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은 비가 쏟아지는데, 방 안은 와 이래 덥노?
                                                                                                                      담배 재가 날려 선풍기를 꺼니 찜질방이 따로 없다.
                                                                                                                            귀찮아도 담배는 화장실 가서 피워야겠다.
                                                                                                                      좌판기 두들기며 피우는 담배 맛이 솔솔한데...
                                                                                                               없는 놈은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는 말도 옛날 이야기다.
 
                                                                                                                                                    사진, 글 / 조문호

 

 

창문 없는 쪽방은 사람 살 곳이 아니다.

햇볕 구경은커녕, 바퀴벌레나 쥐가 서식하기 좋은 구조라 사람이 살 수 없다. 죄 지은 사람이 갇혀 사는 교도소도 창 없는 감방은 없다.  벼랑에 몰린 빈민들은 창 없는 쪽방이라도 따질 겨를이 없다. 그들은 창이 있느냐 없느냐 보다 방세가 한 푼이라도 싸냐 비싸냐 부터 따지니, 이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

 

창문이 있고 없음에 따라 방세가 달라지기도 하지만, 삶의 격이 달라진다.

중세 유럽에서는 창의 숫자로 세금을 매겼다니, 창이란 오래전부터 부를 가늠하는 기준이며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동자동 쪽방도 창이 있으면 26만원에서 30만원 이고, 없는 방은 20만원에서 18만원까지 방세가 달라지니 창이 바로 돈인 셈이다. 지하방이나 쪽방마저 창에 따라 삶의 등급이 나뉘는 것이다.

 

창의 종류도 참 다양하다.

열고 닫는 방법에 따라 들창, 여닫이, 미닫이, 벼락닫이, 붙박이로 구분되고, 막아버리는 봉창까지 합하면 그 종류가 많기도 하다. 내가 사는 쪽방 창문은 미닫이지만, 창의 기능을 반 밖에 하지 못하는 구조다. 옆 건물의 봉제공방 창과 붙어 있어 서로의 사정을 훤히 드려다 보고 살지만, 햇볕 구경을 할 수 없다. 그러나 공기는 통해 담배연기 빠져나가는 대는 아무 지장이 없다. 한 달 방세는 23만원인, 입주한지 칠년이 가깝도록 한 번도 방세는 올리지 않았다. 4층까지 오르내리기가 불편해 찾는 사람이 없는지, 관리인이 봐주는 건지 모르겠다.

 

가난한 빈민들은 창문 없는 창고 같은 골방도 감지덕지하며 살지만, 더 이상 방관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주거공간을 제공하여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것이 정부가 할 일이 아니던가? 2년 전에 발표한 동자동 공공개발을 더 이상 깔아뭉개지 말고 지구지정부터 실시하라. 튀르키에 난민구제에 팔을 걷어 부치듯, 짐승처럼 살아가는 국민들의 삶도  살펴다오. 다시 한 번 조속한 동자동 공공개발을 부탁드린다.

 

"히말라야 산골 사람들은 창을 무척이나 사랑한다. 하얀 설산이 내다보이는 창 하나 새로 내달고는 온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하루 종일 잔치를 벌인다 / 창은 신성하다. 창은 햇빛과 바람이 들어오고, 달빛과 별빛이 스며들고, 새소리 빗소리가 넘어오는 곳이다

[김홍성시인의 ‘나팔꽃 피는 창가에서’ 부분 ]

 

사진, / 조문호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가 물러가니, 연이어 추위가 찾아왔다.

쪽방은 더위보다 추위가 지내기 쉽지만, 노숙인의 겨울은 죽음의 골짜기다.

노숙인을 위해 안 입는 내복을 얻으러 쪽방 몇 곳을 찾아다녔다.

대부분 단벌이라 여분이 없었고, 정씨는 일찍부터 잠들어 있었다.

박희봉씨 방문을 열어보니, 그는 짐 속에 파묻혀 웃고 있었다.

