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포항 장기장 가는 길에 울산 태화장에 들렸다.

 

태화장은 30년 전까지 울산일대에서 가장 컸던 울산장의 흔적을 가장 많이 간직한 장이다.

 

옛 울산장은 상설시장인 중앙, 성남, 우정시장으로 쪼개졌다가 대형마트 출현으로 시들해졌다.

이 틈새를 파고들어 생겨난 것이 바로 태화 오일장이다.

 

10년 전에 생겨 점차 규모를 키워오다, 이제 근동에서 가장 큰 오일장이 되었다.

큰 광장이 없는 태화장은 장날이면 찻길가와 골목 전부가 장터로 변한다.

대로나 이면 도로를 가리지 않고 빈터만 있으면 물건을 펼쳐놓았는데,

시장 중앙에서 300나 떨어진 동강병원까지 뻗쳐 있었다.

 

태화장은 주변에 아파트 단지가 많아 다른 재래시장의 손님이 줄어드는 것과 대조적으로 갈수록

시장 규모가 커지고 있다는데. 가는 날 역시 사람이 너무 많아 주차할 곳은 물론 발 디딜 틈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곳에도 체온을 체크하거나 손 소독하는 곳도 없었다.

더구나 비좁은 시장 길에 자리 잡은 음식점엔 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먹었다.

아무리 먹고 사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이러다 생사람 잡을까 걱정된다.

 

함께 간 정동지는 사람들에 떠밀려 비좁은 시장 길을 헤집고 다녔으나,

난 외곽을 맴돌며 정동지의 촬영이 끝나기만 기다려야 했다.

동지를 사지로 내몰고 망 보는 격이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물산이 풍부했던 울산의 옛 정취를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옛 태화루를 끼고 있어 고풍스런 멋도 간직하고 있다.

 

좁은 길을 가다 부딪쳐도 시비 거는 사람 없고, 길이 막힌다고 재촉하는 이도 없었다.

 

아지매! 좀 팔았소? “밥은 뭇는기요?” 정감 깃든 인사들이 오 간다.

초짜로 보이는 오징어 장수는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오징어요를 외친다.

허리 아픈 할머니는 굽은 허리를 펴지도 못한 채 손님 맞는다.

 

코로나만 아니라면, 오일장의 진면목을 맛볼 수 있는 장이다.

태화장은 5일 10일에 선다. 

 

돌아오는 길에 태화 강변을 거니는 호젓한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사진, / 조문호

 

 

 

 

(35)전남 진도 십일시장

밭일하던 여인네도, 장터에서 마주친 여인네도…
틈만 나면 흥얼흥얼…삶을 노래로 승화시켜

열흘 간격 장 들어서 마을이름 ‘십일시’…지금은 4·10·14·20·24·30일에 열려
인근섬 사람들 드나들어 어물전 지천

 

 

진도에는 유달리 한(恨)의 노래가 많다. 삶의 희로애락에서 비롯된 소리들이 이어지는 것이 마치 유장하고 애절한 아쟁 가락 같다. 삶과 노래가 따로따로가 아니게 느껴지는 것은 “오메!” 하는 장터 여인네의 추임새 때문일까. 그 소리에 한바탕 어깨춤을 추면 푸르디푸른 남도 가락이 흥얼흥얼 장터 안으로 흘러가다 멈추어 선다.

 얼마 전 십일시장을 찾았을 때는 무거운 안개가 내려앉은 듯 장 안에 활기가 없었다. 농번기이기도 하지만 온 나라를 깊은 슬픔에 잠기게 한 참사 현장인 팽목항이 장터에서 10여분이면 닿는 거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방 진도가 초상집이여. 영감이 잡아오는 생선 팔아 가용으로 쓰고 병원 댕기고 하는디, 요샌 뭍에도 못 나가. 장이 쪼까 휑하지라? 젊은 여자들은 모다 팽목항으로 봉사 갔어. 첨엔 장바닥에 퍼져 앉아 ‘아까운 새끼들 어짜 쓰까’ 함서 막 울고 그랬제. 어쩌겄는가. 이렇게 꼼지락거리면서 이겨내야제. 슬픔이 이 늙은이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된다는 것을 이참에 배웠당께.”

