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참 빠르다.

문영태화백이 세상을 떠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3년째란다.

 

지난 19일 문영태화백의 3주기를 맞아

김포 월곶면 보구곶리에 위치한 민예사랑에서 문영태 유작전이 열렸다.

두 권의 추모집, “심상석-문영태누가 몰가부를 내놓겠는가출판기념회를 겸하여...


 

그의 작품들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전시된 유작들을 둘러보며 묘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문영태화백이 옆에서 싱긋이 웃고 있는 듯 착각이 들었다.

그 전시공간은 문화백이 많은 시간을 보낸 집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전 그곳에서 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작품 보여 달라니까, 약 올리듯 전시나 한 번 해볼까라는 아리숭한 말을 했던 것이다.


 

전시된 작품들도 사진 촬영할 때의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전시를 준비한 미망인 장재순여사의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었다.

소품의 배치가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절제미를 보여주며 작품을 돋보이게 하였다.

이 전시를 위해 전시장 구조를 바꾸는 대대적인 공사를 벌여 재개관했다는데,

작품 배열에 얼마나 신경 썼는지, 문영태 화백의 체취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의 대표작이나 마찬가지인 상처 난 두개골을 보면, 바로 시대정신이 생각난다.

제일 먼저 문영태씨 그림을 본 것이 시대정신표지에 실린 작품이기도 하지만,

우리민족의 아픔에 앞서, 분노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미술평론가 김진하씨도 이야기했지만,

나 역시 두개골의 상처를 광주항쟁에서 피 흘린 민중의 상처로 보았다.

판화가 오 윤씨의 그림이 동적이라면

그의 그림은 정적이면서도 더 충동질 하는 매력이 있다.



 

민초들의 질긴 생명력과 한()의 정서가 묻어나는 심상석'시리즈는

우리나라 민중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스스로를 내 세우기 싫어하는 선비적 성격으로,

그 작품들이 부각되지 못한 채, 덜 평가되었다는 견해들도 생각해 볼 문제다.


 

신학철선생 말처럼, 그는 지사(志士)의 기질을 가진 사람으로 화가이기 전에 문화운동가였다.

전시와 출판기획은 물론 문화운동가로서, 저술가로서, 더 많은 활동을 펼쳐왔다.

1980년대 초반 서울미술공동체를 시작으로 시대정신’, ‘삶의 미술전’,

해방40년 역사전등 중요한 전시와 출판을 주도했다,

민족미술협회를 창립하고 그림마당 민을 운영하며

민중미술을 확장시키며 현장을 지켜 온 장본인이다.


 

90년대, 지금의 김포 문수산방에 정착한 이후에는

민속학적 문화에 바탕을 둔 저술 활동에 몰두했다.

진보월간지 사회평론'문영태의 한국의 문화, 한국인의 성()'을 연재하였는데,

그의 깔끔한 문체와 독보적인 비평의 글들은 독자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 무렵에는 사진가 이지누씨를 비롯한 16명의 작가들로

'경의선모임'을 결성한 후 사진 작업도 했다.

다들, 그림이나 문학, 사진 등이 예술이기 전에 사회를 변화시키는

하나의 도구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한 작가적 문제의식은 사진집 분단풍경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그 뒤 시인 김정환씨가 대본을 쓰고 자신이 사진을 찍어 두 사람을 출판하는 등

사진작업도 열심히 한 팔방미인이다.


 

이번 유작전은 연필화 심상석’(心象石) 연작부터 사진작업인 분단 풍경까지

고인의 대표작들을 선보이는 전시인데, 그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석기를 연상시키는 돌의 형상으로 민중 신앙을 표현했던 심상석

광주항쟁을 겪으며 폭력에 의한 상처와 정신적 상흔을 상징하는

상처투성이의 형상으로 변해가는 과정도 볼 수 있다,


 

전시장에 걸린 작품들을 둘러보며 남다르게 친밀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생전에 벽에다 쓰 놓은 古風이란 붓글도 그렇지만,

그가 사용한 서재에서 문영태 화백을 증언하는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책이나 집기는 물론 그 어느 것 하나 그의 손 때 묻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문영태화백의 작품과 활동 자료가 담긴 심상석-문영태

그가 집필한 문집 누가 몰가부를 내놓겠는가도 출판되었는데,

뒤늦게 심상석을 펼쳐보며, 도록을 만들고 전시를 추진한

나무아트김진하씨의 안목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정확하게 분석하고 짚어 낸 그의 통찰력도 대단하지만,

찾아 낸 자료를 꼼꼼하게 정리하여

문영태화백의 전모를 제대로 살펴 볼 수 있도록 편집해 놓았다


   

 

그 날 개막식은 문영태화백 미망인 장재순여사와 아들 문지함, 김윤지 내외,

그리고 딸 문지민 등의 가족을 비롯하여 많은 선후배 화가와 학교동문,

문화예술인 10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가 박진하씨 사회로 진행되었다.