 

방세가 20만원이라 다른 곳보다 싸기는 하지만, 한 평도 채 되지 않았다.

창문도 없는데다, 사방이 짐으로 둘러쌓여 들어가 앉을 자리조차 없었다.

방문을 열어놓고 밖에 걸터앉으려니, 방으로 들어오라며 손을 내 저었다.

사람이 지나가는 좁은 통로라, 길을 막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좁은 공간에 끼여 앉아 커피한 잔 얻어 마시며, 내복 이야기를 꺼냈다.

안 입는 내복은 있으나 산더미처럼 쌓인 짐을 다 들어내야 해, 이사가기 전에는 손도 대지 못한단다,

많은 짐을 끌어 내리면 다시 쌓아 올릴 수가 없다기에 할 말을 잃었다.

얼마나 공간이 협소했으면, 티브이와 선풍기도 손바닥만 한 것을 사용했다.

 

박희봉(69세)씨는 밀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객지를 떠돌았다고 한다.

혈육이라고는 형님 한 분 계셨으나 어린 시절 헤어져 지금은 생사조차 알 수 없다.

고생이란 고생은 찾아 다니며 하다, 20년 전에야 동자동에 안착했다.

그동안 모은 짐이 쪽방을 가득 채웠으나, 버리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만약 쌓아놓은 짐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큰일 날 것 같았다.

 

건강에 문제가 생겨 술은 끊었다지만, 담배는 도저히 끊을 수가 없단다.

담배연기 빠질 곳도 없는 좁은 공간에서, 유일한 낙이 담배라며 담배부터 꺼내 문다.

살아 온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악몽의 세월은 돌아보기도 싫단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이다.

 

쪽방이 공공 개발되면 방 같은 방에서 한 번 살아 볼 꿈에 부풀었지만,

죽기 전에 이룰 수 없는 진짜 꿈같은 일이 되고 말았다며 한숨을 내 쉰다.

동자동 공영개발이 민영으로 가닥을 잡아가는 오늘의 현실은

동자동 빈민들에게 심한 좌절감을 안겨주고 있다.

 

집에서 가져 온 내의 한벌을 챙겨 서울역광장으로 갔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인지, 서울역광장에 노숙인이라고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노숙인 응급 잠자리를 운영하는 지하공간은 공사 중이었고,

노숙인이 머물 수 있는 지하도에만 30여명이 몰려 있었다.

 

내의가 한 벌 뿐이라 잠든 노숙인 머리맡에 슬쩍 내려놓고,

오는 길에  ‘실버넷뉴스’ 운현선 시민기자를 만났다.

나를 만나러 서울역에 왔다는데, 평소 전화를 받지 않아 어렵사리 만난  것이다.

작년 홈리스 추모제에서부터 ‘노숙인 길에서 살다’ 현수막 전시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취재해 갔으나, 모자란 부분을 보충해야 한단다.   

 

여지 것 신문이나 방송기자들의 인터뷰는 극구 사양했지만, 운현선씨만은 거절할 수 없었다.

그동안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과 나의 ‘인사동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공조했기 때문이다.

별 영향력 없는 매체라 걱정할 필요는 없으나, 마음에 걸리는 일은 틀림없었다.

 

마침 서울시에서 실시한 ‘약자와의 동행’ 식권사업에 대해 물어 흔쾌히 답해 주었다.

독거노인에게 절실한 사안이라 전국적으로 확대했으면 하는 바램에서다.

 

'국토부'는 빈민들의 마지막 희망인 동자동 공영개발을 하루속히 추진하고,

'복지부'는 독거노인에게 하루 한 끼의 식권을 제공하라.

그리고 차디 찬 거리에 방치된 노숙인의 안전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바란다.

약자들의 재난은 정부에서 책임져야 할 것 아닌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

 

사진, 글 / 조문호

 

 

서울역에서 노숙하는 강훈(69세)씨는 다행히 코로나에 감염되지 않아

지하도 계단에 살아남아 있었다.

