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미술행동’이 광화문광장에 야전 캠프를 차렸다.
전기도 없는 바람막이에 불과한 천막이지만, 용사들이 쉬며 전력을 재정비할 전투사령부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된 것이다.

두 번 째 차벽공략 프로젝트로 싸늘한 경찰 장벽을 국민들의 염원을 담은 전시장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이젠 회를 거듭 할수록 참여 작가들이나 프로젝트의 규모도 커지지만 전개방식도 다양화되고 있다.

이 '광화문 미술행동' 전투부대의 총 사령관은 판화가 김준권씨가 맡았고, 부사령관은 류연복씨가 맡고 있다.
여태명, 김진하, 장경호, 이인철, 박재동씨 등 서예나 그림 그리는 막강한 참모들도 포진해 있다.
보좌관 김남선씨가 살림을 맡고 있지만, 대부분 사령관 쌈짓 돈으로 끌어 간다.
시민예술가들의 참여나 후원도 간간히 이어지고 있으나, 실탄은 여전히 부족한 상태다. 
광화문의 온 차벽을 미술관으로 만들어 승리로 이끌 그 날까지 우리 모두 힘을 보태자.

이제 '미술행동'에 참여하는 시민들의 초상사진을 찍기 위한 다큐사진가들의 참여도 시작되었다.
엄상빈, 남 준, 곽명우, 정영신씨가 시동을 걸었고, 뒤늦게는 양시영, 하형우씨도 함께 했다.

이 기록 또한 새 세상이 올 때까지 계속되므로, 더 많은 사진가들의 참여와 목소리가 절실하다.

아래 사진들은 두 번 째 전투가 있었던, 전 날부터 이틀동안 예술 전장에서 만난 분들이다.
화가 신학철선생을 비롯하여 장경호, 김이하, 이윤엽, 최병수, 류연복씨

그리고 다음 날엔 김윤수, 여태명, 이광군, 김진하, 이도윤, 정고암씨 등 여러 분을 만났다.

'광화문 미술행동'사령부 야전 캠프는 광화문 캠핑촌 희망촛불탑 옆에 있고,

초상사진 인증 샷은 세종대왕상 뒤편에 있는 ‘그 날 나도 여기에 있었다’ 배경막에서 한다.

함께할 용병들은 캠프에 들리시고, 후원하실 분은 아래로 보내주면 고맙겠다.

작은 시냇물이 큰 강물을 이루니, 작은 도움이라도 망설이지 말자.

[후원계좌 / 국민은행 420801-01-270492 김남선/광화문미술행동]

사진,글 / 조문호




캠프에 둘러 앉은 김준권, 신학철, 장경호,김남선씨


좌로부터 김준권, 김이하, 장경호씨


좌로부터 판화가 이엽, 김준권씨, 이윤엽씨는 캠프 옆에 있는 '궁핍현대미술광장'에서 목판화전을 한다.

광화문광장 캠핑촌에서 살아, 그의 노숙자 행색이다.


좌로부터 최병수, 김준권씨, 최병수씨는 광장에 날카로운 예술무기들을 만들어 놓았다.

머지않아 작업실에 둔 거대한 솟대와 배도 가져 온 단다.


사령관 김준권씨가 빨지산 우두머리 격인 신학철선생과 뭔가 이야기를 나눈다.

경호대장  장경호씨의 뒷모습도 보인다.



류연복씨가 시민들에게 나누어 줄 판화 달력을 가져와 캠프로 옮기고 있다. 

부사령관이 수송대 일까지 맡아, 늘 바쁘다.



좌로부터 이광군, 김준권, 류연복, 이정엽씨, 정의를 위해 싸우는 빨지산이다.


좌로부터 양시영, 곽명우, 남 준, 엄상빈씨, 시대적 역사를 기록하는 찍사들이다.


찍사 하형우(우측)씨와 그의 친구인데, 성함을 잘 모르겠네.



좌로부터 여태명, 이광군, 김윤수, 이도윤, 정고암씨, 김윤수선생은 한 때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낸 분이 아니던가.


