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에는 장경호씨 호출로 인사동에 불려나갔다.
지방 다녀와 밀린 일 좀 하려니, 그냥 두지 않았다.






저녁 한 끼 때울 겸 인사동 ‘툇마루’로 나갔더니,
최명철씨가 딸내미 보라양을 데려왔더라.
처음인데도, 인사성도 밝고 성글성글한 게 붙임성이 좋았다.






된장비빔밥에 막걸리 한잔 마시고, ‘낭만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장씨나 최씨나, 다들 술에 골았는지 비실비실했다.
쇠 덩어리도 그리 퍼마시고 나부대면 견디지 못할 것이다.






최명철씨는 집에 가자는 보라 데리고, 먼저 퇴청한지라 그만 일어나야 했다.
안주로 시켜놓은 가자미찜이 그대로지만 보영이 더러 싸 달라고 했다.
귀찮아도 가져가면, 내일 아침식사는 폼 나게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만 돌아갔으면 좋겠으나, 다시 ‘유목민’에 들어갔다.
옆 자리에는 화가 강행복씨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장경호씨 몸이 말이 아니었다.
추운데서 웅크려 잤는지, 마치 풍 맞은 것처럼 허리를 펴지 못했다.
혼자 사는 사람은 몸 아픈 것보다 더 서러운 것이 없는데, 걱정이다.






뒤늦게 페북에 들여다보니 최명철씨도 이틀 동안 잠만 자다
결국 병원신세 진다는 글을 보았다.





오나가나 술뿐인 연말을 견디려면, 몸 관리 잘 해야 한다.
살아남아야 마시지...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9일은 술 마시느라 바쁜 하루였다.
전주 문화계 맹주 도예가 한봉림씨가 인사동에 온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논산 강경장에서 열리는 보부상축제에 있었으나,
서둘러 저녁시간은 맞출 수 있었다.






오후6시 무렵, 서울에 도착했는데,
김명성씨와 장경호씨의 전화가 약속이나 한 듯 연이어 걸려왔다.
장경호씨는 최명철씨와 ‘툇마루’에 술판을 벌여놓았고,
김명성씨는 한봉림씨를 맞이해 ‘여자만’에다 술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오후7시엔 ‘로마네꽁띠’에서 열리는
소설가 박인식씨의 시집 출판기념회도 있지 않던가.






먼저 들린 ‘툇마루’ 입구에는 화가 장경호씨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새김아트의 창시자 정고암씨의 모습도 보였다.
제주를 다녀 온 최명철씨는 짐 보따리를 옆에 둔 채 술을 마셨다.





급히 막걸리 두 잔만 연거푸 마시고 일어나려니,
최명철씨가 한봉림씨를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안주가 그대로였으나, 술 잔만 비운 채 옮겨야 했다.






‘여자만’에 들려 오랜만에 한봉림씨를 만났다.
몇 년 만인지 아득했으나,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의 여유 있는 너털웃음에 세상설음 다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전주로 이사 간 송상욱시인도 와 있었고,
김명성, 김상현, 김각환, 이상훈씨 등 반가운 분들이 많았다.
회와 탕 등 안주를 잔뜩 시켜놓았으나,
다들 박인식씨 출판기념회 때문인지 마음이 바빠 보였다.






한봉림씨만 ‘여자만’에 남아 장경호씨와 어울려 마셨다.
그 날 따라 가는 곳 마다 술상이 푸짐했으나, 다들 술꾼들만 있어 음식이 줄지 않았다.






담배 피우고 돌아오니, 한봉림씨는 옆 자리 분과 합석해 있었는데,
인사를 나누어 보니, BMC 대표로 있는 조민제씨 였다.
함안 조가의 제자 항렬이면 대개가 일가이기도 했으나, 폐친이라 더 반가웠다.
건너편 자리에는 김종철씨와 신학림씨의 모습도 보였고,

그날따라 눈에 익은 분들이 많았다.






그러나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난 출판기념회에 걸려 술자리가 편치 않았다.
한봉림씨가 기꺼이 자리에 남은 것도, 남은 사람이 마음에 걸려서 일거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이지만, 어쩌랴!



