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오후5시 무렵, 인사동 사람들의 정기모임이 인사동 유목민에서 열렸다.

 

두 달 만에 열린 이번 모임에는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이명희, 정복수, 조해인, 유근오, 장경호, 정영신,

임태종, 공윤희, 안원규, 임헌갑, 최유진, 임경일, 김발렌티노 등 15명이 참석했다.

 

모처럼 만난 반가운 자리였으나 좌석이 여러 곳으로 나뉘어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분도 있었는데, 마침 최유진씨로 부터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년을 맞아 위령 종루를 보수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는 27일 오후4시부터 인사동 서원빌딩 14‘615남측위원회회의실에서 종루 보수 모금 확산을 위한 이규수교수의 '관동대진재와 조선인 학살, 그 망각과 기억의 소환'이란 특강이 열리니 많은 참석을 바랍니.

 

이 일은 오래 전, 김의경, 심우성선생께서 성금을 모아 일본 관음사 경내에 종과 종루를 세웠으나, 지금은 훼손이 심해 보수해야 할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돌아가신 심우성선생을 대신하여 연극연출가 최유진씨가 모금위원장을 맡아 발 벗고 나섰다고 한다.

 

2023년은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년이지만, 그 참혹한 역사를 기억하고 원혼들을 진혼하기 위한 시설이 아직 우리나라에는 없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59년 양심적인 일본 시민들이 그 학살 현장에서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는 위령제를 올리기 시작한 것이 발단이었단다.

 

1985년 그곳의 위령 팻말을 본 한국 문화예술인들이 나서서 대한민국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희생자 기림 시설인 보화종루를 일본 관음사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1999년에는 일본 시민들이 조선인 희생자들의 위령비를 종루 옆에 세우고, 한일 양국 시민들의 추모문화제도 계속 열었다고 한다. 이렇게 역사적 의미가 깊은 사적 가치를 지닌 보화종루가 오랜 세월과 잦은 지진으로 훼손과 파손이 심해져 붕괴 위험에 처한 것이다.

 

이에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년을 맞아 과거 이 종루를 건립하고 보수해왔던 원로 문화예술인들의 후배와 자녀 세대 문화예술인이 중심이 되어 다시 한 번 양국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개보수하여 시설을 보존하려 한다.

 

학살피해 100주년이 되는 오는 9 10일은 추도문화제도 함께 개최하여 상생의 뜻깊은 전통을 이어가고자 하오니, 뜻있는 분들의 많은 동참을 부탁드립니다.

 

 사진, / 조문호

 

 

  

 

2021,9,22

지난 18일 오후는 정영신씨의 ‘어머니의 땅’ 전시 디피하는 날이었다.

 

사진 액자는 진즉 ‘나무아트’ 전시장에 올려놓은 터라 인사동 거리부터 돌아보았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토요일이라 그런지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날따라 거리공연에 나선 뮤지션이 세 명이나 되었다.

다양한 음악으로 거리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유독 바이얼린을 연주하는 러시아 소녀를 경찰관이 제지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주변에 있는 가게 주인이 신고를 했단다.

 

"에라이~ 돈밖에 모르는 썩을 놈의 인간들..."

바이얼린 연주가 무슨 영업 방해가 되며,

비록 방해가 된다 해도 어떻게 자식 같은 외국 소녀에게 상처를 주는가?

 

연주하던 소녀가 다른 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걸 보고서야 ‘나무아트’에 올라가니,

이미 김진하관장이 액자를 배치하고 있었다.

전문가가 하는 일에 나설 수 없어 포장 해체하는 정도만 도왔다.

 

마침 거리미술가로 알려진 이태호 교수가 오셨다.

고 김수영시인 탄생 백 주년을 기념하는 전시에 판화 두 점을 출품하기로 했는데,

어디서 주최하는 행사인지 궁금해 했다.

