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지키느냐? 편리하게 사느냐? 하는 것은 원칙과 현실에서 늘 갈등하는 문제다.

천만다행으로 편리하게 살 여건이 되지 않아 자연을 지키는 원칙을 따르며 살아왔다.

그러나 뜻밖에 원칙을 어긴 이변이 생겨버렸다.

 

정선 만지산 집 마당에 레미콘 한 차를 부려놓은 사진이 정영신씨 핸드폰으로 보내 온 것이다,

옆집의 윤인숙씨가 보낸 것이라며 날더러 보라고 했다.

지난 번에 도로 포장하는 사람 있으면 움푹 파진 입구 좀 부탁 했다는데, 마당부터 덮어버린 것이다.

그 마당은 자기 내 주차장으로 사용해 레미콘 비용의 반은 자기가 부담하겠다는 거다.

 

누가 들어도 고맙다고해야 할 일이라 아무 소리 못하고 20만원을 보내 주기로 했단다.

레미콘 값만 아니라 콩크리트를 바닥에 골고루 펴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백 번 고맙다고 말해야 하지만, 한편으론 마당을 차지한 점령군 같았다.

이미 엎질러진 시멘트라 쓸어 담을 수도 없었다.

 

그 집은 25년 전 동강 환경캠프로 빌려 사용하던 집인데,

이년 여의 활동이 끝 난 후, 개인 작업을 위해 혼자 눌러 앉은 집이다.

밭으로 지정된 땅에 무허가로 지은 농가주택인데, 불편하긴 해도 사는 대는 지장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환경캠프에 함께 한 회원 한 사람이 그 집을 사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렇다면 집을 비워줘야 하는데, 그 많은 짐을 어디로 끌고 간단 말인가?

부랴부랴 아내에게 부탁해 복에 없는 그 집을 사게 된 것이다.

당시 시세보다 비쌌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살 수 밖에 없었다.

 

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는 유랑민 체질인지라

아름다운 자연도 버릴 수 있겠다 싶어 돌아가신 어머님까지 그 곳에 묻어 두었다.

 

김대중정부에서 댐을 취소하는 결단을 내림에 따라 동강 환경운동도 끝나게 되었는데,

문제는 농민들의 보상이 이루어지며 모든 게 달라졌다.

주택건설비를 비롯해 축사나 버섯재배장 같은 농가지원이 실시되며,

오래된 농가주택은 모조리 사라지고 국적불명의 양옥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아마 그 때 주택이라고는 내가 사는 집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그뿐 아니라 집집마다 티브이 수상기가 들어와, 사는 방식이나 습관마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보다 가슴 아픈 것은 순수하기 그지없었던 동내 인심이 서서히 변해갔다는 것이다.

 

산골에 살다보면 마당에 제초작업도 해야 되고 소나기라도 퍼 붓게 되면 땅도 질퍽거리지만,

별 신경 쓰지 않았다. 마당에서 조차 흙을 밟을 수 없다면 굳이 산골에서 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옆집 차가 자주 들락거려 잡초도 자랄 틈이 없지만, 자주 머물지 못하니 불편하지 않았다.

 

 

여름이면 마당가에 코스모스가 너울거리고, 딸기가 조롱조롱 달리는 풍경도 이제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10여 년 전 여름 폭우 속에 만난 아름다운 장면도 이제 사진으로만 남았다.

 

집에 없는 샤워한다며 알몸을 드러낸 아내의 몸에 빗물이 줄줄 흘러내렸는데,

황토물이 발 위에 튀어 오르는 소란스러움과

무성하게 핀 맨드라미의 붉은 꽃술은 정염을 토하듯 매혹적이었다.

아쉽게도 보도검열에 걸려 아직 빛을 보지 못하고 있지만,

이젠 그 장면도 서랍 속에 갇힌 풍경이 되고 말았다.

 

지난 19일 정선 집에 들려보니, 마당의 2/3는 콘크리트로 하얗게 덥혀있었다.

이젠 그대로 둘 수도 없는 처지라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날 두 번째 레미콘 차가 도착했을 때는, 함께 도와 바닥을 고를 수밖에 없었으니,

이제 탓하기는커녕 고맙다고 인사해야 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했으나, 영 마음이 편치 않다.

만지산과의 인연을 끝내야 하는 것 인가?

정이 떨어지니, 모든 사물까지 싫어진다.

 

사진, 글 / 조문호

 

해마다 농사지으러 정선 다니지만, 타산이 안 맞다.

야채모종이나 씨앗 값만 십여 만원 먹히는데다.

한 달에 두 번씩 농사지으러 가는 연료비가 칠십만원 들어간다.

양평가는 국도를 이용해 통행료는 물지 않으나,

한 번 오가는 기름 값만 오만원들어 나로서는 만만찮은 지출이다.