사진, 글 / 조문호





























[스크랩] 서울문화투데이 / 정영신기자


▲ ‘쓴 맛이 사는 맛'으로 인사동 작가전을 연 채현국 선생 Ⓒ정영신


인사동을 사랑하는 작가 60여명 참가,. 수익금은 생활 어려운 작가들에게 

‘쓴맛이 사는 맛’이라는 이름을 내 건 이색적인 전시가 지난 15일 오후5시 ‘인사아트프라자’ 3층에서 개막됐다.

'쓴맛에 생각도 하고, 쓴맛에 괴로웠고 아팠지만, 그 쓴맛에 사람이 깊어진다'는 '건달'할배' 채현국'선생의 말씀에 따라, 회화, 사진, 조각, 서예, 도예, 새김아트, 금속공예, 섬유공예 등 인사동을 사랑하는 작가 60여명이 뭉친 것이다.


 

개막식에는 참여작가 외에도 이부영, 임재경, 이애주, 유홍준씨 등 2백여명의 문화계 인사들이 모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이 모인 전시가 쉽지 않은데, 바로 이것이 채현국 선생의 저력이 아닌가 생각한다.



 



  

▲ 전시 축하를 위해 참석해주신 이애주,이부영,임재경,채현국선생(왼쪽부터) Ⓒ정영신


건달할배 채현국 선생은 인사말에서 같이 어울리고 함께 살자는 의미로 이번 전시를 열게 되었는데, 전시회 수익으로 생활이 어려운 문화예술인들을 돕는다고 했다. 욕심을 부린다면 참여 작가들과 함께 남북을 걸어서 가보고 싶다는 말도 전했다.


  

▲ 방혜자선생의 '생명의 숨결' 15호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는 질타로 이시대의 어른으로 추앙받는 채현국 선생은 현재 경남 양산에 있는 효암학원 이사장이다. ‘쓴맛이 사는 맛’으로 세상에 쓴 소리를 거침없이 하는 선생의 시원시원한 입담에 젊은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어른이기도 하다.


  

▲ 주재환선생의 '이곳과 저곳' 캔버스에 유화 90.5x90.5cm,2008


시인 신경림 선생은 ‘쓴맛이 사는 맛’ 전시에 부쳐 “그는 거인이다. 키는 작지만 생각이 크고 시원시원하다/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고 큰 것을 향해 성큼성큼 발도 빠르다/ 그는 젊다/ 나이를 먹으면서도 전혀 늙지 않는다/ 그래서 늘 거침이 없고 늘 싱싱하다/ 게다가 그는 부자다. 돈은 없으면서도 늘 남을 도울 것을 생각하고/ 남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방법을 찾느라 분주하다/ 이웃과 친구들이 다 잘 살길을 찾느라 늘 바쁘다/ 가장 크고 가장 젊고 가장 부자인 그는/ 그래서 이 나라에서 가장 바쁜 늙은이다.”라고 썼다.

이 헌시(獻詩)에 채현국 선생의 삶이 오롯이 담겨있다.


  

▲ 김정헌작가의 '이승과 저승-시원소주' 캔버스에 아크릴과 종이꼴라쥬,91x91cm


채현국 선생의 부름에 놓았던 붓을 다시 들어 그림을 완성했다는 화가도 있었다. 박재동 화백은 개구쟁이 같은 채현국 선생의 초상화를 선보였고, 단색화의 대표작가인 이우환 선생의 작품 등 기라성 같은 예술가들이 출품한 작품으로 전시장은 가득 메워졌다.



  
▲ 민정기작가의 '우리섬 독도 삼형제 굴바위' 105x107cm oil on canvas,2015

이번 전시에 참여한 많은 작가 중 1980년대 이후 민중미술을 대표해온 작가 신학철 선생은 캔버스 위에 포토몽타주, 포토리얼리즘 기법으로 시대정신에 보다 더 가까이 접근함으로써 역사를 관념이 아닌 구체적 실체로서 형상화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특히 그의 작품 ‘모내기’ 그림은 1989년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로 당국에 압수되었고, 3개월 동안 서울구치소에 수감되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판문점 풍경으로 분단의 아픔을 형상화했다.


