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대선 벽보판을 지켜보고 있다, -서울, 동자동-



선거철이 되니 전국 똥파리들이 왕왕거려 정신이 하나도 없다.

투표는 해야겠지만, 선거 끝날 때까지 조용한 곳으로 가야겠다.


이번 총선은 절대 정당보다 사람 위주로 후보를 뽑자.

이제 패거리 정치는 끝낼 때도 되었다.


그렇다면 비례대표는 어떻게 해야할까?

적폐의 본당인 통털어 잡당과 더불어 망할 당 외에 선택할 당이 없는가?
그렇다고 철들지 않은 철수당을 선택할 수야 없지 않은가?

스스로 비례연동형 만들어 놓고, 너도 나도 어거지당 만들어,
패거리 조장하며 국고나 갉아먹는 인간들이 어찌 국회의원이냐? 국개의원이지..
이런 인간들은 더 이상 정치판에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돌아가는 판세를 보니 더불어 압승은 기정사실이다.
이제 거대 여당의 전횡을 견제하며, 협력 발전하는 참된 야당이 필요하다.
의석 잃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원칙 지킨 정의당이 그래도 희망이다.
이제 정치판 좀 새롭게 짰으면 좋겠다.



위 사진은 돌아가신 최민식선생의 자갈치사진이다.
아직도 힘 있는 놈들이 힘없는 사람을 억압하는가?


글 / 조문호










지난 13일 아침,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울먹이는 햇님의 전화를 받았다.

병세가 위중한 상태에서 한 달 넘게 버티어 잠시 잊고 있었는데, 기어이 떠나신 것이다.



 


서울서북시립병원’ 병실에는 햇님 엄마의 낮은 통곡이 처절하게 깔리고 있었다.

엄마 미안하데이! 그 흔한 꽃구경 한 번 못시켜주고, 맛있는 거 한 번 못해주면서, 지랄 같은 성질머리로 맨날 욕만 끌어 퍼부엇제.

새벽 네시만 되면 햇님이 잘 되라고 기도했는데이제 그 기도는 누가 하라고 가버렸노? 흐흐흐~"





불효자가 더 슬피운다는 말처럼, 그 울음은 한 여인의 한 맺힌 통곡이었다.

차마 눈을 감지 못한 채 숨을 거두어, 지켜보는 햇님도 연신 눈물을 훔쳐내고 있었다.

밖에는 남지현이가 첫 돌도 지나지 않은 손녀 하랑이를 안고, 햇님이와 교대로 병실을 드나들었다.



 


외할머니 연세가 올해로 아흔 셋이고, 큰 고통없이 돌아가셨으니 호상임은 틀림없었다.

더구나 고난의 삶을 마감하는 죽음 자체를 축복으로 여기는 내가, 이토록 슬픈 것은 왜일까?

아마 버림받아 힘겹게 살아 온 두 모녀의 기구한 운명 때문일 것이다.






슬픔도 잠깐일 뿐, 눈앞에 닥친 장례절차와 비용이 더 걱정되었다.

'정의당' 은평지역 일에다 지역봉사에 매달려 벌이가 신통찮아,

틈틈이 공사판 노가다 일이라도 찾아야 하는 어려운 사정을 잘 알기 때문이다.

장례 비용이 싸다는 서울서북시립병원장례식장 조차 수리한다는 명목으로 문 닫은 지 오래되었단다.

연고자 없는 쪽방 빈민처럼, 화장터로 직행하는 방법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건 아닌듯 했다.



 


대개의 경조사 경비조달은 서로 돌아가며 도와주는 축의금이나 조의금에 의존하지 않던가. 

알리는 것이 구걸하는 것 같아, 형편이 어렵지 않던 친 어머니 초상은 주변에 알리지도 않았지만,

막상 형펀이 어려운 햇님 외할머니 장례는 알리고 싶어도 알릴 수가 없었다. 


30여년 전 햇님이 엄마와 이혼한 사이라 가족관계가 끊긴 것이다.

획일화된 장례절차도 개선할 점이 많지만, 가족제도의 모순에 직면하기도 했는데,

아무튼,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몸뚱이 하나 뿐이었다.


그리고 햇님 엄마의 무데뽀 성격에 친정은 물론 주변사람들이 모두 등을 돌려 알릴 곳도 없단다.

오죽하면 햇님 엄마를 잘아는 오랜 친구들이 고외수씨를 고악질 여사라고 불렀겠는가?



