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에서 자리 잡은 고영준씨가 모처럼 서울에 나타났다.

죽도록 식구들 고생만 시키던 사진을 접고 사업에 몰입한지 15년째다.

사진을 그만두길 정말 잘 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사진도 하고 돈도 벌 수 있으면 좋으련만, 사진과 돈은 멀어도 너무 먼 것 같다.

그러나 다시 시작한다 해도 돈은 선택하지 않을 것 같다.





지나 온 세월을 돌이켜 보니, 온갖 회한이 다 밀려온다.

잘 나가던 가게 내팽개치고 사진하지 40여년, 과연 얻은 게 무엇인가?

살기가 힘들어 몇 차례 직장을 전전하기도 했으나, 사진에 미쳐 오래가지도 못했다.



83년 인사동 포장마차에서..(좌로부터 고영준, 조문호, 윤재성, 유성준)



평생 저축 한 번 하지 않고, 만원 생기면 만원 쓰고, 십 만원 생기면 십 만원 썼다.

그렇지만 돈 없어 굶어 본 적 없고, 돈 없어 병원 못간 적도 없다.

한 평생 잘 놀며 잘 살았으니 여한은 없다. 죽고나면 말짱 도루묵 아니던가?

그렇다면 결혼을 하지말고 혼자 살아야하는데, 가족들 고생시킨 죄는 크다.

다들 뿔뿔이 흩어져 이산가족처럼 살지만, 흉악한 돈에 물들지는 않았다.




같이 춤춘 이런 때도 있었네, 옆 여인은 누구지? ㅎㅎ



지난 11일 오후 고영준씨가 귀국했다는 전갈에 충무로 커피숍에서 그를 만났다.

모처럼 케케묵은 이야기로 지난 시간을 떠올리는 한가한 시간을 가진 것이다.

고영준은 40년 지기의 사우로 ‘사협’ 내막을 일찍부터 지켜 본 산증인이다.

인사동에 '예총'사무실이 있던 70년대 하반기부터 사진협회 총무로 일했으니,

원로사진가들의 이야기는 물론, 단체에 대한 내막을 훤히 깨고 있다.



85년 '동아미술제'에서 큰 상을 받았을 때 축하하러 온 사우들

(오른쪽부터 고영준, 신희순, 양은환, 홍순태, 조문호, 한 분 건너뛰어 정동석, 유성준씨)



김광덕이사장에서 시작하여 이정강, 이명복이사장을 두루 거쳤으나,

천성이 못된 짓을 못해, 못된 패거리들과 어울릴 수가 없었다.

그 때 그만두었기에 망정이지 더 있었다면, 똥바가지 뒤집어 쓸 수도 있었을 게다.

갈수록 조직 규모가 커지면서 비리의 규모도 비례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달에는 400여명의 아마추어 사진인들이 한꺼번에 회원으로 입회하였다니,

가히 사진작가를 생산하는 공장이나 마찬가지다.






고영준씨는 '한국환경사가회'를 비롯한 여러 모임에서 함께 일했는데,

사람 좋은 덕에 그의 주변에는 항상 사람이 꼬인다.

그런데, 독한 구석도 있다는 것은 뒤늦게 알았다.

그 좋아하던 사진을 접고 사업에 매진한 것은 차지하고라도

'알중'에 가까울 정도도 좋아한 술과 담배를 하루아침에 끊어버렸다는 점이다.

건강에 문제가 있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난 담당의사가 끊지 않으면 죽는다 해도 끊지를 못하니, 어찌 존경스럽지 않겠는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브레송 갤러리’에서 전시되는 강재구씨의 ‘12mm’사진전을 보러갔다.

전시 작가는 잘 모르지만,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12mm' 사진집 광고에 관심을 가져서다.

전시장에 아는 분이라고는 고정남씨 뿐이었으나, 군 입대를 앞둔 장정들의 긴장된 표정들이 눈길을 끌었다.






이번에 전시된 ‘12mm’는 군 입대 전에 머리카락을 12mm로 자르는 행위를 통해 통제되고 집단화되어 가는 과정을 말했다.

전형적인 기념사진풍의 방식이었으나, 긴장된 표정을 강조하기 위해 인공조명을 사용한 점이 특이했다.

입대를 앞둔 장정의 긴장된 표정과 경직된 자세가 핵심인데, 사진에는 애인 같은 여성이 옆자리를 지켰다.

그것은 개인의 정체성이 규율화되고 통제되는 것을 보여주면서, 여성을 통한 사회적 관계도 함께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젊은이의 표정과 자세를 통제하여 진지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이끌어 내었는데,

남성이라면 한 번은 거쳐야 할 군대라는 공룡집단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었다.

입영을 앞둔 두려움과 이질감은 가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강재구씨는 이전에도 군인을 소재로 한 작업을 두 차례나 가진 바 있었는데, 그 작업들이 궁금해 졌다.

병영의 기록은 이한구씨의 작업 '군용'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전시장에 다녀와 고정남씨가 올린 페북 사진을 보니, 강재구씨도 나의 페친이란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평소 ‘오빠랑 놀고 싶다’는 젊은 애들만 아니면 무조건 페친으로 받아 주다보니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아,

가끔 인사동이나 전시장에서 모르는 사람이 인사를 하면 난감할 때가 많다.




강재구 사진집 ‘12mm’ / 눈빛사진가선 60
2019년 4월 ‘눈빛출판사’ 발행 / 가격12,000원



전시장을 나왔으나, 고영준씨가 술을 마시지 않으니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마침 정영신씨와 연락이 되어 충무로 복국집에서 이른 저녁식사를 했다.

제기랄! 혼자 소주 한 병을 깠더니,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이제 소주 한 병도 무리인 것 같은데, 술과 인연을 끊어야 할지 모르겠다.

고영준씨와 언제 만날지 기약은 없지만, 헤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살아 있다면, 볼 날이 있겠지...