판화가 류연복씨와 함께 한 미녀들, 워낙 사람이 좋아 주위에 여성 팬이 끊이지 않는다.


[스크랩] 서울문화투데이 2016년 12월30일

▲ 조문호 사진가


시국이 어수선하다.

올바른 세상을 위한 산통으로 보지만, 국민들에게는 희망의 불씨를 키우고 있다. 이제 부패한 권력은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아무리 재벌과 언론을 끌어들여 야합해도 소용없다. 신속한 SNS가 국민들의 귀와 눈을 열어놓았으니, 예전의 독재시절과는 상황이 다르다.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촛불시위는 21세기 한국의 문화혁명이다.

기득권층의 부정부패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토요일마다 전국 도심을 촛불로 밝히며, 평화시위로 이어지고 있다. 일부 ‘박사모’ 일당들이 맞불 집회로 방해하고 있으나, 결국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꼴이다.

한편으론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먹고 살기 위해 얼굴에 철판 깐 사람들도 있지만, 난리 통에 각인된 반공의식이나 박정희 새마을운동 향수에 빠진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젠 먹고 살만하니, 빨갱이 세상 될까 걱정하는 단순 무지한 사람일 뿐이다. 그런 신앙적 추종세력들의 속성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 더 슬프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많지 않아 걱정할 필요 없다.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렇게 살다 사라질 사람들이 아닌가?. 이제 젊은이들이 나서 올바른 세상으로 바꾸어 나가면 된다.

성탄절과 연결된 9차 시민촛불 집회에는 영하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광화문광장으로 60만의 시민들이 몰려나와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를 담아 캐럴송을 부르고, 구호를 외쳐댔다. 가족과 연인, 친구끼리 몰려나와 전쟁터가 아닌 촛불의 축제장으로 이끌어 갔다.

김제동씨를 비롯한 연예인들은 광화문 열기를 후끈 끌어 올리며 추위를 물리치게 했고, 예술가들은 갖가지 행위예술로 군중들의 마음을 끌어 올렸다.

마임이스트 유진규씨 일행은 네 번째 “옳”시국 퍼포먼스를 벌였고, 판화가 김준권, 류연복씨가 주동이 된 ‘예술행동’도 본격 시동을 건 것이다. 김준권, 류연복씨가 누구인가? 바로 긴 세월 독재 권력과 싸워 온 역전의 용사들이 아닌가? 거기다 김진하, 여태명, 이인철, 장경호, 성효숙, 박은태씨 등 기라성 같이 많은 예술가들이 합세하여 박근혜가 구속될 때까지 예술행동을 이어갈 것이라고 한다.

그 날 광화문광장에서 보여 준 “옳”시국퍼포먼스는 ‘까도까도 끝이 없다’는 ‘양파’를 보여주었다. 등에 짊어 진 양철판 끌리는 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광화문과 헌법재판소 가는 길은 나팔소리와 냄비 두드리는 소리까지 가세해 요란했다. 그 굉음에 틀어막은 박근혜의 귀도 뚫렸을 것이다. 뚫렸으면 교도소 들어가서나 공주노릇해라.

광화문 미술행동 ‘차벽공략, 촛불은 꺼지지 않는다” 첫 번째 프로젝트는 40미터에 달하는 천에 낙서그림을 그려 경찰차벽에다 붙인 것이다. 많은 작가들과 시민들의 참여로 철통같은 차벽을 순식간에 재미있는 그림판으로 바꾸어 놓았다. ’국민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행복한 나라에 살고 싶다’, ‘자식보기 부끄럽다’, ‘치 떨린다 최순실, 끌어내자 박근혜’ 등 갖가지 구호들이 그림판에 새겨졌다.

요사이 광화문 일대는 박근혜 국정농단에 분개한 예술가들의 전진 기지로 활용되고 있다. 블랙리스트 예술인들의 텐트촌이 생기면서, ‘민미협’에서 만든 거대한 ‘희망촛불탑’도 불을 밝혔다.