  

▲ 신학철 선생의 '가야할 길' 116x81cm,2017


조절된 에너지와 침묵의 힘을 빛의 순간으로 보여주는 방혜자 선생은 ‘생명의 숨결’을 내놓았고, 시계가 멈춘 탄광촌의 삶을 그로테스크한 질감으로 그려내는 황재형 작가는 ‘Bus’를 출품했다.


  

▲ 황재형화가의 'Bus'53ㅌ72.7cm, 캔버스에 유채,1993


비닐과 골판지, 폐품과 종이 등을 재활용해 발랄하고 통통 튀는 작품으로 블랙유머를 시대정신으로 재현하는 주재환 선생의 ‘이곳과 저곳', ‘현실과 발언’의 창립동인으로 비판적 리얼리즘 작가이자 문화운동가인 김정헌 선생의 ‘이승과 저승-시원소주’, 인사동 그림판의 마당발 화가 장경호의 ‘묵시’는 삶에 지친 인간의 초상으로 오늘의 시대정신을 말하고 있다.


  

▲ 장경화화가의 '묵시' 72.7x90.9cm Oil on canvas,2011


조각가 박상희씨는 예수를 안고 있는 부처를 통해 세상의 다툼과 분리에 저항하는 ‘삐에타’를 선보였다. 우주의 근원적 생명과 사랑을 표현하는 화가강찬모는 ‘빛의사랑’을, 키치화풍의 전형성을 재창출하여 미학적 엄숙주의에 빠져있는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던 민정기화백은 우리시대 삶의 풍경인 ‘우리섬 독도 삼형제 굴바위’작품을 내놓았다.


  

▲ 박상희조각가의 '삐에타' 67x53x94cm, mixed media,2012


이번에 작품을 내놓은 대부분의 작가들은 채현국선생과 특별한 인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이다. 채현국 선생은 인사동 허름한 술집을 찾아다니며 가난한 작가들의 술값을 말없이 내주고, 힘들어하는 작가에게는 슬그머니 지폐를 호주머니에 넣어주기도 했다. 호탕한 웃음을 날리며 이 술집 저 술집을 떠돌며 주머니가 텅텅 빌 때 까지 사람 만나기를 계속해 온 구세주 같은 분이었다.


  

▲ 박재동 화백의 '채현국선생' 종이에먹,2017


작가들은 오랫동안 채현국 선생에게 빚진 술값을 갚기라도 하듯, 전시 소식에 망설이지 않고 흔쾌히 작품을 내놓았다. 어려운 예술가들을 돕기 위한 자선바자회지만, 잘 알고 지낸 작가들이 함께 어울리는 이러한 전시는 단발성으로 끝내는 것보다 해마다 했으면 하는 작가들이 의외로 많았다.


  

▲ 강찬모화백의 '빛의사랑' 53x72cm, 한지에 한국전통채색기법및안료,2017


참여 작가인 조문호 사진가는 오래전 인사동을 사랑하는 작가들의 모임인 ‘창예헌’ 사람들이 다시 뭉친 것 같다는 말도 했다. 2008년 창립되어 몇 년 전부터 흐지부지된 ‘창예헌’은 인사동을 사랑하는 예술가 200여명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기능을 상실한 오늘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다시 부활시키자는 예술가들의 목소리가 더 높았다.

채현국 선생은 돈이나 권력은 마술 같아서 아무리 작은 것도 휘두르기 시작하면 썩기 때문에 빈털터리가 되어야 인생이 행복하고 풍요로워진다고 말씀하셨다. 선생이야 말로 염치를 아는 이시대의 진정한 어른이 아닌가 싶다.


  

▲ ‘쓴 맛이 사는 맛'전을 위해 모인 문화예술인들 Ⓒ정영신


건달 할배 채현국과 함께하는 예술가들의 작품전 ‘쓴 맛이 사는 맛’ 전시는 오는 21일까지 ‘인사아트프라자’ 3층에서 열리고, 다음달 12일부터 25일까지는 유카리화랑에서 이어진다. 전시작품을 판매한 수익금은 생활이 어려운 작가들을 위해 쓰인다.


박제동 그림



지난 15일, 가난한 작가들을 돕는 취지의 색다른 전시가 ‘인사아트프라자’에서 열렸다.
‘쓴 맛이 사는 맛’이란 전시로, 채현국선생께서 주변 작가들의 어려움을 헤아려

인사동 마당발 노광래씨를 내세워 마련한 단체전이다.