    

축사에 나선 민중미술가 신학철선생은 정갈한 선비 같은 모습으로

세상을 바라본 작품하나하나에 그의 인격이 들어 있다고 했다.

그가 그린 상처 난 뒤통수는 분단의 아픔이 아닌가 생각한다며,

통일과 민주화에 열정을 쏟던 그 때 모습이 그립다고도 했다.


    

이재권동문은 학창시절을 회상하며,

영태는 함석헌선생의 장자관을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심취해있었다고 한다.

그림을 보는 관점이나 칼라를 보는 관점도 장자처럼

천하를 너그럽게 놓아두기에 있었다고도 추억했다.


 

그 외에도 성기훈 마을이장과 김정환시인, 김진하, 이인철, 홍선웅씨 등

많은 분들이 그의 업적을 기리며 추모의 인사말을 했고,

자리를 마련한 장재순여사의 감사 인사도 따랐다.

집안 곳곳에 그이의 손길이 남아 더 마음이 아프다

사무친 그리움을 달래기도 했다.


 

그 외 참석한 분으로는 류충렬, 김명희, 박불똥, 안창홍, 장경호,

이재민, 손기환, 김영중, 박정현, 양정애, 정재숙, 정동용, 김 구,

한상진, 김재홍, 최경태, 김종길, 양상용, 노광래, 편근희, 정영신,

나종희, 김영진, 송용민씨 등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늦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그 전에는 유흥준씨가 다녀갔다는 이야기도 했고,

밤늦게는 유연복씨와 김준권씨가 왔다는 소식도 들었다.


 

문영태화백의 유작전은 오는 62일까지 김포 보구곶리에 위치한

겔러리 민예사랑’(010-5357-5256)에서 열린다.

여행하듯 훌쩍 떠나시어최북단 마을의 정취에 빠져 좋은 전시 한 번 관람하기 바란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글 : 조문호
























































































































































그날 찍은 사진들이 하나같이 한변의 촛점이 선명하지 않아 카메라가 고장난 줄 알았는데,

나중에 렌즈를 살펴보니, 막걸리 자욱이 선명하네.

난, 소주를 마셨는데, 그기 왜 막걸리가 들어갔을까?

아마 카메라는 막걸리가 마시고 싶었던 모양이지.

나만 취하면 그만이지, 너까지 취해 버리면 난 어떻해!

사진 물어 내놔~













 

 

 


최북단마을 김포시 월곶면 ‘민예사랑’에서 다음달 2일까지 열려...

[서울문화투데이]2018년 05월 22일 (화) 13:34:56 정영신 기자 press@sctoday.co.kr

 

‘문영태추모위원회’에서 기획한 문영태 유작전이 지난 19일 오후4시, 북한을 눈앞에 둔 최북단마을 김포 월곶면에 자리한 갤러리 ‘민예사랑’에서 개막되었다. 이 유작전은 인사동에서 ‘민예사랑’을 운영하는 미망인 장재순씨가 미술관을 새롭게 개관하며 마련하였다.

민중문화운동가이기도 했던 문영태화백의 유작전에는 80년대 작업한 연필화 ‘심상석’(心象石) 연작에서 부터 사진작업 ‘분단 풍경’까지 고인의 대표작을 한자리에 모아 보여준다.



▲ 심상석-상황, 종이에 연필, 53X53cmX4


3주기에 맞춰 마련한 문영태 유작전 개막식에는 많은 선후배 화가와 학교동문, 문화예술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가 박진하씨의 사회로 진행했다. 축사에 나선 민중미술가 신학철선생은 “선비 같은 모습으로 세상을 바라본 문영태의 작품하나하나에 그의 인격이 들어 있다.

다른 사람은 그의 그림을 어떻게 볼지 모르지만 내 눈에는 분단의 문제로 보인다. 그의 ‘심상석’(心象石) 연작은 어떤 표현도 가능하기에 아직까지 유효하다고 본다. 모더니스트임에도 불구하고 통일과 민주화에 열정을 쏟은 그의 모습이 보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 자화상,종이에 연필, 31X49cm, 2002


이재권 동문은 ”대학 다닐 때의 문영태는 함석헌선생의 장자관을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심취해있었다. 그의 그림 속에도 도를 보는 관점, 칼라를 보는 관점이 장자처럼 ‘천하를 너그럽게 놓아두기’에 있다고도 했다.