 


국화 한 송이 없는 간소한 장례지만, '은평장례식장' 장례비도 만만치 않았다.

더구나 문상객 한 사람 없는 빈소를 지키고 있으려니, 애가 터졌다.


돈이라고는 사정을 잘 아는 사진동지 정영신씨가 오십 만원 보태 주었고

햇님 엄마 외가 오빠가 준 오십 만원이 전부였다.

다행스럽게도 '정의당' 당원들이 마지막 날 늦게 몰려 왔는데, 그 조의금이 이백만 원이나 되었단다. ,

큰 부담을 줄여 준 동지들이 고맙기 그지 없었다.


장례비 오백만원 중 부족한 돈은 햇님이 카드로 막았으나, 늘어난 빚이 걱정되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2일장 같은 간소한 장례절차도 생겨야 할 것 같았다.



 



이틀 날 아침 6'백제화장터'로 옮겼으나, 납골당 비용도 걱정이었다.

정선에 수목장 하자는 내 뜻이 받아져 돈은 들지 않았으나, 먼길이라 어려움도 따랐다.

하필이면 정선 만지산에 도착할 즈음에는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십 팔년 전에도 폭우가 쏟아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승용차가 계곡에 추락해 가족이 다치기도 하고, 질퍽대는 땅에서 치룬 장사는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공교롭게도 그 어머니 제사가 바로 오늘인데, 같은 날 치루는 수목장도 만만치 않았다.

우의를 입고 땅을 팠으나, 자세가 좋지 않았던지 허리를 삐꺽한 것이다.

은행나무 밑에 나무상자를 파묻고는 비닐로 덮어 비를 피하게 해두었다.

내일 가족들이 몰려오지만햇님 더 머물 형편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수목장은 30일 이내에 군청에 신고해야 한다는데, 장소가 임야라야 된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

매장한 곳이 농지라 산소로 이장해야 할 처지가 되어버렸는데, 삐꺽한 허리의 통증은 시간이 흐를수록 아팠다.

앉거나 누우면 괜찮으나, 서있거나 걸어 다니면 죽을 맛이었다.


어머니 제사를 간소하게 지낸 후 자정이 지나 겨우 잠 들었는데느닷없는 전화가 걸려왔다.

모르는 전화번호였는데, 누가 이 깊은 밤에 전화를 거는 것일까?

전화번호를 바꾸어 아는 사람이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인데 말이다.

다시 전화가 울렸으나 받지 않았는데, 그 뒤로 잠이 오질 않았다.





간신히 한 두 시간 눈 붙이고 일하러 나가니, 그 때 또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도대체 시도 때도 없이 거는 전화가 누구인지 궁금해, 안 받을 전화를 받았더니 햇님 엄마였다.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아냈는지 모르지만, 전화 건 사연이 기가 막혔다.

화장하는 걸 두 눈으로 보고도 "시신 묻을 때 빠트린 것이 있다며 추가로 유품을 묻을 수 없냐?"는 것이다.

하도 기가 막혀 "백제화장터에서 화장하는 걸 직접 보지 않았냐?"고 냅다 소리 질렀더니,

그때 사 생각났는지 갑자기 통곡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치매 증세가 심해진 스스로를 한탄하는 울음이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허리가 아파 앉아서 땅을 파고, 뿔뿔 기어다니며 벌초하였더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낫까지 들지 않아 잡초를 베는 것이 아니라 거의 뜯는 수준이었다.

아침 여섯시에 시작하여 정오 무렵 끝났으니, 한 두 시간에 끝낼 일을 무려 여섯 시간이나 걸린 것이다.

마치 시간을 맞춘 듯 인천의 형님가족이 산소에 도착했는데, 흙과 땀이 범벅된 내 몰골을 보고 기급을 한 것이다.



 


엄마! 오늘 오빠 좆 됐소” 

농담을 지껄여 다들 웃었지만, 너무 힘들었다.

형님이 준비해 온 음식을 차려놓고, 햇님 외할머니와 잘 지내라는 부탁을 드리기도 했다.

점심 먹으러 읍내 나가자는 형님 말을 사양한 채 만지산에 남았는데,

아픈 몸을 이끌고 상추와 고추 따느라 또 다시 두 시간 남짓 씨름한 것이다.





