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국제사진제’가 탄생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7회를 맞았다.


강원도 정선에 집이 있는 덕에 사진제가 열리는 여름이면 오며 가며 빠지지 않고 관람하는 호사를 누려왔다.

개막식은 못 들린 때가 더 많았으나, 공교롭게도 참석했던 두 차례나 비가 왔다는 사실도 특이하다.



    

 

동강사진제는 영월 사진박물관 건립을 추진한 다큐멘터리 사진가 윤주영씨의 공로가 크다.

강원도지사였던 김진선씨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성사되었는데, 음엔 다큐멘터리사진축제로 시작되었으나,

김승곤씨에서 김영수, 이재구씨로 운영위원장이 바뀌면서 그 구분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올해 동강국제사진제의 핵심은 인간성 회복이 아닌가 생각된다.

동강사진상을 수상한 황규태선생의 묵시록 그 이후전은 인간성을 상실한 현실에 대한 문명비판적 작품이었다.

오늘을 돌아보며, 사람답게 사는 방법에 고민하게 했다.

사랑의 시대라는 국제 주제전은 사랑이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동강사진상 수상자전, 황규태, Usherette


 

현대사진의 경향을 보여주는 국제 주제전은 10개국 13명의 사진가가 참여했다,

특유의 시적 표현력을 보인 미국 사진가 알렉 소스의 초기작인 사랑을 찾아서와 리처드 레날디의 낯선이와의 접촉’,

이탈리아 파올로 벤츄라의 여행가방 속의 남자 2’야나 로마노바의 '기다림'등이 돋보였다.



국제주제전, 야나 로마노바, 기다림


 

또한, 전 세계 사진작가들을 대상으로 공모한 국제 공모전 '올해의 작가'는 캐나다의 천 화 캐서린 동이 선정되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생전에 어머니와 친하게 지냈던 인물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모습과 함께 기록했다.



국제공모전- 올해의 작가상, 천 화 캐서린 동, 어머니

    

 

그리고 동강국제사진제의 또 하나 볼거리는 영월군의 주요 거리를 갤러리로 변신시키는 '거리 설치전'이다.

이는 공공미술 개념의 전시로 거리의 벽이나 계단에 설치되는데,

올해는 꿈과 희망의 영월이라는 주제로 단종과 정순왕후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었다.



거리설치전, 송석우, 장릉 정자각

    


이번에 어렵사리 개막식에 참석한 것도 황규태 선생의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서인데,

수상전을 돌아보며 선생의 저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선생께서 국내에서 사진 상 한 번 받은 적이 없다는 점이 믿기지 않았다.

국내외적으로 알려진 유명세나 작품 가격 형성도 만만찮다.

우리나라 사진사에 끼친 영향도 무시하지 못하지만, 꾸준히 문제작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불공정하고 편파적인 사진상의 실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전시장의 황규태선생

 


먼저 우리나라 사진상의 선례부터 한 번 돌아보자.

숱한 잡음을 일으키다 없어져버린 '최민식사진상'은 포토포트폴리오 심사로 결정했으니, 더 이상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

지금은 없어져 유명무실한 상이되었지만, 그 당시 유명세 위주로 준 대표적인 상이 현대칼라에서 시상한 현대문화사진상

뒤 따라 ‘사진예술에서 시상한 이명동사진상을 꼽을 수 있겠다.

지금은 대한사협의 '이해선사진상', ‘대한항공조양호가 주는 '일우사진상',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의 모임에서 주는

온빛사진상등 여러 사진상이 있으나, 당시로서는 현대문화사진상’과 그뒤에 생긴 이명동사진상’이 주요 사진상이었.

문제는 현대문화사진상이나 이명동사진상의 역대 수상자를 보면 마치 순번을 정해 놓은 듯 비슷 비슷하게 받았다는 사실이다.

중견작가는 끼일 수도 없을 정도로 누군가 조종하는 막강한 힘이 느껴지는 그런 사진상이었다.


    

 



그러나 ‘동강사진상은 좀 달랐다. 처음부터 원로보다 중견작가 위주로 주었는데,

눈여겨 볼 것은 공교롭게도 육명심선생 직계제자인 최광호씨와 이갑철씨가 1-2회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점이다.

그 많은 작가 중에 두 사람이 먼저 발탁된 것이 우연치고는 좀 그랬다.

사진이 좋아 그렇겠지!”라고 판단하기엔 미심쩍은 부분도 있었다.



 


그리고 3-4회는 갑자기 원로인 김기찬씨와 최민식씨로 수상 세대가 바뀐 것이다.

두 분 다 충분히 받고도 남을 분이지만, 갑자기 원로 위주의 수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닌지 우려했으나, 그렇지는 않았다.

