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서울문화투데이 / 정영신기자


▲ ‘쓴 맛이 사는 맛'으로 인사동 작가전을 연 채현국 선생 Ⓒ정영신


인사동을 사랑하는 작가 60여명 참가,. 수익금은 생활 어려운 작가들에게 

‘쓴맛이 사는 맛’이라는 이름을 내 건 이색적인 전시가 지난 15일 오후5시 ‘인사아트프라자’ 3층에서 개막됐다.

'쓴맛에 생각도 하고, 쓴맛에 괴로웠고 아팠지만, 그 쓴맛에 사람이 깊어진다'는 '건달'할배' 채현국'선생의 말씀에 따라, 회화, 사진, 조각, 서예, 도예, 새김아트, 금속공예, 섬유공예 등 인사동을 사랑하는 작가 60여명이 뭉친 것이다.


 

개막식에는 참여작가 외에도 이부영, 임재경, 이애주, 유홍준씨 등 2백여명의 문화계 인사들이 모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이 모인 전시가 쉽지 않은데, 바로 이것이 채현국 선생의 저력이 아닌가 생각한다.



 



  

▲ 전시 축하를 위해 참석해주신 이애주,이부영,임재경,채현국선생(왼쪽부터) Ⓒ정영신


건달할배 채현국 선생은 인사말에서 같이 어울리고 함께 살자는 의미로 이번 전시를 열게 되었는데, 전시회 수익으로 생활이 어려운 문화예술인들을 돕는다고 했다. 욕심을 부린다면 참여 작가들과 함께 남북을 걸어서 가보고 싶다는 말도 전했다.


  

▲ 방혜자선생의 '생명의 숨결' 15호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는 질타로 이시대의 어른으로 추앙받는 채현국 선생은 현재 경남 양산에 있는 효암학원 이사장이다. ‘쓴맛이 사는 맛’으로 세상에 쓴 소리를 거침없이 하는 선생의 시원시원한 입담에 젊은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어른이기도 하다.


  

▲ 주재환선생의 '이곳과 저곳' 캔버스에 유화 90.5x90.5cm,2008


시인 신경림 선생은 ‘쓴맛이 사는 맛’ 전시에 부쳐 “그는 거인이다. 키는 작지만 생각이 크고 시원시원하다/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고 큰 것을 향해 성큼성큼 발도 빠르다/ 그는 젊다/ 나이를 먹으면서도 전혀 늙지 않는다/ 그래서 늘 거침이 없고 늘 싱싱하다/ 게다가 그는 부자다. 돈은 없으면서도 늘 남을 도울 것을 생각하고/ 남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방법을 찾느라 분주하다/ 이웃과 친구들이 다 잘 살길을 찾느라 늘 바쁘다/ 가장 크고 가장 젊고 가장 부자인 그는/ 그래서 이 나라에서 가장 바쁜 늙은이다.”라고 썼다.

이 헌시(獻詩)에 채현국 선생의 삶이 오롯이 담겨있다.


  

▲ 김정헌작가의 '이승과 저승-시원소주' 캔버스에 아크릴과 종이꼴라쥬,91x91cm


채현국 선생의 부름에 놓았던 붓을 다시 들어 그림을 완성했다는 화가도 있었다. 박재동 화백은 개구쟁이 같은 채현국 선생의 초상화를 선보였고, 단색화의 대표작가인 이우환 선생의 작품 등 기라성 같은 예술가들이 출품한 작품으로 전시장은 가득 메워졌다.



  
▲ 민정기작가의 '우리섬 독도 삼형제 굴바위' 105x107cm oil on canvas,2015

이번 전시에 참여한 많은 작가 중 1980년대 이후 민중미술을 대표해온 작가 신학철 선생은 캔버스 위에 포토몽타주, 포토리얼리즘 기법으로 시대정신에 보다 더 가까이 접근함으로써 역사를 관념이 아닌 구체적 실체로서 형상화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특히 그의 작품 ‘모내기’ 그림은 1989년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로 당국에 압수되었고, 3개월 동안 서울구치소에 수감되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판문점 풍경으로 분단의 아픔을 형상화했다.


