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은 인사동사람들 만나 술 한 잔하는 셋째 수요일이었다.
죽기 전에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만나자고 나발 분지가 제법 되었건만,
다들 그리운 사람이 없는지, 사는 게 힘든지 잘 나오지 않는다.






그 날은 오후2시부터 인사동 나오라는 장경호씨 전화를 받았다.
일찍부터 마시면 늦게까지 버티기 힘들어 겁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만난 지 오래된 최명철씨와 함께 ‘툇마루’에 있다는데...






나오다 동자동 입구에 자리 잡은 유정희씨 일당에게 덜미 잡혔다.
“날씨도 더운데, 막걸리 한 잔 해요.”
차마 거절할 수 없어 마시다보니 30분이 후딱 지나버렸다.






바삐 갔더니, 그 때까지 장경호씨와 최명철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최명철씨는 전국구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일 없이 바쁜 양반인데, 모처럼 인사동에 나온 것이다.
툇마루 막걸리는 맛은 있으나 느즈막에 달아올라 힘들게 하는 술이지만, 찔끔 찔끔 받아 마셨다.






그런데, 인사동에서 30여 년 동안 양념 행상을 해 온 권정선씨가 ‘툇마루’ 이층에 올라 온 것이다.
알고 보니 ‘툇마루’의 된장비빔밥에 들어가는 참기름을 권씨 할매가 댄다고 했다.
‘툇마루’를 단골로 잡고 있는 권씨 할매가 갑자기 존경스러워 보였다.
뵐 때마다 옛날 같지 않은 야박한 인사동이라 사는 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비빔밥 한 그릇 먹고 ‘유목민’으로 가다 거리에서 뜻밖의 까딱이를 만난 것이다.
이 친구 역시 인사동에서 만난 지가 30년 넘었지만,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인사동 물귀신이다.
그것도 날씨가 무섭도록 춥거나 더울 때만 나타난다.
보이지 않으면 혹시 죽지나 않았는지 걱정하는데, 그 걱정을 비웃듯 나타나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이다.






이 인간 보면 사람 목숨이 참 질기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노숙자들이 몰리는 서울역 부근으로 가면 밥이라도 쉽게 얻어먹을 수 있지만,
그가 즐겨 다니는 곳은 인사동이나 미술관이 몰린 곳이라 밥은커녕 사람들의 눈총만 받는다. 



 


비록 노숙하며 살아가는 걸승이지만, 내공은 보통이 아니다.
저승 떠난 화가 강용대씨가 그를 일찍부터 알아채어 유일하게 벗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는 한 때 해인사 중이었지만, 무슨 사연인지 인사동을 헤맨 지 숱한 세월이 지났다.
인사동에서는 스님들이 그의 밥이다.
얼마 전에는 조계사 경내에서 보살 한 분이 거지 행색을 푸대접 했다가 혼쭐나는 모습을 최명철씨가 봤단다.






그는 중답게 술은 마시지 않는다.
녹차는 좋아할 정도가 아니라 그의 중독자에 가깝다.
거지 주제에 따뜻한 물 구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그 비결은 나도 모른다.
녹차 문제로 종로경찰서에 들락거린 적도 두 차례나 있는데, 그 때마다 고인이 된 ‘귀천’ 목여사가 빼 내 주었다.






아무리 꼬드겨도 그의 법명은 물론 신상에 관한 일체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무슨 의문이 그리 많은지 항상 고개를 까닥거리고 다녀 그냥 까딱이로 부른다.
탁발 또한 아무한테나 손 벌리지 않고 아는 사람에게만 강탈하듯 뺏는다. 
푼돈이지만, 만나면 항상 갈취 당했는데, 요즘은 내 사는 꼴을 짐작했는지 돈 달라는 소리를 일체하지 않는다.






너무 반가워 담배 한 대 권했더니, “주제에 담배는 무슨 담배냐”며 갑 채 빼앗아 자기만 피운다.

오히려 내가 담배를 구걸하도록 만들었다. 좌우지간 보통 내공이 아닌 의문의 걸승이다.






이 날은 오래된 인사동 꼴통들을 자주 만났다.
돌 위에 자리 잡은 사람에게 카메라를 들이댔더니, “문호형님 아입니꺼?”라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올려다보다 지산이었다. 이 인간 이야기 꺼내려면 날 샐 것 같아 그만해야겠다.






