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인사동 이야기' 사냥 길에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

인사동 민중미술의 교두보 역할을 해 온 김진하관장 만나러 가는 길에발렌티노를 만났는데,

김수영 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아 축하 대잔치를 갖는다는 것이다. 

 

요즘 코로나로 휴관 중에도 불구하고 김진하관장과 화가 박 건씨를 인사동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나무화랑'에서 모처럼 반가운 분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는 중에 뜻밖의 소식이 날아 온 것이다.

김수영 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는 오는 20일 정오무렵, 종각 타종 행사를 시작으로 100일 동안 축하대잔치를 연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김발렌티노가 김수영시인의 시 ‘푸른 하늘을’ 너무 좋아해 입버릇처럼 노래를 불렀는데,

기타리스트 김광석씨가 곡으로 옮겨 새로운 노래로 탄생시켰다는 이야기도 뒤늦게 들었다.

 

인사동 거리는 며칠 사이 새로운 점포가 여럿 들어섰다.

'나무화랑' 건물 일층에 있던 ‘보물창고’가 사라지고 무엇을 파는지는 알수 없으나

‘블랙다이아’라는 간판을 단 새로운 매장이 마무리 단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성보갤러리'가 있던 건물이 재건축되어 건물 전체가 ‘더스타갤러리’란 간판을 달고

개관전으로 서달원씨의 ‘面’이 열리고 있었다.

 

버스킹에 나선 젊은이들의 연주 솜씨들도 날이 갈수록 세련되어 거리가 한층 젊어졌다.

 

두 분 시간 뺏은게 너무 미안해 모처럼 술 한 잔 대접하기 위해 ‘툇마루’로 자리를 옮겼다.

된장비빔밥에 막걸리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김진하씨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옛날 인사동 다방에서 이루어졌던 나까마들의 그림 거래에 대한 이야기인데, 

귀가 번쩍 뜨이는 인사동 사료라 원고청탁까지 했다.

 

그런데, 그 자리를 어떻게 알았는지 불화가 장춘씨가 나타났다.

네명 인원 초과로 떨어져 앉아 자리 파하기만 기다리는 게, 영 마음에 걸렸다.

 

세 사람이 막걸리 두 주전자 밖에 마시지 않았지만,

달짝한 툇마루 막걸리는 술술 넘어가는 대신, 뒤늦게 취기가 오르는 위용을 알아 더 마실 수도 없었다.

 

정영신사진

반가운 사람들과 기분 좋게 마신 술자리라 입구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찍힌 사진을 보니 두 화가 사이에 늙은 개 한 마리 끼인 꼴이었다.

 

술이 취해 준비해야 할 골목전시 현장 확인 하느라 작별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술만 취하면 개로 돌변함을 널리 양지하시길....

 

사진, 글 / 조문호

 

 

 

며칠 전 조준영시인으로 부터 인사동서 만나자는 전화가 걸려왔다.

 

 

 

예전에는 정기적인 인사동 모임이 있었으나, 코로나 광풍에 밀려 사라진터라 반가운 기별이 아닐 수 없었다.

 

 

 

조준영씨를 만난 지가 일 년을 훌쩍 넘겼으나 인원수 제한에 걸려  다른 분은 연락도 못했다.

아마 정선 집에 불난 소문을 듣고 무리하게 자리 만든 것 같았다.

 

 

 

정영신씨와 함께 약속보다 일찍 나가 마루아트에서 열리는 노무현 추모전 사람 사는 세상’부터 보러갔다.

 

 

 

전시장에서 박재동 화백과 유준 화백을 만나기도 했다.

 

 

 

99명의 작가들이 내놓은 작품들이 넓은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는데, 세삼 울컥하게 만든 작품은 노무현대통령 전속 사진가로 일한 장철영씨 사진이었다소탈한 바보 대통령의 진솔한 모습에 어찌 옛날 생각이 나지 않겠는가?

 

 

 

오랜만에 나온 인사동 거리는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문 닫았던 몇몇 가게들이 옷 가게나 악세서리 가게로 다시 문을 열었는데, 전통 노리개를 팔던 아원공방자리는 화려한 색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인사동 길가의 신축건물 일층에 더 스타갤러리가 문을 열었더라.

일 년만 숨어 지내다 오면 인사동의 모든 게 다 바뀔 것 같았다.