처음엔 전시 성격이나 명분이 모호해 망설여졌으나, 평소 존경하는 분이라 거절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인기작가 몇을 뺀 참여 작가 모두가 가난한 작가들이라 결국은 우리를 위한 전시가 아니던가?

다들 그런 생각으로 작품을 내 놓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 불경기에 작품이 팔린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고,

팔린다고 해도 잘 나가는 작가 몇 명에 한정될 것이라 전시 명분 찾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대관료와 팜프렛 제작비, 뒤풀이 비용만 고스란히 선생께서 안게 될 것이 걱정스러웠으나,

오랜만에 인사동이 들썩이겠다는 기대감은 있었다.






어쨌든, 인사동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작가 60여명을 규합한데다, 백낙청씨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인사 90여명이 뜻을 같이 하여, 마치 창당 대회 같은 대규모 전시였다.

한편으론 우려 섞인 주변 분들의 지적도 있었지만,

서로 잘 만나지 못하는 인사동 사람들을 모아, 한데 어우러지게 한 것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했다.

가히 이산가족전이라 할 만큼 많은 지인들이 모였는데, 근간에 우리가 이렇게 많이 모여 본 적 있었는가?






작품보다 사람을 더 기다린 전시였지만, 개막시간을 오후6시로 잘 못 알아 한 시간이나 늦어 버렸다.

도착하니 뒤풀이 장소로 옮기고 있었는데, 그 때까지 축하공연은 이어지고 있었다.

전시장에는 반가운 분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인사 나눌 겨를도 없이 닥치는 대로 카메라부터 들이댔다,

그게 내 인사법으로 여겨, 아무도 탓하지 않는다.





전시장은 작품 반, 사람 반이었다. 그 많은 작품을 어떻게 다 걸지 걱정했는데, 용케도 다 걸려 있었다.

한정된 공간이라 유치원생 사생대회처럼 다닥다닥 걸 수밖에 없었으나, 좋은 작품이 산만한 주변에 묻혀 아쉬웠다.

분단풍경을 보여 준 신학철선생의 ‘가야할 길’을 비롯하여 발길 잡는 작품들도 여럿 있었다.






사진 찍기 바빠 작품 감상도 제대로 못하고 뒤풀이 장소로 옮겼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낭만’과 ‘아리랑’으로 갈라져야 했다.

술 마시고 사진 찍기도 바쁜데, 이 곳 저 곳 돌아다니느라 불알에 요령소리 날 지경이었다.

시간이 지나니 하나 둘 빠져나갔고, 잔당들만 유목민으로 몰려들었다.





매월 셋째 수요일마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 술 마신지가 몇 개월 되었지만,

이 날은 채현국선생 덕에 완전 대박 난 것이다. 뒤늦게 나타난 손연칠씨는 전시도 모르고 있었다,

오늘이 인사동사람들 만나는 셋째 수요일이라 나왔다고 했다.

‘부어라 마시어라’ 얼마나 흔들며 온 몸으로 놀았던지, 그 이튿날 죽어났다.

죽어도 좋았던 그 많은 이야기가 절절하나, 자고 일어나니 머리가 하얗더라.






그 날 만난 분들을 떠올려야 하는, 이 부분에서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리고 머리 아프다.

사람은 생각 나는데,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를 뒤적일 때도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사진이 너무 많다.

그 날 카메라 총알이 떨어져, 김재규가 박흥주 권총 빼앗아 박정희 쏘듯,

정영신이 카메라까지 빼앗아 갈겼으니 오죽하겠나? 더러는 정영신이가 찍은 사진도 있다.





낮 시간에는 강민, 방동규, 구중서, 이행자, 김승환, 장봉숙선생 등 연세 많은 분들이 다녀가셨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겠다.


먼저 채현국선생 내외분을 비롯하여 주재환, 임재경, 유홍준, 신학철, 이애주, 서정춘, 장경호, 박불똥, 이인철, 이인섭,

김 구, 김명성, 노형석, 전강호, 이명희, 구중관, 김상현, 임계재, 조준영, 박상희, 황외성, 서길헌, 노광래, 정영신, 이은영,

안영상, 김수길, 하형우, 정명수, 고선례, 신미라, 백남이, 배평모, 강고운, 박구경, 이희종, 최혁배, 전종덕, 김영복, 이두엽,

임경일, 전활철, 이만주, 이지녀, 김종근, 김태서, 박 건, 덕원스님, 박 철, 김봉준, 김효성, 정영철, 최명철, 김이하, 장순향,

김대희, 공윤희, 강선화, 홍석화, 임경숙, 편근희, 유진오, 김형구, 박수영씨 등이다.