 임회면 석성 인근에 사는 김순단 할머니(76)가 펼쳐놓은 쟁반 위의 문어 두 마리가 조곤조곤 얘기하는 할머니 말을 알아듣는 듯 꿈틀거린다.

 십일시장은 전남 진도군 임회면 석교리의 자연마을인 십일시리에서 열린다. 마을 이름이 십일시(十日市)인 것은 옛날에는 이 시장이 10·20·30일에 열흘 간격으로 열렸기 때문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15세기 중엽에는 장이 한 달에 두 번이나 세 번쯤 열렸지만, 18세기 이후 상업이 활성화되면서 대부분의 장들이 오일장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오늘날 십일시장은 임회장이라고도 하며, 특이하게도 4·10·14·20·24·30일에 열린다. 고군면 고성리에 서는 고군장(이 장은 십일시장을 피해 1·5일에 열린다)과 장날이 겹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석교천이 흐르는 십일시교를 건너면 장터가 시작되고, 오른쪽 길목으로 들어서면 장옥이 버티고 있다. 그리고 오랜 세월 이어온 장터의 흔적과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십일시장은 인근에 있는 상조도·하조도·각흘도·관매도·가사도·조도군도 등의 섬사람들도 드나드는 장이란다. 장터 바닥은 그야말로 바다를 옮겨놓은 듯 어물전이 지천이었는데, 요즘은 장이 선 이래 가장 조용하다고 한다.

 어물전 멋쟁이로 유명한 김씨 할머니(71)가 “요 꽃게나 사람이나 사는 게 같당께” 하며 꽃게 이야기에 열을 올린다. 꽃게는 달이 작은 그믐때는 많이 먹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아 살이 통통하게 올라오고, 반면 달이 밝은 보름에는 활동을 많이 해 살이 오르지 않는단다. 할머니는 “사람이나 꽃게나 많이 움직이면 저절로 살이 빠지는 것은 같은 이치”라며 꽃게를 들어 보인다. 그러면서 45년째 생선을 만지다 보니 소리도 좀 한다며 <진도아리랑> 한 자락을 뽑아낸다. ‘진도 가면 글씨자랑·그림자랑·노래자랑을 하지 말라’는 소리가 괜한 말이 아니다.

 십일시교 앞에는 할머니들이 장보따리를 세워놓고 버스를 기다리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여그는 땅 모양만 갖추어도 밭을 맹글어부러 놀고 있는 땅이 없당께. 진도 땅이 기림져서 뭐든 심기만 허믄 잘돼야. 진도 대파는 한양서도 소문 났드만. 징허게 맛나다고.”

 밭일 하던 여인네도, 장터에서 마주친 여인네도 틈만 나면 절로 터지는 노래로 삶을 승화시킨다. “이년아, 가슴에 저미는 한이 있어야 소리가 되는 벱이여.” 영화 <서편제>에 나오던 대사가 이 장터에선 여인네들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진도에서는 십일시장 외에도 앞서 말했듯 고군장이 1·5·11·15·21·25일에 선다. 구기자·홍주·돌미역·돌김·대파로 유명한 진도장은 2·7일에, ‘돌아온 백구’와 ‘신비의 바닷길축제’로 알려진 의신장은 1·6일에 열린다.

 

[농민신문]

 

(33) 충남 공주 산성장  

 

 

“밤꽃 냄새에 홀려 반평생 장터 지켜유~”

200년전 형성…1·6일 드는 날에 열려
주변이 우리나라 최대 밤 생산지
밤으로 만든 국수·떡 등 음식 다양
호두 많이 나오는 ‘유구장’도 가볼만…
“덤 없으면 장이 아니어유. 저울 눈금대로 살게 되나유. 말 한마디에 덤도 주고 그러면서 살지유.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도 있지유.”