린다노클린은 "예술의 목표는 그 시대의 모습을 분석하고 묘사하는 것이며, 예술은 구체적인 모습을 갖는 그 시대의 세계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이상이나 상징보다는 사회적 제 조건과 보다 간접적이고 실질적인 관계가 있다"고 밝힌바 있다.


▲ 장재순'민예사랑'대표 Ⓒ정영신


민중문화운동가였던 문영태는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한 뒤 1980년대 ‘서울미술공동체’를 시작으로 ‘시대정신’, ‘삶의 미술전’, ‘해방40년 역사전’을 추진하였고, 민족미술협회를 창립하고 ‘그림마당 민’을 운영하면서 출판과 전시기획, 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활동을 펼치며 동시대의 삶을 성찰해왔다.


▲ 천지인 115X77X20cm 상석에 조각 1995


화가 박건씨는 1980년 문영태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의기투합해 <시대정신>창간호를 발간하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미술운동가들이 함께 만든 최초의 민중문화운동 담론지로서 나중에 ‘민미협’과 ‘민예총’으로 가는 다리역할을 했다고도 한다. 또한 문영태는 “공공성과 민중문화에 대한 존중감이 높은 선배였다”고 기억했다.



▲ 나무화랑 대표이자 평론가 김진하씨 Ⓒ정영신


‘나무화랑’을 운영하는 미술평론가 김진하씨는 "‘문영태의 심상석 연작은 1977녀부터 1983년까지 종이에 연필로 그린 작품으로 ‘심상석’은 마음의 형상이 새겨진 돌, 혹은 돌에 새겨진 마음이다. 어떤 것이든 무형의 마음이 구체적사물인 돌로 치환하는 마음과 돌이 인과 혹은 등가의 의미를 띄는 단어이다.


▲ 심상석-결합, 종이판화, 44


타제 마제석기를 연상시키는 ‘심상석’작품은 대체적으로 무겁고 심각하다며, 마음이나 정서에 상처 입은 사람들의 한, 혹은 물리적인 폭력에 의해 몸과 두개골 등에 상흔이 새겨진 사람들, 일상적인 삶의 무게와 민중적 생명력에 관한 작가의 시선이 복합적으로 얽혀져 있다.

단단한 돌에 풍화작용처럼 마음의 흔적이 심상(心象)으로 새겨진다는 것은 뭇 생명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생존에의 의지가 긴 세월 인고의 세월을 부침하며 견딘 결과라며, 문영태의 심상석에서 기층 민중들의 질긴 생명력과 한(恨)의 정서가 동시에 묻어난다고 작가론에 적었다.



▲ 심상석 78-3, 종이에 연필, 168X122cm, 1978


특히 문영태는 1990년 경의선모임이란 공동작업체를 만들어 사진 작업도 했다. 문영태가 주축이 되어 사진가 이지누, 화가 박불똥, 유연복, 최민화, 김기호, 김태희, 남궁산, 백창흠, 박 건, 송진헌, 유은종, 이정희, 조경숙, 공예가 김원갑, 이송열, 미술평론가 라원식씨 등 열일곱명이 참여하였는데, 그 결과물로 ‘눈빛출판사’에서 ‘분단풍경’사진집을 펴냈다.

▲ 국도 7번 도로변- '분단풍경'사진집에서


‘분단풍경’ 사진작업 이후로는 김포 월곶리 자택에 칩거하며 평소 관심가진 전통적인 민중성과 민속적인 글쓰기를 통해 기층 민중들의 생활사에 기반 한 민속민예문화를 연구하면서 상처받은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위무할 수 있는 문화를 꿈꾸었고, 그런 민초들의 생명력에서 서로를 보듬는 미술의 민중성을 지향해 왔다.


▲ 시대정신 창간호,1983-1987


새롭게 자리잡은 ‘민예사랑’개관과 문영태 3주기 유작전을 축하하는 자리에는 ‘민예총’이사장 박불똥씨, 화가 신학철, 장경호, 이인철씨, 사진가 조문호, 판화가 홍선웅, 미술평론가 김진하, 동영상을 제작한 양정애씨등 ‘문영태추모위원회’를 비롯한 친지와 많은 지인들이 찾아 와 고인을 추모하며 유작전을 관람했다.



