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16일, 사진가 양재문씨의 ‘비천몽’전시가 율곡로 ‘아트링크’에서 열렸다.
기다린 전시였으나, 꾸물대다 30분이나 늦었다.

전시장에는 작가를 비롯하여 ‘아트링크’ 이경은 관장, 사진가 황규태, 김녕만, 곽영택, 이기명,

강홍구, 김복남, 곽명우씨등 많은 사진가들이 보였으나, 강홍구씨의 노래는 이미 끝나버렸고,

춤꾼의 치맛자락만 봄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전시된 작품들을 돌아보니, 추는 춤과 걸린 작품이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아트링크’갤러리가 마치 이 전시를 위해 만들어진 공간처럼 생각되었다.

정사각형으로 이어진 한옥의 회랑  마당에서 춤을 추었는데,

실제의 춤사위보다, 벽에 걸린 꿈결같은 춤이 더 아름답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사진에 다양한 장르가 있지만, 난 사진의 가치를 기록에 두어 그런지,

비현실적이거나 작가의 주관에 의한 작품은 사진보다 미술로 보는 고집스러움이 있다.

현실보다 비현실이 더 아름답다는 생각에 일종의 배신감 같은 것도 느꼈다.

양재문씨는 30년 지기의 오래된 사이지만, 살기가 바빠 그런지 참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전시를 보니 20여 년 전에 보았던 ‘풀빛여행’이란 전시가 떠올랐다.

그 몽환적 춤 여행이 아직 선명한데, 이번엔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었다.

마치 한 폭의 수묵채색화처럼 아름다워, 육감까지 동했다.


작가는 어머니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춤사위에 담았다고 한다.

느린 셔터로 잡은 흔들리는 동작은 자신도 느끼지 못한 무아의 경지에 달했는데,

내가 볼 때는 흥행이 될 것 같았다.

사진평론가 이경률씨는 “어떠한 구체적인 정보도 주지 않는 작가의 사진들은 하늘로 비천(飛天)하는

영혼을 보여주듯이 춤사위 그 자체의 기록을 넘어 그것으로부터 반사되고 전이(轉移)된 정신적 생산물로

이해된다”고 말했으나, 에둘러 말하는 관습 때문인지, 원고지 채울 요량인지, 머리가 좀 지끈거렸다.

어쨌든, 오늘 좋은 사진전과 반가운 사람들 만나 기분 좋았다.
양재문씨의 작품이 쌕시하다는 곽영택씨 말처럼, 내 식으론 꼴리는 사진이었다.
뒤풀이는 '북촌만두'에서 인사동 ‘촌’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마셨다.


자기자랑에다 면전에서 상대방 칭찬까지 해 대는 친구가 있어 좀 껄끄러웠지만,

맞은편에 앉은 미녀 복남씨의 눈웃음에 술은 술술 잘 넘어갔다.

취기가 너무 올라, 마구초 한대로 진정시켜야 했다.

‘귀천’에서 모과차 한 잔으로 속 풀고, 돌아오는 길은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내 십팔번 “연분홍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라는 노랫말처럼,

조지피면 같이 웃고, 조지지면 같이 울고 싶었다.


"꿈에서 몽정이나 한 번 했으면..."



사진, 글 / 조문호
























1970년 ‘한국일보사’가 주최한 ‘제1회 한국국제사진전’에서 금상을 수상한 황규태선생 작품이다.
‘한국현대사진대표작선집’에서 옮겼다.


새해를 맞아 일출과 관련된 이미지를 생각하다, 황규태선생의 '원풍경'이 떠올랐다.

사진을 찾으려고 83년도에 발행된 '한국현대사진대표작선집도록을 뒤적였더니, 

뒤 페이지에 실린 원로평론가의 짧은 작품해설에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작가의 의도와 전혀 다른 ‘고요한 아침의 나라’ 운운하며 화면구성에 대한 이야기만 풀어놓았다.

그만큼 현대사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시기였다.


그건 생태환경의 변화를 예견한 경종이었고, 통렬한 비판이었다.
생태적, 환경적, 문명적인 것에 대한 비판정신을 바탕으로 한 황규태선생의 ‘원 풍경’은 

기록성과 고발성을 겸해 조형적 회화의 속성까지 띄고 있다.