자선단체에서 나누어 준 자장면으로 허기를 메우며

‘모진 목숨 죽지 못해 산다’며 살아남음을 위안했다.

 

서울역에 있던 많은 노숙인들이 코로나에 감염되어 실려 갔지만,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도 없단다,

 

살아남으려면 코로나검사를 일주일에 한 번씩 받아

음성판정이 나와야 밥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다.

 

나 역시 ‘쪽방상담소’에 가거나 '동자동사랑방'에 가거나

어디를 가도 음성판정 확인이 돼야 갈 수 있으니,

일주일에 한 번씩 검사를 받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노숙인이나 쪽방 사는 늙은이들을 수시로

검사해야 하는 검사원의 불편도 이만 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머리도 안감고 세수도 하지 않은 냄새나는 코 구멍을

연이어 쑤셔대야 하니 짜증도 날 것이다.

 

긴 줄에서 한참 만에 검사받을 차례가 되었는데,

내 행색도 노숙자와 다를 바 없는지, 고개를 가까이 대라며 손짓 했다.

유리 구멍으로 손을 내밀어 코 구멍에 면봉을 집어넣는데,

너무 아프게 문질러 고개를 약간 돌렸더니, 푹 쑤셔버렸다.

 

얼마나 아픈지 코에 구멍 난 줄 알았다.

이런 고통을 당하면 누가 검사 받고 싶겠는가?

 

옆줄에는 옆방 사는 최완석군도 검사받으러 와 있었다.

이 친구는 병원 가거나 검사받는 걸 지독히 싫어하지만,

밥이라도 얻어먹어야 하니 어짜겠는가?

 

검사 결과를 받으려면 이틀이 걸려 통보 올 때까지 아무 일도 볼 수 없었다.

동자동 '새꿈 공원'으로 자리를 옮겼더니 한적할 뿐이었다.

 

요즘은 쪽방에 사는 사람들은 외출을 자제하여,

아는 사람 만나기가 하늘에 별 따기다.

파지 줍는 노인만 쓰레기 더미를 정리하고 있었다.

 

방에 올라가기 위해 담배 한 갑 사들고 골목을 들어서니,

낯선 여인이 길가에 잠들어 있었다.

술마신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배고파 탈진한건 아닌지 모르겠다.

담배사고 남은 오천 원을 놓고 왔으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거리로 내 몰리는 것은 특별한 사람만이 아니라

누구나 내 몰릴 수 있다는 말이다.

 

다들 삶의 의욕을 잃은 지야 오래지만,

사형수처럼 죽음만 기다릴 수야 없지 않은가?

 

코로나감염에 노출된 노숙인 구제가 시급하다.

노숙인 부터 먼저 백신접종을 해주길 부탁드린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8일 1시 무렵, 허리가 아파 침 맞으러가는데, '동자동사랑방' 사무실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일단 병원이 급해 치료부터 받고 돌아오니 김원호, 유한수, 김정호, 조두선, 김창헌, 조인형, 허미라, 김정길,

강병국, 홍홍임씨 등 여러명이 계셨고, MBC에서 나와 부양의무제에 대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김정호씨와 소주 한 잔하러 중국집 ‘태향’에 가서 사정이야기를 들었는데,

우건일조합장이 연락되지 않아 조두선씨가 권한대행을 맞았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르지만, 권한대행까지 선임했다면 간단히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이날 쪽방상담소 앞에서는 반찬을 나누어주었는데, 문규도, 송범섭, 이기영, 이상준씨 등 여러명을 만났다.

사진, 글 / 조문호

































12일 있었던 '민중 총궐기'대회 이후 심신이 편치 않다.
토요일엔 잠도 한 숨 못 잤지만, 일요일은 애인과 데이트하느라 바빴다.
피로가 덜 풀린 몸으로 일어 나 컴퓨터를 켜니, 또 울화가 치민다.