 박씨 할머니(78)는 밤꽃 냄새에 홀려 장터에 들었다가 반평생을 장 덕분에 버텼다고 한다. 충남 공주시 정안면 월산리 소랭이마을 산자락에 하얀 눈 내리듯 밤꽃이 피면, 박씨 할머니는 창문을 두드리는 비릿한 밤꽃 냄새에 잠을 설칠 때가 많았단다. 그러다 땡볕에서 기른 상추와 오이를 머리에 이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주 산성장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박씨 할머니는, 어수룩한 청상과부를 장터로 불러낸 것이 밤꽃 냄새라고 추억한다.

 박씨 할머니가 사는 정안면은 우리나라 최대의 밤 생산지로 6월에는 밤꽃축제도 열린다. 밤막걸리·밤국수·밤파전·밤떡을 자랑하는 할머니 목소리에도 밤꽃 향기가 배어 있다.

 200여년 전부터 형성돼 오늘에 이르는 공주 산성장은 1일과 6일이 드는 날이면 공주시 산성동 일대에 선다. 시외버스터미널을 중심으로 장이 열리는 이곳에는 장날이면 크고 작은 난전이 펼쳐지고, 사람들의 표정도 역동적이다.

 버스 정류장 앞에서 고무줄을 길게 늘어뜨려놓고 잡화난전을 차린 김씨 아저씨(67)가 사람들을 향해 외친다. “시방 못 사면 평생 못 사유. 천원이유, 천원~!” 그러자 버스를 기다리던 할머니들이 모여든다. 고무줄을 고르는 오달성 할머니(83)에게 어디에 쓰실 건지 용도를 물어봤더니 할머니 하시는 말씀. “장항아리 묶는 데도 쓰구유, 개미 지나가는 길에도 냅둬유. 장화 신고 밭에 갈 때 바짓단 내려오지 말라고 묶기도 허구만유.” 장터에서 검정 고무줄은 진열 방식이 독특하다. 그냥 툭 던져놓기만 해도 저절로 ‘디스플레이’가 되는 것이다. 마치 꿈틀거리는 생물처럼 짓밟히면서 존재를 드러내기도 한다.

 서해안 시대를 맞아 충남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공주는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교육과 박물관의 도시다. 세종특별자치시도 지척에 있어 자동차로 20여분이면 닿는다.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를 거쳐 원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선조들의 삶의 원형을 만날 수 있는 국립공주박물관은 무령왕릉의 모든 출토품을 전시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또한 계룡산과 금강의 청정 환경을 즐길 수 있는 ‘5도2촌마을’을 운영해 평일 5일은 도시에서, 주말 2일은 공주에서 체험활동을 할 수 있다.

 그래도 공주 땅 자연과 사람의 진면목을 알게 하는 것은 역시 장터다. 자연은 모든 것을 내어주고 다시 거두어간다. 씨앗 한 톨이 흙과 만나는 시간과 그 이후 벌어지는 일들이야말로 자연이 만들어내는 예술임을, 장터 마당에 가면 어렵지 않게 배우게 된다. 장터는 또 사람과 사람의 중심에 서 있다. 이곳에 가면 걸어다니는 시간을 볼 수 있다. 장터에서 만난 더벅머리 총각과 순박한 시골 처녀를 백발의 촌로로 만든 것도 시간이다.