5회부터 성남훈, 김아타, 강홍구, 이상일, 강용석, 오형근, 노순택, 이정진, 구본창, 정주하, 김옥선, 정동석씨가 차례로 받아

몇몇 사람이 좌지우지한 예전의 사진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기로는 함량미달의 작가도 더러있었지만, 딱 부러지게 자격 규정해둔 것도 없으니 시비 걸 수 없었다.

누가 심사를 해도 가까운 분을 주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겠으나, 수상에 대한 뚜렷한 명분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더 아쉬운 것은 힘을 실어주어야 할 신진작가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지금은 신진작가도 아니지만, 그나마 노순택씨 정도로 위안할 수 있겠다.



 


그런데, 갑자기 원로사진가 황규태 선생께서 받게되어 좀 의아 했는데,

행여 뒷방에 계신 원로사진가들이 욕심 내지 않을까 염려되어서다.

물론, 황규태 선생처럼 눈부신 성과를 보이는 현역이라면 쌍수로 환영하겠지만,

이제 관록으로 주는 상으로 돌아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상이란 그때 그때의 문제 작가에게 주어져 창작활동을 돕는 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개막식에는 만나기 껄끄로운 사진가들이 많아 맨 뒷자리 구석에 혼자 앉았는데, 갑자기 육명심선생께서 옆자리로 오신 것이다.

모처럼 만나 뵈어 반갑기는 했으나, 최민식사진상의 문제점을 까발린 죄로 뵐 면목이 없어 만나뵙기 꺼렸던 것도 사실이다.

그 사건에 직계제자인 최광호씨가 수상자로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런 저런 말씀을 듣고 있는 중에 그만 시상식이 끝나버린 것이다.

다들 개막식 테이프 커팅을 위에 앞으로 나가고 있어 황급히 일어나야 했다.

황규태선생 수상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 기다렸으나, 그만 놓쳐버린 것이다.



 


그런데, 개막식이 끝나고 커피숍에서 만난 황규태선생께서 상금을 주최 측에 기증하셨다는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물론 사진계 발전을 위해 내 놓은 선생의 뜻은 높이 사겠으나,

오래 전 김아타씨가 상금을 내 놓아 젊은 사진가들에게 욕먹은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렵게 작업하는 후배 사진가들에게 부담 주는 그런 선례를 남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당시 여론이었다.

차라리 가난한 후배들을 위해 다큐멘터리사진가들이 운영하는 온빛 사진상’ 같은 곳에 기증해,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에게 조금이나마 혜택을 주는 것이 훨씬 빛날 텐데 말이다.

문제는 주최 측인 영월군에서 은근히 바라게 되면, 심사위원도 가난한 작가보다 돈 많은 작가를 선호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 예로 몇 년 전의 일이다.

잘 알고 지내는 '동강국제사진제'의 운영위원 한 분으로 부터 상을 받게 되면 상금을 주최 측에 기증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어이없는 제안이었다. 가난한 나로서는 명예 따위야 아무 소용없는데, 상금이 없다면 구린내 나는 상을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결국 받지 못해 없던 일이 되고 말았지만, 그 소리를 들으며 운영위원들이 주최 측의 사주를 받거나 눈치를 본다는 것을 짐작한 것이다.


    

 


그리고 '동강국제사진제'의 운영해 대해 한 번 짚어보자.

수상자전이나 주제전 등의 본 전시는 발전해 가고 있으나, 강원도사진가전은 이제 고려해 볼 전시다.

국제전에 걸맞지 않는 구태한 전시를 한 번도 빼먹지 않고 반복한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았다.

과연 강원도에 내놓을 만한 작가가 몇이나 되겠는가?

무슨 뚜렷한 주제도 없이 마치 아마추어 동아리 전 같은 전시로 국제전에 티를 남긴다면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차라리 전국의 신진 작가들이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획전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강원도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결국 나만 욕먹지만어쩔 수 없다.

사진판이 잘 못 돌아가도 다들 입 다물고 눈치만 보고 있으니 말이다.

제발 젊은 후배 사진가들에게 더러운 것은 물려주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지인의 말처럼, 철부지고 바보.

철부지는 겁이 없고, 바보는 곁눈질 않는다.

 

사진, / 조문호









동강사진상 수상자전, 황규태,  '묵시록 그 이후' 전시장


제17회 동강국제시진제 도록 표지








 

 


동강사진상 수상전, 영월‘동강사진박물관’에서 열려...

[서울문화투데이] 2018년 06월 26일 (화) 00:25:11 조문호 기자/사진가 prees@sctoday.co.kr  



작업에 대해 설명하는 황규태선생



황규태선생은 우리의 영원한 오빠다.