무공해 채소를 위한 선택이지만, 그 돈이면 사 먹고도 남는다.

 

이전에는 자연이 좋아 조경용으로 나무도 심었으나, 지금은 농사지을 땅이 더 필요해 졌다.

이왕 농사지을 바엔 본전 찾아야 되겠다는 욕심에서다.

자연환경도 없는 이에겐 사치나 마찬가지다.

 

옆집 한순식씨에게 포크레인으로 나무를 뽑아 땅을 파 뒤집어 달라고 부탁했다.

한 나절 일한 대가로 그 곳에 버틴 50년 된 옻나무 한 그루를 주었다.

옻닭 장사 하는데는 없어서 안 될 약재니까...

 

지난 어린이날 땅을 파 뒤집어 놓았다가, 다시 들린 21일부터 일구었다. 

고추와 옥수수, 야채 모종도 심고 여러가지 씨앗도 뿌렸다.

삼일에 걸쳐 너무 무리하게 일 했는지, 몸이 말이 아니다.

 

힘들어 곤죽이 된 잠자리도, 여러마리의 개들이 난리를 피워 깨어버렸다.

이 깊은 밤에 산돼지가 나타났을까? 고라니가 나타났을까? .

 잠은 깨웠지만, 집을 잘 지켜주니 탓할 수도 없었다.

개가 없을 때는 아무나 들락거려 산나물 씨를 말렸으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잔인한 것 같다.

이틑날 옆집에 손님 여러명이 찾아와 끓였다며 개장국 한 그릇을 주었다.

기름기가 니글거렸지만 배가고파 허급지급 먹었다. 설마 키우던 개는 아니겠지...

아니나 다를까 먹고 일어서기가 무섭게 설사가 쏟아졌다.

되로 먹고 말로 싼 것이다.

 

늘 하던 대로, 먹던 대로 살 것이지, 그 놈의 욕심 때문에 몸만 망가졌다.

적당히 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사진, 글 / 조문호


89년 귤암리 옛집에서 촬영한 최종대, 이선녀부부


정선 최종대씨는 만난 지가 25년이 넘은 오랜 인연으로 이웃을 넘어 동생처럼 가까웠던 사이었다.

그러나 2년 전 지하수 사용에 대한 이웃과의 분쟁에 휘말려 등 돌리고 말았다. 그가 주도한 갑질을 용납할 수 없어서다.




그런데, 작년 말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뒤늦은 부고로 장례조차 지켜보지 못해 어쩔줄 몰랐는데, 이야기를 듣고보니 가슴이 미어졌다.




최종대씨는 하루에 담배를 서너 갑씩 피우는 골초로, 운명하기 전부터 심한 장애를 겪었다고 한다.

변을 당하기 하루 전에는 장모 생신을 맞아 가족들과 진주를 갔는데, 차 안에서 눈물을 그리도 많이 흘렸다고 한다.

아마 죽음을 예견한 것 같았다.




돌아와서도 얼굴 붉혀가며 악착스럽게 살아 온 지난날이 후회스러운지, 한 없이 울었다고 한다.

술 좋아 하는 아내에게 술 좀 줄이라고도 부탁하고, 내가 보고 싶다는 등 평소에 하지 않던 말을 많이 하더란다.

그러더니 갑자기 뇌출혈을 일으켜 손도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임종한 것이다. 


 

정말 인생무상이란 말을 절감했다.

떠나기 전에 따뜻하게 다독여 주지 못한 게 한이 되어버렸다.

앞으로 집안 일은 누가 꾸려 갈 것이며, 그 많은 농사는 어쩔지 걱정스런 일이 하나 둘 아니었다.

더구나 큰 아들 창수는 정신병을 앓아 병원을 들락거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믿기지 않는 일이 생긴 것이다. 아들 창수가 언제 정신병을 앓았냐는 듯 멀쩡해진 것이다.

아버지가 하던 일을 하나하나 챙겨가며 어머니를 돕는다고 했다.

해마다 엄청나게 짓는 고추 농사를 그만두고, 손이 덜 가는 유기농에 전념하기로 했단다.



농장이름도 엄마이름을 딴 ‘선녀농원’으로 지어 새로운 삶을 예견하게 했다. 남편 잃고 자식 살린 셈이다.

이선녀씨는 남편을 떠나보낸 슬픔도 잠시 뿐,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




지난 4월 25일은 정선에 땅 뒤집으러 갔다가 카메라와 지갑이 든 가방을 두고 와 

십 여일 동안 사진 한 장 제대로 찍지 못하고 가슴 조려왔기에 빨리 정선 갈 날만 기다렸다.



5월5일 야채 파종하러 갈 때는 정영신씨가 따라 붙어 마치 야외 나들이 하는 기분이었다.

