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 인사동 거리축제에서 널 뛰기를 하고 있다. 뒷편이 '쌈지'로 바뀐 '영빈가든'

지난 4월3일 ‘푸른사상’ 맹문재씨 사무실에서 방동규선생을 모시고

돌아가신 백기완선생 이야기를 듣는 자리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인사동 이야기가 잠간 언급되었는데

 내용인 즉, 인사동 매력이 사라져 별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좌로부터 맹문재, 조문호, 방동규선생

그동안 인사동은 끝났다는 소리를 많은 사람들이 했지만, 사실상 인사동 풍류가 사라진지 오래다.

그 이야기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은, 나에 대한 충고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왜 인사동에 집착하는지에 대한 스스로의 질문이었다.

 

2009 눈오는 날의 인사동거리

아무리 생각해도 인사동은 잊을 수 없는 마음의 고향이었다.

환경이 달라졌다고 고향이 고향 아닐 수도 없지만,

마지막까지 변해가는 인사동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기록에 좋고 나쁜 것이 있겠는가?

 

1982 실비집에서 나오는 박종수시인과 천상병시인

내가 인사동과 인연을 가진 것은 부산에서 올라 온 81년 무렵이었다.

아무 의지할 곳 없는 낯선 타향에서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곳이 인사동이었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서...

인사동에는 미국에서 ‘서울로 서울로’를 노래 부른 최정자 시인,

적음이란 법명을 가진 땡초시인 최영해, '실종' 소설로 실종된 소설가 구중관,

인사동에 재산 다 털어넣은 김명성, 인사동 마당발 노광래,

소설 폐업한다며 ‘작가폐업’ 술집 낸 배평모, 술값 내 주는 물주 사진기자 김종구,

청운의 꿈을 안고 상경한 화가 이청운, 별을 그리다 별이 된 화가 강용대,

히말라야 기 받아 잘 나가는 화가 강찬모, 노동자 시인 김신용,

바람개비 작가로 알려진 설치미술가 김언경, 사마귀 그림으로 알려진 전강호,

막사발로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도예가 김용문, 시와 도자가 하나인 신동여,

아직까지 대위로 불리는 공윤희, 홍대미대 나와 술 장사하는 전활철

목련이 뚝뚝 떨어지는 노래로 애간장을 녹였던 임춘원 시인,

‘갈까보다’ 판소리로 휘어 잡은 ‘레테’ 주인 이점숙 등 많은 사람을 만났다.

 

2006, 호젓한 아침 무렵의 거리풍경

인사동 지척에 있는 피맛골에 박종수 시인이 운영한 '시인통신'이 있었는데,

시인 조해인, 화가 이목일, 연극배우 이명희, 언론인 이두엽 등

많은 예술가들이 피맛골과 인사동을 넘나들었다.

 

1985, 초창기 맴버들 ,좌로 이윤섭,노광래,박광호,최울가, 고 김종구(앞), 공윤희, 김신용,황외성

그런데, 부산에서 잘 알던 화가 이존수, 최울가, 박광호를 비롯하여

마산에서 상경한 디제이 출신 박한웅 등 여러 사람을 우연히 인사동에서 만난 것이다.

이처럼, 인사동에 애착을 갖는 것도 인사동이란 장소에 앞서 사람에 대한 정이다.

 

1984, 인사동거리축제에서, 화가 강용대 모습도 보인다

88년 무렵, 인사동 사거리의 허름한 옥탑 방을 얻어 ‘카메라워크’ 작업실로 사용한 적이 있다.

그러나 작업실이 종종 술집이 되어 노는 것과 일이 구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충무로로 옮기고 부터 여기 저기 떠돌았는데, 한참 후 그 옥탑방을 다시 찾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놀랍게도 방 곳곳에 손 때 묻은 나의 흔적들이 있었다.

끼익끼익 소리 내며 돌아가는 환풍기와 쓰레기에 섞여 나온 빛바랜 간판이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 유적 같은 파편들이 인사동 사람들을 더 그립게 만든 것이다.

벗들을 다시 찾아 나서며 찍은 입상사진으로 전시도 했다.

그 이후 정영신씨와 사진출력실 ‘아트온’을 차렸으나 돈 벌이가 되지 않았다.

 

2015, 심우성,이명희,강민,정영신씨, 돌아가신 심우성, 강민 선생은 유달리 인사동을 사랑하셨다.

필자 외에도 인사동 주변에 사무실이나 작업실을 두고 왕래한 분이 여럿 있었다.

70년대 후반에 문을 연 김상옥시인의 ‘아자방’을 비롯하여 민속학자 심우성, 김동수, 

사진가 한정식, 김영수, 정인숙, 안영상, 언론인 임재경, 화가 이존수,

 서지학자 김영복, 시인 송상욱, 서예가 이상명, 천연염색인 이명선 등이다

 

1999 '아트온' 사무실에서, 좌로부터 전활철, 김의권, 변형주, 김언경

80년대 초반에는 문학 유목민들도 인사동으로 대거 옮겨왔다.

명동에서 관철동으로 옮겨 ‘한국기원’에서 지내던 문인들이 인사동으로 건너 온 것이다.

늘 봇짐을 메고 다녔던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선생을 비롯하여

‘귀천’에 죽치며 막걸리 집을 드나들었던 천상병시인,

영국산 파이프를 물고, 술보다는 커피 향을 즐기던 박이엽 방송작가,

시인 신경림, 황명걸, 문학평론가 구중서선생 등 일개 소대는 족히 되었을 거다.

