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너무 허무하다.” 모든 게 한 순간이구나.

 

어제 오전 7시 무렵, 녹번동 정영신씨로 부터 전화를 받았다.

정선 만지산 집에 불이 나 모든 게 타 버렸다는 비보였다.

 

그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설마, 누군가 빨리 오라는 장난 전화를 했겠지”라고 위안했으나

부리나케 정동지를 만나 정선으로 떠난 것이다.

 

연락에 의하면 밤1시 40분 경 옆집에서 불이 나

우리 집으로 옮겨 붙었는데, 원인은 누전이란다.

옆집 한씨가 전기기술자인데, 누전으로 불났다는 건 이해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 집은 동강 변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옛집이 아니던가?

동강 댐이 무산되어 주민들에게 주택건설비를 지원할 때

동강 변에 있던 집들은 모두 헐려나가며 국적불명의 주택이 들어섰다.

 

집만 아니라 그 안에는 동강 사람들의 삶의 변천사가 담긴 자료는 물론,

긴 세월 수집해둔 소중한 사진자료들이 차곡차곡 보관되어 있었다.

한 달에 두 번씩 정선 갈 때마다 새로 생긴 자료들을 챙겨가

정선 집은 자료 창고나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부엌 헛간을 개조해 암실과 작은방까지 만들어 두었으나

방은 물론 암실 기자재 위에도 숱한 짐이 쌓여 창고가 되어버린 것이다.

 

가장 큰 걱정거리는 그 곳에 남겨 둔 필름 박스였다.

필름 박스 두 개 중 한 개는 스캔받기 위해 녹번동으로 옮겼지만,

한 개는 만지산 집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자동에 들어 간 이후 몇 년 동안 필름박스를 손도 대지 못했다.

그 일만 끝냈다면 나머지 것과 바꾸어 필름 이미지는 건졌을 것이다.

 

그 집에는 동강자료 뿐만 아니라 나는 물론 정영신씨가 전시한

수 많은 사진 작품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스캔된 이미지야 다시 만들면 되겠지만 사라진 이미지는 어쩌냐?

 

그리고 둘 만의 작품만 아니라 다른 작가들의 그림이나 도자도 있었다.

강용대 그림에서부터 초창기의 강찬모 그림과

수안스님, 최울가, 이존수, 신동여, 이청운작가 등 십여 점이 보관되어 있었고

나를 그려 준 박재동선생 그림을 비롯한 초상화도 여러 점 있었다.

그리고 통도사에 계신 수안스님께서 방문하여 ‘몽암’이라는 현판까지 달아주셨다.

꿈의 암자라고 이름 지었는데, 결국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정선 만지산에 도착하니, 옆 집 두 채와 우리 집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포크레인만 불탄 현장을 지킬 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화재 규명은 물론 불탄 필름 흔적이나 피해 자료를 찾아야 하는데,

왜 포크레인이 현장에 들어 와 헤집어 놓았을까?

한 쪽에선 불씨가 남았는지 연기가 피어오르고, 굶주려 지친 개들만 여기 저기 퍼져 있었다.

 

불탄 잔해를 살펴보니 그동안 아무리 찾아도 없었던

90년도 만든 ‘전농동588번지’ 전시 팜프렛 잔해도 보였다.

그렇지만 건져낼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윗만지 창수네 집으로 올라갔다.

고사리 꺾던 이선녀씨는 하던 일을 제쳐두고 술상부터 차렸다.

마음을 위안해 줄 게 술 밖에 더 있겠는가?

 

막걸리가 몇 잔 들어가니 한결 마음이 편하더라.

들려준 바에 의하면 동네사람들이 밤잠을 설쳤고, 소방차가 일곱 대나 동원되었단다.

다들 산으로 번지지 않도록 막았을 뿐, 속수무책이었다고 한다.

 

누전이란 것은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더니, 아니란다.

어제 손님 네 분이 윤인숙씨 집에 와 묵었는데, 늦도록 고기 구워 술을 마셨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은 불씨가 살아나 옮겨 붙은 것으로 추정한단다.

 

불난 집 이야기에서 웃기는 이야기로 불이 옮겨 붙었다.

살러 온 색시마다 도망쳤다는 뱃사공 유춘식씨 이야기에서부터

한 밤중 일 치던 내외가 석유병을 들기름으로 착각해

거시기에 불이 붙은 비화 등 배꼽 잡을 옛날 이야기들이 나왔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이선녀씨가 따 놓은 두릅을 두 보따리나 챙겨주었다.

두릅 값으로 신사임당 한 장을 꺼내주었더니, 감동적인 말을 했다.

“인정을 돈으로 계산하지 말자”는 거다.

 

마을 이장 처럼 항상 보살펴주는 최연규씨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다들 불난 집에 와 있단다.

 

 

내려 가보니, 동내 사람들이 술 한 잔 마시며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이야기했다.

나야 보험이라고는 자동차 보험 밖에 없지만, 옆집도 화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요즘 집 공사 중이라 현금을 칠백만원이나 두었는데, 그 것까지 홀랑 태웠다는 것이다.

보상 받기 위해 잿더미를 뒤적거려 이백만 원 정도의 흔적은 찾았다고 한다.

