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태어나, 언젠가는 꽃잎처럼 떨어져 사라진다.

그러나 죽음보다 더 서러운 것은 쉽게 잊혀진다는 것이다.





힘든 세상사, 어쩌면 죽음 자체가 축복일 수도 있겠다.

난, 초상집이 잔치마당이 되어야 한다고 여긴다.

문상객의 슬픈 모습보다 웃는 모습이 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웃을 수 있는 영정사진까지 만들어 두었다.





죽음이란 떠나가는 망자보다, 살아 남은 자의 슬픔이다.
슬픔도 잠시 뿐, 쉽게 잊어버리고 좀처럼 기억하지 않는다는 게 더 슬프다.





흐르는 세월에 잊혀지는 것이야 어쩔 수 없겠으나, 너무 빨리 잊어버린다.
아무리 좋아했던 사람도 조금만 지나면 까마득하게 잊혀진다.

요즘 사람들은 모두 건망증 환자다.






얼마 전, 인사동을 사랑한, 한 여인이 꽃잎처럼 떨어졌다.
그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는 모르지만,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었다.
다 가난이 원죄다. 절망의 벽이 너무 높았던 모양이다.






삶을 끝낸 것보다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은, 모두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무관심한 것은 쪽방촌에 사는 빈민들도 마찬가지다. 강아지가 죽어도 그러지는 않는다.

가족들이 방관하는 시신은 냉동실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다, 태워진다.






돈과 명예를 가진 자의 죽음은 온 세상이 떠들썩하도록 시끄럽지만,

그 여인의 자살은 많은 신문의 어느 한 구석에도 실리지 않았다.

인간이 평등하다는 말만 무성하지, 가진 것 없는 낮은 사람은 죽어서도 외면 당한다.


더러운 세상, 저주의 굿판이나 벌일까 보다.






꽃잎처럼 떨어져 세상을 등진 정성애씨는 참 착한 여자였다.
지난 여름, 우연히 인사동 ‘유목민’에서 찍은 사진이 그녀의 마지막 사진이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하필이면, 장선우 감독의 영화 “꽃잎‘을 배경으로 찍었는데,
80년 5월, 광주에서 죽어가는 엄마를 뿌리친 소녀의 한에 버금가는가?
담배 연기속의 애잔한 웃음에 가슴이 아린다.


우연히 그녀 사진을 만나, 그리운 분의 모습을 찾아 보았다.







“문디 자슥아~ 문디 자슥아~”를 연발하던 천상병 선생은 윙크하고 계셨다.

노자돈 받아 막걸리 사 드시며 흐뭇해 하시던 모습이 그립다.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선생께서 인사동 고서점을 기웃거리는 사진도 있었다.

말씀 없이 웃으시며, 허름한 봇짐에서 붓글씨를 꺼내 나누어 주시던 모습이 아른거린다.

자유분방한 선생만의 필체는 오래된 인사동 가게라면 부적처럼 붙어있다.






선배들은 챙겨주고, 후배들은 다독거리던 ‘민예총’의 거목 김용태씨도 반겼다.

거나하게 술이 취해, 바지춤을 추켜 세우며 부르던 청포도사랑이 듣고 싶어진다.

저승에서라도 재기의 깃발 올리는 '민예총'에 힘을 실어주길 부탁한다. 





민속박물관장을 지낸 김동수선생은 점심 먹자는 전화를 가끔 하셨다.

인사동에 작업실이 있을 때인데, 선생께서도 사무실을 인사동에 두었다.

만나기만 하면 인사처럼 하시는 말씀이 조군 사진 값을 줘야 할텐데...”였다.

인사동 사람들전시 후, 선생사진을 전해 드렸더니 그게 마음에 걸렸나보다.





‘인사동, 봄날은 간다’ 사진전에 오셨던 이계익 장관도 보고 싶어진다. 
노 풍류객의 아코디온 소리가 아직까지 귓전에 생생하다.

그 와중에 민영시인과 연극배우 이명희씨가 나누는 밀담은 무엇이었을까?





혼 술로 속세를 마감한 적음선사도 내 눈에 밟힌다.

땡초처럼 살았지만, 마음은 깊다. 그가 기거한 '일소암'에서만 볼 수 있는 속내다.

정선 '만지산축제'에서 불렀던 '긴머리 소녀'도 잊을 수 없다.

머리카락 한 올 없는 중이 부른 노래라 다들 배꼽 잡았지만, 나는 슬펐다.






별을 그리다, 별 따라 간 강용대 화백,

인사동에서 일원짜리 동전 가진 사람에게 십원짜리로 바꾸어주는 퍼포먼스도 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인사동 거지 까딱이를 반기며, 대작해준 유일한 술 친구였다.