두릅 철이라 두릅 따러 간 것이다. 신세진 분들과 나누어 먹을 심산인 것 같았다.




그런데, 요즘 운전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기름 값이 경유 1리터에 970원까지 내려 간 것이다.

예전에 전국 장터 쫓아다닐 때는 1500원까지 올랐는데, 그때 비하면 공짜나 마찬가지다.

살다보니, 코로나 덕도 보나 싶다.




평창장에서 야채 모종을 산 후, 만지산에 도착하니 오전 10시쯤 되었다.

열흘 전에 핀 탐스러운 도화꽃과 배꽃은 시들시들하고, 새롭게 핀 철쭉이 맞이했다.

“그런데, 이 일을 어쩔까?” 갑작스런 더위에 두릅이 다 피어버린 것이다.

어차피 양이 적어 창수네 두릅을 사기로 했지만, 아까워 미칠 지경이었다.




예전에는 정선 가면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즐기며 여유롭게 지내다 왔는데,

요즘은 서울에 예쁜 여자 숨겨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바삐 설치는지 모르겠다.

죽도록 일만하고 돌아와, 이젠 정선 가는 게 두려워진다. 아마 동자동에 살며 생긴 조급증인 것 같았다.




평창장에서 구해 간 야채 모종부터 옮겨 심었는데, 그 날은 보슬비가 내려 모종에 물줄 일은 덜었다.

하던 일을 끝내고 창수네 집으로 올라갔는데, 창수엄마가 반가워 어쩔 줄 모른다.

나야 운전 때문에 술 마실 처지가 못 되지만, 술 마시며 하는 이야기가 눈물겹다.




처음 시집왔을 때, 낮 시간의 중노동이 끝나도 밤에 디딜방아 찧는 일도 일상의 하나라고 했다.

시아버지가 막걸리와 콧등치기를 좋아해 옥수수를 비롯한 여러가지 곡식을 찧었는데,

체중이 가벼워 디딜방아가 올라가지 않았다고 한다.

시어머니가 큰 돌을 등짐에 짊어지고 밟으라고 시켰다는데, 찧고 나면 온 몸이 파김치가 된다는 것이다.




구절구절 지나간 이야기보다 앞으로 살아 갈 이야기가 더 기대되었다.

여지 것 일에 치이고 남편 눈치 보느라 못 푼 신명을 다 풀 것 같아서다.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이선녀씨로 부터 두릅을 전해 받았는데, 두릅 값을 기어이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이전에 못 전한 조의금을 겸한 두릅 값인데, 정말 입장 난처했다.




“우리 사이는 돈이 오 가는 사이가 아니지요”라는 창수엄마 말에 할 말을 잃었다.
“그래요. 다음에 맛있는 거 많이 사오리다. 부디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랍니다”

사진, 글 / 조문호




맑은 날 사진은 4월25일 찍은 사진이고, 흐린 날 사진은 5월5일 찍은 사진.

아래는 삼년 전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올린 창수엄마 이선녀씨 이야기랍니다. 
  http://blog.daum.net/mun6144/4251















 

2019,10,6 정선아라리공원 / 귤암리 사는 장승쟁이 서덕웅씨

 


"우잉~ 이기 우얀 일이고?"
이 핑계 저 핑계 안 가던 정영신씨가 날더러 정선 가자네.
외롭게 혼자 정선을 들락 거린지가 벌써 일 년이 넘었는데...

 

 

 

2019,10,6 봉평 섶다리

 

한 동안 몸이 아파 정선 집에 통 가보질 못했다.

태풍이 지나갔다는데 별 일 없는지, 작물은 어떻게 되었는지,

몸은 서울 있어도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2019,10,6 / 정선 아라리촌

 

몸이 나아 바로 못 간 것은 일거리가 생긴데다 서초동 촛불까지 발목 잡았다.

월요일쯤이나 갈 작정을 했는데, 정영신씨가 일요일에 가잖다.

촛불집회가 끝난 그 다음 날 새벽에 부리나케 정선으로 떠났다.

 

 

2019,10,6 / 정선 아라리촌

 

정영신씨는 가는 김에 여기저기 갈 속셈이 있는 것 같았다.

늘 다니던 국도로 갔는데, 쉼터로 활용하는 ‘풍수원’에 잠시 세웠더니,

‘풍수원성당’에 한 번 가보자는 것이다.

 

 

2019,10,6 / 정선 아라리촌

 

20년 넘게 ‘풍수원성당’ 앞길을 수없이 지나치고 쉬어갔지만,

어찌 그 유서 깊은 ‘풍수원성당’에 한 번 들리지 않았단 말인가?

무엇이 그리 바빠...

 

 

2019,10,6 / 풍수원성당

 

‘풍수원성당’은 강원도에서 처음으로 생긴 성당이다.