 

정영신씨가 기획자 소개도 할 겸, 그 일을 추진하는 김발렌티노를 불렀는데,

김수영시인의 대형 시비도 만들어 둔 게 있다며, 전시 가능 여부를 타진했다.

 

그런데, 김진하관장께서 토론토 Tai Kim씨가 보내왔다는 예쁜 엽서를 전해 주었다.

페친으로서 정선에 불난 소식을 전해듣고 얼마나 정성스럽게 편지를 쓰고

행운의 크로바까지 붙여 보내 와 너무 감동적이었다.

이 글을 통해서나마 그 고마움을 전해 드린다.

 

김진하관장의 전시 디피 솜씨는 일사불란했다.

그 많은 액자를 짜임새 있게 배치했는데, 시간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을 마무리한 후 이태호 선생과 함께 ‘툇마루’로 식사하러 갔지만,

차 때문에 술 한잔 제대로 마실 수가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노숙인, 길에서 살다’ 현수막을 설치할 ‘유목민’ 골목에도 잠시 들렸다.

골목 테이블에는 이인섭, 유근오, 노현덕씨가 술을 마시고 있었고,

‘유목민’ 안 쪽에는 김수길씨도 있었다.

 

반가운 분을 만났으나 술 한 잔 나누지 못하니 무슨 재미랴.

전시 기간 내내 짐 때문에 차를 끌고 다녀야 할 텐데,

참아야 할 술 고문은 어떻게 견뎌야 할지 모르겠다.

 

사진, 글 / 조문호

며칠 전 사진가 최인기씨로 부터 전화를 받았다.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와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는 제안이었다.

최인기씨는 미투와 관련된 사건으로 불편한 관계라

식사보다 인사동에서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했다.

 

모처럼 ‘유목민’에 나갔더니, 다들 먼저 와 있었다.

내가 올린 꼴 페미 까는 글 보고 청탁한 원고를 취소한 터라

어색한 관계를 풀어야 했는데, 바쁜 이규상씨까지 나오게 해 송구스러웠다.

 

그리고 최인기씨는 미워할 수 없는 사이다.

좋아하는 후배이기도 하지만, 사진판에 잘 못된 현실과 싸우는 그만한 전사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올린 내용은 일부 급진적 페미니즘이 여성의 성 평등 운동에

오히려 장애가 되고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요즘 상대를 매장시키려는 가짜 미투가 기승을 부려

선의의 피해자마저 의혹의 눈길을 받는 세상이 되어바렸다.

특히 정치판에서 많이 악용되는 현실인데,

진보 정치인들의 무분별한 공략에 많은 국민들이 등 돌리고 있다.

더 이상 착한 사람이 목숨을 잃는 일은 없어야 한다.

무엇이던 과하면 탈이 생기기 마련이다.

 

물론 최인기씨를 꼴 페미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청탁한 원고를 취소하는 전화를 하기도 쉽지 않지만,

그 동안의 관계를 생각하면 쉽게 할 수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주변 누군가의 문제 제기에 어쩔 수 없이 전화했을 것으로 여긴다.

 

그냥 덮고 넘어 갈수도 있었지만 페미니즘 문제라 

 꼴 페미의 문제점을 다시 한 번 부각시키고 싶었다.

아마 내 글을 본 지인이 ‘눈빛출판사’에 연락한 것 같은데,

이규상대표가 화해의 자리를 주선한 것이다.

 

그 날 최인기씨는 죄송하다며, 여러 차례 사과했다.

그러나 페미니즘에 관한 자신의 의견은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내가 민망할 정도의 사과라 더 이상 묻지도 말하기도 싫었다.

내가 상관할 문제는 아니지만, 노령진수산시장 투쟁 사진집 서문은

최인기씨를 잘 아는 이규상대표가 쓰면 어떠냐고 했더니,

이번 책은 서문 없이 사진집을 내겠다 했다.

 

아무튼, 좋은 일은 아니지만 즐거운 술자리가 되었다.

그날 이규상 대표가 반가운 선물도 주었다.

