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3·1 운동의 시발점, 태화관 미스터리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인사동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모습을 그린 기록화.

지난 1일은 제104년 삼일절이었습니다. 굳이 이 인물까지 이 코너에서 언급해야 할지 의문이 들긴 했습니다만, 학원강사 출신의 한 방송인이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과 그 좌장인 손병희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가 물의를 빚은 적이 있습니다.

“(민족대표 33인이) 우리나라 최초의 룸살롱이었던 태화관에서 낮술을 먹었다.” “태화관 마담 주옥경하고 손병희가 사귀었고, 나중에 결혼을 한다. 그 마담이 할인을 해준다고, 안주를 더 준다고 오라 그랬는지 모르겠다.”

이 발언은 역사 인식의 총체적인 혼란을 보여 줍니다. 우선 주옥경은 1915년 손병희와 결혼하기 위해 명월관을 나왔으니 1919년에 명월관의 지점인 태화관 마담이었을 수는 없습니다.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고 여성운동에 헌신했던 주옥경을 ‘마담’으로 칭한 것은 명백한 비하입니다. 서울의 대표적인 고급 요리점이었던 태화관을 ‘최초의 룸살롱’이라 보는 것 역시 부적절한 해석입니다. ‘민족대표들이 낮술을 마시기 위해 태화관에 모인 것’처럼 얘기한 것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손병희의 부인 주옥경. '독립운동의 숨은 공신'이자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하지만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것은 3·1 운동의 발발 과정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의문점을, 위의 발언이 무척 희화되고 왜곡된 형태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왜 민족대표 33인은 다른 곳도 아닌 ‘기생집’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것일까? 둘째, 이들은 일경에게 전화해서 자신들이 거기 있다고 알렸다는데, 그러면 자수한 것이 아닐까?

이러다 보니 1997년 초판이 나온 한국사 개설서들에서는 이런 악의적인 서술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대표 33인은 막상 3월 1일이 닥쳐오자 뒷걸음쳤다. 그들은 처음 예정대로 사람들이 만이 모이는 파고다공원에서 선언서를 낭독하지 않고, 태화관이란 음식점에 모인 후, 일본경찰에 연락하여 자수하고 말았다.>

<’민족대표’들은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 요리집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읽은 뒤 경무총감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독립선언서 서명자 일동이 명월관 지점에 연행, 구속될 것을 기다리고 있다’면서 스스로 투항해 버렸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학계에서는 이미 논란의 여지 같은 것 없이 분명하게 결론이 난 사안입니다.(박찬승 한양대 교수의 2019년 논문 ‘1919년 태화관의 독립선언식과 민족대표’) 두 가지 문제를 하나씩 짚어 보겠습니다.

 

31운동 독립 선언식이 열렸던 서울 종로 태화관 자리에 들어선 태화빌딩. 건물 정문 앞에 표지석이 있다. /이태경 기자

◇(1)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는가?

먼저 33인 중 한 명인 권동진이 경성지방법원 예심에서 진술한 내용이 있습니다. “(2월) 20일 오전 10시 경에 최린, 오세창, 이승훈이 내 집에 와서 모든 일은 정하기로 하였다. …독립의 선언은 3월 1일 오후 2시에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낭독하여 발표하기로 하고, 그날은 헤어졌다.”

당초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려고 했던 장소는 파고다공원, 현 탑골공원이었습니다. 최린은 “파고다공원은 (서울의) 중앙에 있고, (고종의) 국장 때문에 지방 사람도 다수 들어와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에 적당하고 좋을 것이라 하여 그 장소를 선택한 것”이라 진술했습니다.

그런데 거사 하루 전날인 2월 28일 손병희의 집에서 열린 민족대표의 사전 모임에서 이갑성이 “그 일을 학생들이 이미 알고 있어서 약 200명이 모이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박희도와 권동진이 “그런 경우 학생들이 소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학생들이 일본 경찰에 대항해 충돌할 것이 염려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31절인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제104주년 31절 기념식 및 탑골공원 성역화 범국민추진위원회 발기인대회에서 학생들이 플래시몹 공연을 하고 있다. /뉴스1

그러자 손병희가 “장소를 바꾸자”고 제안합니다. 양한묵은 경찰신문조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일 아침 (손병희) 선생을 방문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선언의 장소는 파고다공원으로 말했었지만, 그 장소는 다수의 인민이 모이는 곳이다. 이미 학생들이 다수 집합하기로 되었기 때문에 발표 때에는 반드시 경관의 취체를 받고, 우리들 전부는 동행하여 안치될 것임에 틀임없다. 그 때에 큰 문제를 야기하기에 이를 수 있어, 도리어 수행 상 불온한 우려가 있기 때문에 명월관 지점으로 변경하였다고…” 명월관 지점이란 바로 태화관입니다.

