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태화산 심산유곡에 둥지 튼 마곡사

백제 무왕(643)때 신라의 자장율사가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고대 한국불교와 종교적 의례의 중심사찰로

대광보전, 대웅보전, 영산전, 오층석탑 등 많은 역사적 유적이 있다.

 

임진왜란 때 승병의 집결지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나, 정조 9(1785)에 다시 지었다.

 

특히 신록은 마곡사, 가을 단풍은 갑사로 불릴 정도로,

마곡사의 봄이 아름다워 春麻谷(춘마곡)으로 불리기도 했다.

 

절 이름에 삼베 자가 들어간 것으로 보아,

본래 대마를 재배한 계곡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지난 6월 중순 무렵, 정동지와 함께 마곡사를 찾아갔다.

봄을 놓친 초여름에야 마곡사를 찾게 되었는데,

그마저 꾸물대다 한여름이 되어서야 소개하게 되었다.

 

요즘은 보은 법주사와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와 함께 세계문화유산 7대 산사로 지정되어 유명세를 더하고 있다.

 

마곡사는 불화를 그리는 스님을 대대로 배출한 사찰이기도 하다.

금호(錦湖), 보응(普應), 일섭(日燮)으로 계보가 이어지는,

화승들을 추모하는 불모다례제도 매년 열린다.

 

그리고 마곡사는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선생과도 깊은 인연이 있다.

김구선생이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일본인 장교를 죽이고 은거하던 중

원종이라는 법명으로 출가 수도할 때 마곡사 백련암에 머물렀다.

 

산문으로 들어가려면 정문 격인 해탈문을 거쳐야 한다.

대개 일주문과 천왕문을 거쳐 불이문이나 해탈문으로 들어서는 것이 상례이나,

일주문이 없는 마곡사는 해탈문이 첫 관문인 셈이다.

 

일주문을 지나 부처의 세계에 들어서는 것에 비해,

해탈문을 통과함으로써 부처의 세계 즉 법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해탈문은 정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기둥과 기둥 사이는 모두 판장벽으로 막고 정면 중앙을 개방하여 통로로 사용한다.

 

양편에는 주먹을 쥔 금강역사상과 보현 및 문수동자상을 봉안하고 있다.

해탈문을 지나니 작은 돌탑을 쌓아놓은 소담한 정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마곡사는 계류를 사이에 두고 남원과 북원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남원은 작은 마당을 중심으로 영산전과 수행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고,

북원은 주불전인 대광보전을 중심으로, 위에는 대웅보전

마당에는 14세기에 건립된 티베트식 상륜부를 갖춘 오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제일 먼저 지장전, 시왕전이라고도 부르는 명부전을 만나게 된다.

1939년 건립된 명부전은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자형의 불단을 놓고 그 위에 시왕을 배치하였다.

 

남원의 흥성루는 정면 5, 측면 3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누각의 의미를 갖지만, 마루바닥이 높지 않은 구조라 누각이라고 볼 수 없다.

앞면에는 장판문을 달아 외부와 차단시켰으나 영산전 맞은편은 개방되어,

사찰 행사 때 강당으로 활용하고 있다.

 

홍성루와 마주한 영산전마곡사에 남아 있는 건축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로, 빛바랜 단청이 오래된 절집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영산전은 정면 5칸에 측면 3칸의 배흘림기둥을 사용한 주심포 맞배지붕으로,

고려 건축양식이 잘 드러난 소박하면서도 친근한 느낌을 주는 목조 건물이다.

영산전 현판은 세조가 김시습을 만나기 위해서 왔다 남긴 필적이란다.

 

불단에는 과거칠불을 중심으로 비바시불, 비사부불, 구나함모니불, 석가모니불, 가섭불, 구류손불,

시기불이 배열되었고, 석가모니불을 제외한 나머지는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거나,

한 손을 어깨 위로 올리고 있다. 뒤로는 1000분의 부처가 봉안되었다.

 

영산전은 본래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하던 당시의 광경인 영산회상을 재현한 것이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10대 제자를 모시거나 혹은 16나한이나 500나한을 모시기도 하는데,

마곡사의 영산전은 한가운데 과거칠불을, 그 주위에 1000분의 부처님을 모신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영산전 내부 우측 벽면에는 신중탱화가 걸려있다.

 

마곡사의 중심 법당인 대광보전 뒤로 또 하나의 대웅보전이 있는 북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대광보전 마당에는 오층석탑이 있고, 좌측은 심검당 우측은 관세음보살 입상이 배치되어 있다.

대광보전은 마곡사의 중심 법당답게 대웅보전보다 훨씬 당당하고 안정적이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대개의 본존인 비로자나불이 현판이 걸린 정면을 바라보는데 비해

대광보전 본존불은 서쪽을 등지고 동쪽을 향해 봉안되었다.

 

그리고 비로자나불 뒤에는 후불탱화 영산회상도가 있고,

비로자나불 뒤 벽면에는 관세음보살 벽화 백의수월관음도가 봉안되어 있다.