 시대적 환경 변화와 상관없이 43년 동안 시계 고치는 일만 해온 박영철씨(72). 멈춰버린 시계를 장날 하루에 스무개에서 서른개 정도 고친다고 한다. 요즘은 휴대전화가 시계 역할을 대신해 시계 고치는 곳이 점점 없어지고 있지만, 박씨는 오히려 옛날보다 요즘 들어 찾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정직하게 해주니까 단골이 많아지지유. 홍보가 별건가유. 오로지 입소문 하나로 되는 거지유.” 박씨는 말하는 중에도 쉬지 않고 시계를 고친다. “40년이 넘다 보니께유, 믿고 오는 사람이 많아유. 장날이면 누가 보냈다고 손님들이 찾아오는 맛에 홀려 나도 모르게 장에 나오게 되구먼유.” 박씨의 손끝 사이로 늦은 봄바람이 한움큼 바르르 떨고 지나간다.

 공주에는 산성장 외에 고랭지 무와 호두가 많이 나오는 유구장이 3일과 8일에 선다. 유구읍에서는 8월 초순이면 우렁각시축제도 열린다.

장터순례(28)강원 고성 거진장

 

거진항서 10분 거리…“싱싱한 도치·대게 팔아요”
인근엔 북녘 볼수있는 통일전망대
덩달아 관광객 사시사철 붐벼
상인들 새벽녘 항구서 작업한 해산물
장터로 건너와 내다 팔아

 


 강원 고성은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남북교류 1번지’로 불리며 활기가 넘쳤었다. 군 전체가 남북으로 나뉘어 있는 데다 절반가량은 군사지역이지만, 북녘이 그만큼 가까운 까닭에 금강산 관광의 통로 구실을 했던 것이다.

 금강산 관광 중단으로 한때 주춤했던 고성이 요즘 동해안 관광명소로 이름을 얻고 있다. 금강산이 보이는 현내면의 통일전망대는 사시사철 실향민들과 관광객들이 찾는 장소인지라 거진장도 덩달아 잔칫집처럼 웅성댄다.

 “고향과 가장 가까운 이곳에 자리 잡은 지도 벌써 60년이 넘었수다. 처녀 때 피란와서 이젠 할망구가 다 됐어. 살아생전 고향 땅이나 한번 밟아보고 죽는 게 소원이드래요.”

 행여 바람에 실린 고향 냄새라도 맡을 수 있을까 해 높은 지대에 집을 마련했다는 김동선 할머니(86)의 오래된 습관 하나는 고향 하늘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할머니는 60년째 생선을 말려 거진장에 내다 팔고 있다. 처음에는 생선을 머리에 이고 이 마을 저 마을로 떠돌아다니며 장사했다고 한다.

 거진장은 고성군 거진읍 거진리에서 1·6일에 열린다. 장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우리나라 최북단에 위치한 거진항이 나온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명태잡이로 유명해 ‘명태의 고향’으로도 불렸다. 명태가 귀해진 지금은 그 빈 자리를 다른 생선이 넘보고 있다.

 요즘 동해안에서 많이 잡히는 겨울 생선 중 하나가 도치다. 도치는 아귀·물메기와 함께 ‘못난이 삼형제’로 꼽힐 만큼 못생겼다. 위급한 일이 생기면 공처럼 웅크려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데, 이곳 사람들은 ‘심퉁이’란 별명으로 부르며 즐겨 먹는다. 암컷은 시큼한 김치를 넣어 알탕으로 요리하고, 수컷은 데쳐서 숙회로 먹는다고 한다.

 거진항에서 도치를 고르던 최씨 할머니(78)가 죽왕면에 있는 왕골마을 자랑을 한다.

 “왕골마실에 한번 가봐. 집집마다 다른 항아리굴뚝이 있어 구경꾼들이 많아.”

 왕골마을은 양근 함씨와 강릉 최씨의 집성촌으로, 북방식 전통한옥의 원형과 함께 600여년의 세월을 지켜오고 있다. 집마다 다르게 쌓은 굴뚝 위에 항아리가 얹힌 것이 특징이다.