  

▲ 신학철 선생의 '가야할 길' 116x81cm,2017


조절된 에너지와 침묵의 힘을 빛의 순간으로 보여주는 방혜자 선생은 ‘생명의 숨결’을 내놓았고, 시계가 멈춘 탄광촌의 삶을 그로테스크한 질감으로 그려내는 황재형 작가는 ‘Bus’를 출품했다.


  

▲ 황재형화가의 'Bus'53ㅌ72.7cm, 캔버스에 유채,1993


비닐과 골판지, 폐품과 종이 등을 재활용해 발랄하고 통통 튀는 작품으로 블랙유머를 시대정신으로 재현하는 주재환 선생의 ‘이곳과 저곳', ‘현실과 발언’의 창립동인으로 비판적 리얼리즘 작가이자 문화운동가인 김정헌 선생의 ‘이승과 저승-시원소주’, 인사동 그림판의 마당발 화가 장경호의 ‘묵시’는 삶에 지친 인간의 초상으로 오늘의 시대정신을 말하고 있다.


  

▲ 장경화화가의 '묵시' 72.7x90.9cm Oil on canvas,2011


조각가 박상희씨는 예수를 안고 있는 부처를 통해 세상의 다툼과 분리에 저항하는 ‘삐에타’를 선보였다. 우주의 근원적 생명과 사랑을 표현하는 화가강찬모는 ‘빛의사랑’을, 키치화풍의 전형성을 재창출하여 미학적 엄숙주의에 빠져있는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던 민정기화백은 우리시대 삶의 풍경인 ‘우리섬 독도 삼형제 굴바위’작품을 내놓았다.


  

▲ 박상희조각가의 '삐에타' 67x53x94cm, mixed media,2012


이번에 작품을 내놓은 대부분의 작가들은 채현국선생과 특별한 인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이다. 채현국 선생은 인사동 허름한 술집을 찾아다니며 가난한 작가들의 술값을 말없이 내주고, 힘들어하는 작가에게는 슬그머니 지폐를 호주머니에 넣어주기도 했다. 호탕한 웃음을 날리며 이 술집 저 술집을 떠돌며 주머니가 텅텅 빌 때 까지 사람 만나기를 계속해 온 구세주 같은 분이었다.


  

▲ 박재동 화백의 '채현국선생' 종이에먹,2017


작가들은 오랫동안 채현국 선생에게 빚진 술값을 갚기라도 하듯, 전시 소식에 망설이지 않고 흔쾌히 작품을 내놓았다. 어려운 예술가들을 돕기 위한 자선바자회지만, 잘 알고 지낸 작가들이 함께 어울리는 이러한 전시는 단발성으로 끝내는 것보다 해마다 했으면 하는 작가들이 의외로 많았다.


  

▲ 강찬모화백의 '빛의사랑' 53x72cm, 한지에 한국전통채색기법및안료,2017


참여 작가인 조문호 사진가는 오래전 인사동을 사랑하는 작가들의 모임인 ‘창예헌’ 사람들이 다시 뭉친 것 같다는 말도 했다. 2008년 창립되어 몇 년 전부터 흐지부지된 ‘창예헌’은 인사동을 사랑하는 예술가 200여명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기능을 상실한 오늘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다시 부활시키자는 예술가들의 목소리가 더 높았다.

채현국 선생은 돈이나 권력은 마술 같아서 아무리 작은 것도 휘두르기 시작하면 썩기 때문에 빈털터리가 되어야 인생이 행복하고 풍요로워진다고 말씀하셨다. 선생이야 말로 염치를 아는 이시대의 진정한 어른이 아닌가 싶다.


  

▲ ‘쓴 맛이 사는 맛'전을 위해 모인 문화예술인들 Ⓒ정영신


건달 할배 채현국과 함께하는 예술가들의 작품전 ‘쓴 맛이 사는 맛’ 전시는 오는 21일까지 ‘인사아트프라자’ 3층에서 열리고, 다음달 12일부터 25일까지는 유카리화랑에서 이어진다. 전시작품을 판매한 수익금은 생활이 어려운 작가들을 위해 쓰인다.



인사동을 사랑했던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다들 자기 집에서 지내다, 큰 맘 먹어야 나오는데 나와도 잘 만나지지 않는다.
가끔 주변 전시오프닝에서 만나기도 하지만, 요즘은 그런 기회마저 많지 않다.