몸을 씻고 떠날 준비를 하니, 그때 사 집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정선에 머문 이틀 내내 카메라 한 번 꺼낼 겨를이 없었는데,

마당 밑에는 도라지꽃이 만발하고 언덕에는 산딸기가 주렁주렁 달렸다.



 


꽃도 딸기도 다 싫고, 한시라도 빨리 정선을 떠나고 싶었다.

빨리 가서 눕고 싶기도 하지만, 가만히 앉아 운전하는 자세가 그 중 편하기 때문이다.


연극처럼 파란만장한 인생, 이제 그만 잠들고 싶다.

 

사진, / 조문호












 





고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의 추모문화제가 49제를 이틀 앞둔
지난 7일 저녁7시, 국회 본관 앞 잔디 광장에서 열렸다.

하늘마저 가시는 길을 밝히듯 붉게 물들였다.






‘그대가 바라보는 곳을 향해, 우리는 걸어갑니다’라는 제목으로 열린
이 날 추모문화제에는 정의당 이정미 대표와 심상정, 윤소하, 김종대,
추혜선의원,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박영선, 남인순, 맹성규 의원,
민주평화당 장병완 원내대표, 권영길, 강기갑 전 의원,
고인의 부인 김지선씨와 유족 등 17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사회를 맡은 이금희 아나운서는 무대에 올라 “이런 자리에서 사회를 보게 될 줄 몰랐다.
그러나 여전히 쉽지 않다”며 눈물을 글썽여 주변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국회 환경미화원 김명숙씨는 “의원님은 우리를 투명 인간이 아닌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대우해주셨다”며 여성의 날에 늘 꽃을 선물하던 기억을 회고 했다.






노 전 의원의 오랜 정치적 동지였던 심상정 의원은 “아직도 실감 나지 않는다.
노 대표님 떠난 자리에, 마치 부재가 존재를 입증하듯
더 그윽하고 진한 노회찬의 향기가 가득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우리 대표님과 우리가 사랑했던 것은 이념이 아니고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이라며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 말했다.
그리고 "유능한 정당으로 도약해서 우리 국민들에게 정치가 불신의 대상이 아니라
내 삶을 바꾸는 희망이 되는 사회를 꼭 만들어가겠다"고 약속했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거대권력에 굴하지 않고 더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달라는 뜻,
사회적 약자들을 더 따뜻하게 보듬는 진보 정치가 되어달라는 뜻,
더 크고 강한 정당이 되어달라는 그 뜻을 반드시 이루겠다"고 말했다. 




 


노회찬전의원이 떠난 후로 정의당에 만명의 신입당원이 입당하였다고 한다.
그 중 한 명인 홍순태 신입당원은 당비라도 보태려는 심정으로 입당했다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제주에서 올라온 손세실리아 시인은 “추모를 추모하다”라는 시로 고인을 추모했고,
밴드 노랑, 416합창단, 가수 전인권, M&P챔버오케스트라가 추모공연을 했다.






두 시간에 걸쳐 진행된 추모문화재를 지켜보는 내내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처음엔 고인의 빈 자리를 어떻게 매울 수 있을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으나,
희망의 불빛이 곳곳에서 비치기 시작했다.






입당 행렬에 발맞추어 ‘노회찬 재단’도 설립된단다.
“노회찬이 했던 정치를 '노회찬 정치'로 되살리려는, 노회찬의 삶과 꿈을 이어갈

제2, 제3의 노회찬을 양성하고 지원하겠다"는 ‘노회찬 재단' 설립 제안이

고 노회찬대표 49제에서 발표되었다.






추모문화제를 마치고 돌아오는 내내 심상정의원의 말이 머리에 맴돌았다.
정치적 불신이 정점에 달한 오늘 날, 국민들에게 믿음을 주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정의당이 진보에 앞서 인간적인 정당이 되겠다.”는 말은
고인의 정치철학이기도 하지만, 정의당의 지향점이라 생각된다.






“노회찬 의원님! 부디 편안히 영면하시길 바랍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조햇님이가 남지현에게 장가가고, 남지현이가 조햇님에게 시집왔다.

그 것도 자식까지 잉태하여 울리는 빵빠레인데, 내 복에 이런 날이 올 줄 어찌 알았겠나?




    


햇님아! 그동안 엄마와 병든 외할매 모시고 사느라 고생했다.

짐 떠 넘긴 죄로 마음 한 구석엔 말 못할 아픔이 항상 응어리졌다.