천주교 박해를 피해 산간벽지로 피신한 사람들이 다니던 성당이 아닌가?

처음으로 올라가 보니, 길가에서 불과 200미터에 불과했다.

 

 

2019,10,6 / 정선 아라리촌

 

첫 인상이 한 마디로 고풍스럽고 아담했다.

마치 서울 약현성당을 떠 올렸다.

정면에 종탑부가 있고 출입구는 아치형으로 되어 있었다.

 

 

2019,10,6 / 풍수원성당

 

난, 한 때 ‘프란체스코’란 세례명까지 받은 적이 있다.

그 뒤 ‘진공’이란 법명으로 바꾼 변절자지만, 지금은 무신론자다.

신이 있다면 악의 세상을 그냥 둘리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배신의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2019.10.6  정선아라리촌 / 정영신


정영신씨는 집에 가기 전에 들려야 할 곳을 말해주었다.

봉평 이효석 문학관, 정선 아우라지 나룻터, 정선아리랑시장, 정선아리랑 축제장,

 

우메~ 봉평 까지 가면 집에 가서 일은 언제하지...

 

 

2019.10.6  정선아라리공원 / 정선 사람이 정선아리랑 한 자락 못하면 간첩이지.

 

그나저나 정선에서 ‘정선아리랑제’가 열리는 것도 모르고 있었네.

아무리 바빠도 정선아리랑제가 열릴 때는 꼭 갔는데, 요즘 내 정신이 아니다.

 

 

2019.10.6  정선아우라지

 

봉평을 거쳐 아우라지에 도착했는데, 느닷없이 아우라지는 왜 찿는지 모르겠다.

 

요즘 지역 장터와 유적을 잇는 책을 쓰다 보니, 아마 자료가 필요한 것 같았다.

한 많은 뱃길은 아우라지로부터 시작되니, 그 곳에서 흔적이라도 찾을 모양이다.

 

 

2019.10.6  정선아리랑시장

 

정선 읍내 들어오니 벌써 점심때가 되었다.

정선아리랑시장에서 곤드레 밥으로 요기 하고 시장부터 한 바퀴 돌았다.

한 때 ‘정선아리랑시장’에서 사진찍는 일을 한 적도 있었다.

 

 

2019.10.6  정선아리랑시장 ㅣ 시장살림을 도맡은 임미순씨를 만났다.

 

축제 중이라 장날은 아니지만, 장은 열렸다.

공연장에서 ‘정선아리랑시장’ 또순이 임미순씨를 만났다.

고맙게도 커피를 두 잔이나 사주었는데, 난 자판기스타일이라 어쩌지...

 

 

2019.10.6  정선아리랑시장 / 시장에서 소설 쓰는 강기희씨 모친을 만났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강기희씨 어머니를 만나 안부도 묻고,

장삿꾼 이숙란씨 만나 사는 이야기도 들었다.

 

 

2019.10.6  정선아리랑시장 이숙란씨

 

‘정선아리랑제’ 리프렛을 뒤져보니, 일요일이라 큰 행사는 없었다.

 

 

2019.10.6  정선아라리촌

 

먼저 ‘정선아라리촌’부터 들렸다.

정영신씨는 ‘아리랑박물관’에서 열리는 ‘정선아리랑 포럼’에 가고,

난 잘 정리된 ‘아라리촌’을 돌아다니며 산책을 즐겼다.

 

 

2019.10.6  정선아라리촌

 

‘아라리공원’으로 자리를 옮겼더니, 그 곳에는 사람이 엄청 많았다.

길에서 최성준 정선군수를 만나 안부를 나누기도 했다.

아라리공원 입구에서 열리는 ‘평화기원 아라리 장승제'에 들렸다.

 

 

2019.10.6  정선아라리공원에서 최성준군수를 만났다. (정영신사진)

 

귤암리 서덕웅씨가 마련한 행사라 동네 사람들이 많이 왔는줄 알았는데,

아는 분은 서덕웅씨 내 외 뿐이었다.

고사를 지냈으나 차 때문에 고사 술 한 잔 얻어 마시지 못하고 돌아왔다.

차도 차지만, 요즘은 해가 빨리 넘어 가 일할 시간이 없어서다.

 

 

2019.10.6  정선아라리공원 서낭제에서..

 

우리 집은 태풍 피해가 없었다.

이십 여 년을 살며 한 번도 태풍이나 수해를 당한 적이 없다.

사방의 산이 막아주어 요새나 마찬가지다.

 

 

2019.10.6  정선아라리촌

 

고추, 열무, 가지, 호박 등 별 게 없으나 농작물 피해도 없었다.

정영신씨는 고추에 더 관심이 많더라,

 

 

2019.10,6 / 만지산 고추밭

 

해 넘어가기 전해 거두어야 할 것이 많건만, 옆집에서 오라고 성화다.

