넋전 춤에서 절규하는 심우성선생



인사동, 또 하나의 별이 떨어졌다.
우리 전통문화와 인사동을 누구보다 사랑하셨던,
심우성선생께서 지난 23일 오후1시 숙환으로 소천하셨다.




인사동 '신궁장여관' 계실 때의 모습



심우성선생께서 '공주요양원'으로 떠난 지도 벌써 일 년이 되었다.
몇 달 전에 전화 드렸더니, 목소리에 외로움이 절절했다.
“한 번 내려와”를 반복하셨는데, 미루다 기어이 가지 못했다.
철천지한을 남기고 말았다.



인사동 '푸른별이야기'구석방을 사용했던 집필실에 계시는 모습


심우성선생은 인사동을 짝 사랑하여 상사병 난 분이시다.
다들 변심한 풍정에 고개 돌리지만, 인사동을 그토록 못 잊어 했다.
한 때 인사동 벽치기 골목 '푸른별이야기' 구석방을 집필실로 삼아,
밥은 '화목식당'에서, 잠은 신궁장여관에서 주무셨지만,
그 때가 선생께서 가장 행복한 나날이었을지도 모른다.



강민시인의 생신을 맞아 많은 친구분들이 모였다.


"무정한 세월아! 제발 너만 가거라.
정든 사람 다 데려가면 남은 사람 어찌 살란 말인가?”


어쩌면, 세월보다 더 무정한 게 사람인지 모른다.
잘 나갈 땐 파리떼 처럼 들끓어도, 기력 쇄하면 금세 사라진다.
심지어 피를 나눈 가족 까지도...






얼마나 외로움의 한이 컸으면, 태풍까지 몰고 오셨겠는가?
부디 노여움 거두시고, 넋전 춤으로 편안히 영면하십시오.



사진, 글 / 조문호





장례식장 : 공주장례식장 101호 (041-854-1122)
발인 : 2018년 8월25일 오전9시
장지 : 의당면 율정리 향원
상주 : 심하용, 심가용




민속학자이며 연행예술가인 남천(南泉)심우성(沈雨晟 :1934.6.28~2018.8.23)선생은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사물놀이’라는 이름을 창안하였으며, 문화재 관리국 문화재 위원과 공주민속박물관장(1996∼2010)을 역임했다.
민속 문화를 연구 계승하는 데 평생을 바치며, 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와 ‘한국민속극연구소’ 소장도 지냈다.
1959년 ‘꼭두각시놀음’을 재연하여 민속놀이 1인극에 큰 족적을 남겼고, '민속문화론 서설'등 10권의 저서와 20여 권의 번역서를 출간했다.
대표작으로는 "심우성일인극장", "문", "장안산조", "무등산조", "남도들노래", "판문점별신굿", "넋이야 넋이로구나", "새야새야" "결혼굿",

“넋전 아리랑” 등의 공연활동을 이어오며, 서울시 문화상, 향토문학예술상 수상과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아래사진은 살아 생전 인사동에서 찍은 사진이다.

 선생의 삶을 추억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시길 바란다. 












































































심우성선생께서 생전에 가장 아끼던, 두 살무렵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인사동 터줏대감인 민속학자 심우성선생께서 요즘 몸이 불편해 요양원에 계신다.

인사동 시궁창(신궁장)여관에 투숙하시며, 투덜투덜 인사동을 떠도시던 모습을 이제 볼 수 없게 되었다.

절규하는 선생님의 넋 굿도 더 이상 볼 수 없다.

선생님 팔순 잔치 때 찍은 사진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4년이나 흘러 버렸다.

세월이 너무 빠르다.





“무심한 세월아 너만 가거라. 정든 사람, 귀한 사람 다 데려가고 남은 사람은 어찌 살란 말인가?”

세월보다 더 무정한 것은 사람이다.

잘 나갈 때는 파리무리처럼 들끓던 사람들이 기력 이 다하면 금세 사라진다는 것이다.

심지어 가족들 까지도...

엊그제 선생님의 넋 춤 제자였던 양혜경씨가 올린 글을 보고, 요양원에서 외롭게 지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주에 있는 아내와 서울에 있는 가족들은 다 무엇하고, 왜 공주까지 홀로 떠나셨는지 모르겠다.

이게 사람 사는 도리인가?