일 때문에 인사동에 나가도 미리 약속 하지 않으면 아무도 만날 수 없다.
술꾼들이 방앗간처럼 들리는 ‘유목민’에서 가끔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나들이가 잦지 않으니, 대개 해가 바뀌어도 얼굴 한 번 못 보는 사람이 많다.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고, 만나면 몇 번이나 더 만나겠는가?
예전에는 ‘인사동 사람들’이라는 ‘창예헌“ 모임에서 정기적으로 판을 벌여 왔으나
그마저 물주 김명성씨의 사업이 쇠락하여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를 애석하게 생각해 온 조준영시인이 가끔 연락해 만나기야 하지만 10여명에 불과하다.
이전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회비를 조금씩 걷어 그런지 모르지만, 많이 나오지 않는다.

아마 한 사람이 맡아 여기 저기 사발통문을 보내지 않아 그럴거다.






그 날, 내가 제안을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날짜를 정해두고, 일 없는 분들은 인사동으로 나오자고 했다.
시간은 정 할 필요가 없지만, 장소는 인사동 낭만의 마지막 보루인

벽치기 샛길에 있는 ‘유목민’도 좋고,  인사동 11길에 있는 '부산식당',  

인사동 8길의 '사동집'이나 '낭만', 아니면 6길의 '툇마루'던, 어디던 들려보자.

특정한 분들끼리 만나려면 장소를 페북이나 카톡에 알려, 함께 놀자는 것이다.


어느 한 집을 지정하여 약속하는 것도 좋지만, 약속 없이 만나는 즐거움이 더 좋다.

매월 몇일로 날자를 정하던지, 아니면 전시들이 열리는 몇째주 수요일로 택해도 좋다.

어느 특정한 날은 인사동에서 친구들과 술 마시는 날로 정하자는 것이다.

지방에서 오는 분들도 약속을 그 날로 잡아두면 님도 보고 뽕도 따지 않겠는가.

인사동에 애착을 가진 많은 예술가들의 의견들을 한 번 듣고 싶다.






몇 일 전 조준영 시인의 연락을 받았다. 27일 오후6시30분경 ‘유목민’에서 얼굴 한 번 보자는것이다.

요즘에는 가야할 전시나 일이 몰려 시간내기가 어렵지만, 다행히 그 날은 약속이 없었다.
시간 맞추어 나갔더니,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화가 장경호, 전강호씨가 판을 벌여 놓았다.
뒤이어 음악인 김상현씨와 연극배우 이명희씨가 등장하였고,

김명성, 공윤희씨가 차례로 나타나 술자리가 두 패로 갈라졌다.






음악인 김상현씨가 나를 위해 부른다며 ‘봄이 오면“이란 신곡을 열창했는데,
이 노래 역시 짠한 슬픔을 남겼다. 왜, 봄은 와도 슬프고 가도 슬픈가?


전복안주가 나오니, 전강호씨가 몸 보신하라며 전복을 권했다.
농담으로 ‘몸 좋아져 거시기 발동하면, 책임 질거냐?’니까 조준영시인 말한다.
"남자는 밥숟가락 들 힘만 있으면, 정력 타령이고,
여자는 밥숟가락 들 힘만 있으면 화장을 한단다."
꽃은 나비를 불러 들여야 하고, 나비는 씨를 뿌려야 하는 엄정한 자연의 이치를 어찌 할거나...






자리에 앉기 전에는 이승철, 김이하 시인이 마시다 갔고,

뒤늦게는 화가 김정헌씨와 최유진, 이상훈씨도 등장했다.

그리고 카메라를 뒤져보니, 전 날 찍힌 장경호, 성기준, 강기숙, 홍인호씨의 모습도 들어있네.

좌우지간,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인사동에서 만나, 못 다한 시름 풀어보자.

사는 게 별거냐? 죽고 나면 아무 소용없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0여 년 동안 문화행정 일에 빠져 살던 김정헌씨가 다시 붓을 빼들고 전시를 열었다.
지난 17일부터 4월17일까지 구기동 ‘아트스페이스 풀“에다 그림 보따리를 풀어놓은 것이다.

"김정헌의 이야기그림, 그림이야기"란 화집도 펴 냈다.