이 전시는 21일까지 열리고, 유카리화랑에서 12월12일부터 25일까지 열리는 2차전도 있는데,

벌써부터 전시에 대한 구설수가 많아 걱정이다.

가난한 작가 돕는다는 핑게대고 재미는 엉뚱한 곳에서 본다는...


사진, 글 / 조문호






























































































































































지난11일은 동자동 사람들과 어울려 일찍부터 술독에 빠졌다.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님은 먼 곳에’를 청성 맞게 따라 부르는데,
장경호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술 마시기 좋은 꿀꿀한 날씨라 인사동에 나왔다는 것이다.
가겠다고 말은 했으나, 술이 취해 걱정이었다.
사진 찍는 건 일상이나, 몸 가누기가 불편했다.






인사동에서 ‘툇마루’ 가는 골목을 접어돌다,
그만 난간에 걸터앉은 노인의 발을 밟아 버렸다.
“어이쿠! 미안합니다‘라며 고개를 들어보니, 전각가 최규일 선생이셨다.

야! 너무 반가웠다. 한 때는 인사동을 주름잡은 어르신인데,
원주로 옮기고부터 한 번도 찾아뵙지 못했기 때문이다.
약주라도 한 잔 대접하고 싶었으나, 사모님을 기다리는 중이란다.






아쉽게 헤어지고 ‘툇마루’로 올라갔더니, 반가운 사람이 너무 많았다.
구석에는 장경호씨를 비롯하여 최명철, 김이하시인이 자리 잡았고,
한쪽에는 카페 ‘아리랑’을 운영하는 민요가수 최은진씨 일행이,
입구에는 김발렌티노 일행이 포진하고 있었다.






인사도 나누지 않은 채, 돌아다니며 사진부터 찍었다.
난, 사진 찍는 걸 인사처럼 여기지만, 모르는 사람은 이상하게 볼 거다.
그 뿐 아니라, 술 취해 돼지 목 따는 소리로 노래까지 불렀으니,
밥집에서 쫓겨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김이하촬영



지랄발광을 떨었더니, 그때야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비빔밥 한 그릇을 단숨에 비우고는 도망칠 궁리부터 했다.
더 있으면 영업방해만 될 뿐이기 때문이다.

오늘 명절에 놓친 선물 값 4만원을 동사무소에서 받았는데,
그 걸 내놓고 줄행랑쳤다.
가는 길에 ‘유목민’들려 전활철, 노광래씨 얼굴만 보고 돌아왔다,






쪽방에 들어 누웠으나,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술이 깨야 자는 습관인데다,
술 취하면 인터넷도 손대지 않기로 했으니, 할 일이 없었다.

쉽게 잠들 수 있는 방법이 단 한 가지 있으나, 상대가 없다.
같이 놀아 줄 사람 없는 독거의 설움이 절절한 밤이었다.


사진,글 / 조문호
















김이하촬영



























지난 명절연휴 끝자락에 인사동에서 독거들 밥상머리가 있었다.
장경호, 하태웅씨와 ‘툇마루’에서 만나기로 했으나, 시간이 맞지 않아 같이 먹진 못했다.
장경호씨는 너무 일찍 와 먼저 먹어버렸고, 하태웅씨는 너무 늦게 와 먹지도 못했다.
중요한 것은 술꾼들이 술보다 밥을 먼저 챙겨먹었다는 사실이다.
긴 연휴동안 얼마나 곯았기에...