정영신씨의 ‘어머니의 땅’ 가제본된 사진집 한 권을 내놓아 눈이 번쩍 띄었다.

그동안 ‘길 위의 인문학’ 공모에 정영신씨 원고가 선정된 것은 알았지만

사진집을 만든다는 것은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그런데, ‘유목민’ 안 쪽 테이블에서 반가운 사람이 있었다.

미술평론가 유근오씨와 도예가 변승훈씨가 나를 보더니 옮겨왔다.

변승훈씨는 백기완선생 문상 다녀 왔다는데, 이미 취해 말이 거칠었다.

이규상씨와 유근오씨는 서로 명함을 건네받으며, 원고 청탁도 하더라.

구체적으로 모르나, 문제만 일으키는 내 뒷조사 해달라는 말인지,

나에 대한 글을 청탁하는 것 같았다.

 

아무튼 좋은 필자와 좋은 편집자가 만났으니, 좋은 일인 건 틀림없을 게다.

미술평론가 유근오씨도 한 때 미투문제에 걸려 곤욕을 치룬 적도 있었다.

의혹이 풀려 다시 강단에 서게 되었지만, 자칫하면 생사람 잡는 무기로 악용된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파장 무렵에는 발렌티노 김이 나타났다.

서울특별시 환경미화원 복장으로 나타났는데, 요즘 청소하는 모양이다.

얼마 전 공채 시험 면접에서 "서울을 자기 머리처럼

빤짝 빤짝 빛나게 하겠다"는 말에 배꼽을 잡은 적도 있었다.

무슨 일을 하던 예술가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어렵게 사는 최인기씨 주머니를 털어 마음은 편치 않지만,

나올 때 무거웠던 걸음에 비해 갈 때는 날아갈 것 같았다.

알랑방구 낄 정영신씨 책을 옆구리에 끼고, 간 크게도 택시를 불러세웠다.

 

“기사 양반 요! 녹번동 가입시다. 택시비는 그 집 안주인한데 바드이소”

 

사진, 글 / 조문호

 




지난15일 오후6시, 인사동 ‘갤러리 라 메르’에서 김진두씨 개인전 열림식이 있었다,
'미협' 소속으론 몇 안 되게 친분있는 화가인데, 장경호씨 연락으로 찾아 나섰다.


전시장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주인공 김진두씨와 장경호씨 뿐이었다.
뒤늦게 전시 서문을 쓴 미술평론가 이경모씨와 유근오씨가 왔지만,
대부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동안 잘 보이지 않더니, 그림을 많이 그렸더라.
적절한 색의 대비와 조화로 이루어진 나비형상이 마치 박제된 그림처럼
겹치거나 색을 달리해 걸려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시력 검사할 때 보았던 도판처럼, 환시현상을 일으킬 것 같았다.

그러나 작업에 대한 정보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손바닥만 한 팜프렛에서 “프시케에 대한 사고”란 제목만 보았을 뿐,
이경모씨의 발문조차 깨알 같은 영문으로 쓰 놓아 알아볼 수 없었다.

작가의 인사말이나 내빈들의 인사조차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다.
대단한 작품이라는 찬사는 있었으나, 어떤 면에서 대단한지는 이야기가 없었다.
단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시케’를 내세웠으니, 환상과 연관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너무 불친절한 전시였다.
네 눈높이에서 보라는 뜻인지 모르겠으나, 평자의 글까지 영문으로 표기한 건 이해되지 않았다.
전시장에 외국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는데, 마치 외국 사람을 위한 전시 같았다.
한글로 적힌 것이라고는 작가의 약력이 유일했다.

뒤풀이가 있는 ‘원당 감자탕’집으로 서둘러 내려왔다.
장경호씨는 몸이 좋지 않은지, 그 좋아하는 막걸리를 마다한 채 우유만 홀짝이고 있었다.
다들 술에 골병들어 몸을 생각해야 했다.