그 이후에는 행위예술가 무세중, 무나미씨를 비롯하여

거지행색으로 인사동을 누비던 중광스님과 원광스님 등 괴짜 스님들도 등장했다.

 

2006 고) 원광스님

천상병 시인 부인 목순옥씨가 차린 ‘귀천’과 장문정씨의 ‘수희재’,

최정해씨의 ‘초당’ 같은 찻집이 만남의 장소였다.

술집으로는 실비집이나 고갈비 양푼집 등 이름도 없는 대폿집이 단골이었다.

실비대학이라 불린 '실비집'은 항상 빈털털이 예술가들이 우글거렸다.

그 이후 ‘하가’나 '레떼', '춘원', '누님칼국수‘ 등이 생겨났고,

전시 뒤풀이 장소였던 ’부산식당‘에서 많은 작가들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 무렵에 알게 된 작가로는 김용태, 여 운, 문영태, 신학철, 박불똥, 황재형, 박성남,

최민화, 장익화, 류연복, 미술평론가 곽대원, 최석태, 조각가 박상희, 연극연출가 기국서,

음악인 김상현, 시인 서정춘, 소설가 박인식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2014, 좌로부터 구중서,강민,방동규,추은희,김승환,기국서,신경림,정두리,박정희,장소임,심우성선생

84년 정동용 시인이 운영한 ‘시인학교’를 시작으로

이생진 시인의 ‘순풍에 돛을 달고’, 김여옥 시인의 ‘시인’, 

몇 년 전 문을 연 이춘우 시인의 ‘시가연’이 생기는 등

문인들의 아지트도 이어졌다.

 

1989 '춘원'에서 열린 문은옥시인 시집 출판기념회, 박중식시인이 삼페인을 들고 있다

인사동은 예술단체들이 모여 있었다는 점도 또 하나 특징이다.

남인사마당 맞은편의 포도대장 터에는 초창기 ’예총회관‘이 있었고,

80년대 중반에는 ‘민미협’이 창립되며 김용태, 문영태, 유홍준씨가 주동이 된

‘그림마당 민’이 생겨나는 등 민중미술의 본거지가 된 것이다.

 

1985 안국동 아랍미술관 ‘한국미술 20대의 힘 전’에서 / 박용수사진

88년에는 조성국, 고 은, 김윤수선생이 공동의장을 맡고

신경림선생이 사무총장, 김용태가 실질적인 업무를 맡은

‘민예총’이 창립되며 건국빌딩에 사무실을 냈다.

그리고 99년에는 홍순태선생이 회장이고 필자가 사무국장을 맡은

‘민사협’이 창립되어 북인사마당 입구 제과점 2층에 둥지 틀었다.

 

2011 '푸른별 이야기'에서 좌로부터 배평모, 전강호내외, 장경호, 최일순, 전활철, 김용문

이렇게 형성된 인사동 풍류는 문인과 화가만이 아니라 사진가, 연극인, 언론인까지 모여 들였다.

한학자 노촌 이구영선생을 비롯하여 김영복, 임계재, 김문호 등 여러 명이

‘이문학회’를 만들어 정기적으로 낙원동에서 모이기도 했다,

'통인가게' 관우가 주동이 된 '인사모'를 비롯한 인사동을 사랑하는 모임도 여럿 생겼다.

 

2013 '인사모' 회원들, 왼쪽부터 강윤구, 박일환, '김완규, 민건식 

심우성, 채현국, 민 영, 김동수, 신봉승, 이계익, 이호철, 조준영, 장경호, 윤양섭, 배성일 등

많은 예술가들이 그 무렵 생겨 난 노인자 ‘뜨락’이나 ‘소설’,

이해림의 ‘평화만들기’  이미례 영화감독의 ‘여자만’, 송점순의 ‘사동집’,

유재만의 ‘아리랑가든’, 박중식 시인의 ‘툇마루’같은 술집이나 밥집을 드나들었다.

전유성의 ‘학교종이 땡땡땡’과 사진가 김수길의 '구름에 달 가듯이', 시인 강고운의 '무다헌'도 있었다.

 

2007 '무다헌'에서 노래하는 이계익선생, 좌측은 송상욱시인

2012년에는 전활철의 ‘유목민’과 최일순의 ‘푸른별 이야기“도 생겨났다.

인사동 술집 곳곳에는 많은 예술가들이 북적이며 개똥철학을 풀어댔다.

그러나 술판의 끝자락은 언제나 소란했다.

‘평화 만들기’에 평화가 없던 그때가 인사동의 전성기였다.

 

2010  '봄날은 간다'사진전에서 아코디온을 켜는 이계익 전장관, 좌측은 연극배우 이명희,민영시인

이제 인사동의 마지막 풍류주막으로 꼽을 수 있는 곳은

김용태 미망인 박영애가 운영하는 ‘풍류사랑’과 전활철의 ’유목민‘ 뿐이다.

 

1987 실비집 골목에서, 좌로부터 박한웅, 조해인시인

세월을 되돌려 옛 사료들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궁중화가들의 작업실인 도화서도 인사동에 있었다고 한다,

연암 박지원과 율곡선생도 인사동에 살았고,

400년 된 회화나무와 명성황후의 조카 민익두 대감의 옛 저택인 ‘민가다헌’,

박영효 대감댁이었던 ‘경인미술관’ 한옥도 인사동 유적이다.