연세는 팔순을 넘겼지만, 행동이 젊고 생각이 젊기 때문이다.

기존상식을 희롱하고, 고상함에 야유를 던지는 자유분방한 작업 스타일에다 생활습관까지 젊은 작가 빰 치는 현역이다.




황규태작,‘Untitled 1969-1972’



처음엔 다큐멘터리사진을 찍으며 신문기자로 일했지만. 70년대 초 미국으로 건너가며 작품성향이 완전히 달라졌다.

여타 장르에서나 볼 수 있는 초현실주의를 사진으로 실천했다.

그 후 10년의 세월이 지나 처음 본 선생의 사진은 충격 그 자체였다.

지금은 미술과 사진의 장르가 무너졌지만,

그 때는 비사진적이란 생각도 들었으나 마음을 끌어당기는 흡인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마치 예언가처럼 지구환경과 문명의 위기를 경고하며, 종말적인 상황을 재현해 보였다.




황규태작,'Christina's World'



선생의 작품들은 문명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었다.

그 당시 보여 준 일련의 작품세계는 리얼리즘 사진이 주류를 이루던 한국사진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80년대 후반 유학파들이 귀국하여 ‘한국사진의 수평전’이란 새로운 사진 바람을 일으켰지만,

그 위에 황규태 선생이 계신 것이다.




황규태작,'Evolution-Pixel'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지만, 그 당시는 엄두도 못 낼 시기였다.

표현방법으로서의 기술적인 문제에 앞서 임응식선생께서 주창한 생활주의 리얼리즘이라는 틀에 갇혀,

자칫 ‘낙동강 오리알’신세 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황규태작, 'Babel'



선생은 사진의 표현 확장을 위해 온갖 실험을 거듭했다.

이중노출과 몽타주는 물론, 때로는 필름을 태워 이미지를 얻기도 했는데,

요즘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며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

그런 실험정신 덕에 한국 포스트모더니즘의 대가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황규태작, ' Monologue'



젊은 시절 스스로의 머리에 총을 쏘는 'Monologue' 작품에서는 입이 벌어졌다.

지구의 위기의식을 넘어 자멸로 향하는 메시지가 그렇게 강력하게 다가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지구환경의 심각성을 알아챈 예언가로서,

생태적, 환경적, 문명적인 비판의식이 선생의 작품 하나하나에 독사처럼 똬리 틀고 있었다.




황규태작, 'Reproduction'



선생께서 90년대 중반 무렵 선물한 ‘원풍경’ 사진집은 지금도 가끔씩 꺼내보는 나의 애장사진집 중 하나다.

그 작품들이 사진의 외도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상 사나이라면 외도도 한 번쯤 해보고 싶은 것이 본심 아니겠는가?



황규태작,'Melting the sun'



미국에서 하시던 사업을 접고 귀국하신 후에 보여준 쉼 없는 작품들은 후배 사진가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진가로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선생께서 여지 것 그 흔한 사진상 한 번 못 받았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늦게나마 받게 되었지만, 상이란 것 자체가 웃기는 짜장면이다.




황규태작, 'Pixel,Big Brother'



이번 제17회 동강국제사진제의 동강사진상 수상자전으로 열린 황규태선생의 ‘묵시록 그 이후’전은

오래된 작품도 몇 점 있지만, 대부분 최근에 작업한 작품들이다.

전시장 입구에 걸린 ‘Untitled 1969-1972’ 작품 앞에서는 말문이 막혔다.

운전석에 사람이 아니고 부엉이가 앉아 있었는데, 50여 년 전에 그런 생각을 했다는 점이 놀라웠다.



황규태작,'Hi Daddy'



전시장을 들어서며 받은 느낌은 압도적이었다.
정면 벽을 가득 메운 눈동자 'Pixel,Big Brother'라는 작품은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정신 차리라는 것 같았다.

사실은 인간이 만든 기술에 의해 인간이 감시 당 하는 현실을 일깨우고 있었다.

확대된 컴퓨터 픽셀로 만들어진 그 눈은 생명체의 눈이 아니라 생명체를 감시하는 눈이었다.

그러니 작품에 다가서면 대갈통 만한 픽셀이 드러나 도대체 무슨 형상인지 알 수 없었다.

가까이 가면 실체가 사라지지만 항상 멀리서 감시한다는 암시같았다.

사진이 아닌 컴퓨터 픽셀로 조형적 이미지를 만들었지만,

과학 문명의 종말을 과학의 힘으로 드러낸다는 의미도 걸 맞는 방법 같기도 했다.