▲ 김포 월곶리 '민예사랑' 전시된 작품 Ⓒ정영신


이날 추모전시에서는 ‘나무아트’대표 김진하씨가 만든 자료집 <심상석·문영태>와 문집 <누가 몰가부를 내놓겠는가―한국의 문화, 한국인의 성>(몰가부-자루 빠진 도끼)라는 책이 출간되기도 했다.

책에는 1990년대 ‘분단풍경 : 열일곱 사람의 경의선 사진작업’ 그룹을 결성하고 분단된 국토의 현장을 직접 답사하며 찍어둔 필름들, 시인 김정환과 공동으로 펴낸 <이 시대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두 사람>, 1996~98 월간 <사회평론 길>에 연재한 ‘문영태의 한국의 문화, 한국인의 성(性)’, 2001년 사진가 이지누와 공동으로 발간한 계간 <디새집>에 연재한 ‘궁시렁 궁시렁 문영태의 집 이야기’ 등 문영태선생의 후반기 글쓰기 작업까지 한데 모아서 엮었다.



▲ 좌)'심상석-문영태'도록표지, 우)'누가 몰가부를 내놓겠는가' 책표지


문영태선생의 유작전은 김포시 월곶면 보구곶리 ‘민예사랑’에서 다음달 2일까지 이어진다.

전시문의 (010-5357-5256 민예사랑)




 



요즘 뜨는 김정은 덕에, '은평 평화공원도 다시 보인다.

지난 토요일, 이청운씨가 평화공원에 나왔다는 정영신씨의 전화가 걸려왔다.

서둘러 나갔더니, 아내와 딸을 대동하여 봄바람 쐬고 있었다.

여지 것 병석에서만 보다 야외에서 만나니, 예전으로 돌아 온 것 같이 반가웠다.


 

병원 갔다 오는 길에 공원에서 잠깐 쉰다고 했다.

둘 다 귀가 어두운데다 말도 어눌해 아내가 통역을 했는데,

서로 눈만 쳐다보며 마음 헤아리는 것이 나을 듯 했다.


 

빤짝이는 그의 눈과 예민한 표정에 기가 살아 있었다.

다시 붓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돌아가는 뒷 모습을 지켜보며 그의 재기를 기원했다.


 

헤어진 후, 전활철씨와 장경호씨를 만나러 기사식당에 가야했다.

같이 식사한 후, 아들 조햇님 선거사무소 개소식에 가기로 약속한 것이다.

먼저 온 전활철씨와 자리 잡았는데, 정영신씨는 이정선씨를 데리고 나타났다.


 

이정선씨는 열린 시대사람을 만나고 싶다라는 두 가지 월간지를 발행하는

팔방미인의 여장부였는데, 기어이 밥 사주겠다며 함께 온 것이다.


 

된장찌개, 생선구이, 김치찌개 등 여러 가지를 잔뜩 시켜놓았는데,

장경호씨가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했더니, 깜빡 잊었다는 것이다.

시간이 없어 밥도 먹지 못하, 선거사무소로 바로 가겠다고 했다.


 

아들 덕에, 선거사무소란 곳도 처음 가 보았다.

남의 일에 구호 외쳐가며 지지해 주는 분들이 고맙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아들놈이 도움 준분들을 소개하며, 쪽팔리게 울어 버린 것이다.


 

그래, 눈물도 날만 할게다.

여지 것 애비라는 게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무거운 짐만 지우지 않았던가?

우는 모습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바뀌지 않았더라.


 

개소식이 끝난 후, 정영신, 장경호씨와 녹번동으로 왔다.

바쁜 걸음 치느라 밥도 먹지 못한 장경호씨는 얼마나 술 생각이 간절했겠나?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다, 평소엔 줄 서야하는 울릉도 물회 집에 들어갔다.

막걸리 세병에 소주 한 병 마셨는데, 그 때부터 손님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눈치 보여 더 앉아 있을 수 없어 가까이 있는 정영신씨 집으로 이동했다.

가져 간 막걸리가 바닥나 상황 버섯주로 끝냈는데, 잘 숙성되었더라.

장경호씨는 햇님이 후원금 주라며 꼬불쳐 둔 비상금을 꺼내놓았다.

편치 않지만, 어찌 성의를 물리칠 수 있겠나?


 

그 날 하루는 희망을 본 하루였다.

더 이상 회생하지 못할 것 같은 이청운의 기가 살아나고,

바닥에서 몸부림치던 햇님이도 이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이 각박한 세상에, 아직 인정이 살아있음을 장경호가 보여주지 않았던가?