김용문씨의 '옹관장전' 퍼포먼스에서는, 왜 온 몸을 칭칭 감은 시신 역활을 자처했을가?

일찍부터, 더러운 세상 살고 싶지 않았나보다.





인사동 콧수염으로 통하는 김영수는 성질 한번 고약하다.

그는 마음이 상하면 두 번 다시 보지 않는 성격이다.

괴팍한 그의 박치기에 나가떨어진 사람도 여럿 보았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 장례식장 가다 차에 치이는 교통사고도 당했다.

장례식장에 구급차 타고 갔던 귀 막힌 사연이다.





 

문영태는 다리가 불편하지만, 지인들 전시에는 빠지지 않는 의리파다.

그가 그린 심상석을 보여 달래도 끝까지 보여주지 않더니,

결국 죽고 나서 모든 작품을 보여주었다.

저승에서 빙그레 웃고 있을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천상병 선생 뒷바라지로 고생하셨던 '귀천'의 목순옥 여사 모습도 안스러웠다.

천상병 선생 기리는 사업을 그렇게 악착스레 밀어 붙이더니, 결국 빚더미에 오르고 말았다.

마지막까지 돈을 못 구해 전전긍긍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자신을 위한 삶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가련한 분인데...





온갖 기행으로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중광스님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났다.

만나뵈러 댁에 갔더니, 조기를 갈비처럼 뜯어 드시며 어린애처럼 식탁을 어지럽혔다.

사진처럼, 허접한 것들을 보여주며 이게 바로 작품이라는 것이다.

작업실에선 들통에 가득 담긴 먹물을 샤워하듯 온 몸에 부어 쑥대밭을 만들기도 했다.

자우지간 괴짜였다. 저승에서는 어떻게 사시는지 궁금하다.





'인사동 밤안개'로 불리는 목탄화가 여운도 그립다.

인사동 카페 '산타페'에다 양주를 맡겨두고, 술 값 없으면 그 술 마시라는 멋쟁이다.

자신을 위해선 남에게 부탁 한 번 않지만, 어려운 친구를 위해선 손발 걷어 부친다. 

자칭 '전푼련"(전국푼수연합회) 회장이시다. 






온 몸을 비틀며 시를 토해낸 이선관시인,

공단 폐수에 썩어가는 바다를 절규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썩어가는 인간들 정신에 통곡했을 것이다.





기타 하나 둘러메고 인사동을 떠돌던 유랑객 이종문씨는

대마초 한 모금에 세상 시름 다 녹이며, 아름답게 살다 떠났다.





정남규와 홍수진은 둘 다 병들어 떠났지만, 죽는 방식은 달랐다.

정남규는 마당에 있는 감나무에 목 매달아 죽었지만, 홍수진은 병원에서 끌려갔다.

다들 정남규를 나무라지만, 누가 더 현명했는지는 생각에 따라 달라진다. 



 


홍수진의 시 처럼, 그들의 노래는 아직도 잠들지 않았다.





마지막 사진은 얼마 전에 돌아가신 심우성 선생이다.
민속극과 인사동을 온 몸으로 껴안고 사셨지만, 허허롭게 떠난 것이다.

넋전춤으로 선생의 넋을 기리는 제자 양혜경씨가 있어 그나마 위안된다.






그러나 죽는 것만 죽은 것이 아니다.

아무 일도 못한 채, 병석에서 시한부 삶을 사는 사람이 더 불쌍하다.
어눌한 말로 낄낄 거리던 이청운화백 모습에,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세월이 원망스럽더라.






우리 모두, 그리운 사람들 추억이나 씹자.
죽는 것 보다 더 서러운 것은 잊혀진다는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49제를 맞은 지난 23일, 이계익선생을 추모하는 모임이 인사동 한마당에서 열렸다.


추모의 밤에는 친구 분이셨던 송대현선생을 비롯하여 한소라, 구중관, 이만주,

노광래, 권영하, 노광희, 최선옥, 지 윤, 박해환, 양장근, 윤강욱, 김주현, 고일영,

김가중, 정태만, 편근희, 신현수씨 등 평소 고인과 가까웠던 30여명이 모였다.

 

한소라 관장이 마련한 이 추모의 밤은 몇 시간 전에서야 연락받아 알았다.

이계익선생의 49제라기에 일을 미루고 달려갔는데, 마치 연회장 같았다.

한 쪽에서는 구중관씨가 와 계셨고, 그 옆엔 곽대원씨와 배성일씨가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무대 중앙에 내가 찍은 사진들이 스크린에 비쳐지고 있었다.