박근혜의 나쁜 짓거리야 말 할 것도 없지만, 반성은커녕 노골적으로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인간으로서 한 가닥 양심도 없는, 저런 인간을 대통령으로 둔 게 너무 분했다.
국민을 우습게 본, 그 대가는 곧 치루게 될 것이다.





이제 강제로 끌어내릴려면, 우리가 더 강하게 싸울 수밖에 없다.
먹는 것보다 잠을 더 자고 싶었으나, 그냥 일어났다. 싸우려면 좀 먹어 둬야했다.
아침 겸 점심 먹으러, ‘식도락’으로 내려갔다.

다들 식사 한 후라, 밥 한 그릇만 달랑 남아 있었다.
천 원짜리 한 장으로, 맛있게 먹었으나,
우건일씨와 뒤늦게 온 분들은 밥이 없었다.

큰 솥에다 라면 몇 개를 한꺼번에 끓였는데,
옛날 군에서 먹던 라면이 생각나, 군침 돌았다.
“라면 좀 먹어 보라”, “수급자 신청은 했냐”는 등
살가운 인사들에 답답한 가슴이 좀 풀렸다.






커피 한 잔하러 ‘동자동사랑방에 갔더니, 김정오씨가 김치 한 박스를 안겨 주었다.
올 겨울에 라면이라도 끓어 먹으려면, 김치가 있어야 할 것 같아 받아 놓았다.
적십자사에서 동자동 빈민들을 위해 보낸 김치였으나, 좁은 방에 둘 자리가 없었다.

틈나면 조금씩 나누어 주려고 옥상에 보관시켜 두었다.








오후에는 동자동 쪽방 촌을 한 바퀴 돌았다.
사람 때 묻은 옛날 건물들과 빤질빤질한 빌딩들이 모여 있는

우리 동네는 돈과 가난이 공존하는 독특한 구석이 있다.






요즘 노숙자로 전전하는 라흥주씨를 거리에서 만났다.
막걸리 두 병 사들고는, 따라 오라며 눈짓한다.
아래 공원 모퉁이에 자리 잡아, 한 잔 얻어마셨다.
술 마시며 했던, 그의 사연도 가슴 아팠다.

돈 벌러 서울 올라 온지가 30여년이 넘었지만,
아직까지 가족들에 연락마저 할 수 없는 사정이란다.
마지막 남은 4백만원 마저 잘 아는 사람에게 도둑맞아,
이젠 완전 개털되어 노숙자로 전전한다는 것이다.




살아가는 사연들을 들어보면, 하나같이 눈물겨운데,
대통령자리 도적질한 박근혜는 국민들의 피 같은 돈까지 도적질했다.

더 이상, 자격 없는 대통령이 좌지우지하는 시대는 끝내야 한다.
정의감보다 눈치나 보며 명령에 끌려 다니는 섞어 빠진 검사들도 많지만,
정의감에 피 끓는 검사들도 분명 살아있다.

죄상은 명명백백히 밝혀 질 것이고, 박근혜는 그 죄 값을 받으면 될 것이다.

"그 걸 피하려 잔머리 쓰면, 너 네 아버지처럼 총 맞는다.
순리대로 풀어라!  국민이 살아있고, 역사가 지켜본다."

사진, 글 / 조문호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서울역 주변의 쪽방에서 절망스런 삶을 사는 사람이 천 백명이나 됩니다.

그들의 곤궁한 삶에 관심을 가졌으나, 그 벽이 생각 외로 두터웠습니다.

오랜 세월 단절된 습성 때문인지, 쉽사리 마음의 문을 열지 않습니다.

더구나 외부의 노출을 꺼리는 그들로서는 사진 찍기를 단연코 거부합니다.

그 벽을 허물려면 많은 노력과 정을 쏟아 부어야 할 것 같네요.

 

지난 19, 동자동에 사는 장애인 윤용주(54)씨를 만났습니다.