 

자칫했으면 생사람 잡을 뻔 했더라.

숨이 막혀 일어나니 연기가 차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돈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팬티 바람으로 튀 쳐 나갈 수밖에 없었단다.

천만다행인 것은 그날 밤 바람이 한 점도 없었다는 점이다.

불이 산으로 옮겨 붙었다면 대형 산불로 번질 가능성이 많았다.

동원된 소방관들도 불이 윗쪽으로 번질 것을 대비해 포진했지만,

일방통행인 만지산 길에 물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진화가 더 더뎠다고 한다.

 

늦게 불붙은 우리 집은 소방관들이 조금만 빨리 출동했어도 옮겨 붙지 않았을 거고,

물 공급만 원활했어도 자료의 반이라도 건져낼 수 있었다고 한다.

산불이나 마찬가진데, 소방헬기는 왜 동원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동강 댐으로 시끄러울 때 왔으니, 어언 이십 오년의 세월이 훌쩍 넘었다.

환경 사진가들이 만지산에 둥지 틀고 물고기나 곤충, 들꽃 등 각자 전문분야를 기록했는데,

난, 동강 변에서 살아 온 사람들의 삶을 기록한 것이다.

지금 불탄 집이 그 당시 캠프로 사용했던 집이다.

 

2000년, 동강 사람들의 눈물겨운 이야기를 담은 ‘동강 백성들’ 사진 산문집과

조해인시인의 ‘어라연 뱃사공 이해수씨’라는 동강 시집이 나올 무렵에는

‘동강주민을 위한 굿마당’을 옛 귤암분교에서 열기도 했다.

 

김명성씨가 주동이 된 ‘창예헌’ 예술가들이 버스 몇 대에 나누어 타고 찾아 와

밤늦도록 주민들과 어울렸는데, 이원창 사또 나리께서 늦게 나타나는 바람에

좁은 도로가 마비되는 등 조용했던 동네에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다.

 

그 무렵은 다들 동강 댐 찬성하는 주민들을 나쁜 놈으로 몰아세웠다.

댐을 만들라는 목소리를 낼 수 밖에 없는 속 사정은 일언반구도 없이

여론몰이 하는 형태는 지금의 기레기나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환경운동연합’과도 반대의견을 낸 것은 사람이 살아야 동강도 살수 있다는 말이다.

 

빚에 쪼들려 물에 투신하거나 농약먹고 자살하는 등

동강 사람들이 여럿 죽어나가자 주민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

명동성당 앞에 진을 쳤는데, 날씨마저 얼마나 추웠는지 모른다.

그 당시 충무로에 있던 ‘현대사진가회’ 강의실을 비워 귤암리 노인들을 모셔놓고

밤 세워 전단지 만들고 보도자료 보내느라, 사진단체 사무실이 동강사람들 전진기지가 되었다.

이틀 날 ‘문화일보’ 사회면에 동강주민 살리라는 사회면 특집기사가 실린 것이다.

 

주민대표 이영석씨를 비롯한 몇 명이 김대중 대통령 호출로 청와대에 불려갔다.

피해주민에게 주택자금 지원과 부대시설을 지원하기로 약속받는 등 난제를 해결했다.

그 때 출판한 ‘동강환경사진집’과 ‘동강 백성들’ 산문집으로 환경단체 프로젝트는 끝났지만, 

두메산골사람들’과 '산'을 주제로 사람과 자연 환경을 찍으며 혼자 눌러 앉았다.

 

그 곳은 자연 환경도 아름답지만, 절처럼 마음이 편안해 떠나기 싫었다. 

몇 년 지난 후 프로젝트에 같이 참여한 사우가 그 집을 자기가 사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울며 겨자 먹기로 빚내어 사게 된 것이다.

그 많은 짐을 옮길 곳도 없었지만, 하던 작업이 끝나지 않아서다.

오죽했으면 역마살이 끼어 한군데 오래 정착하지 못하는 버릇을 알아

돌아가신 어머니까지 만지산에 묻었겠는가?

 

20년 전 평당 팔만원에 400평을 샀다.

당시의 시세가 평당 만원정도 했으니, 바가지도 그런 바가지가 없었다.

 집도 밭에다 지은 무허가 농가였다.

문제는 한 집이었던 옆집을 다른 사람에게 잘라 팔며 절집 같이 고요한 만지산의 낙원도 끝나버렸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거나 지나치는 사람들로 정동지가 정선 집에 가기 싫어했다.

욕실도 없고 화장실도 멀리 떨어져 있어 밖에서 목욕을 하거나 소변을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예 우리 집 마당을 주차장으로 사용하며 들락거리니, 나 역시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옆 집은 한 때 대학로에서 카페를 운영 했다는 박진기씨가 살았으나

땅 살 형편이 못 되자 미국 사는 친구를 끌어들여 사도록 부추긴 것이다.

옛 말을 믿을 수는 없으나, 그 집에 우환이 생긴 원인은 집 구렁이 때문이 아닌가도 추정된다.

 

2002년 여름, 우리 집 모퉁이에 팔뚝 굵기의 능구렁이가 똬리 틀고 있었다.