셋방에서 가난하게 살지만, 올 곧게 살아주어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가난이 욕이 아니라 덕이라는 변명 같은 말을 다시 한다.

만약 우리가 돈이 많았다면, 그 중독성에서 과연 헤어날 수 있었겠나?

돈이 인간성을 죽이는 원죄라는 걸 너도 잘 알잖아.



 


결혼식이 있던 25일은 마음이 들떠 일찍부터 설쳤다.

기념사진 찍는다기에, 오전 아홉시에 '하림각'으로 달려갔다.



 


사진 촬영하는 신부를 지켜보니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았다.

지난 번 선거유세장의 첫 만남에 그 사람 됨됨은 짐작했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선녀였다니...



 


조씨 집안에 호박이 넝쿨 채 굴러들어 온 경사가 아니겠는가.

더욱 믿음직한 것은 험난한 현실에 뛰어들어 바르게 살았다는 점이다.

어찌 햇님이와 천생연분이란 생각이 들지 않겠나?.



 


햇님이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칠십 나이에 지팡이 짚은 초라한 모습에서 지난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그 성질머리에 식구들마저 등진 채, 오로지 자식 하나 보고 살아온 비련의 여인이 아니던가?

호랑이 이빨같은 깡다구는 다 어쩌고, 이렇게 양처럼 온순해졌나?





오직 햇님이 만이 그 성질 다 받아주며 모셨는데,

이제 자식마저 떠나 보내게 되었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나?

그래도 신혼 방이 좁아 햇님이 짐을 가져갈 수 없다니 천만다행이다.

집에 들릴 때마다 따뜻하게 손잡아 줘라.



 


시간이 다가오니 하객이 한 사람 두 사람 모여들기 시작했다.

멀리 계시는 분들이 더 일찍 왔는데, 다시 만날 수 없는 분들 같았다.

그 사연 사연은 뒤로하고 부지런히 그들 모습을 카메라에 주워 담았다.



 


다들 고맙고, 고맙습니다.

가난한 처지라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살았건만, 잊지 않고 찾아 준 그 정에 가슴이 찡하다.

예식장을 가득 메운 친지들의 고마움이 한편으론 짐처럼 어깨를 짓누른다.

뒤늦게 알았지만, 하객이 400여명이 넘었다니, 이 어찌 부담이 아니겠는가?



 


한편으론 정의당 전당대회 같았다.

주례를 맡은 심상정의원을 비롯하여 천호선, 김재남, 박원석, 양경규, 김종민씨 등 알만한 분들은 다 보였다.

한 때는 당원이었으나. 지금은 쓴 소리를 거침없이 하는 논객 이광수교수까지 부산에서 올라 오셨다.

고향 친구를 비롯하여 인사동을 사랑하는 예술가들도 많이 참석하셨다.



 


햇님을 항상 도와주는 박재송씨의 사회로 심상정의원이 주례사를 했다.

이날 심상정의원의 주례사는 부부가 일심동체라는 말은 잘못되었다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심이체임을 인정하며 뜻이 다를 땐 서로 듣고, 같을 때는 합심하라고 했다. 

정의당과 사회를 위해 일하며 더불어 건강한 가정을 만들라고 말했다.





신부가 던진 부케는 유동호위원장이 받았으나, 거리가 멀어 사진을 찍지 못했다.

예식 장면을 기록할 수 없어 아쉬웠지만, 앉은 자리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 한 두컷 찍었다.





또 하나 귀 똥찬 이벤트는 정의당 합창단의 노래 노란샤스 입은 사나이였다.

노란 셔츠 입은 말없는 그 사내가 어쩐지 나는 좋아”로 시작되는 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졌다.

분명 정의당의 히트곡이 틀림없었다.





정치를 떠나 인간적인 만남의 자리이니, 이 얼마나 뜻 깊은 자리인가?

정으로 뭉쳐 정의로운 평등사회를 만드는 것이 정의당의 존재이유지만,

정의당이 뜨지 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했다.



 


결혼식과 오찬이 끝난 후, 햇님이 엄마를 차에 태워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햇님이 없는 빈집이 얼마나 허전할까 걱정스러웠으나,

강아지 밥 챙겨 줄 걱정 하는 것 보니, 정 붙일 곳이라도 있어 다행이다 싶다,

옛날엔 짐승을 그토록 싫어하더니, 뒤늦게나마 마음을 돌렸구나.

좌우지간, 아들 키우느라 고생많았다.