수시로 이곳에서 예술가들의 시국선언이 이어지고, 매주 금요일 오후3시부터 춤꾼 장순향교수가 주동이 된 ‘춤 교실과 전통문화제‘도 열린다. 그리고 궁핍현대미술광장 개관전이 열리는 천막 전시장도 마련되었다. 음악과 퍼포먼스, 시와 그림으로 부패권력을 조롱하며 박근혜 구속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시작된 시국전 ‘병신무란 하야제’도 촛불처럼 꺼지지 않는다. 인사동 ‘아리수’에서 열린 ‘조국의 산하’전을 거쳐, ‘인천아트플랫폼‘의 ‘광장, 환대의 문지방’으로 규모가 확대되어 이어지고 있고, 춘천의 ‘순실뎐’에 이어 광주전시 등 전국으로 번지고 있다. 가히 예술혁명으로 이끈다.

박근혜가 구속되고, 세상이 바뀔 때까지 시민들과 함께하는 예술가들의 저항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국민들을 고생시키지 말고 그만 끝내라. 최소한 연민의 정이라도 남게 하라.

부디 새해에는 국민들의 염원이 이루어지는 대동의 한 해가 되길 바란다.




왜냐하면, 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게 정치를 개 좆 같이 하니 그런 것 아니가.

왜 열심히 일했는데, 지들처럼 떵떵거리고 살지는 못하더라도,
일한 만큼 대우받고, 최소한 사람답게는 살아야 할 것 아니가?
평생을 권력자들께 당하고, 기득권자들에 밀려 손해만 봤다.
그래서 가진 자들과 권력 쌘 놈들이 대를 이어 나쁜 짓하는 이런 나라가 싫은 것이다.
돈 없으니 나가 살 수도 없고, 죽으려니 가족이 밟혀, 악만 남았다.



나라를 끌고 가는 년은 얼굴에 철판을 깔았는지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그래도 역사가 중요한 건 알았던지, 교과서를 국정화해야 된다네.
지 애비 나쁜 짓 한 거는 다 알아...




어제 민중봉기 날에는 끝장 낼 작정하고 나갔다.
페트병에 휘발유 두 병 넣어 가, 분신할 생각까지 했다.
영웅이 되고 싶냐는 마누라의 비아냥거림에 쪽팔려 포기했지만...


경찰들에 시비 붙어 실큰 두들겨 맞아 죽을 작정도 했으나,
헬맷 눌러 쓴 전경들의 눈을 보니 욕도 한 마디 못하겠더라.
다 자식 같은 놈들인데, 지가 무슨 죄가 있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내 할 일은 그 날 벌어진 일들을 샅샅이 찍는 일 뿐이더라.
그러나 연장이 신통찮아 걱정스러웠다.
지난번 인사동 시위 때 맞은 물대포로 카메라를 망쳤으나,
돈이 없어 아직까지 카메나도 없는 신세다.
마누라에게 똑딱이 하나 빌려 쓰고 있는데, 이게 내 밤일처럼 작동이 느려
순간 포착이 어렵고, 특히 어두운 밤중에는 맥을 못 춘다.



그렇지만 어쩌랴!  일찍부터 대학로에 나갔다.
여러 집회장이 있지만 역사쿠데타를 저지하는 ‘민주민생수호 범시민대회’부터 갔다.
민중들의 슬픈 마음을 알았는지, 그 날은 날씨까지 우중충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좀 달랐다. 젊은이들이 주축인 이전에 비해 연세 지긋한 분도 많았다.
이건 교과서국정화문제로 여지 것 눈감아주었던 보수층들이 돌아 서고 있다는 정황이다.
함세웅 신부를 비롯하여 김정헌, 장순향씨 등 반가운 분들도 더러 보였다.



조선, 동아일보는 수험생들을 힘들 게 하는 민중궐기라며 비난을 퍼부었으나 광화문으로

이동시간을 학생들의 입실이 끝나는 오후4시까지 기다리는 등,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었다.
마치 축제 행렬 같은 분위기였는데, 종로로 행진하는 길에서 판화가 김준권씨도 만났다.