그 날은 막사발로 통하는 김용문씨를 비롯한 서울공고 동문들의 단체전이 있다기에 ‘나무화랑’에 올라갔다.
석심 미술전이라 이름 붙였는데, 돌에는 마음이 없으니 보나마나다.
김용문씨를 내세운 아마추어 동문들 전시였는데, 아는 분이라고는 김용문씨와 김진하관장 뿐이었다.






날씨도 내 마음처럼 왔다 갔다 했다.
비오다 더웠다 들랑날랑 하니 사람들도 많았다 적었다 날씨 따라 갔다.
‘유목민’에 자리 잡았으나 시간이 이른지 손님도 없었다.
오가며 만난 아는 사람이라고는 이수호선생과 김명성, 공윤희, 유진오, 전활철, 박혜영씨가 전부다.






그나저나 술이 취해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다들 늦게나오는데, 나오기도 전에 내가 취해버렸으니 어쩌랴!
다음부터는 오후 여섯시 이전에는 절대 나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장경호, 유진오씨를 남겨두고 삼십육계 줄행랑 쳤다.






아! 살아남기 힘들다.

제발 셋째 수요일을 기억해다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1일, 인사동에서 술 한잔하자는 조준영시인의 전화를 받았다.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인사동이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하나의 의식 같은 모임이다.






모이기로 한 ‘유목민’으로 가다 ‘갤러리 이즈’ 앞에서 아르바이트하는 Lucy양을 만났다.
언제나 쉴 틈 없이 초상화를 그리는 그녀지만, 마침 혼자 있었다.
모처럼 이런 저런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았다.






홍익대 3학년인데, 학비 마련하러 인사동에서 일 한다는 것이다.
한 장 그리는데 팔천 원씩 받지만, 그리는 량이 많아 수입은 짭짤하단다.
돌콩 같은 조그만 녀석이 참 기특했다.






그래서 나를 그려보라며 Lucy양의 모델이 되어 주었고,
Lucy양은 나의 사진모델이 되었다.
얼굴 특징을 잡아내기 위해 연신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이 참 예뻤다.
낯선 소녀를 이토록 가까이에서 쳐다볼 기회가 어디 있겠는가?
잠시 소녀의 미모에 넋을 놓고 있는데,
‘유목민’으로 가던 장경호씨와 안원규씨에게 덜미 잡힌 것이다.






초상화를 그리는 시간은 십분도 채 걸리지 않았지만,
내 꼬라지가 하도 지랄같이 생겨서인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완성된 초상화를 받아보니 너무 미화시켜 놓았더라.
대개 예쁘거나 근사한 자신의 모습을 원하겠지만, 대 실망이었다.




 


이가 빠지면 빠진 데로 주름살이 있으면 있는 데로 리얼하게 그려야 하는데,
닮은 것이라고는 안경테와 콧수염뿐이었다.
주변에 그려 넣은 색이나 카메라도 산만하게 느껴졌다.
거리에서 돈은 벌지 모르겠으나, 본인 작업에는 도움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더니,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조준영씨를 비롯하여 김상현, 이한성, 전강호, 장경호, 안원규씨가 먼저 와 있었고,
뒤늦게는 공윤희씨가 나타났다. 번개 팅도 아닌데 참석률이 저조했다.






더욱 김빠지게 하는 것은 분위기를 정화시키는 여인이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자래야 기껏 연극하는 이명희씨와 사진하는 정영신씨 정도겠지만,
그래도 구색은 맞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침 구석자리에 사진하는 분들이 여럿 와 있었다.
한기현씨가 두 차례나 인사하며 언질 주었건만, 이야기하느라 가보지 못했다.
아마 그날 희수갤러리에서 열린 박경태씨의 ‘마주한 기억’ 전시를 본 후
‘유목민’에서 한 잔 하는 것 같았다.






담배 피우러 나갔다 들어오니, 다들 나가려고 술값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행 중 한 분이 한옥란교수를 닮아 깜짝 놀랐다.
자세히 보니 한참 젊은 미녀였는데,

뒤늦게 페친 신청한 이름을 보니 노미경씨였고, 안명현씨도 있었다.
다들 헤어지기 아쉬워 부랴부랴 기념사진을 찍었지만, 송구스러웠다.
다음 만날 기회 있으면 꼭 술 한 잔 올리리다.