선생께서 외로워하신다는 양혜경씨의 문자메시지에 당장 달려가고 싶지만,

마음처럼 싶지 않은 것이 사람 사는 현실이다.

통화는 가능하다기에 전화로나마 문안인사 드렸더니, 엄청 반가워 하셨다.

언제 한 번 만나자는 말씀에 외로움이 뚝뚝 묻어났다.

평소 가까이 지낸 지인들은 전화로 문안인사라도 드렸으면 고맙겠다.

행여 공주방향으로 가는 걸음이 있다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인생 길,

따뜻한 선생님의 손 한번 잡아드리자.

전화 010-9940-1299 / 공주 에덴요양병원 201호


사진,글 / 조문호






 

 

민속학자 심우성선생께서 인사동으로 올라 온지도 벌써 해를 넘겼다.
여관방에서 자고 끼니는 식권으로 해결하지만, 마냥 행복해 하신다.
매일같이 친구 만나고, 고서점을 더나들며 책 사 모우는 재미로 산단다.
거기다 간간이 들어오는 원고청탁에다 무대공연까지 있으니 신바람 난 것이다.

선생께서 혼자 상경하셨을 땐, 안 서러워 했으나, 지금 생각하니 잘 됐다 싶다.

천성이 떠도는 광대나 다름없는데, 갇혀 사셨으니 감옥이나 마찬가지였을게다.


 

지난 27일 인사동 ‘유목민’에서 술 한 잔 하시며 인사동 아리랑 이야기를 꺼내셨다.
인사동 숙소에만 아리랑과 관련된 서적이 50권이나 있고,
제주에는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 부터 아리랑에 관한 자료들이 없는게 없단다.
언젠가는 인사동에 아리랑박물관 하나 만드는 게 마지막 꿈이란다.

수집한 아리랑 책들을 보기위해 신궁장여관 숙소에 들렸더니, 여관방 자체가 박물관이었다.

한 평 남짓한 방에 오밀조밀 붙이고 걸고 쌓아, 마치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화개장터 같았다.

그 책들의 표지들을 모두 복사했는데, 더러는 귀중한 자료들도 여러 권 보였다.

심우성선생께서 신문에 난 사진자료까지 다 오려 스크랩하기에,

컴퓨터 한 대 들여 놓으라 말씀드렸더니 손사래를 치신다.

인터넷에 왠 만한 사진자료들은 다 있는데다, 원고지에 글 쓰는 게 안 스러워 한 말이지만,

민속학자가 컴퓨터 가지고 노는 것도 좀 웃긴다 싶었다.

비록 여관에서 혼자 지내는 신세지만 친구 분들 중에는 제일 부자다.
받은 원고료로 책사고, 남는 돈은 매일같이 친구들 술 받아 드린다.
“선생님께서 술값 내시면 여관비하고 밥값은 우짭니꺼?”라며 물었더니
제자들이 여관비로 한 달에 60만원씩 보내주고, 잘 아는 후배가 식권도 대 준다는 것이다.
부러웠다. 선생님은 분명 복 받은 분이셨다.

그 복으로 인사동 아리랑박물관까지 꼭 만들 것으로 믿는다.

사진,글 / 조문호

 

 

 

 

 

 

 

 

 

 




 

인사동 거리를 걷다보면 지팡이에 의지한 채,  쓸쓸하게 걸어가는 노학자 심우성선생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원로 민속학자이자 일인극 배우인 남천 심우성(82세)선생은 요즘 인사동의 ‘신궁장’여관 206호에서 장기 투숙하신다.
인사동 변두리에 있는 ‘화목식당’에서 3천원짜리 식권으로 끼니를 해결하며 유령처럼 인사동 주변을 떠도는 것이다.

 

평소 인사동에서 자주 뵙기는 하지만 말씀이 없어시기에, 왜 제주에서 혼자 올라 와 계시는지 근황을 여쭈어 보았다. 

 

 

남천선생은 원래 충청도 공주가 고향이지만, 서울 명륜동에서 태어나 인사동 ‘수도약국’ 옆 골목에서 사셨다.

아버님이신 소민선생께서 인사동 고서점 ‘통문관’과 ‘관훈고서방’의 주인 분과 절친했기에,

일찍부터 그 곳을 들락거리며 우리 것에 대한 애착을 키웠다고 한다.