종각 쯤 당도하니, 더 이상 행진을 못하도록 도심을 경찰버스로 성곽처럼 쌓아 놓았더라.
행렬을 벗어나 광화문으로 가는 통로를 찾았으나 쥐새끼 한 마리 못 들어가게 만들어 놓았다.

정말 대단한 경찰이더라. 북한에서 무장공비가 내려 와도 이렇게는 못 할 것이다.
한 업소를 통해 간신히 빠져 나가기는 했으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북한의 광장같이 텅 빈 광화문은 경찰버스만 줄지어 있을 뿐, 황량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합류하기 위해 얼마나 돌고 돌았던지, 벌써 어둠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조선일보사 앞에서 반가운 분들을 만났다.
백기완 선생과 이수호, 신학철, 장경호, 하태웅씨 등 여러 명이 식당으로 가던 중이라,
따라붙어 짜장면 한 그릇으로 허기를 메울 수 있었다. 


 


대치하고 있는 길거리는 캡사이신 물대포를 얼마나 쏘아댔는지 희뿌연 물이 흐르고 있었고,
저지 망을 치우기 위해 버스를 묶어 당기는 시위대 위로 연신 물대포를 쏘아댔다.

어느 놈이 지시하고 조준하는지 모르지만 무자비했다. 사람이 물대포를 맞고 쓰러져도 그 위에 퍼부어 댔다.
급기야는 사람이 다쳐 군중 틈을 뚫고 구급차가 들어왔으나, 더 이상 진입하지 못했다.
길 터라는 군중들의 외침에 누군가 실려 나갔지만, 정황을 파악할 겨를도 없었다.
미처 우의를 준비 못했던 터라 온 몸은 물대포를 맞아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다.




긴 시간동안 버스를 치우기 위해 밧줄에 엮어 당겨댔으나 허사였다.
경찰들이 미리 전신주나 단단한 지주에 묶어 둔데다, 건너편의 경찰들은 막대에 톱을 달아
묵인 밧줄을 잘라 버리기 때문이다. 온 힘을 쏟아 당기던 군중들이 나 자빠져 다치기도 했다.

화난 군중들은 경찰버스를 때려 부수기도 했으나 그들에게 빌미를 주는 일일 뿐이었다.
오후11시가 되니 연행한다는 선전포고가 시작되고 경찰들의 포위망이 좁혀지기 시작했다.
사진 찍으려 경찰버스 위를 오르다 곤두박질해 욕도 바가지로 얻어먹었다.
체력의 한계를 느껴, 끝까지 지켜보지도 못한 채, 마지막 지하철을 타야 했다.



옷을 벗어 세탁기에 집어넣으며, 걱정되어 기다리던 마누라께 말했다.
“아들 같은 경찰 놈이 나더러 더럽게 늙은 놈이라 카던데.”
슬프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내 신세가... 

더러운 세상이지만 끝까지 싸워, 다 잘사는 평등의 시대는 보고 죽어야 할 것 아니가?

사진,글 / 조문호














서양화가 신학철씨의 작품

























































 

12월20일, 주말의 인사동은 몹씨 추웠다.
지난 밤 내린 눈이 곳곳에 쌓여있었으나 젊은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북인사마당에서는 비누방울 날리는 버스킹에 구경꾼들이 몰려들었고,

구세군 자선남비에 지갑을 여는 온정도 아름다웠다.

길바닥에는 처음 보는 서예가가 등장해 고행하듯 붓을 휘두르고 있었다.
눈을 쓸어낸 찬 바닥에 종이 몇 장 깔고 앉았으나 아무도 관심주지 않았다.
마치 나를 나무라듯 “言行一致”를 써 주며 가져가라지만,

카메라 잡은 손엔 장애물일 뿐이었다.

이 날은 한정식선생과의 오찬약속으로 나왔지만,

1월21일로 예정된 사진전을 위해 대관 신청까지 했다.
”아라아트‘에서 일을 마치고 목판화가 김준권씨가 전시 중인 3층에 들렸더니,

입구를 마치 개인 작업실처럼 꾸며 놓았었다.
마침 30년 전 제자를 전시장에서 만났다기에 기념사진 한 장 찍었다.