황규태작, 'Usherette'



사람이 마네킹처럼 보이는 'Usherette'이란 작품도 보는 이로 하여금 소름 돋게 하였다.

사람 사는 세상인지, 기계 사는 세상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한 쪽 벽에는 만들어낸 복제 생명체들이 우글거리는 'Reproduction'란 작품 또한 주눅 들게 하였다.

태양은 녹아내리고, 생활쓰레기는 회오리바람처럼 지구를 덮치고 있다.


큰 일 났다! 전시 보러 강원도 가자.




황규태작, 좌위로부터'Sightseer', 'New Eyes Grafted','Mutation', 'Dogman','The Bio Buddha',


이 전시는 9월21일까지 영월 '동강사진박물관'에서 열린다.








  

  

  

  

 








그동안 해온 사진 작업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되었다.
공익을 위해서는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피할 수 없다는
오래된 인식을 바꾸게 되었다.

대개 본인이 원하거나 묵인할 때 찍지만,
더러는 원하지 않을 경우도 있다.






흔한 예로 잠든 노숙인을 찍을 때가 그렇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아닌 것도 아닌데, 
찍고나서 양해를 구한다 해도 찍는 순간은 도둑사진일 뿐이다.
사람을 위해 사람을 찍는다는 공익에 대한 명분도
한 사람의 프라이버시 앞에서는 무참하게 무너져 내린다.



뒤늦게 고민에 빠지기 시작한 일주일 전부터
습관처럼 찍어 온 동자동 사진도 이전처럼 노출할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마음을 굳힌 것은 어저께 장경호씨 집에서 찍은 사진 때문이다.
알리지 말라는 후배의 말에도 사는 처지가 딱해 노출시켜 버린 것이다.
본인이 보았는지 모르지만, 심한 자책에 시달린 것이다.
사람을 위한다며 당사자의 뜻이 무시된 사진이 어디 이 뿐이겠는가?
그래서 사진을 내리며 생각을 바꾼 것이다.






평생을 사람만 생각하며, 사람을 찍어 왔지 않았던가.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말도 어쩌면 헛소리일 뿐이다.
종국엔 지구의 모든 것이 사라질테니까.

그러면 앞으로 동자동과 인사동 사진은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서로가 통하는 사람 대 사람의 일대 일 기록 말이다.
이제부터 블로그에 올리는 사진도 본인이 수긍할 수 있는
다섯 장 이내로 제한하기로 했다.






여기에 올린 사진은 지난 토요일 찍은 사진이다.
사진을 부탁한 쪽방주민 조인형씨와 노숙하는 유정희씨다.
조인형씨는 빵 타기 위해 찬송가 적힌 순서 표를 들었고,
유정희씨는 머물고 있는 처소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날따라 원로사진가 황규태선생께서 동자동을 방문해 맛있는 음식을 사 주셨다.
나뿐 아니라 동자동 친구 이기영씨 까지 고마워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6일 정오 무렵, ‘류가헌’에서 황규태 선생을 뵙기로 약속했다.
점심같이 먹자는 선생의 연락에 찾아 나섰는데, 좀 늦어버렸다.
그 곳에서 황규태선생 전시가 있는 것으로 여겼으나, 문선희씨 '묻다'란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전시장엔 아무도 없었는데, 의외의 사진을 보며 차분히 감상할 수 있었다.





문선희씨에 대해서 아는바가 없어나, 사진가의 문제의식이 돋보였다.
조류 인플루엔자로 살 처분된 가축의 매몰지를 찾아 다니며 찍었는데,
섞어가는 땅의 디테일이 마치 한 폭의 추상화처럼 아름답기도, 섬뜩하기도 했다.
인간의 잔혹성과 환경오염 현장을 재확인하는 자리였는데, 사진이 그 답을 묻고 있었다.

12월 3일까지 전시가 열리니, 시간내어 한 번 볼만한 전시다.



 


황규태선생을 찾아 2층에 올라가니, 거기서 기다리고 계셨다.
메시지를 보내고 계셨는데, 전화번호를 잘 못 알아 남의 전화에 메시지를 계속 보냈다.
황송하기 그지없었으나, 멋쩍은 웃음만 흘릴 수밖에 없었다.
마침 한정식 선생께도 연락되어 같이 자리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황규태 사단장의 멋진 찝에 편승할 기회가 생겼다.
내 좋아하는 음식을 아신 듯, “돈까스가 좋으냐 중국집이 좋냐”고 물었다.
두 선생님 계신데 내가 결정하는 것이 난처했으나, 빼갈 생각에 중국집이 좋겠다고 말했다.
동네의 가까운 중국집에 갈 줄 알았는데, 세검정의 ‘하림각’으로 가셨다.