몽타주에 의한 그의 의외로운 해석은 당시로서는 신선한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에 보여 준 이와 같은 일련의 작품들은 리얼리즘 사진이 주류를 이루던 한국사진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80년대 후반 유학파들이 귀국하여 ‘한국사진의 수평전’이란 새로운 사진 바람을 일으켰지만,

그 위에 황규태 선생이 계신 것이다.

선생은 사진의 재현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실험을 거듭했다.

이중노출과 몽타주는 물론, 때로는 필름을 태워 이미지를 얻기도 했는데,

요즘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며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

그런 실험정신 덕에 한국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 사진가로 자리 잡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60년대 초반, '경향신문'기자로 사진을 시작한 황규태선생은 특파원1호로 미국에 건너갔다.

그 곳에서 사진의 한계를 넘나드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사진세계를 개척해 낸 것이다.

그 뒤 사업에도 크게 성공해, 미국에서 사진 공부한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선생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것도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무튼 사진인 들에게 선생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선생의  시적감성도 탁월하다.

흐드러지게 핀 벗꽃을 사진에 잔뜩 넣어놓고, 그 밑에 붙여 논 제목이 뭔지 아는가?

<큰일낫다 봄이 왔다> 강현국 시인의 시 한 구절이다 후렴은 '가난한 내 사랑도 꿈틀거린다'이다.

서정춘시인의 '봄 파르티잔'에 버금가는 절창아닌가?

머지않아 팔순을 내다보는 연세지만, 탁월한 감각과 번득이는 에너지는 변함없으시다.
대형카메라를 이용한 픽셀 확대 작업이나 ‘기(banner)’시리즈 등의 작품 스타일 뿐 아니라,

생각이나 생활까지 젊은이들 빰친다.

기존상식을 희롱하고, 고상함에 야유를 던지는 선생의 자유로운 창작정신에 경의의 박수를 보낸다.

글 / 조문호
 





                                       1969년부터 1972년 사진을 ‘한국현대사진의 흐름“작품집에서 옮겼다.



 

 

30여 년 동안 사라져가는 서울의 골목풍정을 기록한 김기찬선생께서 세상을 떠난 지도 어언 10년이 되었다.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께서 10주기를 맞는 지난 8월 27일, ‘골목을 사랑한 사진가’란 제목의 책을 펴내며,

중학동에 있는 '한일관'에서 김기찬선생을 추모하는 조촐한 자리를 만들었다.

 

그 자리에는 미망인 최경자여사를 비롯하여 사진가 한정식, 황규태, 이완교, 전민조, 엄상빈, 김보섭, 정영신,

윤한수씨, ‘눈빛’ 편집장 안미숙씨, 한겨레신문 임종업기자 등 생전에 가까운 지인들과 글을 쓴 필자들이 모였다.

안미숙편집장은 인사말에서 “이 책을 지궁스럽게 만들었다”며 잘 쓰지 않는 말부터 끄집어냈다.

이번에 나온 사진 에세이에 김기찬선생께서 ‘지궁스럽다’는 말을 썼는데,

그 뜻이 책을 만든 우리의 마음을 가장 잘 드러낸 것 같다는 것이다.
윤한수씨가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보니 “마음 쓰는 것이 지극히 정성스럽고 극진한데가 있다“로 찍혀 나왔다.

정말 ‘눈빛출판사’의 이규상, 안미숙 두 내외는 김기찬선생을 지극하다 못해 끔찍히도 모셔왔다.

한정식선생께서도 그의 지극한 마음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규상씨가 “지난 번 김기찬선생의 ‘골목안 풍경’사진집이 재판되었을 때,
고인의 무덤까지 사진집을 가져갔다”는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김기찬 사진에세이 '골목을 사랑한 사진가'


 

제본소에서 책 나오기를 안절부절 기다리던 이규상씨가, 뒤늦게 책을 안고 허겁지겁 나타났다.

내 놓은 책들은 금방 구워낸 붕어빵처럼 따끈따끈했다.

10주기에 맞추어 선보이려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그의 지극한 마음이 전해졌다.

그 마음이야 김기찬선생에 대한 존경심에서 비롯되었겠지만, 오래전부터 싹터 온 인간적 정리도 한 몫 한 듯하다.

그 분에게만 잘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사진을 위해 그만큼 애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사진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 한다.

뻔히 안 팔릴 줄 알면서도 기록적 가치만 있으면 무조건 출판하는 그의 뚝심에 모두들 걱정이 대단하지만.

그의 집념은 아무도 꺾을 수 없다.