그런데 오랜만에 ‘툇마루’ 비빔밥을 먹었더니, 너무 맛있었다.
밥 한 그릇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고, 막걸리를 두 주전자나 비워 재꼈다.
장경호씨는 어렵사리 이사한 자기 사정보다, 손장섭선생 작업실을 걱정하고 있었다.
다행히 미대 다니는 아들이 자기가 이사한 연신내로 합친다는 반가운 소식도 주었다.
드뎌 독거는 면했지만, 행여 아들놈 시집살이 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아들 때문이라도 끼니는 좀 챙길 것이고, 술도 좀 줄이겠지.
이야기 중에 치과의사 이세희씨가 죽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 주었다.
‘로마네꽁티’에서 와인을 엄청 얻어 마셨는데, 유난히 건강을 챙기던 양반이 아니던가?
매일 죽는다고 나발 부는 나는 멀쩡하고, 아직 짱짱한 양반이 먼저 죽다니, 세상사 참 새옹지마다.
난, 대장암 걸린 신경림 선생 소식을 전해 주었는데. 제발 무탈하시길 빌 뿐이다.






술 마시다 밖에서 담배피우고 있으니, 그 때야 하태웅씨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술자리 끝났다며, 밥도 한 그릇 먹이지 않고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겨 버렸다.
‘유목민’에는 공윤희, 이회종, 전월봉씨 등 반가운 사람이 여럿 있었다.
취기가 올랐으나 이번엔 소주 한 병을 시켰는데,
화가 전월봉씨가 즉석에서 내 몰골까지 스케치 해주었다.






그런데, 왜 그림에다 보증수표 만원이라 쓰 달라고 졸랐을까?
술 취하면 택시비로 사용하기 위해서일까? 팁 주기 위해서일까?
그 날 장경호씨가 한 말처럼, 정말 세상 잘 놀았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0일은 인사동에서 반가운 사람들 만나 술마실 수 있었던 셋째 수요일이었다.
이른 술시부터 화가 전강호씨로 부터 연락 왔으나, 두 세 시간 지나야 나갈 수 있었는데,
뒤늦게 인사동 ‘사랑방’으로 갔더니, 장경호, 전강호, 두 사람이 나와 있었다. 빈 병으로 보아 장경호씨는 정량을 초과한 듯 싶었다.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더니, 김명성, 이상훈씨가 있었고, 뒤늦게는 공윤희, 신현수, 이인섭, 강찬모, 신성준씨가 차례대로 등장했다.


그러나 술을 마셔도 노는 게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술자리는 조가 잘 맞아야 하니까...
장경호씨는 이미 취해 매사에 시비조였다. 전강호씨가 배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니, 관용을 아느냐는 식이다.





그래서, 다시 자리를 옮겼다.

장경호가 비상금으로 꼬불쳐 둔 신사임당 한 장으로 술값을 내길래, 내가 강찬모한테 탁발한 심사임당 한 장을 주었는데,

'낭만'가는 길에서 최명철씨를 만나 , 그 구리알 같은 돈을 최명철씨 한데 줘버렸다.

이런 싸가지 좀 보게, 그것도 오빠 보는 앞에서...

최명철씨 역시 객지에서 떠 돈지가 오래되어, 주머니가 빈 걸 눈치챈것 같았다.


김용태씨 딸래미 보영이가 장사하는 '낭만'에 가보니, '민미협' 그림쟁이 투성이더라.

이재민, 조신호, 강성봉, 정세학씨 등등, 다 말하다 보면 날 새겠다.






그 날따라 갑자기 열반한 적음(寂音)이 그리웠다.
인사동하면 생각나는 사람으로  민병산, 박이엽, 천상병선생 등 유명세를 떨친 분이 한 둘 아니지만,
선생 분들은 체면 때문에 본색을 들어 낼 수 없었으니, 노는 것하고는 별개 문제다.

단지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적음이만 유일하게 술자리를 유쾌하게 만들었다.


‘월간 뻐꾸기’이야기가 신화로 둔갑한 '월 빠'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대개 알것이다.
자기가 무슨 ‘월간 빠’ 주간이라며 창간과 복간을 거듭하는 ‘월빠’이야기로 좌중을 웃겨댔다.
자기 이야기에 자기가 웃는 것도 그렇지만, 온 몸을 흔들대며 낄낄대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자신은 ‘적음선사’로 불러주길 원했지만, 법명을 뜻하는 “사운드 오브 사이렌스”나 땡초로 통했다.

보면 이 갈리고, 안 보면 보고 싶은 게, 적음이다.



