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1일은 돌아가신 어머니 기일이었다.

20여 년 동안 정선 만지산에 어머니를 모셔 두고 제사를 지냈는데,

묘지 벌초하는 모습을 지켜본 조카의 만류도 만류지만,

거리가 멀어 자주 올 수 없다는 가족들의 원망에 손을 들고 말았다.

 

어머니 유골을 일산 '하늘문 납골당에 모신 후, 제사마저 인천 형님 댁으로 옮겨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인천 형님 댁에 제사상을 차려놓고, 한쪽에서 예배를 보았으나

그 다음부터 아예 제사상을 차리지 않고 예배만 보아 발길을 끊은 것이다.

밥 한 그릇만 떠 놓아도 혼자 제사 지내는 게 속 편했다.

 

, 무신론자로 제사마저 부질없는 줄 알지만,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제사로 어머니를 기리고 싶은 것이다.

결국 융통성 없는 기독교 교리가 가족 간의 마음을 상하게 한 촉매 역할을 한 셈이다.

 

이번 기일에는 어머니를 모셔 둔 하늘문납골당에서 가족들이 모이기로 했다.

누님 조영희를 비롯하여 형님 조정호, 동생 조창호, 조진옥, 매제 김종성,

그리고 정영신 동지를 비롯한 조카 박홍전, 조아라, 조은겸 등 10명이

 한자리에 모여 어머니를 기리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다들 사는 게 그렇게 바쁜지 집안에 길흉사가 없으면 일 년에 한 번도 만나기 어렵다.

모두 수도권에 살면서도 어찌 남보다 못한 이 지경이 되었는지,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모처럼 집안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건 아니다 싶었다.

형수가 아파 병원에 입원했다는 연락마저 퇴원을 앞두고 한 것이다.

그리고 막네 조카 은겸이가 결혼을 한다는 소식도 주었다.

은겸이는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끔찍이도 끼고 돌아, 누구보다 어머니께서 좋아하실 것 같았다.

 

또 하나 놀라운 소식은 막내 여동생 진옥이가 화가라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우연히 매제 김종성씨가 집사람이 상을 받았다며, 휴대폰으로 이미지를 보여주는데,

수상작보다 자신의 색깔이 뚜렷한 일련의 그림 이미지에 더 놀란 것이다.

남편 뒷바라지나 하며 자식을 키운 아낙으로 살아 온 줄 알았는데,

긴 세월동안 동생이 뭘 했는지도 모르고 살았으니, 귀가 막힐 노릇이었다.

 

하기야! 나 역시 여태 사진집을 출판하거나 여러 차례 전시를 열었지만,

한 번도 식구들에게는 연락하지 않았으니,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다.

스스로를 내 세우기 싫어하는 집안 내력인 것 같았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릴 때 잠깐 문 닫았던 진주청국장 그만 두겠다는 조카 홍전의 말에 또 한 번 놀랐다.

진주에서 여의도로, 여의도에서 서초동으로 옮겨가며 돈을 많이 벌었으나, 미련 없이 손을 털기로 했단다. 

누님은 자신이 만들어 온 독특한 경상도 음식 맛이 사라질까 아쉬워하지만,

조카 홍전의 쉽지 않은 결단에 존경심이 일었다.

고생하는 어머니를 편히 쉬게 하려는 효도에서 비롯되었지만,

벌면 벌수록 강해지는 돈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욕심은 무섭기 때문이다.

 

모처럼 이산가족이 한자리에 만나는 즐거운 시간이 되었는데.

도대체 누굴 위해 사는지, 산다는 게 뭔 지 모르겠다.

고향도 가족도 잊은 채, 어찌 이리 비정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사진, / 조문호

 

 

 

어머니! 그립습니다.

정선 만지산에서 ‘하늘문 납골당으로 모신지도 벌써 일 년이 넘었군요.

적막한 산골짜기 보다야 아파트 같은 납골당이 좋겠지요?