사실 이것은 3·1 독립선언서 발표의 주체 중 기독교 측이 학생들과 연합을 도모하고 있었던 것을 손병희·최린·권동진 등 천도교 측에서 잘 모르고 있었던 결과라고 박찬승 한양대 교수는 분석합니다.

그런데 왜 태화관이었을까. 한번 생각해 보죠. 이미 많은 학생들이 독립선언서 발표를 알고 있었다는 것은 일본 경찰 역시 이미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는 것이 됩니다. 실제로 1일 새벽 일본 경찰들은 시내 곳곳에서 독립선언서 전단을 발견하고 수사에 들어간 상황이었습니다. 서울의 다른 강당이나 집회장으로 장소를 옮긴다? 위험이 컸습니다. 그래서 파고다공원과 가까운 인사동의 요릿집으로 발표 장소를 옮긴 것이 됩니다. 33인은 ‘요릿집 손님’으로 위장했던 것입니다.

결국 ‘파고다공원에서 발표할 경우 몰려든 학생들이 일본 경찰과 충돌할 것이 우려됐기’ 때문에 ‘서울 시내 중심부에 있으면서 많은 인원이 입장할 수 있고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발표할 수 있는 장소’로 태화관이라는 요릿집을 택한 것입니다. 당시 서울의 웬만한 요릿집에는 기생이 있었고 고급 요릿집인 태화관도 마찬가지였지만, 여기서 ‘기생의 유무(有無)’나 ‘낮술을 마실 수 있는 조건’ 같은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선언서 발표 장소로서 ①파고다공원에서 급히 변경해야 했던 ②보안이 유지되는 ③서울 중심부의 한 지점이라는 것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구의 요릿집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발표한 ‘기미독립선언서’. /문화재청

 

◇(2)일본 경찰에 전화를 걸어 자수했는가?

3월 1일 태화관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한때 정설처럼 유행했던 ‘민족대표들이 일본 경찰에 전화를 해 자신들을 잡아가라고 투항했다’는 얘기는 사실일까요?

오후 2시 조금 못 미쳐 참석자들이 거의 모였을 때 학생들이 들어와 장소 변경에 대한 항의를 하고 돌아갔습니다. 2시 정각, 독립선언문이 배포됐습니다. 선언문 낭독은 생략하고 참석자들은 눈으로 선언문을 읽었습니다. 한용운이 일어나 “우리들은 이미 독립선언을 했으므로 목적을 달성했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고 일동은 기립해 ‘독립만세’를 삼창했습니다.

 

만해 한용운

 

이 무렵 최린 등은 인력거꾼을 시켜 종로경찰서에 선언문을 보냈습니다. 민족대표들이 어디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던 경찰은 인력거꾼에게 물어 그 선언문이 태화관으로부터 배송됐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이갑성과 이규갑의 증언에 따르면, 경찰은 실제로 태화관에 민족대표들이 있는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 그곳으로 전화를 했고, 이 전화를 받은 태화관 주인(또는 종업원)이 민족대표들에게 와서 “거기 다들 모여 있느냐고 물어보는데 어떻게 대답하면 될까요”라고 물어봤다는 것입니다. 이에 민족대표들은 “당신이 본 대로 대답하시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민족대표들이 경찰에 먼저 전화를 걸어 ‘우리는 지금 태화관에 있으니 잡아기시오’라고 한 적은 없었던 것이죠. 이후 민족대표들은 경찰이 가져온 자동차를 타고 차례로 경무총감부로 연행됐습니다. 이것을 과연 자수라고 봐야 할까요. 그들은 잘못한 것이 없으니 달아나지 않았을 뿐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박찬승 교수는 말합니다. “당시 민족대표 측은 독립선언식과 선언문의 배포를 통한 독립선언, 그리고 일본 정부, 조선총독부, 미국과 파리 강화회의에의 독립청원서의 전달을 무사히 마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자신들이 서울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무사히 마치자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하고 경찰에 연행돼 갔던 것이다.” 자신들의 역할은 3·1 운동의 불씨를 지피는 일이었으니, 이제 전국의 수많은 민중들에 의해 만세운동의 불길이 타오를 것을 기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이뤄졌습니다.