지름길인 청와대 길로 들어섰는데, 언제나 드라이브 코스로는 멋진 길이다.
문정부 들어서 쓸데없는 검문을 폐지해 시민들의 호응을 얻고 었으나,
아직까지 청와대 주변에 서성이는 기관총 든 경찰의 모습은 여전했다.






위협적이고 꼴 볼견 풍경이 지나 칠 때마다 걸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한정식선생께서 그 문제를 지적하셨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얼마든지 방위할 수 있지 않냐?’는 거다.
지켜보는 국민만이 아니라, 경호받는 당사자도 기분 좋은 풍경은 아니다.






하해와 같은 사단장님의 은혜로 고급 청요리집에서 오랜만에 목에 때 벗겼다.
유산슬 에다 빼갈까지 곁들인 과분한 점심을 먹었다.
커피는 ‘류가헌’에 와서 마시라는 조예인씨의 배려에 다시 돌아왔다.
난 자판기 스타일이라 커피 맛은 잘 모르지만, 냄새는 죽였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탁자에 두 권의 사진집이 올려졌다.
이한구씨의 ‘군용’과 박종우씨의 ‘DMZ’로 모두 국방부에서 소장해야 할, 질 높은 사진이었다.
이한구씨의 ‘군용’사진집은 오래 전에 본 사진이지만,
이번에 독일에서 출판 된 박종우씨의 ‘DMZ'사진집은 두 선생께서도 감탄하셨다.
12월 26일부터 ‘류가헌’에서 열릴 박종우씨의 “DMZ'사진전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의미 있는 전시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사단장께서 입 호강, 눈 호강 다 시켜주면서, 하사금까지 내려주셨다.
다들 겨울의 쪽방이 추워 고생하는 줄 알지만, 사실은 겨울보다 여름이 더 힘들다.
겨울은 방이 작아 전기장판과 담요만 있으면 걱정 없지만,
더운 여름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30만원을 주시며 오리털 침낭을 꼭 사야한다고 당부하셨는데,
그 돈으로 동자동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실까 걱정스러우신 모양이다.
그러나 침낭은 그 날 오후 ‘나누미’에서 쪽방주민들에게 나누어 주기로 되어있었다.
침낭은 쪽방 사람들 보다 노숙하는 친구들이 더 절실한 물건인데 말이다.






그 날 나누미 행사장에서 침낭을 받아 깔아보니 사이즈가 내 침대와 똑 같았다.
그러나 담요 덮고 자유롭게 자는 것이 좋지, 굳이 침낭에 묶여 잘 필요는 없는 듯 했다.
노숙하는 친구 중에 옷이 제일 허술한 친구에게 건네주기 위해 챙겨두었다.





그러나 사단장께 받은 하사금 사용처를 아직까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오리털파카’를 사 입는 게 뜻을 받아들이는 거지만, 옷은 있는 옷만 해도 죽을 때까지 입고도 남는다.






그 돈으로 정영신씨와 장터 여행이나 떠났으면 좋겠으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엉뚱한 일이 생겨버렸다.


오래전부터 고환에 통증은 있었으나 잠간 잠간이라 견뎠는데,
이젠 통증이 심하게 지속되고 붓기까지 해 병원에 가보아야 했다.
여지 것 병은 모르는 게 약이라며 모든 검진 자체를 거부해 왔는데, 걱정스럽다.
난치병이라면 진통 치료만 받을 작정이다.

아무튼 별일 없으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광화문광장“의 촛불집회에 나가는 게 습관이 되어 토요일만 되면 엉덩이가 들썩인다.

지난 토요일은 집회가 없었지만 나갈 채비를 했는데, 마침 ’눈빛출판사‘의 이규상대표로부터 전화가 왔다.

’류가헌‘ 전시장에서 만나 점심식사나 같이 하자는 것이다.

사실 ’류가헌‘이 옮긴지가 제법 되었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더구나 나도 출품한 ’촛불의 구술사‘전이 열리고 있지 않은가.

첫 날 일이 있어 못 들리다 보니 차일피일 미루어 왔던 것이다.

길눈이 어두워 물어물어 찾아 갔는데, 가보니 촛불집회 때마다 들락거린 청와대 가는 청운동이었다.

전시장에는 황규태선생을 비롯하여 이규상, 이규철씨가 나와 계셨고, 뒤이어 석재현, 박진영, 하지권씨도 만났다.

다들 반가웠으나 황규태선생을 뵈니 송구스럽기 그지없었다.

몇 일전까지 ‘류가헌’에서 열었던 황선생님 개인전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사치레가 아니라 좋은 전시를 못 본 건 내 손해인데, 스스로의 게으름을 자책해야 했다.