그가 동자동 쪽방에 살게 된 것은 올해로 12년째라는데, 나이에 비해 많은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천식과 고혈압, 당뇨로 고생해왔는데, 몇 년 전부터 합병증에 의해 혈관이 막혀 다리가 썩기 시작했답니다.

지난해는 왼쪽다리를 잘라냈으나, 이젠 오른쪽 다리까지 옮겨갔답니다.

 

그는 IMF사태가 만들어 낸 희생자입니다.

그 이전엔 전주에서 건설회사의 하청업체를 운영하며 단란한 가정을 꾸리던 가장이었습니다.

IMF 직격탄을 맞은 건설회사 도산으로 빚더미를 안게 되었고,

술로 한탄의 세월을 보내다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아, 여기까지 밀려왔답니다.

두 자녀를 키우는 전 처도 생활이 어렵다는 소문은 들어, 가족에게 전화할 수도 없는 처지라고 합니다.

그냥 자식이나 한 번 만나는 게 소원이랍니다.

 

기초생활수급대상자인 그는 한 달에 50여만 원을 정부에서 지원받고 있으나, 병원비를 부담하기엔 어림없습니다.

돈이 없어 제대로 치료 받지 못하니, 다리는 자꾸 썩어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를 도와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혹시 자선의 뜻이 계신 분은 아래로 연락해주면 고맙겠습니다.

    


윤용주 : 010-2191-3477

서울시 용산구 후암로 57, 동자동 17-7 (16)

농협 302-0603-4335-41 (윤용주)















 

 





지난 18일, 김신용시인과 양동에서 만나기로 했다.
서울역 주변에서 쪽방사람들을 찍는 나를 도우려, 시흥에서 나온 것이다.
양동은 그가 지게꾼으로 일하며 시를 쓰 왔던 시작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는 매혈은 물론,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으로 시행된 정관수술을 두 차례나 받았다.

끼니해결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았는데, 그러한 부랑의 시절에 양동골방

(그 때는 쪽방이 아니라 골방이라 했단다)에 엎드려 양동시편을 쓰내어,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창녀촌이자 빈민굴인 양동의 풍경이 생생하게 묘사된 시편들은 '문학적 승화'가 어떤 것인지 보여줄 만큼 아름답다.





양동시편에 나오는 김신용의 '뼉다귀집'시 한 편을 읽어보라.


뼉다귀집을 아시는지요
지금은 헐리고 없어진 양동 골목에 있었지요
구정물이 뚝뚝 듣는 주인 할머니는
새벽이면 남대문 시장바닥에서 줏어온
돼지뼈를 고아서 술국밥으로 파는 술집이었지요
뉘 입에선지 모르지만 그냥 뼉다귀집으로 불리우는
그런 술집이지만요
어쩌다 살점이라도 뜯고 싶은 사람이 들렀다가는
찌그러진 그릇과 곰팡내 나는 술청 안을
파리와 바퀴벌레들이 거미줄의 현을 고르며 유유롭고
훔친 자리를 도리어 더럽힐 것 같은
걸레 한 움큼 할머니의 꼴을 보고는 질겁을 하고
뒤돌아서는 그런 술집이지만요
첫새벽 할머니는 뼉다귀를 뿌연 뼛물이 우러나오도록
고아서 종일토록 뿌연 뼛물이 희게 맑아질 때까지
맑아진 뼛물이 다시 투명해질 때까지
밤새도록 푹 고아서 아침이 오면
어쩌다 붙은 살점까지도 국물이 되어버린
그 뼉다귀를 핥기 위해
뼈만 앙상한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들지요
날품팔이지게꾼부랑자쪼록꾼뚜쟁이시라이꾼날라리똥치꼬지꾼
오로지 몸을 버려야 오늘을 살아남을 그런 사람들에게
몸 보하는 디는 요 궁물이 제일이랑께 하며
언제나 반겨 맞아주는 할머니를 보면요
양동이 이 땅의 조그만 종기일 때부터
곪아 난치의 환부가 되어버린 오늘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뼉다귀를 고으며 늙어온 할머니의
뼛국물을 할짝이며
우리는 얼마나 그 국물이 되고 싶었던지
뼉다귀 하나로 펄펄 끓는 국물 속에 얼마나
분신하고 싶었던지, 지금은 힐튼 호텔의 휘황한 불빛이
머큐롬처럼 쏟아져 내리고, 포크레인이 환부를 긁어내고
거기 균처럼 꿈틀거리던 사람들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러나 사라지지 않은 어둠 속, 이 땅
어디엔가 반드시 살아있을 양동의
그 뼉다귀집을 아시는지요