 


인류학을 전공해 KBS 공채 1기로 아나운서가 되었고, ‘대한뉴스’ 아나운서를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직업이 주는 대우보다는 하고 싶은 일에 쏠려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인 민속사 연구에 몰두했는데, 한 때 '공주민속박물관장'을 지내기도 하셨다.

탈과 솟대 뿐 아니라 민속극에 빠져 꼭두각시를 내 세운 넋전을 수 차례 열기도 했다.

 

['푸른별 이야기' 술집 골방에 마련한 집필실]


고향처럼 정겨운 인사동을 떠나지 못해 여기 저기 전전하시다 경운동 SK오피스텔에 사무실을 마련한 적도 있었다.

인사동을 출입하는 친구들과 어울려 풍류를 즐기시던 어느 날,

인사동에서 '완자무늬‘란 식당을 운영하던 김모 여인에게 마음이 뺏겨 모든 걸 바치게 되었다.

그러나 행복한 시절도 잠깐일 뿐, 감당하기 힘든 위암이 전위되어 사경을 헤메게 된다.

남천선생이 병석에 있는 동안 아내인 김여사는 전 재산을 처분해 자신의 고향인 제주도로 옮겨 버렸다.

얼마 후 회복해 기력을 차린 남천선생은 마음 변한 아내의 속내를 읽고,

자신이  평생 일구어 온 민속자료와 모든 것을 남겨 둔 채, 빈손으로 인사동으로 돌아오게 되었단다.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을 뒤늦게 절감하게 된 것이다.


 


남천선생의 어려운 사연을 알게 된 연출가 임진택씨와 춤꾼 이애주씨가 가끔 용돈을 챙겨드리기도 하고,

인사동에서 ‘푸른 별 이야기’란 주막을 운영하는 최일순씨가 술집 골방을 비워 선생님 집필실로 제공하기도 했다.

낯에는 골방에서 민속에 관한 글을 쓰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 특강을 나가는 등 

마음의 상처를 지우려 애쓰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오늘도 거리를 오가며 급속하게 변해가는 인사동을 안타까워 하지만, 각박한 세상 인심은 돌이킬 수 없었다.

몰려드는 인파에 밀려 외각 길로 돌아 다니지만, 죽을 때까지 인사동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다.

돈에 밀려 난 인사동 문화와 병들어 쓸쓸한 노학자의 모습이 너무 닮았다.

스러져 가는 인사동 낭만, 버림 받은 인사동 터줏대감의 쓸쓸한 모습에서 슬픈 비애를 느낀다.

 

사진, 글 / 조문호

 

 



제주 사시는 심우성선생께서 몇 달 전에 인사동으로 나오셨다.
제주에 대궐 같은 집과 사모님을 남겨두고, 인사동에서 떠도는 이유가 뭘까?
고향처럼 포근했던 인사동이 눈에 밟혀, 아름다운 섬도 귀양 온 것 같았단다.

마침 종로경찰서 옆 좁고 외진 골목에 있는 '푸른별이야기'
쪽방을 집필실로 정하고, 식사는 '화목식당'에서 잠은 여관에서 주무신단다.
낮에는 집필실에서 지내며 오랜 친구들도 만날 수 있지만,
기나긴 겨울밤은 외로워 어떻게 지내셨을까?

팔순 노년의 지칠 줄 모르는 방랑벽을 누가 말릴까마는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그 용기가 가끔은 부럽다.

 

 

 

 

 

 

 

 

 




[스크랩]특급뉴스 / 구중휘


 공주가 낳은 ‘민속학자’이며 ‘1인극배우’인 심우성 옹(81세)을 서울 관훈동 ‘푸른별 주막’ 문간방 ‘극단 서낭당’에서 만났다.

처음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은 2014년 1월 5일 오후 12시 30분, 장소는 종로경찰서 앞이었다. 그러나 실제는 약속 시간보다 20여분 빨리 그 장소에 도착, 전화를 걸게 되었다.

마침 앉을 만한 의자가 있어서 편하게 기다리게 되었는데 마침 지나가던 두 아가씨가 다가와 “종로경찰서가 어디냐?”고 물었다. 외국인 학생이었다. 아가씨가 갈 때는 한국말로 “감사 합니다”라고 했다. 심우성 옹이 지금 머물고 있는 ‘푸른별 주막’은 인사동 바로 거기였다.