 해가 떠오르는 거진항의 아침은 너무도 정겹다. 잡은 생선을 배에서 내리고 경매에 붙이느라 아수라장이지만, 치열한 삶이 아름다운 시(詩)로 재탄생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것은 새도 마찬가지다. 먼저 날아든 갈매기 한 마리가 신호를 보냈는지 갈매기들이 순식간에 손수레 옆으로 날아든다. 도치를 사러 나왔다는 박순덕 할머니(85)는 “먹이 찾아 갈매기들이 날아드는 것 보믄 사람이나 똑같은 기래요. 나도 묵고 살라고 반평생 동안 죽자 살자 이곳에 나오니께” 하며 웃는다.

 대게 작업이 한창인 곳에서 일손 빠른 외국인을 만났다. 인도네시아에서 1년 전에 왔다는 라스니까씨(38)는 한국말도 드문드문 잘해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다.

 “한국 사람들 참 친절하게 잘해 줍니다. 그렇지만 두고 온 가족이 보고 싶어 바다를 향해 소리도 질러보고, 고향 노래도 불러 본답니다.”

 말끝을 흐리는 라스니까씨 어깨 위로 아침 햇살이 살포시 내려앉는다.

 거진항과 거진장은 따로가 아니라 하나다. 거진항에서 대게 작업을 끝낸 허씨 할머니(70)가 손수레 가득 대게를 싣고 거진장으로 건너왔다. 새벽녘에는 거진항에서 대게 꺼내는 작업을 하고, 장이 서면 장터로 와 대게를 내다 판다.

 허씨 할머니는 열아홉에 시집와서 지금까지 거진항과 거진장을 오가며 살고 있단다. 대게 색깔에 맞추었는지 할머니의 옷과 장화 모두 붉은색이다. 젊어 보인다고 했더니 할머니 입이 귀에 걸린다. “방금 잡은 대게가 만원에 일곱 마리!” 하는 목소리도 쩌렁쩌렁 울린다. 평생 일손을 놓은 적이 없다는 할머니는 즐겁게 일하는 것이 젊게 사는 비결이라며 멋진 포즈로 한마디 건넨다.

 “빨간 옷 입고 빨간 대게 파는 할머이 잊지 말래요.”

 고성에는 이 밖에도 진부령 용대리 황태덕장으로 유명한 간성읍에 서는 간성장(2·7일)이 있다.

 

 

 

완도 고금장은 너무 초라했다.
겨우 장꾼 두 사람이 나와 간신히 장터의 명맥만 지키고 있었는데,
아마 전국 오일장에서 가장 작은 장으로 손꼽힐 만한 곳이었다.
장터라기보다 오히려 마을 구멍가게가 문을 열렸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완도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 고금장을 찾은 날이 정월대보름장인데도 장을 찾는 사람들은 없었다,
옛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렸을 듯한 넓은 장터에는 인근에 사시는 할머니 네 사람이 나와
무료한 장꾼들의 말벗이 되어주고 있었다.

                                                                                    

                                                       고금도 안내

 

고금도는 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면의 중심인 섬으로 북위 34° 12′, 동경 126° 45′에 위치한다. 북쪽으로는 강진만(康津灣)이 있고, 서쪽과 남쪽, 동남쪽에는 각각 완도・신지도・약산도[조약도]가 자리하고 있다. 면적은 43.66㎢이고, 해안선 길이는 62.5㎞이다.
 
