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9.21

지난 17일은 정선에 다녀왔다.

매년 명절을 앞두고 성묘도 할 겸 연례 행사처럼 갔지만,

이번에는 어머니 묘를 이장해 굳이 갈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주소지가 정선으로 되어있어 재난지원금을 정선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제사장도 보고 신세 진 분들에게 선물이라도 전할 겸 정영신씨와 정선에 간 것이다.

 

서울서 챙겨 온 선물을 전하러 아랫 만지골의 최영규씨 댁부터 들렸다.

마침 두 내외가 집에 있어 직접 전해 줄 수 있었는데, 최영규씨 인사가 걸작이다.

“이제 모친 무덤을 파갔으니, 선물을 주지 않아도 되는데 왜 가져 왔냐?”는 것이다.

‘십여 년을 해 온 일인데 어찌 그만둘 수 있냐?“고 답했지만, 듣기는 좀 그렇더라.

 

마침 일하러 오기로 한 일꾼들 주려고 가마솥에 곰국을 잔뜩 끓여 놓았는데,

펑크를 냈다며 곰국이라도 한 그릇 하라며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아침 식사도 하지 않고 달려 온 터라 한 그릇 맛있게 얻어먹었으나,

이놈의 차 때문에 반주 한 잔 못 걸치는 심정, 아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윗만지골 창수네 집도 들렸다.

그 집에는 일찍부터 손님들이 찾아와 음식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선물만 전하고 떠나려 했더니, 커피라도 한잔하고 가라며 통 사정이다.

지난 번에 방황하는 아들 창수 주라고 카메라 한 대를 맡겨두었는데,

”창수가 너무 좋아한다“며 고마워했다.

아무튼 사진에라도 재미를 붙여 마음을 다잡았으면 좋겠다.

 

장 볼 일이 있어 서둘러 정선 읍내로 나갔다.

정선 장날로 맞추어 갔는데, 이렇게 서울과 정선의 물가 차가 큰지는 미처 몰랐다.

서울보다 시골이 물가가 더 비싸다는 이야기야 들었지만,

그것도 공산품도 아니고 시골에서 재배하는 농산물 가격 차이가 이리 심할 수 있단 말인가?

재래시장도 아니고 정선 축협 하나로마트와 서울 은평구 ‘하모니마트’의 가격 격차가 말이다.

 

그렇다고 장 보지 않을 수도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필요한 것만 골랐다.

손이 오므라들어 많이 샀다고 생각했는데도 지원금은 남았다.

덕분에 추석빔으로 신발가게에서 신발까지 한 켤레 얻어 걸쳤다.

주인에게 정들었던 헌 신발도 싸 달라고 했더니,

“구멍 난 쓰레기를 왜 가져가냐?‘는 타박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새 신발을 신어보니 너무 가벼워 날아갈 것 같았다.

한 판 뛰어도 좋을 것 같아 ”사모님! 블루스나 한번 땡기시죠“라며 능청을 떨었다.

 

언제 올지도 기약 없는 정선을 떠나오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선과의 연을 이어갈 것인지 끊을 것인지를 논했으나, 결론이 나지 않았다.

더 두고 보기로 세월에 맡겼지만, 마음은 이미 떠난 것 같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6일은 정선 만지산에 계신 어머니를 하늘문납골당에 모시는 이장 날이다.

하루 전 정영신과 함께 정선 귤암리로 갔으나, 쉼 없이 내리는 비 때문에 걱정이 태산 같았다.

13년 전 어머니 장례 때도 장대 같은 비가 내려 난장판이 된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쏟아지는 비에 가려 지척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 딸이 타고 오던 승용차가 개울에 빠져 병원에 입원 하는 등 한 바탕 난리를 쳤다.

쏟아지는 소나기를 뚫고 산 위까지 시신을 옮겨야 하는 상여꾼들의 고생은 말할 것도 없고, 흙 또한 흙이 아니라 찰떡이었다.

찰흙이 장화에 달라붙어 발이 떨어지지 않아 걸음조차 제대로 옮길 수 없었다.

어떻게 장례를 치뤘는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고향 선산을 두고 정선 만지산에 안장할 것을 제안한 나는 가족 볼 면목도 없었다.

어머니께서 생전에 내 죽으마 절대 너거 아부지 옆에 묻지 마라입버릇처럼 하신 말씀을 믿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미워 한 말을 곧이곧대로 옮겼으니 하늘이 난리법석을 친 것 같았다.

어머니 말씀을 거스를 수도 없었지만 가까이 모시고 싶은 욕심도 한 몫했다.

 

오래된 이야기를 새삼 꺼내는 것은 그때처럼 비가 내려 걱정이 되어서다.

날씨 때문인지 오기로 한 가족들도 당일 새벽에 오거나 원주 화장터로 바로 오겠다며 일정을 바꾸어 버렸다.

아무튼, 일할 분들이 오기로 한 아침에라도 비가 그쳐주길 바랄 뿐이었다.

 

만지산에 오후 세시 쯤 도착했으나, 불 난 집은 보기도 싫어 곧바로 창수네 집부터 들렸다.

이선녀씨는 비 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란 노랫말처럼 일터에 가지 않고 술판을 벌여 놓았다.

집안 버팀목이었던 창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창수마저 오락가락하고 있으니 일하기 싫은 모양이다.

그 많은 자기 땅을 놀려두고 다른 집에서 일해주며 사는 것도 사람이 그리워서다.

술 한잔하며 하는 하소연에는 반가운 소식도 있었다.

새처럼 중국까지 날아간 꿈을 꾸었는데, 중국 군중들로부터 큰 환대를 받았단다. 꿈마저 그녀 이름처럼 동화적이다.

그 꿈을 꾼지 얼마 후, 창수 아버지가 농어촌공사에 남기고 간 빚 2억을 갚을 수 있었다고 한다.

방치한 역전 땅이 공원 부지로 바뀌며 정선군에서 보상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금방 찐 옥수수를 안주 삼아 막걸리를 권했으나, 차 때문에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

늦기 전에 머물 방을 부탁해 놓은 최영규씨 댁으로 옮겨가야 했다.

아랫만지로 내려가니 지척이 보이지 않았는데, 그때까지 읍내 나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민박집에 가기위해 후진을 하다, 오래전 딸이 빠진 개울 가림막에 부딪혀 뒤 범프가 찌그러졌다.

 비에 대한 징크스 액땜이라며 스스로 위안했다.

 

몇 년 만에 들어가 본 최연규씨 민박집은 놀부 대궐집처럼 지어 놓았다.

방이 네 개인데다 마루 한가운데 노래방 기계와 술상까지 있으니, 모여 놀기 딱 좋은 공간이었다.

일찍부터 잠잘 준비를 하는데, 차 소리가 나며 최영규씨 내외가 들어왔다.

정선에서 오는 길에 술과 안주까지 사 온 것이다. 술잔에 만지산 비화를 담아 낄낄거렸다.

 

난, 최영규씨를 대궐 같은 놀부집에서 흥부같이 사는 사람'이라 말한다.

동년배기도 하지만 만지산 사는 분 중에 유일한 친구다.

오래전 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시어 전화로 묏자리 좀 빌려 달라 했더니, 두말없이 마련해 주었다.

상여꾼 모으는 일에서 부터 그 초상집 난장판 정리를 다 해준 사람이다.

내가 해줄 수 있었던 것은 사진 작품 한 점 선물한 것뿐이다.

그날도 민박 사용료를 주었더니, 가족이 오지 않아 받을 수 없다며 돌려주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보니 다행스럽게도 비가 그치고, 앞산에 걸린 구름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반겼다.

좀 있으니 동생 창호가 도착했고, 뒤이어 이장을 맡은 업체에서도 도착했다.