술이 얼큰해지니 갑자기 졸리기 시작했다. 나만 조는 것이 아니라 장경호씨도 졸았다.
지난 밤 너무 더워 잠을 못이루어, 둘 다 졸음이 몰려 온 것이다.
먼저 가 쉬라는 조준영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줄행랑쳤다.
같은 버스를 탄 장경호씨와 번갈아 졸기 시작했으나, 다행히 내릴 곳을 놓치지는 않았다.






구월 모임에는 많이 불러 모아 좀 재미있게 놀아 봅시다.

그리고 모임의 이름이나 인사동에서 해야 할 일을 의논하는 등 모임의 틀도 짭시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7일은 고 노회찬의원의 영결식이 있던 날이다.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하려던 당초의 계획은 엉뚱한 일로 무산되고 말았다.

용산경찰서사이버수사대에 출두하여 조사받는 날과 겹쳐진 것이다.


 

3년 전 수난 당하는 동강할미꽃, 최초 발견한 사진가는 이석필씨다.”란 글을

인사동 사람들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는데,

뒤늦게 야생화 사진작가 김정명씨가 명예혜손으로 고소장을 접수시킨 것이다.

고소장이 접수되었다는 연락을 받은 지가 숱한 시일이 지나도록 감감소식이었는데,

뒤늦게 주소지인 용산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그가 찍어 발표한 동강할미꽃 사진이 야생화의 생태를 헤치는 잘못된 방법이라는 점과

알려 진 내용이 사실과 다른 점을 바로잡기 위해 블로그에 올렸는데, 그 내용이 명예훼손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사실과 달리 동강할미꽃 최초촬영자로 나서며 정선군의 명예군민증까지 받지 않았던가?

동강할미꽃 사진은 그가 촬영하기 10년 전 태백의 야생화사진가 이석필씨가 먼저 찍었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1999년 동강환경사진집에 실린 이석필씨의 동강할미꽃 사진만 하더라도 김정명씨가 만든 야생화 달력보다 앞서고 있다.

    

 


문제는 누가 먼저 찍었냐보다 동강할미꽃에 스프레이로 물을 뿌리거나 꽃에 붙어있는 마른 풀을 뜯어내는 등

생태환경을 파괴하여 내 놓은 그의 사진에 있는 것이다.

야생화사진을 심사할 위치에 있는 중견사진가의 꽃 사진이 그러할진데,

어찌 사진 배우는 아마추어 사진인들이 그의 사진을 따르지 않겠는가?

그 글을 올린 것도 따라하는 아마추어 사진인들의 만행을 근절하기 위한 자구책이기도 했다.


 

야생화사진이란 생태를 파괴하는 것 보다, 자연환경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좋은 사진이라는 것이지,

김정명씨 개인에 대한 감정이 있거나 명예를 혜손시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변명으로 일관된 고소장을 읽어보며, 부끄러움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도 새삼 알게 되었다.

몇 가지 챙겨간 증거자료를 제출하며, 수사관의 질문에 답변하다 보니 조사시간이 세 시간을 훌쩍 넘겨버렸다.

    

 


살다보니 별일도 다 있다며 동자동으로 돌아왔으나, 곧 바로 인사동 유목민으로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조준영 시인으로 부터 모처럼 인사동에서 술 한잔하자는 사발통문을 받은 것이다. 

반가운 인사동사람들을 만나는 일이야 마다할 수 없지만,

노회찬의원의 영결식이 있는 27일까지는 술을 마시지 않기로 한 스스로의 약속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그동안 술자리가 여러차례 있었지만 이가 아프다는 핑계로 술을 사양해 왔고,

그제 밤에는 어머니 제사를 지내면서도 음복 한 잔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약속장소에는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조해인, 장경호, 공윤희, 전활철, 박혜영, 김상현씨가 먼저 와 있었고,

뒤늦게는 유진오, 정영신, 이인섭, 이 현, 황예숙, 박상하씨도 나타났다.