최종대씨가 얼른 잡아 옆집 부엌의 빈 장독 속에 넣어둔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옆집은 최종대씨 장인인 이관옥씨가 오가면 사용한 집인데,

이튿 날 뱀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고 한다.

집 구렁이를 잡아서 안 된다는 옛말이 생각나 늘 마음이 꺼림직 했다.

 

이번에 불난 발화지점이나 사람 죽은 방도 그 부근이었다.

비록 그 일 때문은 아니겠지만, 우환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 집을 산 성수씨가 어느 날 술이 취해 부얶 방에 들어가다 깨진 방문 유리에

동맥이 찔려 죽는 변을 당하는가하면, 처음 잠깐 살았던 박진기씨도 아내와의 불화로

집에서 석유를 몸에 붓고 불을 붙여 자살한 것이다.

 

성수씨가 갑작스런 변을 당하자 아내가 무서워 못살겠다며,

이사 가려고 급히 집을 내놓았는데, 그 집을 산사람이 이번에 불 난 윤인숙씨다.

세상을 하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구렁이를 잡은 최종대씨도 나이에 비해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어지는 우환이 우연치고는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우리 집은 일찍부터 ‘사진 굿당’이란 이름을 내걸고 여러 가지 일을 벌였다.

산삼 심는 ‘농심마니’ 팀들을 초대하여 만지산에 산삼을 심었고,

사진굿당 앞 서낭당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때로는 굿당 축제에 무세중씨나 정선 무당을 모셔 와

밤 세도록 징소리 울리며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굿판을 벌이기도 했다.

 

일 년에 한 번씩 축제를 연 것도 동강사람들 자료관으로 자리잡기 위해서였다. 

타지의 예술인들을 불러 모아 수시로 놀이판을 만들어 문화적 역량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동강과 사람들에 대한 숱한 자료들을 모아 왔으나, 그 꿈은 순식간 화마에 휩쓸려가고 말았다.

 

우연치고는 근래에 생긴 일들도 예사롭지 않았다.

여지 것 그 집을 전혀 손대지 않았던 것은 돈도 없지만,

집 자체를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불편함을 토로하는 정동지의 불만을 깔아뭉갠 것이 미안할 뿐이다.

 

그런데, 보름 전 느닷없이 옆집에서 우리 집에 신식차양을 달아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호의를 거절할 수도 없었지만, 좋아하는 정동지를 보며 어찌 반대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다음 주에 정선군청에 들어갈 작정으로 구체적인 기획안까지 만들어 두었다.

그 집에 보관된 동강자료는 물론 집 자체를 정선군에 넘겨주기 위해

실무자를 만나 손 털 계산을 한 것이다.

 

또 하나는 인사동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기 위해 몇 년 동안 손대지 않고

쳐 박아 둔 녹번동 필름박스를 정리하기로 작정했다는 점이다.

그 필름을 스캔 받은 후 정선 필름과 바꾸어왔다면 이미지는 살아남지 않았겠는가?.

한꺼번에 일어난 이 일련의 갑작스런 변수들이 화재와 연관은 없었을까?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 지 걱정이 태산 같다.

아무래도 윗만지산의 마지막 우환은 내 차례가 될 것 같다.

이년 쯤 후에는 동자동 쪽방 일도 마무리 될 것으로 여겨진다.

재건축이 끝나 다들 한 곳에 머물게 되면 더 이상 할 일은 없다.

그 때쯤 집터에 오두막 지어 살다 만지산에 뼛가루를 뿌리게 할 예정인데, 뜻대로 될지 모르겠다.

 

동네 주민들이 위로 차 여럿이 모여 술잔을 돌렸으나

예전부터 살던 주민은 최연규 내외와 김순배씨 뿐이었다.

 

다들 낯설거나 안면 정도 있었는데, 술 마시는 분위기가 무거워 노래 한 곡 불렀다.

그런데, 웃기려 불렀던 성냥공장 노래마저 노동가처럼 비장감이 뚝뚝 흘렀다.

 

“만지산 성냥공장

성냥 만드는 아저씨

하루에 한 갑 두 갑

낱 갑이 열두 갑

바지 밑에 감추고서

정문을 나오다

바지 밑에 불이 붙어

자지털이 다 탔네

만지산 성냥공장

아저씨는 백자지 백자지“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십 년 전에 심은 만지산 집 살구나무,

살구 좋아하신 장모님 나무다.

열리라는 살구는 열리지 않고

꽃만 흐드러지게 피는 살구나무

꽃 무게에 넘어질까 지팡이도 짚었다.

지천에 온갖 꽃이 다 피어도

살구꽃처럼 예쁜 꽃은 없다.

살구 맛도 못 보고 가신 우리 장모님

꽃이라도 보실지 모르겠다.

늙은 이내 가슴 다 녹는다.

 

지난 주말 정선 만지산에 파종하러 갔다.

모처럼 정영신씨와 나선 걸음이라 자동차도 신 났다.

 

만지산엔 온갖 꽃이 만발했다.

살구꽃을 비롯하여 진달래, 철쭉이 반겼고,

옆 마당의 벚꽃은 하늘을 뒤덮었다.

 

지난 번 봉우리 맺혔던 목련은 처참하게 떨어졌다.

그렇지만, 꽃구경할 겨를이 없다.