전시 제목이 길었다. “생각의 그림, 그림의 생각” “불편한, 불온한, 불후의, 불륜의, ...그냥 명작전”이다.
작가가 인사말에서 했던 “나이 들어 몸이 받쳐 주지 않으니 생각이 많아지더라”라는 말처럼,

작품들을 보니 많은 생각이 떠오르더라. 세월호 등의 시사적인 현장과 일상적인 풍경들을

거칠거나 흐릿하게 드러내며 작가의 생각들을 소근 거리는 의성어 적듯 새겨놓았었다. 

70~90년대 민중미술의 이름으로 다양하게 시도했던 구작들이 특유의 잡 글과 어우러진 것이다.

모더니즘 맥락에서 현실참여로 옮겨가던 초창기 작업에서는 젊은 시절의 숨결도 느낄 수 있었다.

‘아몰랑 구름이 떠있는 수상한 옥상’이란 작품은 불길한 사회 현실을 암시하고 있었으며,

세월호 사건에 대한 생각을 나타낸 ‘희망도 슬프다’는 보는 이로 하여금 분노를 넘어 절망에 치닫게 했다.

대체적으로 작품에 분노와 한탄의 정서가 깔려있었는데,

참여미술의 정체성이나 여러 가지 후회스러움에 대한 회한의 정서도 엿보였다.

그는 '현실과 발언' 창립멤버였지만, 2004년 '백 년의 기억'전을 마지막으로 예술행정에 발을 디뎠다.

‘문화연대’ 대표와 한국문화예술위원장에도 발탁되었으나 정권이 바뀌면서 자진사퇴 압력을 받고 경질됐다.

법정공방으로 세상을 시끌벅적하게 만든 당시 사건으로 더 유명해졌다.

난 지금도 그의 경로이동을 잘 못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욕심이었다.

차라리 잘못된 예술행정을 바꾸려면 정치판에 뛰어드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한 채, 10여 년 동안 자신의 작품세계만 빈자리를 남긴 것이다.

아무튼 개막식에는 엄청 많은 분들이 모여 들었다. 민중예술의 명사뿐 아니라 정계, 관료 등 다양했다.
백기완선생을 비롯하여 이부영, 이수호, 이 철, 최 열, 손장섭, 주재환, 방동규, 신경림, 임재경, 박현수, 

성완경, 민정기, 정희성, 김태서, 이승철, 김여옥, 조경연, 장경호, 조 섭, 강홍구, 김영중, 김정대, 최석태,

박 건, 임정희, 심광현, 김홍희, 최백호, 김영호, 이태호, 김정환, 배인석씨 등 많은 분들로

변두리 조그만 전시장을 북적이게 했는데, 모르는 분들이 더 많았다.

요즘 주재환선생과 박불똥씨 등 민중미술가들의 연이은 전시로 자주 만났으나,

그 분들 사진 찍느라 바빴고, 와인 마시느라 신났다.
그러나 오후7시에 있는 인사동 약속 때문에 뒤풀이 술자리를 놓쳐버렸다.

구기동에서 집까지는 가까워 코가 비틀어지게 취할 수 있었는데...

사진, 글 / 조문호



































































































김정헌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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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초 결성된 미술동인 ‘현실과 발언’은 단체 이름에서부터 기존 미술판에 충격파를 던졌고 그해 10월17일 서울 동숭동 문예진흥원 산하 미술회관에서 창립전 대관을 하루 전날 일방취소하면서 빚어진 ‘촛불전시회’ 사태로 사회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사진은 82년 서울 덕수미술관에서 열린 ‘현발’의 세번째 정기 작품전 ‘행복의 모습’ 때로, 왼쪽과 가운데 두 그림이 고 김용태 선생의 출품작이다. 사진 김정헌 이사장 제공


[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현발’ 창립때 야인풍모 그와 첫 대면
토론땐 경청, 뒤풀이선 좌중 압도

 

80년 창립전 ‘전시불가’ 통보
전기 차단하자 촛불 들고 관람
매년 ‘주제전’ 열어 세상 향한 발언
84년 용태형 ‘DMZ’는 불후의 명작

 

‘붉은색 들어갔으니 용공작품’
전두환 정권 노골적 탄압
오윤 세상 떠나고 몇몇은 유학
10년만에 해산…구심점 ‘민미협’으로

 

■ 현실과 발언의 태동

 

나와 ‘용태 형’의 인연은 순전히 1979년 ‘현실과 발언’(이하 현발)에서 시작됐다. 바로 전까지 <미술과 생활> 창간 기자로 일한 그를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럴 기회가 없었다. 새로운 동인 활동과 관련해, 맨 처음 나를 찾아온 이들은 그해 가을 최민과 오윤이었다. ‘부마항쟁’ 등 유신 말기의 어수선하던 시절 새로운 미술 운동이 필요하다면서 같이하자고 권유했다. 그들과는 이래저래 자주 어울리는 사이라 얘기가 나오자마자 나는 동의했다. 그러면서 물었다. “누가 누가 같이하는가?”