원래 고이도(古爾島)라고 불렸는데 점차 변하여 고이도(古你島)가 되었다. 그 뒤 고금도(古金島)로 바뀌어 불렸다가 고금도(古今島)로 변하여 현재에 이른다. 고구마가 이곳에서 재배되고서 육지로 전래되었다고 하여 ‘고금도에서 나온 마’라는 뜻으로 ‘고구마’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섬의 북서쪽에는 덕암산(德巖山; 해발 246m)과 봉황산(鳳凰山; 해발 216m) 등의 산지가 있고, 남쪽에는 구릉성 산지와 평야가 분포하며, 동쪽은 해안을 따라 개펄이 발달하였다. 서쪽의 회룡리 일대에도 비교적 넓은 간척지가 형성되어 있다. 덕암산 동쪽 경사면에서 발원한 청룡천(靑龍川)은 동쪽으로 흘러 해안에 이르는데 주변에는 평야와 함께 마을이 들어서 있다. 남쪽 해안 주변을 비롯하여 동북쪽와 서남쪽에도 간척 사업으로 조성된 넓은 평야가 있다. 연평균 기온은 14.3℃이고, 1월 평균 기온은 1.9℃이며, 8월 평균 기온은 25.1℃이다. 연강수량 1,282㎜로 팽나무・동백나무・후박나무 등의 난대림이 무성하다.
 
고금도에는 1384년(우왕 10) 봉성리[독바위]에 천씨(千氏)가 최초로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1589년(선조 22) 덕동리에 고금진(古今鎭)이 설치되면서 강진군(康津郡)에 속하였고, 1896년에 완도 주변의 섬을 합하여 완도군(莞島郡)이 설치되었을 때, 고금도와 약산도의 사이에 위치한 덕동리에 소재지를 두면서 완도군에 속하였다. 1946년 약산도의 약산면(藥山面)을 분할하고서 농상리에 고금면 소재지를 두어 오늘에 이른다. 2007년 6월 29일에 강진군 마량면(馬良面)과 고금도를 연결하는 길이 760m의 고금∼마량 연륙교가 완공되었다. 이를 계기로 동쪽으로는 약산면・금일읍(金日邑)・생일면(生日面)을 잇고, 남쪽으로는 신지면(薪智面)・완도읍(莞島邑)과 연결되며, 북쪽으로는 마량면과 강진읍(康津邑)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부상하였다.
 
2009년 현재 2,196세대 4,541명(남자 2,153명, 여자 2,388명)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은 주로 마량면으로 연결되는 77번 국도를 따라 분포하며, 면 소재지인 농상리에도 집중 분포한다. 토지 현황은 논 6.78㎢, 밭 9.32㎢, 임야 25.43㎢이다. 농산물은 주로 쌀・보리・콩・감자・유자 등이 생산되고, 유자・치자・김・미역 등은 특산물로 유명하다. 섬 주변의 어장은 산란장으로 적당한데 제주 난류의 북상에 따라 난류성 어족이 풍부하며, 굴・김・미역・전복 양식도 활발하다.
 
문화재로는 덕동리에 조개무지, 가교리에 돌로 쌓은 성터, 청룡리에 도요지와 고인돌 등이 있으며, 사찰로는 덕동리에 옥천사(玉泉寺)가 있다. 약산도 사이에는 약산 연도교가 놓여 두 섬 간의 교통과 수산물 유통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섬 남쪽의 상정 선착장에는 신지도의 신지면으로 연결되는 선박이 운항되고 있다. 교육 기관으로는 고금초등학교, 고금중학교, 고금고등학교 등이 있다.
 

'화개장터의 냇물은 길과 함께 흘러서 세 갈래로 나 있었다…

경상 전라 양도의 경계를 그어주며 다시 남으로 남으로 흘러내리는 것이, 섬진강 본류였다.'

(김동리 소설 '역마(驛馬)' 중)

 


화개장터는 소설 '역마'의 주무대가 되는 곳이기도 하지만

조영남씨의 노래 '화계장터'가 인기를 끌며 더욱 유명해 졌다.

일단은 관광지나 장터는 유명해진다는 것 자체가 문제다.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면서 부터 서서히 본래의 모습을 잃어 간 것이다.

갈 때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오래전의 화계장터 흔적들은 찾을 수 없었다.

장 모퉁이 한 쪽에 적혀 있는 다산 정약용의 '화계장' 시가 

옛날을 추억하게 할 뿐이다.


 
 

 

             

               화계장


          -다산 정약용-


조랑말 고개 늘여 골짜기 벗어나니,
나룻배 뜬 강에 봄물이 푸르구나.