사진, 글 / 조문호













전시작가 김동진씨



김동진의 ‘또 다른 도시’ 사진전이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14일까지 열리고 있다. 

지난 토요일 정오 무렵 찾아 갔는데, 작가 김동진씨와 손님 한 분이 계셨다.

사진을 돌아보며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고정관념에 대해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잖아도 전시장에 오기 전 서울역을 소란스럽게 하는 보수단체의 태극기 퍼레레이드를 보며,

다들 정상이 아니라고 비난했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모든 일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하며

비정상적이라 생각되는 일은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던가?




2016 부산, 구포동



김동진의 사진들은 현대인의 편견을 말하고 있었다.

다소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면면을 찾아 기록한 사진 자체도 일반적인 시각에서 볼 때는 비정상적으로 보인다.

험상 굳게 생긴 사람이나 삐뚤어진 화면, 목이 잘린 여인 등 하나같이 낮 선 풍경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정상과 비정상으로 규정된 고정관념에 대하여 생각하게 만든다.




2017, 서울 금곡동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어느 날 갑자기 보호자에게 떠밀려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었다고 치자.

보호자는 현재 그의 정신상태가 ‘비정상’이기 때문에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끌려 온 환자는 스스로가 정상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의사라도 서로가 주장하는 바가 다를 때 명확하게 구분 짖기는 어려울 것이다.




2016서울 영등포



규정해 놓은 정치나 법이나 사회의 모든 이해관계도 마찬가지다.

거리에 나와 태극기를 휘날리며 시위를 벌이는 극렬 보수단체를 대개 비정상으로 보지만,

그들은 지극히 정상으로 생각한다.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하는 자체가 일반적인 판단으로 규정지어놓은 것으로,

자유롭게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구속하는 하나의 장치일 뿐이다.




2016 부산, 남포동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이 모든 가치기준을 뛰어넘는 가장 중요하고도 추상적인 개념은 '유토피아'다.

한 사람이 갖고 있는 다양한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고 통합되어 최적의 기능을 발휘하는 상태가 정상이라는 것이다.

즉 '나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정상적인 인간일 것이다.




2016 부산, 구포동



정상이 비정상을 지배하는 구조로 인한 소외, 외면, 박탈, 욕망, 갈등 등 사회의 비정상적인 모습을 비추려 한

김동진의 사진들은 뿌리내리지 못하고 부유하는 현대인의 불안과 광기와 욕망을 그만의 어법으로 담아내고 있다.

급박한 현대화로 인간성이 상실되고 급기야는 개인주의로 치닫는 오늘의 슬픈 현실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것이 다큐멘터리사진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아니겠는가?




2016 서울, 광화문광장



부산 경성대에서 사진학 석사학위를 받아 ‘버스 희망공간’ 등 몇 차례의 개인전을 가진바 있는 사진가 김동진씨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버스와 지하철, 열차 등 대중교통으로 도시와 시장, 해변을 누비고 다녔다. 



2016, 부산, 구포동



"삐에로처럼 포장되어 살아가는 사회의 감추어진 이면을 드러내고 싶었으며,

전염병처럼 만연해 있는 비정상에 대한 편견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전시를 본 후, 작가인 김동진씨와 김남진관장 따라 충무로의 어느 식당에 들렸는데,

평소에는, 술 마신 후에나 속풀이로 먹는 맛 없는 북어국이라 생각했으나, 달랐다.

다들 북어국만 시켜 하는 수 없이 따라 시켰는데, 엄청 맛있었다.

만드는 사람의 솜씨나 상황에 따라 바뀌는 것을 음식 자체로 규정지어 온 잘 못된 편견이었다.


오는 14일까지 연장되었으니, 기회가 닿으면 꼭 한 번 보시길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작업 노트]














































2016년 한해 동안 '갤러리브레송'에서 진행한 '이 땅의 고수를 찿아서..'


2018년 03월 12일 (월) 03:02:24    정영신 기자 press@sctoday.co.kr





지난 2016년부터 매달 두 번씩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국내사진가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한 이광수 교수가 한국현대사진가 열 두 명의 작가론을 묶은 ”카메라는 칼이다“를 펴냈다.


중요한 것은 그동안 제대로 된 국내 사진가론이 전무하였다는 사실이다. 평론가들이 외국사진가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반복해가며 거론하였지만, 정작 국내 사진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작품이란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심장을 열어젖히는 것이다.

사진을 무기로 사진에 대한 신화를 깨었다. 장르도 초월하고 경계도 없애고, 패거리도 없애는 대동의 사진세계에서 멋지게 노는

이 땅의 진정한 고수를 찾는 놀이로 시작되었다"고 저자 이광수 교수는 말하고 있다.


'카메라는 칼이다'저자 이광수교수 Ⓒ정영신


사진을 전공하는 교수와 작가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작가들의 작가론이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는 것에 학자로써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역사가 있기에 우리가 존재하듯 각자 자기의 고유한 역사를 지니며 살아가고 있다. 더구나 평생 우리나라 문화와 생활상을 기록해 온 사진가들의 작가론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 '카메라는 칼이다'의 사진가들과 저자인 이광수교수, 갤러리브레송 김남진관장 Ⓒ정영신


다른나라 사진가론은 줄줄 외면서 우리나라작가들이 이 시대를 어떻게 기록해오고 과거의 진실을 어떻게 발견해 왔는지 인식하지 않았다는 것에 통분했다. 사대주의적 발상이 아니었다면 국내 사진가에 대해 아무도 손대지 않았던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현실에 주목하여 이광수 교수가 제일 먼저 손을 댄 것이 최민식 작가론이다.





이광수 교수는 끊임없는 동어반복적인 시간이 응축된 사진 속에 숨겨진 의미를 하나하나 찾아내었고, 그의 예리한 집도에 의해 작가들의 심중에 묻힌 비장의 언어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그는 부산외국어대학교에서 인도사를 연구하는 교수이자 사진비평가로. 사진으로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10여년 넘게 사진비평에 혼신을 쏟아왔다.