 

‘미술과 생활’에 자주 기고하던 평론가 원동석이 80년 ‘4·19혁명’ 20돌을 맞아 미술 분야에서도 기념 전시회를 열자며 처음 모임을 발의했다고 했다. 그 취지에 동의한 이들은 서울대 쪽으로 최민·성완경·김경인·오수환·오윤·최민 등과 홍대 쪽으로 손장섭·김정수 등이라고 했다. 그밖에 ‘미술과 생활’ 출신으로 윤범모는 알겠는데, 주재환, 김용태는 생소했다.

 

그해 12월 초 ‘현발’ 첫 회합이 있었다. 주재환과 김용태는 첫눈에 봐도 온갖 풍상을 겪은 야인의 풍모였다. 우리는 곧 의기투합했다. 물론 12·12 쿠데타로 전두환 신군부가 정권을 잡기 위해 비상계엄을 발동했던 무렵이라 만나도 제대로 교분을 쌓을 틈도 없이 헤어지곤 했다.

 

그러다 80년 초 ‘현발’이라는 명칭과 ‘새로운 미술’을 선언하는 창립 취지문이 완성되면서 자연히 모임은 생기를 띠기 시작했다. 단어 자체로 제도권 미술에 일격을 가한 명칭 ‘현발’은 이론가들의 작품이었다. 특히 원동석·최민·성완경·윤범모의 활약이 컸지만 아마도 69년 서울미대 시절 오윤 등이 시도했다 좌절된 ‘현실동인’의 영향도 컸으리라. 특히 내게 ‘발언’이라는 단어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와우~ 미술이 발언한다?” 기껏해야 ‘미술은 표현’이라는 정도에 머물러 있던 나였으니 더욱 그랬다.

 

그 무렵 회원 추천을 통해 심정수·권순철·백수남·노원희·김건희·임옥상 등 8명이 새로 가세했다. 그 가운데 이상국, 여운 등이 탈퇴한 대신 뒤이어 이태호·강요배·이청운 등이 가입했다.

 

 

■ 현발 회원들의 의식화

 

80년 초 동인 회원들이 확정되자 현발은 정기 모임이나 야외로 엠티(MT)를 나가기 시작했다. 모임 때는 주로 ‘현실’과 ‘발언’에 대해 이론가들이 발제하고 전체의 토론으로 이어졌다. 미대 시절에는 전혀 접할 수 없었던 새로운 미술의 세계를 의식화하는, 요즘 식으로 얘기하면 미술에 인문학이 접속되는 순간이었다. 예컨대 원동석의 ‘현실과 미술의 만남’이나 성완경의 ‘발언의 독점과 관용구의 타락’ 등이 대표적으로 회원들의 정신세계를 무장시키는 주제였다.

 

그러나 현발의 진면목은 이런 토론을 통한 의식화보다는 새로운 세상을 육화시키는 뒤풀이 자리였다고 하겠다. 그 뒤풀이에서 오윤과 ‘용태 형’이 슬슬 진면목을 보이기 시작했다. 오윤의 뒤풀이 재능은 익히 알았지만 새 인물이 나섰으니 바로 그가 ‘용태 형’이었다. 오윤처럼 레퍼토리가 많지도 않았다. 오로지 ‘산포도 처녀’ 노래 하나만으로 좌중을 압도했다. 그밖에도 심정수의 샹송, 민정기의 ‘무너진 사랑탑’, 주재환의 ‘여보야 당신아…’, 임옥상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등등 회원들의 육화된 장기들은 끝이 없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현발 회원들이 곧잘 벌이던 토론 때 ‘용태 형’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끝까지 경청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대신 그는 행동에는 빨랐다. 현발의 야외 엠티나 지식산업사에서 했던 정기 모임이나 뒤풀이 술자리는 모두 그의 진두지휘 아래 이루어졌다. 입담이 세고 다들 한가락씩 하는 회원들을 이끄는 모습은 탁월한 야전사령관을 연상케 했다. 그의 친화력은 야전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그는 그 무렵 밥벌이로 <조경>이라는 전문잡지사에서 출판 일을 하고 있었는데 현발의 전시회 팸플릿이나 회지 <그림과 말>, 다이어리 <’85 그림일지>, 오윤의 전시회 도록과 판화달력 등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출판물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 20세기 첫 촛불 전시회