사진/글 : 조문호

 

 

 

 

 

 

 

 

 

 


마지막 남은 달력마저 달랑거리는 12월 10일의 수요일이었다.

 

인사동의 수요일은 언제나 예술가들의 축제날이나 다름없다.
전시장마다 새 전시가 열리고, 식당과 술집들은 뒤풀이로 부산하다.
가는 곳마다 반가운 사람들이고, 거리 곳곳에 낯익은 모습들 뿐이다.

 

12월10일은 평소 수요일과는 달리 뜨거운 열기로 인사동이 들썩였다.

한 때 민중미술가로 정치 투쟁의 선봉에 섰던 목판화가 김준권씨와
화가 박불똥씨의 전시가 열려, 옛 민주인사들로 인사동이 도배됐다.

 

그 날은 민중봉기 기념일이 아니라 세계인권선언기념일이었다.

이 곳 저 곳 돌아 다니며 사진 찍고 술 마시느라 혼자 바빴다.
불알에 요랑 소린지, 구세군 종소린지 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사진,글/ 조문호

 

 

 

 

 

 

 

 

 

 

 

 

 

 

 

 

 


김준권씨의 회고전 ‘나무에 새긴 30년’展, 개막식 뒤풀이가 지난 10일 오후6시부터 인사동 ‘영빈가든’에서 열렸다.

 

작가 김준권씨의 가족들을 비롯하여 김윤수, 황명걸, 임재경, 황석연, 이애주, 윤범모, 김명성, 임진택, 이강군, 박홍순,

이도윤, 류연복, 정정식, 이인철, 조윤수, 이태호, 성효숙, 민정기씨 등 많은 지인들이 환담을 나누며 여흥을 즐겼다.

 

‘영빈가든’에서 ‘소담’으로 옮긴 술자리는 늦은 시간 까지 이어졌다.

 

 

 

 

 

 

 

 

 

 

 

 

 

 

 

 

 

 

 

 

 

 

 

 

 

 

 

 

 

 

 

 

 

 

 

 

 

 

 

 

 

 

 

 

 

 

 

 

 

 




김준권씨의 회고전 ‘나무에 새긴 30년’展, 개막식 및 화집 출판기념회가 지난 10일 오후4시 인사동 ‘아라아트’2층 전시실에서 많은 내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막되었다.


미술평론가 윤범모씨의 작품평, 김윤수, 김명곤, 유홍준, 김명성씨의 축사와  작가 인사말로 진행된 개막식에는 백기완, 손장섭, 황명걸, 신경림, 임재경, 신학철, 황석연, 이애주, 임진택, 이강군, 박홍순, 이도윤, 류연복, 정정식, 이인철, 조윤수, 이태호, 성효숙, 민정기씨 등 200여명의 문화예술인들이 참석하여 작품들을 감상하며 전시를 축하했다.

미술 운동가에서 서정적 목판화가로 선회한 김준권씨의 작품들은 우리 모두가 발 딛고 사는 이 땅의 질박한 풍경들을 목판에 새겨냈다. 그가 30년간 제작한 작품은 550여 점이지만 이번 전시에는 연도별로 7, 8점씩 선정해 총 250여 점을 선보인다.

아라아트 2층부터 5층까지 4개 층의 넓은 전시장을 가득 메운 이 목판화전은 오는 29일까지 이어진다.

 

 

 

 

 

 

 

 

 

 

 

 

 

 

 

 

 

 

 

 

 

 

 

 

 

 

 

 

 

 

 

 

 

 





김준권 회고전 ‘나무에 새긴 30년’

김준권 작가가 올해 완성한 채묵 목판화 ‘푸른 소나무’. 새벽 시간 왕릉을 둘러싼 소나무 숲이

상서로운 푸른 기운을 내뿜는 모습을 표현했다. 김 작가는 특정 지역의 풍경을 보이는 그대로

그리지 않고 이를 보며 떠오른 생각을 함께 담아낸다.