▲ 강정효작가의 '유해발굴'



이광수 교수는 “작품이 왜 좋은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떤 맥락에서 나오는 건지 어떤 사회적, 문화적 효과를 내고 있는지 평가를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작가를 대상으로 한 논문을 하나도 찾아내지 못해 작가론을 쓰기시작 했다”고 말했다.



▲ 권철 작가의 '가부키초'


또한 인맥이나 학력등을 배재한 채 50대 이상으로 30년 가까이 고독하게 자기작업만을 고집하는 사진가를 찾아내는 일은 '갤러리브레송' 김남진관장이 맡았다. 그야말로 이 땅에 숨겨진 ‘사진’ 고수를 찾아 소개하는데 꼬박 1년이 걸린 셈이다. '


김남진 관장은 사진가를 찾아내고, 이광수교수는 매달 50매에 달하는 글을 써서 오마이뉴스에 연재하면서 갤러리 브래송기획전 ‘사진인을 찾아서’를 진행한 것이다.



▲ 김문호 작가의 '온더로드'


비평가의 책무는 작품 속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 해석하는 것이다. 허나 우리 사진계에 이렇다 할 작가론 한권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광수교수의 ‘카메라는 칼이다’는 의미가 있는 책으로 사진보는 것을 넘어, 사진을 읽게 함으로써 책에 나온 사진가의 진면목을 독자스스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 김보섭 작가의 '청관'


3부로 구성된 책속으로 들어가 보자. 제1부는 ‘시대와 시간을 기록하다’에 권철, 신동필, 최영진, 강정효작가, 제2부는 ‘사람과 역사를 바라보다’에 조문호, 김보섭, 문진우, 김문호, 이재갑, 이영욱작가, 마지막 제3부에는 존재와 예술을 그리는 파인 아트작가로 고정남과 이수철작가를 논했다.



▲ 문진우 작가의 '내 마음속의 다큐 한 장'


‘독대’의 권철사진가는 “도꼬다이.... ‘홀로’의 의미가 강해 사진가 권철을 일컫는 말로 이보다 더 정확한 것은 없다”고 쓰고, 이어 신동필작가를 논하면서 “신동필의 역사는 민족의 역사다. 그는 투사로서 민족, 자주, 반미, 통일의 도도한 물결을 거스리지도, 시비 걸지도 않고 대의를 따라 함께 걸었다”고 평하고, 최영진작가론은 “그대로 그렇게 그 모태를 재현하고 있다며, 죽어 말라 버린 물고기 한 마리 이미지가 쉬 사라지지 않는다. 노자가 말하고 최영진이 따르는 자연의 미와 추에 대해 생각한다” 고 했다.



▲ 신동필작가의 '또 다른 가족'


풍경, 민속 그리고 역사를 담은 강정효는 “유채꽃 노란 물결에 배어 있는 농민들의 땀을 읽어 주십사 하는 목소리를 낸다. 강정효는 제주의 모든 것을 담되, 그 안에 사람이 우선되는 세상에 대한 염원을 담았다”고 했다.



▲ 이수철작가의 '화몽중경'


인본을 이야기하는 조문호작가는 “사람을 존중하고 사람을 섬기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사진가라며 조문호에게 이말보다 더 잘 묘사할 수 있는 말을 나는 찾지 못했다”고 해석했다. 오브제로 기록하는 감성적 민족지를 보여준 김보섭 작가는 “그는 사라져 가는 세계를 당당하고 아름답게 본다. 그 위에서 그가 만든 포토제닉한 이미지는 감성으로서 독자들이 과거를 스스로 재구성할 수 있는 여지를 더 크게 열어 젖힌다”고 쓰고 있다.



▲ 이영욱작가의 '자유공원'


카메라불사 카메라 40년의 문진우 작가는 “사진의 작품성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바로 오래됨에 있다며 찍어놓고 보면 시간이 흐르고, 그 사이에 오래됨이 생긴다. 누구든, 그 오래된 사진에 끌리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 기준이 무엇인지 나만 혼자 바보가 되네’의 김문호 작가는 “세계와 역사에 대한 고민이 많고, 사유가 깊은 다큐사진가일수록 그 재현 방식의 이동 폭 이 넓다. 김문호 작가가 그 대표적인 사진가다”고 작가론을 펼쳤다.



▲ 이재갑작가의 '무대 뒤의 차가운 풍경'


“아픈 역사를 이면과 기억으로 엮는 서사시”의 이재갑작가는 “기록할 수 없는 그렇다고 토해낼 수도 없는 트라우마를 잊기 위해 기억해야 하는 것, 이 기억에 대한 담론을 사진으로 작업한다”고 평했다.


사진으로 사진에 대한 신화를 깨다의 이영욱 작가는 “이영욱 사진은 기록에 대해 시비를 거는 메타기록이다. 경험에 대한 기록이 아니고, 해석에 의한 기록이 아닌, 세계본질에 대한 기록이다”고 쓰고 있다.



▲ 최영진작가의 '서해안'


‘끊임없는 기억의 흐름에 정해진 것은 없다’의 고정남작가는 “답도 없고, 옳고 그른 것도 없고, 가치와 의미로 된 규정도 없고, 모두가 있는 작은 곳곳의 자리에서 나 자신만의 세상을 누벼보는 것이다. 사진은 찍는 이의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보고 나누는 이의 것이기도 하다”고 썼다.


마지막으로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레퀴엠’의 이수철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때로는 합성을 통해, 때로는 덧칠을 통해, 때로는 타 매체와의 협업을 통해 그는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 레퀴엠을 바친다”고 논했다.