우리가 그에게 보답할 수 있는 일은 한 권의 책이라도 더 많이 사 보는 방법뿐이다.

결국 스스로를 기름지게 하는 자양분이지만...

 

 

 

책에 실린 김기찬선생의 생전 모습 / 한정식선생께서 찍었다.


 

책을 펼쳐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선생의 주옥같은 사진과 글들이 마치 당시의 상황과 애잔한 마음을 직접 들려주는 것처럼 다정하고 생생했다.
그리고 사진가 한정식선생과 전민조씨는 평소에 지켜 보았던 작가의 따뜻한 인간적 면모를 적었고,

사진가이자 건축가인 윤한수씨는 선생께서 다녔던 골목 골목을 답사하며 사진과 함께 글을 썼다.

사회학교수 김호기씨와 사진평론가 정진국씨, 역사학교수 이광수씨, 한겨레신문 임종업기자,

‘사진책도서관’대표 최종규씨 등 여러 필진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김기찬선생의 작가론과 골목이야기들을 풀어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실린 부산대 사회학 교수 윤일성씨의 ‘도시 빈곤에 대한 두가지 시선’

-최민식과 김기찬의 사진연구-란 논문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사진의 대가를 하찮게 여기는, 서양귀신 씬 사진가들은 꼭 읽어야 한다.

“최민식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의 작가이고 김기찬은 ‘따사로운 온기’의 작가이다.”
그 논문에 쓰인 이 한마디가 양대 다큐멘터리 대가의 성격을 잘 말해 준다.



 

 

 

각설하고, 이야기를 다시 추모 만찬장으로 돌린다.
추모사를 겸한 이규상씨의 인사말과 이완교선생의 추억담 등 고인을 기리는 이야기들은

시종일관 김기찬선생을 그립게 만들었다. 그토록 골목을 사랑한 분이 어디 있었는가?

 

그리고 어려운 형편에 음식은 얼마나 푸짐하게 차렸는지, 너무 황송스러웠다.

고맙게도 누가 몰래 밥값을 냈으나  계산했다는 사람은 없었다. 짐작컨데 황규태선생께서 내신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짐을 들어주고 싶은 따듯한 마음이 이심전심 전해졌다.

이차로 자리를 옮긴 맥주집에는 이규상, 안미숙 내외와 엄상빈, 김보섭, 정영신, 임종업씨가

자리를 함께 했는데, 한 잔 마신김에 좀 과음했다.

뒤늦게 '한겨레신문'의 김봉규씨가 온 것으로 기억되나 카메라에 그의 흔적이 담겨있지 않았다. 너무 취했나?
아무튼 무소의 뿔처럼 돌진하는 ‘눈빛출판사’ 이규상씨의 기개에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2일 인사동 ‘양반댁’에서 이명동선생님을 모시는 사진가들의 오찬 모임이 있었다.

이명동 선생을 비롯하여 육명심, 한정식, 황규태, 이완교, 구자호, 전민조, 유병용,

이기명씨 등 열명이 모여 정겨운 환담을 나누며 또 한 해를 떠나 보내는 아쉬움을 달랬다.

그 날은 돌아가며 차례대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육명심선생의 제안으로

사진에 관한 많은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제일 먼저 ‘대구사진비엔날레’ 운영위원장을 맡았던 구자호선생으로 부터 여러 가지

그 뒷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고, 이완교씨는 파리비엔날레에 초대되었던 당시의 보람과

애로를 말했다. 그리고 육명심선생은 몇일 후에 티벳 작업을 정리한 사진집이 나온다는

말씀을, 한정식 선생은 지병에서 해방되어 사진촬영을 다녀 온 말씀을 하셨고,

이기명씨는 자신이 추진하고 있는 ‘제주 해녀’ 프로젝트 대한 뒷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전민조씨는 역사박물관에 소장된 작가들을 초대한 심포지움에 대한 이야기를,

유병용씨는 내년 5월에 있을 개인전 준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아내 정영신과 600여개 오일장 순례를 마감하고, 그 보고서 형식의 전시를

올 연말에 하기로 했으나, 출판이 지연되어 내년 1월20일로 연기되었다는 말을 했다.

마지막으로 황규태 선생 차례가 되자 황선생의 말씀이 걸작이었다.
“나는 할 말도 없고, 조형! 그 팔팔이나 하나 줘요”


사진,글 / 조문호

 

 

 

 

 

 

 

 

 

 

 

 

 

 

 

 

 

 

 

 

 

 

 

 

 

 

 

 

 

 

 

 

 

 

 

 

 





Hello, I See You.