당일 떠나려면 일을 서둘러야 하기 때문이다.

 

정동지는 야채모종 심느라 바빴고,

나는 땅 고르고 씨 뿌리기 바빴다.

 

옆집의 한순식씨는 집수리부터 하란다.

천막 떨어져 나간 자리에 공사판에서 챙겨 온 아크릴 차양을 달란다.

 

주는 것도 고마운데, 두 내외가 더 설쳤다.

발가락 부러진 윤인숙씨는 깁스까지 했으나

비닐봉지로 감싼 채 물청소를 하고,

한순식씨는 차양 다느라 애썼다.

 

이젠 우리 집도 신식 차양을 달았다

한 때 동강 댐 보상 턱으로 집 지어줄 때,

동강변 일대의 헌집은 모두 헐려 나갔다.

 

우리 집이 동네에서 유일한 헌집인데,

아직 석면 스레트 지붕을 달고 산다.

읍사무소에서 무상으로 교체해 주었으나

우리 집만 잔재를 그대로 남겼다.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미련하게 보이겠나?

돈이 없어 새집을 짓지 못했지만,

어찌 보면 동강 변의 유일한 옛집이라

주택 변천의 자료적 가치는 있을거다.

 

새집이야 돈만 있으면 언제나 지을 수 있지만,

헌 집은 허물면 다시 볼 수 없지 않겠는가?

 

살기가 불편해 정동지 마저 정선가길 싫어한다.

나야 어디서나 지내는 야생의 습성을 지녔지만.

따뜻한 물은커녕 씻을 곳조차 마땅찮은 시골집에

어느 여인네가 가고 싶겠는가?

 

돈 생기면 조립식 주택이라도 옮겨주겠다고

둘러 댄지가 10여 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그런 처지에 비 피할 수 있는 차양이라도 올렸으니

공사 중의 공사고 경사 중의 경사가 아닐 수 없다.

 

달아 준 것만도 황송하기 그지없는데,

부침개까지 부쳐 술상까지 차려 주었다.

상낭식이 아니라 차양식이 된 셈이다.

아랫집 김익수씨와 윗동네 두 내외도 합류했다.

 

그나저나 보답을 해야 하는데, 돈이 십 만원 밖에 없었다.

윤인숙씨께 수고비로 털어 드리고,

사진 작품 하나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물었더니, 만지산 사진을 택했다.

 

운전 때문에 술 한 잔 못 마셨지만, 기분은 째지더라.

차양을 달아서보다 정동지가 좋아하니까...

 

어두워지기 전에 마무리 할 일만 남았다.

서두러느라 대마씨는 제대로 뿌려졌는지 모르겠다.

힘들지만 이게 산골 사는 재미가 아니겠는가?

올 여름엔 지인들 불러 잔치 한 번 벌일까보다.

 

사진, 글 / 조문호

 

세상 사람들 요~. 이 내 사연 한 번 들어보소.

옛날 같으면 고려장 할 이 나이에

소가 갈아야 할 땅 파 엎느라 녹초가 되어부럿소.

손바닥 물집은 터지고 허리는 펴지지도 않는데,

슬피 울어주던 새소리 끊긴지도 오래 되었소.

사는기 죽는 긴지, 죽는기 사는 긴지 나도 모르것소.

이 좋은 봄날, 신세타령 한 번 합니더.

 

옛날 할매들의 한 맺힌 팔자타령을 늘어놓는 것은 이 보다 더 좋은 위안의 말이 없어서다.

 

지난 주말 이틀 동안 정선 만지산에 농사 지으러 갔는데,

이제 체력의 한계가 서서히 느껴졌다.

매년 반복되는 농사지만, 땅 파 뒤 짚는 일이 제일 힘든 일의 하나다.

소도 경운기도 없이 오로지 곡괭이로 파 엎어야 하는 데, 간이 쑥 둘러빠지는 것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곡괭이질도 서서히 느려질 수밖에 없다.

한 번 파고 헉헉대고, 두 번 파고 낑낑대다 결국 한 밭때기는 남겨야 했다.

 

몇 년 전만해도 밭 주변 나뭇가지에 다양한 산새들이 날아들었다.

힘들어 낑낑대면 새들이 조잘대며 다독이거나

뻐꾹뻐꾹 노래도 불러 주었으나 이제 새소리 멈춘 지도 오래다.

온 산을 개간해 농약을 뿌려대니, 새들도 더 이상 살 곳이 아니라 여겼는지 모두 떠나버렸다

 

어둡기 전에 집 주변 청소부터 해야 했다.

겨울내내 집을 비웠으니 집 주변에 몰린 낙엽이나 나뭇가지가 흩어져 할 일이 태산 같다.

오랜만에 지피는 군불이라 온돌 데우려면 불도 많이 지펴야 한다.

태울 것들 부엌에 가득모아 낙엽을 의자삼아 군불을 지피는데, 연기가 장난이 아니다.

더구나 호흡기에 문제가 있어 약과 흡입기를 입에 달고 살지 않는가?

숨이 차고 눈물이 나도, 낙엽 타는 소리와 구수한 냄새가 정겨워 참는다.