 

조선일보 / 유석재기자

삼일절 전 날 밤은 고향 생각에 잠을 설쳤다.

영산은 서울에 이어 두 번째로 독립만세운동을 벌인 고장이다.

그래서 삼일절이 다가오면 옛 생각이 떠오른다.

 

고향 사람들의 독립에 대한 의지와 기개는 대단했다.

그 독립정신을 되 세기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 바로 '영산삼일문화제'다.

옛 부터 정월대보름이면 즐기던 줄다리기와 쇠머리대기를

60년 전부터 시작된 삼일문화제에 끌어들인 것이다.

 

삼일문화제는 중요무형문화재인 줄다리기와 쇠머리대기 외에도

구계목도, 문오장, 연등놀이 등 많은 전례 민속놀이를 주축으로 3일 동안 치루어 진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진영을 나누어 벌이는 줄다리기다.

지금은 고향친구인 신수식씨가 이어받았지만, 조성국선생의 열정으로 재현된 민속놀이다.

 

60년 전 삼일문화제가 처음 열릴 때는 중학생 시절이다.

그 당시 부친의 친구끼리 동부와 서부 대장을 나누어 맡았는데,

적장이 된 후로는 원수처럼 으르렁 거렸지만, 지금의 대선 판처럼 추잡하진 않았다.

우리 집은 동부의 거점이 되어 며칠 동안 풍물패 술과 음식 대느라 잔치집처럼 북적였다.

 

 줄다리기도 지금처럼 학교운동장에서 벌인 것이 아니라 영산 큰 들에서 벌였다.

장수들이 말 위에서 칼춤을 추며 진영을 지휘했는데, 줄의 규모도 어마어마했다.

시작을 알리는 총소리와 함께 터지는 군중들의 함성과 자욱한 흙먼지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밀리고 당기는 줄다리기가 이어지는 동안 곁 줄이 끊어져 넘어지는 사람이 여기 저기 생겨나기도 했으나

승부가 판가름 나는 긴박한 순간들은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고향을 등진 후에도 삼일절이 되면 찾았으나, 카메라 장비를 몽땅 잃어버리는 낭패도 당했다.

삼일문화제는 전국에서 많은 사진인들이 몰려오는데, 카메라를 노리는 전문절도단에게 털린 것이다.

전야제가 있던 날, 고향친구 조대권을 만나 다방에서 차 한 잔 하고 나오니

카메라가방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사진인들이 장비를 차에 두고 간편한 카메라만 휴대하는 습관을 노린 것 같았다.

 

파출소에 카메라 분실을 알리며 사진인에게 카메라를 조심하라는 안내를 부탁 했는데도

그 이튿날 행사장에서 세 사람이 카메라가방을 도둑맞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분실한 사람 중 두 사람은 잘 아는 사진가였는데, 나처럼 오래된 차는 차문을 쉽게 열었으나

문이 열리지 않는 좋은 차는 차 유리를 깨어 훔쳐 간 것이다.

 

내가 도둑맞은 장비만 해도 중소형 카메라 바디 세 개에 달린 갖가지 렌즈를 합하면

분실 액수가 만만찮은데, 그 속에는 빌려 온 핫셀브라드 망원렌즈가 있어 더 걱정되었다.

그 외에도 당시 '이미지 라이프'라는 취재대행업을 했는데, 부탁받은 일 때문에 난감했다.

오래 전 찍어 둔 사진으로 어렵사리 위기를 모면한 기억도 난다.

 

근 이십여 년이 지난 일이지만, 그 일만 생각하면 온 몸에 힘이 빠진다. 

분신이나 마찬가지였던 카메라를 모두 잃었으니, 그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카메라를 잊어버린 후로는 삼일문화제에 가기가 싫어졌다.

그 대신 삼일절만 되면 탑골공원에서 선열들을 기리는 것으로 대신한다.

 

이런 저런 생각하느라 늦잠에 빠져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오전10시가 가까웠다.

지하철 타러 서울역으로 달려 갔으나 정신없이 타다보니 반대방향의 열차를 탔는데,

남영역에서 내려 갈아타는 어이없는 일도 벌어졌다.

종로3가역까지 몇 구역 되지도 않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데, 왜 그리 서둘렀는지 모르겠다.

 

현장에 도착하니 오전11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탑골공원에서 열리는 추념식은 끝났는지 공원은 텅 비었고,

탑골공원 주변에는 민족지도자대회나 시민대회라는 이름의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신명을 돋우는 풍물패를 찍고 있을 무렵, 생각지도 못한 장경호씨를 만난 것이다.