 

 

산신제와 어머니께 간단한 예를 올린 후 땅을 팠으나, 비에 젖어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만약 육탈이 되지 않았다면 원주 화장장까지 가야 하는데, 화장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마침 한순식씨가 일하러 가지 않아 굴삭기를 불러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었다.

굴삭기 사용료를 주었으나, 기어이 받지않겠다고 우겨 식사라도 하라며 운전석에 묻어두었다.

 

관을 열어보니 다행스럽게도 육탈이 완전하게 되어 유골만 남아 있었다.

일하는 분이 정성스럽게 유골을 수습하여 현장에서 간이화장을 할 수 있었다.

 

급히 가족들에게 원주 화장장으로 오지 말고 일산 납골당으로 오라는 연락을 했다.

시간이 줄어들어 서둘 필요도 없이 천천히 고양시 하늘문납골당으로 갈 수 있었다.

가는 길에 '횡성한우직매장'에 들려 아침 겸 점심을 동생이 샀는데,

부드러운 육질의 쇠고기가 입에 착 달라붙었다. 횡성한우가 왜 비싼지 이해되었다.

 

납골당 하늘문을 찾아가는 긴 시간은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그 동안 한 달에 두 번씩 갈 때마다 어머니를 보살피기는 했으나 아무도 찾지 않는 외딴곳에서 얼마나 외로웠겠는가?

가족들도 일 년에 한 차례는 어머니 뵈러 왔는데, 생전에 지극히 좋아한 막네 손녀 은겸이의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남달랐다.

가족들도 처음에야 강변길 따라가는 정선 풍경이 좋았겠지만, 서너 시간의 운전 길이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다들 운전 하느라 정동지가 유골함을 안고 가는 것도 편치 않았다.

 

납골당 하늘문에 도착해 보니 많은 가족이 나와 있었는데, 이 얼마 만의 반가움인가?

누님 조영희, 형님 조정호, 동생 조진옥을 비롯하여 형수 김순화, 매부 김종성, 조카 조향, 조웅래, 조은겸,

박홍전, 박유정 등 일이 있어 못 온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와 있었다.

예쁜 녀석들이 아줌마가 되어버린 조카들 모습에서 세월의 빠름을 절감했다.

 

진주청국장‘하던 누님이 장사를 접었다는 소식도 전해 주었다.

진주에서 여의도로 여의도에서 강남으로 옮겨 온 수십 년의 사업이지만 건물 개축으로 밀려났다고 한다.

코로나 시국인지라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않고 당분간 폐업에 들어갔단다.

식당 일이 진저리가 날 만도 한데, 누님은 일이 없으니 몸이 편치 않다며 불만이다.

 

매년 기일마다 납골당에서 모이기로 약속하는 걸 보니, 가까이 모신다고 해서 자주 뵙는 것도 아니었다.

, 납골당 마저 가족들이 추억하기 위한 공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자연과 융화된 육신 따라 유골도 자연으로 돌려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그토록 혼줄이 났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리 삐딱한 생각만 하는지 모르겠다.

 

어머니를 안치하며 차례대로 영원한 안식을 기원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아! 너무 허무하다.” 모든 게 한 순간이구나.

 

어제 오전 7시 무렵, 녹번동 정영신씨로 부터 전화를 받았다.

정선 만지산 집에 불이 나 모든 게 타 버렸다는 비보였다.

 

그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설마, 누군가 빨리 오라는 장난 전화를 했겠지”라고 위안했으나

부리나케 정동지를 만나 정선으로 떠난 것이다.

 

연락에 의하면 밤1시 40분 경 옆집에서 불이 나

우리 집으로 옮겨 붙었는데, 원인은 누전이란다.

옆집 한씨가 전기기술자인데, 누전으로 불났다는 건 이해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 집은 동강 변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옛집이 아니던가?

동강 댐이 무산되어 주민들에게 주택건설비를 지원할 때

동강 변에 있던 집들은 모두 헐려나가며 국적불명의 주택이 들어섰다.

 

집만 아니라 그 안에는 동강 사람들의 삶의 변천사가 담긴 자료는 물론,

긴 세월 수집해둔 소중한 사진자료들이 차곡차곡 보관되어 있었다.

한 달에 두 번씩 정선 갈 때마다 새로 생긴 자료들을 챙겨가

정선 집은 자료 창고나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부엌 헛간을 개조해 암실과 작은방까지 만들어 두었으나

방은 물론 암실 기자재 위에도 숱한 짐이 쌓여 창고가 되어버린 것이다.

 

가장 큰 걱정거리는 그 곳에 남겨 둔 필름 박스였다.

필름 박스 두 개 중 한 개는 스캔받기 위해 녹번동으로 옮겼지만,

한 개는 만지산 집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자동에 들어 간 이후 몇 년 동안 필름박스를 손도 대지 못했다.

그 일만 끝냈다면 나머지 것과 바꾸어 필름 이미지는 건졌을 것이다.

 

그 집에는 동강자료 뿐만 아니라 나는 물론 정영신씨가 전시한

수 많은 사진 작품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스캔된 이미지야 다시 만들면 되겠지만 사라진 이미지는 어쩌냐?

 

그리고 둘 만의 작품만 아니라 다른 작가들의 그림이나 도자도 있었다.

강용대 그림에서부터 초창기의 강찬모 그림과

수안스님, 최울가, 이존수, 신동여, 이청운작가 등 십여 점이 보관되어 있었고

나를 그려 준 박재동선생 그림을 비롯한 초상화도 여러 점 있었다.

그리고 통도사에 계신 수안스님께서 방문하여 ‘몽암’이라는 현판까지 달아주셨다.

꿈의 암자라고 이름 지었는데, 결국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정선 만지산에 도착하니, 옆 집 두 채와 우리 집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포크레인만 불탄 현장을 지킬 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화재 규명은 물론 불탄 필름 흔적이나 피해 자료를 찾아야 하는데,

왜 포크레인이 현장에 들어 와 헤집어 놓았을까?

한 쪽에선 불씨가 남았는지 연기가 피어오르고, 굶주려 지친 개들만 여기 저기 퍼져 있었다.

 

불탄 잔해를 살펴보니 그동안 아무리 찾아도 없었던

90년도 만든 ‘전농동588번지’ 전시 팜프렛 잔해도 보였다.

그렇지만 건져낼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윗만지 창수네 집으로 올라갔다.

고사리 꺾던 이선녀씨는 하던 일을 제쳐두고 술상부터 차렸다.

마음을 위안해 줄 게 술 밖에 더 있겠는가?

 

막걸리가 몇 잔 들어가니 한결 마음이 편하더라.

들려준 바에 의하면 동네사람들이 밤잠을 설쳤고, 소방차가 일곱 대나 동원되었단다.

다들 산으로 번지지 않도록 막았을 뿐, 속수무책이었다고 한다.

 

누전이란 것은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더니, 아니란다.

어제 손님 네 분이 윤인숙씨 집에 와 묵었는데, 늦도록 고기 구워 술을 마셨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은 불씨가 살아나 옮겨 붙은 것으로 추정한단다.

 

불난 집 이야기에서 웃기는 이야기로 불이 옮겨 붙었다.

살러 온 색시마다 도망쳤다는 뱃사공 유춘식씨 이야기에서부터

한 밤중 일 치던 내외가 석유병을 들기름으로 착각해

거시기에 불이 붙은 비화 등 배꼽 잡을 옛날 이야기들이 나왔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이선녀씨가 따 놓은 두릅을 두 보따리나 챙겨주었다.

두릅 값으로 신사임당 한 장을 꺼내주었더니, 감동적인 말을 했다.

“인정을 돈으로 계산하지 말자”는 거다.

 

마을 이장 처럼 항상 보살펴주는 최연규씨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다들 불난 집에 와 있단다.