모임의 화제는 자연스럽게 인사동 사람들블로그에 올라오는 글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내용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때로는 당사자의 반감으로 사람을 잃을 수도 있다는 걱정들을 했으나,

잘 못을 지적하고 바로 잡는데 어찌 친분을 따질 수 있겠는가



오는 8월25일 아들 햇님이 장가 갈 걱정에서 부터, 속도위반으로 손자를 얻어 일타 쌍피를 쳤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는데,

하필이면 사돈 될 두 내외가 16년 전 영월 천포문학회에서 거시기 퍼포먼서로 난리 친, 그 집 주인이라는 이야기를 꺼냈더니,

조준영교수는 한 수 더 떠 내가 찍은 그 때 사진을 핸드폰에서 보여 주었다.



조준영교수는 쪽 팔린다며, 부인의 투정을 털어 놓기도 했다.

화가 이청운을 검색해보니, 죄다 조준영씨와 술 마시는 사진만 나오더라는다.

"이젠 같이 마시고 싶어도 마실 수 없는 처지가 되었으니, 너무 탓하지 마시라요."



사실 사진판이나 문화예술계는 물론 즐겨 찍는 인사동이나 동자동 사람들 대개가

가깝거나 잘 아는 분들이다.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 이야기를 쓸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 부터라도 정신차려야 하는 것은, 나이 들어가며 더 이상 쪽팔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나중엔 왕따가 되어 외로워지더라도 내가 할 마지막 일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노회찬의원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피할 수 없는 관심이었다.

문대통령이 문상은 가지 않으면서 장례기간 중에 광화문 호프집에서 젊은이들을 만나 맥주 쇼를 벌였다는 이야기다.

정치 자체가 쇼를 필요로 하는 것이겠지만, 정치적 동지로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기야 박원순 시장까지 옥탑방에서 쇼를 벌이고 있지 않는가?

문제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그런 쇼에 넘어가는 순진함에 있다는 것이다.


 

장경호씨는 인사동 모임을 묵사모로 하자고도 했다.

민초연대로 하면 참여할 사람이 많겠지만, ‘묵사모가 더 좋다는 것이다.

말없이 마음속으로 생각한다는 默思의 뜻은 좋으나 단번에 묵사발이란 말부터 떠올라 좀 그랬다.

하기야 모임의 진정성이 더 중요하지 그까짓 이름이야 무슨 소용이랴!

단지, 술 마시고 노는 모임에서 인사동을 위해 뭔가 보탬이 되는 모임으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나도 모르게 술을 마시고 말았다.

고인도 그 시간엔 편히 영면에 들었겠지만, 숱한 시름을 술잔에 풀어놓고 말았다.


 

부디 이 땅에 진보정치가 뿌리 내릴 수 있도록, 하늘나라에서나마 잘 지켜주소서!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지난 11일은 낮술에 취했다.
컴퓨터를 열어보니, 잘 아는 사진가가 다큐사진으로 살기 힘든 현실을 적어 놓았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가슴이 먹먹했다.
그러니, 살아남기 위해 줄서고 눈치보는 사진인이 많아진 것이다.
술 김에 카메라 렌즈가 총구였으면 좋겠다는 악담을 늘어놓았다.






또 다른 댓글은 열 받게 만들었다.
다 아는 사실을, 자기는 뒷 짐 지고 나서지 않으면서 말로만 잘난 척하는 꼴이 거슬렸다. 
그 전에는 그림 그리는 친구가 아주 저질스런 어투의 야유를 페북에 올려놓았다
둘 다 2-30년이나 된 오랜 지기지만, 사정없이 페친에서 잘라버렸다.
무슨 특권가진 대법관 방망이 휘두르듯...






술 취해 늘어져 자는데, 정영신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북촌에서 냉면이나 먹자는데, 배고픈 줄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
하루 종일 밥은 안 먹고 술만 마셨더니 속이 쓰려 죽을 지경이었다.






집 나서기가 무섭게 장경호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인사동 ‘유목민’으로 술 한 잔 하러 오라는 것이다.
냉면은 못 먹어도 콩국수라도 먹자며 정영신씨를 꼬셨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술 취해 저지른 만행이 마음에 걸렸다.
왜 이리 아무것도 아닌 일에 마음이 각박해 졌을까하는 자책이었다.
몇 년 전, 페북에 들어오며 더 그런 것 같았다.
정영신씨 말처럼, 중독되었다고 생각하니 남새 서럽다






이제 마약 같은 페북을 끊는 일만 남았다.
끊는 일이야 간단하겠지만, ‘티브이도 신문도 보지 않으니
세상과 소통은 어떻게 해야 할까?‘ 변명 같은 고민도 한다.