색깔별로 별도의 목판이 필요해 6개 판에 새겨 완성했다. 김준권 작가 제공

 

 

소담스레 눈이 쌓인 시골 마을, 서늘한 새벽 공기를 내뿜는 숲 속 정경, 분홍 꽃잎이 흐드러진 봄날의 꽃나무….

김준권 작가(58·사진)의 서정적인 풍경화를 보면 두 번 놀란다. 먹빛이 부드러운 수묵화 같은데 뾰족한 칼로 파낸 판화다. 평화로운 풍경을 그려내는 작가는 청년 시절엔 민족해방(NL) 계열로 정치 투쟁의 선봉에 섰던 투사였다.

1980년대 미술계의 주류였던 민중 화가들은 민주화 이후 각자의 길을 걸었다. 목판화가 오윤(1946∼1986)은 40세에 요절해 전설이 됐다.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한 그림으로 논란을 일으킨 홍성담 작가(59)는 여전히 직설적 화법으로 시대와 불화한다. 투쟁의 도구가 아닌 예술의 본질로 돌아가 미학적 고민을 하는 이들도 있다. 김 작가가 그런 경우다.

 

 

10일 서울 종로구 아라아트센터에서 개막하는 그의 회고전 ‘나무에 새긴 30년’은 미술 운동가에서 서정적 목판화가로 선회한 작가의 예술 여정을 시기별로 보여준다. 홍익대 미대 졸업 후 미술교사에서 해직 교사로, 민족미술협의회의 사무국장과 상임집행위원장으로 바쁘게 활동하며 억센 선묘 위주의 선동적 작품을 선보였던 작가는 민중미술운동이 동력을 잃자 다른 고민을 해야 했다.

“커다란 이념이 아니라 동네 고샅길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 감동을 표현할 기술이 없더군요.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선에 투입됐던 거예요. 내가 옳다며 떠들던 것들이 실은 무지의 발로가 아닐까 회의했습니다. 다시 공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민중미술가로 활동하던 시절인 1985년 고무판에 유성잉크를 발라 찍어낸 선묘 위주의 ‘태극도’. 김준권 작가 제공

 

 

떠들썩한 세상 한가운데 서 있던 그는 30대 중반이던 1991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산골짜기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자발적인 유배 생활을 시작했다. 팔만대장경이 있는 해인사에서 전통적인 수묵인화기법을 익히고, 목판화의 선진국으로 유학을 떠나 일본 다색목판화 우키요에와 중국의 수인판화를 배웠다.

한중일 3국의 목판화 문화를 섭렵한 결과물이 채묵 목판화다. 젊은 시절 여느 목판화가들처럼 서양 종이에 유성물감으로 찍어냈던 그는 지금은 한지에 먹을 안료로 쓴다. 유성판화는 누가 찍든 같은 결과물이 나오지만 수묵판화는 먹의 농도, 목판과 한지의 수분 함량에 따라 작품들이 다 다르다. 그만큼 표현 영역이 넓지만 수분 조절이 어려워 정교한 기술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소재도 바뀌었다. 머릿속 이념을 담아내던 작가는 평범한 이들이 발 디디고 사는 이 땅의 질박한 풍경들을 눈으로, 발로 사생하고 작업실에 앉아 되새김질하며 목판에 새겨낸다.

그가 30년간 그리고, 파고, 찍은 작품은 550여 점. 작품마다 5, 6개의 판을 새겼으니 3000개가 넘고, 작품당 20점 미만의 에디션을 찍었으니 6만 장이 넘는 판화를 내놓은 셈이다. 이번 전시에는 연도별로 7, 8점씩 250여 점을 전시한다.

작업실에 ‘한국목판문화연구소’라는 간판을 내건 작가는 “목판화란 죽은 나무를 살려내는 일”이라며 “내가 살려낸 것이 무엇인지 묻고 또 묻는다”고 했다. 29일까지. 02-733-1981

동아일보 /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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