적음선사



술이 취하면 '찔레꽃'을 엄청 청승맞게 불렀다.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참 좋지!


한 번은 정선 만지산 ‘서낭당 축제’ 뒤풀이에서 “긴 머리 소녀”를 불렀는데,
털도 없는 중놈이 '긴 머리 소녀'를 청승맞게 불렀으니, 동네 사람들이 나 자빠진 것이다.
아직까지 만지산 사는 최종대씨는 그 이야기로 적음을 그리워한다,

탁발로 살아야할 중이 대중에게는 손 내밀지 못하고, 가까운 사람들 주머니만 털지만,
그마져 없으면 인사동 ‘실비집’에 퍼져 날 밤을 까며 퍼 마셔댔다.
아는 사람 나타나기만 기다렸으니, 무전취식으로 경찰서 끌려가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다 싶다.


오죽했으면 장경호는 적음 이야기만 나오면 아직도 이를 간다.
미술선생을 할 때인데, 돈 떨어지면 학교 찾아와 수업중인 자기 기다리느라

교무실에서 회전의자 돌리고 있었다는데. 얼마나 징그러웠겠는가?

그래도 끝 까지 술값 보태 준 사람은 전활철, 김명성, 강찬모 등 몇몇사람 있었지만,

적음의 겉모습이 아니라 속 깊은 정신을 아니까...






그는 열다섯 살에 경북 기림사로 출가하였으나, 그 기행은 서라벌예대 문창과에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어디엔들 이 한 몸 머물 곳 없으랴’는 산문집이 잘 팔려나가자 허구한 날 술로 살았다. 있는 대로 퍼 마셨다.
주머니에 돈 한 푼 없어도 택시타고 인사동에서 봉화 ‘청량사’까지 간다.
절에 차 대놓고 주지 불러 택시비 주라니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그것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단지 술 마시기 위해 돈이 필요할 뿐이지만, 한 마디로 돈을 좆같이 본다는 거다.






술을 너무 좋아하니, ‘청량사’ 있을 때도 벼랑 깊은 암자에서 혼자 살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암자에서 하루 머문 적이 있는데, 한 밤중에 부엌에서 그릇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반복되었다,
그 암자에 적음과 나, 두 사람 뿐인데, 누가 그릇을 만진단 말인가?
완전 쫄아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다음 날 아침에 물어보니, 가끔 나한상이 장난 질 친다며 별거 아니란다.


그런데 한참 후에 모령의 애인을 데리고 가서 황당한 일을 당하고 말았다.
산 깊은 암자에 오르느라 너무 피곤한데다, 술에 취해 잠이 들어버렸다.

자고 일어나 눈을 떠보니, 적음도 애인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꼭두새벽에 찾아 나섰는데, 옆 골방에서 신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창호지에 침 발라 구멍을 뚫어 들여다보니, 미쳐 팔짝 뛰겠더라.
보이는 것은 달싹거리는 이불 뿐이었지만, 그 아래서 들리는 신음은 분명 그녀의 신음이었다.

산은 하얀 눈으로 뒤덮였는데,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더라.
도저히, 그 자리를 지킬 수 없어 산으로 기어 올라 청량사를 내려보며 울부짖었다.
“적음아! 이 씨발 놈아~ 적음아! 이 씨발 놈아~” 목 놓아 외치니 산울림은 내 귀에 내려 꽂혔다.

내 얼굴에 침 밷는 격이었다.

내려 와보니, 그 여인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머리 감고 있었고, 적음은 자고 있었다.

그냥 “나무관세음보살~”이라고 지껄일 수 밖에..

아마 꿈 속에서 본 장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일소암 '전경




나중엔 거기서도 밀려나 봉화 수식에 있는 헌 집 하나 얻어 ‘一笑庵’이란 문패 달고 혼자 살았다.
보나 마나 가까이 있는 도예가 신동여씨를 비롯하여 이미 고인이 된 영주의 뮤지션 이종문과

많은 글 패들게 민폐께나 끼쳤을 것이다.


나중엔 마을 사람까지 싫어해 외톨이가 되었는데, 어느 날 발가벗은 알몸으로 열반하고 말았다,
그의 법명처럼 조용하게 세상을 떠났지만, 시신이 방바닥에 썩어 안타까웠다.

그게 바로 적음이다.