‘유목민’에 도착하니 장경호씨와 전활철씨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이 목구멍에 들어가기 시작하니 깬 술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버렸다.
난, 술 취하면 농담을 자주 하는 편이지만, 장경호씨는 질색을 한다.
술 마시는 코드가 잘 맞지 않는데도 자주 어울리는 것 보면 신기하다.
술자리에서 시시껄렁한 소리나 하며 웃어야지,
거룩한 표정 짖고 앉았으면 뭐하냐? 는 게 내 생각이다.






술에 녹초되지 않으려고 부지런을 떨어댔다.
그 날 인사동 '리갤러리'에서 김용문, 윤진섭 도판화 2인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용문씨가 있다는 술집 ‘시가연’에도 들리고,
인사동 거리에서 노는 외국인 노래 장단에 맞추어 엉덩이도 흔들어댔다.
소울이 있는 친구들이었다.
가게에서 손님 받는 전활철씨까지 데려가 함께 흔들었다.






“노세노세 늙어 노세, 죽고 나면 못 노나니...”

사진, 글 / 조문호
































그동안 해온 사진 작업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되었다.
공익을 위해서는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피할 수 없다는
오래된 인식을 바꾸게 되었다.

대개 본인이 원하거나 묵인할 때 찍지만,
더러는 원하지 않을 경우도 있다.






흔한 예로 잠든 노숙인을 찍을 때가 그렇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아닌 것도 아닌데, 
찍고나서 양해를 구한다 해도 찍는 순간은 도둑사진일 뿐이다.
사람을 위해 사람을 찍는다는 공익에 대한 명분도
한 사람의 프라이버시 앞에서는 무참하게 무너져 내린다.



뒤늦게 고민에 빠지기 시작한 일주일 전부터
습관처럼 찍어 온 동자동 사진도 이전처럼 노출할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마음을 굳힌 것은 어저께 장경호씨 집에서 찍은 사진 때문이다.
알리지 말라는 후배의 말에도 사는 처지가 딱해 노출시켜 버린 것이다.
본인이 보았는지 모르지만, 심한 자책에 시달린 것이다.
사람을 위한다며 당사자의 뜻이 무시된 사진이 어디 이 뿐이겠는가?
그래서 사진을 내리며 생각을 바꾼 것이다.






평생을 사람만 생각하며, 사람을 찍어 왔지 않았던가.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말도 어쩌면 헛소리일 뿐이다.
종국엔 지구의 모든 것이 사라질테니까.

그러면 앞으로 동자동과 인사동 사진은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서로가 통하는 사람 대 사람의 일대 일 기록 말이다.
이제부터 블로그에 올리는 사진도 본인이 수긍할 수 있는
다섯 장 이내로 제한하기로 했다.






여기에 올린 사진은 지난 토요일 찍은 사진이다.
사진을 부탁한 쪽방주민 조인형씨와 노숙하는 유정희씨다.
조인형씨는 빵 타기 위해 찬송가 적힌 순서 표를 들었고,
유정희씨는 머물고 있는 처소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날따라 원로사진가 황규태선생께서 동자동을 방문해 맛있는 음식을 사 주셨다.
나뿐 아니라 동자동 친구 이기영씨 까지 고마워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일요일 오후,  인사동 ‘유목민’주인장 전활철씨, 사진가 정영신씨와 함께

몸이 아파 꼼짝 못하고 드러누운 화가 장경호씨 위문공연에 나섰다.

다들 ‘그동안 술이 얼마나 고팠을까?’걱정했지만, 사실은 우리가 더 고팠다.
연서시장에 들려 안주를 잔뜩 장만했다.
곰장어구이에다. 가자미찜, 메밀국수까지 사들고, 불광동 집으로 쳐들어갔다.