 

현발은 80년 초 출범 때 이미 10월17일 창립전을 열기로 하고 문예진흥원에서 운영하는 미술회관(지금의 아르코미술관)을 전시공간으로 대관해두었다. 바로 그 유명한 ‘촛불 전시회’다.

 

마침내 개막 전날 회원들은 저마다 설치할 작품을 들고 미술회관에 모여들었다. 진열 장소를 배정하고 하나둘 작품을 개봉하고 있는데 대표 자격으로 관장을 만나고 온 심정수에게서 청천벽력 같은 얘기를 들어야 했다. ‘전시 불가’ 통보를 받았다는 것이다. 추상화가 아무개씨가 “어찌 이런 단체의 전시를 할 수 있느냐”고 항의하는 바람에 관장이 긴급조처를 내렸다는 어처구니없는 얘기였다. 회원들의 항의에 관장은 다음날 운영위원회를 소집해 공식적으로 결정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튿날 운영위원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아무리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비상계엄하라지만 납득할 수 없는 ‘만행’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전시회를 찾아온 적잖은 지인과 관객들은 미술회관에서 전기를 차단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급히 마련된 촛불을 들고 마치 순례자들처럼 전시장을 돌 수밖에 없었다. 아마 20세기 최초의 촛불 전시회가 아니었을까? 다행히 창립전은 견지동 동산방화랑에서 3주 뒤 다시 열 수 있었는데 화랑주 박주환 사장의 호의 덕분이었다.

 

아무튼 현발의 창립전은 모더니즘 단색 계열의 추상화가 판을 치던 미술계에 적지 않은 파문을 던졌다. 특히 미대를 다니거나 졸업하고 이제 세상에 첫발을 내디딘 젊은 세대에게 대단한 충격이었다. 80년대 초반 수없이 생겨난 실험적이고 비판적인 젊은 미술단체들이 이를 증명한다.

 

이후로도 현발은 기회 있을 때마다 엠티를 통해 서로의 정신적 유대를 강화해 나갔다. 81년 <도시와 시각전>을 비롯해 <행복의 모습전>, <6·25전> 등 해마다 주제전을 열어 미술계를 향해 또한 세상을 향해 발언을 퍼부었다.

 

‘용태 형’도 그 시절엔 해마다 유화 등으로 회원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다만 워낙 강렬한 작품들이 쏟아진 탓에 도드라지게 주목을 받는 편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84년 ‘6·25전’에서 불후의 명작이 나왔으니, 바로 동두천 사진을 모아 만든 ‘디엠제트’(DMZ)다.

 

초기 현발의 주제전이 사회 현실을 집중 조명하기 위한 방식의 하나였다면, 82년부터는 분과별로 소그룹을 나눠 그 결과물을 내놓기도 했다. 판화분과에서는 <현실과 발언 판화전>을 열었고, 주재환·김용태가 속한 출판분과에서는 처음으로 회지인 <그림과 말>과 열화당의 호의로 무크지 <시각과 언어 1, 2>를 펴냈으며, 내가 속했던 벽화분과는 공주교도소 안에 <꿈과 기도>라는 대형 벽화(3m×30m)를 그렸다. 이런 시도는 모두 소통 부재의 미술계에 대중매체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였다.