 

 

 

약속시간이 되어 툇마루로 갔더니, 김 발렌티노가 반갑게 맞았다.

요즘 청소부로 돈 번다며 밥 한 그릇 사겠다고 우겼으나 약속이 있어 사양했다.

 

 

 

'툇마루에서 조준영씨를 만나 된장 비빔밥에 막걸리 한 잔 했다.

요즘 술만 마시면 힘들어 아껴 마실 수 밖에 없었는데, 입은 땡기고 머리는 말리니 어느 장단에 춤 출지 모르겠더라.

 

 

 

다들 지난한 나날들 하소연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조준영씨가 화재 후원금을 건네주었다.

함께 공유할 예술창고를 만들려면, 돈보다 많은 사람들의 동참이 필요해 고맙게 받아 들였다.

 

 

 

대기손님들이 일어나기만 기다리고 있어 오래 버틸 재간이 없었다.

 

 

 

툇마루에서 나와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유목민도 손님이 많았다.

그런데, 이게 누군가? 소식 끊겨 죽은 줄만 알았던 장춘씨가 나타난 것이다.

 

 

 

정말, 안보면 보고 싶고 보면 징그러운 여인이다.

'죽어도 고.”라는 작심으로 마시기 시작했는데, 소주가 입에 짝짝 달라붙었다.

 

 

 

오랜만에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는데, 그녀의 언어 법은 귀신들이 나누는 말투라 다소 난해하다.

 

 

 

우린 한 쪽 귀로 듣고 한 쪽으로 흘리니 문제될 게 없으나, 옆 좌석에 던지는 실 없는 소리에 신경 쓰였다

다행스럽게 귀신 말귀를 알아챘는지, 맞장구를 쳐 주어 분위기가 무러익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홀짝 홀짝 마신 술에 취해 버렸다.

그렇지만, 이 얼마만이더냐? 마음대로 이야기하며 기분 좋게 마신 적이...

 

 

 

같은 방향이라 녹번동으로 함께 갔는데, 장춘씨가 떠난 생각이 나지않는 걸 보니, 아마 먼저 뻗은 것 같았.

벌 받아 그 다음 날은 하루 종일 누워 낑낑거렸으나 후회되지는 않았다.

 

 

 

 우리가 놀면 날마다 노나?

"사랑이 좋으냐? 친구가 좋으냐?

막걸 리가 좋으냐? 색시가 좋으냐?

사랑도 좋고 친구도 좋지만 막걸리 따라주는 색시가 좋더라.

앵헤야~ 엥헤야~ 앵헤야~ 앵헤야~“

 

사진, / 조문호

 




한 이십년이나 되었을까?
봉화 수식에서 있었던 일이다.
영주에서 신동여씨 전시를 끝내고,
봉화 수식으로 가다 차가 개울에 처박혔다.

막걸리와 전 부쳐 먹을 밀가루도 
차에 실은 것으로 기억된다.
차에는 저 세상으로 떠난 적음스님을 비롯하여,
도호스님, 신동여, 장 춘씨가 탔다.

그런데, 바탈진 시골길을 달리다,
그만 차가 개울에 전복해 버린 것이다.
죽었구나 싶었으나 정신을 차려보니,
안전밸트에 묶여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차에서 뿔뿔 기어나가 차안을 밝혀보니 가관이었다.
밀가루를 뒤집어 쓴 적음스님은 눈을 깜빡이며
“아이고! 중 살려~“라며 농담하고 있었고,
도호스님은 머리가 이상하다며 헛소리 해댔다.

사람은 별 탈 없는 사고인 것 같았으나,
갤로퍼는 완전 개 박살난 것이다.
그것도 새 차 뽑은 지 몇 달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차에서 내려 짐만 챙겨들고 작업실로 갔다. 

패잔병 꼴로 막걸리만 퍼 마셨는데,
도호스님은 계속 헛소리를 해댔고,

적음스님은 빠도 못하게 됐다며 너스레를 떨어댔다.

웃을려는 농담인줄 알았으나,
이튿날에서야 적음스님 팔 부러진 것을 알게 되었다.