끝까지 어머니를 지키지 못한 자식놈을 용서하십시요.

 

만지산에 계실 땐, 메주알 고주알 세상 이야기를 전해드렸으나

이젠 기일이 아니면 어머니께 말씀드릴 겨를이 없습니다.

 

이장을 결정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만지산 집에 불이 났습니다.

모든 걸 태워 몸 둘바를 몰랐으나,

정선을 떠나라는 어머니의 계시로 알고 만지산에 대한 미련은 접었습니다.

 

모든 게 무위로 끝나는 세상이치지만, 지난 세월의 그리움은 지울 수가 없네요. 

그동안 제일 무서운 돈병은 들지 않고 잘 살았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삶, 하던 일 마무리하고 따라 가겠습니다.

 

오늘따라 어머니의 십팔번 ‘삐빠빠 룰라’가 유난히 듣고 싶습니다.

 

불효자식 문호가 기도 올립니다.

'나무관세음보살'

 

어머니 기일인 지난 12 정오무렵, 정동지와 함께 고양 하늘문납골당으로 갔다.

그곳에는 누님 조영희, 형님 조정호, 동생 조진옥을 비롯하여

형수 김순화, 매부 김종성, 조카 조웅래, 박홍전 등 여러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가족도 이런 날이 아니면 만날 수 없을 정도로 다들 뿔뿔이 흩어져 바쁘게 산다.

반가움에 지난 날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위안한 하루였다.

 

 

 

 

 

지난 26일은 정선 만지산에 계신 어머니를 하늘문납골당에 모시는 이장 날이다.

하루 전 정영신과 함께 정선 귤암리로 갔으나, 쉼 없이 내리는 비 때문에 걱정이 태산 같았다.

13년 전 어머니 장례 때도 장대 같은 비가 내려 난장판이 된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쏟아지는 비에 가려 지척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 딸이 타고 오던 승용차가 개울에 빠져 병원에 입원 하는 등 한 바탕 난리를 쳤다.

쏟아지는 소나기를 뚫고 산 위까지 시신을 옮겨야 하는 상여꾼들의 고생은 말할 것도 없고, 흙 또한 흙이 아니라 찰떡이었다.

찰흙이 장화에 달라붙어 발이 떨어지지 않아 걸음조차 제대로 옮길 수 없었다.

어떻게 장례를 치뤘는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고향 선산을 두고 정선 만지산에 안장할 것을 제안한 나는 가족 볼 면목도 없었다.

어머니께서 생전에 내 죽으마 절대 너거 아부지 옆에 묻지 마라입버릇처럼 하신 말씀을 믿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미워 한 말을 곧이곧대로 옮겼으니 하늘이 난리법석을 친 것 같았다.

어머니 말씀을 거스를 수도 없었지만 가까이 모시고 싶은 욕심도 한 몫했다.

 

오래된 이야기를 새삼 꺼내는 것은 그때처럼 비가 내려 걱정이 되어서다.

날씨 때문인지 오기로 한 가족들도 당일 새벽에 오거나 원주 화장터로 바로 오겠다며 일정을 바꾸어 버렸다.

아무튼, 일할 분들이 오기로 한 아침에라도 비가 그쳐주길 바랄 뿐이었다.

 

만지산에 오후 세시 쯤 도착했으나, 불 난 집은 보기도 싫어 곧바로 창수네 집부터 들렸다.

이선녀씨는 비 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란 노랫말처럼 일터에 가지 않고 술판을 벌여 놓았다.

집안 버팀목이었던 창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창수마저 오락가락하고 있으니 일하기 싫은 모양이다.

그 많은 자기 땅을 놀려두고 다른 집에서 일해주며 사는 것도 사람이 그리워서다.

술 한잔하며 하는 하소연에는 반가운 소식도 있었다.