 

사진, / 조문호











 




남북정상 회담하는 뉴스에 가슴이 벌렁 벌렁했다.
꿈도 꿀 수 없었던 통일이지만, 이젠 꿈이라도 꿀 수 있게 된 것 같다.
여지 것 살아오며 티브이 없는 것을 이처럼 안타까워 한 적도 없었다.
페북에 올라 온 뉴스로 보았으나, 큰 화면에서 보고 싶었다.


소원이라면, 죽기 전에 정영신씨와 북한 장터나 한 번 돌아보는거다.




이른 시간부터 축배 들자는 장경호씨의 호출이 있었지만,
하던 일만 마무리하고 가려는데,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서둘러 나가다 인사동 돌 턱에 앉아 노닥거리던 공윤희, 민영기씨를 만났다.
둘 다 술시를 기다리는 듯 했으나, 난 기다릴 겨를이 없었다.




몇 발자국 가다 이번에는 죽은 줄만 알았던 까딱이를 만난 것이다.
진짜, 죽은 사람 살아온 것처럼 반가웠다.
사라졌다 잊을 만하면 인사동에 나타났는데,
이번에는 근 이년 가까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숙자라 길거리에서 객사한 줄 알고, 인사동 골동 하나 사라진 것을 아쉬워 했다.




전에는 그를 만나면 도망치기 바빴고, 그는 쫒아오느라 정신없었지만, 이젠 달랐다.

둘 다, 너무 반가워 손을 덥석 잡고 멀건이 쳐다보았는데,
오히려 그가 나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꼬라지가 많이 상했네. 이빨은 어데 팔아 묵었노?”라기에
“자슥, 많이 칼 컬어 졌네, 어디 돈 많은 할마시라도 하나 걸렸나?” 서로 안부만 물었다.
그런데, 또 하나 바뀐 것은 평소처럼 돈 내라며 손을 벌리지 않았다.



같이 술이라도 한 잔 하고 싶었으나, 그는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녹차에 중독되어, 어렵게 탁발하여 녹차를 사 마시는 중놈 출신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다시 보자며, 툇마루로 올라가니, 장경호씨와 박세라씨가 앉아 있었다.
옆 자리에는 테너 이동환씨가 젊은 친구들과 앉아 있었는데,
오늘 ‘통인오페라’를 마치고 후배들과 한 잔한다고 했다.
다들 축하주 마시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기분이 좋아 오늘 통일 만찬주는 내가 쏜다며 페북에 날렸는데.
댓글 올라오는 것 보니, 의외로 통일에 겁먹은 사람이 많더라.


갑자기 죽은 김용태씨가 생각나, 이차로 ‘낭만’으로 옮겼는데,
그 곳에는 성기준씨 패거리가 큰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김보영, 박영애씨 두 모녀를 세워두고, 죽은 용태한테 보낼 사진이라며 한 장 박았다.
그런데, 나올 때 박영애씨가 술값을 받지 않더라. 거지라 불상하게 여겼을까?
그나저나, 용태 주소를 몰라 어디로 부쳐야 할지 모르겠다.




마지막 3차는 ‘유목민’에 들려 임경일씨와, 임태종씨를 만났는데,
다들 기분 좋아 싱글벙글했다.
경상도 성주장 갔다 오는 정영신씨를 불러들여 마지막 축배로 끝냈다.




김정은이 덕분에 이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멋진 놈 인줄, 진정 난 몰랐네.


이러다 내가 받들어 모시는 교주 바뀔지도 모르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셋째 수요일은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 정 나누는 날이다.
인사동 어디서든 반가운 사람들이 인사도 나누고, 차나 술 한 잔하는 날이다.
일 년이 아니라 한 달에 한 번이지만,
인사동을 견우와 직녀가 만난 오작교로 생각하고 많이 들 나오시길...






지난 18일의 수요일엔 원로 문인과의 오찬 약속이 인사동 ‘나주곰탕’에서 있었다.
강 민, 구중서, 방동규, 김승환, 장봉숙씨가 나오셔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곰탕 건더기를 안주로 소주 한 잔 하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대한항공’ 오너 집안의 갑 질에 대한 이야기가 화두가 되었다.
문학평론가 구중서 선생께서는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에 이어,
모든 원인은 가정교육이 잘 못되어 그렇다고 말씀하셨다.
부모가 자식의 거울인데, 어린 시절부터 엄마의 갑 질을 너무 많이 보아 온
자식들이 모두 체질화되었다는 것이다.