▲ 조문호작가의 '동자동 노숙인'



카메라는 칼이다’의 저자 이광수교수는 “기계가 만들어내는 사진의 역사가 180년 가까이 지난 지금, 하늘 아래 새로운 사진이라는 게 과연 존재하겠는가? 사진이 어떤 용도로 쓰일지라도 모든 경우에 통용되는 가치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오래됨’이라고 했다.


이 땅에서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면 숨어있는 현대사진가 12명의 작가론을 해석하고 비평한 이광수교수의 ‘카메라는 칼이다’ 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충무로에 자주 가지만, 맛 집들이 몰려있는 인현시장(仁峴市場)은 미처 생각 못했다.
인현시장은 50년대 말엽에서 60년대 초까지 만들어진 시장으로, 5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단다.
그 이전은 잘 모르지만, 영화거리와 인쇄골목으로 알려진 충무로 뒷골목이라, 현재와 과거가 함께 하는 장터풍경을 연출한다.






인현시장의 골목 폭 은 1-2m정도로 좁지만 길이는 2백미터  남짓되는 곳에 100개가 넘는 점포가 밀집해 있다.

숨겨진 맛 집이 많은데다 가격까지 저렴하니, 인근의 인쇄공이나 가난한 장사꾼들이 많이 이용하는데,
그 오밀조밀 붙어있는 밥집의 정취가 서민적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지난 18일 충무로 ‘반도갤러리’에서 열리는 조성기사진전에 간 김에, 

 ‘브레송’에서 열리는 고정남씨의 ‘우리는 예술가(0)사’전에도 들렸다.
‘갤러리 브레송’ 홈피 만드느라 늦은 시간까지 고생하는 김남진관장은 만날 수 있었다.
난 이미 취했지만, 술 한 잔하자는 김관장 따라나섰다.






어딘지도 모르며 따라 가다보니, 30여년 전 김문호씨와 함께 사무실로 쓰던 충무로 ‘카메라워크’ 이층집도 보였고,
참치백반집과 된장집 등 안면있는 식당들이 하나 하나 나오더니, 평소 시장이라 생각지도 못한 인현시장 골목을 만난 것이다.
김남진씨 단골집을 찾아가 앉았으나, 난 더 마실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마시도록 놔두고 난 시장이나 돌아보았다. 






내가 없다고 마누라 뺏길 일은 아니니, 마음 편하게 돌아다니며 오랜 추억자락이나 뒤진 것이다.
진화된 세상 풍경속에는, 원초적인 것을 자극하는 것들이 족쇄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이 곳은 인사동 못지않게 많은 추억이 남아있는 곳이다.

충무로에 사무실을 두기도 했지만, 한 때 근무한 '월간사진'사무실도 인현동에 있지 않았던가.

근일간에 다시 인현시장에 들려, 못다한 술도 마시고 노래도 한 곡 부를란다.



사진, 글 / 조문호























이 삭막하고 추운 세상에, 따스한 봄 내 살살 풍기는 사진전 하나 열리고 있다.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리는 양승우 마오 부부의
행복한 사진일기 ‘꽃은 봄에만 피지 않는다’다.







지난 16일 사진전 열림식에 갔는데, 전시장을 마치 화사한 신방처럼 꾸며놓았더라.
양승우씨가 직접 나서, 연분홍 빛깔로 전시장을 다시 단장 했단다.
전시장 입구 사진에는 아내를 알고 처음으로 벚꽃이 아름답게 보였다는
사진가 양승우의 청춘고백도 적혀 있었다.







찍은 사람도 좋지만, 사진들이 너무 좋았다.
사랑, 사랑, 사랑, 쉼 없이 말들은 하지만, 이보다 구체적인 사랑은 없다.
백 마디의 미사여구나 수많은 사랑의 시들도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랑의 장난기가 하나도 정제되지 않은 채, 살아 날 것으로 꿈틀거렸다.
계산하지 않고, 그냥 둘이서 사랑하며 놀며 찍은 것이다.







사진으로 남기는 기록은 놀이에 가깝다는 사진비평가 이광수교수의 글을 옮겨왔다.


“지금 하는 이 전시는 바로 신혼 생활 첫 3년 핑크빛 나날에 대한 기록이다.

그렇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건 기록이 아니고 놀이의 흔적이다.

사랑놀이, 이 세상 그 어느 것보다 가슴 떨리고 가슴 저미는 그 사랑놀이 말이다.

사진은 이런 게 좋다. 글같이 무겁지 않아, 가벼워서 좋다.

굳이 예술의 창의성을 쥐어짜면서 작품의 경지에 올라간 것들도 있으나

이렇게 둘이 놀면서 가볍게 찍다가 예술의 경지에 올라간 것도 있다.

이건 사진으로만 닿을 수 있는 작품의 경지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와 놀면서 안고 만지고 찍어주는 것 이보다 더 아름다운 예술이 과연 있을까?

사랑보다 더 아름다운 예술이 있냐?“고 묻기도 했다.







사진가 김문호씨는 전시를 보고나서 가슴 한켠에 늘 남아있는 그리움을 뒤챘다며,

“수채화로 그려낸 쌉싸름한 단편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은 느낌...

잘 다듬어진 일본의 하이쿠 한 수를 읽는 것 같은 담백함..”이라 적고 있다.







이런 저런 가식 없이 살아가는 해맑은 모습 속에 눈에 띄는 풍경 사진 한 장 있었다.
담장 밖으로 붉은 꽃들이 떨어진 장면인데, 많은 이야기가 담긴 담백한 시처럼 느껴졌다.

양승우는 “결혼을 하면서 동시에 인생의 꽃은 다 떨어진다”고 말했다.

사진 한 장으로 사랑을 다 담았으니, 이게 시가 아니고 뭐겠는가?

삶의 소소한 아름다움에서 찾은 가치라 여운이 길었다.