새처럼 중국까지 날아간 꿈을 꾸었는데, 중국 군중들로부터 큰 환대를 받았단다. 꿈마저 그녀 이름처럼 동화적이다.

그 꿈을 꾼지 얼마 후, 창수 아버지가 농어촌공사에 남기고 간 빚 2억을 갚을 수 있었다고 한다.

방치한 역전 땅이 공원 부지로 바뀌며 정선군에서 보상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금방 찐 옥수수를 안주 삼아 막걸리를 권했으나, 차 때문에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

늦기 전에 머물 방을 부탁해 놓은 최영규씨 댁으로 옮겨가야 했다.

아랫만지로 내려가니 지척이 보이지 않았는데, 그때까지 읍내 나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민박집에 가기위해 후진을 하다, 오래전 딸이 빠진 개울 가림막에 부딪혀 뒤 범프가 찌그러졌다.

 비에 대한 징크스 액땜이라며 스스로 위안했다.

 

몇 년 만에 들어가 본 최연규씨 민박집은 놀부 대궐집처럼 지어 놓았다.

방이 네 개인데다 마루 한가운데 노래방 기계와 술상까지 있으니, 모여 놀기 딱 좋은 공간이었다.

일찍부터 잠잘 준비를 하는데, 차 소리가 나며 최영규씨 내외가 들어왔다.

정선에서 오는 길에 술과 안주까지 사 온 것이다. 술잔에 만지산 비화를 담아 낄낄거렸다.

 

난, 최영규씨를 대궐 같은 놀부집에서 흥부같이 사는 사람'이라 말한다.

동년배기도 하지만 만지산 사는 분 중에 유일한 친구다.

오래전 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시어 전화로 묏자리 좀 빌려 달라 했더니, 두말없이 마련해 주었다.

상여꾼 모으는 일에서 부터 그 초상집 난장판 정리를 다 해준 사람이다.

내가 해줄 수 있었던 것은 사진 작품 한 점 선물한 것뿐이다.

그날도 민박 사용료를 주었더니, 가족이 오지 않아 받을 수 없다며 돌려주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보니 다행스럽게도 비가 그치고, 앞산에 걸린 구름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반겼다.

좀 있으니 동생 창호가 도착했고, 뒤이어 이장을 맡은 업체에서도 도착했다.

 

 

산신제와 어머니께 간단한 예를 올린 후 땅을 팠으나, 비에 젖어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만약 육탈이 되지 않았다면 원주 화장장까지 가야 하는데, 화장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마침 한순식씨가 일하러 가지 않아 굴삭기를 불러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었다.

굴삭기 사용료를 주었으나, 기어이 받지않겠다고 우겨 식사라도 하라며 운전석에 묻어두었다.

 

관을 열어보니 다행스럽게도 육탈이 완전하게 되어 유골만 남아 있었다.

일하는 분이 정성스럽게 유골을 수습하여 현장에서 간이화장을 할 수 있었다.

 

급히 가족들에게 원주 화장장으로 오지 말고 일산 납골당으로 오라는 연락을 했다.

시간이 줄어들어 서둘 필요도 없이 천천히 고양시 하늘문납골당으로 갈 수 있었다.

가는 길에 '횡성한우직매장'에 들려 아침 겸 점심을 동생이 샀는데,

부드러운 육질의 쇠고기가 입에 착 달라붙었다. 횡성한우가 왜 비싼지 이해되었다.

 

납골당 하늘문을 찾아가는 긴 시간은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그 동안 한 달에 두 번씩 갈 때마다 어머니를 보살피기는 했으나 아무도 찾지 않는 외딴곳에서 얼마나 외로웠겠는가?

가족들도 일 년에 한 차례는 어머니 뵈러 왔는데, 생전에 지극히 좋아한 막네 손녀 은겸이의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남달랐다.

가족들도 처음에야 강변길 따라가는 정선 풍경이 좋았겠지만, 서너 시간의 운전 길이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다들 운전 하느라 정동지가 유골함을 안고 가는 것도 편치 않았다.