전화 목소리는 생생했으나, 일어나기 힘들어 그런지 나오는 시간이 한참 걸렸다. 
독거의 설움이란 몸이 편치 않을 때일수록 절절할 수밖에...
마석에서 불광동으로 이사 온지가 몇 달 되었으나 집들이도 못 갔는데,
결국 집들이가 아니라 병문안이 되고 말았다.






아픈 원인은 작업하는 자세가 불편해 생긴 신경통 같은데,

작년에 나도 그 병으로 입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병원에도 가지 않고, 파스만 쳐 바르고 있었다.
아이고, 이 고집불통을 어찌해야 할까?
내일 차 끌고 와 병원에 가자고 했으나, 기어히 필요없단다.






집 안을 둘러보니. 귀가 막혔다.
사람 사는 집에 냉장고는 커녕 냄비 하나 없었다. 
밥은 커녕 라면도 끓여 먹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집안에는 화구와 그림들만 있었고,
먹다 남은 말라비틀어진 만두 두 알과 빈 우유팩만 딍굴었다.






내가 사는 한 평도 되지 않는 쪽방도 냉장고와 냄비 등 기본적인 것은 다 갖추고 사는데,

이렇게 넓은 집에 살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하기야,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큰 집을 구했다지만,
이 집 달세가 장난이 아니란다.
벌이도 신통 찮은 환쟁이 주제에 어떻게 버티는지 모르겠다.






카메라를 들이대니 ‘보도금지’라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쪽팔려 그러겠지만, 가난한 작가들이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가 찍힌 사진을 올렸다 지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에 걸렸다.

문제는 가난해 지면, 그 가난의 늪에서 쉽게 벗어 날 수 없는 현실이다.
체면이 무엇인지, 다들 정부에서 준다는 쥐꼬리만한 복지마저 마다하지 않았던가?
돈이 사람을 망치는 요물이지만, 최소한 먹고는 살아야 할 것 아닌가?






마음이 편치 않아, 가져간 술에 우리가 취해버렸다.
내일 다시 들리겠다며 나왔더니, 기다렸다는 듯 호출이 왔다.
어느 소장자가 이청운씨의 못 본 작품을 보여 주겠다는 것이다.
그림 값이 만만찮은 이청운씨도 어렵게 살기는 마찬가지다.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작업 못한지가 오래되었는데, 비싸면 무슨 소용이던가?






대관절 작가는 누굴 위해 종을 울리는지 모르겠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버는 격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9일 저녁 무렵, 화가 장경호씨로 부터 전화가 왔다.
인사동 ‘유목민’에서 술 한 잔 하자는데,
피차 징그럽지만 어쩌겠는가?

요즘 관 같은 쪽방에 누워 꼼짝도 않고 지내는데,
귀찮지만 일어나야 했다.






꾸물대다 한 참을 지나서야 ‘유목민’에 도착했는데,
그 자리에는 장경호씨 외에도 영화감독 이정황씨와 최명철씨도 있었다.
엊그제 김구 전시 뒤풀이에서도 보았지만, 다들 반가웠다.

잘 챙겨먹지 않는 것을 아는지, 이 감독은 앉자 말자 밥부터 챙긴다.
옆에 앉아 계속 밥 숱 가락에 반찬을 올려 주는데,
마치 죽은 울 엄마가 살아온 것 같았다.






옛날엔 밥 먹어라는 소리가 그렇게 싫었으나, 세월이 지나니 그리웠다.
얼마나 밥 먹는 걸 귀찮아했는지,
마누라 혈압 올렸던 일도 대부분 밥 때문이다.






호강에 바쳐 요강에 똥 싸는 소린지 모르지만,
동자동에선 밥 먹으란 소리하는 사람 없어 너무 좋다.
배고프면 빵으로 간단하게 해결하니, 설거지도 필요 없다.

그런데, 그 역할을 지금 이감독이 하고 있으니, 죽을 맛이었다.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결국 한 그릇 다 비우고 말았다.






그날의 술 안주는 요즘 뜨는 김정은이었다.
김정은이를 좋아하는 사람들만 모인 것이다.
하기야 요즘 김정은이 싫어하는 사람은 자한당 패거리 말고는 없을 것이다.


빨간색의 자한당이 빨갱이를 싫어하는 것도 그렇지만,
어쩌면 평화를 싫어하는 자한당이 빨갱이가 아니던가?