지팡이 짚고 서서, 떠나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는 눈길이 왠지 측은해 보였다.





부디, 오래살아 정의로운 평등사회가 오는 날은 보고 떠나자


 

사진, / 조문호



















































 

 

 





사고는 사고인데, 분명 경사인 것 같습니다.
아들 햇님이가 지현이에게 장가도 가기 전에 애를 배게 했거던요.
속도위반으로 날아오는 딱지는 내가 다 해결 할 테니, 얼마든지 위반하라고 했습니다.
난, 법을 우습게 아는 범법자 아닙니까.






그래서 결혼을 서둘게 되었다는데, 나야 일타 쌍피라 좋지만 기분은 좀 그렇더라.
이젠 할아버지 소리를 피할 수 없으니, 내 청춘은 우짤고?


사정은 이야기 않고 느닷없이 결혼식 올리겠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부자지간에 돈 한 푼 없는 개털이니까..
아무런 대책도 없이 날짜만 다가오니, 이판사판 부딪혀 볼 수밖에 없다.
설마 산 사람 입에 거미줄 치겠냐마는, 문제는 천오백만원이나 되는 예식비용이다.
잘 못하면 신혼여행은 커녕 신랑신부가 예식장에 잡혀 일할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돈과는 인연이 없으니, 머슴살이를 하더라도 금실 좋게 살며 자식이나 잘 키워라.






지난주에는 한 달에 한번 가는 정선으로 떠났다.
한번 갔다 오는 비용이 오만원이나 들지만,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농작물도 살펴야 하지만, 무덤에 계신 울 엄마한데 자랑 질 할 일이 더 급했다.
머지않아 증손자 보게 되었다는 희소식을 어찌 전하지 않고 견딜소냐.






텃밭에는 고추와 방울도마도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실소를 머금케 하는 것은, 고추밭에서 다산과 번창하는 자손이 연상되는 건 또 뭔가?
능력만 있으면 자손들도 고추나 토마토처럼 주렁주렁 열렸으면 좋으련만,
돈 없이는 엄두도 내지 못할 세상이 아니던가?
세상에 빚지지 않을 만큼, 둘만 낳아 잘 키워주길 부탁한다.






소식 전하려 만지산 산소부터 올라갔다.
속도위반한 아들을 닮았는지, 무덤가엔 성급한 코스모스가 만발했다.
마치 경사를 축하하듯 너울거렸다.
아마 살아 계셨다면, 울 엄마가 제일 좋아하실 거다.

“햇님이가 장가도 가기 전에 애부터 가졌습니더! 벌써 다섯 달이 되었다네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으니, 엄마가 좀 보살펴 주이소!”라며 엎드려 빌었다.
“햇님이와 며느리 될 색시는 와 안 데려왔노?”라고 묻는 것 같아,
“똥 오줌 못 가릴 정도로 바빠 증손자 보면 함께 올 게요”라며 변명했다,






오후엔 고추와 방울토마토를 따고, 잡초 잡는 일에 시간을 다 보냈다.
끼니는 동자동에서 먹던 빵을 챙겨 갔으나, 좀처럼 먹을 틈을 주지 않는다.
옆집의 윤인숙씨가 밥 때 되기가 무섭게 불러대기 때문이다.






밥 얻어먹으러 갔더니, 앞마당 바닥 데크를 넓혀놓았는데, 춤을 추어도 되겠더라.
찾아 온 낯선 손님들에게 닭백숙을 대접하고 있기에 숱 가락 하나 걸친 것이다.
요즘 시골에서는 대마씨 효능을 알아차려 닭백숙에도 넣어 끓이는데, 그 맛이 아주 독특했다.

아마 귤암리 대마농사가 재개될 조짐까지 보였다.






서울은 언제 가냐고 묻길래, 내일 아침에 떠난다니, 아침도 같이 먹고 가란다.
어렵사리 틈내어 정선 갔으면, 넉넉하게 쉬었다 왔으면 좋으련만,
동자동에 꿀단지 숨겨 둔 것도 없는데, 가자마자 떠날 채비부터 한다.
그래도 이번엔 아들 결혼식이 눈앞에 다가 왔다는 핑계거리라도 있다.






그나저나 지인들에게 청첩장을 보내야 하는데, 마치 고시서 보내는 것 같아 망설여진다.
그래서 아주 가까운 몇몇 분만 청첩장을 보내고, 정보만 드린다.