그리고 작년에는 ‘통인화랑’, ‘통문관’, ‘동헌필방’, ‘농협종로지점’,

‘이문설농탕’ 등이 서울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953 인사동거리 / 임인식사진

19세기말 개화바람이 불면서 인사동 일대는 교회, 요릿집, 병원 등이 들어서며 신식 동네로 변해갔다.

태화관 터, 천도교 수운회관, 숭동교회, 해정병원 등이 다 그 때 생긴 것이다.

 

2018, 이겸노옹에 이어 지금은 손자인 이종운씨가 운영하는 '통문관'

1924년 김정환 옹의 ‘통인가게’가 생기면서 고미술 관련 상가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1934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책방, 산기 이겸노옹이 운영한 ‘통문관’도 들어섰다.

가장 오래되었으나 살아 남았던 '통인가게'나 '통문관'이 같은 통할 통자를 쓰는 것도 흥미롭다.

 

2020 '통인가게' 김완규선생

한국전쟁 이후에는 고가구나 고미술품 등 골동이 인사동으로 쏟아져 들어오며,

1960년대까지 고서점, 고미술상, 필방, 표구점 거리가 되었다.

'구하산방'과 수도약국도 그 때 생겨난 것이다.

 

1988 수도약국 앞에서 휘호대회를 구경하는 사람들

일제강점기에 형성되었던 골동품 상점들은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 초까지 성시를 이루었는데,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먹고 살기 힘들어 많은 골동품이 인사동으로 몰려들었다.

미군장교 출신 막 뮐러가 골동품을 몇 트럭이나 사들여 번 돈으로 천리포수목원도 만들었고, 

골동상들도 때 돈을 벌었다.  문제는 소중한 유적들을 일본에 팔아 넘겼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기사건도 성행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가짜 고서화사건, 금당 살인사건이다.

 

1988 북인사마당 장승터에서 고사를 지내고 있다

인사동이 갤러리 타운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다.

박명자씨의 ‘현대화랑’이 관훈동에 문을 연 것을 기점으로 1974년 '문헌화랑',

1976년 '경미화랑' 등의 상업 화랑들이 속속 모여들어 미술문화의 거리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한국화 작가를 발굴하여 전시하는 박주환씨가 1976년 '동산방'을 열었고,

1977년에는 김창실씨가 '선화랑'을 열었다.

1983년 이호재씨의 ‘가나화랑’과 공창호씨의 ‘공창화랑’, ‘관훈갤러리’, ‘학고재’,

‘경인미술관’ 등이 개관하므로 인사동은 명실상부한 화랑가로 자리를 굳힌 것이다.

 

김명성씨가 2012년 개관한 '아라아트' 전경

한 참후에는 화가 최대식씨가 운영한 갤러리 21‘과

미술평론가 김진하씨가 운영한 ’나무화랑‘을 비롯한 많은 화랑이 생겨났다.

’나무화랑‘은 ’그림마당 민‘에 이은 민중미술 터전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통인가게‘를 이어받은 관우선생의 ’통인옥션갤러리‘도 역량 있는 작가를 꾸준히 초대하며,

정기적으로 판소리마당을 여는 등 인사동 문화를 일으키는데 일조하고 있다.

 

1959년 인사동 사진갤러리 '신한화랑' 개관식에 참석한 사진계인사,

왼쪽 4번째가 이경모선생, 다섯번째가 임인식선생, 일곱번째는 이해선선생, 열번째가 성두경선생

 

상업화랑이 생겨나기 이전인 1959년에는 종군사진기자 임인식선생이

관훈동에 사진전문화랑인 '신한화랑'을 차린 적도 있었다.

80년대 중반에는 신희순이 운영한 ‘꽃나라’ 라는 흑백현상소가 생겨나며

김대현, 양은환, 유성준, 정영신, 윤 옥, 김종신, 정용선, 이혜순, 고영준, 하상일, 변홍섭 등

많은 사진인들이 인사동을 더나드는 계기가 되었다.

 

2018, 인사동 "꽃나라'에 출입하던 사진인들을 오랜만에 인사동에서 만났다. / 정영신사진

2000년대 이후에는 ‘김영섭화랑’과 이순심이 운영한 ‘나우’와 룩스’가 생겼으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최건수가 운영하는 ‘인덱스’가 유일한 사진화랑으로 남았다.

 

2012 룩스갤러리에서 열린 김영수추모전 개막식, 정범태선생과 곽명우씨가 보인다

99년 창립된 ‘민사협’은 사무실 보증금이 없어

회원인 정원일에게 500만원을 빌렸으나, 아직 갚지 못했다.

회장과 사무국장은 로봇에 불과하고 모든 걸 김영수가 좌지우지해,

다들 탈퇴하거나 한 걸음 물러나게 된 것이다.

오죽하면 대구지부에서 연명으로 탄원 하는 등 분란도 속출했다.

사무국장은 일찍부터 정인숙이 물려 받았다.

 

1986 고)김영수씨, 인사동 작업실에서

그래도 김대중 정권 들어서며 ‘광복60년 시대와 사람들’,

‘한국현대사진60년’ 등 ‘사협’에서는 엄두도 못낼 굵직한 일을 해냈다.

그러나 김영수가 세상을 떠나자 '민사협'도 막을 내리고 말았다.

젊은 사진가들이 다시 결집했으면 좋겠다.