“다정도 병이련가?”

 

 

2019.10.6  만지산 옆집에서 잔치 벌어졌네

 

이 집은 얼마나 손님이 많이 오는지 갈 때마다 잔치다.

그 날은 옆집 윤인숙씨 딸과 사위가 왔단다.

딸이 서천에 들려 사왔다는 대하와 이름도 모르는 조개를 한순식씨가 숯불에 꿉고 있었다.

술도 벌 술에다 돌배 술 등 귀한 술은 다 나왔더라.

 

 

2019.10.6  만지산 옆집 윤인숙씨

 

그런데, 내일 급한 일이 생겨 밤에 가야하는데, 차 때문에 술을 마실 수 없네.

정영신씨 좋아하는 세우나 염체 없이 까 날랐다.

원님 덕에 나팔 부는 거지 뭐.

 

 

2019.10.6  정선 만지산


좌우지간, 만지산은 정영신씨 없으면 앙코 없는 찐빵이라니까.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구월 첫날 정선에 울 엄마 무덤에 벌초하러 갔다.
새벽길의 양평 물안개는 뭐가 뭔지 오리무중이고,

정선 만지산 살팔봉의 지조는 변함없었다.

 

 

 

만지산골에 도착하니, 눈이 뻔쩍 뜨이는 궁디가 수줍은 듯 날 반겼다.

 

 

 

두 달 넘게 뻔질나게 들락거렸지만, 엉뚱한데 신경 써다보니 온 밭이 잡초세상이었다.

호순이 유혹도 마다하고 잡초와의 전쟁에 들어갔는데, 허리가 뻐근했다.

 

 

 

 

 

 

울 엄마 무덤에 벌초하러 갔다.

벌초 할 때 마다 손가락에 피 칠갑을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기일과 추석에 맞추어 일 년에 두 번씩 벌초하지만, 이번 기일에 조카가 한 말이 떠 올랐다.

초죽음의 몰골로 벌초하는 삼촌을 본 안타까움에 비롯된 제안이었지만,

할머니 시신을 화장하여 모두가 편하게 서울 인근 납골당에 모시자는 것이다.

 

 

 

사실, 아버지가 묻힌 우리 집 산소는 경남 영산의 영축산 대암골에 있건만,

울 엄마를 만지산에 묻어야 했던 사연도 기가 막힌다.

생전에 나에게 두 번이나 간곡하게 부탁한 것이다.

문호야~ 내 죽으마 절대 너거 아부지 옆에는 뭍지마라

자유부인 처럼 진보적인 삶을 원한 울 엄마가 보수적인 아버지 밑에서,

억눌린 삶을 저승까지 끌고 가지 않으려는 부탁이 아닌가 생각 되었다.

 

 

 

그래서 아버지 무덤에 비수를 꽂는 불효 아닌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그 업으로 장례 치루는 날 장대같은 비가 무섭도록 쏟아지더니,

가족이 탄 승용차가 개울에 전복하는 등 만지산에 난장판이 벌어졌다.

장화 신은 발이 흙에 달라붙어 꼼짝하지 않는 상황에서 시신을 묻는다고 한 번 생각해보라.

그건 분명 지옥도의 한 풍경이었다.

 

 

 

벌초를 하는 중에 이런 저런 하소연을 했다.

엄마~ 짜마 이번 벌초가 마지막 벌초가 될지 모르겠네 예!

지난여름 조카 향이가 할머니를 가까운 서울에 모시자는데, 엄마는 우째 생각합니꺼?”물었더니,

아이구! 야야~ 여서 많이 놀았다 아이가~ 우리가 어디 간들 못 놀겠나?

고마 새끼들 하는 대로 놔 두 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던 중에 느닷없이 산소에 인기척이 들려왔다.

세워 둔 차를 보고는 누가  조작가~ 뭐해요?”라는 것이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이 산소를 빌려준 지주 최연규씨였다.

제초기도 아닌 낫으로 사부작 사부작 벌초하는 것을 보고 하는 말이 더 웃긴다.

아이구! 효자 났군, 효자 났어

제초기가 없어 낫으로 벌초한다는 것은 모르고, 어머니 무덤을 정성껏 깎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고맙게도, 무덤 들어가는 길목에 제초제를 뿌려주어 편하게 갈 수 있도록 길을 튀워 두었다.

연규씨! 제초제 뿌려 준것 고마워~”라고 인사했더니, “에이~ ..”하며 얼굴 붉힌다.

 

 

 

제초기로 하면 30분도 걸리지 않을 일을 세 시간이 넘도록 하고보니, 어느 듯 해도 뉘엿뉘엿 넘어갔다.