그날 열림식에 너무 늦게 갔더니, 전시장에는 양승우, 마오 부부를 비롯하여

김남진관장과 정영신, 곽명우씨 등 몇 분만 남아 있어, 사진들은 꼼꼼히 볼 수 있었다.





뒤풀이에서 눈빛출판사 이규상, 사진비평가 이광수, 사진가 김문호, 김보섭, 엄상빈, 정진호,

이정환, 석재현, 성남훈, 박찬호, 고정남, 남 준, 한금선, 최근모, 박신흥, 안세홍, 안해룡씨 등

많은 사진인들을 만나 두 내외의 알콩달콩 깨 쏟아지는 사진전을 축하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이 사진전은 25일까지 갤러리 브레송(02-2269-2613)에서 열린다.
‘눈빛출판사’에서 양승우 마오 부부의 행복한 일기 “꽃은 봄에만 피지 않는다” 사진집(156쪽 / 값 23,000원)도 출판되었다





사진가 양승우 마오부부 /사진 정영신






























































사진 / 김문호

























































충무로에 있는 사진전문갤러리 ‘브레송’에서 색다른 전시 하나 열렸다.

바로, 화가 김기호씨와 사진가 권 홍씨가 보여 준 암울한 시대의 초상이다.
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두 사람의 작품들은 많은 여운을 남기게 했다.
어디로 갈지 모를 표류하는 배처럼, 막막한 현실을 말했다.

다들, 카메라와 연필이라는 도구만 달랐을 뿐이지,
오늘의 시국을 안타까이 바라보는 기록이고, 하나의 시어였다,
직설적인 표현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김기호씨의 드로잉 작업은 현실을 우화적으로 꼬집었고.
권홍의 사진은 다중노출이나 팬닝기법으로 현실을 비껴가며,
아픈 기억들을 끌어내고 있었다.

또 다른 ‘시대의 기록 전’ 이었다.






이인전에 부쳐 송효섭씨가 쓴 글의 일부를 옮긴다.

“김기호는 주로 연필로 한 드로잉 작업을 보여준다. 작은 화면에 매일 떠오르는 생각들을 그 때 그때 그린 것들이다. 드로잉은 모든 조형작업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는 무한한 미래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드로잉을 보는 재미는 미완결 된 것처럼 보이는 작업 앞에서 앞으로 펼쳐진 수많은 조형적 가능성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따라서 드로잉은 그 자체로 ‘날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나친 가공을 거치지 않은 날 것의 상태는 전문적인 기법이나 기교 이전의 것으로 삶의 진실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작가는 지금의 기록이다”라고 외치는 드로잉 작품은 마치 시절인 으로서의 자기선언처럼 보인다. 그의 작업에 등장하는 일상적 사물들은 그가 살고 있는 현재 속에서 교묘하게 뒤틀려 제시된다.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많은 것을 말하는 방식이 바로 이것이다.


권홍은 사진작업을 보여준다. 일상생활 속에서 포착된 형상들을 단지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그 때 그 때 떠오른 정서에 따라 적절히 가공한다. 그가 자주 사용하는 다중노출의 패닝기법은 있는 그대로의 형상에 마치 수묵과도 같은 번짐과 모호함을 주어, 시간 속에서의 기억을 축적시키는 역할을 한다. 하나의 풍경은 지금의 풍경이기도하고, 또한 바로 이전의 풍경이기도 하다. 우리의 느낌이 시간의 기억을 토대로 하듯, 권홍의 사진에서 드러나는 형상은 이러한 기억을 불러일으켜 현재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 촛불광장을 그려내는 방식 도한 사실적 제시를 목적으로 한 다큐멘터리가 아닌, 그것에 대한 공감을 표현하는 주관적이고 정서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광장의 촛불은 시절인으로 그가 경험한 매우 사적인 것이며, 그래서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이들 두 작가가 격변의 시대를 사는 시절 인으로서의 삶의 체험을 각기 다른 매체를 통해 담담하게 그려낸다. 

시절 인으로서의 관객이 이들 작업을 통해 예술적 열락에 쉽사리 감염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지난 5일 오후6시 ‘브레송’에서 열린 개막식 풍경은 평소와 사뭇 달랐다.
전시 축하객들의 면면이 사진하는 분에서 미술인으로 바뀐 것이다.
내가 아는 사진가로는 전시작가와 김남진 관장, 박영환씨 밖에 보이지 않았고, 대부분 안면 있는 화가들이었다.
장경호씨를 비롯하여 배인석, 천호석, 이재민, 최석태, 김영중, 송효섭, 양상용, 탁영호, 정영철, 이승완,

변대섭, 이원석, 최연택, 강기욱, 안창길씨가 보였고, 정동용 시인도 왔었다.

그리고, 다른 일에 빠져 개막식에서 찍은 사진을 그동안 깜빡 잊고 있었다
뒤늦게 올리게 되었는데, 지인이나 전시 보실 분들은 서둘러야겠다.

이번 토요일(14일)에 끝나는 ‘빛과 선으로 시절을 그리다’를 잊지 마시라.

사진,글 / 조문호









































































 

지난 11월24일 오후1시 무렵, ‘갤러리 브레송’으로 이광수교수를 만나러 갔다.
사흘 전, 김문호씨의 ‘사진인을 찾아서’기획전 개막식에서,

김남진관장이 나를 마지막 작가로 지목해 인터뷰 하러 올라 오셨는데, 송구스럽기 그지없었다.
길바닥에 돈 뿌려가며, 연이은 서울 나들이를 하셨는데, 미처 인터뷰에 필요한 사진 파일을 보내드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갑작스런 전시 결정에 정신을 못 차려, 사진을 선택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약속장소인 ‘갤러리 브레송’에 갔더니, 전시중인 사진가 김문호씨와 ‘한겨레‘ 곽윤섭기자도 나와 있었고,
뒤늦게는 울산의 산신령이란 분이 나타나서, ‘사진에게 위로받다’라는 사진집도 한 권 주었다,

이광수교수께서 여러 가지 물어보았으나, 사진보다 살아 온 내력을 주로 물었다.
그동안 어떠한 사진을 찍은 것이야 대략 알겠지만, 자료가 없으니 사진에 대하여 물어 볼 수가 없었던 게다.
그러면 나라도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 주어야 할텐데,

술 마시지 않으면 주변머리가 없어 꾸어다 놓은 보리쌀자루처럼 가만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인터뷰에서 상대방을 김빠지게 만들 때가 종종 있는데, 특히 방송사의 인터뷰 요청은 지레 겁먹어, 가급적 사양한다.