 

2006 인사동 거리풍경

1980년 정일학원 자리에 민정당사가 들어서며 밤이 되면 식당골목 주변에

검은 세단이 들락거렸으나, 정치인들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이처럼 인사동에 정치인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예술인들이 모여들며

샛길 안쪽에 ‘선천집’, ‘사천집’, ‘이모집’, 등의 한옥 음식점들이 많이 들어섰다.

 

2006 많은 인파가 몰리는 주말의 인사동거리

그런데 1987년 ‘인사동 상인회’가 결성되었고,

그 이듬해 ‘전통문화의 거리’로 지정되면서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인사동에 관이 개입하여 축제를 벌이자 구경꾼은 몰렸지만

인사동만의 풍류는 서서히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일요일에는 차 없는 거리가 시행하자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기존의 고서점, 화랑, 민예품 가게를 밀어내고,

화장품 가게나 중국산 싸구려 기념품 가게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1997 '인사전동문화보존회'에서 발행한 '인사동이야기' 목차

1997년 ‘인사동 상인회’가 ‘인사전통문화보존회’로 바뀌었다.

이호재가 보존회 회장을 맡으면서 ‘인사동이야기’란 회보를 제작하기도 했다.

2011년부터는 인사동에 차 없는 거리가 실시되며 관광객 거리로 변모했다.

 

1988 인사동 거리축제에서 할아버지와 어린이가 함께 놀고있다

상권이 바뀌면서 1999년에는 '영빈가든' 자리 약 450평에 고층상가가 세워질 계획에

길가 있던 동서표구, 아원공방 등 열두 가게가 쫓겨 날 처지가 되었다.

이를 구제하기 위해 인사동 사람들과 문화예술인들이

인사동 ‘작은 가게 살리기 운동’을 펼쳐 이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 부지를 인수한 '쌈지'가 열두 가게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공예품 전문 쇼핑몰로 만든 것이 지금의 쌈지길 건물이다.

 

2018 인사동 쌈지 앞 거리풍경

인사동 한복판에 대형 관광호텔과 곳곳에 상가건물이 지어져,

국적불명의 관광지화는 가속화 될 것이다.

이제 문화특구로 내세울만한 예스러움이나 인사동 풍류는 오간데 없다.

특색 없는 유락지로 전락한 중국 베이징의 ‘유리창’을 빼 닮았다.

인사동 터줏대감들은 인사동이 완전 망했다고 한탄하지만,

세월 따라 바뀔 수밖에 없는 세대교체다.

 

2013 '아라아트'에서 열린 천상병 20주기 추모행사장에서

그 무렵 인사동을 사랑하는 예술인들이 인사동을 살리기 위해 규합하기 시작했다.

2009년 3월 김명성을 비롯한 150여명의 예술인들이 뭉쳤다.

‘아리랑가든’에서 발기인 총회를 가진 후 몇 년에 걸쳐 여러차례의 문화행사를 벌였다.

 

 2013 '아라아트'에서 열린 천상병 20주기 추모행사

그리고 천상병 시인 20주기가 되는 2013년 4월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인사동 소풍, 천상’이라는 시와 노래, 회고담이 어우러지는 추모행사를 열었다.

‘눈빛출판사’ 이규상은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사진집을 출판해 기념했다.

 

2012, '아라아트' 개관식에서

가난한 예술인들이라 처음부터 대부분의 경비를 이사장인 김명성이 부담했다.

그러나 그가 건평 1,000평이 넘는 대형갤러리 ‘아라아트’를

인사동에 세워 자금난에 시달리자 ‘창예헌’ 활동도 침체하기 시작했다.

결국 부도나 중국자본에 넘어감에 따라 '창예헌’ 활동도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2007년 ‘공화랑’에서 개최한 ‘인사동, 그 기억의 풍경’ 사진전과

2010년 ‘북스갤러리’에서 개최한 ‘인사동, 봄날은 간다’ 사진전이 내가 남긴 인사동 자료다.

 

2007 ‘공화랑’에서 열린 ‘인사동, 그 기억의 풍경’ 사진전 퍼포먼스

이제 이 글을 계기로 그동안 기록한 인사동 사진들을 정리하는 일만 남았다.

유일한 인사동 사진집으로 펴냈던 ‘인사동 이야기’는 절판되어

저자도 없는 귀한 책이 되고 말았다.

 

2010 북스갤러리 '인사동, 봄날은 간다' 전시 개막식에서

낭만과 풍류가 흐르던 옛 인사동은 질퍽하면서도 따뜻한 정으로 영글었다.

모두들 주머니는 비었으나 밤새 외상술 마셔가며 예술을 이야기하고 인생을 노래했다.

이제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거나 어디론가 사라져

그 흐릿해 가는 추억을 안주삼는 예술가들만 인사동을 떠돌 뿐이다.

그마저 일 년 넘게 끌어 온 코로나 여파로 만나기 어려워졌다.

 

2013 여자만 연회에서, 송상욱시인과 김신용시인

유일하게 희망적인 것은 '인사아트프라자' 박복신 대표가 인사동 문예부흥에 공 들이고,

박재동화백이 갤러리 입구에 작업실을 마련해 인사동 지킴이로 나섰다는 점이다;

 

2019 '통인가게' 판소리 마당에서 배일동명창이 열창하고 있다

그렇게 그렇게 나의 전시 제목처럼 인사동, 봄날은 갔다.

내 마음을 대변하는 두 원로 시인의 시로 긴 글을 마무리한다.