 

낙엽과 가지들을 다 태우고 나니 방안에 연기가 들어차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방바닥 곳곳에 구멍이 생겨 연기가 방안으로 들어 간 것이다.

방안 가득 찬 연기가 다 빠져 나가려면 오래 걸리지만,

검은 산 바라보며 잡 생각에 빠지는 시간도 싫진 않다.

 

자정이 가까워서야 연기가 다 빠져나갔는데,

라면 끊여먹고 방 청소 하니 밤 두시가 가까웠지만, 이 얼마만의 안온함이냐?

따끈따끈한 온돌에 아픈 등 지지는 그 노골 노골한 맛을 알랑가 모르겠다.

가히 여인네 품속과도 비길 수 있는데, 만약 품속까지 있다면 난리 나는 거지.

 

동창이 밝아 눈을 떠니 오전 아홉시가 되었다.

예전에는 창이 밝아오면 새 소리가 시끄러워 늦잠을 잘 수 없었는데.

깨워 줄 새들이 사라졌으니, 일손도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따뜻한 온돌 덕에 한결 몸이 가벼워졌다.

 

돌아가신 강민선생의 동오리 집 방문앞에 핀 목련꽃에 반해

심었던 목련의 키가 지붕을 훌쩍 넘었는데,

이제 막 피어나려고 봉우리를 맺기 시작했다.

다음에는 목련 꽃 아래서 술 한 잔 할 수 있겠구나

 

저녁 무렵 서울로 돌아가려면 할 일이 바빴다,

먼저 산소부터 들려 아머니께 인사드렸다.

“엄마! 저승에는 코로나가 없는기요?” 물어도

오랜만에 찾아 삐쳤는지 대답도 없더라,

 

땅에 밑거름 뿌리려면 정선 읍내 퇴비 사러 가야했다.

가는 길목에 핀 ‘동강 할미꽃’에 어찌 문안드리지 않을소냐?

아직은 이른 시기지만 성질 급한 할미 몇몇은 벌써 고개 내밀었더라.

벼랑에 핀 할미 보며 노래 불렀다

 

“동강 할미야

열길 높은 벼랑에

누굴 그려 피었느냐?

칼바람에 오무렸다

햇살에 핀 동강 할미야

죽은 울 엄마 생각나는 동강 할미야.“

 

정선농협에 비료 사러 갔더니, 가는 날이 장날이 아니라 점심시간이었다.

마음은 바쁜데, 시간만 죽여야 했다.

퇴비 열 포 사 싣고 만지산에 돌아온 것 까지는 좋으나

또 하나의 고난도 일거리가 남았다.

마당에서 밭까지 퇴비를 올리는 일이었다.

 

언덕에 박아 놓은 토끼궁댕이 같은 돌계단 따라

비료 들어 올리는 일은 그의 곡예에 가깝다.

퇴비 무게에 자칫 중심을 잃으면 나자빠지기 십상이다.

줄 타듯 중심 잡아 올라가는데, 깜짝 깜짝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힘만 좋다면야 등짐으로 올리면 좋으련만,

힘이 딸리니 기생첩 끌어 안 듯 가슴에 안아 오르는데,

평소 여인네를 그렇게 끌어안아 주었다면 말년이 이렇지는 않을 게다.

 

어렵사리 퇴비 다 뿌리고 떠날 채비를 했다.

점차 힘들어지는 농사를 그만 두겠다며 다짐에 다짐하지만 봄이 오면 다시 반복한다.

작년에는 땅에 휴식년 준다는 결심까지 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땅을 놀리면 안 된다’는 농꾼들의 지론을 핑게 삼지만,

그 일마저 그만둔다면 이 산골에 일 년에 몇 번이나 올 수 있으며,

산 위에 누운 울 엄마는 얼마나 외롭겠는가?

그리고 정동지에게 무공해 야채를 전해 주는 그 즐거움은 어쩌랴?

 

또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는 약으로 긴 세월 애용했던 대마다.

농작물이야 농사 짓지 않아도 어디서나 구할 수 있으나

마약 올가미 씌워 놓은 대마는 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밭 언저리에 몇 포기 심어 나물도 무쳐먹고, 강정도 만들어 먹고 술도 담아 버티는 것이다.

몇 년이나 더 버틸지 모르지만, 살아 움직이는 동안은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서울로 돌아오는 강변에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나른한 밤길 운전에 졸음까지 몰렸으나, 졸음 쫒는 특효약을 잊어버렸네.

깜빡대는 졸음에 놀라 몸을 꼬집기도 빰을 때리기도 했으나 아무 소용없었다.

차창을 모두 열어 재치고 미친 놈처럼 노래 불렀다.

 

“오늘도 걷는다 마는 정처 없는 이 발 길...”

 

사진, 글 / 조문호

 

정선가는 길은 언제나 아름답다.

양수리 물안개를 밟고 구불구불 구름을 넘어

조양강에 이르면 만지산 살팔봉이 반긴다.

 

가을걷이로 정영신씨까지 대동했으나, 별로 거둘 것도 없다.

어머니께 내년에 오겠다는 인사나 마찬가지다.

 

농사란 공들인 만큼 돌아오는데, 나그네처럼 집 떠날 때가 더 많으니 될 리가 없다.

