞바다에서 잡은 싱싱한 수산물까지 없는 게 없다. 큰길 따라 양쪽으로 줄지어 장이 들어선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500평이 넘는 장옥을 지었으나 상인과 장돌뱅이들이 길거리로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장이 옮겨지게 되었고, 기존의 장옥은 폐쇄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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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통이 좋아 군산, 김제, 익산, 전주 상인들뿐만 아니라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정읍, 고창, 충남 서천에서도 온다고 한다. 장사꾼들이 모여드니 사람들도 모이는 것이다. 장날이면 곡물, 생선, 젓갈, 채소류 등과 각 지역 특산품들이 나오지만 대야장의 명물은 무엇보다 묘목이다. 큰 도로가에 대봉감이 줄렁줄렁 달린 감나무가 수직으로 서 있어 가까이 가보았다. 감나무 잎이 싱싱해 감이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상은 테이프로 붙여 놓은 것이었다. 농장을 직접 운영하면서 장날만 나온다는 김씨(67세)는 나무는 가을에 심어야 봄에 뿌리를 내리기 때문에 땅이 얼기 전에 심어줘야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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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를 약속받은 땅이 군산이라고 한다. 시간이 일을 만들어내듯 지금도 새만금간척사업은 진행 중이다. 군산항은 일제강점기 때 호남평야의 미곡수출항으로 크게 성장했다. 군산시를 에워싸고 있는 옥구읍 이름을 풀어보면 물 댈 옥(沃)자에 개천 구(溝)자다. 개천에 물을 댄다는 뜻이다. 이제 개천에 물을 대는 현실이 눈앞에 펼쳐지게 되었다. 새만금간척사업은 고군산군도와 비안도를 거쳐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를 잇는 33km의 바다방조제를 쌓아 서울 여의도의 140배 규모의 토지를 조성하는 대단위 간척사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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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년 전인 1904년 대야면 지경리에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된 지경장이 대야장으로 이름만 바뀌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대야면에서 장 구경나온 장기봉(73세) 씨는 대야에서 나오는 쌀이 국내 최대 규모의 농산물 품평회에서 장관상을 받은 ‘큰 들의 꿈’이라며 쌀 자랑에 열을 올린다. “나락은 잡종 없이 혈통을 잇어간께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고 안 헙디여, 사람도 똑같은 것 보믄 쌀이 사람을 맹근당께. 글고 벼꽃은 봤는지 모르겄네, 요것이 오전 10시에서 12 사이에 딱 한 번 펴는디 당체 부지런 떨어야 볼 수 있당께.” 요즘은 오히려 잡곡이 부자들의 음식이 되어가지만 쌀은 우리가 살아가는 힘의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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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의원 앞에서 할머니들이 펼쳐놓은 난장에는 산과 들, 밭에서 가을걷이를 끝낸 작물들이 사람들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검정 쌀이 되박에 얌전히 담겨져 있고, 무 여덟 개가 북처럼 다소곳이 기다리는 모습은 마치 녹두 위에 올려진 참기름병이 지휘만 하면 자연의 음악이 연주될 것만 같은 풍경이다. 나포에서 온 박순자(75세) 할머니가 “선유도 구경 왔는갑네, 군산 온 게 볼거리가 많지라우.”
      군산하면 선유도가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선유도(仙遊島)는 이름 그대로 풀어도 ‘신선이 노니는 섬’이다. 얼마나 아름답기에 신선도 머물다 간다고 했을까. 선유도를 포함한 고군산군도는 16개의 유인도와 47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졌는데, 자연이 창조한 천혜의 해상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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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게 늘어서 있는 장터에는 밀고 다니는 수레꾼 장돌뱅이가 많았다. 손수레 위에는 여인네들이 김장철에 사용할 수 있는 갖가지 재료들이 실려 있다. 청각과 남새우, 김장 봉투와 고무장갑, 고무줄 같은 잡화까지 손수레 가득 싣고 나와 여인네들이 많은 곳을 찾아다닌다. 청각과 남새우를 파는 장옥례(67세) 씨는 바구니 안에서 톡톡 튀는 남새우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할머니와 눈이 마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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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매요, 맑고 깨끗한 물에서만 산다는 남새우사다 아욱국 끓여 잡사 봐, 소고깃국보다 맛나.” 죽산리에서 나온 김다분(85세) 할머니가 “시계 고치는데 2만 원이나 써 뿌려 오늘은 못 사것구먼, 도란장에도 오제.”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얼굴이 신용이었는데 지금은 외상으로 달라는 사람도 없는 듯하다. 생선가게에서 잠시 쉬는 김씨 할머니께 대야장의 옛날이야기를 부탁했다. “참말 옛날이 좋았제이, 소 새끼가 지 엄니 졸졸 따라 가기도 허고, 국밥집에서 밥 먹다가 사돈도 맺고, 동지 지나 문 길가에 자리 깔고 토정비결 봐주는 사람 옆에 붙어서 귀를 세우고 듣고 그랬제. 그 뭐시냐 동백기름 맨드르하게 볼르고 양복 입고 폼재며 어슬렁거리던 사람들도 있었당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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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선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는 이씨(67세) 좌판에서 봉지 열어주는 봉사를 하고 있다는 할머니가 참견한다. “소시장 있을 때는 여그 장이 볼만했어라, 사람이 많이 모인께 벼라별 사람들이 다 왔어, 소 판 돈으로 투전판 벌이다가 돈 잃고 술주정 부리고, 소 헐하게 폴았다고 한잔, 잘 폴았다고 한잔, 국밥집에는 이쁜 새악시도 있었당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삶의 터전이었던 장은 우리나라 근대사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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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화장 끝머리에는 집에서 만들어온 도토리묵을 맛보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드는 박씨(75세)가 도토리묵 자랑에 열을 올린다. 임피에서 온 문말자(88세) 할머니는 마늘과 콩을 팔고 있다. “집에 있기 갑갑혀서 콩 쪼까 갖고 왔는디 당체 시세를 모르겄어, 마늘은 얼마에 폴아야 쓰까? 오늘 사람구경 많이 했승께 남는 장사했제.” 수줍게 웃으며 아쉬운 듯 말을 이어간다. “서로 필요한 것끼리 바꿀 때가 좋았어라, 장사허는 사람들은 농사를 안 진께 모다 바꾸고 그랬어, 임피아짐 오늘은 뭣 갖고 나왔소? 함서 아는 체하고들 그랬는디, 시방은 모다 남이나 마찬가지여, 옛날 생각하믄 안 되는디 그때 생각나서 한 번씩 나오믄 중국산이냐, 농사진 것이냐 물어봤싸, 사람 말을 안 믿고 자꾸 물어싸….”

     

    • 요즘 장터에서 많이 듣는 이야기다. 각 장터에는 팔 물건이 있을 때만 나오는 지역 원주민들이 있다. 그들은 손수 농사진 것만 갖고 나오기 때문에 경운기와 오토바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중간도매상이 물건을 빼앗아 흥정에 들어가는 경우를 종종 본다. 싸게 사려는 도매상과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는 농민들은 몇천 원 때문에 언성을 높이기도 한다. 그들은 이른 봄부터 땅을 일구어 씨앗에서 곡식이 나올 때까지, 자연과 시간이 빚어낸 한 톨의 농산물도 허투루 하지 않고 소중하게 다룬다. 흙과 함께 살아가는 농민들의 삶의 흔적들이 흥건히 고여 있는 곳이 시골장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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