 

2007 쌈지에서 노래부르는 장사익씨

인사동 / 고 은

 

인사동에 가면 오랜 친구가 있더라

얼마 만인가

성만 불러도

이름만 불러도 반갑더라.

 

오로지 빈손을 잡고

그냥 좋기만 하더라

인사동에 오면

그런 날들 가슴에 묻어

고향 같은 골목들

그냥 좋기만 하더라.

 

서로 나눌 지난날이 있더라

밤 이슥히 손 흔들어

헤어질 친구가 있더라”

 

(2016 좌로부터 조준영, (고)강민 시인과 민속학자 심우성선생)

인사동 아리랑 / 강 민

 

붐비는 인파 속에도

내가 찾는 이는 없다.

 

오늘도 내 인사동 걷기는 여전히 허전하다

추억처럼 불빛이 켜지고 있다.

 

어딘가 전화라도 걸까

눈시울이 시큰할 뿐

휴대전화를 만지는 손가락은 뻣뻣이 움직이지 않는다

 

진공(眞空)의 거리

어디선가 그리운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사진, 글 / 조문호

 

(2005년 '인사아트프라자' 앞에서 노래하는 고) 이남이씨)



정선가는 길은 20여 년 동안 쉼 없이 오고 가며 스스로의 생각에 빠져들었던 사색의 길이다.

평균 한 달에 두 번 가지만 농사철에는 더 잦아질 수밖에 없는데, 기름 값이 장난이 아니다.

몇 푼 되지도 않는 나의 생활비 대부분이 길바닥에 뿌려지는 셈이다.

양평으로 가는 국도를 이용하여 고속도로 통행료는 없지만, 왕복 기름값이 5만원 소요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짐도 짐이지만 만지산 중턱이라 두 번 갈아타는 데다 한 참을 걸어야 한다.


 

국도로 가면 시간은 좀 더 걸리지만 속도를 내지 않아 기름 값이 절약되고 길 막힘도 그의 없다.

도로가 정비된 요즘은 세 시간 반쯤 걸리지만, 쉬다보면 족히 네 시간은 걸린다.

그러나 혼자 운전하는 시간만이 스스로를 생각하게 하는 유일한 시간인 셈이다.

돌아올 때는 일에 지쳐 생각할 겨를이 없지만, 출발하는 시간은 새벽이라 안성맞춤이다.

정신도 맑은데다 주변 풍경까지 변화무쌍해 사색하는 시간으로 딱 좋다.


 

지난 20일은 특별하게 갈 일은 없었으나 새벽 네시에 집을 나섰다.

요즘 무더운 쪽방에서의 생활에 열 받아 그런지 폭발 직전이었다.

어저께도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댓글에 악을 박박 쓰며 욕을 퍼부어 댔다.

그 댓글에 대한 감정은, 오랜 악연이 생각나 도저히 누그러트릴 수가 없었다.

스스로를 돌아보며,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소용없었다.


 

9년 전 완주 종남산 자락에서 열린 창예헌의 가을여행 때 일이었다.

난 행사를 준비하는 처지라 그 자리에 없었는데, 그가 뱉은 말 한마디가 화근이 된 것이다.

소설 쓰는 친구와의 대화에서 날더러 저 인간이 뭐가 좋아 같이 사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하니

소설 쓰는 친구가 좋은 구석이 있겠지라고 대꾸했다는 것이다.

물론 같이 앉은 술좌석에서 말했더라면 농담으로 여겨 욕하고 넘어 갔겠지만,

본인도 없는 자리에서 그것도 마누라가 듣도록 이야기했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 말은 수십 년 된 친구로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며칠 후 다른 사람을 통해 들어 혼자 속을 부글부글 끓였는데,

그의 전화번호를 지우며 그와의 오랜 인연을 끊기로 작정한 것이다.

본인은 내가 안다는 사실을 모르겠지만, 말 한 것도 잊었는지 그 뒤에도 자기가 필요할 때 연락해 왔다.

도록에 들어 갈 사진이 필요하면 내려와 사진을 찍어달라거나, 서울 올라오면 불렀지만,

내가 미쳤다고 그를 위해 삼천포까지 내려가며, 그 얼굴 보러 인사동 나가겠는가?

더불어 맞장구치고 어울려 다니는 친구까지 꼴 보기 싫어졌다.


 

그런데, 엊그제 느닷없이 패북에 댓글이 달린 것이다.

처음 페북에 가입했을 때는 누군지 살피지도 않고 페친 신청을 받아주었던 게 탈이었다.

그가 페친인줄도 몰랐는데, 그가 올린 댓글에 오랜 악연이 치솟았다.



 내용인즉, 내가 올린 페북의 글을 쭉 읽어 잘 안다며 충고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도둑고양이처럼 훔쳐보기만 하고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는 말인데,

내용도 내가 올린 동자동이야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말년에 철든 것처럼 왜 그리 설치냐는 댓글에 처음엔 습관적으로 대꾸했으나,

옛날의 미소가 그립다”. “뒤도 돌아보라는 등 두 세 번 올라오는 내용에 저의가 느껴졌다.

아마 위선적인 노인을 탓하는 글에 알랑방귀 끼고 싶었으나, 속보일까 엉뚱한데 댓글 단 것 같았다.


 

댓글도 댓글이지만, 오랜 악연이 생각나 댓글을 지우며 페친을 끊어버린 것이다.

문제는 분노가 식지 않으니, 녹번동에서 술친구 만난 이야기를 쓰면서도,

그 이야기로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이 터져 나오는 등 감정 조절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를 돌아보며 반성하는 시간을 가질 작정으로 집을 나선 것이다.