남은 거라고는 무와 들깨 조금이고. 산소에 핀 들국화 따는 일이 고작이다.

 

만지산에 도착하니, 현영애감독을 비롯한 손님들이 먼저 와 있었다.

울 엄마 무덤에도 갔다 오고, ‘대마불사주’도 자랑했다.

아직 좀 일렀지만, 술은 잘 익어가고 있었다.

 

손님 접대할 음식이 아무 것도 없어 현감독 일행과 읍내에 나가야 했다.

‘정선아리랑시장'에서 곤드레 밥에다 모듬전까지 시켜 먹었다.

맛있게 먹었으나, 밥값을 손님이 계산해버렸네.

 

식당에서 일어났으나, 일하러가기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아무래도 만지산에 다시 한 번 와야 할 것 같았다.

모처럼 정영신씨도 왔는데, 힘들게 할 수야 없지 않은가?

시름시름 운전해 녹번동에 도착하니, 오후 아홉시가 가까웠다.

 

그런데, 짐 내리러 자동차 트렁크를 열어보니 술 냄새가 진동을 한다.

술 항아리가 넘어져 굴러 다니다, 숨구멍이 열려버린 것이다.

한 말이나 되는 술을 다 쏟아냈는데, 진한 술 냄새에 어질 어질했다.

 

정영신씨가 어디서 소독약 냄새가 난다고 한 이유를 알겠더라.

차가 취했는지, 차도 왔다 갔다 했다는 증언도 뒤따랐다.

그 술에 들어 간 공력이 얼마며, 또 돈은 얼마나 들어갔나?

 

보조타이어 탱크에도 흥건히 고여 있어, 퍼 마시고 싶더라니까.

나야 안 마시면 그만이지만 맛보여주겠다고 떠벌린 약속은 어쩔거냐?

정영신씨는 새 술로 우려내라지만, 꼴도 보기 싫었다.

 

술만 버렸으면 모르겠으나, 수확한 농작물까지 술에 취해 버렸다.

모든 걸 자제하라는 계시로 받아들였으나, 기분 좆 같았다.

내년에는 일체의 농사를 짓지 않고 땅에 휴식년을 줄 생각이다.

 

길에 쏟아 붓는 기름 값도 만만찮지만, 더 이상 힘들어 못 다니겠다.

하는 일에나 집중해야겠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새벽길을 나서다보면 가끔 꿈길 같은 아름다운 풍경과 부딪히게 된다.

 

이십 여 년 동안 정선 갈 때마다 양평으로 가는 국도만 이용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고속도로 통행료를 아끼려는 생각도 있지만, 주변 풍경과 대면하는 즐거움이 더 크다.

 

기온이 갑자기 내려가는 날엔 양수리쯤에서 만나는 물안개가 장관을 이룬다.

안흥 매화산 능선 따라 몰려다니는 구름은 가보지 못한 무릉도원을 무색케 한다.

 

절경의 마지막 코스는 정선 광하리에서 귤암리로 들어가는 강변길이다.

구불구불 조양강변과 만지산 수리봉은 빼 놓을 수 없는 절경이다.

 

자연이 연출한 뜻밖의 비경들은 보는 것만도 감격스럽다.

날씨의 변화가 클수록 행복의 선물 보따리도 늘어난다.

 

혼자 보기 아까워 카메라를 꺼내지만, 위험할 때도 있다.

음주운전보다 더 위험한 줄 알지만, 잘 안 고쳐진다.

 

만지산으로 접어더니 길가의 코스모스가 하늘하늘 반겨준다.

 

가을만 되면 우리 집 마당을 뒤덮었던 코스모스는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

강가에는 없던 코스모스가 핀 걸보니, 물이 그리워 도망쳐 왔나보다.

 

사진, 글 / 조문호

 

역병으로 사람 만나지 말라는 엄포에 만지산에 격리되었다.

말 안 듣기로 소문난 놈이 무서워서 격리된 게 아니라 그냥 쉬고 싶었다.

정선 집은 인터넷이 되지 않아 이참에 마약 같은 페북도 들락거리지 않을 생각이다.

단지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는 정선 읍내 피시방에 들려 가끔 소식이나 전할 작정이다.

 

그래도 동자동에서 하는 일이 있어 매주 화요일은 서울나들이를 해야 하기에,

그 때 사모님께 문안드리기로 했다. 사모님께서 부르면 언제나 달려 갈 기사의 각오는 되어있다.

확실한 유배도 격리도 아닌, 길거리에 돈만 뿌리게 된 셈이다.

머지않아 정선 집을 정리할 생각으로, 긴 세월의 아쉬움이 한 몫 한 것이다.

 

이번에는 지난 금요일에 들어 와 이틀 동안 밀린 일하느라 똥오줌을 못 가렸다.

지루한 장마가 계속된 한 달 넘게 못 왔더니 집구석이 엉망진창이었다.

농작물인지 잡초인지 도저히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긴 장마로 방안이 눅눅해 군불을 좀 지폈더니 완전 찜질방이 되어버렸다.

방문을 열어놓은 채 발가벗고 잤더니 새벽녘에는 추워서 오들오들 떨어야 했다.

콧물이 쉼 없이 나오는 걸 보니 개도 걸리지 않는다는 여름 감기에 단단히 걸린 것 같다.