 

납골당 하늘문에 도착해 보니 많은 가족이 나와 있었는데, 이 얼마 만의 반가움인가?

누님 조영희, 형님 조정호, 동생 조진옥을 비롯하여 형수 김순화, 매부 김종성, 조카 조향, 조웅래, 조은겸,

박홍전, 박유정 등 일이 있어 못 온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와 있었다.

예쁜 녀석들이 아줌마가 되어버린 조카들 모습에서 세월의 빠름을 절감했다.

 

진주청국장‘하던 누님이 장사를 접었다는 소식도 전해 주었다.

진주에서 여의도로 여의도에서 강남으로 옮겨 온 수십 년의 사업이지만 건물 개축으로 밀려났다고 한다.

코로나 시국인지라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않고 당분간 폐업에 들어갔단다.

식당 일이 진저리가 날 만도 한데, 누님은 일이 없으니 몸이 편치 않다며 불만이다.

 

매년 기일마다 납골당에서 모이기로 약속하는 걸 보니, 가까이 모신다고 해서 자주 뵙는 것도 아니었다.

, 납골당 마저 가족들이 추억하기 위한 공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자연과 융화된 육신 따라 유골도 자연으로 돌려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그토록 혼줄이 났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리 삐딱한 생각만 하는지 모르겠다.

 

어머니를 안치하며 차례대로 영원한 안식을 기원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양재동에서 ‘진주청국장’을 운영하는 조영희 누님이 병원에 입원했다는 전갈을 받았다.
어깨뼈를 다쳐 분당 '서울대병원'에서 수술 받았는데, 수술결과는 좋다고 한다.




진주에서 여의도로, 여의도에서 양재동으로 40여 년 동안 청국장 끓이는 일에 매달렸으니,
쇠덩어리라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맏딸 박홍전이가 시집도 가지 않고 장사를 이어 받았는데, 골병드는 일이 식당일이다.
돈은 좀 벌었겠지만, 건강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랴!




지난 년말, 일산 사는 동생 조창호와 조옥희, 매제 김종성씨와 함께 병문안 갔다.




누님께서는 “수술을 잘 끝내고, 다른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며 반갑게 웃었는데,
팔 밑에 받침대를 댄 모습이 어릴 적 본 아이스케키 통 맨 사람 같았다.
‘아이스케키 좀 팔았냐?’는 농담도 했는데, 얼굴만 보아도 즐거운 것이 가족이다.




이제 팔순을 넘겼으니, 식당에서 은퇴할 나이가 넘었다.
여기 저기 놀러 다니면 좋으련만, 시집가서 식당일만 해서 노는 것도 잊어버렸을 것이다. 
기껏 하는 일이 조계사에 기도하러 가는 것 뿐이다.




가족들이 다 수도권에 살지만, 좋은 일이던 나쁜 일이던, 일이 생기지 않으면 만날 수도 없다.
모처럼 만났으니,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지만 할 말은 많았다.




아들 햇님이가 카톡으로 보낸 손녀 하랑이 사진을 돌려보기도 했다.
장가 간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손녀 하랑이 첫돌이란다.




매제 김종성씨는 대학에서 정년퇴임하여, 딸 소원이가 운영하는 약국의 셔터맨으로 봉사한단다.

다들 생활전선에서 물러 날 때가 되었으니, 이제 재미있게 사는 일만 남았다.




못 다한 이야기는 퇴원 후로 밀쳐두고 다들 물러났다.



"새해에는 오짜던둥 건강 잘 지켜 재미있게 삽시더.

조씨 집안이 노는대는 일가견이 있다 아이가"



옛날에는 꽃놀이 술판을 '회초'라 그랬는데, 사전에는 없어 어원을 모르겠네.





"날 풀리마 꽃놀이 술놀이나 한 판 벌립시더!