 

그 곳에서 최석태를 만나기로 했다지만, 목부터 추기자며 인사동으로 옮겼다.

술시가 이른지 ‘유목민’도 ‘사랑채’도 모두 문이 잠겨있었다.

둘 다 아침을 먹지 않아 ‘부산식당’으로 갔다.

 

모처럼 시원한 생태탕으로 반주까지 곁들였는데, 그날따라 장경호씨가 술을 아꼈다.

하기야! 매일 같이 마시는 술을 이른 시간부터 취할 수야 없지 않겠는가?

식사가 끝날 무렵이 되어서야 최석태씨가 나타났다.

 

최석태씨 따라 찻집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즐거운 찻집’이라는 처음가는 곳이었다.

술 마시다 차 마시는 별난 자리지만, 아마 그 곳에서 우문명씨를 만나기로 한것 같았다.

그 날 술값과 찻값을 모두 최석태씨가 계산했지만, 술값은 아깝지 않은데 차 값은 왜 그리 아까울까?

 

‘유목민’으로 옮겼더니, 그때 사 전활철씨가 문을 열었다.

그러나 소주 한 병을 다 마셔 더 이상 마실 수가 없었다.

술도 땡긴다고 마구 마시는 것이 아니라 계산해 마셔야 했다.

하루종일 버텨내기 위해 막걸리를 아껴 마신 장경호씨가 이해되었다.

 

‘유목민’ 전활철씨 말로는 가게 문 열 때 들어와 문 닫을 때 간다지만,

술 마시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람이 그리운 것 같았다.

그런데, 장경호씨와는 왜 매번 길이 엇갈렸는지 모르겠다.

 

인사동을 사랑한다는 인사동사람은 많지만, 다들 말로만 사랑한다.

얼마 전 ‘나무화랑’에서 ‘인사동이야기’ 전시할 때 알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장경호 처럼 인사동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인사동하면 천상병시인 떠 올리듯, 먼 훗날 화가 장경호 이름을 떠 올릴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3월1일 정오 무렵, 옛 태화관 터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다고 했으나

날씨관계로 행사가 취소되었는지 아무도 없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인사동 거리는 몇몇 사람만 종종걸음 칠 뿐 한산했다.

 

허탕치고 돌아가는 길에 안국역 대기의자에 앉아

그 날의 함성을 떠 올리며 순국열사를 추념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안국역은 2018년 독립운동 테마 역으로 지정되어

여러 형태의 독립운동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대기의자 기둥에도 무명 독립운동가의 이름과 사연을 빽빽이 새겨 놓았는데,

그 중 한 기둥에는 사방이 여성 독립 운동가들로 채워져 있다.

학생과 의병은 물론 연약한 기녀들까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싸운 것이다.

 

아직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을 위해

자리를 남겨 두었다는 빈 칸들이 더 가슴을 아프게 한다.

독립유공자 혜택은커녕 이름도 남기지 못한 열사를 찾아 그 자리를 메워야 한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가난에 찌들어 어렵사리 연명하건만,

일제에 빌붙어 민족의 피를 빨아먹은 친일세력들은 자손 대대로 잘 산다.

그 것만도 분통이 터져 죽을 지경인데,

친일 집안이 독립운동가로 날조되는 현실에 치를 떨 수밖에 없다.

어찌 선열들 앞에 고개를 들 수 있겠는가?

 

마치 인사동에 내리는 빗방울이 선열들의 피눈물 같았다.

이제 위선의 가면을 벗겨내야 한다.

 

글 / 조문호

 




지난 셋째 수요일은 인사동 사람들 만나는 날이었다.
요즘 몸이 편치 않아 움직이기 싫으나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나가면 얼마나 더 나갈 것이며, 만나면 몇 번이나 더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조급증에서다.






인사동은 훤하게 불 밝힌 관광상품 매장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전시장을 다녀오는 화가들의 모습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인사16길' 골목은 술시가 이른지 조용했으나,
코너에 있던 전시장 ‘보고사’가 골동품 매장으로 바뀌었더라.






그 곳은 여러 차례 전업을 거듭하는데,
아무래도 골목 모서리라 술집이나 음심점으로 바꾸는게 나을 것 같았다.






‘유목민’에 들렸더니, 반가운 분들이 많이 와 있었다.
김명성씨를 비롯하여 서길헌, 김영국, 김상윤, 김각환,
신상철, 이미례, 이승철, 박완규, 전활철씨 등 여럿 모여 있었다.