 

장보러 정선 읍내 갔다 오는 길에 ‘귤암리캠핑장’에 잠시 들렸다.

그 앞을 수시로 들락거렸지만, 20년 만에 처음 들린다면 믿겠는가?

 

옛 ‘귤암분교’ 자리인 그곳에서 ‘동강변 주민을 위한 굿마당’을 연 후 처음인데 많이 바뀌었더라.

성수기인데도 캠핑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코로나 때문인지 장마 때문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하루 이용료가 4만-5만원이란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날씨마저 흐렸다 개였다 내 마음처럼 변덕을 부렸다.

내일이 화요일이라 사모님께 상납할 옥수수도 따고 호박도 몇 덩이 차에 실었다.

더 중요한 것은 따끈따끈한 오빠의 마음을 실었다는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사진, '아세아경제' 스크랩

오래전부터 대마에 대한 약리작용이나 실용성은 널리 알려졌으나.

새로운 연구결과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몇 일전 YTN ‘사이언스 투데이’에서 ‘대마 성분’으로 뇌 시계 되돌린다“는

내용이 방영되어 치매성 질환을 앓는 분들의 귀가 번쩍 뜨이게 만들었다.

 

사진, YTN에서 스크랩

독일 본 대학과 이스라엘 예루살렘 히브리대학 공동 연구팀이

대마 성분으로 뇌 인지기능에 대한 변화를 연구한 결과 놀랍게도

대마 성분을 투여한 늙은 쥐의 인지기능이 젊은 쥐처럼 개선되어

늙은 쥐의 생체 시계가 되돌아간 것 같다"고 말했다.

 

사진, 외신에서 스크랩

사실 오래전부터 대마가 뇌전증과 치매에 대한 효능이 인정되었으니, 뜬금없는 결과는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외신에 의하면 대마가 코로나19의 잠재적 치료법 목록에 올랐다고 할 정도로

방대하고 신비한 대마의 효능에 세계 석학들이 주목하고있다.

 

하기야! 대마의 CBD성분이 알츠하이머성 치매, 파킨슨질환, 뇌전증, 암,

우울증, 다발성경화증, 심뇌혈관질환, 당뇨 합병증 등 17개 질환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것은 이미 검증되었으니 최고의 약초임은 틀림없다.

 

사진, 외신에서 스크랩

약으로서의 효능 뿐 아니라 종이와 삼베, 에너지 등 산업용으로 활용가치도 높다.

어제는 대마로 만든 배터리가 리튬이온보다 성능이 8배나 더 좋다는 외신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뒤늦게나마 정부가 안동시를 산업용 헴프(HEMP) 규제자유특구로 지정하기 직 전이고,

춘천에서도 대마특구를 추진한다고 한다.

 

대마에 대해 궁금한 분에게는 최근에 나온 책 "올 어바웃 카나비스"를 소개한다.

한국에 나온 대마초 관련 책 중에서 가장 심도가 깊으면서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미 중국에서 대부분의 특허를 독점한 상황이라 때늦은 감은 있지만,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엊거제 정선 가려니, 자동차가 없어 난감했다.

차를 폐차해 발이 묶인 셈인데, 하루만 차를 빌린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렵사리 인사동 ‘유목민’의 전활철씨께 부탁했더니, 새벽 일찍 차를 끌고 왔더라.

고맙기 그지없으나, 너무 염치없는 부탁을 한 것 같았다.

 

그런데, 차 주인이 떠난지 5분도 지나지 않아 갑작스런 사고가 터져버렸다.

조용한 새벽이라 백 밀러를 보지 않고 출발하는 실수를 저질렀는데,

뒤에서 달려 온 택배차량이 운전석 앞 펜더를 치고 가 왼쪽 눈알이 튕겨 나와 버렸다.

보험처리할 형편이 되지 않아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갈 길 바쁜 택배기사가 쌍방 과실이니 각자 수리하자며 먼저 떠나버렸다.

 

일단 수습은 되었으나, 정선에 가야할지 망설여졌다.

튀어나온 헤드라이트야 밀어 넣어면 운행에 지장은 없으나

운전대를 잡자말자 터진 사고라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다.

 

그러나 제사는 미룰 수 없는 일이었다.

차가 소나타라 운전하기는 편했으나, 마음의 짐은 무거웠다.

가는 길에 평창 자동차정비소에 들려 상담을 받았는데,

도장하는 시간도 많이 걸리지만, 비용이 적잖으니 그냥 타라는 거다.

거지인줄 알아챘는지 모르지만, 타는 속을 어찌 알겠는가?

 

활철씨께 수리비를 건네줄 작정을 했으나, 받아 줄지 모르겠다.

운전하는 내내 걱정에 쌓여 목적지에 도착했다.

마당 밑을 뒤덮은 도라지꽃과 조롱조롱 달린 돌배에 그나마 위안되었다.

 

서울로 돌아와 자동차를 돌려주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수리비를 받지 않겠다고 한다.

보험처리하면 된다고 안심시켰으나, 마음의 큰 빚을 지게되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일요일은 정선 가는 날이다.

그것도 사모님 모시고 가는 길이라, 더 더욱 신났다.