 

어두운 시가지를 벗어 나 양평 쯤 도달하니 운무에 휩싸인 그림 같은 풍경이 연출되었다.

자연의 경이에 감탄하며 속 좁은 인간의 한계를 탓하기도 했는데,

한편으론 속마음을 숨기고 수시로 변하는 인간사를 말하는 듯 했다.



만지산에 눌러 살 때는 새벽녘, 안개나 구름 따라 바뀌거나 사라지는 산의 형상을 통해

지워져 가는 산을 찍은 적도 있었다.

구름에 가려 지워지는 모든 것은 무에서 시작되어 무로 돌아간다는 무위의 사상을 일깨우며,

산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지우는 작업이었다.

사진 팔아먹을 속샘도 깔렸지만, 사진 아닌 소설쓰는 것 같아 비위도 상했다.

자신을 지우지 못해 다시 사람을 찍지만, 그 때가 떠오르기도 했다.



용문산 가까이 이르니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붉게 타오르는 태양에서 어김없이 다시 하루가 시작되는 세상사를 떠 올렸는데,

부질없는 생각일랑 버리고 좀 더 희망적인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메시지로 다가 왔다.

미워하는 사람도 끌어안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친구 모습만 떠올라도 달아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없던 일로 되돌리기는 어려울 것 같아 갓길에 차를 세워놓고

졸음방지용으로 준비해 둔 대마초를 한 대 피웠다.

생각을 깊게하는 대마초는 부정보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끌어내며,

상대를 배려하고 이해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긴 시간 운전을 하며 마음을 다잡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였으나 자신이 없었다.

그를 만나면 그 때 일이 다시 떠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차는 이미 귤암리 강변으로 들어섰는데,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차를 강변에 세워두고 흐르는 강물을 멍청하게 지켜보았다.




비가 왔는지 흐르는 강물의 속도가 빨라졌고, 우뚝 솟은 만지산 살팔봉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나쁜 기억은 흐르는 강물에 흘려보내고, 좋은 기억만 세우라는 것 같았다.

그래! 나쁜 기억은 지우고, 그때 일은 용서하기로 하자.

만나면 그 때 일이 생각나 다시 불편해 질것아 멀리서 지켜보며 응원하기로 했다.

대신 그 친구가 말한 뒤 돌아보며 살라는 말은 두고두고 새겨들을 것이다.


 


나 역시, 말 한마디로 남에게 상처 준 적이 한 두 번이겠는가?

쉽게 던진 말 한마디가 상대의 가슴에 박혀 등진 사람은 왜 없겠는가?

그동안 글로서도 숱한 상처를 준 것이 사실이다.

말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신중을 기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정의롭지 않은 부당한 일을 밝혀내어 시정하는 일은 중단할 수 없다.

고쳐지면 당사자에게 정중하게 사과할 작정인데,

개인적인 감정은 없음을 너그럽게 이해하기 바란다.

 

사진, / 조문호







 





지난 토요일 오후1시 무렵, 인사동 ‘갤러리 그림손’에 들렸다.
사진가 양재문씨를 만나러 갔는데, 케냐의 사진가 김병태씨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더 페이스’란 제목의 케냐 사람들 얼굴을 찍은 작품인데, 검은 공간에 부조처럼 박혀 있었다.






전시작가와 인사를 나누고, 멀건 대낮부터 한 잔 하러 갔다.
인근의 전라도 음식점 ‘자희향’에 갔는데, 맛있는 홍어부침에 김병태씨 사진이야기를 곁들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곳에서 뜻밖의 반가운 분을 여럿 만났다.
미술평론가 김진하. 이태호씨 등 몇 분이 입성하더니, 뒤 따라 김명성, 김용국, 김상윤씨가 들어왔다.
이 집 음식이 맛있는 건 다들 알지만, 용케도 시간이 맞은 것이다.






몇 일전 이야기는 들었지만, 김명성씨가 천상병시인을 추억하는 인사동 잔치를 마련한다고 했다.
6월 28일 정오부터 오후9시까지 ‘아리랑’에서 여는데, 모처럼 인사동 사람들이 만나는 좋은 자리다.






전 ‘창예헌’ 회장 김명성씨 제안으로 추진되는 이번 잔치에 ‘아리랑’ 유재만 회장도 후원한단다.




2013년 고)천상병시인 20주기에 맞추어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열린 '인사동 소풍'의 한 장면이다. 



그 날 원로시인들로 부터 천상병시인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시 낭송회를 비롯하여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작은 음악회도 준비한다.





다음 주에 다시 한 번 알리겠지만, 인사동 사람들은 물론이고 천상병시인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페북이나 블로그에 신청만 하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술자리가 끝나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녹음 짙은 인사동 10길의 정취가 낯선 듯 아름다웠다.
토요일의 인사동 거리라 변함없이 붐볐는데, 오랜만에 만개떡 장사도 나왔더라. 






취기가 올라 ‘유담’ 커피숍에서 팥빙수를 시켰는데, 김명성씨가 두툼한 책 두 권을 선물했다.






한 권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펴낸 ‘서울과 평양의 3.1운동’이고
한 권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에서 펴낸 ‘백년 편지’라는 소중한 사료집이었다.






김명성씨가 독립운동에 관한 사료를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가 갖고 있던 ‘대한독립선언서’와 ‘대한국민의회 독립선언서’가 책에 실려 있었다.