소천 하셨을 때, 부음과 함께 추억할 수 있는 기록들을 30여장 간추려 블로그에 올렸는데,

그걸 보여주고 있었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백 마디 말보다 선생을 추억하기야 좋겠지만, 당연히 허락을 받아야했다.

연락했더라면 좋은 일에 거절할 리 없다. 오히려 원본이미지를 빌려 줄 수도 있었다.

퍼가지 못하게 잠가 논 걸 해제시켜 말없이 퍼갔다면, 이건 도적질이다.

 

그리고 주인이 나타났으면 뒤늦게나마 양해를 구해야 한다.

무대에서 숱한 이야기를 했으나, 사진 출처까지 밝히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알고도 모른 체 하는지 모르겠으나, 진짜 죄의식을 못 느낀다면 더 큰 문제다.

 

그 자리에서 따질 일은 아닌 것 같아, 사진하는 김가중, 정태만씨와 막걸리만 마셨다.

이계익선생의 생전 모습들을 보니, 지난 생각에 눈물만 나더라.

 

이만주씨의 사회로 차례대로 불려나가 시낭송이나 생전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평소 즐기신 음악들을 연주하며 선생을 기리는 추억의 시간을 가진 것이다.

나도 불려나가 봄날은 간다한 곡 불렀다.

 

사진,/ 조문호
































































인생 말년을 멋지게 연출하신 인사동 풍류객 이계익선생께서 떠나셨다.
요즘 거동이 어렵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그렇게 빨리 떠날 줄은 생각 못했다.

어제 노광래씨로 부터 부음을 받고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어차피 한번은 가야할 길이고, 죽음 자체가 축복이라 생각하지만,
인사동 풍류의 마지막 불길이 꺼졌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장례식장인 ‘서울성모병원’을 찾았더니, 오래 된 영정사진이 낯설어 보였다.
입구에서 만난 도예가 김용문씨를 비롯하여 채현국, 황명걸, 백낙청, 구중관, 이소라,

배평모, 김영복, 공윤희, 노광래, 박진관, 오춘석 씨 등 많은 문상객들이 모여 있었다.

소주를 홀짝이며, 지난날의 선생님을 추억했다.

선생께서는 서울대 나와 기자에서 장관까지 엘리트 코스를 밟은 분이다.
선생말씀에 의하면 은퇴 전까지는 ‘국,영,수’를 충실히 한 모범생으로 살았지만,
은퇴하고 나서야 ‘예체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단다.

그래서 뒤늦게 아코디온 연주를 배우고, 여 운 화백으로부터 그림도 배웠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라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렇게 인사동을 흘러 다니셨다.
그림 전시도 열고, 후배들 전시에서 멋진 연주를 하며 풍류를 마음껏 즐기신 것이다.
가끔 술이 취해 오버하기도 하셨지만, 난 오히려 그런 모습이 좋더라.

언젠가 교통부장관 시절 있었던 얘기를 들려 준 적이 있다.
고속철 개통을 앞두고 프랑스 ‘테제베’로부터 엄청난 로비자금을 받았다는 것이다.
상상도 못할 액수라 청와대로 들고 갔는데, 김영삼대통령의 대답이 재미있다.
“니가 알아서 해야지, 그걸 와 내 한데 묻노?”
정신이 버쩍 들어, 열차 값을 그 이상 낮추도록 하고 돌려주었으나,
솔직히 갈등은 좀 있었다고 한다.
만약 그 돈을 받았다면, 비참한 노후가 되었을 것이라며 가슴을 쓸어 내리셨다.

문상객들이 하나 둘 떠난 자리는 허전했다.
터키에서 교편 잡는 막사발 장인 김용문씨와 ‘K옥션’에 나가는 김영복씨가 남아 있었다.
인사동 원조들만 남은 셈인데, 인사동 이야기를 하다 김영복씨가 말을 꺼냈다.

80년대 인사동을 추억할 수 있는 전시와 책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응답하라 인사동”이란 제목까지 말하는 걸 보니 많이 생각한 것 같았다.
그 시절의 사진들과 그림, 이야기를 한데 묶어보자는 것이다.


80년대에는 김용복씨가 ‘통문관’에 있을 때인데, 강용대와 김종구가 많이 생각난다고 했다.
그 소리에 ‘실비집’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실비집’은 그 당시 유일한 해방구였기 때문이다.
"그래 그 시절 이야기들을 한 번 모아보자." 셋이서 뜻을 모았다. 
그러나 그걸 못 보고 가시는 이계익선생이 원망스러웠다.

멋들어지게 하모니카 불며, 노래 한 곡 뽑으실 텐데...