황규태展 / HWANGGYUTAE / 黃圭泰 / photography

2013_0911 ▶ 2013_1120 / 일,공휴일 휴관

 

 


황규태_길_Ed. 1/5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1960년대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40317c | 황규태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 토요일_11:00am~04:00pm / 일,공휴일 휴관


아트스페이스 J ART SPACE J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159-3번지Tel. +82.31.712.7528

www.artspacej.com


필연성과 자의성의 경계를 넘은 황규태의 자유로움 ● 황규태 사진의 자유로움을 설명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안 맞는 일이다. 말이고 설명이고를 떠난 자유로움인데 무엇을 말 하겠는가. 필자가 황규태의 자유로움을 처음 만난 것은 1998년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원풍경-다큐멘트』에서였다. '사진계'라는 말 자체, 그곳을 주름 잡는 아무개, 아무개 선생이라는 말 자체에 신물이 나 있던 필자에게 절대로 양복을 안 입으며, 엄청난 일을 저질러 놓고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감이 없이 마냥 천진하기만 한 어린애 같은 황규태는 유일하게 마주 대하고 얘기를 할 수 있는 사진가로 보였다. 그 전시에서 황규태는 수면에 비치는 빛을 깊은 노출부족으로 찍어서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만든 것을 아주 큰 대형 프린트로 걸었는데, 그 모든 것을 다루는 솜씨의 근간에는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 혹은 모든 것이 다 중요하다'는 자유로움이 깔려 있었다. 한국에서 사진을 좀 한다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은 황규태가 유일하다. 다들 "이것은 지켜야 한다"는 식의 신주단지 모시는 태도로 사진을 하고 있는데, 그래서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필자의 25년간의 평론생활을 걸고 장담할 수 있다. ● 그런데 평론가로서 황규태가 왜 자유로운가를 설명할 수는 없다. 평론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어떤 식으로 자유로운가만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평론가는 근원을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 표면을 다루는 사람이므로. 더 정확히 말하면 지금 눈 앞에 보고 있는 표면의 매트릭스가 의미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조금만 더 정확히 말하면 설명하려 할 뿐이다. 다른 사람들의 매트릭스에 질서, 규율, 위계 따위들이 들어차 있다면 황규태의 매트릭스에는 자유로움만이 있을 뿐이다. 그 자유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다른 평론가 같으면 그의 성장과정이나 인물 됨됨이를 논하겠지만 필자는 자유는 그런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개념의 문제이다. 그 자유의 개념에 대해 하나하나 따져들어가 보자.

 

 


황규태_동무_Ed. 2/5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1960년대

우리가 가진 가장 나쁜 문화적 습관은 어떤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또 지금의 상태대로 꼭 그렇게 있어야 한다고 물신적으로 믿는 태도이다. 우리는 문화적 표상들을 필연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만일 한글 자모의 조합을 뒤섞어 놓거나 수학공식에 쓰이는 기호들을 뒤섞어 놓으면 그것을 읽는 이들은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즉 우리는 여기서 필연성(neccesity)과 자의성(contingency) 사이의 대립을 본다. 결론부터 말 하면 우리가 애지중지 모시고 있는 문화적 표상들은 전부 자의적이다. 즉 이렇게 되도 좋고 저렇게 되도 좋은데 수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어 열심히 노력하여 필연성의 탑을 쌓은 것이다. 그것이 서예든 사진이든 기본적으로는 다 자의적이다. 지금의 상황은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릴리푸트 사람들이 계란을 위부터 깨먹을 것이냐 아래부터 깨서 먹을 것이냐를 놓고 싸운 상황과 매우 비슷한 것이다. 문화에 대한 담론들은 겉으로는 저 작품이 더 나은가 이 작품이 더 나은가의 싸움으로 보이지만 실은 필연성과 자의성의 싸움이다. 어차피 자의적으로 정한 것인데 그것을 자의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후기구조주의에서 말 하는 해체(deconstruction)이다. 해체란 뜯어서 없애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표상의 속에 어떤 뼈대가 숨어 있는지 드러내 보여준다는 말이다. 겉으로 튼튼해 보이던 표상이 사실은 겉은 허술하고 속에 뼈대를 안 보이게 숨겨 놓고 있음이 드러나면 그 표상의 정당성은 사라지고 만다. 어떤 배우가 눈물 흘리는 연기를 하도 잘 해서 모든 사람들이 깜빡 속아 넘어갔는데 알고 보니 그의 눈물은 안약 몇 방울 넣은 거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 해체의 순간이다. 표상이라는 것을 세상에 던져 놓으면 그 다음부터는 만든 사람의 손을 떠나 세상의 풍파의 처분에 놓이게 된다. 바닷가에 모래성을 쌓아놓으면 그 다음부터는 파도의 처분에 놓이듯이 말이다. 해체란 그냥 보여주기일 뿐이다. 보여주고 나면 이 세상이 알아서 폐기처분하건 다시 살려내건 할 것이다. 필연성을 해체하여 자의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해체주의적 전략이다. 사실은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건 꼭 이래야 한다고 하던 필연성의 사슬을 풀고 실은 자의적인 것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황규태_소원_Ed. 2/5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1960년대