이처럼 벽면을 가득 메우는 관세음보살상은 고려 말기에 성행한 형식으로,

고려시대 전통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절 마당에 우뚝 서 있는 오층석탑풍마동다보탑으로도 불린다.

이 탑은 탑 전체 무게를 받쳐주는 기단을 2단으로 쌓고, 그 위로 5층의 탑신을 올린 후

머리장식을 올린 모습이다. 길쭉해 안정감은 적으나 풍채가 당당하다.

 

탑신이 8.7m인 이 탑의 1층 몸돌 남쪽 면에는 자물쇠 모양이,

2층 몸돌 네 면에는 부처가 새겨졌고,

상륜부는 금속으로 된 풍마동이 장식된 이색적인 탑이다.

 

고려 말에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라마교 양식의 탑으로

한국, 인도, 중국을 통 털어 3개밖에 없는 귀중한 탑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 무너져 탑 안의 보물들이 대부분 도난당했는데,

1972년 수리할 때 동제 은입사향로와 문고리가 추가로 발견되었다.

 

그 위에 자리 잡은 대웅보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을 모셨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구조를 다포 양식이라 하는데,

기둥 위뿐만 아니라 밖으로 뻗쳐 나온 부재 위에 연꽃을 조각한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 이후의 장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창호 문살은 세 가지 꽃살 무늬로 장식했다.

 

대웅보전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효종 2(1651) 각순대사에 의해 중수되었으나,

그 후 또 불이 나 다시 지었다고 한다.

 

1층은 정면이 5, 측면이 4칸이고, 2층은 정면이 3칸 측면이 2칸 규모의 중층 건물이다.

이런 형식의 중층 건물은 화엄사 각황전이나 부여의 무량사 극락전에서 볼 수 있는데,

중층 건물을 올리면서 처마가 깊어지므로 추녀마루 끝 네 곳에 활주를 받쳐 놓았다.

 

삼존불을 모신 법당에는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이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하고 있고,

좌우에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이 협시하고 있다.

그리고 삼세불상 뒤에는 석가모니불의 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 약사여래불의 후불탱화인

약사회상도 그리고 아미타불의 후불탱화인 아미타회상도가 걸려 있다.

우물 정() 자형에 연꽃무늬로 조각된 삼존불 위의 천정 장식도 돋보인다.

 

최근에 조성된 범종루에는 범종을 비롯하여 법고와 목어 및 운판 등의 사물을 비치하였다.

 

그리고 마곡사 주변에 솔바람길이라는 산책로도 조성되어 있었다.

 

마곡사에서 빠져나와 공주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 고분군으로 갔다.

무령왕릉은 송산리 제6호 벽돌무덤 북쪽의 나지막한 구릉지대 였다.

 

백제 돌방무덤이 주종을 이루는 송산리 고분군은

당시 중국 지배계층 무덤의 형식을 그대로 모방하여 축조하였다고 한다.

 

무령왕릉은 발굴조사 때 무덤 안에서 주인공을 알려주는 묘지석이 발견되어

백제 제25대 무령왕 무덤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왕릉으로 발견된 것도 매우 우연한 기회였다고 한다.

 

19717월 제6호 벽돌무덤 내부로 스며드는 유입수를 막기 위해

땅을 파면서 입구가 드러나 무령왕릉을 조사하게 되었다는데,

 도굴과 같은 인위적 피해는 물론 붕괴 등의 피해도 없이 완전하게 보존된 상태였다고 한다.

 

지석에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던 계묘년 57일에 붕어하시고,

을사년 812일에 대묘에 예를 갖춰 안장하여 기록한다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이로서 무령왕은 5235월에 사망하여 5258월에 왕릉에 안치되었고,

왕비는 52611월에 사망하여 5292월에 안치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무령왕릉은 무덤의 주인공이 정확하게 밝혀진 몇 안 되는 무덤으로,

피장자가 백제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훌륭한 군주라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무덤 안에서는 금으로 만든 관장식, 용과 봉황이 장식된 큰 칼,

글씨가 새겨진 팔찌 등 모두 4,600여 점에 이르는 다량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그 중 12종목 17건이 국보로 지정될 만큼 소중할 뿐만 아니라,

절대연대가 확인된 유물로 백제사는 물론 한국 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벽돌무덤이라는 중국 남조계통의 무덤 형식과 중국제 도자기, 일본산 금송을 사용한

관재 등의 존재를 통하여 당시 중국이나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전개한 것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사후세계에 대한 생각과 죽은 이에 대한

엄격한 의례가 담겨있어, 매장된 유물을 통해 그 시대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쾌거였다.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부여군 홍산면에서 열리는 홍산장에 들렸다.

 

몇 년 전만해도 흥청대던 홍산장이 이제 파장처럼 한적했다.

금방 밭에서 수확해 온 야채가 곳곳에 펼쳐져 있으나

손님이라고는 손으로 셀 정도였다.

 

손님도 없는 뻥 튀기 가게에는 뭔가 준비 할것을 빼곡이 적어놓았다.

 

휴게실로 활용하는 공간은 마치 연극무대처럼 빈 의자만 진열되어 있었다.

 

사라져가는 오일장의 안타까운 실상을 목도한 것이다.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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