 

■ 정권의 노골적인 탄압과 해산

 

창립전부터 제도권 미술계의 ‘눈엣가시’로 찍힌 현발은 전두환 정권에는 이미 불온한 집단으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82년 정기회원전 <행복의 모습전>을 열 무렵 대표를 맡고 있던 나는 문공부(지금의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연락을 받고 주무 국장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현발 회원들을 중심으로 안기부에서 미술인들 내사를 해왔는데 불온한 작품들에 대해 조처를 취해야 되겠다’고 협박성 통보를 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전문위원으로부터 우리 작품에 대한 유권해석도 이미 받아놓았다고도 했다 . 붉은색만 들어가면 거의 용공작품이라는 식이니, 참 황당무계했다. 해당 작가는, 회원으로는 임옥상, 신경호, 노원희 등이고 비회원으로는 김경인, 강광, 홍성담 등을 들먹였다. 그러면서 그는 대표가 나서서 더 이상 다치지 않게 문제 작품들을 자진해서 문공부에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나는 ‘당신이 해당 작가들에게 직접 요구하라’고 되받아쳤다. 결국 그 국장과 해당 작가들이 모여 협의를 했고, 수사를 종결하는 대신 작품을 문공부에서 보관하기로 했다. 일종의 강압적인 압수보관이었다.

 

그런데 뒤이어 나와 신경호 등 대학교수 회원들에게 교육부를 통해 경고장이 날아왔다. 공문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위의 김정헌은 ‘추상표현주의’를 표방하는 불온한 단체에서 활동하여… 이를 엄중 경고 조치하고 보고할 것.” 그때 현대미술관에 압수보관당했던 작품들은 몇해 전에야 작가들 품으로 돌아왔다. ‘압수보관 작품 반환 기념전’이라도 열어야 했는데 때를 놓쳐 아쉽다.

 

그 뒤로 현발은 해가 거듭할수록 동력이 줄어들었다. 82년 박재동, 83년 안창홍·정동석·박세형·최병민·김호득, 85~86년 박불똥·안규철 등 해마다 신입 회원이 들어오긴 했지만 최민, 임옥상, 백수남 등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고 오윤은 86년 세상을 떠나 버렸다.

 

그렇지만 후배 그룹들이 새로운 집단 동인 활동을 벌이자, 긴장한 정권은 85년 서울미술공동체에서 주관한 <힘전>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현발 회원들도 미술운동의 선배로서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해 11월 ‘어쩔 수 없이’ 만든 단체가 바로 민중미술운동의 구심체로 결성한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였다. 김용태, 원동석, 손장섭, 주재환 그리고 내가 민미협의 지도부를 구성하고 적극적으로 활동에 나섰다. 그때부터 ‘용태 형’은 민중미술운동의 야전사령관으로 활약하며 마침내 88년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창설의 주역으로 나아갔다. 현발에서 주로 뒤풀이를 조직했던 그는 민예총의 건설과 운영에서 앞풀이 내지 본풀이로 자신의 진가를 발휘한다.

 

86년 <제6회 현실과 발언 동인전>에 이어 88년의 <한반도는 미국을 본다전>을 마지막으로 <민중미술을 향하여>라는 거창한 보고서를 출판한 현발은 10년 만에 자진 해산했다.

 

김정헌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고 김용태 선생 특유의 ‘형·아우 화법’은 이질적인 예술인들을 한데 모이게 하는 ‘마력’을 발휘했다. 사진은 1983년 1월 충북 청원군 문의마을로 엠티를 가기 위해 행정선을 타고 대청댐을 건너고 있는 ‘현실과 발언’ 동호인들로, 왼쪽부터 김용태, 한 사람 건너 민정기, 이태호씨의 모습. 사진 김정헌 이사장 제공

 

경상도 사나이의 화법…누구하고나 ‘형님, 아우’

 

 

 

‘용태 형’ 매력은 친근감 있는 호칭
상대에 존칭 붙일때는 되레 긴장

 

“나에게 김용태 선생님은 언제나 ‘용태 형’이었다. 10년이나 선배였는데도 언제나 ‘형’이라 부를 수 있었던 건, ‘선생님’이란 명칭이 주는 거리감, 민중운동이 줄 수밖에 없는 거대한 무게를 ‘용태 형’이라는 친근한 호칭이 단칼에 없애버렸기 때문이었고, 형도 그런 느낌으로 후배들을 대해 주었던 것으로 기억된다.”(미술평론가 심광현) “용태 형은 두번째 만나는 사람에게는 선배건 후배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어김없이 반말 투로 내려서 형, 동생처럼 친밀감을 증폭시켰다.”(판화가 홍선웅)

 