“선생님 잘 사셨습니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노래 부르며 편히 승천하십시오.
그 곳에는 천상병선생을 비롯한 많은 친구들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거기서 아코디온 연주로 멋지게 풍악 한 번 울려야지 예!“

사진,글 / 조문호
























 


-2008년 7월, 인사동 '소담'앞에서-


인사동 풍류객 이계익(79세)선생께서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이계익선생은 동아일보 해직기자로 교통부장관과 관광공사 사장을 지내다, 20여년 전 인사동 풍류객으로 등장하셨다.

인사동에 나타나 후배들 전시에서 하모니카와 아코디온을 연주해 주시기도 하고,

잘 알아 듣지도 못하는 러시아 민요를 부르시며 어깨를 추켜세우기도 했으나, 결국은 술에 의해 거동이 불편하게 되셨다.

환갑이 된 노광래씨를 지팡이 삼아 인사동 출입을 하시더니, 지난31일 하늘나라로 떠나셨다는 부음을 받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유족으로 부인 진옥현씨와 아들 하일·형범씨, 딸 귀인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장례식장 21호실, 발인은 3일 오전 7시. 02-2258-5940.

아래는 인사동에서 찍은 생전의 모습을 간추려 보았다.


사진, 글 / 조문호


-2013년 4월, 소설가 구중관 칠순잔치에서-

-2013년 4월, 소설가 구중관 칠순잔치에서-

-2013년 4월, 소설가 구중관 칠순잔치에서-

-2013년 5월 '무다헌'에서-

-2010년 4월 '북스갤러리'에서 열린 '인사동, 봄날은 간다' 사진전 뒤풀이에서-

-2010년 4월 '북스갤러리'에서 열린 '인사동, 봄날은 간다' 사진전 뒤풀이에서-

-2010년 4월 '북스갤러리'에서 열린 '인사동, 봄날은 간다' 사진전에서-

-2010년 '가나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 박영현 도자전에서-

-2010년 10월 전북 완주군 소양면 한봉림 도예공방에서 열린 '창예헌'가을여행에서-

-2010년 10월 전북 완주군 소양면 한봉림 도예공방에서 열린 '창예헌'가을여행에서-

-2015년 2월 '아라아트'에서 열린 '청량리588'사진전에서-

-2015년 2월 '아라아트'에서 열린 '청량리588'사진전에서-

-2013년 4월 아라아트에서 열린 "인사동 소풍, 천상병" 20주기 추모행사에서-


-2013년 4월 아라아트에서 열린 "인사동 소풍, 천상병" 20주기 추모행사에서-

-2013년 4월 아라아트에서 열린 "인사동 소풍, 천상병" 20주기 추모행사에서-

-2015년 1월 아라아트에서 열린 '장에가자'사진전에서-

-2008년 5월 '아라아트' 착공식에서-

-2008년 5월 '아라아트' 착공식에서-

-2013년 5월 '무다헌'에서-

-2011년 10월 '인사동사람들에서-

-2011년 10월 '인사동사람들에서-

-2014년 4월 '여자만'에서-

-2010년 10월 전북 완주군 소양면 한봉림 도예공방에서 열린 '창예헌'가을여행에서-

-2015년1월 '유카리화랑'에서 열린 이계익선생의 누드크로키 소품전에서-

-2015년1월 '유카리화랑'에서 열린 이계익선생의 누드크로키 소품전에서-

-2015년1월 '유카리화랑'에서 열린 이계익선생의 누드크로키 소품전에서-

-2015년1월 '유카리화랑'에서 열린 이계익선생의 누드크로키 소품전에서-

-2015년 1월 '원당감자탕'에서-

-2015년 1월 '원당감자탕'에서-

-2015년 7월 '무다헌'에서-

-2015년 7월 '무다헌'에서-

-2014년 7월 '유목민'에서 열린 강민선생의 '외포리갈매기'시집출판기념회에서-


 

 

육이구 선언한 날, 속 시원한 선언이라도 없을까 기대하는 중에 술 마시러 오라는 기별이 왔다.

 

인사동 ‘무다헌’에는 몸이 불편한 이계익 전 장관을 비롯하여 서양화가 신학철, 장경호, 시인 정희성,

김명지, 강고운씨가 모여앉아 술판을 벌여놓았다.

 

신학철선생은 두 달 전 아내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내 술자리를 자제해 오다 오랜만에 인사동에 나온 것이다.

물론 장경호씨의 전화에 비롯되었지만, 작업이 풀리지 않아 붓을 내던지고 왔단다.

 

시위현장의 야전사령관격인 신학철선생께서 술잔을 기울이며 오래 전 이야기를 꺼냈다.

격렬한 시위현장에서 돌멩이를 잡았으나 차마 던지지 못하겠더란다.