이빨 사이로 새는 '봄날은 간다'도 색다르게 쌕시하다."


사진, 글 / 조문호








양재동에서 ‘진주청국장’ 밥 장사하는 조영희 누님께서 엊그제 팔순을 맞았다.
옛날 같으면 고려장에 들 연세지만, 아직도 주방에서 고군분투하신다.
한 평생을 진주에서 여의도로, 양재동으로 옮겨가며 청국장만 끓여 왔다.
이제 딸 박홍전이에게 식당을 맡겨놓고, 주방에서 맛만 지키신다.
한편으론, 그 지긋지긋한 일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사니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팔순을 맞아 점심이라도 같이 먹자는 연락을 받았는데, 가게 옆 일식집으로 오란다.
‘진주청국장’은 손님이 많아 편하게 드시지도 못하지만, 외식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것도 전 가족이 모이는 팔순잔치가 아니라, 남매만 모이는 오붓한 자리였다.
형님 조정호와 동생 조창호, 조카 조아라, 동지 정영신씨 등 여섯 명이 함께 한 것이다.
작은 누님은 몇년 전 돌아가셨으나, 여동생 조옥희가 급한 일이 생겨 오지 못했다.






평소에는 만나기 힘든 형님께서 나와 반갑기 그지없었는데, 지난 년 말 퇴임 하셨단다.
팔순을 이년 남겨두고 일손을 놓았지만, 시원섭섭한 모양이시다.
재벌총수 댁 집사로서 남의 살림을 도맡아 살다보니, 식당 누님처럼 변변히 노는 날도 없었다.






누님과 형님께선 돈 걱정 안하고 살지 모르지만, 내가 볼 때는 불행하기 짝이 없었다.
좋아하는 취미생활 한번 즐기지 못한 채, 평생 돈에 끌려 다닌 게 아니던가?
동생 창호는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며 산전수전 다 겪었으나,
이젠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생활에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사실, 우리가족은 노는 데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들이다.
형님은 젊은 시절엔 한량이었다. 사교 춤과 당구 등 재주가 다양한 분이라 말씀드렸다.
“이젠 ‘완 투 쓰리 카바레”도 가시고, 당구장도 열심히 다니며 즐겁게 사시라”고...






아직도 철이 안 들었다고 탓할지 모르지만, 돈은 없어도 내가 제일 잘 살았다.
나처럼 꼴리는 대로 살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 아니던가?
가족을 고생시킨 무책임은 면할 수 없지만, 오히려 돈의 노예가 되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팔순을 축하하는 술잔을 들며 나눈 대화는 요즘 사는 이야기는 뒷전이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추억을 먹고 산다 듯이, 다들 옛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어린 시절의 잊을 수 없는 사연들이 줄줄이 나왔는데,
한국전쟁 때 불바다가 되었던 고향, 영산 이야기도 나왔다.






낙동강전투의 마지막 방어지역인 영산은 피비린내 나는 전장의 한 복판이었다.
내 나이 세 살 때라 기억이 흐릿하지만, 딱 한 가지만 생각이 또렷하다.
남산 밑의 미나리꽝을 지나가는데, 총 맞은 군인이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물 달라 통사정하고,
옆에 선 군인은 그냥 가라며 총부리로 위협했다.





등에 업힌 나를 돌려 업고 도망치던 엄마의 거친 숨소리는 아직도 생생하다.
왜 위험한 전쟁터를 지나가야 했는지 이해되지 않았는데. 가게 된 사연을 누님께서 들려주었다.






식구들은 모두 안전한 곳으로 피난하였는데,
동네가 불바다가 되는 바람에 집에 숨겨 둔 패물이 걱정되어 가셨다는 것이다.
당시 도정공장을 운영할 때인데, 쓰임세가 큰 아버지 몰래 자식들을 위해
패물을 사모아 두었다는데, 그게 걱정되어 가지러 가셨다는 것이다.
좌우지간, 그 놈의 돈이 무엇이기에 목숨까지 걸어야 했는지 모르겠다.