따사로운 백사장에 이제 막 장이서니,
부엌마다 연기나고 술고기 벌려있네.

언덕엔 소와 말이 서로 얼려 희롱하고,
포구엔 돛배들이 엮은 듯이 총총하네,

송경. 중국비단이 거쳐서 들어오고,
울릉. 탐라의 생선도 이 곳으로 수입되네.

오고 가는 이 발길들 모두다 이익 때문,
그 누가 이를 말려 장사잇속 막을 손가.

돌아보니 지리산이 구름 속에 잠겨있고,
청학은 높이 날아 쫓아가기 어렵구나.



 

 

경남 하동장은 작년에 들려 일정에도 없는 코스였으나 네비게이션 조작 실수로 가게 되었다.

고금장을 떠나며 무주 설전면사무소로 찍었으나 난데없는 남해 설전면사무소가 찍혀 안내된 것이다.

두 시간 넘게 엉뚱한 길로 달리다 잘못된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꼼꼼하게 살피지 못한 과오도 있지만, 인간이 기계의 속물이 되어간다는 생각에 기분 나빴다.

없는 돈에 기름 값과 통행료 날린 속상함도 한몫해 괜히 옆 자석의 아내에게 짜증을 부렸다,
그리고 하동장에 내리며 아내에게 한 말은, 내가 한 말이지만 너무 웃겼다.

“본전 찾아야 하니 좋은 사진 찍기 전에는 갈 생각 말아라“

이미 파장이 된 장터에는 할머니들만 띄엄띄엄 지키고 있어 골목과 외진 구석들을 찾아 다녔다.
어느 한 골목을 들어서니 일전에는 본 적이 없는 개인 장옥 한 동이 눈에 띄었는데,
고색창연한 외양이 일단은 눈길을 끌었다.
창으로 살짝 들여다보니, 아주머니 혼자 운영하는 뻥튀기집이었다.
오랫동안 얼마나 많은 사진인들과 기자들한테 시달렸으면 사진쟁이 둘이나 침입했으나

미소로 반길 뿐이었고, 집안을 돌아다니며 촬영해도 하던 일만 반복할 뿐이었다.

일하며서 간간이 묻는 말에 답은 했으나 이름과 나이 등의 인적사항은 노코멘트였다.
그 자리에서 4-50년을 장사했다는데, 집 구조나 집기들은 오랜 연륜을 보였지만
주인이 너무 젊어 보여 좀 믿기지 않았다.

붉은 백열등 불빛을 받은 뻥튀기 기계 두 대가 연이어 터져댔다.
재료에 따라 가열시간이 다른데도 쉼 없이 해내는 일솜씨가 보통은 아니었다.
여태껏 장터에 따라붙는 다양한 뻥튀기 행상들을 봤지만 이런 가게는 처음이었다.
예전에는 주로 난전에서 튀겼으나 지금은 대부분 차를 개조해 포터 위에서 튀긴다.
일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편할지 모르지만, 내키지 않아 그냥 지나쳐 왔던 터다.
그런데 이곳은 난전도 아닌 판자집 안인데다, 아주머니 혼자 억척스럽게 일해 구미가 당겼다.

판자집 구조도 뻥튀기 집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문이라고는 입구문과 조그만 창 하나가 전부였으나, 터질 때마다 김이 쉽게 빠져 나갔다.

이름 없는 뻥튀기 집이지만 오래된 추억들과 함께 그 곳 사람들의 구수한 인정까지 골고루 주워 담을 수 있었다.
밤을 튀겨 가는 한 아낙은 밤 세알을 내 손에 살짝 쥐어 주었고, 주인 아낙은 튀긴 메밀을 맛보라며 내놓았다.
이것이 사람 사는 맛이고, 장마당의 인정이다.
그 집을 나오며 아내에게 말했다.

“본전 찾았으니 이제 가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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