‘대한독립선언서’는 1919년 조소앙선생이 작성한 글로
당시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김교헌, 여준 등 주요인사 39명이 연서한 독립선언서였다.

제2선언서라는 ‘대한국민의회독립선언서’는 문창범선생께서 중심이 된 최초의 임시정부로 
선언서 마지막 부분에 대한국민의회 직인이 찍혀 있었다.






우리나라는 역사적 사료를 홀대하는 나라인지, 대부분의 중요한 사료를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공짜로 기증받을 생각만 하지, 적극적으로 구입하지 않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모처럼의 인사동 나들이에 반가운 사람 만나 즐겁게 취하고, 좋은 선물까지 받았다.





그런데, 그 날 밤은 축구결승을 보아야 하는데, 어디서 볼지 고민되었다.
티브이가 없어 서울역 대합실에서 보면 되겠으나, 토요일은 녹번동 가는 날이 아니던가. 
녹번동에 들려 인터넷으로 볼 작정을 한 것이다.






여지 것 결승에 오르기 까지 축구 중계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뉴스를 보지 않아 세상 돌아가는 꼴을 모르기도 하지만, 내가 보면 지는 징크스가 있다.






꾸물대다 컴푸터를 늦게 켰는데, 이미 전반전이 시작되어 한 골 이기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지켜보자 역전되기 시작하더니, 결국 3대1로 지고 만 것이다.






난, 정말 재수 없는 인간이다.
안 보던 축구 중계는 왜 보아 온 국민이 김빠지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전생에 무슨 죄가 많은 지, 되는 일이 없다.



사진, 글 / 조문호


















안국역 6번 출구의 개구멍 같은 샛길,
벽치기 골목은 언제나 취객들로 북적댄다.
담배 피울 수 있는 골목 자리라,
골목이 주막이 되어버렸다.
담배 연기 자욱한 술 자리지만,
아무도 탓하지 않는 정겨운 풍경이다.






지난 29일은 인사동사람들의 옛 모임
‘창예헌’ 사람들이 '경복궁'에서 만찬을 가진 후,
벽치기 골목의 ‘유목민’으로 몰려온 것이다.






김명성씨를 비롯하여 방동규, 최백호, 이성, 김신용, 김혜련,
조준영, 고중록, 김용국, 오세필, 임태종, 허미자, 전인미,
이상훈, 공윤희씨 등 이십 여명이 이동하였는데,
‘유목민’에 계시던 구중서선생을 비롯하여
전활철, 서길헌, 황예숙, 정영철씨도 합류했다.






시간이 늦어 ‘유목민’으로 오신 구중서선생은
김명성씨께 선물할 붓글씨를 써 오셨더라.






유상곡수군현필지(流觴曲水群賢畢至)라고 적었는데,
여러 선비들이 어김없이 왔으니,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
그 잔이 돌아오기 전에 시 짓는 놀이나 하자는 뜻이 아니던가?
술만 취하면 시를 쓰는 김명성시인이 좋아할 내용이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술만 취하면 자기 자랑에 침이 말라 듣는 이를 곤혹스럽게하고,

어떤 이는 본인 앞에서 듣기 민망한 과분한 칭찬을 해댄다. 






자기자랑도 웃기는 짜장면이지만, 넘치는 칭찬도 불편하다.
제발 교만하지 말고, 알랑방귀 뀌지 말고 살자.
작품이 아무리 좋아도, 추하게 보인다.


배운 것 없는 거지보다 못하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사람들의 모임인 '창예헌' 고문이셨던, 김벌래선생께서 지난 21일 별세하셨습니다.
너무 늦게 비보를 접하여 알리지도, 문상도 가지 못한채,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아래는 한국일보에 실린 부고기사입니다.

효과음 장르를 개척한 선구자로 '음향의 달인'이라 불렸던 김벌래(본명 김평호)씨가 21일 새벽 3시16분 노환으로 별세했다. 77세.

연극배우를 꿈꿨던 고인은 고등학생 때 연극판에 뛰어들어 밑바닥에서부터 일을 배웠다. ‘벌래’라는 예명은 작은 덩치지만 부지런히 열심히 일하는 습관을 눈여겨본 이해랑(1916~1989) 선생이 붙여준 ‘벌레’를 다시 고친 이름이다. 1962년 동아방송에서 효과음을 맡으면서 음향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후 1990년대까지 이런저런 소리 2만 여개를 만들어냈다. 광고, 방송, 공연 등 전 분야에서 그가 만든 소리가 쓰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특히 광고업계에서는 ‘TV 광고에서 나오는 소리 가운데 CM송 빼고는 다 김벌래 소리’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 2002년 월드컵 등 국가의 큰 행사 때마다 사운드 연출과 제작을 맡았다. 이런 화려한 경력 때문에 고졸 학력임에도 서울예대, 홍익대 등 대학 강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황경자씨, 태근(삼팔오디오 대표이사)ㆍ태완(삼팔오디오 이사)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1호, 발인은 23일 오전 8시. (02)3010-2261


지난 11일 오후6시부터 인사동 ‘유목민’에서 인사동을 사랑하는 이들의 송년회가 있었다.


이 날 모인 인사동 꼴통들은 한 때, “創藝軒”맴버로 함께 한 사람들이다.
인사동을 지켜 우리문화를 살찌우자며, 인사동을 드나드는 예술인 100여명이 뭉쳤던 것이다.
당시 ‘아라아트’ 김명성씨가 총대를 메고, 아내 정영신이가 사무국장을 맡았다.