아무튼, 이 선생께서 널리 양해하시어, 매서운 비판으로 꾸짖어 주었으면 좋겠다.
대신, 글 쓰다 의문점이 생길 땐 연락주시면, 충실히 답해 드리겠다.

그리고, 한 가지 자문 받고 싶은 것도 있다.
전시제목을 ‘사람중심’으로 생각하다, “人本主義‘로 바꾸려는데, 선생께서 생각하는 적절한 제목은 없으신지?
그리고 김관장 께서는 사진들을 이 것 저 것 다 걸고 싶어 하지만, 모든 걸 정영신씨께 일임해 버렸다.
그러나 나름으로 최선은 다할 작정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사진인을 찾아서 ⑨] 이수철론 -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레퀴엠


글 / 이광수 (사진비평가)

사진가 이수철은 일본에서 사진을 배웠다. 일본에서 사진을 배울 때 그는 '순수' 사진이라는 모순으로 가득한 어휘의 사진 범주를 전공했다. 왜 굳이 '순수'라는 말을 쓸까? 그 상대적 개념은 불순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 '순수'란 사회적 메시지나 시대 정신을 담지 않는 예술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시대의 불온함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지사적인 행위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그 안에 담겨 있다.

그 '순수' 사진을 일본에서 배워 귀국한 그가 처음 작품을 발표한 것이 1998년의 일이고, 그가 잡은 주제는 기억이었다.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거시사의 종말을 공공연히 말하던 것이 무르익을 때, 개인과 복합과 감성이 인간 세계의 중심 화두로 떠오를 때 그 때의 일이다. 사진가는 이후 꾸준히 사진에 대한 이러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사진을 그 자체의 본질을 갖지 않는 한낱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도구론적 입장으로 생각한다면, 문제는 그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된다면 사진의 존재론적 범주의 최후의 조건인 뭔가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 대상을 찍는 것이 사진이다, 라는 전제조차 허물 수 있다.

카메라로 대상을 찍어 필름에 담고 그것을 인화하는 것이 보통의 프로세스라면, 카메라와 필름이 없이 바로 인화로 들어가 버리는 것도 사진 프로세스 중의 하나가 된 것이 1924년의 일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아예 뭔가를 찍지 않아도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고, 그 창조된 이미지로 뭔가 작가만의 방식으로 말 하고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예술의 한 방식 아니냐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그 질문을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건 매우 궁색하다. 고작 할 수 있는 것은, 그렇다면 과연 그것이 사진이냐, 정도이지 않을까. 그렇다. 그것이 무엇이든 개의치 않는다. 그것이 포토그라피(photography)면 어떻고, 그것이 이미지그라프(imagegraph)면 어떻고, 그것이 디지그라프(digigraph)면 어떠냐? 사진가 이수철에게 카메라는 현상을 포착하는 메커니즘의 하나일 뿐이다.

1. 디지그라프 : 저작권도 없고 장르 구분도 없는 세계



Hello Thomos-4 archival pigment print (2007)ⓒ 이수철

The Space for Renovation-1 archival pigment print (2007)ⓒ 이수철


The Space for Renovation-3 archival pigment print (2007)ⓒ 이수철


The Space for Renovation-4 archival pigment print (2007)ⓒ 이수철



사진가 이수철이 2008년에 연 <환상의 에피파니>전은 사진에 관한 몇 가지 통념을 깬다. 우선 남의 것을 훔쳐오는 것에 대해 당당함을 부르짖는 것이다. 이수철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진가 토마스 루프의 사진을 스캔해서 베껴 와 자신의 작품에서 다른 의도로 사용해버렸다. <환상의 에피파니>다.

그가 토마스 루프의 별을 가져온 이유는 비단 그가 말 한 바, 사랑하는 딸에게 아빠의 어렸을 적 추억이 담긴 그 별 헤는 밤, 그 꿈의 세계를 보여주고 싶은 것만은 아니다. 작가로서 사진의 존재 담론에 대한 도발을 시도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토마스 루프의 별을 베껴 왔지만, 사실은 토마스 루프 또한 어느 천문대 대원이 우주 관측용 망원 카메라로 찍은 천문 자료 사진을 가져와 사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있는 대상을 그대로 찍어 놓은 것을 이리 사용하고 저리 사용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자연에 존재하는 돌과 나무와 흙을 이리 배치하고 저리 배치해서 작품을 만드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저작권에 대한 강력한 도발이다. 그 안에서 조작이나 왜곡은 기존의 근대적 개념을 넘은 하나의 창조적 예술 행위가 된다.

사진가 이수철이 토마스 루프의 사진을 무단으로 가져와 자기 마음대로 사용함으로써 던진 도발은 단지 저작권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사진의 성격상 또 다른 맥락에서도 중요하게 생각할 점이 있다.

전유다. 전유는 존재의 성격이 그것이 처한 위치에 따라 달라짐을 말하는 것이다. 본질도 없지만, 실존이라는 개념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원래의 별 사진은 문자 그대로 다큐멘트다.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은 사물에 대한 본인의 시각이나 재현의 의사를 전혀 갖지 않는 것으로 마치 물이나 거울이 하듯 사물의 반영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무미건조한 과학의 산물이다.