“조햇님, 남지현의 결혼식이 8월25일 오전11시, 종로구 자하문로255(부암동) ‘하림각’에서 있습니다”
부디 잘 살도록 많이들 축하해 주길 바랍니다.






사진, 글 / 조문호


































노회찬 의원 죽음으로 몇 일동안 슬픔의 늪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자괴감에 다음 세상이 있는가의 고민도 따랐다
저 세상에서라도 못 다한 진보정치의 뿌리를 내려, 다 잘사는 평등의 세상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진보정치의 롤 모델이었던 그가 없는 세상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지난 26일 오후 무렵, 연세대학교 대강당에 마련된 고 노회찬 의원 추모식장을 찾았다.

추모 나흘째이자 발인을 하루 앞둔 이날까지 빈소가 마련된

신촌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에는 조문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그 긴 조문 행열에는 잘난 사람 못난 사람의 차별도 없었고, 노동자이건 국회의원이건 다 같이 순서를 기다리며 추모했다.

노 의원에 대한 추모 글이 적힌 노란 포스트잇은 현수막을 넘어 빈소 앞 까지 빼곡했다.

  

추모문화제가 열린 1600석의 대강당 1·2층은 일찌감치 꽉 들어찼다.

강당에 들어오지 못한 많은 분들은 야외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으로 추모제를 지켜봐야 했는데,

여러분 함께 가시겠습니까?” 라는 노회찬 의원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차마 카메라를 들 수 없어, 한 쪽 구석자리에 앉아 추모식을 지켜보았다.

사진을 찍으려면 여기 저기 돌아다녀야 하지만그 날만은 조용히 추모하고 싫었다.



 


유시민씨는 고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었다.

우리에게 다음 생이란 없다고 생각해왔고, 지금도 그렇다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다음 생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 만나는 세상이 더 정의롭고 더 평화로운 곳이면 좋겠습니다.”


추모문화제 사회를 맡은 김미화씨는 제가 의원님께 장미꽃을 받았지만 고맙다는 인사도 못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장미꽃 대신 국화꽃 한 송이를 놓게 됐습니다 울먹였다.

객석에서도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영화배우 박중훈씨는 평소 의원님이 해주신 말씀이

"말 잘하는 사람보다 행동 잘하는 사람을 더 존경하고, 말 잘하는 사람보다는 글 잘 쓰는 사람을 인정한다며,

그중에서도 우위에 있는 사람은 단연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가르쳐주셨다. 제가 노회찬 의원님을 따르고 형님으로 존경했던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 성향이나 생각을 떠나 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고 일생을 던진 그런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대형 스크린에 고 노회찬의원이 나와 말했다.

아들·딸 같은 수많은 직장인이 빌딩을 드나들지만 그 빌딩이 새벽 5시 반에 출근하는 아주머니들에 의해

청소되고 정비되는 것을 의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한 달에 85만원 받는 이분들이야말로 투명인간입니다.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우리는 투명정당이나 다름없다. 정치한다고 목소리 높여 외쳐왔지만, 이분들이 필요로 할 때 이분들 손이 닿는 거리에 우리는 없었다.” 

몸은 죽었지만 정신은 살아 있는 듯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추도사에서 사시사철 낡은 구두를 신고 다닌 대표님이 생각난다며,

살아계실 때 구두 한 켤레 못 사드린 게 마음에 걸린다"며 아쉬워했.


KTX 해고승무원으로 최근 복직이 결정된 김승하씨는 님은 우리를 지키려고 평생 살아오셨으나 우리는 님을 지켜드리지 못했다.

죄송하고 죄송하다. 이제 노회찬 의원님이 남기신 뜻을 세상의 모든 약자들이 모여 펼쳐나가겠다. 님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하겠다.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 옆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셨던 모습 기억하고 그 뜻을 이어 가겠다고 다짐했다.



 


우리 친구들은 노회찬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우리 가슴 속에 고이 묻어 영원히 간직하였습니다.

노회찬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할 것입니다.”며 고인의 중학교 친구 김봉룡씨가 추도사를 읽었다.


그리고 고인의 큰 조카인 노선덕씨가 유가족을 대표해 추모객들에게 인사 드렸다.

한 때 노씨는 고민이 생겨 큰아버지께 조언을 구하러 간 적이 있단다.

"어떤 선택이 최선의 선택인지 알 수 없을 때는 가장 어려운 길을 걸으라고,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하셨다면서 이젠 삶의 이정표가 사라진 것 같다고 말했다.