인사동에서 '천상병추모제'를 갖는 등, 5년 동안 일을 벌였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모두 들 개성이 강해 단합이 잘 되지 않는데다, 난재는 운영할 수 있는 재원이 없었던 것이다.
이사장 지원에만 의지했으니, 한계에 부딪힌 것이다.


장터사진 찍느라 일에 쫒기든 아내가 사무국장을 넘겨주는 걸로, 그만 문을 닫게 되었다.
제일 아쉬운 건, 회원들 간의 경조사 연락이 끊겼다는 점이다.
더구나 회원가족을 모르니 신변에 이상이 생겨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걸 제일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이 ‘강남대’에서 교편 잡는 조준영시인이었다.
지난 달 연락이 왔는데, “해 넘어 가기 전에 가까운 분들과 술 한 잔 하자”고 했다.
주변 분들만 연락하기로 했으나, 손발이 맞지 않아 빠진 사람이 더 많았다.

그 날은 충무로 ‘브렛송’에서 있었던 정진호씨 사진전과 겹쳐, 한 시간이나 늦었다.
약속장소에는 조준영씨를 비롯하여 이명희, 강경석, 전강호, 주승자, 유진오, 전활철, 김상현,

허미자, 전인경, 박혜영, 전인미씨가 마시고 있었다. 뒤이어 정영신, 하욱만, 노광래, 강성수, 공윤희,

김명성, 강찬모, 박인식, 김은경, 배성일, 오치우, 임채욱, 이세희, 이상훈, 이태규씨가 속속 나타났고,

뒤늦게는 울산의 오세필, 경주의 정기범, 부산의 김봉미씨도 합세했다.

마침, 그 날이 김명성씨 생일인지라, 하루 뒤인 아내 생일까지 합쳐 생일케익을 잘랐다.

오랜만에 김상현씨의 “봄날은 간다”를 들어가며 신나게 놀았다.
밤 11시가 넘어 퇴각했는데, 김명성씨를 비롯한 잔당들은 노래방에서 새벽4시까지 놀았단다.

모처럼 인사동에서 사람냄새 진하게 맡았다.

사진:정영신,조문호 / 글: 조문호

























































































 

 

경주의 목판화가 정비파씨의 기획초대전 '국토'가 지난 15일 오후5시30분, 인사동 '아라아트'센터 지하1-2층 전시실에서 성황리에 개막되었다.

우리나라 산과 강의 혈맥들을 섬뜩하게 드러낸 정비파씨의 방대한 목판화 작품들을 보며 기가 번쩍 솟는 느낌을 받았다.

한 작가의 끈질긴 집념이 이루어 낸 결과들인데, 그 6미터에 달하는 대작들을 경주 작업실에서 어떻게 옮겨 왔는지도 궁금했다.

이 날 개막식에는 작가 정비파 가족들을 비롯하여 우리의 건달 할배 채현국선생, 서양화가 신학철, 임옥상, 박진화, 정복수, 김정대, 성기준씨 목판화가 류연복, 김영만씨 제주4,3연구소 김상철이사장, 아라아트 김명성회장,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종률총장, 국회의원 임수경씨, 김명곤 전 문화부장관, 미술평론가 곽대원, 최석태, 유근오씨, 무도가 하태웅씨, 문학평론가 구중서씨, 사진가 정영신씨, 소설가 구중관씨, 손예진, 오덕훈, 신상철, 한소라, 김영진씨 등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냈다.

 

광복70주년 기념으로 기획된 정비파 목판화전은 오는 8월 20일까지 계속된다. 꼭 한 번 볼만한 전시다.

사진,글 / 조문호

 

 

 

 

 

 

 

 

 

 

 

 

 

 

 

 

 

 

 

 

 

 

 

 

 

 

 

 

 

 

 

 

 

 

 

 

 

 

 

 

 

 

 

 

 

 

 

 

 

 

기록사진이란 된장이나 와인처럼 세월이 흘러 숙성되어야 그 가치를 발휘하는 것이다.

어저께 인사동에서 민속학자 심우성선생님과 막걸리 한 잔 나누는 자리에서 말씀을 꺼내셨다.

“조군, 내가 두 살 때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이 한 장 있는데,

동생들이 갖고 싶어 하니 몇 장 복사해 주게"라고 하셨다.


사진을 달랬더니, 지척에 있는 집필실(푸른 별 이야기)로 달려가 조그만 사진틀

하나를 갖고 오셨는데, 사진이 너무 좋았다.

 

그 사진은 세월의 두께가 더해져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사진틀 뒤에는 1933년 6월 28일 종로 명륜동 자택에서 라고 적혀 있었고,
당시 명륜동에 있었던 '아리수 사진관'에서 출장 나와 찍은 사진이라고 설명하셨다.

모시 한복 차림으로 앉은 어머니와 어렸던 심선생의 모습은 아련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게 했다.

80여 년 전, 유리원판 사진이라면 쉽게 찍을 수도 없던 시절이었다.

대부분의 사진가들이 예술 지상주의에 빠져 자기 생각들만 형상화하는 요즘,
다시 한 번 기록사진의 가치를 입증한 순간이었다.

기록사진이란 시사적 사회적 현상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일상적 삶의 모습도 소중하다.
바로 이게 우리가 살아 온 역사 아니던가.

역사란 결국 사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그 조그만 흑백사진 한 장이 말해 주고 있었다.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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