2관에서는 강제훈씨를 비롯한 13명의 다큐멘터리사진가들이 찍은 ’촛불의 구술사‘전이 열리고 있었고,

1관에서는 사진가 이규철씨가 컬렉션한 ‘我 之 我’전이 열리고 있었다.

매년 한 장씩 20년 동안 모은 작품 20점을 전시하고 있었다.

가난한 사진가가 매년 사진작품을 구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사진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작품이기에 허턴 작품은 있을 수가 없었다.

이미 잘 알려진 작품도 있었는데, 사진보는 안목이 덜한 분은 믿고 살만한 작품들이었다.

전시된 작품을 판매하는 게 아니라 작가와 연결시켜 주는데, 부담 없는 가격이라 제법 팔렸다고 한다.

또한 사진집을 구입한 분께는 작품사진을 증정하는 이벤트도 열고 있었다.

사진 컬렉션에 다시 한 번 관심 갖게 하는 좋은 사진나눔운동이었다.






이규상, 황규태 선생과 전시장 옆에 있는 떡 만두국 집에서 식사를 하고 ‘광화문광장’까지 걸어왔는데,

경복궁 앞길에는 유난히 한복 입은 아가씨들이 많았다. 그러나 광화문광장은 여느 때와 달리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이순신동상 부근에는 ‘사회를 위한 대학생공동행동’의 집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누가 뒤에서 어깨를 툭 쳤다.

돌아보니 인사동터줏대감 강 민시인과 방동규선생이 계셨고 옆에는 미모의 소설가 김단하씨의 모습도 보였다.

술 한 잔 하자는 강 민선생의 말씀에 간재미집으로 안내했다.

방배추선생의 구수한 옛 이야기 듣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방동규선생 사모님께서 광장에 기다린다는 전갈이 받고야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광화문광장에서는 ‘사드저지 및 세월호 진상규명, 적폐청산의 날‘이란 퇴진행동의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재명 성남시장과 사진가 고 헌씨의 모습도 보였고, 무대에는 장순향교수가 선언문을 낭독하고 있었다.

문제는 눈앞에 닥친 대선에서 이러한 난제를 해결할 의지를 보이는 분은 이재명, 심상정 후보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사드철회는 물론 모든 진상규명과 적폐가 청산될 때까지 촛불을 꺼서는 안 된다.

토요일마다 ‘광화문광장’을 문화예술난장으로 만들어 촛불시민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전진기지로 만들자.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여름의 사모님 모습-  



지난 14일 원로사진가 이명동선생 사모님께서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았다.
갑작스런 비보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으나,
한편으론 힘든 연명보다 저승이 더 편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혼자 남게 된 이명동 선생을 어쩌랴!
사모님 죽 끓여 드리는 게 유일한 낙이셨는데, 그 빈자리를 어떻게 메울까?


작년 여름 찾아뵐 때만해도 반갑게 맞이하며, 자식처럼 뭘 못 먹여서 안달이셨다.
유난히 수줍음도 많이 타셔서, 눈길만 마주쳐도 고개 내리시는 분이다.
날 좀 풀리면 찾아뵈려 문안을 미루었던 게 후회스러웠다.
예전에는 이선생님께서 설렁탕 먹자며 가끔 전화를 하셨는데,
요즘 연락이 통 없었던 걸로 보아 사모님께서 많이 편찮으셨나 보다.






정영신씨께 연락하여 함께 강남 삼성의료원 장례식장을 찾아갔다.
장례식장에서 사진가 황규태선생을 만났으나, 아는 분이 없어 그냥 가신다고 했다.
한정식선생을 장례식장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먼저 가셨다는 말씀도 하셨다.

이명동 선생도 자택에 가셔서, 아는 분이라고는 둘째 아들 태웅씨 뿐이었다.
예만 올리고, 황규태선생을 따라 나서야 했다.
황선생께서 같은 방향이라 태워 주셨는데, 걱정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돌아가신 사모님보다, 이명동선생님이 더 마음에 걸린 것이다.






예전에는 누가 돌아가시면 슬퍼하기도 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으나 요즘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개똥밭에서 굴러도 저승보단 이승이 낫다“는 속담은 틀린 말이라 생각한다.
요즘은 병원에서 사람을 살릴 수는 없어도 죽이지는 않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고통 없이 죽는 것은 하나의 축복이라 생각한다,
병원생활 오래 하게되면 가족 간의 정조차 메말라버린다.
환자도 힘들지만, 가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아마, 사모님께서도 병원에 계셨더라면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댁에 계셨기에, 돌아가실 때까지 정 나누며 편안하게 영면 할 수 있었을 게다.
이젠 편하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막지 말아야 한다.
고달픈 이승보다 고통 없는 저승이 훨씬 편하다.
사람 목숨 담보로 장사하지 말고, 안락사를 허용하라.