그 돌멩이에 누군가 맞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 연약한 양반이 아직까지 시위현장을 맴돌아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장경호씨는 '무다헌'에서 팔지도 않는 막걸리를 공수해 마시며, 통풍 때문에 맥주 못 먹는 날 위해 시바스리갈을 시켜주었다. 

너무 감격스러워 박통처럼 총 맞아 죽어도 좋다싶었다.

 

모처럼 다들 즐거워하는 모습에 기분 좋아, 어린애로 돌변하는 주벽까지 슬며시 도졌다.

모든 걸 내려놓고 놀았으나 다행히 총 맞지 않고 살아남았다.

 

 

사진,글 / 조문호

 

 

 

 

 

 

 

 

 

 

 

 

 

 

 

 

 

 

 

 

 

인사동 풍류객 이계익선생의 누드 크로키 소품전이 인사동 '유카리화랑'에서 열리고 있다. 

90년대 후반에 집중적으로 그리셨던 작품들로, 지난 6일부터 오는 12일까지 이어진다. 

 

본래는 화가가 아닌 언론인으로 교통부장관과 관광공사 사장까지 지내셨으나

세상 시류에 밀려 늦게서야 인사동 풍류객으로 돌아오셨다.
틈틈이 인사동에 나타나 후배들 전시에서 하모니카와 아코디온을 연주해 주시기도 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러시아 민요를 부르시며 어깨를 추켜 세우기도 했으나, 

결국은 술 때문에  지체가 불편하게 되어 환갑이 된 노광래씨를 꼬봉 삼아 힘들게 사신다.

 

그래도 손에 잡힐 듯 잡힐 듯, 아련해져 가는 인사동의 낭만을 지키고 싶었던게 선생의 속 마음이었을 게다.

이계익선생의 전시에서 작품들을 둘러보다 진짜 육체를 탐미하는 작가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엉덩이를 그린 그 풍만한 선에서 짜릿한 흥분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예술이 뭐 그리 대단한지는 몰라도, 이계익선생님 처럼 작업을 즐기며 사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처럼 풍류를 즐기며 일하고 싶지만, 딱 하나 걸리는 게 돈이다.

난 6일 오후6시에 시작된 오프닝 파티에는 이계익선생을 비롯하여 구중관, 곽대원,

노광래, 김영주, 하홍만, 박참한, 한소라, 이만주, 김승준씨 등 대략 20여명이 모였고,

이차로 간 '원당감자탕'에서 코가 비틀어지도록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 전시의 중요한 정보 하나는 누드 크로키 소품 한 점에 십 만원이라는 것이다.

사진,글 / 조문호

 

 

 

 

 

 

 

 

 

 

 

 

 

 

 

 

 

 

 

 

 

 

 

 

 

 

 

 

 

 

 

 

 

 

 

 

 

 

 

 

 

 

 

 

 

 

 

 

 



[노래가 있는 풍경] 안성현 ‘부용산’

1947년 목포 항도여중 교사 박기동이 24세에 요절한 누이를 추모해 시를 지었다. 여기에 같은 학교 음악교사 안성현이 열여섯 살 여제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선율을 붙였다. 달 밝은 밤, 빨치산들이 부르던 노래, 그래서 오랫동안 금지곡이었던 노래. 벌교 사람들은 꼬막 팔아 번 돈으로 이 노래 ‘부용산’을 살려냈다.

부용산 자락에서 내려다 본 벌교읍내 전경. 한적한 포구였지만 수탈을 목적으로 일제가 개발해 오늘에 이르렀다.

역사의 시곗바늘을 몇 년 전으로 돌려보자. 부엉이바위의 비극이 발생하기 22일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에 소환되고, 한나라당이 재선거에서 전패한 2009년 4월 30일 밤이다.

서울 종로구 운현궁 뒤켠 주점 ‘낭만’에 애절한 노랫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부르는 목소리는 각기 달랐으나 노래는 딱 한 가지, 대중에게는 낯선 단 한 곡의 노래를 번갈아 가며 정성을 다해 부르고 있었다. 모인 사람들은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정·관계, 문화계를 움직이던 쟁쟁한 인사들.