그런데 예술을 하는 작가란 기본적으로 해체주의자들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자신에게 부과하는 어떤 필연성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가에게는 중력의 법칙을 포함하여, 이 세상 어떤 법도 통하지 않는다. 진정한 작가라면 표상의 필연성을 믿지 말고 자의성에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즉 자기가 만든 것이든 남이 만든 것이든 꼭 그렇게 돼야만 한다고 고집하지 말고 어떤 다른 식으로도 변 할 수 있는 유동성에 몸을 내맡겨야 할 터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유동하는 모습에 가장 적극적으로 열려 있어야 할 예술의 형태인 사진은 가장 경직된 형태를 띠고 있다. 우리가 사진으로 찍은 모든 것들은 사진으로 찍히지 않아도 존재했을 것이며, 그것이 사라졌다고 아까워 할 것도 아닌 것이다. ● 자유로운 자의성, 그게 황규태의 사진이 즐거운 이유다. 그는 사람들이 사진에서 꼭 지켜야 한다고 믿는 것들을 다 벗어던져 버렸다. 우선 그는 프레임을 버렸다. 프레임은 사진의 포도청이다. 그 안으로 들어오면 구제 받고, 못 들어오면 망각의 바다에 빠져 영영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존 버거는 사진의 눈이 신의 눈을 닮았다고 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절대로 자신의 사진의 프레임을 자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신화화하여, 사진의 프레임에는 함부로 손대면 안 된다는 것이 한국의 사진가들이 믿는 최상의 신화이다. 사진의 프레임이 중요한 이유는 딱 하나 뿐이다. 가로 세로의 비율이 적절해서 아름답게 보일 때 뿐이다. 즉 가로와 세로의 비율이 잘 맞아서 아름다운데 프레임을 함부로 잘라서 그것을 파괴하면 안 되기 때문에 프레임을 자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진의 아름다움이 프레임의 아름다움 밖에 없는가? 그렇지 않다. 사진에는 여러 차원의 아름다움이 있다. ● 그런데 필름 혹은 촬상소자의 비율은 카메라 회사 마다 다 달라서 36×24, 6×6, 6×7, 4×5, 8×10 등 실로 다양하다. 즉 사진의 프레임은 카메라 회사 혹은 필름 회사가 자기들 나름의 원칙에 따라 자의적으로 정한 것인데 사진가는 절대로 자르면 안 된다는 것은 우스운 얘기 아닌가? 누구든 사진의 프레임을 자를 수 있다. 그리고 사진이 처음 나왔을 때 특히 그림 그리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것은 사진의 프레임이 이 세상의 시각장을 마구 자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 사진의 프레임은 자르면 안 된다고? 서양이나 일본의 카메라 회사들이 마구 자른 프레임을 한국의 사진가는 절대로 자르면 안 된다는 것은 중국에서 공자 제사를 더 이상 안 지내는데 한국에서는 계속 지내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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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태_Pixel Tvee_Ed. 1/3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145×110cm_2011