아무튼, 이번 북미정상회담에서 핵 폐기에 따른 보상을 충분히 받아야 한다.
그건 핵 포기에 따른 보상이 아니라,
미제국주의의 패권을 위해 한반도에 끼진 패악의 대가다.


제주 4,3사건을 비롯하여 죄 없는 국민들의 목숨은 얼마나 앗아 갔는가?
그 피의 대가를 김정은이가 받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날의 술잔은 회담 결과를 앞당긴 축배나 마찬가지였다.
이정황감독이 쏜 평화 기원 주에 모처럼 행복했다.



사진, 글 / 조문호











622일부터 715일 까지 메멘토, 동백으로 이어져...



작가 강요배


 

제주의 역사와 자연을 그리는 화가 강요배의 현재와 과거로 이어지는 2부작전이 지난 25학고재에서 개막되었다.

617일까지 열리는 1부작 ()을 찾아서는 말 그대로 마음에 들어 온 상의 정수를 뽑은 역작들이다.

제주 풍경과 자연의 벗들을 윤기 없이 거칠게 그려 낸 심상풍경 30여점을 내 걸었다.



1부 '우레비'를 관람하고 있다. 2017 Acrylic on canvas 259


 

전시되고 있는 ()을 찾아서622일부터 715일까지 보여 주게 될 4,3을 그린 2부 작품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2메멘토, 동백이 과거였다면, 1상을 찾아서는 현실일 뿐 일맥상통 한다.

제주의 거친 바람이 느껴지는 묵직하고 느릿한 색에 민중의 한 같은 것이 깔려 있었다.



1부 치솟음 2017 Acrylic on canvas 259X194cm

    

 

작가 강요배는 그 한의 늪에서 결코 빠져나오지 못 할 것으로 생각된다.

어쩌면 바닥에 깔린 한이 강요배 그림의 백미인지도 모른다.

나 역시 제주4·3항쟁 연작을 발표할 때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 그림들이 주는 한의 울림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2부 부모들 1992 Acrylic on canvas 130,3X162,1cm

    

 

강요배의 아버지는 1948년 봄, 제주 4·3 항쟁을 몸소 겪었다.

육지에서 출동한 토벌대는 빨갱이라는 명목아래 사람들을 색출했다고 한다.

같은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당사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처형당했다.

순이, 철이 같은 당시 많이 사용한 이름을 가진 사람은 이유도 모르고 억울하게 죽어야 했다.

강요배의 아버지는 그 참담함을 지켜보며 자식 이름은 남들이 같이 쓸 수 없는

이름 글자를 찾아 (요나라 요), (북돋을 배)를 써서 '강요배'라고 지었다고 한다.



1부 한조1, 2018 Acrylic on canvas 90,5X72,5cm

    

 

일찍부터 그림에 관심을 가진 그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81현실과 발언동인으로 현실과 시대, 그리고 역사와 미술의 문제를 고민하며 '인멸도'(1981), '탐라도'(1982),

'장례명상도'(1983), '굳세어라 금순아'(1984) 등의 시대적 모습을 담아내는 민중미술가로 활약했다.

소설가 현기영씨의 '바람 타는 섬'에 그린 한겨레신문 삽화로 제주 4·3 항쟁에 대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2부 자식을 묻는 아버지1991 Conte on paper 38,7X54cm

 


슬픔과 분노로 얼룩진 4.3 역사화를 완성한 '강요배 역사그림-제주민중항쟁사'전은 4·3의 현실을 세상에 알리며,

역사 주제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제주에서 일어난 잔인한 학살의 충격은 제주4,3을 다시 인식하게 만든 것이다.



2부 잠녀 반일 항쟁1989 Pen and blank ink on Paper 38,7X53

    

 

1992년 서울 생활에서 더 이상의 의미를 찾지 못한 그는 고향 제주로 돌아와 지도를 들고 제주의 자연을 찾아 나섰다.

제주의 역사를 알고 나니, 자연 풍경이 조형적 형식이 아닌 감정이 담긴 대상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1부 항산 2017 Acrylic on canvas 197X333

    

 

이번에 전시한 ()을 찾아서2015년 보여 준 이중섭미술상 수상 기념전에 이은 삼 년만의 서울전이다.