뒤늦게 작가와 마주 앉게 되어, “와 팜프렛에 영어만 쓰 났노?라고 물었더니,
‘한 번 더 써 물라고요.’란다.
술이 취했더라면 싸질렀겠지만, 술이 덜 취해 속으로 뇌까렸다.
“마이 써 무라.”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0일은 통의동과 인사동을 오갔다.
대전에서 전시중인 정복수씨와 울산에서 올라 온 오세필씨로 부터 연락을 받은 것이다.
먼저 정복수씨를 만나러 신학철, 장경호, 박불똥 3인전이 열리는 통의동 ‘인디프레스’로 갔다.


경복궁 지하철에서 내려 골목을 접어더니 장경호씨와 유근오씨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마, 술 마시다 담배 피우러 나온 모양인데, 반가움보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두 사람은 아주 가깝게 지낸 사이지만, 무슨 오해가 생겼는지, 일 년 가까이 등 돌리고 지냈기 때문이다.

그런 두 사람이 함께 했으니, 이제 화해가 된 듯싶었다.

술집에 채현국선생을 비롯하여 많은 분이 있다지만, 약속시간이 늦어 지체할 겨를이 없었다.

좀 있다 보자며 걸음을 재촉하는데, 이번에는 정영신, 오세필, 최백호씨를 비롯한 열 여명의 모르는 여인네들이

커피 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오세필씨 부탁으로 아침 일찍 전시 안내하러 간 아내를 길에서 만난 것이다.

DDP에서 열리는 간송문화전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들, 그리고 ‘아라아트’의 브레인 워시전을 거쳐

신학철, 장경호, 박불똥 3인전이 열리는 ‘인디프레스’로 왔다는 것이다.

인사만 나누고 정복수씨가 기다리는 전시장으로 급히 갔더니, 조금 전에 나갔다는 것이다.

바쁜 일이 있나 보다며 돌아서려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전시장 옆 ‘메밀꽃 필 무렵’으로 오라는 것이다.

그 곳에는 교장선생님인 정복수씨 부인도 함께 있었다. 몇일 전 대전 전시장에서 뵙기는 했으나, 반가웠다.

미색도 출중하지만, 정복수씨의 든든한 후원자인 셈이다.

정복수씨가 반평생 신체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부인 덕이었다.


술과 안주를 주문하기 바쁘게 사람들이 찾아왔다. 미술 평론가 최석태, 유근오씨와

화가 장경호씨 그리고 시나리오 작가 최근모씨 등 여러 명과 어울려 마시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소주나 마실 것이지, 남 따라 장에 간다고 잘 마시지 않는 막걸리를 마셨더니, 금방 취했다.

아마 맞은편 미녀 눈길 닿는 게 쑥스러워 벌컥벌컥 마셨던 게 원인이 아닌가 짐작된다.

김정대씨와 합류하여 어딘가 이차를 간듯한데, 기억조차 나지 않는 것이다.

오세필씨와 인사동 ‘유목민’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마저 잊어버린 것이다.
김명성씨의 전화를 받고서야 자리를 옮겼는데, 그 자리에는 이성 구로구청장을 비롯하여, 최백호,

박인식, 오세필, 김명성, 최석규, 정영신, 임태종씨 등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카메라불도 꺼졌지만, 술이 취해 횡설수설해대니, 옆에 있던 아내가 가자며 눈치를 주었다.

왜 술만 취하면 오버하는지 모르겠다. 가슴에 뭉친 불만을 술이 밀어내는 걸까?

사진, 글 / 조문호











































파리를 중심으로 세계를 유목민처럼 떠돌며 암벽화 같은 그림을 그려 온 

원시의 영혼 최울가 화백이 모처럼 서울에 모습을 드러냈다.


New Storage Series, Oil on Canvas, 130x162cm, 2015



현대미술에 대한 작가의 철학적 성찰과 그의 작업행로를 담은 나는 하이에나처럼 걸었다책을 출판하며

서울에서 특별전을 가진 것이다.