 

마지막 추모사에 나선 정의당 심상정 의원은 한 동안 마이크 잡은 손이 떨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저는 노회찬 없는 정치,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노회찬의 꿈이 제 꿈이고 우리 정의당의 꿈이고, 우리 국민들이 바라는 정치라고 저는 믿습니다.

끝까지 우리 대표님하고 함께 가겠습니다.”


울먹이는 심상정 의원의 모습에 참았던 울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그만 일어서야 했다.

추모석을 향해 카메라를 겨누었으나, 눈물에 가려 파인더가 보이지 않았다.



 


다들 눈물 흘리며 인간 노회찬을 그리워했고,

초지일관 신념을 지켜온 정치인 노회찬과의 이별을 슬퍼했다.

 

노회찬 의원의 자결은 결코 헛된 죽음이 아니었다.

살신성인의 그 정신은 약자들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넣는 토양을 만들었다.

진보정치가 추구하는 정의로운 사회건설에 기름을 부었다.





이제 부디 세상사 모두 잊으시고, 편안하게 영면하시길 바랍니다.

 

사진, / 조문호













경사는 분명 경산데, 걱정거리하나 생겼다.
아들 햇님이가 장가가겠다며 색시를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지난 번 선거유세장에서 유세 돕는 처녀를 얼핏 보았지만,
막상 마주앉아 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무 능력 없는 애비로서 그 뒷 감당을 어찌해야 할지 막막했다.
못 치는 사기지만, 사기 칠 여유도 없이 밀어붙이면 난 어쩌란 말이냐?






걱정은 다음 문제고, 갑자기 햇님이 엄마와 첫선 볼 때의 40여 년 전으로 필름이 돌아갔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눈도 제대로 마주 치지 못하던 그때의 심정이었다.
새로운 가족이 눈앞에 앉았으니, 어찌 마음 설레지 않겠는가?

일단은 생각지도 못한 복덩이가 굴러왔으니, 표정관리하기 힘들었다.
나이가 40이 넘도록 두 노인 뒤치다꺼리 하느라 장가도 못 갔는데,
그 오랜 소원을 이루게 해 주었으니 얼마나 고맙겠는가?
부모님 근황을 물어보며 찬찬히 살펴보니, 참 예쁘고 착해보였다.
둘 다 착해버리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지도 걱정 되더라.






조햇님과 며느리가 될 남지현은 정의당 동지로서 만난 남다른 인연이다.
어떻게 착한 젊은이들이 정의당의 싸움꾼으로 나섰는지도 이해되지 않았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생각이 가상해 나까지 싸움꾼이 되지 않았던가?
생각이나 지향점이 같아 서로 큰 힘은 되겠으나,
살아가는데 필요한 돈과는 무관한 일이라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그런데, 아들의 구의원 출마에 따른 상흔이 채 가라앉지도 않은 즈음에,
밀어붙이는 결혼이라 미심쩍기까지 했다. 물론 둘 다 나이가 만만찮으니,
마음이야 급하겠지만, 사돈 상견례에 이어 8월25일 오전11시로 날짜까지 잡은 것이다.
혹시 속도위반으로 손자를 가지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7월14일 ‘하림각’에서 상견례가 있다기에, 내 딴엔 때 빼고 광내어 나갔다.
나에게도 드디어 돈이 아니라, 사돈이 생긴 것이다. 사돈!
‘사돈의 팔촌’이라거나 ‘사돈 남 나무란다’는 등 사돈과 관련된
여러 속담도 있듯이 사돈이란 가깝고도 먼 사이란 말일 것이다,
그러나 맺기에 따라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사돈을 만나보니 무척 낯이 익었는데, 오래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분이었다.
바깥사돈은 남선우씨, 안사돈은 김진희씨 였는데,
듣고 보니, 16년 전 영월에서의 천포문학 모임의 자리를 주선한 집 주인이었다.
그 때 단체사진 찍으며 거시기를 꺼내는 기상천외한 퍼포먼스를 했는데,
그 걸 여지 것 기억하고 있었다. 이 일을 어쩔거나..






사람의 인연이란 이렇게 연결될지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 당시는 서울에서의 직장생활을 끝내고 영월로 이사했을 무렵이라는데,
그 이후부터 두 내외가 오손 도손 영월에서 살았다고 하셨다.