이들이 이날 이 허름한 주점을 찾은 이유는 간단하다. 참석자 저마다 노래 ‘부용산’을 돌아가며 부르고 또 듣기 위한 것이었다. 딱 한 곡을 두고 40여 명이 젖 먹던 내공까지 다해 노래를 부르는 해괴한 풍경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술자리는 점차 숙연해져 비장감마저 넘쳐흘렀다. 부르는 이마다 제각기 간절함을 더해 각기 다른 가락으로 뽑아낸다. 어떤 이는 남도 민요조로, 또 어떤 이는 엄숙한 성악풍으로, 저마다 노래에 사연을 녹여내 ‘부용산’을 불렀고 한쪽 구석에서는 숨죽여 훌쩍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슨 사연이 있고 무슨 까닭이 있기에 이다지도 많은 사람이 단 한 노래를 구슬프게 부르고 또 불렀던 것일까? 거슬러 본 사연은 노랫가락만큼이나 기구하고 애절하다. 한때 이 땅에서 ‘부용산’을 부르면 곧바로 당국에 끌려가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뒷골목 술집에서 주위를 살피며 숨죽여 노래를 불렀다. 단장이 끊어질 듯한 노래는 오랜 시절 금지곡으로 묶여 박제화되었다가 1980년대 후반 민주화와 더불어 햇빛을 보고 조금씩 일반 대중에게 다가가게 된다.

서울 종로 운현궁 뒤켠 허름한 골목길에 위치한 낭만식당. 노래 ‘부용산’ 부르기 경연대회가 열린 바로 그 공간이다.

 

악보 없는 노래

그러던 어느 날 언론인이었던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과 서상섭 전 국회의원, 김도현 전 문화부 차관 등이 ‘부용산’을 흥얼거리다 ‘(악보가 없어) 사람마다 곡조가 다르니 누구 노래가 더 나은지 한번 겨뤄보자’고 의기투합했다. 이를 들은 이두엽 교수(군산대)가 이날 행사를 기획, 진행하게 된다. 악보마저 금지되어 오랫동안 구전으로 전해온 연유로 음정도 박자도 제멋대로인 노래이지만, 이참에 마음 터놓고 한번 불러보자며 ‘작당’한 것이 바로 이날 노래 한마당이었다. 이날 노래자랑은 한겨레신문에 이같이 소개되면서 알려진다.

이날 노래자랑에는 김도현씨가 심사위원장, 소리꾼 임진택씨는 사회를 맡았다. 더벅머리의 송상욱 시인. 기타의 트로트풍 선율에 맞춰 나긋한 음색으로 ‘부용산’ 가사를 곱씹었고 지역 대표라는 벌교의 쪽물 염색 장인 한광석씨는 시원시원하면서도 구슬픈 여음 남는 목소리로 박수를 받았다. 감옥에서 노래를 익혔다는 운동권 출신의 서상섭 전 의원은 낭랑한 저음을 깔았다.“…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붉은 장미는 시들어지고/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한국전쟁 때 낙오한 인민군 장교에게 가락을 처음 들었다는 이계익 전 교통부 장관은 아코디언으로 애달픈 선율의 ‘부용산’을 들려주었고, 연주는 곧 합창으로 바뀌었다.

누가 누가 잘하나. 인사동 주점 ‘소설’의 주인인 ‘재야가수’ 염기정 씨의 차례에서 노래 마당의 흥은 절정에 올랐다. 문인들이 읊조린 노래를 어깨너머로 들으며 외웠다는 그는 매혹적인 탁성으로 고즈넉하게 ‘부용산’을 불러 열광적인 앙코르 요청을 받았다. 분위기가 이슥해지자 김도현 씨가 불콰한 얼굴로 일어났다.

“오늘은 진보, 보수 모두 실패한 날, 누구도 이기지 못한 날입니다. 노래를 들으며 좌절과 절망을 추억하고, 희망과 낙관을 떠올려봅시다.”

이날 심사 결과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밤늦도록 술잔 기울이며 ‘부용산’과 자기네 삶에 얽힌 이야기꽃을 피웠다. ‘부용산’이 엮어낸 애잔한 풍류의 밤이었다는 게 한겨레신문이 전한 내용이다.

‘부용산’은 슬픈 노래다. 누구나 한번 들으면 그 비장미에 온몸을 부르르 떨게 된다. 당초 출발은 한 요절한 누이를 추모하는 현대판 ‘제망매가’쯤 되는 노래였지만 세월을 잘못 만나 1960~80년대에는 저항가요로 한 시대를 장식한다. ‘부용산 산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60년 묵은 구전가요 ‘부용산’은 이렇게 시작된다.

‘부용산’은 본디 1947년 목포 항도여중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시인 박기동(1917~2004)이 24세에 요절해 전남 벌교 부용산 자락에 묻은 누이를 추모해 지은 시였다. 여기에 같은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음악교사 안성현이 열여섯 살 여제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선율을 붙였다고 전한다. 우연히 두 여자의 죽음이 겹친 것이다.