이 전시는 한남동의 갤러리 서화’(02-546-2103)에서 지난 421일 개막되어 54일까지 이어진다.




, 작가를 알게 된 지가 어언 4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부산에서 알게 되어 서울로 올라오며 헤어졌는데,

몇 년 후 인사동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그 때부터 그의 작업실과 전시회를 오가며 작업들을

지켜볼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이다.  


원시성을 띤 그의 그림들은 너무 순수하고 자유로웠다.

도상에 화려한 색을 입힌 그림들은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같이 느껴졌다.

그 무렵 나에게 선물로 준 작품 한 점이 있다 비 맞을까 걱정되어 개구리에 우산을 받쳐 든

어린이의 형상은, 볼 때마다 배려에 대한 자성의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Acrylic on Korean Paper, 20x25cm 1993

 

다양한 도형을 바탕으로 한 그의 작품세계는 드로잉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드로잉 자체가 구석기시대부터 시작된 원초적인 표현방법 아니던가.

작가의 고향이었던 울산 반구대 암각화가 바로 연상되었다. 사람이 등장하기도 하고, 동물이나

나무 같은 사물들이 무질서하게 그려 진 그림들은 원시적인 인간 본연의 삶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무시하는 아나키적 화법에서 오히려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이다.



[Everything About New York] Oil on Canvas, 259x193cm, 2001 국립현대미술관소장


White Play Series, Oil on Canvas, 122x152cm, 2012


 

그 이후 파리와 뉴욕에서 살아 자주 만날 수는 없었지만, 가끔 서울에 초대된 작품을 보며 많은 변화를 읽었다.

그 무렵 “Black and White” 연작으로 더욱 상승세를 타고 있었는데, 기하학적인 정형이나 모형들이 어느 정도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암각화 같은 조형들이 마치 바위 위에 정으로 새긴 듯 빽빽하게 그려져,

보는 이에게 말 걸고 있었다. 그 상형문자 같은 기호들은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의식에 다름없었다.

원시성의 훼손에 대한 물질문명의 비판을 그만이 즐기는 놀이 법으로 풍자한 것이다.

아마 문학적인 그의 그림언어로 현대인들의 숨통을 트이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Black Play Series, Oil on Canvas, 130x162cm, 2015



White Series, Oil on Canvas, 162x112cm, 2015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이번 갤러리 세화에 발표된 작품들은 또 다른 변화를 보여주었다.

원시주의에 천착한 골격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선들이 굵어졌고 여백의 미도 생겨났다.

일단 보는 이로 하여금 안락한 느낌을 주었는데, 그가 펴낸 나는 하이에나처럼 걸었다란 책을 읽고

그 원인을 짐작하게 되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언어그 자체가 자신을 가로막는 장애란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는 것이다. 결국 끝없이 추구하는 자유로움이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 낸 것이다.

캔버스 위에 생겨난 여백들은 바로 작가 자신의 마음의 여백으로 여겨진다. 곰곰이 그의 작업행로를 돌아 보면,

꾸준히 변해 온 작업여건이나 주변 환경도 작품에 반영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Infinity Series, Oil on Canvas, 162x130cm, 2015


Infinity Series, Oil on Canvas, 100x100cm, 2015


Infinity Series, Oil on Canvas, 100x100cm, 2015


처음 가본 갤러리 서화 가정집을 개조했는지 분위기가 아늑했다.

오랜만에 만난 그의 모습에 엄청 반가웠으나 작가와 진득하게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전시 작품에 대해 물어 볼 것이 많았으나, 손님들이 내미는 책에 서명하기 바빴기 때문이다.

그리고 찾아 온 손님도 미술평론가 유근오씨 외에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쉽지만,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날이 갈수록 더해가는 성취도에 경의의 박수를 보내며 돌아 왔다.