중놈 머리처럼 말갛게 깎아놓고 내려와 대충 챙겨 먹고 정신없이 쓰러져 잤다.

 

 

 

한참을 자다보니,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잠을 깨야했다.

미처 방에 군불을 지피지 않고 잔 것이다.

엊저녁은 동자동서 더워서 빌빌거렸는데, 하루 만에 추워 벌벌 떨다니...

정선 방은 동자동 쪽방에 비한다면 여섯배나 큰 방이 아니던가.

극과 극의 세상을 원망하랴! 아니면 흐르는 세월을 원망하랴!

 

 

 

그러나 몸은 늙어도 마음속의 봄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 호박같이 편한 고향의 봄을...

 

사진, / 조문호

 

 

 

 

 

 

 

 

 

 

 

 

 

 

 

 

 

 

 

 

 

 

 



정선가는 길은 20여 년 동안 쉼 없이 오고 가며 스스로의 생각에 빠져들었던 사색의 길이다.

평균 한 달에 두 번 가지만 농사철에는 더 잦아질 수밖에 없는데, 기름 값이 장난이 아니다.

몇 푼 되지도 않는 나의 생활비 대부분이 길바닥에 뿌려지는 셈이다.

양평으로 가는 국도를 이용하여 고속도로 통행료는 없지만, 왕복 기름값이 5만원 소요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짐도 짐이지만 만지산 중턱이라 두 번 갈아타는 데다 한 참을 걸어야 한다.


 

국도로 가면 시간은 좀 더 걸리지만 속도를 내지 않아 기름 값이 절약되고 길 막힘도 그의 없다.

도로가 정비된 요즘은 세 시간 반쯤 걸리지만, 쉬다보면 족히 네 시간은 걸린다.

그러나 혼자 운전하는 시간만이 스스로를 생각하게 하는 유일한 시간인 셈이다.

돌아올 때는 일에 지쳐 생각할 겨를이 없지만, 출발하는 시간은 새벽이라 안성맞춤이다.

정신도 맑은데다 주변 풍경까지 변화무쌍해 사색하는 시간으로 딱 좋다.


 

지난 20일은 특별하게 갈 일은 없었으나 새벽 네시에 집을 나섰다.

요즘 무더운 쪽방에서의 생활에 열 받아 그런지 폭발 직전이었다.

어저께도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댓글에 악을 박박 쓰며 욕을 퍼부어 댔다.

그 댓글에 대한 감정은, 오랜 악연이 생각나 도저히 누그러트릴 수가 없었다.

스스로를 돌아보며,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소용없었다.


 

9년 전 완주 종남산 자락에서 열린 창예헌의 가을여행 때 일이었다.

난 행사를 준비하는 처지라 그 자리에 없었는데, 그가 뱉은 말 한마디가 화근이 된 것이다.

소설 쓰는 친구와의 대화에서 날더러 저 인간이 뭐가 좋아 같이 사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하니

소설 쓰는 친구가 좋은 구석이 있겠지라고 대꾸했다는 것이다.

물론 같이 앉은 술좌석에서 말했더라면 농담으로 여겨 욕하고 넘어 갔겠지만,

본인도 없는 자리에서 그것도 마누라가 듣도록 이야기했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 말은 수십 년 된 친구로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며칠 후 다른 사람을 통해 들어 혼자 속을 부글부글 끓였는데,

그의 전화번호를 지우며 그와의 오랜 인연을 끊기로 작정한 것이다.

본인은 내가 안다는 사실을 모르겠지만, 말 한 것도 잊었는지 그 뒤에도 자기가 필요할 때 연락해 왔다.

도록에 들어 갈 사진이 필요하면 내려와 사진을 찍어달라거나, 서울 올라오면 불렀지만,

내가 미쳤다고 그를 위해 삼천포까지 내려가며, 그 얼굴 보러 인사동 나가겠는가?

더불어 맞장구치고 어울려 다니는 친구까지 꼴 보기 싫어졌다.


 

그런데, 엊그제 느닷없이 패북에 댓글이 달린 것이다.

처음 페북에 가입했을 때는 누군지 살피지도 않고 페친 신청을 받아주었던 게 탈이었다.

그가 페친인줄도 몰랐는데, 그가 올린 댓글에 오랜 악연이 치솟았다.



 내용인즉, 내가 올린 페북의 글을 쭉 읽어 잘 안다며 충고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도둑고양이처럼 훔쳐보기만 하고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는 말인데,

내용도 내가 올린 동자동이야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말년에 철든 것처럼 왜 그리 설치냐는 댓글에 처음엔 습관적으로 대꾸했으나,

옛날의 미소가 그립다”. “뒤도 돌아보라는 등 두 세 번 올라오는 내용에 저의가 느껴졌다.