 

 

 

심 옹은 수염을 기르고,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1934년생이니 우리나라 나이로 81세이다. 그러니 당연한 일이리라. 그러나 눈빛은 형형하고, 세상을 꿰뚫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골목을 돌아서 간 곳이 ‘푸른 별 주막’이었다. 원래 이 집은 제자인 최일순이라는 분이 제공했다고 한다.

원래 10여 평이 될까 말까한 이 작은 집은 이름 그대로 주막인데, 마침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영업장임을 느끼지 못했다.

점심을 먹고 돌아와 집에 돌아와, “이 집이 얼마나 가겠소?” 하고 물었더니 현재 소유자인 제자가 7억원에 구입했다고 한다.

심옹이 머물고 있는 곳은 ‘푸른 별 주막’ 문간방으로 1평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도 책상과 의자, 그리고 책장들로 배치되어 있어서 집필하기에는 적절해 보였다. 마침 책상 위에는 작성하던 원고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숙소가 있다고 했다. 그곳도 이명선이라는 제자가 제공했다고 한다.

서울을 떠나 공주를 거쳐 현재는 제주도에서 살다가 10여 년 만에 돌아왔는데, 주위 사람들이 잊지 않고 있는 듯하였다.

이 외에도 친구인 전 윤보선 대통령 둘째 아들도 “자기 집에 있으라”고 권유한다고 한다.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 사양했으나, 1주일에 한 번 정도는 ‘푸른 별 주막’을 찾아온다고 한다.

 

 

현재 심우성 옹은 출판사 민속원과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한국 민속학의 기억과 기록》[2013. 8. 20]과《통일 아리랑》[2013. 12. 30]은 작년에 작업을 끝낸 성과물이었다. 앞의 것은 직접 쓴 것이고, 뒤의 것은 엮은 것이었다.

《한국 민속학의 기억과 기록》은 2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부분이 민속학자[이능화, 손진태, 송석하]를 다음 부분이 민속학의 발자취와 사상적 배경 등을 논의하고 있다.

‘조선학의 선각자 이능화’, ‘방법론의 개척자 손진태’, ‘조선 민속과 송석하’ 등이 논의의 대상이었다.

심옹은 우리나라 민속학의 본격적인 출발점을 1927년[《계명》제19호]으로 보았다. 이능화의 《조선무속고》와 최남선의《살만교차기》가 실렸기 때문이었다.

인터뷰 마지막 단계에서 앞으로 민속학의 미래와 방향을 물었다. 그런데 답변은 의외였다. “지금 열심히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원로 학자가 아직까지도 ‘모색 단계’라는 말씀은 물론 그대로 받아드릴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끊임없이 문헌적 연구와 현장 확인 등을 통한 정리 단계의 방향 모색이라고 보아지기 때문이다. 한국 민속학의 기억과 기록》의 후반부 ‘문화와 민중의식’에서 민속학의 모색이라는 열기가 느껴진다.

그러나 이러한 심옹의 글들은 새로이 작성한 것이라기보다 그동안 지면을 통하여 피력한 것들을 종합 정리한 것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통일 아리랑》은 심옹이 엮은 책이다. 역시 총2부로 구성되었는데, 제1부는 학자들의 논문이고 제2부는 각 지역의 아리랑 모음집이다.

논문은 진용선의 ‘정선 아리랑의 보존과 전승’, 서정매의 ‘밀양 아리랑 보존의 필요성에 관한 제언’, 박병훈의 ‘진도 아리랑의 유래와 현황’, 최창호·홍강성의 ‘라운규와 수난기 영화’ 등이다.

대표적인 아리랑이 정성·밀양·진도에 있고, 세상에 널리 알려진 계기를 만든 것이 라운규라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고 짐작된다.

제2부는 심옹이 보는 아리랑과 신경림, 김연갑, 조규익·조용호 등이 찾아 나선 아리랑 관련 글들이다. 심옹이 《통일 아리랑》을 엮은 것은 결국 아리랑의 사랑 때문이다. ‘시작의 이야기’에서 쓴 것처럼 외형적인 책의 묶음이라기보다는 그 ‘이전에 마음 깊이 통일하고 싶은 아리랑’이라고 힘을 주었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아리랑’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여, 4·3 고개를 넘어간다.’ 등의 1인극을 올린 바 있다. 사석에서 들은 바로는 ‘본인이 처음 우리나라 지도에 파란색을 칠한 깃발을 1인극에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면 민속원과 연관하여 얼마 동안 무슨 내용을 집필하려는가를 물었다. 그랬더니 민속원 홍기원 사장과는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인데, 심우성 옹이 내고 싶은 책이 있다면, 아무 이유 없이 모두 내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작업 중인 것은 민속학 관련 수필집으로 총 60꼭지로 구상하고 있는데, 이미 30여 꼭지를 썼으며, 2월중에는 나오지 않을까 한다”고 밝혔다.