 

 

내려 가보니, 동내 사람들이 술 한 잔 마시며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이야기했다.

나야 보험이라고는 자동차 보험 밖에 없지만, 옆집도 화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요즘 집 공사 중이라 현금을 칠백만원이나 두었는데, 그 것까지 홀랑 태웠다는 것이다.

보상 받기 위해 잿더미를 뒤적거려 이백만 원 정도의 흔적은 찾았다고 한다.

 

자칫했으면 생사람 잡을 뻔 했더라.

숨이 막혀 일어나니 연기가 차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돈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팬티 바람으로 튀 쳐 나갈 수밖에 없었단다.

천만다행인 것은 그날 밤 바람이 한 점도 없었다는 점이다.

불이 산으로 옮겨 붙었다면 대형 산불로 번질 가능성이 많았다.

동원된 소방관들도 불이 윗쪽으로 번질 것을 대비해 포진했지만,

일방통행인 만지산 길에 물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진화가 더 더뎠다고 한다.

 

늦게 불붙은 우리 집은 소방관들이 조금만 빨리 출동했어도 옮겨 붙지 않았을 거고,

물 공급만 원활했어도 자료의 반이라도 건져낼 수 있었다고 한다.

산불이나 마찬가진데, 소방헬기는 왜 동원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동강 댐으로 시끄러울 때 왔으니, 어언 이십 오년의 세월이 훌쩍 넘었다.

환경 사진가들이 만지산에 둥지 틀고 물고기나 곤충, 들꽃 등 각자 전문분야를 기록했는데,

난, 동강 변에서 살아 온 사람들의 삶을 기록한 것이다.

지금 불탄 집이 그 당시 캠프로 사용했던 집이다.

 

2000년, 동강 사람들의 눈물겨운 이야기를 담은 ‘동강 백성들’ 사진 산문집과

조해인시인의 ‘어라연 뱃사공 이해수씨’라는 동강 시집이 나올 무렵에는

‘동강주민을 위한 굿마당’을 옛 귤암분교에서 열기도 했다.

 

김명성씨가 주동이 된 ‘창예헌’ 예술가들이 버스 몇 대에 나누어 타고 찾아 와

밤늦도록 주민들과 어울렸는데, 이원창 사또 나리께서 늦게 나타나는 바람에

좁은 도로가 마비되는 등 조용했던 동네에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다.

 

그 무렵은 다들 동강 댐 찬성하는 주민들을 나쁜 놈으로 몰아세웠다.

댐을 만들라는 목소리를 낼 수 밖에 없는 속 사정은 일언반구도 없이

여론몰이 하는 형태는 지금의 기레기나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환경운동연합’과도 반대의견을 낸 것은 사람이 살아야 동강도 살수 있다는 말이다.

 

빚에 쪼들려 물에 투신하거나 농약먹고 자살하는 등

동강 사람들이 여럿 죽어나가자 주민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

명동성당 앞에 진을 쳤는데, 날씨마저 얼마나 추웠는지 모른다.

그 당시 충무로에 있던 ‘현대사진가회’ 강의실을 비워 귤암리 노인들을 모셔놓고

밤 세워 전단지 만들고 보도자료 보내느라, 사진단체 사무실이 동강사람들 전진기지가 되었다.

이틀 날 ‘문화일보’ 사회면에 동강주민 살리라는 사회면 특집기사가 실린 것이다.

 

주민대표 이영석씨를 비롯한 몇 명이 김대중 대통령 호출로 청와대에 불려갔다.

피해주민에게 주택자금 지원과 부대시설을 지원하기로 약속받는 등 난제를 해결했다.

그 때 출판한 ‘동강환경사진집’과 ‘동강 백성들’ 산문집으로 환경단체 프로젝트는 끝났지만, 

두메산골사람들’과 '산'을 주제로 사람과 자연 환경을 찍으며 혼자 눌러 앉았다.

 

그 곳은 자연 환경도 아름답지만, 절처럼 마음이 편안해 떠나기 싫었다. 

몇 년 지난 후 프로젝트에 같이 참여한 사우가 그 집을 자기가 사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울며 겨자 먹기로 빚내어 사게 된 것이다.

그 많은 짐을 옮길 곳도 없었지만, 하던 작업이 끝나지 않아서다.

오죽했으면 역마살이 끼어 한군데 오래 정착하지 못하는 버릇을 알아

돌아가신 어머니까지 만지산에 묻었겠는가?

 

20년 전 평당 팔만원에 400평을 샀다.

당시의 시세가 평당 만원정도 했으니, 바가지도 그런 바가지가 없었다.

 집도 밭에다 지은 무허가 농가였다.

문제는 한 집이었던 옆집을 다른 사람에게 잘라 팔며 절집 같이 고요한 만지산의 낙원도 끝나버렸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거나 지나치는 사람들로 정동지가 정선 집에 가기 싫어했다.

욕실도 없고 화장실도 멀리 떨어져 있어 밖에서 목욕을 하거나 소변을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예 우리 집 마당을 주차장으로 사용하며 들락거리니, 나 역시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옆 집은 한 때 대학로에서 카페를 운영 했다는 박진기씨가 살았으나

땅 살 형편이 못 되자 미국 사는 친구를 끌어들여 사도록 부추긴 것이다.

옛 말을 믿을 수는 없으나, 그 집에 우환이 생긴 원인은 집 구렁이 때문이 아닌가도 추정된다.

 

2002년 여름, 우리 집 모퉁이에 팔뚝 굵기의 능구렁이가 똬리 틀고 있었다.

최종대씨가 얼른 잡아 옆집 부엌의 빈 장독 속에 넣어둔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옆집은 최종대씨 장인인 이관옥씨가 오가면 사용한 집인데,

이튿 날 뱀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고 한다.

집 구렁이를 잡아서 안 된다는 옛말이 생각나 늘 마음이 꺼림직 했다.

 

이번에 불난 발화지점이나 사람 죽은 방도 그 부근이었다.

비록 그 일 때문은 아니겠지만, 우환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 집을 산 성수씨가 어느 날 술이 취해 부얶 방에 들어가다 깨진 방문 유리에

동맥이 찔려 죽는 변을 당하는가하면, 처음 잠깐 살았던 박진기씨도 아내와의 불화로

집에서 석유를 몸에 붓고 불을 붙여 자살한 것이다.

 

성수씨가 갑작스런 변을 당하자 아내가 무서워 못살겠다며,

이사 가려고 급히 집을 내놓았는데, 그 집을 산사람이 이번에 불 난 윤인숙씨다.

세상을 하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구렁이를 잡은 최종대씨도 나이에 비해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어지는 우환이 우연치고는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우리 집은 일찍부터 ‘사진 굿당’이란 이름을 내걸고 여러 가지 일을 벌였다.

산삼 심는 ‘농심마니’ 팀들을 초대하여 만지산에 산삼을 심었고,

사진굿당 앞 서낭당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때로는 굿당 축제에 무세중씨나 정선 무당을 모셔 와

밤 세도록 징소리 울리며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굿판을 벌이기도 했다.

 

일 년에 한 번씩 축제를 연 것도 동강사람들 자료관으로 자리잡기 위해서였다. 

타지의 예술인들을 불러 모아 수시로 놀이판을 만들어 문화적 역량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동강과 사람들에 대한 숱한 자료들을 모아 왔으나, 그 꿈은 순식간 화마에 휩쓸려가고 말았다.

 

우연치고는 근래에 생긴 일들도 예사롭지 않았다.

여지 것 그 집을 전혀 손대지 않았던 것은 돈도 없지만,

집 자체를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불편함을 토로하는 정동지의 불만을 깔아뭉갠 것이 미안할 뿐이다.