이 세상 어떤 것에도 걸리적 거리지 않는 바람 같은 사람 황규태가 사진의 프레임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 자유로움으로부터 그는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창출해냈다. 그가 1960년대에 찍은 못 살던 한국의 모습들은 전통적인 흑백사진의 구도로 돼 있었다. 거기서는 춘향이가 살던 시절의 목가적인 정취가 고전적인 구도로 살아 있었다. 이제 그 프레임을 부숴 버리자 목가적인 구도는 21세기 다운 초현실적인 이미지의 파편이 돼버렸다. 여인의 고무신은 원근감이 압축되고 톤은 날아가 버려서 더 이상 목가적이지 않다. 그 고무신의 주인에게 그 사진을 보여줘도 못 알아볼 것이다. 그것은 고무신이 아니라 픽셀일 뿐이기 때문이다. 만일 황규태가 프레임을 자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 고무신을 붙잡고 울고 넘는 박달재를 읊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 사진을 보고 화소수를 얘기하고 RGB를 얘기하고 USB를 얘기한다. 미래에는 그 사진을 보고 □□□□를 얘기할 것이다. 아니면 아무 말도 안 할 지도 모른다. 사실 1960년대의 고무신은 이미 화소수와 RGB와 USB를 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고무신이 꼭 고무신이어야 하는 낡고 보수적인 의식이 고무신의 해방을 막았을 뿐이다. 황규태가 프레임을 잘라서 한 일이라곤 고무신이 다른 것으로 보일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일 뿐이다. 그런데 이 쉬운 일을 하는데 50년이 걸렸다. 자유를 얻는데 걸리는 시간이 그만큼 길었던 것이다. ● 머리에 짐이 잔뜩 들은 광주리를 이고 걸어오는 모녀의 모습은 모든 디테일이 사라지고 검은 실루엣으로만 남았다. 그래서 마치 우연히 사진으로 찍혔다가 경찰에 증거로 수집되어 확대된 흉악범의 실루엣처럼 보인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사진에서는 흉악범과 천진한 모녀가 동격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착한 사람 사진은 착하고 나쁜 사람 사진은 나쁘다고 잘못 믿어왔다. 우리는 사진에 너무 많은 성격을 부여해 왔고 너무 많은 동일시를 해왔다. 사진에는 입자만, 오늘날에는 픽셀만 있는데 말이다. 그런 단순하고 분명한 사실을 깨닫는데 또 50년이 걸렸다. 도대체 우리는 왜 단순한 것을 배우는데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걸까? 오로지 황규태의 자유로움 만이 그런 사실을 깨닫는 문을 열어줄 뿐이다.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1960년대의 감각에서 21세기의 감각을 이끌어내는데 시간이 걸렸다고 할 수 있다. 이 검은 실루엣은 일면 불길해 보인다. 하지만 이 모습은 불길한 것도 길한 것도 아니다. 검으면 뭔가 불길하다고 생각하는 지나친 동일시가 우리의 눈을 흐렸기 때문에 검은 실루엣이 불길해 보이는 것이다. ● 우리가 황규태 만큼의 자유로움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는 눈 앞에 뭐가 보이면 그것이 반드시 어떤 것이라고 고착시키는 생각 때문이다. 즉 사과가 보이면 사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것은 正일 때 이미 그에 대한 反을 품고 있다. 사람들이 헤겔의 변증법을 잘못 이해하여 正이 反을 만나서 새로운 合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正은 反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正속에 反이 들어 있다가 시간이 흘러서 나타나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의 모든 표상은 그것에 반대 되는 것, 그것과 이질적인 것을 품고 있는 풍부하고 다양한 꼴을 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거기서 하나만을 본다. 어떤 것이 나비로 보이면 오로지 나비라고만 믿는 것이다. 사진이 문명사에 끼친 최대의 해악은 어떤 사물의 모습을 기록하면서 오로지 한 가지 양태로만 존재한다고 못 박아 버린 것이다. 즉 하나의 사과는 사과일 뿐이지 절대로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고 표상적으로 못 박아 버리는 것이 사진의 못된 행태인데 우리는 그것에 너무 얽매여 버렸다.

 

 


황규태_한강 Collection-그 겨울_Ed. 1/3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120×210cm_2011