 

작곡가 안성현은 일반 대중에게는 낯선 음악가다. 그러나 그가 김소월의 시에 가락을 붙인 저 유명한 ‘엄마야 누나야’의 작곡자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일제치하에서 우리 민족의 슬픔을 애절하게 노래했던 ‘엄마야 누나야’의 작곡가가 일반에게 알려진 건 얼마 되지 않는다. 오랜 세월 교과서와 노래집에는 김소월 시, 작곡가 미상으로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전남 나주 출신인 그는 6·25 당시 월북했으며 북한 국립교향악단 단장을 지냈다고 전한다. 그런저런 이유로 노래 ‘부용산’의 작곡자는 지난 권위주의 시대, 그 오랜 세월 동안 수면 아래로 사라지고 작곡자 이름은 백지로 남게 된다.

 

1960~80년대 저항가요

 

그러나 노래는 해방 공간의 폐허가 된 시대적 정서에 맞물려 호남 전역에서 소리 소문 없이 인기를 끌며 퍼져 나갔다. 특히 전라남도에서 유행했던 이 노래는 ‘좌익’들에게는 자신들의 군가처럼 받들어지며 애창된다. 실제로 지리산, 회문산 일대 골짜기의 달 밝은 밤이면 두고 온 고향을 그리워하는 빨치산들이 워낙 구슬프게 불러대는 바람에 인근 마을 사람들까지 밤잠을 설쳤다고 한다. 애초 이념과는 무관했던 이 곡이 금지곡이 된 데에는 이처럼 빨치산이 즐겨 불렀다는 이유가 한몫한다. 사실 빨치산들도 노래에 이념성을 넣어서 불렀다기보다는 자신들의 처지가 고달파서 불렀겠지만 여순 사건 등을 거치면서 노래는 당국에 의해 엄격히 금지된다.

 

이 여파는 작곡자 안성현에게 옮겨져 1949년 안성현은 면직처분을 받았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월북해버렸다. 난데없이 유탄을 맞게 된 박기동 시인 역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부용산’의 작사자임을 철저히 숨겼다. 하지만 계속되는 당국의 가택 수색, 연금 등을 피해 호주로 이민 가게 된다. 이 같은 연유로 지하로 깊숙이 숨었던 노래는 1960~80년대 운동권, 진보 지식인들에게 작자 미상의 구전 저항가요로 은밀하게 전해졌다. 권위주의 시대, 극히 일부에게 전해지며 겨우 명맥을 이어오던 노래는 1980년대 후반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계기로 드디어 대중에게 존재감을 드러내게 된다. 그 뒤 가수 안치환이 음반을 낸 것을 기점으로 한영애, 윤선애, 이동원, 국소남 등 여러 가수가 경쟁하듯 불렀지만 실체를 아는 일반인은 여전히 손에 꼽을 정도다.

 

호남인의 애창곡인 ‘부용산’의 실체가 일반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노래는 연고를 주장하는 지역 간 갈등의 씨앗이 되는 또 다른 기이한 운명을 만난다. 전술한 바와 같이 노래는 목포 항도여중 음악교사 안성현이 당시 사랑에 빠졌던 미모의 여제자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작곡했다는 일부의 주장에 따라 한동안 목포의 노래로 인정받게 된다. 당연히 목포지역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뒤늦게 벌교번영회가 중심이 된 열혈 벌교 주민들이 이에 반발, 벌교의 노래로 선언한다. 노래 한 곡을 두고 두 지역이 ‘원수’가 된 상황이다. 벌교 주민들의 정성은 뻗쳤다. 목포에 빼앗긴 노래를 되찾기 위해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이어 꼬막 팔아 번 돈으로 성금을 모아 호주로 떠난다. 호주로 이민 간 작사자 박기동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다.

 

박기동 시인의 증언으로 폐병으로 사망한 누이동생을 벌교의 뒷산 부용산 자락에 묻고 오며 시를 지었고 항도여중 재직 당시 동료 교사 안성현이 노랫가락을 붙였다는 실체적 진실을 확보한 벌교 주민들은 마침내 ‘부용산’을 벌교의 노래로 선언한다. 그 뒤 해마다 벌교꼬막축제 등 크고 작은 벌교 행사에는 반드시 노래 ‘부용산’을 의무적으로 부르도록 했다. 박 시인은 1987년 ‘부용산’이 해금되고 그 뒤 노래 ‘부용산’이 재조명되자 2002년 일시 귀국해 산문집 ‘부용산’을 출판했고 노래가 벌교의 노래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해준다. 이후 2003년 호주 생활을 청산하고 영구 귀국했으나 이듬해인 2004년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


부용산 산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붉은(병든) 장미는 시들었구나

부용산 산허리(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부용산’을 부르는 지역 주민 안택조 씨. 장좌리 별신굿 보존회장이기도 한 그는

부용산을 되찾기 위해 호주까지 쳐들어 갔다 온 열혈 부용산 노래 지킴이다.