 

그런데, 보름 전 느닷없이 옆집에서 우리 집에 신식차양을 달아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호의를 거절할 수도 없었지만, 좋아하는 정동지를 보며 어찌 반대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다음 주에 정선군청에 들어갈 작정으로 구체적인 기획안까지 만들어 두었다.

그 집에 보관된 동강자료는 물론 집 자체를 정선군에 넘겨주기 위해

실무자를 만나 손 털 계산을 한 것이다.

 

또 하나는 인사동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기 위해 몇 년 동안 손대지 않고

쳐 박아 둔 녹번동 필름박스를 정리하기로 작정했다는 점이다.

그 필름을 스캔 받은 후 정선 필름과 바꾸어왔다면 이미지는 살아남지 않았겠는가?.

한꺼번에 일어난 이 일련의 갑작스런 변수들이 화재와 연관은 없었을까?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 지 걱정이 태산 같다.

아무래도 윗만지산의 마지막 우환은 내 차례가 될 것 같다.

이년 쯤 후에는 동자동 쪽방 일도 마무리 될 것으로 여겨진다.

재건축이 끝나 다들 한 곳에 머물게 되면 더 이상 할 일은 없다.

그 때쯤 집터에 오두막 지어 살다 만지산에 뼛가루를 뿌리게 할 예정인데, 뜻대로 될지 모르겠다.

 

동네 주민들이 위로 차 여럿이 모여 술잔을 돌렸으나

예전부터 살던 주민은 최연규 내외와 김순배씨 뿐이었다.

 

다들 낯설거나 안면 정도 있었는데, 술 마시는 분위기가 무거워 노래 한 곡 불렀다.

그런데, 웃기려 불렀던 성냥공장 노래마저 노동가처럼 비장감이 뚝뚝 흘렀다.

 

“만지산 성냥공장

성냥 만드는 아저씨

하루에 한 갑 두 갑

낱 갑이 열두 갑

바지 밑에 감추고서

정문을 나오다

바지 밑에 불이 붙어

자지털이 다 탔네

만지산 성냥공장

아저씨는 백자지 백자지“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정선 만지산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간밤의 폭우로 강물이 넘쳐 다리가 물에 잠겨버렸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잠수교라 비가 조금만 많이 와도 다리를 건너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높은 다리를 만든 다음부터는 다리가 잠겨 고립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은 일이다.

 

10년 전에는 정선 읍내 장 보러 갔다 오니, 그 사이에 강변길이 침수되어

이틀 동안 정선읍내 여관에서 물 빠지기만 기다렸던 때도 있었다.

물가에 산다는 것이 결코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오래전에는 옛 귤암분교를 빌려 레프팅업을 운영하던 외지인이 갑자기 물이 불어나자

 서둘러 다리를 건너다 차가 물에 떠밀려 가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

 산길로 돌아 갈 수도 있었는데, 무엇이 급해 목숨까지 버렸는지 모르겠다.

 

나 역시 물이 빠지도록 집에서 기다리면 되겠지만,

이튿날이 생일이라 아침식사를 같이 하자는 정영신씨의 약속을 지켜야 했다.

이틀 전부터 구름이 오락가락하며 뜸을 들이더니, 엄청난 폭우를 쏟아 부었다.

 

윗만지산 중턱에 있는 우리 집은 사방이 산으로 가려있어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다.

20여 년 동안 살며 한 번도 폭우나 태풍 피해를 입은 적이 없었다.

 

2002년 8월 태풍 루사가 몰아 닥쳤을 땐, 이변도 있었다.

한 밤 중에 산에서 돌이 굴러 부딪히는 소리가 대포 터지는 소리를 방불케 했다.

무서워 꼼짝도 못하고 밤을 지샜는데, 새벽에 나가보니

서낭당 앞 공터가 폭격을 맞은 듯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돌덩이가 개울과 도로 따라 굴러 우리 집 주변은 아무 피해가 없었다.

 

10년 전에는 스님 한 분이 찾아와 집 터에 절을 짓겠다며 땅을 팔라고 종용한 적도 있었다.

풍수지리적 여건이 자기가 찾던 곳이라지만, 살고 있는 집을 팔수야 없지 않은가?

아마 명당인 것을 알아본 듯 했다.

 

첫날은 비 때문에 일을 못하고, 둘째 날은 땅이 질퍽거려 일을 못했다.

방안에서 혼자 노닥거리려니 무료해 미칠 지경이었다.

만지산에는 티브이도 인터넷도 없어 책 볼일 밖에 없는데,

요즘은 시력에 문제가 생겨, 책도 오래보지 못한다.

 

무료한 마음을 아는듯, 아랫만지 사는 최연규씨가 찾아왔다.

집에 술안주가 없는 것을 눈치 챘는지, 윤인숙씨가 사는 옆집으로 오라고 했다.

술 마시러 온 것이 아니라, 술꾼을 모으러 온 것 같았다.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자기 집으로 가자는 것이다.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차를 타고 아랫만지로 넘어갔다.

아랫만지 가는 도로도 물에 잠겼으나 사륜구동이라 산길을 넘어갈 수 있었다.

아랫만지 아낙들이 물 구경하느라 입구까지 나와 있었다.

 

최연규씨 댁은 농지가 많은 대농이라 일반 농작물만 아니라 사과나 배 등 과일도 없는 것이 없다.

소도 여러 마리 키우는데, 그 많은 일을 두 내외가 맡아, 농사철에는 한가하게 만나기도 쉽지 않다.

얼마나 부지런한지 모든 농작물이 풍작이었다. 고추도 과일도 주렁주렁 달렸다.

 

그 날 아낙들은 깻잎을 땄지만, 남정네는 냉동실에 있는 홍어를 안주로 술을 마셨다.

홍어가 부족한지, 이번엔 매운탕 끓인다며 물고기 잡으러 가자는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물이 넘쳐 고립되면 항상 즐기는 놀이지만, 대개 조그만 피라미들만 잡힌다.

그물 채를 급조하여 물가로 나가보니, 아까보다는 물이 많이 빠져 있었다.

강변길 일부가 모습을 드러냈으나, 다리는 그 때까지 형체도 보이지 않았다.

 

길가에 심어 둔 농작물들은 휩쓸렸고, 떠내려 온 쓰레기들만 나무에 엉켜 붙어 있었다.

쓰레기 더미에는 고구마가 능쿨채 떠내려 와 걸려 있기도 했다.

밤 늦게는 물이 빠져 다리를 건널 수 있을 것 같아, 자리를 슬쩍 피해버렸다.

고기를 잡은 후 계속 술을 마신다면 나중에 출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술을 깨기 위해 밭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옆집의 윤인숙씨가 데리러 왔다. .

손사래를 친 후, 밤 열시쯤 출발해 보니 길가의 물은 빠졌으나 진흙 투성이었다.

 미끄러운 길을 힘들게 뚫고 나갔으나, 다리가 막혀있었다.

 

다리에 물은 남았지만 갈 수는 있었는데, 떠내려 온 나무둥치가 다리 중턱을 가로막았다.

늦은 시간이라 이웃의 도움은 물론 기계 톱도 빌릴 수 없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정영신씨에게 전화 걸어 아침 약속을 저녁약속으로 바꾸어야 했다.

 

그러나 돌아 오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진흙에 바퀴가 빠져 계속 헛바퀴를 돌렸다.

핸들을 돌려가며 계속 페달을 밟았더니,

차가 앞으로 가지 않고 옆으로 미끄러지며, 뒷 범퍼가 돌벽을 치고 빠져 나왔다.

범퍼 부딪히는 소리가 가볍기에 확인해 보지도 않고 돌아 와 버렸다.

 

그 이튿 날은 새벽부터 일어나 열무도 솎아내고

지난번에 수확하고 남겨 둔 옥수수대와 무성한 잡초들도 제거했다.