그 날 이야기는 ‘광복회 3,1독립선언서 필사 챌린지’였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실시하는 독립선언문 이어쓰기에 이성 구로구청장이 지명 받아서다.
이성씨는 탑골공원이 있는 종로구 김영종 구청장과 항일 유적이 많은 완주군의 박성일군수,
그리고 만 여 점 넘게 독립운동 사료를 모은 김명성씨 등 세 사람을 지명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사자인 김명성씨는 하는 방법을 몰라 못했다는데, 인터넷하는 젊은 직원에게 부탁해야 할 것 같았다.
받은지 48시간 안에 독립선언서 한글본과 한 문장 필사 사진을 첨부한 게시물을 업 로드해야 한다,. 

필사한 후, 다음 문장을 이어 필사할 3명을 지목하면 된다.






독립운동가의 비장한 심정을 간접적으로 느끼며, 그분들의 헌신과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독립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는 뜻 깊은 일이다.
많은 분들이 3·1독립선언서 필사 챌린지에 동참하시기 바란다.






그리고 술자리에서 맛있는 음식이야기로 침을 튀길 때가 종종있다.
다들 미식가기도 하지만, 사는 재미가 별 없으니, 할 이야기가 뭐 있겠는가?
맛 보다 끼니 때우는 게 급급한 나로서는 그림의 떡에 불과하지만...






김명성씨는 홍어 애탕 이야기를 꺼냈다. 

‘애간장 끓인다’는 옛말도 애탕이 너무 맛있어 나왔다는 것이다.
황복이 맛있느니, 돔이 맛있느니, 온갖 생선들이 도마 위에 올랐다.
난, 조개가 맛있다고 맛장구 쳤더니, 김용국씨는 한 술 더 떴다.
“전복이 더 맛있어! 살아있는 전복에 참기름 치면 꿈틀꿈틀하는 맛이 죽인다”나...






씰데 없는 소리 그만하고, 독립선언서 필사 챌린지나 동참하자.
다 같이 3.1운동 100주년의 독립운동 정신을 되 세기며, 진정한 통일을 염원하자.






그리고 3.1절 백주년 행사로 열리는 줄 댕기기와 신명천지 열두마당도 참여하자.

이래는 2월 26부터 3월1일까지 청계천광장에서 펼쳐지는 일정이다.


26일: 4시 줄비나리
27일: 오전 9시~ 진도북놀이와 풍물
28일: 오전 10시부터 줄 말기 / 1시30부터 줄고사, 청수 의례춤 /

        오후 2시부터 신독립선언문 낭독 /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전야제- 시대상황극 12마당 -

3월1일: 4시부터 줄이 나가지만, 미리 오셔서 함께 줄을 짊어지자.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삼일절에는 시청에서부터 광화문에 이르기까지 태극기로 뒤 덥혔지만.

보수단체들의 태극기에 대한 남용과 오용으로 참담한 하루였다.


선열들께서 피로 지켜낸 나라의 국기가 일제에 빌 붙었던 박정희 우상화와

그의 딸 박근혜를 지키려는 도구로 전락되고 있음에 얼마나 통탄 했겠는가?

이 날 내린 봄비가 선열들의 눈물인양 서글펐다.






난 여지 것 시청 앞에서 열리는 보수단체들의 관제데모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객관적인 눈으로 기록해야 하는 다큐멘터리사진을 해왔지만, 그게 잘 되지 않는다.

사람을 찍어도 좋은 사람만 찍고, 싫은 사람은 카메라조차 들기 싫으니,

다큐사진가로서의 자격이 없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한 번쯤은 가 보아야 할 것 같아, 이 날은 지하철 시청역에서 내렸다.
지하철의 화장실 입구는 이른 시간부터 노인들로 붐볐고.

어떤 이는 박근혜 초상사진과 태극기를 들고 일인 시위하듯, 서 있었다.





시청광장으로 나가니 의자까지 준비된 삼일절 집회가 열리고 있었으나,

확성기에 울려 퍼지는 소리는 종북 타령과 박근혜를 옹호하는 선동적인 이야기 일색이었다.

연단에 나와 발언하는 사람들의 어투나 집회 분위기가 왠지 북한을 닮아가는 듯 했다.

빨갱이는 죽여야 한다며, 하는 짓은 그들과 똑 같았다.