그런데, 또 한사람 반가운 이산가족을 만난 것이다.
바로 햇님이 엄마 고외수씨 였다. 이 또한 얼마만이던가?
그 곱던 모습은 다 어디가고 이제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지난한 세월을 이야기하려면, 책 한권은 족히 될 것이다.






싸우기도 많이 싸웠으나, 미운 정이 더 무섭다는 것을 알게 한 여인이었다.
오직 자식하나 보고 악착같이 살았는데, 지금의 마음은 또 어떻겠는가?
처음으로 따뜻하게 손 한번 잡아주고 싶었으나, 쑥스러운지 피했다.
나를 만난 것이 죄가 되어, 그 동안 참 고생 많이 했다.
눈물 마를 날 없었던 비운의 여인이었다.
세상사 다 ‘새옹지마’란 옛말을 떠올리게 했다.






그 날 자하문의 ‘하림각’에서 한 상견례 덕에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었다.
이름도 모르는 음식이 즐비했으나, 단지 반주가 없어 아쉬웠다.
상견례가 끝나고, 다음 달 치룰 하림각 컨벤션센터 결혼식장도 둘러보았다.
너무 호화로운 결혼식장이라 마음에 걸렸다. 사돈만 없었다면 어림없었다.
식사비만 하객 일인당 5만원이라지 않는가?
그 자리에서 손잡고 입장하는 예행연습에다,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주례는 정치적 대모 심상정씨가 맡기로 했단다.






그나저나 자식이 장가간다지만 애비로서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었다.
내 사정을 훤히 알아 바라지도 않겠지만, 최소한의 도움은 주어야 할 것 아닌가?

죽으면 관 값 하려고 통장 바닥에 묻어 놓은 50만원이 전 재산이었다.
보다 못한 정영신씨도 비상금으로 꼬불쳐 둔 백만 원을 내놓았다.
살림은 커녕 요강단지도 못 살 돈이지만, 그 돈을 자식에게 내 밀었다.
안 받겠다고 밀쳤지만, 기어이 손에 쥐어주었다.
신혼여행가서 아름다운 추억 하나 사 오라고...

“부디 잘 살아라.”

사진, 글 / 조문호


























조햇님을 성원, 지지해 주신
많은 분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 송구합니다.

거대정당의 기득권을 뚫고 들어간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닌 모양입니다.
지방선거 정당공천제의 문제점을 재확인했을 뿐입니다.

조햇님 으로서는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더 없는 공부였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앞으로 은평구의회를 더 열심히 감시하며,
잘 못을 바로잡는데, 최선을 다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 번 지켜봐 주십시오.

성원해 주심을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조문호


[아래는 조햇님 페북에 올린 낙선 인사를 스크랩했습니다.]

   


하루 쉬고 오늘부터 낙선 인사를 했습니다.

담담한 맘으로 유동호 위원장님과 신현주 당원님과 함께 인사말을 했습니다

    

아쉽게 낙선했습니다.

하지만 보내주신 성원 잊지 않겠습니다

제가 주민들과 한 약속도 잊지 않겠습니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은평 만들기 위해 노력 하겠습니다

은평 주민들과 항상 함께 하겠습니다. 감사 합니다


 

갑자기 현주당원님 눈물을 흘리시고 위원장님도 목이 메여 인사하십니다.

주민들께서 안타까워 해주시고 박수쳐 주시고 엄지를 들어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멋있어요!! 잘했어요!! 주민들의 응원에

저도 그만 눈물이 나서 뒤로 돌아 눈물을 훔치고 인사를 이어 갔습니다


한 어르신은 자유한국당 지지자인데, 아들권유로 저를 찍었으나 아쉽다며

4년 뒤에도 다시 찍겠다고 하십니다.



역사 안 빵집 사장님께서는 낙선인사로 시끄러워 싫어하실 만한데,

목 아프니 목 적셔가며 하라고 아이스커피를 가져다주십니다.

그리고 본인께서 적어주신 낙선 인사말을 조심스럽게 건네주시며,

이렇게 말하면 더 와 닿을 것 같다고 말씀해주십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정의당에서 정치를 하는 이유 오늘 다시 깨달았습니다.

응원해주시는 여러분 미흡하지만 저의 진정성을 알아주시는

여러분들이 계시기에 제가 흔들리지 않고

여러분들 곁에서 소수정당의 깃발을 들고 외칠 수 있다는 것을..."

 

 조햇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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