코끼리''자도 '코끼리를 보지 못하던 옛날의 상형문자로, 유골을 보고 만든 그림 글씨'.

'()’은 형상, 인상, 추상, 표상 등의 미술 용어에서 이미지를 뜻하는 글자다.

인상적이다 는 것은 마음에 찍혔다는 것으로 그 찍힌 상을 끄집어내는 것이 이번 작업이다.



2부 토벌대의 '포로' 1992 Acrylic on canvas 97X162cm



전시된 작품들은 가까이서는 색과 색이 겹쳐 형상이 뚜렷하지 않지만, 뒤로 몇 걸음만 떨어지면 확연히 보인다.

파도가 바위를 치고 올라가는 장면이나 한라산 정상의 설경, 푸른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 등

전시장에 걸린 그림의 형태는 뭔가 분명치 않지만 어떤 '풍경'이나 장면으로 보였다.

'언젠가 본 듯한 장면'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역사의 무게와 깊이까지 느껴진다.



2부 젖먹이 2007 Acrylic on canvas 160X130cm


사생보다 기억으로 그린 이번 그림들은 한국인이 표출한 동양적 이미지, 즉 진경화(眞景畵)라고 평했으며,

추상(抽象)’으로 꺼낸 제주풍경은 "회화가 추구하는 본질을 꿰뚫었다'는 평가도 받았다.



2부 천명 1991 Acrylic on canvas 162X250cm

 


마음에 파고 든 심상을 추상으로 꺼냈다지만, 추상같은 구상이고, 구상 같은 추상이었다.

강요배씨는 '추상(abstrac)'이라는 뜻도 재해석했다.

"지금까지 추상이라는 말도 오인되어 왔다. 라틴어에 abstract'축출한다', '끌어낸다'는 뜻이 있다.

애매하게 그리는 것, 기하학적으로 그리는 것이 '추상'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서 끄집어내는 것이 추상이다."고 말했다.


    

1부 수직, 수평면 풍경 2018 Acrylic on canvas 130X161,7cm

 


그런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강요배 작품에 깔린 한의 무게다. 누가 강요배 만큼 한의 뿌리가 깊겠는가?

22년 전 서울에서 귀향하여 현장을 돌아다니며 삭이고 삭인 한이다.

그는 붓도 빗자루나 말린 칡뿌리, 구기거나 서너 겹 접은 종이 붓을 만들어 쓴다.

20년 이상 써온 '종이붓'으로 상처받은 한의 정서를 유감없이 드러내었다.

거칠지만 노련한 붓질로 속도감은 물론 소리까지 담아내는 듯하다. 그렇게 그의 심상을 표출한 것이다.





마치 시골 아저씨 같은 인간적인 면모도 강요배의 또 다른 매력이다.

바람이라도 불면 픽 쓰러질 것 같은 비쩍 마른 몸으로 실없는 웃음을 날리는 그의 모습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맛이 있다.

친근하면서도 진솔한 인간적 끌림이다. 그의 의리도 여간 아니다.

이번 전시의 뒤풀이를 주최 측인 학고재에서 가까운 곳에다 준비해 두었건만, 기어이 인사동 낭만으로 간 것이다.

지금은 가고 없는 용태형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그런데 뒤풀이가 있은 그 이튿날 누군가가 페이스북에 올린 동영상을 보니,

술이 취한 강요배씨가 몇 사람 남지 않은 자리에서 용태형의 십 팔번 산포도 사랑을 부르며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 장면을 지켜보는 마음이 찡했다.





그 날 참석한 분으로는 원로 손장섭, 주재환선생을 비롯하여 신학철, 유홍준, 김정헌, 박재동, 임옥상, 민정기, 황의선,

우찬규, 윤범모, 장경호, 조경숙, 김환영, 허상수, 박홍순, 김영중, 김태서, 박 건, 박은태, 박불똥, 안창홍, 김준권, 최석태,

김종길, 이종구, 정동석, 이광군, 김정대, 성기준, 이지하, 마기철, 노형석씨 등이다.



    

 

617일까지 열리는 ()을 찾아서에 이어지는

4,3항쟁을 그린 메멘토, 동백오는 622일부터 715일 까지 열리니 많은 관람 바란다.

학고재(02-720-1524-6)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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