요즘 가정교육은 잘 못되어도 한 참 잘못되었다.
자기 자식만 소중한 줄 알고 남을 배려하는 인성교육이 실종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니 대개의 사람들이 개인주의에 빠져 사회 전체가 개판이 되어버린 것이다.


 

방동규선생께서는 가벼운 운동을 습관화 하라는 좋은 말씀도 주셨다.
옛날 새마을 운동처럼 틈만 나면 온몸을 푸는 운동을 하라는데,
순서나 요령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들은 몸의 각도를 어떻게 하라는 등 이런 저런 규칙을 정하지만,
몸에 익지 않으면 자기 편한 대로 하면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기지개를 펴는 것도 하나의 운동이라고 말씀하셨다.




식사가 끝난 후, ‘허리우드’에서 커피 한 잔했는데,
모든 계산을 장봉숙 선생께서 해버렸다.
점심은 쏘겠다고 일찍부터 말씀하셨지만, 찻값은 내가 내야 할 텐데,
낮술에 맛이 가, 허풍떠느라 놓쳐버린 것이다.




그 다음 일정은 ‘나무화랑’에 들려 손기환씨 전시를 관람하기로 했다.

가는 도중 임영주선생을 만나기도 했고, 40년 동안 인사동에서 행상하신 권경선씨도 만났다.

지팡이 짚고 4층까지 오르시느라 다들 고생 하였지만, 좋은 전시를 보게 된 것이다.
김진하관장이 반갑게 맞아주며 친절하게 작품설명을 해 주었다.




선생님들이 모두 떠나신 후, 저녁까지 기다리기 난감하여 사우나탕에 들려
물장난이나 치고 올 생각이었으나, 사진가 김수길씨를 만나 그를 따라 나서게 되었다.
‘부산식당’ 앞을 막 지나는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술평론가 최석태씨의 반가워 하는 모습이 너무 정겨웠다. 몸까지 줄 것 같은...
화가 장경호씨와 ‘부산식당’에서 한 잔하다 지나가는 우리를 본 것 같았다.
그 자리에 퍼져 있다, 다시 ‘나무화랑’에 올라간 것이다.




전시 작가 손기환씨는 그 때까지 도착하지 않았지만,
김정헌씨를 비롯하여 박불똥, 박진화, 윤진섭, 이래훈, 김보중,
한상진, 송 창씨등 많은 화가들이 모여 있었다.
그런데, 김정헌씨가 포장된 액자 하나를 김진하관장에게 전해주었다.
그 그림은 손기환씨가 46년 전에 그린 그림이라는 것이다.



사연 인즉, 김정헌씨는 옛날 손기환씨와 화실을 같이 사용했다고 한다.
김정헌씨는 대학원생 시절이고, 손기환씨는 균명중학교 3학년이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손기환씨가 김정헌씨에게 드린 그림을 여지 것 보관하고 있었다는 자체가 예사롭지 않았다,
일찍부터 손기환씨의 작가적 기질을 알아보았던 모양이다.
전시를 축하하러 오며 아득한 추억 하나 챙겨 왔는데,
손기환씨의 입장에서는 46년 전의 감상에 젖는 또 다른 감회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정겨운 모습이었다. 그림으로 맺은 정의 기나 긴 세월이...




좀 있으니, 학교 수업을 끝낸 전시 작가 손기환씨가 등장하였고,
화가 홍태림씨가 어여쁜 김은진씨를 데리고 나타났다.
그 날 김은진씨와 결혼한다며 청첩장을 가져온 것이다.
처음 알게 된 가족연이지만, 홍태림씨가 가수 홍민씨의 차남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르는 분을 위해 결혼 날자와 예식장을 알려드리오니,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해 주시면 고맙겠다.
5월 19일(토) 낮12시 ‘성균관대학교 600주년 기념관 5층 조병두국제홀’입니다.




술시가 되어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더니, 화가 정복수내외가 오랜만에 등장하였고,
미녀 김정숙씨도 만날 수 있었다.
술자리에는 사진가 김수길씨, 조해인 시인, ‘샘터’ 이종원 편집장이 자리 잡았고,
주인장 전활철씨는 찾아오는 손님 맞느라 분주했다.




조해인씨는 오래 전 방송국 구성작가로 활동할 때 있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려주느라 입에 침을 튀기고 있었는데,
정영신씨의 고향인 함평 손불면 이야기라 귀가 솔깃했다.
그러나 귀가 신통찮아 대략은 짐작이 가지만,
정확한 내용을 모르니 글도 쓸 수 없지만, 정영신씨에게 옮길 수도 없구나.