다음에 시간나면 녹음기 챙겨 다시 와야겠다.
누님 돌아가시면,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가족사는 영원히 파 뭍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젠 형님이 한가해졌으니, 정선 만지산에 계신 엄마 산소에서 봄놀이 한번 하자고 제안했다.
가족과의 봄놀이도 이제 몇 번이나 더 할 수 있겠는가?






술이 얼큰하여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차 한 잔 하러 ‘진주청국장’으로 몰려갔다‘
식당은 바쁜 시간이 끝나 한가했고, 조카 홍전이도 한 숨 돌리고 있었다.
이제 오십에 가까운 조카가 시집도 가지 않은 채, 일에 파묻혀 사는 것을 보니 불쌍했다.
술김에, 늙은 외삼촌과 결혼하자는 흰소리를 지껄이며 낄낄대기도 했다.






누님께선 틈만 나면 맥주 드시는 것이 낙인지라 식사에 소홀한 것 같았다.
우야튼, 밥 잘 챙겨 드시고, 백세까지 팔팔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노세 노세 젊어 노세”가 아니라 “노세 노세 늙어 노세”로 노래도 바꾸자.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자동차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베터리가 방전된 것 같았으나, 산골짜기까지 출동 서비스를 부르기가 민망했다.


울 엄마 묘지 빌려 준 최영규 댁에 추석 선물 하나 전하러 갔다.

윗만지와 아랫만지는 이웃이지만, 산굽이를 돌아야 해, 걸어가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


간 김에 벌초하러 산소에 들렸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혹시나 걱정되어 마당에 말리던 고추를 걷어놓고 온 게 천만 다행이었다.

집에 도착하니 비에 젖은 내모양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최영규씨에게 서울로 떠날 때, 베터리 좀 연결하자고 부탁해 두고 왔으나,

쏟아지는 소낙비로 차마 부를 수가 없었다.


하늘만 쳐다보며 기다리다, 혹시나 하고 다시 시동을 걸어 본 것이다.

수차례 반복했더니,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부르릉” 시동이 걸려 주었다.

“얼시구나”하고 쉬지도 않고 냅다 달려왔다.

서울의 정비공장에 갔더니, 베터리를 교체하라지만, 난 어디서 방전되는지 좀 찾아달라고 했다.

방전되는 곳을 찾으려면, 시간은 걸리는데 돈이 되지 않으니 자꾸 교체를 권한다.

하는 수 없이 베터리를 교체하고, 아내 정영신의 전시 때 팔린 작품을 전해주러 인사동에 나갔다,

그런데, 이젠 차 문의 유리가 올라가지 않는 것이다.

터널통과하며 매연 마시는 것이야 참을 수 있으나 만약 비라도 쏟아진다면 낭패다.







인사동 ‘허리우드’에서 건축가 임태종씨를 만나 작품 두 점을 건네주었다.

어둠이 몰려오기 전에 정비소로 가야 하지만, 차 한 잔 하자는 임태종씨의 권유를 뿌리칠 수 없었다.

‘아라아트’와 관련되어 건축사무소 문을 닫는 불상사까지 겪은 그인지라.

‘아라아트’ 경매낙찰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아쉬움을 달랬다.


그와 헤어져 나오다 몇일 전 어머니 상을 당한 공윤희씨도 만났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고향에 다녀왔다는데, 얼굴이 수척해 보였다.

상대를 배려하는 그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건 아니다 싶다.

언제 위로주라도 한 잔 하기로 하고 헤어졌는데, 이번엔 퇴근하는 전인미씨를 만난 것이다,

여자들이 만나 이야기 나누기 시작하면 길어질까 걱정되었다.

결국 차문 수리는 포기했으나, 오다 보니 불 켜놓고 일하는 정비공장이 하나 있었다.