그렇지만 그 이미지가 다른 위치에 전유되면, 그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원래 가졌던 성격은 무시하고 그것을 자기 마음대로 바꿔 사용하는 사람의 뜻대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때 원 저자의 허가는 필요 없다. 원래는 자료 사진이었던 것이 토마스 루프에 의해 흑과 백과 점들로 구성된 조형적 예술 사진으로 갔다. 그것을 이수철이 사랑하는 딸을 위한 아름다운 밤하늘 풍경 사진으로 만들어버렸다. 장르의 경계를 넘는 포토그라피에 대한 고민의 산물이다.


기억의 풍경-red archival pigment print (2006)ⓒ 이수철

기억의 풍경 industrial complex-4 archival pigment print (2006)ⓒ 이수철

기억의 풍경 industrial complex-3 archival pigment print (2006)ⓒ 이수철


<환상의 에피파니>나 그보다 먼저 발표되었던 <기억의 풍경>은 모두 복합 생성물이다.  <환상의 에피파니>의 경우, 각각의 이미지에서 아래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미지 즉 다리나 들판 등은 모두 사진가가 직접 찍은 것이다. 카메라에 의한 전형적인 생산 방식에 의한 것이다. 거기에 독일 사진가 토마스 루프의 별을 무단으로 가져와 합성시켰다.

그런데 합성은 카메라나 필름 등 전통적 사진의 메커니즘을 통해 한 것이 아니고,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했다.  카메라로 시작했지만 컴퓨터로 완성한 것이다. 이런 생산물을 무엇으로 규정할 것인가? 카메라가 종이 되고 컴퓨터가 주가 되어 만들어낸 그 이미지를 포토그라피 혹은 사진이라 부르지 않을 방도는 없다.

후보정이 종이 아닌 주가 된 것은 <기억의 풍경>에서 더 잘 드러난다. 대상을 정하고 그것을 촬영한 것이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하는 기록적 성격이 강한 사진이라면 그것에 후보정을 통해 색을 입히거나 톤을 바꿔 만들어내는 것은 예술적 성격이 강한 사진이다. 후보정이 보정이 아니고, 본 공정이 되는 것이다.

결국 사진가 이수철에게 사진이란 찍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선 작업보다 후 작업이 더 우선이 된다면, 있는 대상을 찍어내는 것이 아니고, 없는 것을 프로그램으로 만들어낸다면 그것이 포토그라피이지만, 그 범주를 넘어선 것이라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결국, 사진 후(後)적 존재 포스트 포토그라피라고나 할 수 있을까?

상황이 이렇더라도 사진가 이수철이 갖는 포스트 포토그라피에 대한 철학은 분명하다. 사진을 만들어내는 것이 비록 컴퓨터라는 기술일지라도, 자신의 그 사진이 기술의 현란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되면 안 된다. 기술이란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 사용 목적은 개인의 감성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사진은 말하기 방식의 차원에서 볼 때 지금까지 사진이 취해온 기존의 방식과 동일하다. 사실 혹은 리얼리티를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닌, 이미지가 주는 어떤 느낌을 주려 하는 전통적 예술 방식 그대로다.

2. 전유 : 개인 감성을 위한 미시 이미지의 세계


<화몽중경> Over the Dream - 1ⓒ 이수철

<화몽중경> The Last Lady-1ⓒ 이수철

<화몽중경> The Last Lady-2ⓒ 이수철

<화몽중경> 신데렐라 나를 찾아 나서다-1ⓒ 이수철



사진가 이수철의 <화몽중경(畵夢中景)>은 문자 그대로 꿈속 풍경을 그린 것이다. 물론 그린 것도 아니고 꿈속 풍경도 아니다. 현실을 카메라로 찍되 꿈속 풍경처럼 찍은 것이다. 컴퓨터로 작업한 것이 아닌 필름을 사용한 스트레이트 사진이다.

사진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 눈에는 마치 미니어처를 찍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을 미리 세팅해놓고 4"x5" 카메라로 초점을 조절해 몽환적인 분위기가 나도록 촬영한 사진들이다. 역시 기억 혹은 꿈에 관한 이야기다.

<환상의 에피파니>가 사진가가 속한 그 세대가 보았던 과거를 딸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존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기억 즉 집단의 기억으로서의 꿈이었다면, <화몽중경>은 사진가라는 한 개인이 경험했던 혹은 경험한 것으로 여기는 지극히 사적인 꿈이다. 내러티브가 있는 사진임에는 분명하지만 작가의 의도는 그 내러티브를 정하지 않은 것임에 틀림없다. 그가 들려주고자 하는 것은 정해진 이야기에서 특정 메시지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고, 기억이 잘 나지 않은 세계로 돌아가 마치 물고기가 유영하듯 자유롭게 해석하고 느끼기를 바랄 것이기 때문이다.

<화몽중경>은 작가가 2000년 중반 독일의 유형학 사진에 푹 빠졌을 때 그로부터 빠져 나오면서 새롭게 시도한 작품이다. 전작에서 디지털 작업을 통해 포스트 포토그라피를 보여줬다면, 이번에는 다시 필름으로 돌아가되, 전통적인 스타일이 아닌 새로운 스타일을 찾아보고자 하는 작업이다. 식상함이라는 것은 싫다. 남들이 다 하는 것은 아무리 메시지가 좋아도 따라가기 싫다.

<환상의 에피파니>가 특별한 내러티브가 없는 유형학적 사진으로 토마스 루프의 사진들을 닮았다면 <화몽중경>은 일정한 내러티브를 미리 설정하고 장면을 세팅해서 찍었다는 차원에서 그가 좋아하는 또 다른 사진가 샌디 스코글런드의 사진들을 닮았다. 그렇다고 해서 <화몽중경>이 스코글런드가 보여주는 일련의 사진과 같이 사회적 메시지를 강하게 담고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스코글런드는 환경이나 여성 등 사회 문제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만 이수철은 그런 목소리를 내려 하지 않는다.