그리고 삼일절에 태극기는 당연히 들고 나와야겠지만, 성조기는 왜 들고 나왔으며,

퇴역한지가 수십 년이 된 늙은이가 왠 군복을 입고 나왔는지, 이해되지 않는 일이 너무 많았다.

보기에는 하나같이 평범한 분들인데, 하는 짓은 완전 사이비 종교집단의 광신도 같았다.






시청에서 광화문 쪽으로 몰려가는 사람들을 따라 가보니,

세종문화회관 방향에 대형 스크린과 고성능 확성기를 세워놓고 혼란을 부추키고 있었다.

경찰이 광장과 도로 사이를 차벽으로 갈라놓아 광장 통과하기란 삼팔선 넘어가기보다 더 어려웠다.

화장실이나 식당에 가려면 엄청난 인내가 요구되었다.






정오 무렵의 '광화문광장'에는 촛불시민이 그리 많지 않다.
노인들이 주축인 보수단체의 집회는 일찍 시작하여 일찍 끝나지만,

촛불시민들의 집회는 늦게 시작되어 늦게 끝나는데, 오후 세 시가 되어서야 촛불시민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비가 내려 보수단체 참가자들은 대부분 흩어 졌지만, 그들의 확성기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촛불집회가 시작되자, 아예 스피커와 스크린을 촛불집회 방향으로 돌려 방해하기 시작했다.

확성기 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운지 촛불집회 발언자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의 행진 목적지인 청와대로 가지않고, 왜 광화문에서 집회를 열었는지?

그리고 촛불집회가 열리는 지척에다 대형스크린과 확성기는 왜 세웠는지?

일련의 의혹들이 경찰과 짜고 치는 고스톱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촛불집회의 '퇴진행동' 최영준실장은  ‘박근혜 세력이 광화문에 집결하여

평화롭게 진행하는 촛불에 도발하고 있다”며 강력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가 오는 중에도 30만에 달하는 많은 촛불시민들이 몰려나와 박근혜 구속과 황교안 탄핵을 외쳤다.

이날 광장에서는 윤승길(3.1절민족공동행사준비위) 사무총장의 사회로 ‘3.1정신 이어받아 통일독립 이룩하자!’는

‘제98주년 3.1절 민족공동행사’와 3,1국민주권선언대회 등 삼일절과 관련된 행사도 줄줄이 열렸다.





‘광화문미술행동’의 열한 번째 프로젝트는 ‘민주주의 촛불공화국만세!!!’였으며

‘바람찬 전시장’의 기획전은 '태극기 역사'전으로 시의적절한 태극기 자료전이 열렸다.

행진에 사용할 대나무 깃발도 대량으로 만들어졌고, 임실필봉농악의 대학생 풍물패들이 흥을 돋우기도 했다,

강병인, 김성장씨의 서예퍼포먼스와 시민들의 바닥 글쓰기, 촛불시민 인증샷 사진 찍기,

류연복 유대수씨의 촛불 목판화 찍기 등 다양한 예술행동이 펼쳐졌다.






이날 비를 맞으면서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수많은 시민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정의로운 세상을 바라는 국민들의 결기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느껴졌다.

 





그런데, 이 날 벌어진 웃지 못할 사건은 태극기 집회에 나온 이모(51)씨가

자신의 집에서 왼손 새끼손가락을 잘라 붕대를 감고 나왔다는 것이다.

손가락이 아니라 목숨을 끊을 수도 있겠지만, 손가락 자른 이유가 너무 웃겼다.

“안중근 의사처럼 3·1절에 독립 운동 한 것처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부패권력자 김기춘 구속에 따른 항의라고도 했다.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으니, 이보다 더한 코메디가 어디 있겠는가?


사진, 글 / 조문호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는 지난 삼일절도 광화문광장에 촛불집회가 열렸다.
‘광화문 미술행동’의 열한 번째 프로젝트는 ‘민주주의 촛불공화국만세!!!’였다.





이 날은 보수단체들이 모이는 시청에서부터 광화문에 이르기까지 태극기로 뒤 덥혔다.

보수단체에서 악용해 온 태극기마저도, 이 날은 밉지 않게 보였다.

충돌을 우려하여 경찰들이 차벽치고 난리를 피웠지만, 한 가닥 기대도 했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내 세운, 이 날 만큼은 태극기로 하나 되는 헛꿈을 꾼 것이다.

오히려 광화문까지 밀고 들어와 대형 확성기로 방해하며 망언을 해댔다.

이건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사이비종교집단의 맹신도 같았다.