마른 땅이라면 옥수수뿌리는 괭이로 캐야 겠지만, 땅이 질어 손으로 뽑기 시작했는데,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새벽부터 시작한 일이 점심 때가 지나서야 끝났다.

 

그 때사 시장기가 몰려오기 시작했는데, 허리가 아파 일어서지도 못하겠더라.

한번 일에 빠지면 힘든 것조차 잊어버리는, 고질병이 아닐 수 없다.

정선만 갔다 오면 그 다음 날 곤욕을 치루지만 잘 고쳐지지 않는다.

 

라면으로 허기를 메운 뒤, 수확한 농작물과 짐을 싣다보니, 차가 엉망진창이었다. 

간밤에 진흙탕에서 씨름하였으니 깨끗할리야 없지만, 뒷 범퍼 모서리가 쩍 벌어져 있었다.

 

얼마 전에도 문짝이 망가져 중고 문짝을 60만원이나 들여 교체했는데,

차주인 정영신씨에게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기초생활수급비 받아, 정선 오가는 기름 값과 차 유지비에 대부분 소모하는 편인데,

더 이상 수리할 여력이 없어 난감했다.

 

부득이 내년에는 땅도 쉴 겸, 농사를 짓지 않을 생각을 했다.

길에 돈 뿌려가며 농사 지어도 모종 값과 비료 값이면 사먹고도 남는다.

 

정선 만지산에서 출발한 시간은 오후1시 무렵이었느데,

언제 물난리가 났느냐는 듯, 도로와 다리는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너무 무리하게 일해 손가락은 깨졌고 팔목은 삐었지만, 운전을 마다 할 수 없었다.

 

오다보니, 강변 도로에 아스팔트 조각들이 떠 내려와 쌓여 있었다.

몇 달 전에 시멘트 포장이 된 산길을 모두 아스팔트로 덧 입혔더라.

낭비가 심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좋아하는 주민도 있어 입을 다물었는데,

이게 토목업자와 군의원의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멀쩡한 포장길에 왜 날림공사 하느라 돈을 쏟아 붓는지 모르겠다.

정선군은 돈이 남아돌아 탈이다.

 

매번 정선 갈 때는 새벽에 출발하고, 올 때는 한 밤중에 출발한다.

그래서 자동차가 정체를 한 번도 겪지 않았는데,

이 날은 하는 수 없이 한 낮에 출발하여 엄청난 곤욕을 치루었다.

양평을 경유하는 국도는 늦어도 네 시간이면 충분한데, 이 날은 일곱시간 걸렸다.

 

양평부터 밀리기 시작하더니, 퇴근 시간과 마주친 서울에서는 다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저녁식사를 일찍하는 정영신씨가 기다려줄지 걱정했으나 기우에 불과했다. 

밥상은 차려 놓고, 아들 햇님이 내외와 손녀 하랑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좀 있으니 가족들이 나타났는데, 예쁜 하랑이 덕분에 지친 피로도 잊어버렸다.

생일케익까지 사와 복에 없는 생일잔치까지 열게 된 것이다.

 

생일밥 먹기가 이리 힘들다면, 다시는 생일을 맞지 않으리...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구월 첫날 정선에 울 엄마 무덤에 벌초하러 갔다.
새벽길의 양평 물안개는 뭐가 뭔지 오리무중이고,

정선 만지산 살팔봉의 지조는 변함없었다.

 

 

 

만지산골에 도착하니, 눈이 뻔쩍 뜨이는 궁디가 수줍은 듯 날 반겼다.

 

 

 

두 달 넘게 뻔질나게 들락거렸지만, 엉뚱한데 신경 써다보니 온 밭이 잡초세상이었다.

호순이 유혹도 마다하고 잡초와의 전쟁에 들어갔는데, 허리가 뻐근했다.

 

 

 

 

 

 

울 엄마 무덤에 벌초하러 갔다.

벌초 할 때 마다 손가락에 피 칠갑을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기일과 추석에 맞추어 일 년에 두 번씩 벌초하지만, 이번 기일에 조카가 한 말이 떠 올랐다.

초죽음의 몰골로 벌초하는 삼촌을 본 안타까움에 비롯된 제안이었지만,

할머니 시신을 화장하여 모두가 편하게 서울 인근 납골당에 모시자는 것이다.

 

 

 

사실, 아버지가 묻힌 우리 집 산소는 경남 영산의 영축산 대암골에 있건만,

울 엄마를 만지산에 묻어야 했던 사연도 기가 막힌다.

생전에 나에게 두 번이나 간곡하게 부탁한 것이다.

문호야~ 내 죽으마 절대 너거 아부지 옆에는 뭍지마라

자유부인 처럼 진보적인 삶을 원한 울 엄마가 보수적인 아버지 밑에서,

억눌린 삶을 저승까지 끌고 가지 않으려는 부탁이 아닌가 생각 되었다.

 

 

 

그래서 아버지 무덤에 비수를 꽂는 불효 아닌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그 업으로 장례 치루는 날 장대같은 비가 무섭도록 쏟아지더니,

가족이 탄 승용차가 개울에 전복하는 등 만지산에 난장판이 벌어졌다.

장화 신은 발이 흙에 달라붙어 꼼짝하지 않는 상황에서 시신을 묻는다고 한 번 생각해보라.

그건 분명 지옥도의 한 풍경이었다.

 

 

 

벌초를 하는 중에 이런 저런 하소연을 했다.

엄마~ 짜마 이번 벌초가 마지막 벌초가 될지 모르겠네 예!

지난여름 조카 향이가 할머니를 가까운 서울에 모시자는데, 엄마는 우째 생각합니꺼?”물었더니,

아이구! 야야~ 여서 많이 놀았다 아이가~ 우리가 어디 간들 못 놀겠나?

고마 새끼들 하는 대로 놔 두 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던 중에 느닷없이 산소에 인기척이 들려왔다.

세워 둔 차를 보고는 누가  조작가~ 뭐해요?”라는 것이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이 산소를 빌려준 지주 최연규씨였다.

제초기도 아닌 낫으로 사부작 사부작 벌초하는 것을 보고 하는 말이 더 웃긴다.

아이구! 효자 났군, 효자 났어

제초기가 없어 낫으로 벌초한다는 것은 모르고, 어머니 무덤을 정성껏 깎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고맙게도, 무덤 들어가는 길목에 제초제를 뿌려주어 편하게 갈 수 있도록 길을 튀워 두었다.

연규씨! 제초제 뿌려 준것 고마워~”라고 인사했더니, “에이~ ..”하며 얼굴 붉힌다.

 

 

 

제초기로 하면 30분도 걸리지 않을 일을 세 시간이 넘도록 하고보니, 어느 듯 해도 뉘엿뉘엿 넘어갔다.

중놈 머리처럼 말갛게 깎아놓고 내려와 대충 챙겨 먹고 정신없이 쓰러져 잤다.

 

 

 

한참을 자다보니,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잠을 깨야했다.

미처 방에 군불을 지피지 않고 잔 것이다.

엊저녁은 동자동서 더워서 빌빌거렸는데, 하루 만에 추워 벌벌 떨다니...

정선 방은 동자동 쪽방에 비한다면 여섯배나 큰 방이 아니던가.

극과 극의 세상을 원망하랴! 아니면 흐르는 세월을 원망하랴!

 

 

 

그러나 몸은 늙어도 마음속의 봄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 호박같이 편한 고향의 봄을...

 

사진, / 조문호

 

 

 

 

 

 

 

 

 

 

 

 

 

 

 

 

 

 

 

 

 

 

 




제13회 동강할미꽃 축제가 지난 29일부터 31일까지 정선읍 귤암리 ‘동강생태체험학습장’에서 열렸다.