그 날의 술값은 물론, 돌아 갈 여비까지 김수길씨가 챙겨 주었는데,
이 원수를 살아생전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부디 복 많이 받으시고, 다음 달에는 더 많은 분들 뵙기를 바랍니다.

사진, 글 / 조문호




























































































몇일 전, 조준영교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으니, 인사동 좋아하는 사람들 얼굴 한번보자는 전화였다.
그러자는 답은 했으나, 몸이 피곤해 한 숨만 자고 갈 생각 이었다
한 시간만 자고 가려했으나, 그만 깊게 잠이 들어버린 것이다.
전화벨에 눈을 떠보니, 조준영씨 였는데, 오고 있냐는 거다.
시계를 보니, 지금 쯤 도착했어야 할 일곱 시였다.
엉겁결에 거짓말을 했다. 지금 지하철 타고 가고 있다고...






도착하니 조준영 시인을 비롯하여 뮤지션 김상현, 사진가 김수길, 연극배우 이명희,
화가 장경호, 유목민 주인장 전활철, 박혜영, 유진오, 공윤희씨 등 대략 열 명 쯤 모여 있었다.






전활철씨가 갖다 준 깔치조림에다, 허급지급 밥부터 먹었다. 살아남으려고..
한 잔 한 조준영시인의 목청 높은 소리가 밥숟가락 사이로 흘러왔다.






“박근혜는 뭘 모르는 바보지만, 이명박이는 진짜 나쁜 놈입니다.
그 놈은 돈 밖에 모릅니다. 억지로 잡은 대권도, 대권보다 이권이 먼저입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난, 박근혜나 이명박보다 더 나쁜 것들은 언론이라 생각한다.
명색이 대통령으로 나온다면 그 사람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내어
국민들에게 알려야 하는데, 무슨 득 좀 보려고, 쉬쉬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다수의 국민은 언론이 바람 잡는데로 찍은 것이다.
“얼마나 분하겠느냐? 내 손가락으로 찍은 대통령이 저런 바보였고,
저런 도둑놈이었다는 것이...

” 씨발! 찍은 내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싶다는 말을 많이 했다.






정치이야기 하면 열 받으니까, 가요반세기로 돌아갔다.
임희숙의 ‘진정 난 몰랐네“로부터 남인수의 ’비나리는 호남선‘에 이르기까지
김상현씨의 애절한 노래가 슬펐는데,
갑자기 아마추어 가수 전활철씨가 나타나 ’청춘‘을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갑자기 오랜 울분이 치솟았다.






술자리에서는 아가리 닥치고, 남의 이야기나 듣다가,
술 취하면 조용히 사라질 것을 스스로 약속해 살며시 빠져 나오니,
화가 장경호씨의 술 취한 행복한 노래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뒷동산 아지랑이 할미꽃 피면 꽃댕기 매고 놀던 옛친구 생각난다

그시절 그리워 동산에 올라보면 놀던바위 외롭고 흰구름만 흘러간다

모두 다 어디갔나 모두 다 어디갔나~”





사진, 글 / 조문호






































































서정춘시인의 시가 죽이듯이, 주벽 또한 죽인다.
그러나 한 동안 술을 끊어, 더 이상의 술 꼬장은 볼 수 없었다.
술자리에서 잘 만날 수도 없지만, 만나도 재미가 없다.

예전엔 술만 취하면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져 슬슬 피해 다녔는데,
한 번은 꼬장부리다 기국서씨의 헤딩 한 방에 나가떨어진 적도 있다.
서정춘씨가 말로 하는 꼬장이라면, 기국서씨는 행동으로 하는 꼬장이다.

그러나 막상 술을 끊고 보니, 인사동 낭만 한 자락 잃은 듯 섭섭했다.
가끔은 그의 주벽이 그리웠다.






그런데, 다시 인사동 주당으로 돌아 온 것이다.
지난 2일, 인사동 ‘시가연’의 채현국선생 만찬장에 나타났다.
난, 초장부터 열 받아 퍼 마셨지만, 서정춘씨도 많이 마신 것 같았다.
마이크 잡고 노래도 뽑았으나, 난 나와 버렸다.

참새들의 방앗간 ‘유목민’에 들렸더니, 공윤희씨가 있었다,
좀 있으니 장경호씨가 나타났고, 잇따라 하홍만씨가 서정춘시인을 부축해 왔다.
얼마나 시달렸던지, ‘유목민’에 데려다 놓고 가버렸다.