아침 녘에 보험회사에 연락하고
차가 뒤집어진 현장을 확인하러 가는 중에,
사진 속의, 등교하는 두 소녀를 만난 것이다.
옷이나 머리가 엉망진창인 낯선 사내가 이상했던지,
연신 돌아보며 웃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메고 있던 카메라로 한 컷 찍었는데,
그 사진이 뒤늦게 책갈피에서 나온 것이다.
언젠가 전해 주려 프린트해 둔 모양인데,
그만 숱한 세월이 지나고 말았다.

지금은 어른이 되어 시집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녀에게는 좋은 추억이 될것 같아,
신동여 화백께 한 번 물어봐야겠다.
아마 가까운 동네에 살았으니, 아는지도 모르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 터줏대감들께서 모처럼 나오신다기에, 신년 인사드리려 인사동에 나갔다.


인사동에 대한 애정이 식어가는 요즘, 유일하게 인사동을 챙기는 분이 강민선생이시다.
용인에서 버스와 지하철을 몇 번이나 갈아타야하는 불편함을 무릅쓰고 나오시는
선생의 인사동에 대한 애착에 그져 고개가 숙여 질뿐이다.
삭막하게 변해가는 인사동을 보면 속만 답답하실 텐데 말이다.






점차 친구들도 한 분 두 분 세상을 떠나고 있다.
재작년엔 소설가 이호철선생과 극작가 신봉승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셨고,
작년에는 심우성선생마저 공주 요양병원으로 떠나지 않았던가.
살아 남은 분이라도 자주 만나고 싶어하시나
다들 몸도 마음도 예전 같지 않으시니, 잘 나오지 않는단다.






년초부터 감기에 걸려 이틀 동안 누워지내다 3일에서야 간신히 추수릴 수가 있었다.

정영신씨를 대동하여 약속장소인 ‘나주곰탕’으로 갔더니, 강민선생을 비롯하여 김승환, 장봉숙선생이 와 계셨다.
너무 반가운 만남이었다. 페북에서야 가끔 인사 드리지만, 뵌 지가 몇 달은 된 것 같았다.

선생께선 낮에만 나오시고, 난 올빼미처럼 밤에 출몰하니 잘 만날 수가 없었는데,
다들 건강하신 모습을 뵈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곰탕 건더기를 안주삼아 조촐한 신년하례식을 가졌는데,
강민선생은 방동규선생께 미처 연락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하셨다.
방동규선생이 계셔야 호탕한 한 해를 시작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모처럼 식사 한 끼 대접하려 했으나 장봉숙선생께서 먼저 계산해 버렸다.

새해부터 어른들께 신세지는 일을 없애려 했으나, 첫날부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커피 마시러 ‘인사동 사람들’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 곳은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인사동을 사랑하는 옛 사람들의 발길이 줄었다는 말이다.


붙잡아도 머물어 주지 않는 세월을 원망해야 할지,
갈수록 야박해지는 세상을 원망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하나 둘 변하고 사라지는 게 인생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커피를 마시다 선생님들 앞에서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

감기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인지, 술이 오르니 갑자기 잠이 몰려온 것이다.

눈을 떠보니 정영신씨 혼자 남아 있었는데, 선생께서 일어나시면 깨워야 하지 않는가?

죄 없는 정영신씨만 원망하고 있으니, 전활철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강민선생께서 지하철 타러 가는 길에 유목민잠시 들렸다고 했다.

그 곳에서 강민선생은 다시 만날 수 있었지만, 김승환, 장봉숙선생은 떠나시고 없었다.

그동안 말씀이 없어 잘 몰랐는데, 강민선생께서 오래전 넘어져 다친 팔목이 아직 불편하다고 했다.

늘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계셔서 눈치채지 못했는데, 빨리 완쾌하셔야 할텐데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뜻밖에도 민화 그리는 장춘씨가 '유목민'에 나타난 것이다. 

홍두깨처럼 나타났다 증발해 버리는 그의 행적이 늘 궁금했기에, 죽은 사람 만난 듯 반가웠다.

오죽하면 북한의 지령받고 움직이는 간첩이 아닌가 생각했을까?


그러나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장춘씨와 정영신씨를 '유목민'에 남겨두고, 강민선생 따라 일어서야 했다.