오전10시 30분부터 진행된 개막식은 정선아리랑시장 문화장터를 움직이는 MC 정춘경씨 사회로 시작되었다.





동강할미꽃축제 최완순 추진위원장의 인사와 정태규 정선군 부군수를 비롯한 인사들의 축사가 이어졌다.

지역인사들이 참여한 동강할미꽃심기도 진행되었는데, '그림바위' 김형구 관장 내외도 자리했다.

관광객이 없는 축제라 동네잔치나 마찬가지였다.





작년에는 축제장을 찾은 관광객 한 분이 정선군에 민원을 제기한 적도 있다.

대중교통이 불편해 정선터미널에서 축제장을 잇는 셔털버스를 운영해 달라는 민원과

축제장을 찾는 관광객이 먹을 수 있는 식수를 제공하라고 했으나, 바뀌지 않았다.

올해도 축제장 차림표에 작은 생수 한 병에 천원, 자판기 커피 한 잔에 천원이란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정말 한심했다. 작은 욕심이 큰 것을 잃는 걸 왜 모를까?





개막식이 끝날 무렵 최승준 정선군수와 귤암리 최연규씨가 나타났다.

손님을 맞은 최연규씨가 차려낸 음식을 보고 불평을 쏟아냈다.

손님 대접을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냐며, 잔치 집에 돼지라도 한 마리 잡아야 할 것 아니냐는 것이다.

최연규씨만이 아니라 귤암리 어른 대부분이 불만이 많지만, 젊은 사람들에게 욕먹기 싫어 입 다물고 있을 뿐이다.

‘인심좋은 귤암리’란 말은 옛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나 역시, 문제를 떠 벌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어차피 외지인이 없는 지역잔치로 자리잡아가고 있는데, 동네잔치라도 잘 하도록 돕는 수밖에 없다.

그 대신 동강할미꽃 축제에 외지인을 끌어들이는 홍보는 일체 않기로 했다.

그렇지만 귤암리 주변의 수려한 경관과 함께 동강할미꽃을 만날 수 있는 삼월 하순경의 귤암리 여행은 적극 추천한다.





정선 ‘동강할미꽃’은 동강 유역의 석회질 바위틈에서 자라는 한국 특산종이다.

다른 할미꽃과는 달리 절벽의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며 하늘을 향해 꽃을 피우는 것이 특징이다.

하얀 솜털이 아름다운 순수한 자태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동강 할미꽃의 신비와 자연의 경이로움만으로도 행복한 봄 여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동강할미꽃이 필 시기만 되면 전국에서 아마추어 사진인들이 몰려든다.

처음에는 꽃에 물을 뿌리거나, 꽃을 감싸는 마른 잎을 제거하는 등, 꽃이 견디지 못하도록 위해를 가했다.

이젠 그런 일이 사라졌는데도 일부 방문자가 올린 글을 보니, 아직까지 그런일이 벌어지는 것 처럼 적어놓았다.




 


그래서 동강할미꽃 훼손에 대한 지난 이야기를 다시 언급하려 한다. 

사건의 발단은 2015년 동강할미꽃 축제에 초대 전시된 야생화 사진가 김모씨 사진이 불씨가 되었다.

물을 뿌려 이슬처럼 보이게 하거나 마른 잎을 뜯어내는 것은 물론, 심지어 인공조명까지 비춘 사진이 있었다.

아마추어 사진인들을 지도하고, 들꽃 사진을 심사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런 사진을 보고, 그 사진이 좋은 사진으로 생각하니 아마추어 사진인들이 답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015년 동강할미꽃 축제에 초대 전시된 야생화사진 전문가 김모씨의 사진, 꽃잎에 물방울이 맺혀있다. 



결국 야생화사진 전문가라는 사람조차 생태사진의 가치를 제대로 모른다는 말이다.

동강할미꽃은 햇볕이 들어 따뜻해져야 꽃 봉우리를 피우니 이슬이 맺힐 수가 없고, 사진처럼 마른 풀이 없을 수가 없다.



2015년 동강할미꽃 축제에 초대 전시된 야생화사진 전문가 김모씨의 사진, 옆에서 인공조명을 비춘 흔적이 역역하다.



생태사진이란 꽃의 습성이나 자연적인 주변 환경이 중요하다는 것을 왜 모를까?

특히 동강할미꽃은 꽃송이만 크로즈업 하는 것보다 높은 벼랑에 피는 주변 환경이 나타나야 가치가 있다.

 


 88년 4월 최초로 동강할미꽃을 찍은 이석필사진, 주변환경이 잘 나타났다



그래서 작심하고 전시된 사진을 문제 삼은 것이다.

‘서울문화투데이’ 칼럼과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수난 당하는 동강할미꽃‘이란 제목으로 내막을 샅샅이 까발린 것이다.

당사자인 김모씨에게는 치명적인 상처가 될 수밖에 없지만, 공익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 당시 야생화를 찍는 엄청난 수의 아마추어 사진인들이 블로그에 접속하는 등 파문을 일으켰는데,

다행스럽게도 그 이후부터 동강할미꽃의 수난이 수그러들었다.





결정적인 것은 생태사진에는 인위적으로 변형시킨 사진이 좋지 않은 사진이란 것을 아마추어 사진인 스스로 깨달았다는 점이다.

문제는 야생화를 찍어 달력을 만들어 팔거나 사진원고를 팔아서 사는 야생화 사진가 김모씨의 사진계 위상은 물론

상업행위에 따른 수익에 치명타를 입은 것이다.

그 일로 명예혜손으로 나를 고소한 지가 일 년이나 되었으나,  법원에서 아직까지 감감소식이다.



13회 동강할미꽃 축제장에 전시되어 있었으나, 누가 그린 그림인지 작가를 밝히지 않았다.



동강할미꽃이 슬픈 꽃인지, 수난이 너무 많다.


“할미야 할미야 벼랑에 핀 할미야

죽은 울 엄마 그립게 하는 동강가에 할미야“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7일 새벽 일찍 정선으로 떠났다.

피서를 겸해 좀 쉬었다 왔으면 좋으련만, 겨우 2박3일의 일정이었다.

특별한 일은 없지만, 느긋하게 있을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이다.





만지산에 당도하니, 옥수수 밭이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멧돼지가 쳐들어 와 난장판을 벌인 것이다.
알맹이라고는 한 알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먹어 치워버렸다.






옥수수 챙겨주기로 한 약속들도 결국 헛소리가 되고만 것이다.

우리 밭만 전기 철조망을 설치하지 않았으니 한 해 걸러 당하는 일이지만,
전기 철조망까지 쳐가며 농사짓고 싶은 생각은 없다.




 


주렁주렁 열린 고추에는 옆집에서 시키지도 않은 농약을 쳤다고 한다.
한 집만 농약을 치지 않으면 모든 고추가 탄저병이 걸린다는 이유인데,
농약 없는 유기농 풋고추 먹으려는 노력 또한 공염불이 되고 말았다.
이리저리 망친 농사에 답답해 하는 중에 가족들이 찾아왔다.






동생 조창호, 큰누님 조영희, 김순화 형수, 조카 영란이가 찾아 와 산소에 올라갔다.
어머니 무덤에 절 올리며 나눈 대화는 햇님이 장가가는 이야기 뿐이었다.
다들 신부 얼굴을 보지 못해 궁금해 하니, 영란이가 핸드폰을 뒤져 신부 사진을 찾아냈다.
참 좋은 세상이다. 산 위에서 블로그 사진을 꺼내 볼 수 있다니...