그 뒤는 너무 취해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밤 세시 무렵, 장경호씨와 택시를 같이 타고 온 기억이 전부다.
그런데, 이튿날 ‘유목민’ 전활철씨의 뒷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다.
전활철씨는 술을 마시지 않은 상태라 술주정을 고스란히 지켜봤단다.

후배 장경호씨에게 존댓말을 꼬박꼬박 써가며 비위를 슬슬 건드렸다고 한다.

술 취하면 장경호씨 꼬장도 보통은 아닌데, 한 판 떠보자는 거 아닌가?
결국은 실구한 ‘호로자슥’이란 한마디에 장경호씨 성질이 폭발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어쩌랴! 죽일 수도 살릴 수도...
그래서 날 데리고 나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 뒤부터 전활철씨가 붙들려, 새벽 여섯시까지 시달렸다고 한다.
나중엔 억지로 택시 태워 사당동까지 보냈다지만,
그 과정에서 넘어져 두 사람이 머리를 찧기도 했다는 것이다.
‘아우야! 머리 아프다’고 했다는데, 아무쪼록 별 탈 없기를 바란다.

인사동 주당으로 컴백한 서정춘 시인의 화려한 입성식이다.
반갑기도, 징그럽기도, 표정관리 안 된다.





서정춘 ‘봄, 파르티쟌’


“꽃 그려 새 올려 놓고
지리산 골짜기로 떠났다는
소식“



사진, 글 / 조문호














화가 황재형씨가 자본 권력의 횡포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며 성토하고 있다.



예술의 생산자인 작가가 돈이 없어 미술관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생겨, 가난한 작가들을 더 슬프게 만들었다. 

주인공이 배제된 미술관이 무슨 필요가 있는지의 논란에, 미술관입장을 자유롭게 해야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난 16일 ‘성곡미술관’에서 열린 ‘해석된 풍경’ 작가와의 만남에서 일어난 이 소란은 작가의 전시 관람을 막아 빚어졌다.
화가라면 다 알만한 중견작가가 전시장에 입장하려는데, 입장권이 없어 안 된다며 막은 것이 불씨가 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화가 황재형씨가, 작가와의 만남에 참여할 수 없다며 노발대발해 한동안 미술관 측의 성토장이 되어버렸다.

솔직히 억눌려 온 자본권력에 대한 성토나 마찬가지였다.



작가 황재형



가난한 작가가 친구 전시 보는데 돈이 없어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되냐?

그 날은 황재형씨 덕분에 화가들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나,

모든 미술관들이 상시 적용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야 한다.



화가 박불똥씨가 자신의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미술평론가 윤범모씨의 총괄기획 아래 진행된 ‘해석된 풍경’은 80년대 이래 한국의 자연과 사회, 인간의 모습을

독자적으로 생산한 작품을 내 걸어, 시대를 재조명하려는 한국 리얼리즘 미술의 실체였다.



황재형작


참여작가로는 강요배, 금민정, 김성룡, 김정헌, 김준권, 김지원, 박불똥, 박생광, 손상기, 손장섭, 송 창, 신학철, 안성석, 안창홍,

오원배, 유근택, 이명복, 이세현, 이제훈, 이종구, 임옥상, 임흥순, 장종완, 조혜진, 홍선웅, 황용엽, 황재형씨등 스물일곱명이었다.



사회를 보는 미술평론가 윤범모씨


지난 16일 오후2시부터 열린 마지막 작가와의 대화에는 윤범모교수의 사회로

이종구, 황재형, 박불똥씨가 차례대로 나와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종구작



쌀포대 작가로 잘 알려진 이종구씨가 제일 먼저 농민들의 애환이 담긴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며 작품을 설명했다.

황재형, 이종구씨 모두가 아버지를 반복해 그린 공통점이 있었고, 초지일관 농부와 광부를 붙들고 작업하는 것도 똑 같았다.

한 때 일산에서 살았던 박불똥씨는 신도시 건설 과정에서 벌어졌던, 주민들과 함께 싸운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작가 이종구



작가와의 대화라기 보다 작가가 작품들을 보여주며 이야기하는 세미나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주인공으로 나온 작가 외에도 장경호, 박 건, 윤병갑, 고 헌씨 등 많은 작가들이 자리를 채웠다.



좌로부터 화가 이종구씨와 박건씨



이 '해석된 풍경'전은 그 이튿날인 17일에 막을 내렸다. '성곡미술관'이란 이름과 함께... 

이 미술관이 자그만치 800억원의 매물로 나왔다는데, 무엇이 들어설까?

더 이상 자본권력이 예술가를 갖고 노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사진, 글 / 조문호




박불똥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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