아마 위선적인 노인을 탓하는 글에 알랑방귀 끼고 싶었으나, 속보일까 엉뚱한데 댓글 단 것 같았다.


 

댓글도 댓글이지만, 오랜 악연이 생각나 댓글을 지우며 페친을 끊어버린 것이다.

문제는 분노가 식지 않으니, 녹번동에서 술친구 만난 이야기를 쓰면서도,

그 이야기로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이 터져 나오는 등 감정 조절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를 돌아보며 반성하는 시간을 가질 작정으로 집을 나선 것이다.


 

어두운 시가지를 벗어 나 양평 쯤 도달하니 운무에 휩싸인 그림 같은 풍경이 연출되었다.

자연의 경이에 감탄하며 속 좁은 인간의 한계를 탓하기도 했는데,

한편으론 속마음을 숨기고 수시로 변하는 인간사를 말하는 듯 했다.



만지산에 눌러 살 때는 새벽녘, 안개나 구름 따라 바뀌거나 사라지는 산의 형상을 통해

지워져 가는 산을 찍은 적도 있었다.

구름에 가려 지워지는 모든 것은 무에서 시작되어 무로 돌아간다는 무위의 사상을 일깨우며,

산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지우는 작업이었다.

사진 팔아먹을 속샘도 깔렸지만, 사진 아닌 소설쓰는 것 같아 비위도 상했다.

자신을 지우지 못해 다시 사람을 찍지만, 그 때가 떠오르기도 했다.



용문산 가까이 이르니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붉게 타오르는 태양에서 어김없이 다시 하루가 시작되는 세상사를 떠 올렸는데,

부질없는 생각일랑 버리고 좀 더 희망적인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메시지로 다가 왔다.

미워하는 사람도 끌어안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친구 모습만 떠올라도 달아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없던 일로 되돌리기는 어려울 것 같아 갓길에 차를 세워놓고

졸음방지용으로 준비해 둔 대마초를 한 대 피웠다.

생각을 깊게하는 대마초는 부정보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끌어내며,

상대를 배려하고 이해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긴 시간 운전을 하며 마음을 다잡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였으나 자신이 없었다.

그를 만나면 그 때 일이 다시 떠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차는 이미 귤암리 강변으로 들어섰는데,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차를 강변에 세워두고 흐르는 강물을 멍청하게 지켜보았다.




비가 왔는지 흐르는 강물의 속도가 빨라졌고, 우뚝 솟은 만지산 살팔봉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나쁜 기억은 흐르는 강물에 흘려보내고, 좋은 기억만 세우라는 것 같았다.

그래! 나쁜 기억은 지우고, 그때 일은 용서하기로 하자.

만나면 그 때 일이 생각나 다시 불편해 질것아 멀리서 지켜보며 응원하기로 했다.

대신 그 친구가 말한 뒤 돌아보며 살라는 말은 두고두고 새겨들을 것이다.


 


나 역시, 말 한마디로 남에게 상처 준 적이 한 두 번이겠는가?

쉽게 던진 말 한마디가 상대의 가슴에 박혀 등진 사람은 왜 없겠는가?

그동안 글로서도 숱한 상처를 준 것이 사실이다.

말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신중을 기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정의롭지 않은 부당한 일을 밝혀내어 시정하는 일은 중단할 수 없다.

고쳐지면 당사자에게 정중하게 사과할 작정인데,

개인적인 감정은 없음을 너그럽게 이해하기 바란다.

 

사진, / 조문호







 




세상에! 어찌 이리 간이 컬 수 있을까?
정선 집 방문 앞에다 벌집을 만들고 있는데,
천장도 아닌 정면에 보란 듯이 작업 중이다.
이건 쪽발이 아베 신조가 하는 짓이나 마찬가지다.



산중에서 벌이나 뱀은 가급적 손대지 않으나
이건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도발이었다.
이전 같으면 벌집을 때내 멀리 버렸겠으나,
아베 신조 생각에 살충제로 씨를 말려버렸다.
빈 벌집은 도발의 표본처럼, 보란 듯이 붙여두었다.




찢어진 차양막은 점령군 깃발처럼 펄럭이고, 축대는 산사태 난 것 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사는 데는 지장 없는 오래된 집이다, 쪽방에 비하면 대궐이지...
집을 비울 때는 찾아 올 손님을 위해 따뜻한 물도 준비해두고, 책장이 비좁아 오래된 책은 밖에다 내놓았다.
다들 그런 건 관심없고, 필요한 물건만 가져가는 야박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젠 전기세가 부담되어 온수기는 꺼버리고 오지만,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책장은 주저앉아버렸다.
오래된 책은 다들 버리라지만, 오래된 책일수록 버릴 수가 없다.
요즘 일이야 인터넷에 검색하면 다 나오지만, 오래된 소식은 옛날 잡지에서나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달에 한 두 번 들리는데, 이번에는 이박삼일로 좀 여유 있게 잡았으나 금방 가버렸다.
옆집에서 술 한 잔 하라는 인정도 마다한 채, 혼자 동동거려야 했다.
날이 어두워져야 주변도 보이고, 이런 저런 생각도 할 수 있다.