부품이 없어 안 된다지만 유리만 끌어 올렸는데, 이번엔 형수가 대장암수술을 받았다는 전갈이 왔다.

약수역에서 누님과 동생을 만나 신당동 '송도병원'으로 향했다.

아직 정확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지만, 좋은 결과가 있길 기원했다.

오랜만에 가족들을 만나 형수에 대한 옛 이야기 나누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어제가 울 엄마 제삿날이다.
아버지 제사 지낸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제사다.
‘가난한 집 제삿날 돌아오듯’한다는 옛 속담이 실감난다.

마누라는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독감에 끙끙댄다.
죽어도 제사상은 차려야하니, 지켜보는 내가 더 죽을 맛이다.
없는 돈에 장보아, 찌지고 뽁아 상 차렸다.
누님과 동생까지 찾아와, 옛이야기 비벼 잘 먹었다.

사실, 힘들게 장만한 음식이지만, 귀신이 먹는 게 아니라 사람이 다 먹는다.
먹고 남은 음식이면, 닷새 동안은 매끼마다 제삿밥을 먹을 수 있다.
제삿밥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한동안 반찬걱정 안 해도 된다.

선조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옛날에는 살기 힘들었으니, 골고루 영양보충 하기는커녕
끼니를 거르는 게 비일비재 했을 것이다.
그래서 없는 사람들은 건과 같은 제수는 다음에 쓰고 싶어도, 못쓰게 했다.
한 번 올린 제수는 다시 쓰지 않는다고 못 박아 두었으니, 먹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삿날이라도, 골고루 잘 먹으라는 배려였다.

그런데, 그 좋은 미덕을 미신으로 모는 서양귀신들로 풍비박산 직전이다.
이 제사도 서양귀신에 홀린 형님께서 내 쳐, 내가 이어 받은 것이다.
가족들도 남북 갈라지듯, 제삿날에 다 만날 수가 없게 되었다.
한마디로, 좆도 모르는 것들이 탱자탱자 하는 것이다.


사진,글 / 조문호

 

 

지난 29일은 울 엄마 제삿날이었다.

 

꼭 가봐야 할 전시가 있어 정선에서 지내야 할 제사상을 서울로 옮겨 와 버렸다.

산소에 벌초할 때, 서울 나들이 한 번 하시라며 용서는 구했으나, 정말 불효막심한 놈이다.

 

제사를 서울서 지낸다고 연락했더니, 서울 사시는 누님과  일산 사는 동생은 더 좋아했다.

제사 때마다 거리가 멀어 못오고 주말을 이용해 산소에나 들렸는데,

이번에는 함께 제사를 지낼 수 있었으니 모두들 반가웠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인천사시는 형님댁에서 제사를 지내 왔으나 형님께서 교회에 나가며 

정선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 모두들 제사를 멀리하게 되었다.

누님과 나만 주님의 은총을 받지 않았을 뿐 모든 식구들이 크리스찬이 된 것이다.

 

그 이후로는 집안에 길흉사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그의 가족들을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오랜만에 함께 모여 옛이야기들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니, 모두들 행복해 했다.

교회나가는 식구들은 기도하면되니, 앞으로도 제사를 서울서 지내자는 누님의 제안에 따르기로 합의했다.

 

이번엔 누님 조영희, 동생 조창호, 형수 김순남, 조카 조영란이만 왔으나 다음엔 여동생도 오겠단다.

사실 제사는 망자를 위해서라기보다 살아 남은 가족들을 위한 자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 년에 한 번도 만나기 어려운 무심한 세상에 기제사 두 번에 명절 제사까지 합하면

네 번이나 만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부모님을 기릴 수 있으니 저승에 계신 부모님도 오히려 좋아하실 걸로 생각한다.

살아평생을 자식만 위해 사셨으니, 어찌 먼 길이라 마다 하시겠는가.

그게 부모 마음인데...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