 


서울역에서 노숙하는 이종민씨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세밑에 잃어버린 카메라가 문제가 아니라, 그 속에 찍힌 사진파일이 더 필요했고,

그 사진파일보다는 그와의 인간적 신의를 되돌리는 것이 더 절실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새해에는 더 이상 절망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사진, / 조문호 

 
























 

 

 

나에게 다섯 번째 애마 코란도 밴을 기어이 떠나보내고 말았다.
3년 전 350만원에 사들인 애첩인데, 그동안 병원비만 몸값의 배가 들었다.
고속도로에서 애 먹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건만, 그래도 떠나보내고 나니 서운하다.

지난 6일 정영신씨의 장터사진전 준비하러 떠나는 춘천으로 따라 나섰다.
변속이 되지 않아 혼난 경험이 있는 정영신씨가 불안해했으나,
그 문제는 스스로 해결 방법을 찾았다며 안심시켰다.
크러치가 밟혀 올라오지 않으면 발등으로 끌어 올리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춘천 가는 국도의 가평 무렵에 이르러 차에서 타는 냄새가 났다.
그러더니 얼마 가지 못해 시동이 꺼져 버렸다.
다시 시동을 걸어 출발하기를 몇 차례 하였으나, 결국 퍼져 버렸다.
약속시간이 늦어버린 정영신씨는 남의 차 구걸해 먼저 보내고,
멈춰선 차를 견인시켜 갔더니, 엔진헤드를 바꾼다며 수리비 80만원을 내란다,

장례 날만 기다리는 차에 80만원이나 쳐 바를 수 없었다.
디젤 노후차 폐차에 지급하는 환경지원금도 움직이는 차에 한해서란다,
뒤늦게 돌아 온 물주 정영신씨와 의논해 울며 겨자 먹기로
고물 값 40만원 받고 춘천폐차장에 넘겨 버렸다.
차에 실린 짐 꾸러미를 챙겨 돌아오는 마음은 찹찹했다.
그동안 속을 많이 섞였지만, 전국 장터를 돌아다니며 정들었던 차다.
같이 끝내자고 했으나 결국 먼저 가버렸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애마에 얽힌 추억이 너무 많다.
제일 처음 애마를 만난 건 1982년도 였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버린 사우 윤재성씨의 '포니2'를 100만원에 산 것이 시작이다.
그 때는 드라이브에 재미를 느낀 초짜라 아무나 차를 태워주던 시기였다,

어느 날 인사동에서 모령의 여인을 만나 차 한 잔 하는 자리에서 
갑자기 그 녀가 겨울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다.
‘얼씨구나’ 하며 차에 태워 변산 바닷가로 출발했다.
막상 겨울바다에 도착하여 바닷가를 거닐었으나, 추워 오래 견딜 수가 없었다.
차 때문에 술도 마실 수 없어 그냥 돌아와야 했다.

밤늦은 무렵의 한가한 고속도로라 신나게 달렸는데, 앞에서 화물차가 걸리 적 거렸다.
추월하느라 폐달을 힘껏 밟았는데, 추월하고 보니 내리막길이었다.
“아차! 죽었다” 싶었다. 차가 공중에 붕 떠 핸들을 꽉 움켜잡았는데,
순간적으로 판단한 것이 가드레일에 의지해 미끄러지는 방법 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절묘하게 가드레일을 들이 받아 100미터 넘게 끌려가서야 차가 멈춰 섰다.

분명 기적이었다.


치명상을 입기 쉬운 옆자리 여인도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았다,
차에서 내려 보니 오른쪽 바퀴는 둘 다 날아 가버렸고, 휠만 쭈그러져 있었다.
견인차를 기다리는데, 고속도로 순찰차가 닥아 왔다.
망가진 차를 보더니, 가드레일 망가진 곳을 찾기 위해 두 번이나 돌아다녔으나 멀쩡했다,

하늘이 보살폈다“며 순찰하는 이가 구시렁거렸다.

대전 변두리 어느 정비공장에 차를 맡기고 가까운 여관에 들어 갔는데,
뜻밖의 뜨거운 밤을 보내는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살이 끼여 이런 꼴을 당하니 살을 풀어야 한다는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 뒤로 연락 끊긴 하루 밤 풋사랑이지만, 잊을 수 없는 인연이었다.