열반한 적음선사의 시신이 섞은 자욱





지금 되돌아 보니, 내가 인사동에 연연하는 것도 미우나 고우나 사람 때문이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김종구, 강용대, 김영수는  물론이고, 죽지 못해 발버둥 치며 사는 이청운, 배평모, 신동여,

석 파, 김신용, 장경호, 최울가, 김명성, 김용문, 전강호, 박광호, 이수영, 노광래, 공윤희, 이목일, 전활철 등 등..

아마 사람이 그리워서, 아무 것도 아닌 인사동이란 자리에 목메고 살았던 것 같다.


적음이 남긴 '유적'의 시 한자락이  떠 오른다.

"청동의 푸른 뱀이 / 꿈틀거리고 있는 / 숲길을 지난다 / 무섭지도 않은 등 뒤에 / 스멀스멀 / 실안개 / 따라 붙는다."


사진,글/ 조문호



적음의 열반 소식을 듣고 몰려든 지인들


빈소를 여관방에 차려놓고, 신동여, 석파, 이수영씨가 영정사진을 쳐다보며 안타까워 하고있다.


적음 일주기를 맞아 가까운 이들이 모여 적음을 추모하며 한 잔 마셨다.


아래 사진은 지난 수요일 인사동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지난 11일, 모처럼 인사동에 나갔다.

인사동 ‘고도’에서 열리는 박성남씨 전시에 들렸다가 ‘툇마루’로 갔다.




장경호씨를 비롯하여 김이하, 이승철 시인, 그리고 인사를 나누지 못한 최명철씨도 함께 있었다.

최명철씨는 광화문광장에서 여러 번 본 기억이 있는데, 화가 박광호씨를 너무 닮았다.
이미 술판은 파장이었고, 막걸리 한 두 잔 마시고 나와야 했다.





다들 술이 취했으니, 노래 할 수 있는 술집으로 가자했다.
‘아리랑’으로 갔으나, 이른 시간이라 문이 잠겨있었다.
그 다음 찾아 간 곳이 ‘백상사우나’ 부근에 있는 ‘갤럭시 노래방’이었다.
처음 가본 곳인데, 대뜸 최명철씨가 아가씨 네 명을 불렀다.
술 취한 사내가 여인네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마는
난, 술도 취하지 않았지만 너무 뜻밖이라 걱정 되었다.
한 두 사람도 아니고 짝 맞춘다면, 그 돈은 어쩔건가?





이미 엎질러 진 물로, 양주가 나오고 아가씨 네 명이 사내들 옆에 끼어 앉았다.
최명철씨는 노래하느라 바빴고, 아가씨들은 술 권하기 바빴다.
맨 얼굴로는 도저히 마주 볼 수 없을 것 같아 바쁘게 술을 마셔댔다.
빈속에 들어가니, 금세 본색이 더러 났다.
그 때야 옆에 앉은 여인에게 나이를 물어 보았다. 딸이나 마찬가지였다.


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뭐냐고? 다시 물었다.
한 마디로 돈이라 했다.
돈은 중요한 목적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쾌락이라 고쳐 말했다.
너무 솔직한 대답이었다.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즐길 수 있으니까...





취기가 올라 맞은편에 앉은 여인에게 춤을 추자고 권했다.
파트너였던 김이하시인이 마침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그녀는 40대로, 그중 나이가 들어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춤은 추지 못하지만, 그녀를 안아보고 싶었다.


여인네의 살 냄새에 강한 욕정이 일었다.
몸에서 피가 끊었고 힘이 흘러 넘쳤다.
살아 있다는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금세 한 시간이 지나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다들 술이 취해 시킨 술도 마시지 못했건만, 3차로 ‘아리랑’에 갔다.
‘아리랑’엔 먼저 온 손님들이 이미 놀이판을 휘잡고 있었다.
마실 만큼 마셨으면 그만 헤어지지, 왜 방황하는지 모르겠다.





원님 덕에 나팔 불듯 잘 놀았으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자정이 가까워서야 도망쳤는데, 맡겨 둔 짐 보따리 찾느라 유목민에 들렸다 지하철을 놓쳐버렸다.

술 취한 거지를 어떻게 알았는지, 오는 택시마다 도망치네. 제기랄~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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