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낭만에 대하여
기사입력 2013.02.15 17:00:05 | 최종수정 2013.02.15 17: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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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째 SBS 라디오에서 `최백호의 낭만시대`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20년 가까이 `낭만에 대하여`라는 노래도 부르고 있고. 그래서인지 간혹 `낭만`의 정의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런데 노래만 그랬지 사실 나는 그리 낭만적인 사람도 아니고, 특별히 낭만을 연구한 것도 아니고 해서 명쾌한 답을 드리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뭐 낭만이란 게 별 건가….

나는 일출보다는 일몰을 더 사랑한다. 세상을 삼킬 듯이 힘차게 솟아오르는 피둥피둥한 아침 햇살의 욕망스러운 모습보다 온몸을 불태워 최선을 다한 장엄한 황혼의 그 처절한 모습에 감동을 받는다. "그건 당신이 늙어서 그래"라고 지적하는 이도 있겠지만 젊어서도 그랬다. 중학생 시절, 학교 안 가고 책가방을 베고 하루 종일 누워서 바라보던 고향 바닷가의 따듯한 저녁놀,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막막한 심정으로 서성이던 타향살이 LA 샌타모니카 해변의 검붉은 황혼, 하루 저녁 일곱 군데 술집에 노래하러 나가던 길에 차를 세우고 넋을 잃고 바라보던 내 머리 뒤로 번져가던 일산대교의 숨막히는 일몰. 그런 것들을 좋아했다.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웃음보다는 눈물이 좋다. 즐거움으로 숨 넘어가는 듯한 행복한 웃음소리보다, 아픔을 억누르며 소리나지 않게 흘리는 눈물에 더 마음이 움직인다. 밝고 경쾌한 가벼운 노래보다는 슬프고 가슴 아픈 노래들이 좋다. 가사도 멜로디도 슬퍼야 편하다. 그래서 박남정보다는 김수희가 좋다. 김수희의 그 끈적하게 붙어 늘어지는 `애모`가 좋다.

영화도 그렇다. 신나는 활극보다는 비극이 좋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나…. `초우`라는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친구와 숨어 들어가 봤다. 그날 금세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던 깊고 검은 눈동자의 여주인공 문희 씨를 가슴에 품었다. 그리곤 전봇대에 붙어 있던 영화 포스터를 뜯어와서 책갈피에 숨겨 두고 혼자서 은밀히 꺼내보곤 했다. 훗날 가수가 되고 나서 그 기억을 더듬어 문희 씨에게 바치는 노래를 만들었다. `초우의 히로인 문희 씨에게`라고…. 히트하지는 못했지만.

내 직업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가난하여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부터 돈 많고 편안하게 사는 사람들까지. 삶에 지쳐 외롭고 힘 없는 사람들부터 세상일 모두 자기 뜻대로 이룰 것 같은 권력자들까지. 그러나 나는 그 힘 있는 사람들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보다는, 차가운 바람 속을 힘겹게 손수레를 끌며 폐지를 모으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이야기가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아프다. 사람은 눈빛에 마음이 있다. 평범하고 착하게 사는 사람들 눈에는 욕심이 보이지 않는다. 번들거리지 않는다. 그러나 돈과 명예에 뜻을 둔 사람들 눈빛을 보라. 무섭다. 옛 시조에도 있지 않은가. 성낸 가마귀 흰빛을 새오나니….

정치는 잘 모르지만 나름대로 이승만 대통령부터 이명박 대통령까지 우리 현대사를 지켜보며 살아왔다. 그러나 그동안 한 번도 멋진 뒷모습의 대통령을 본 적이 없다. 정말 부끄럽고 슬픈 일이다.

이제 새 대통령 시대가 열린다. 일개 가수의, 국민의 바람일 뿐이지만 이번 대통령께서는 TV 뉴스시간에나 볼 수 있는 딱딱하고 권위적인, 우리와는 먼 곳에 있는 사람이 아닌, 일몰의 여유를 즐기는, 눈물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진심으로 힘들고 서러운 국민의 편에 서 있는, 우리와 똑같은 모습의 대통령이면 좋겠다.
그래서 5년 뒤 모든 국민의 진심어린 박수 속에 웃으며 손 흔들며 돌아가는, 그야말로 낭만적인 뒷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낭만, 어렵지 않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가수 최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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