장례식장은 일원동 ‘삼성의료원’ 장례식장 6호실이고, 발인은 3월16일이다.

장지는 서울추모공원 서을시립납골당이다.


“사모님! 부디 극락왕생하시길 빕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정영신의 ‘장날’ 사진전이 열리는 동안 반가운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첫 날은 한꺼번에 오시는 바람에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는데,
그 다음 날 부터는 마치 순서대로 오시는 것처럼, 좋은 만남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28일의 인사동은 가랑비가 오는 듯 마는 듯, 술 마시기 좋은 촉촉한 날씨였습니다.








전시장에는 이런 시간부터 울산 오세필씨를 비롯해 국민은행의 여성임원들이 찾아왔습니다.

엊 저녁 유목민에서 뵌 분이나, 전시를 보러 다시 왔다는 것입니다.

좀 있으니, 그저께 다녀 간 가수 최백호씨가 다시 왔습니다.

최백호씨는 자신이 쓴 시나리오로 영화를 찍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답니다.

    






그는 다재다능한 후배입니다. 노래 뿐 아니라, 그림도 잘 그리고, 시인 못지않게 글도 잘 씁니다.

오래동안 라디오에서 MC 일을 맡다보니 말도 구수하게 잘하는데다, 공연기획에도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토탈 아티스트인 셈이지요.

오래전부터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지만, 제작비가 큰데다 주위의 만류로 좌절했으나,

이제 그 문제점을 해결한 후, 다시 꿈을 펼쳤답니다.














그의 새로운 영역 개척에 큰 기대를 걸며,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화가 허미자씨와 공윤희씨가 왔습니다.

그리고 페친이며 사진하는 후배 홍윤하씨도 왔습니다.

미아리에서 열리는 텍사스 프로젝트를 보고 왔다는 정보를 주었습니다.









이 '텍사스 프로젝트'는 작년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전시한 588전시 때, 동참의 제안을 받았으나,

일정이 임박한데다 야외 설치라 사진손상을 우려해 거절한 일이 있어 더욱 관심이 갔습니다.


    






오세필씨가 저녁 식사를 대접한다기에 정영신, 공윤희, 홍윤하, 연극하는 처녀 한 분과 여자만'으로 갔습니다

일인분 45,000원이라는 정식에 술 까지 마셨으니, 괜히 부담 되더군요.

    





그 이틑 날인 29일에는 지하철 종로3가에서 내려 인사동으로 들어오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춘천의 김대영씨 전시 보러, '백송갤러리'부터 갈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전시장에 작가는 없었지만, 조용한 분위기에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마치 고감도 필름에서에서나 볼 수 있는 조립자로 그린 자연 형상들이 범상치 않았습니다.


















'장날' 전시장에 들리니, 김중호, 심지윤씨가 지키고 있었고, 오프닝 때 도와 준 음식 장식 전문가 최소연씨도 왔습니다.

그리고 새로 시작할 계획인 양동 쪽방 사람들에 도움 줄 시나리오 작가 최건모씨와 사회복지사 김성규씨도 왔어요.














잇따라 화가 김하은, 황정아씨도 찾아왔고, 원로사진가 황규태선생과 사진가 Area Park이 다녀갔고,

미국에 거주하는 전기작가 이충렬씨도 왔습니다.

이충렬씨는 간송 전형필을 비롯하여 한국미의 순례자에 이어 , 김수환추기경을 펴낸 작가지요.


얼마 전 각종 메스컴에서 김수환추기경 책 소개가 대서특필되었지만, 판매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데,

이번에는 전국의 성당을 돌며 김수환추기경의 사회정의와 인간존엄이란 주제로 강연을 합답니다.

제일 먼저 잡힌 일정은 오는 922일 오후8시부터 10시까지 불광동성당에서 갖는다니,

시간되는 분들은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기록하러 갈 예정입니다.

 

























마지막에 나타난 친구는 사진하는 이돌필과 김은환씨 였는데, 이석필씨는 사진보다 심령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내가 짐작키로 아무도 찍어보지 못한 심령사진을 염두에 둔 듯 했습니다.

화가 서길헌씨와 유카리관장 노광래씨가 나타나 하루를 잘 마무리했습니다.

 















 

유목민에서 여러명이 만찬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돌필대사가 계산을 해 버렸습니다. 오늘 복채 좀 받았던가?

골목을 지나치던 사진가 안영상씨와 화가 장경호씨를 만나, 마지막 술 잔을 나누었지요.