“고등학교 교직생활을 20년 넘게 했던 까닭에 ‘선생님’이란 호칭이 습관이 된 내게 ‘흥순아~!’라고 부르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용태 형이었다. (…) 가끔은 ‘내 나이가 몇인데’라며 불평하는 후배의 소리도 들었지만 결국 친근감의 표시로 받아들이고 만다. 돌이켜보면, 많은 사람들을 우리 진영에 끌어들인 ‘용태 형’의 매력과 흡인력이 바로 상대를 부르는 호칭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화가 박흥순) “과연 명실상부하게 ‘형님’이라 대접할 만한 인품을 나는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오직 단 두 명밖에 만나지 못했으니, 그중 손위가 바로 김용태다.”(화가 박불똥)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에 참여한 문화예술인 43명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고 김용태 선생에 대한 첫인상과 함께 호칭부터 남다른 그만의 화법을 회고한다. ‘용태 형’, 1980~90년대 민중문화운동판의 분위기를 상징하는 ‘보통명사’라고들 한다. 그 시절 사석에서 한번이라도 그와 술잔을 기울인 적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를 그렇게 불렀다. 문학평론가 염무웅 선생도 “그는 발이 넓고 사람 사귀는 데 천재였다. 나는 김용태를 싫어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는 누구하고나 형님, 아우였다”고 기억했다.

 

 

그래서인지 이름과 얽힌 재미난 일화도 여럿 남겼다. 80년대 초 ‘현실과 발언’ 초기 정기모임에 종종 어울린 화가 노원희는 어느 날 뒤풀이 찻집에서 나눈 ‘말린 음식 이야기’를 책에 소개해놓았다. “용태 형이 뭐라 뭐라 떠들 때였겠지, 갑자기 오윤 선배가 특유의 장난기 담은 눈빛과 배시시 웃음 띤 얼굴로 ‘용태야, 니 용 말린 거 용태 아이가?’ 한다. 일순 좌중에 웃음보가 터지고 용태 형은 말이 막혔다.”

 

김용태는 왜 이런 화법을 구사했을까. 지난해 투병 중 내내 구술을 진행했던 큐레이터 전승보는 “그 이유를 용태 형이 직접 설명한 적은 없다”며 “아마도 ‘부산 사나이 기질’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경상도식 친근감의 표시인 것 같다”고 풀이했다. 실제로 ‘용태 형’이 갑자기 상대를 존칭을 붙여 부를 때는 “겁나는 사태”가 빚어지곤 해 모두들 긴장했다는 일화도 덧붙였다.

 

[한겨레신문]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용태형’의 유언대로 유골은 신촌 봉원사에 안치되었다.

한 때 세들어 살았던 봉원사 사가에 대한 추억들이 많았을 것이다.

봉원사 주변 길들을 돌아다니며 오랜 기억 조각들도 찾아보았다.

저돌적인 성격에 상처받았던 생각도, 잔잔한 정에 코 끝이 찡하기도 했다.

 

 

추모회 때는 ‘용태형’의 정확한 나이를 알게 되어, 실 웃음을 짓기도 했다.

그동안 나보다 한 살 많은 것으로 행세하며 항상 동생처럼 대했는데,

알고 보니 나보다도 한 살 적은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같은 입장이던 김정헌씨가 오죽하면 조사 제목을 “야 임마! 용태”를 추도함“

이라 적었겠는가?

 

 

“이젠 나이가 한 살이라도 많은 것이 더 서러운 처지가 되었으니,

그도 다 부질없는 일이 되고 말았구나.

가끔 봉원사에 들려 술 한 잔 올릴테니 저승 소식이나 전해주고,

부디 극락왕생을 누리시게나

 

 


 



















                                              옛날 '용태형'이 살았던 봉원사 집이다










                                                아래사진 두 장은 사진가 정영신씨가 찍은 사진이다.

                                            


인사동에서 노제를 마친 '용태형' 시신은 백제 화장터로 옮겨져, 한 줌의 재가 되어버렸다.

인상무상이라는 말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용태형' 부디 극락왕생 하소!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떠난 '용태형' 운구행열은 서소문 배제학당을 한바퀴 돌아 인사동으로 들어왔다. 오래전 문화운동의 본거지였던 '그림마당 민' 앞에서, 그 시절을 회억하는 유홍준선생의 이야기를 들어며 고인의 넋을 기리기도 했다. 그리고는 망자의 가게였던 '낭만'으로 자리를 옮겨 노제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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