점심식사를 한 후 가족들이 돌아가고 나니, 혼자 바빠졌다.
냉장고가 정전되어 모든 음식물이 썩어 있었는데,

손님 오면 대접하려고 아껴 둔 돼지고기까지 몽땅 버려야 했다.
어찌된 일인지, 밖에 노출된 배전함 스위치가 내려져 있었다.






뒤늦게 냉장고 청소하랴, 집 청소하랴, 똥 오줌 못 가릴 정도로 부산을 떨어댔다.

더위에 지친 사정을 알았던지, 옆집에서 술 한 잔하자는 기별이 왔다.
옆집의 윤인숙씨가 이웃 최재순, 한순식씨와 함께 염소 탕을 안주로 술판을 벌여 놓았단다.






술 자리에서 기가 막히는 이야기를 들었다.
키우던 강아지 두 마리가 누군가가 던져놓은 독약 묻은 고기를 먹고 즉사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우리 집 정전도 누군가의 해코지가 아닌지 의심되었다.
지하수 분쟁에 대한 화풀이라는 추측이 나왔으나, 아무런 물증은 없다.

이젠 산골짜기에도 씨씨티브이를 설치해야 할 형편이다.
어쩌다 순박한 산골 인심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마침, 아랫동네 최연규씨가 나타나 그의 구수한 옛이야기에 잠시나마 즐거울 수 있었다.

뗏꾼들이 즐겨 찾았던 '전산옥'의 살 냄새 풍기는 이야기에서 부터
‘정선아리랑시장’에서 떡메치기 훈수 두던 우스개로 좌중을 웃겼다.


“너무 많이 치면 아파요. 잘 안되면 물 좀 살살 발라 쳐요.”






술이 취해 방으로 돌아오니, 평소에는 정겹게만 보이던 벽의 사진이나
온돌 열기에 그을린 포스터까지 귀신 나올 집처럼 음산해 정나미 떨어졌다.
사실, 귀신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사람이 더 무서운데 말이다.






날이 밝아오니, 어제 일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마당 아래 핀 도라지꽃은 장관을 이루었고, 배나무엔 돌배가 주렁주렁 달렸다.





동강 댐이 무산되어 다들 배나무를 뽑아낼 때, 한 그루 옮겨 심어 놓았는데,
20여 년 동안 가꾸지 않고 버려두었더니, 자연스럽게 돌배가 된 것이다.
그것도 돌배 술을 만드니 호흡기 나쁜 나에게는 도랑치고 게 잡는 격으로,
최고의 약인 셈이다.






그 이튿날은 하루 종일 잡초와의 전쟁을 벌였는데,
잡초 더미 속에서 탐스러운 호박이 굴러 나오기도 했다.
이런 저런 생활에 정들어 어머니까지 모셨으나,

사람들이 자꾸 마음을 뜨게 만드네. 



 


어쩌면 피하지 못할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빼지도 박지도 못할 처지에 한 숨만 나온다.



사진, 글 / 조문호

















잃어버린 카메라를 가까운 지인들 도움으로 한 달 만에 구하게 되었다.
카메라가 없으니 동자동과 인사동 기록은 물론 꼭 필요한 사진조차 놓칠 경우가 많았는데, 너무 고마웠다.

후배 사진가 하재은씨가 선물한 ‘라이카’도 있지만,

그 카메라는 행사 사진이나 부탁받은 촬영에만 사용하지, 일반적인 생활사 기록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잃어버린 Nikon Coolpix P310 카메라는 휴대하기 편한 컴펙트 카메라라 술상에 젓가락 놓듯 항상 같이 놀 수도 있지만.

손바닥에 쏙 들어가 상대방이 의식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찍을 수 있는 편리한 카메라다.

그런데도 기능마저 탁월해 큰 카메라에 전혀 손색 없다.

이 카메라는 5년 전 정영신씨가 38만원에 구입해 물려 받아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지난 년 말 노숙인과 놀다 잃어버려, 다시 구하려니 단종 되고 없었다.

기가 수만 좀 높아졌지 바뀐 게 전혀 없는 새 제품으로 둔갑해 58만원에 출시되어 있었다.

도둑놈이라 욕할 수도 없는 건, 그들은 돈에 영혼을 판 장사꾼이 아니던가.

카메라를 잃어버린 후, 중고 카메라를 구입하려 카메라점마다 돌아 다녔으나 도무지 구할 수가 없었다.

휴대폰처럼 사용하다 버리는 카메라인지,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새 모델을 살 수도 있지만, 그들의 상술에 끌려가는 것 같아 싫었다.






사실상, 살 돈도 없었다.

진즉부터 카메라를 잃어버린 것을 알게 된 김명성씨가 여러 사람에게 거두어 30만원을 만들어 주었으나, 사지 못했다.

이 곳 저곳 알아보았으나 카메라 자체가 없는데다, 돈이란 호주머니에 넣어두면 없어지는 요물이나 마찬가지다.

오랜만에 만난 조카 녀석들 용돈도 주고, 모자라는 술값을 보태는 등 야금야금 썼더니, 핫바지 방귀 새 듯 사라지고 없었다.

걱정에 걱정을 머리에 이고 살았는데, 몇 일전 원로사진가 한정식선생의 오찬장에서 또 다시 구세주를 만난 것이다.

디지털카메라를 잘 아는 김생수선생께 행여 구 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더니,

옆에 있던 엄상빈씨가 인터넷 중고시장에 검색하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뜸 최경자씨가 5만원을 내 놓으며 시동을 걸어 주었고, 엄상빈, 정영신씨가 각각 5만원씩 부담한 것이다,

모자라는 돈은 그 자리에도 없던 마동욱씨까지 합세하여 돈을 마련해 주었다.

이번엔 정영신씨가 직접 돈을 맡아 인터넷에서 찾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리 뒤져도 중고 카메라는 없었다는데, 이월 상품 하나가 나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즉각 돈을 보냈다고 한다.

신품인데도, 처음 나올 때의 정품보다 싼 25만원에 구입했다니, 횡재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정선 고드름축제장으로 떠나야 하는데, 주문한 카메라가 오지 않았다.

이번에 떠나면 축제가 끝나는 25일경에나 돌아 올 수 있으니, 마음이 다급했다. 

동자동에 카메라를 인수할 사람도 없는데다, 축제 사진도 찍어야 하니 그냥 출발할 수 없었다.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어 택배회사까지 찾아가 어렵사리 카메라를 인수받아 정선으로 떠나게 되었다.

오랜만에 만져보는 카메라에 기분이 충천했다.

이 카메라는 엄상빈씨를 비롯한 네 분의 사진가들이 사주었지만,

그 이전부터 김명성씨를 비롯한 인사동 사람들의 마음까지 담겨 예사 카메라가 아니다. 


이 조그만 카메라에 십 여 명의 정성이 담겨 있으니, 그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 분들의 마음에 보답하는 길은 정신 바짝 차려 좋은 사진을 찍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좋은 사진이란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사진에 앞서, 사람답게 사는 세상에 이바지하는 사진이고 싶다.





이런 저런 일로 좀 늦게 정선으로 출발했는데, 정선에 도착하니 오후 네 시쯤 되었다.

전시장으로 만든 콘테이너 박스가 준비되어 있었으나, 좁은 면적에 그 많은 사진을 어떻게 걸어야 할지도 난감했다.

늦어도 디피를 끝내고 싶었으나, 전기 연결이 잘못 되었는지 불도 켜지지 않았다.

정영신씨와 의논하여 대충 자리만 잡아두고 나올 수밖에 없었는데, 숙소가 마땅찮았다,






만지산 집은 추운 겨울에는 살 수 없는 집이다.

군불을 때면 바닥은 따뜻하지만, 산중의 찬바람이 바로 들어오는 집이라, 방안에 있어도 입김이 피어 오른다.