그 당시는 종합보험만 가입했기 때문에 바퀴와 휠만 교체하고 끌고 가야했다.
그 뒤 전주에 갈 일이 있었다. 바디가 찌그러지고 심지어 오른쪽 문이 잠기지 않아
끈으로 칭칭 묶은 차에다 전시할 사진을 잔뜩 실고 갔더니
화가 류휴열씨와 도예가 한봉림씨가 기가 막혔는지,
어떻게 이런 차로 전주까지 올 수 있냐고 놀려댔다.

그런 수모를 당한 포니가 어느 날 화염에 휩싸여 장렬하게 전사했다.
어느 날 ‘환경관리공단’에서 실시한 환경사진공모전 심사를 위해 집을 나섰는데,
출근 시간에 걸려 차가 꼼짝을 않았다.
시간은 촉박한데, 고물차는 열 받아 엔진에서 연기까지 나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어 변두리에 세워두고 지하철로 내려갔다.

그런데, 일 마치고 돌아왔더니 그 자리에 차는 없고 그을린 흔적만 있었다.
주변 사람에게 물어 보니 내가 빠져나가는 순간 차에 불이 붙었고,
그 뒤 소방차가 출동하여 불을 껐는데, 불탄 차는 견인해 갔다고 했다.
환경사진 심사장에서 자연생태사진만 지겹도록 보고 왔는데,
이게 환경고발감이다 싶었다. 어떻게 이런 아이러니가 있을 수 있나?

그 뒤로 티코를 구입해 한 2년 동안 타고 다녔는데, 사고 한 번 없는 괜찮은 차였다.
덩치가 작아 잘 빠져 다니는데다 주차하기도 편했다.
그런데 휴지조각처럼 접힌 사고차량을 본 후로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서 큰 맘 먹고 갤로퍼 숏 바디 신형을 사기로 했다.
92년산 차 값이 1,900만원이었는데, 36개월 활부로 구입한 것이다.
그 무렵은 ‘이미지 라이프’라는 사진취재대행업을 할 땐데,
두 세군데 사보에 일해 주는 것으로 간신히 끌어가야 했다.
주 고객층인 잡지사들이 워낙 영세하다보니, 일을 맡길 사정이 아니었다.

그런데, 차 뽑은지 두 달도 되지 않아 대형 사고를 내고 말았다.
부여에서 사진행사가 있어 고속도로를 탔는데,
휴게소에서 아주 섹시한 여인을 보게 된 것이 원인이었다.
다시 운전대를 잡았지만 그 여인이 아른거려 견딜 수 가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그 여인을 생각하며 딸딸이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속도감에 더해 쾌감도 무르익어 갔다.

 

흔들어도 적당히 끝내야 하는데, 그게 되지 않았다.
갑자기 사정되어, “어~어~”하다 나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밟아버린 것이다.
‘찌이익~“ 차가 미끄러져 급정거하자, 갑자기 ’쾅‘하며 뒤통수를 쳤다.
뒤 따라 오던 2,5톤 화물차가 들이 받은 것이다.
급히 풀 묻은 거시기를 집어넣고 내려갔는데, 터럭기사가 발발 뛰었다.
왜 세웠냐고 캐묻는데, 어떻게 그 이야기를 할 수 있겠나?


좀 있으니 경찰이 달려와 안전거리 미확보라며 피해자를 나무랐다.

교통법규도 웃기는 짜장면이다.
내차는 뒷문이 박살났고 뒷 차는 앤진 룸에서 연기가 났지만, 둘 다 운행에는 지장이 없었다. ` 

서로 각자 수리하기로 합의했으나, 떠나가며 그 기사가 다시 물었다. 
”전방에 아무 것도 없었는데, 왜 세웠어요?“라기에
”미안합니더마는 그거는 죽어도 말 못합니더~“

그래도 2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찰을 기록하는데도 크게 기여한 차다. 

‘한국불교미술대전’이란 일곱 권짜리 화집은 나왔으나, 출판사인 ‘한국색채문화사’가 부도나 원고료도 받지 못했다.

 재수없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이 딱 맞다. 거금 삼천만원이나 되었는데...

그 때 기록한 불교에 관한 슬라이드 필름이라도 남아있으니, 다행이다 싶다.