다행스럽게도 같은 방향인 노광래씨가 차까지 태워 줘 편안하게 귀가 했답니다.

    











전시 철수하는 날인 30일에는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나갔습니다.

충주에서 지용철씨도 오기로 했고, 태백의 박병문씨도 오기로 했거던요.

전시장에 도착하자 말자, 지용철씨가 여성 한 분과 오셨고, ‘나무화랑 김진하관장도 왔습니다.

모두들 철수하기 전에 서둘러 왔다는 것입니다.









뒤 이어 박병문씨가 찾아 와 함께 점심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는데실내장식하는 최영문씨가 나타나 갈팡질팡하게 만드네요.

최영문씨에게 양해를 구하고, 박병문씨와 부산식당에서 생태찌개와 참치구이로 식사를 했습니다.

두 시무렵, 전시를 철수하여 짐을 옮기고는 다시 인사동에 나와야 했습니다.

    







조준영시인과 메비우스관장이었던 기획가 김권선씨와 저녁 약속이 있었거든요.

인사동 마중에서 만나 술 한 잔 했지요. 

마중의 막걸리는 맛은 있으나 빨리 취하는 술입니다. 술 취해 돌아오다 유목민에 잠시 들렸더니

김명성, 전인경, 공윤희, 오세훈, 이상훈씨등 여러 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딱 한 잔만, 딱 한 잔만, 하다 맛이 가버렸네요.

 

















이상으로 보고를 끝 냅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 조문호

 

 






카메라의 신처럼 사진인에게 선망의 대상이던 카메라가 ‘라이카’다.

라이카를 선물 받아 감격한지가 엊그젠데, 실망의 연속이다.
지난 번 ‘스페이스 22’의 임재천씨 전시와 ‘브레송’의 문진우씨 전시 오프닝에서 사용했으나,

사진을 몇 장 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후레쉬를 터트린 사진은 아예 나오지도 않았고,

그 외의 사진도 노출부족으로 화면이 대부분 어두웠다.
반평생 사진을 찍어 왔지만, 이렇게 일을 망친 적은 별로 없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 매뉴얼을 자세히 읽었으나, 뭐가 잘 못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군가는 프로그램을 다시 깔아야 한다는 얘기도 했다.

‘라이카 V-Lux’는 2010만 화소에다. 감도가 12,800이라 어두운 실내에서도 다 찍을 수 있다고 설명되어 있었다.

3cm 거리에서 접사가 가능하고 광각25미리에서 망원400미리까지 되는 줌렌즈가 고정된 카메라로 못 찍을게 없었다.

너무 꿈같은 기능에 장난감 같은 느낌이 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예전의 Nikon COOLPIX P310을 다시 사용했다.
다들 라이카를 왜 쓰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이 카메라가 더 가볍고 편하다고 얼버무렸다.
그러다 어저께 황규태 선생으로부터 점심식사를 같이 하자는 전화를 받아 라이카를 다시 가져 나갔다.

인사동은 실외라 괜찮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지만, 다시 시험할 속셈도 있었다.









약속한 ‘한일관’에는 원로사진가 황규태선생을 비롯하여 강운구, 한정식선생도 계셨다.

냉면에다 소주까지 한 잔 하고, 모처럼 세 분이 함께한 자리라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초점 맞추느라 렌즈가 왔다 갔다 했지만, 잘 찍혀 주었다. 되돌려 확인해 보았으나, 이상 없는 것 같았다.






커피까지 마시고 헤어진 후, 다시 인사동을 찍기 시작했다.

아내의 전시가 예정된 ‘아라아트’에서 공윤희씨와 울산의 오세필씨를 만나 찍기도 했다.

사진을 잔뜩 찍어 와서 컴퓨터에 옮겨보니, 움직이는 사람은 모두 이중으로 겹쳐 있었다.

촬영 나갈 때 돋보기를 가져가지 못한 게 후회막급이었다.








얼마 전에는 니콘으로 찍은 사진을 올렸는데, 어느 페친은 “역시 라이카는 색감이 다르다”는 댓글을 올렸더라.

대부분의 국민들이 명품명품 노래를 부르지만, 사진인들도 라이카라는 명품에 자유롭지 못하다.







갑자기 우스게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옛날에는 대부분 한 식구가 한 방에서 비좁게 살았다.

자식들이 잠든 것을 확인한 두 내외가 사랑놀음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좀 다르게 하느라 벽치기를 시작했단다.

그러자 벽의 울림에 선반에 올려 둔 소쿠리가 갑자기 떨어져 잠자던 아들놈 머리 박에 쿵 떨어졌다고 한다.


자는 척 하던 아들 놈, 왈! “에이! 평소 하던 대로 하지...”


사진, 글 /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