 

그리고 이번 전시와 함께 인문아트에서 발간한 나는 하이에나처럼 걸었다에는

최울가의 예술철학과 삶의 행로가 일기처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초창기 작품에서부터 신작에 이르기까지 130여점이나 실려 있는데다,

문학적 감수성이 배어있는 그의 글들은 최울가의 작품세계에 푹 빠져들게 한다


출판사 : 인문아트 /  책값 : 14,000

 

사진,/ 조문호

 

 

 

 

 





이제 인사동의 고풍스러움은 사라지고, 아련한 추억들만 무성하다.
고미술이나 고서점으로 이어진 정겨운 가게들이 하나 둘 밀려나더니,
예술가들의 열기로 가득했던 골목골목의 주청과 찻집들도 하나 둘 사라져 갔다.

실비식당, 하가, 티롤, 레떼, 평화 만들기, 귀천, 수희재 등 많은 업소들이 생각난다.

암울한 시절, 빈 주머니였지만 어머니 품처럼 예술가들을 토닥여 주고 안아 준 곳이

인사동이고, 그런 술집들이다.

이제 그런 예스러움이나 풍류들은 오 간데 없고, 싸구려 잡동사니만 넘쳐난다.
멀지않아 인사동 고유의 색깔은 완전히 사라 질 지도 모른다.

그 많은 외국 관광객들이 인사동을 왜  찾겠는가?
인사동 고유의 색깔이 없는데, 또 올 리가 없다.

빨리 기념품 일색의 거리환경부터 정리하자.

지금이야말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스토리텔링이 절실한 때다.
인사동은 조선시대 궁중화가들의 작업실인 도화서가 있던 곳이다.
그 도화서를 복원하여 작가들이 이용케 하는 방법은 없는가?


연암 박지원과 율곡선생도 인사동에 살았다. 그리고 민영환 선생의 자결터와

민병옥대감의 저택인 ‘민가다헌’도 잘 보존돼 있다.
그러한 역사적 자취를 바탕으로 이야기 옷을 입혀야 하는 것이다.

가깝게는 80년대 인사동 낭만을 풍미한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 중광스님도 있다.

어쩌면 먼 조선시대 이야기보다 더 가깝게 와 닿을지도 모른다,

어깨에 늘 봇짐을 메고 다녔던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선생을 비롯하여

‘귀천’에 죽치며 막걸리 집을 드나들었던 천상병시인, 파이프를 물고있는 박이엽 작가,

거지행색으로 인사동을 누비던 중광스님의 자유분방한 행색들 말이다.

그 분들의 동상이라도 만들어, 인사동 거리분위기부터 바꾸어보자.

그 다음에 인사동을 드나드는 예술가들의 사람냄새를 담자.
인사동 특유의 골목 문화도 가꾸어, 인사동을 낭만1번지로 되돌리자.


사진, 글 / 조문호



아래사진은 지난 9일 오후의 인사동거리다.

쌀쌀한 날씨에도 사람들은 오갔고, 개막식이 열리는 전시장들도 붐볐다.

전시장에서 나오는 미술평론가 유근오씨와 그 제자들을 '아라아트' 앞에서 만났다.




































“6FIGURATION”전시뒤풀이가 인사동 유목민에서 있었다.

 

김진열, 성병희, 이샛별, 이세현, 장경호, 정복수씨 등 참여 작가를 비롯하여 김진하, 하태웅, 배성일씨가 먼저 자리 잡았다.

뒤늦게 미술 평론하는 유근오씨 등 반가운 분들이 나타났다. 건축가 임태종씨와 공윤희씨, 풍기에서 소설 쓰는 배평모, 구중관씨, 삼천포에서 도자기 굽는 박영현씨, 이회종, 이도흠 교수, 최혁배 변호사, 사진가 정영신씨 등 많은 분들과 여흥을 즐겼다.


그런데 여기 저기 흩어져 있으니, 진득하게 마실 수가 없더라. 술판은 뭉쳐야 되고, 시끄러워야 술 맛 나는데...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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