 




김신용시인은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며 뼈를 깍는 괴로움 속에서도 좌절않고 시를 쓴, 투지의 작가다.

그리고 그의 맑은 사랑의 정신과 예민한 감성은 눈 부시도록 아름답다.

 소외층의 삶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동질성을 바탕에 두었기에 다른 구호적인 사랑의 시편과는 다르다.

어떤이는 한국의 장 주네(프랑스 부랑아출신 작가)나, 제2의 천상병이라고도 하지만. 그만의 감성은 비교할 상대가 아니다.





시집 “버려진 사람들”, “개 같은 날들의 기억”, “몽유 속을 걷다”, “환상통”, "바자울에 기대다"를 비롯하여

소설 “고백”, “기계 앵무새”, “새를 아세요”등 많은 작품들을 발표했고, 여기 저기 문학상도 많이 받았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노동의 시인일 뿐이다.






그와 함께, 지게꾼으로 살던 30여년 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현장을 돌아 다녔다.
'힐튼호텔' 아래 벼랑길에 자리 잡은 그가 살던 3층 건물은 여지 것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마침, 그 당시 문학잡지 기자가 찍은 사진 몇 장을 챙겨왔는데, 외벽 타일까지 그대로였다.


 






-김신용시인이 가져 나온, 30여 년전 찍은 양동사진-






 

지금은 사라진 ‘뼉다귀집’ 터를 비롯해, 일 나가던 길목이나 주변 골목을 돌아보며, 회한에 빠져들었다.

지게꾼 최고의 자리인 '코스모스백화점' 전속지게꾼 자리를 자기보다 더 어려운 박인수씨에게 물려주고,

다른 일거리를 찾아 나선 일, 자신을 좋아했던 창녀의 "같이 살자"는 제안을 거절했던 일 등,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창녀가 살던 집을 돌아보고, 서울역이 내려다 보이는 구름다리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김신용시인은 옛 ‘대우’그룹에서 주변 땅을 접수하기 시작하며 쫓겨났다고 했다.

폭력배까지 동원해  골방촌 사람들을 내쫒았는데, 자신은 독신이라 이주비 20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가족이 있으면 이주딱지를 주었으나, 그 딱지도 대부분 130여만원에 되팔았다고 했다.

딱지도 끝까지 버틴 사람은 훨씬 많이 받고 팔았지만, 버틴 독신자는 이주비를 30만원까지 주었단다.





양동은 '힐튼호텔'을 비롯한 거대한 빌딩들이 점령했지만, 아직도 퇴락한 골방촌의 면면을 간직한 곳이 많았다.

잘 난 사람들이 북적이는 그 빌딩 틈 사이에, 가난한 사람들이 끼어 진드기처럼 연명하는 것이다.

언제 철거될지 모르니, 집들은 낡을 대로 낡았고, 주변 환경조차 지저분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입주한 쪽방 건물이다. 4층 3호실인데, 전세없이 월세23만원














아직까지 여인숙이란 간판이 그렇게 많은 곳도 처음 보았다. 

더 놀라운 것은, 몸을 파는 양동사창가의 잔재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점이다.


쪽방촌 사람들의 고난과 마음의 상처를 다독여 줄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없는가?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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