심옹은 매일 원고를 쓰고 있고, 그 원고의 일부는 어느 잡지(제목은 잊어버렸다)에 연재하고 있었다. “이렇게 좁은 연구실에서 자료도 없는데 어떤 방식으로 글을 쓰시냐?”고 물었다.

그는 태어나기만 공주에서 했지, 사실은 서울 사람이다. 서울의 민속현장을 체험으로 겪었다는 이야기이다. ‘기억’과 ‘현장 확인과 자료[주로 사진]’를 통하여 글을 쓰니 생동감이 있다고 보여 진다. 기대가 된다.

언제까지 서울에 머물 지에 대한 답변은 듣지 못했다. 작업과 관련된 일정일지도 모른다. 헤어지면서 그는 “이제 집도 자주 찾아와서 만납시다”고 웃었다.

 

 

여기서 한 가지 첨가해 둘 것이 있다. 필자는 심우성 옹에게 제안을 하나 했다. 백제 기악에 관한 책을 하나 내자는 것이었다.

백제 기악의 연구는 심옹 부자지간에 시작하여 일단락을 지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악 탈은 심옹의 아버지 소민 선생이 만들었다. 그리고 ‘1인극 배우’답게 백제 기악을 복원하여 무대에 올리는 데까지 성과를 올렸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612년 일본에 전수한 백제 기악의 일본인들의 발전 시켜 나간 과정과 정창원에 소장된 탈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에서 복원한 시대까지이다.

612년 백제기악이 중국 오나라 배워온 것이라면, 그 이전 즉 중국에서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하는 규명이 남아 있다.

여기서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온 과정을 모색한 것이 심우성 옹이 엮어낸 성과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한국으로 오고, 천축[인도] 등 서역에서 중국으로 오는 과정 등은 아직 밝혀내지 못한 부분이다. 이 부분은 필자가 2012년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바 있다.

1) a 서역에서 중국으로, b 중국에서 백제로, c 백제에서 일본으로 간 경위와 내용을 정리하고, 2) [현재 일본에서 진행되는 백제 기악을 바탕으로 복원된] 우리나라에서 무대에 올려진 백제기악에다가 서역에서 중국까지의 영향도 넣어서 보다 풍성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종합적인 백제 기악 연구가 나와야 한다고 본다. 그 책의 구성은 제1부 현재까지 복원되었거나, 복원될 백제 기악, 제2부 서역에서 중국을 거쳐 들어온 백제기악[구중회], 제3부 일본으로 건너가서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온 백제 기악[심우성] 등으로 묶어야 한다.

우리는 책[종합본 백제기악]을 내기로 약속했다. 하여튼 심우성 옹의 서울 생활은 원로 학자가 어떤 자세로 학문을 대하여야 하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더욱 건승하시고 하는 정리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빈다. 
  


민속박물관장 지낸 로맨티스트

'인사동 정보 > 인사동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영주(고미술학자)  (0) 2013.03.11
(고)이호철(소설가)  (0) 2013.03.11
손 숙(연극배우)  (0) 2013.03.11
이유나(무용가)  (0) 2013.03.11
송점순(사동집 대표)  (0) 2013.03.11


가면극에 정통한 민속학자


민속학자, 연행예술가.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언론계를 거쳐
현재 문화재 관리국 문화재 위원과 한국민속극연구소 소장으로 재임하고 있다.
또 공주민속박물관장과 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이기도 하다.
<민속문화론 서설>등 10권의 저서와 <아시아 무용의 인류학> 등 20여 권의 번역서를 출간했으며
'결혼 굿' '심우성의 새야 새야' 등의 공연 활동도 계속하고 있다.
서울시 문화상, 향토문학예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인사동 정보 > 인사동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백호(가수)  (0) 2013.03.11
김신용(시인)  (0) 2013.03.11
최정자(시인)  (0) 2013.03.11
(고)김용태(서양화가)  (0) 2013.03.11
장사익(가수)  (0) 2013.03.1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