스코글런드가 사회를 말할 때 이수철은 개인을 말하고, 스코글런드가 이성을 말 할 때 그는 감성을 말한다. 다만 그는 스코글런드가 견지하는 실체보다는 이미지, 실존의 세계보다는 가상의 세계를 더 소중하게 여길 뿐이다.

3. 크로스오버 : 넘나들기가 일어나는 무경계의 세계

인천여자 #02ⓒ 이수철

인천여자 #03ⓒ 이수철

인천여자 #05ⓒ 이수철

인천여자 #12ⓒ 이수철



사진가 이수철은 한 때 상업 사진을 했다. 그러다가 컴퓨터로 하는 디지털 예술 사진으로 바꿨다. 그러다가 다시 필름 작업을 했다. 그렇게 오는 동안 그는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메시지로 담은 작업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두지 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작업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이 하나 있다.  <인천 여자>다. 이 작업은 현재로서는 유일하게 이미지보다는 사회적 의미에 방점을 찍은 사진이다.  <인천 여자>는 연극 연출가이자 배우인 윤사비나를 모델로 해서 제작한 작업이다. 인천 여자라 말하지만, 인천의 여자를 말하는 것이 아닌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상업적 틀에 맞추어 외형과 내면까지도 지배당하는 현실' 속의 여성을 말하는 것이다.

윤사비나씨는 전신탈모를 동반한 자가면역결핍이라는 희소병을 20대 초반부터 앓아오면서, 희소병, 그에 대한 사회의 편견, 연극에 대한 애착과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여성스러움'이라는 넓은 의미에서의 여성 혐오와 맞서 싸워 온 사람이다. 인천문화재단과 선광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진행해 온 이 작업은 먹고 살아야 하는 사진가로서 피할 수 없는 프로젝트 수주를 통해 제작한 작업이다.

그렇지만 그러하다고 해서 주문자의 뜻을 받들어 작업한 영혼 없는 제품 생산은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해 온 이미지를 위한 감성의 환상곡으로서의 사진이 아닌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2008년에 발표한 <Architectural Photography>는 미완의 작품이다.

세콤이 된 건물ⓒ 이수철

피닉스모텔ⓒ 이수철

정체불명ⓒ 이수철



엄밀하게 말하면 완성했다고 해서 발표하였는데, 전시를 하는 동안 그 완성도에 대해 불만을 가져 스스로 미완을 선언한 작품이다. 지금까지 해 온 동안 줄기차게 이어 온 잊혀 져 간 것들에 대한 기억에 대한 작품이다.

작업의 대상은 이런 저런 여러 사연으로 건축물로서의 생명을 끝내고 죽어버린 그러나 여전히 눈앞에 존재하는 우리가 사는 집이다. 사람이 사는 집, 사람이 살기 위해 지은 집 그러나 버림받아 폐기 되어버린 그 집은 흉물스럽다. 버려지고 잊혀 졌으니 흉물스러운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숨을 거두고 생명을 다 한 채 몸뚱아리만 살아 있는 사람들 눈앞에 덩그렇게 남겨 둔 형상과 같다.

사진가는 우선 그 버림받은 집들을 반듯하게 위치시킨다. 아니, 조금 더 나아가 프레임의 정 중앙에 폼 나게 위치시킨다. 그리고 잡아 낸 그 이미지 위에 화사하게 색칠을 해줬다. 사라져 가 버렸던 것들에 대한 예우다. 타키타 요지로 감독이 만든 일본 영화 <굿바이 (Departure)>에서 장의사 주인공이 죽은 사람을 곱게,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예쁘게 화장을 해주는 장면이 떠오르는 일이다.

사진가가 택한 대상은 한 때나마 하나같이 웅장하고 세련되고 멋졌던 건물이다. 중요한 것은 사실을 보여주고 함이 아니고 말하고자 함이다. 사진가 이수철은 그 형식이 어떻든 간에, 그 경계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괘념치 않는다. 예술가는 하고 싶은 말을 할 뿐이다. 요란하지 않는 경계 넘나들기다.

상상외 風景-1ⓒ 이수철



사진가 이수철이 해 온 경계 넘나들기의 대표작은 화가 조미영과 협업한 <상상 外(외) 풍경>이다. 사진가가 찍은 이미지에 화가가 깃털을 그려 넣어 사진과 회화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매체를 통해 존재하지 않은 풍경을 상상으로 만든 콜라보 작업이다.

사진가 이수철은 물질의 세계에서 얻은 구체적 풍경을 이미지로 만들어냈고, 화가는 그 위에 가벼운, 그래서 언제 어디서고 간에 그 존재를 무시하고, 망각해 버리는 것을 상징하는 깃털 하나를 그려 넣는다. 이는 더 이상 살아 있지 않는 모든 사라져 간 것들에 대해 부르는 레퀴엠이다.

글이든 사진이든 그것으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모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아니, '사실 그대로'라고 하는 개념은 그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세계는 그 자체가 불립문자일 수 있다. 세계는 이미지로 구성되고 이미지로 소통된다. 그것이 비현실이 지배하는 현실의 세계다. 그 안에서 사진은 결국 왜곡이고 '거짓말'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조금 더 아니 좀 더 적극적으로 왜곡하고 '거짓말'로 말하게 한다는 것이 하등에 이상할 것은 없지 않은가. 사진가 이수철이 사진으로 말하고자 하는 사진의 방식이 바로 여기에 있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때로는 합성을 통해, 때로는 덧칠을 통해, 때로는 타 매체와의 협업을 통해 그는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해 레퀴엠(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미사 음악)을 바친다. 그가 노래하는 존재에 대한 노래는 그가 자유롭게 넘나드는 포스트 모던 세계의 전유 안에서 불러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무궁무진한 이미지의 세계를 맛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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