서울이던 정선이던 한 곳에 눌러 살면 좋으련만, 그게 잘 안 된다.
쓰러지기 직전에 있는 정선 집이나 동자동 쪽방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아직은 할 일이 남아 결정하지 못한다. 죽고나면 아무 필요없는 이 욕심을 어쩔까?
서울에 기다리는 사람도 없지도, 또 다시 가야 한다.




그 이틀 날은 새벽부터 서둘렀다.
늙어 버린 상추는 다시 파종하고, 지킴이로 봉숭화 한포기만 남겨 두었다.
무성한 잡초를 뽑아가며 농산물을 거두었는데, 한참 일하다 보니 안경이 없어졌다.
흐르는 땀에 밀려 잠시 벗어 두었는데, 어디다 벗었는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만 지체되어 나중에 찾을 생각으로 산소부터 올라갔다.




지난번 떡갈나무 아래 수목장한 햇님이 외할머니와 어머니 무덤 앞에 무릎 꿇었다.
두 분이 생전에는 상면한 적 없으나, 햇님에게는 조모와 외조모라 각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두 분 모두 손자를 지극히 좋아했으니, 모처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눴을 것 같다.
혼자 걱정하는 것 보다 두 분이 하니, 햇님이가 잘 풀릴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이젠 갈 일만 남았는데, 사라진 안경이 걱정이었다.
풀밭을 이 잡듯이 세 시간이나 뒤졌으나 나오지 않았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돌아왔으나, 흐릿한 초점으로 운전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별 탈 없이 오기는 왔으나, 좌우지간 명줄 하나는 길다.




길에 뿌린 기름 값에다 안경 맞출 돈까지 생각하니, 머리 아프다.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편한 날이 없다.


홧김에 쪽바리 아베에게 욕이나 퍼부었다.


사진, 글 / 조문호



























옛날에는 요즘처럼 몰려 다니며 피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온난화에 의한 찜통 같은 날씨도 아니겠지만, 에어컨은 물론 선풍기도 없던 시절이 아니던가?

찬물에 발 담그는 탁족에 부채질하며, 죽부인이나 껴안고 딩구는 게 고작이었을 것이다.





음식물은 깊은 우물 속에 걸어두거나, 소쿠리에 담아 통풍이 잘되는 곳에 보관했다.

밤이 되어도 점 잖은 사람은 냇가에 나가 목욕할 처지도 못되어,

대문 걸어 잠그고 아내가 밀어주는 등밀이에 "어푸~어푸~"를 연발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은 정선 조양강에도 피서객들이 몰려들고 있다.

난, 사람들이 몰리는 강변을 피해 만지산 중턱에 살고 있지만,

피서객들의 차량이 좁은 산길까지 가로막아 바야흐로 피서철 임을 절감한다.






옛 귤암분교 터에 자리 잡은 캠핑장에는 야영객들로 넘쳐나고,

강가에는 가족들 끼리 낚시나 물놀이를 즐기며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나는 이곳을 20여년 넘게 들락거렸으나, 강변에서 한 번도 더위를 피해 본 적이 없다.






젊은 시절부터 물가 찾아다니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이 곳 귤암리 강변은 그늘이 없어 무지 덥기 때문이다.

간혹 아는 분들이 밤 낚시를 부추기기도 하지만, 그마저 나서지 않는다.






현지에 사는 원주민들의 피서 법은 따로 있다.

이열치열이라 듯 부지런히 일하여 땀 흘린 후, 찬 지하수 물을 뒤집어쓰는 것이다.

축 늘어진 불알이 착 달라붙는 그 맛을 알랑가 모르겠다. 푸! 하하~
밤에는 고기 구워 소주 한 잔하는 맛도 죽인다.






그나저나 지난번에 허리를 다쳐 옥수수 밭을 매지 않았더니, 옥수수 밭이 풀 밭이 되어버렸다.

풀 밭이던 옥수수 밭이던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옥수수가 비쩍 말라 이빨 빠진 내 강냉이를 닮았더라.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멧돼지가 먹어 치우지 않은 것이다.

강냉이가 부실해 봐주었는지 모르지만, 멧돼지들도 그렇게 얌체는 아니다.

오랜 세월 지켜 본 바로는 한 해 쑥대밭을 만들었으면 그 다음해는 그냥 넘어가 주었다.

하물며 짐승도 상대를 배려하는데, 어찌 전기 철망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피서나 농사나 자연의 섭리대로 따를 수밖에...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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