비가 오는 와중에도 ‘퇴진행동’과 ‘광화문 미술행동’에서는 예정된 행동을 벌였고,

30만에 달하는 많은 촛불시민들이 모여 박근혜 구속과 황교안 탄핵을 외쳤다.

‘광화문 미술행동’에서 펼치는 예술행동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오픈 에어 갤러리’ 기획전이다.

아니, ‘오픈 에어 갤러리’가 아니라 ‘바람찬 전시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지난 주 백기완선생께서 이름을 다시 지어주셨다고 했다.





이번에는 태극기에 관한 자료 전시가 열렸다.

태극기는 삼일절에서 떼어놓고 볼 수 없는 상징이기도 하지만,

보수단체의 태극기 오용이 도를 넘는 시점에서, 아주 시의적절 했다.


친일파가 해방이 되니 일장기를 태극기로 바꾸어 그린 것부터,

여성 속옷 베에 그려진 태극기도 있고, 싸움터에 동원된 것 같은 태극기도 있었다.

그 태극기는 날카로운 무언가에 뚫린 구멍과 혈흔이 묻어 있었다.





태극기는 국가에 대한 기호로서의 이미지에 앞 서, 3.1 독립운동에서 시작되어

민주화운동에 이르기 까지 국민들 마음에 소중하게 자리 잡은 국기이다.

이런 태극기가 부패한 정치집단의 무능을 가리는 도구로 오용되고 있으니,

태극기에 대한 혐오감이 생기기도 했다.






태극기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많은 시민들이 기념사진을 찍는 등 분주했다.

비록 하루 열린 전시였지만, 어느 대형전시장도 이만한 관객동원이 쉽지 않다.

실사 이미지긴 하지만 대형 프린트의 시각적 효과는 야외전으로서는 그지 그만이었다.

많은 시민들이 보고 가는데, 중요한 것은 전시내용이 매번 볼 만하다는 것이다.

여지 것 미술평론가이자 전시기획가인 김진하씨가 기획과 전시 디자인을 해 왔다.





그런데, 자신의 화랑 일은 제쳐두고 이 일에 매달리는 김진하씨 뿐만 아니라,

‘광화문 미술행동’을 이끄는 많은 작가들의 숨은 노력과 땀이 베어있다.

대표 김준권씨와 류연복씨는 말할 것도 없고, 김남선, 정덕수, 송용민, 장경호, 여태명, 정고암, 김성장,

이재민, 강성봉씨 외에도 많은 분들이 싸움터인 광화문광장을 예술 광장으로 바꾸는 일들을 하고 있다.






그 날도 행진에 사용할 깃발 만드느라 일찍부터 나와 고생했다.

전 날 김준권, 류연복씨가 청주민예총 서예위원회 회원들을 모아 글씨를 쓰 왔으나, 당일 아침에 또 만든 것이다.

깃발 하나하나에 담긴 구호도 다 다르지만, 글씨체도 각양각색이라 깃발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런데 폭력사태를 우려한 경찰이 그 날은 깃발을 못 들게 막아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행진에는 사용하지 못했으나, 이번 주말에 다시 사용할 작정으로 챙겨두었는데, 망가진 것도 더러 보였다.






이 날은 임실필봉농악의 대학생 풍물패들이 대거 참여하여 흥을 돋우었고,

강병인, 김성장씨의 서예퍼포먼스와 시민들의 바닥 글쓰기도 이어졌다.

촛불시민 인증샷 사진 찍기와 류연복 유대수씨의 촛불 목판화 찍기도 계속되었다.






광화문광장에서 만난 분으로는 위에 거론된 작가 외에도, 신학철선생을 비롯하여 이인철, 김명희, 최병수,

홍석화, 김낙영, 엄상빈, 권 홍, 하재은, 정영신, 정영철, 김가영, 이도윤, 전태삼씨 등이다. 



 



이번 주말 ‘바람찬 전시장’에서 열리는 기획전은 ‘역사, 광장민주주의’다.

사진과 만화로 보는 ‘광장민주주의’로 만화가 이동슈 작품을 비롯하여

전민조씨 등 광화문광장을 기록한 여러 명의 사진가들이 참여한다.

여태명씨의 서예퍼포먼스, 김준권, 류연복씨의 촛불 목판화 찍기, 촛불시민 인증샷,

시민들과 함께하는 공개드로잉 ‘새로운 바람회’ 등 많은 예술행동이 펼쳐진다.