이 세상 모든 것은 변한다. 그리고 영원한 것은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애초부터 미래에 나타날 변화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우리가 못 볼 뿐이다. 자유로운 눈으로 보면 그 변화가 보이는데 우리들 눈이 굳어 있기 때문에 못 보는 것일 뿐이다. 동일자의 철학은 어떤 사물은 오로지 동일성 즉 아이덴티티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사람이건 사물이건 국가건 그 동일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질적인 것을 배제해 버리는 것이 자기인식에 도달하는 과정이라고 가르쳤다. 요즘 시대는 그런 동일자의 철학을 믿지 않는다. 동일자 속에 타자가 숨어 있다고 믿는 시대인 것이다. 사진은 철저히 동일자의 철학에 기반한 표상방식이다. 어떤 사물이 오로지 한 가지 상태로만 존재할 수 있다고 강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진은 동일자의 타자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렌즈 앞에는 사진과는 완전히 다른 3차원의 현실과 사물이 존재해야 하며 렌즈 뒤에는 사진을 발명했지만 그것과 완전히 다른 존재인 인간이 있다. 그런 타자들과의 적대적인 만남을 잘 해소해서 생겨나는 것이 사진이다. 그 과정에서 사물의 천변만화하는 모습은 사라지고 껍질만 남은 것이 오늘날 우리가 걸작사진이라고 부르는 얄팍한 표상들이다. 사진이 예술이 되는데 결정적인 한계는 바로 그런 사물의 천변만화하는 모습은 배제해 버리고 지금 이 순간 몇백분의 일초만 보여준다는 점이다. ● 그런데 황규태의 카메라눈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는 과거 속에서 이미 미래를 봤으며 작은 것 속에서 큰 것을 보았다. 남들은 텔레비전을 보면서 드라마 주인공이 죽는다고 희노애락 하는데 그는 거기서 작디작은 현미경적 픽셀을 봤다. 그의 시선은 경계를 모르고 무한대로 뻗어나간다. 그의 눈은 강물의 출렁임에서 컴퓨터 화면상의 패턴을 읽는다. 남들은 오로지 카메라로 찍어야 사진이라고 하는데 그는 스캐너나 복사기도 카메라라고 하며 사진을 만들어낸다. 이런 자유로움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어떤 사람이 성격이나 성향이 자유로와서 어디에 묶이지 않고 멋지게 생활한다는 그런 뜻이 아니다. 자유로운 프레임이란 프레임을 멋지게 써서 남들이 찍지 않는 각도로 사진을 찍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프레임의 구속력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르게 사고하고 다루는 태도이다. 1960년대의 고무신에서 21세기의 픽셀을 보는 것, 프레임의 균형과 비례를 무시하고 완전히 새로운 이미지를 보는 것, 그리하여 자신이 찍은 사진의 정체성을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것이 황규태의 자유로움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사진의 겉과 속을 뒤집어 입는 자유로움이다. 우리는 셔츠 하나라도 뒤집어 입으면 겉으로 레이블과 솔기가 나와서 창피하게 생각한다. 뭐든지 안과 밖의 경계는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규태에게는 그런 구분이 없다. 그의 사진에서는 앞과 뒤, 겉과 속, 큰 것과 작은 것의 경계가 없다. 문화의 필연성과 자의성을 가르는 엄격한 경계는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황규태_한강 Collection-Blue_Ed. 1/3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120×210cm_2011

그가 얼마나 자유로운가 하는 정도를 말 해주는 좋은 사례가 있다. 이름이 알려진 한국의 중견 이상 사진가들은 다 아류들을 거느리고 있어서 젊은 사진가의 포트폴리오를 보면 대번에 아무개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런데 황규태를 따르는 아류는 아무도 없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의 자유로움을 흉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단순히 스타일 상의 자유로움이라면 얼마든지 흉내 낼 수 있다. 머리 스타일을 흉내 내면 되고 이름을 비슷하게 지으면 된다. 그러나 황규태의 자유로움은 근본적으로 프레임의 질서를 벗어나 있는 것이고 사진에서 정체성의 문제를 완전히 다르게 보고 있는 래디컬한 것이기 때문에 감히 아무도 흉내 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자유로움을 흉내 낼 수 없는 이유는 다른데 있다. 그의 자유로움은 겉으로 보이는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이다. 태도나 사상이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그가 이 세상에 놓여 있는 매트릭스가 자유로운 것인데 그것은 쉽게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의 자유로움이다. 호랑이가 근본적으로 지렁이와 다르게 태어났듯이, 황규태는 사진이라는 지평 위에서 근본적으로 남들과 다르게 보는 존재이다. 거기 그는 홀로 서서 본다. 즉 남들에게 오염돼지 않은 눈으로 홀로 서서 보면서 자유를 획득했다. 우리는 그 자유가 두렵다. 그러나 두려운 일에 발을 디딜 때 진정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 아닐까? ■ 이영준

Vol.20130911b | 황규태展 / HWANGGYUTAE / 黃圭泰 / phot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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