평창장에서 밥 사 먹고, 오전10시 무렵에야 만지산에 도착했다.

마당을 뒤덮은 시멘트에 속이 뒤집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어쩌겠는가?

 

내일 약속이 있어 일부터 서둘러야 했다.

만지산만 비가 피해 갔는지, 농작물이 나 처럼 비실비실 했다.

대마와 고추, 오이, 도마도, 호박, 가지 등 목마른 야채에 물부터 주어야 했다.

온 종일 더운 땡볕에서 풀 메느라, 오줌 누며 거시기 볼 틈조차 없었다.

 

이미 시기를 놓쳐 고개 숙인, 고추대도 박아 묶어줘야 했다.

사모님은 야채 거두느라 바쁜데, 무슨 불만이 많은지 입이 툭 튀어 나와 있다.

쉬지 않고 죽자 살자 일만 하는 늙은이 일 버릇에 심기가 뒤틀린 것 같았다.

해 넘어가는 오후 8시가 되어서야 일손을 멈출 수가 있었다.

 

어둡기 전에 마무리하느라 정신없었는데, 왜 이리 바쁘게 살아야 할까?

몸은 파김치가 되었지만, 다시 운전대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옆 자리에 탄 사모님께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 년부터 농사짓지 마! 차라리 사먹는 게 낫겠다”

 

이젠 체력도 체력인지라, 농사를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호흡기에 문제가 생겨 담배도 끊어야 한다.

  20년 넘게 지은 농사를 포기하니, 시원섭섭했다.

농사짓기 힘들어서보다, 정선 집 마당을 덮은 시멘트에 만정이 떨어져서다.

만지산 땅을 팔아 더 조용한 곳에 여생을 보낼 조그만 집이라도 지어야겠다.

 

그 먼 길을 한 달에 몇 차례씩 오가는 일도 예삿일이 아니었다.

이 달 말쯤, 어머니 무덤부터 이장해야 할 것 같았다.

이런 저런 시름 달래며 운전하는데, 갑자기 앞바퀴가 기울며 덜거덕거리기 시작했다.

갓 길에 세워 확인해 보니, 운전석 앞바퀴가 터진 것이다.

 

이것 정말 난감한 일이었다.

안흥에서 새말 가기 전의 시골길이라, 어두워 위치도 파악할 수 없는데,

오후10시가 넘어 타이어 구할 곳이 없었다.

보조 타이어만 있다면 걱정할 것 없으나, 그마져 터진 지 오래되었다.

 

석 달 전, 함평 가는 서해안 고속도로에서 타이어가 터져 혼 줄 났는데,

보조 타이어를 준비한다면서 계속 미루어 온 것이다.

돈도 돈이지만, 폐차해야 할 차에 더 이상 처 바르기 싫어서다.

그 이후 부터 밤늦게 정선에서 돌아 올 때마다 조마조마 했다.

 

오래 전 영업용 택시 운전대 앞에 달랑거리던 ‘오늘도 무사히’를 되씹었다.

타이어가 빵구나더라도, 가능하면 서울과 가까운 곳에서 터지라고 빌었다.

목적지에 돌아 와서야 한 숨을 쓸어내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오랜 걱정이 현실로 다가오고 말았다.

 

더구나 혼자 오는 것도 아니고, 사모님을 모시고 오는데 말이다.

사모님 들으면 기분 나쁘겠지만, 행여 덤직한 엉덩이 무게에 터진 것은 아닐까?

보험회사에 전화 걸어 견인차를 불렀으나, 사고지점을 정확히 댈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 핸드폰 위치를 추적해 냅다 달려 왔다.

 

차를 살펴 본 기사는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가까운 여관에서 자고 내일 수리 하던지, 아니면 서울까지 견인해야 한단다.

보험사에서 제공하는 견인거리 50Km를 뺀 나머지 구간의 견인비가 십 육만원이란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 망설이는데, 사모님께서 결정내렸다.

 

“서울 녹번동까지 견인 해 줘요. 밤늦게라도 집에 가서 할 일이 있어요”

견인기사는 어떤지 모르지만, 돈이 아까워 미치겠더라.

그 돈이면 새 타이어를 갈아 끼울 텐데...

 

퍼져 있는 고물차를 쳐다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임자 잘 못 만나 개고생한 차다.

그동안 정선 가는 일뿐 아니라 장터마다 찾아다니느라 다른 차의 몇 갑절 일을 시키지 않았던가?

얼음판에 미끄러져 머리가 깨져도 병원 한 번 데려가지 못했고,

그 먼 길 끌고 다니며 튼튼한 신발하나 사 주지 못해 미안할 뿐이었다.

 

결국 견인차에 끌려 갈 수 밖에 없었는데, 아이쿠야! 정말 사서 고생 하는 꼴이었다.

덜덜거리는 견인차 승차감에 비한다면, 우리 차는 벤츠에 다름 아니었다.

두 시간이 넘게 흔들리며, 쉼 없는 기사의 넋두리까지 들어줘야했다.

사모님께서 이 못난 기사가 얼마나 원망스러웠겠나?

 

“그래, 헛바람 든 인생보다 바람 빠진 인생이 낫다”

인생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속된 말로 '나이롱 뽕'이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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