새로운 시대로 방점 찍을 날이 다가오고 있다, 다 같이 힘을 모아보자.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삼일절에는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들이 인사동 주변에서 열렸다.

남인사마당에서 열린 거리축제와 파고다공원에서 열린 추념식을 비롯하여 3.1운동 기념대회 등,

다양한 볼거리가 펼쳐졌지만, 다소 혼란스러운 기념행사가 되었다.

 

독감으로 몸이 불편해 늦게갔더니, 남인사마당의 거리축제는 이미 끝난 뒤였다.

보신각 타종행사라도 찍으려다, 그만 헛디뎌 지하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다행스럽게 얼굴과 머리에 상처를 입기는 했으나, 보행에는 지장이 없었다.

엊그제 통인의 이브닝 콘서트에서도 의자에 힘없이 주저앉다 책장 위의 조각품이 떨어져,

머리에 밤톨 같은 혹이 생겼는데, 얼굴과 머리는 온통 상처투성가 되었다.

 

보신각엔 타종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종각주변에는 사진기자들이 포진하여 들어 댈 틈이 없었다.

하기야! 그 많은 사진기자들이 찍는데, 나까지 찍을 필요는 없을 상 싶었는데, 마침 사진하는 김헌수씨를 만났다.

아들의 고등학교 친구이기도 한, 그는 정선 집에도 온 적이 있어 무척 반가웠다.

아마 서울시청의 사진기록을 맡은 것 같은데, 상처투성이인 몰골을 보이기도 싫었지만,

업에 방해될 것 같아, 인사만 나눈 후 얼른 자리를 피했다.

타종이 끝난 후, 박원순시장의 기념사진만 몇 장 찍고, 인사동으로 다시 돌아왔다.








3,1운동 기념대회가 열리고 있는 '파고다공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공원 안쪽 누각에서는 범민족통일국민화합운동단체총연합(범민단)’에서 주최하는 3,1운동기념대회가

열리고 있었고, 앞쪽에는 광복회에서 주최하는 3,1독립운동희생선열 추념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인사마당'에서 옮겨 간 타종행사에는 젊은이들이 많은데 비해, '파고다공원'행사는 노인들 뿐이었다.

심지어 사진 찍는 이들조차 젊은이와 늙은이로 나누어 져 있었다. '보신각'에는 젊은 사진인 들로 붐볐고,

파고다공원은 사진작가협회소속의 원로 정운봉, 이기윤, 김세권씨 등 나이 많은 분들 뿐이었다.

 

뒤늦게 광복회의 추념식이 열리기 시작했는데, 이곳은 국가보훈처에서 후원해서인지 군악대도 동원되고,

독립유공자들도 많이 참석했다두 곳이 동시에 행사를 치루기 시작했는데, 그 때부터 혼란스러웠다.

양쪽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들이 제각각인데다, 심지어는 한쪽에서 묵념하는데, 한쪽에서는 풍물을 울렸다.

마치 손발 맞지 않아 분탕질하는 정치판 같았다. 어디를 가나 나누어지는 우리 민족의 한 풍속도인데,

이 역시 힘을 가진 기득권 모임과 서민들의 모임으로 나뉜 듯 보였다.

그러나 아무도 강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 시끄러워도 함께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부터라도 진지하게 머리를 맞대어 행사들을 통합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내 고향은 경남 창녕군 영산면인데, 그 곳은 삼일독립운동이 파고다 공원에 이어, 두 번째 일어났던 고장이다.

어릴 적부터 보아 온, 삼일민속문화제는 온 주민들이 합심하여 하나로 뭉쳤다.

어른이나 아이나 남녀노소 다 같이 즐기며, 모두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축제였다.

이제 우리의 전통을 이어받아, 인사동 주변에서 벌어지는 삼일독립운동 기념행사부터 하나로 통합하자. 


'종로구청'의 '남인사마당'축제와 '광복회'의 추념식, '범민단'의 기념대회를 하나로 묶어,

의미와 재미를 더 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화합의 자리로 만들어보자.

광복회범민단의 공동주최로 종로구가 주관하고, 보훈처가 후원하는 식으로 추진하여,

전 시민이 함께하는 삼일절 행사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삼일독립운동에 온 몸 바쳐 희생한, 순국선열 보기 부끄럽다.

 

사진,/ 조문호





























 


 

 

인사동거리가 태극기 물결로 넘쳤다.

청소년들의 태극기 춤도 신났다.

 

거리에서 '통인가게' 김완규, 이계선 내외분을,

늦게는 조준영, 조경석, 주 은씨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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