 

 

벌교 주민들의 ‘부용산’에 대한 사랑은 용광로보다 뜨겁다. 노랫말이 1절밖에 없어 아쉬운 나머지 박 시인에게 청을 넣어 2절 노랫말까지 근사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지금의 2절 가사는 원곡보다 수십 년 뒤에 추가로 지어진 것이다. 주민은 성금을 걷어 벌교 뒷산 부용산 오솔길에 큼지막하게 화강암으로 노래비를 세우고 내친김에 산책로까지 조성했다.

그러나 벌교는 노래 ‘부용산’보다는 소설 ‘태백산맥’으로 친숙하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주 무대가 벌교이다 보니 벌교 곳곳에는 ‘태백산맥’의 흔적이 등장한다. 소설 속에서 토벌대가 공짜로 머물던 남도여관(당시 실제 상호는 보성여관)이나 지역 계엄사령관의 취임식 때마다 열병과 분열식이 벌어졌던 벌교 남초등학교 등이 여전히 역사를 증거한다. 남도여관을 뒤로하고 자그마하게 서 있는 산이 부용산이다. 말이 산이지 해발 192m에 불과한 동네 뒷산이다. 그렇지만 벌교 사람들에게 부용산은 정신적인 지주다. 행정관청과 번영회가 힘을 합쳐 조성해 놓은 ‘부용산 시오리 오솔길’을 오르다보면 부용산 노래비가 찾는 이를 반긴다. 이쯤 되면 외지인들은 ‘부용산’을 벌교의 노래로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해마다 벌교꼬막축제에서 부용산을 부르는 지역 주민 안택조(65) 씨는 “목포는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도 있고 ‘목포는 항구다’도 있는데 왜 벌교의 노래 ‘부용산’까지 탐내는지 모르겠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안씨는 지역 국회의원이자 경원대, 호남대 총장을 역임한 이대순(82) 씨와 더불어 20여 년 전 호주까지 ‘쳐들어가’ 박기동 시인으로부터 ‘부용산’이 벌교의 노래라는 구술 증언을 확보해온 ‘부용산’의 열혈 지킴이다.

 

벌교의 노래 ‘부용산’

 

이쯤해서 부용산을 모르는 사람은 유튜브나 스마트폰을 통해 한번 들어보기를 권한다. (http://www.youtube.com/watch?v=vXq3x4hz9gM) 노래는 지나치게 처연하고 넘치게 아름답다. 애상이 가슴을 꾹꾹 찌르고 있지만 깊고 그윽한 격조를 유지한다. 굳이 유식한 말로 표현하자면 애이불비(哀而不悲)다. 슬프지만 겉으로는 결코 슬픔을 나타내지 아니하고 남루하지 않다. 일찍이 소월이 자신의 시 ‘진달래꽃’에서 강조한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와 맥을 같이한다고 보면 된다.

 

“벌교에서는 주먹 자랑, 여수에서는 돈 자랑, 순천에서는 인물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나는 문득 “벌교 가면 ‘부용산’ 빼고는 노래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고 당부하고 싶다. 그 무섭다는 벌교 주먹이 언제 날아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뜨거운 여름이다. 그래서 슬픈 노래 ‘부용산’을 들으면 여름은 더욱 외롭다. 맞다, 그리움 강이 되어 맴돌아 흐르고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꿈도 간 데 없다. 벌교 부용산 저 멀리엔 재를 넘는 석양만이 홀로 섰고 병든 장미는 뙤약볕에 시들어간다.

 

 

글·김동률|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empas.com 사진·권태균|사진작가·신구대 교수 

(스크랩/신동아)

 

 

 


강민선생의 시선집 ‘외포리의 갈매기’출간을 축하하는 모임이 지난 7월14일 오후6시부터 인사동 ‘노마드’에서 있었다. 그동안 시인들과의 출판기념회 자리는 몇 차례 있었지만, 인사동유목민 가족들을 위해 특별히 제안했으나 무더운 날씨 때문인지 불참한 분이 더러 있었다.

 

함께 하신 분은 강 민선생님을 비롯하여 이행자, 전활철, 장경호, 조경석, 정영신, 이청운, 이승철, 조준영, 김상현, 김명성, 노광래, 공윤희, 권두현, 이명희씨가 참석하여 시집출간을 축하하며 시낭송의 시간도 가졌다. 그리고 몸이 불편한 이계익선생과 소설가 이단원씨를 노광래씨가 모시고 와 뜻 깊은 자리를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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