그 뒤 또 한 번 사고를 쳤다.
도예가 신동여씨가 영주에서 전시를 열 때다.
전시가 끝나고 봉화 수식으로 모두들 자리를 옮겼는데,
얼어붙은 내리막 시골길에 미끄러져 논바닥에 전복되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그 차에는 신동여씨를 비롯하여 지금은 열반한 적음스님과 산중에서 수행중인 도호스님,
불화가 장춘씨가 탔는데, 난 대롱대롱 안전벨트에 거꾸로 메 달려 있었다.

간신히 내려 손전등으로 뒷좌석을 비추어보니 정말 가관이었다.
집에서 먹기 위해 사온 막걸리와 술안주 만들려던 밀가루 봉지가 흩어져
적음스님 얼굴을 뽀얗게 뒤덮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도 ‘중 살려~“라며 농담을 지껄이고 있었다.
도호스님은 머리에 이상이 생겼다며 헛소리를 해대고,
적음스님은 팔이 부러졌다며 낑낑거렸으나 모두 술이 약이었다.
차를 버려둔 채 집으로 몰려가 술만 졸라 축냈다.  

그런데, 이튿날 적음스님 팔에 진짜 문제가 생겼다.
골절로 팔에 깁스를 하였고, 입원하지 않는 조건으로 보험금도 좀 탔다.
보험금 받는 날 적음스님 더러 술 한 잔 사랬더니, 그 대답이 걸작이다.
“문디 코구중에 마늘을 빼먹지...”

그 차는 15년 동안 25만킬로를 같이 뛰었는데,
어느 날 일산 길가에 멈추어 서서 더 이상 같이 못 살겠다고 버텼다. 어찌하랴?

 

헤어지고 새로 만난 애마는 그보다 덩치가 큰 갤로퍼였는데, 일단 조가 잘 맞았다.
사진전에 필요한 자재를 실고 산골마을을 돌아다닌 순회전도 열심히 도와주었고,
아파트에 버려진 장롱까지 차 지붕에 실어 정선으로 옮겨 날랐던 것이다.
정영신씨와 전국 장터를 돌아다니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그도 눈 내린 평창 시골길에서 미끄러져 개울에 전복되어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나에겐 상처하나 입히지 않은 열녀다.

그 고마운 년도 몇 년전 천상병선생 기일 날 의정부 산소 가는 길가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가 떠나며 내게 붙여 준 년이 엊그제 폐차시킨 코란도였다.
착한 마누라가 있으면 악처도 있듯이, 코란도는 나에게 악처나 마찬가지다.
얼마나 속을 많이 섞였던지 꼴도 보기 싫지만 어쩌겠는가?
그래도 내가 데리고 놀며 정들었는데...

더 이상 악연을 만들지 않아야 하는데,
살아있는 동안은 그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이제 세상을 함께 떠날 진짜 애마를 만나고 싶다.

사진, 글 / 조문호

 

 

 

 

 

 

일요일 오후, 느닷없이 손님이 찾아왔다.

 

급히 마무리하다 컴퓨터가 탈이 나, 짜증스러웠다.  
오랜만에 찾은 손님 앞의 표정관리가 힘들었다. 

 

손님은 담배와 막걸리를 사왔다.
평소 담배를 사지 않아, 담배부터 꺼내 물었다.  

 

 담배 향이 좋다며, 안 피우는 아내까지 합세해

모두들 피워대니 좁은 방안은 담배연기로 자욱했다.
담배에 대한 아내의 은근한 압력이 느껴졌다.

 

막걸리를 마시며, 그 날 작업은 포기했다.  

날더러 쉬라고, 귀신이 손님을 보낸 걸로 생각하며

 앞뒤 없는 잡담들을 노래삼아, 낄낄거리고 웃었다. 
 

 

사진 / 정영신, 조문호 글 / 조문호

 

 

 

 

 

 

 



 

 

 

 

 

 

폭설 나리던 2월3일, 불화가 장춘씨가 집을 방문했습니다.

몇일 만에 만났는데, 헤어 스타일이 싹 바뀌었어요.

얼핏보면 배추포기 같은 머리가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백발을 젊은이들처럼 변신시킨 파격적 헤어스타일이 멋져요.

전라도로 떠나는 길에 인사동 "노마드"에 잠시 들렸는데,

전활철씨의 헤어스타일도 마치 오누이처럼 비슷하더군요.

 

 

2013.2.9


만봉스님에게 사사받은 불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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