그래서 보온텐트를 방에 치려 했으나, 모든 매장에서 제품을 철수하고 없었다. 이젠 봄 상품을 준비한다나...






하는 수 없이 인터넷으로 주문하고 내려 왔는데, 그 때까지 텐트가 도착하지 않았다.

10여 년 전에도 정선 읍내 일보러 나왔다가, 쏟아지는 폭우에 강물이 불어 이틀 동안 여관에 머문 적이 있지만,

이번에도 여관신세를 질 수 밖에 없었다.


 



먼저 ‘동호장’에 방이 있는지 전화를 걸었더니, 오늘은 방 하나에 5만원이지만, 내일부터 10만원이라는 것이다.

평창올림픽을 기화로 바가지 씌울 생각부터 하는 돈벌레라는 생각이 드니, 두 번 다시 돌아보기도 싫었다.

'그림모텔'에서 4만원에 잤는데, 생각 외로 괜찮은 여관이었다.

모든 게 다 좋았으나, 욕실 벽의 누드 타일이 좀 야하더라.

 

정영신씨와 모처럼 티브이를 같이 보는 시간도 가졌다.

둘 다 티브이가 없기도 하지만, 그 중독성에 이미 쐬기를 박은지 오래기 때문이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 채, 바뀌는 화면만 쳐다보다 잠들어버렸다.




 

정선 고드름 축제 개막식이 있는, 그 이틀 날은 더 추웠다.

축제장에서 정선군청에 근무하는 전상현씨를 만났으나, 전시준비에 정신이 없어 한가하게 인사 나눌 틈도 없었다.

전시 벽이 액자 무게를 지탱할 수 없을 것 같아 각목과 전기드릴이 필요했다.

어렵사리 구하여 디피를 마무리할 수 있었는데, 전시공간이 좁으니 유치원생 사생대회전이 연상되었다.


    

 



그 때서야 고드름으로 장식한 조양강 축제장 모습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둘 다 전시장은 비워두고 어린애처럼 구경하러 돌아다녔는데,

마침 취재 중이던 엠비시 황지웅 피디와 노기환 엠씨를 얼음동굴에서 만난 것이다.

정영신씨의 장터에서 백 만 가지 표정을 담다.’사진전이 열리는 전시장으로 안내했는데,

배고픈 줄을 어떻게 알았는지, 맛있는 음식을 가져다 주었다.

겨울송어낚시 행사장에서 노기환씨가 직접 잡았다는 송어를 회쳐 왔는데, 너무 맛있었다.

야전의 식사는 이럴 수도 있다며, 둘 다 손가락으로 허급지급 먹어 치웠다.



 


오후 두시 무렵 열린 개막식장에서 전정환 정선군수를 비롯하여 반가운 분들을 여럿 만났으나. 귤암리 주민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 추운 날씨라 나올 엄두를 내지 못한 것 같았다.

축제의 열기는 고드름을 녹일 정도로 후끈했다.



    

 

썰매장에서 열리는 어린이들의 경기를 구경하다보니, 올림픽 성화 봉송팀이 도착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정선은 알파인스키활강과 슈퍼대회전, 복합 종목이 열리는 2018 평창동계올림픽대회 개최지가 아니던가.


올핌픽 개막을 이틀 남긴 시점의 성화봉송은 구절리와 아우라지를 잇는 레일바이크와 풍경열차를 타기도 했고,

배우 김보성씨는 병방치의 짚와이어를 타고 내려오기도 했다.

정선 고드름 축제가 열리는 조양강변 일원을 지날 즈음정선군청 앞에 마련된 무대에서는 축하공연이 펼쳐졌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화가 김형구씨를 비롯한 많은 군민들이 정선군청 앞을 메웠다.

많은 공연이 있었지만, 정선군립 아리랑예술단의 아리랑 별곡은 언제 들어도 정겹다.

평창동계올림픽 개막 축하공연이 끝나자 전정환 정선군수의 환영사와 김옥휘 정선군의회의장의 축사도 이어졌다.



 


그러나 그 날은 축하공연 때문인지 정선시내에 빈 방이 없었다.

결국은 증산에 있는 리브사이드모텔까지 찾아 가야 했다.

정선에서 승용차로 30분 정도 소요되지만, 요금도 4만원인데다 침구도 깨끗했다.

그동안 인터넷에 글을 올리기는 커녕 컴퓨터 구경도 할 수 없었으나,

그 날 저녁만은 컴퓨터에서 필요한 정보를 찾는 눈팅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 이틀 날은 보온 텐트가 도착하여 귤암리 만지산에서 잘 수 있었지만, 결코 녹녹치 않았다.

얼마나 추운지, 두 사람이 양쪽 아궁이에 나누어 앉아 군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 아닌가 생각된다.

추위도 녹일 수 있는데다, 바짝 마른 장작에서 타 오르는 불길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불에 파묻혀 있다보니, 방에서 연기가 새어 나왔다.


깜작 놀라 들어가 보니, 이불에 불이 붙은 것이다.

불을 너무 많이 지피기도 했지만, 아랫목 시멘트 갈라진 틈으로 불길이 올라와 붙은 것 같았다.

일찍 발견하여 큰 탈은 없었으나, 자칫했으면 큰 산불로 옮겨 갈 수도 있는 여건이라 아찔했다.



 


주변을 정리하고 텐트 안에 들어가 누우니, 마치 산행에 나선 기분이었다.

바닥이 따뜻해 그리 춥지는 않았으나 텐트 밑으로 기어 들어오는 한기에 잠을 설쳐야 했다.

가마솥에서 밤새 끓은 물로 세수는 할 수 있었으나, 식사는 불가능 했다.

언제, 아침 식사라고 정해두고 먹은 지도 없었기에, 전시장으로 바로 나왔다.


그러나 급히 나오느라 빠트린 것이 있어 정영신씨만 전시장에 내려주고 다시 만지산으로 돌아가야 했다

가는 길에 어머니 계신 묘소에 들려 술 한 잔 올렸는데, 어머니께서 뭣에 삐쳤는지, 가는 길을 막아버렸다.





내리막으로 꺾어지는 산길에서 핸들을 돌렸는데, 내려가는 길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후진은커녕 질질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핸들만 마음대로 움직여 준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결국은 벼랑으로 떨어져 소나무에 꽝 부딪힌 것이다. 충격의 순간은 얼마나 놀랐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마침 백열등을 갈기 위해 전구를 사서 앞자리에 놓았는데, 그게 팅겨나가 유리창을 치며 터진 것이다.

한동안 멍청하게 앉아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다친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운전석 문이 나무에 끼어 열수가 없어 옆 좌석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는데, 터진 유리조각부터 치워야 했다.

간신히 기어 나왔으나 걱정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 곳은 도저히 견인차가 진입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일단 그 곳에서 제일 가까운 아랫만지 골의 최연규씨 댁으로 내려갔다.

이 친구는 소를 50마리나 키우는데, 자동 물 공급기가 얼어 우사마다 돌아다니며 물을 주고 있었다.

차량 견인에 일가견이 있는 그에게 사정을 이야기를 했더니, 서둘러 따라 나서 주었다

사고현장을 보더니, 견인차로는 불가능하니 내일 포크레인을 불러 끌어내자는 것이다.

그럴려면 눈부터 녹혀야 하니, 염화칼슘 열 포와 모래부터 실어와 뿌려 두어야 일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오늘 밤에 서울 다녀오기로 한 계획은 이미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정영신씨에게 버스 편으로 혼자 다녀오라는 전화를 했으나 걱정스럽기 짝이 없었다.

만지산도 차가 없으면 꼼짝할 수 없지만, 정영신씨도 조양강변 행사장에서 나오려면 제법 걸어야 했다.


마침 최연규씨 트럭타고 정선 읍내에 열화칼슘과 모래를 가지러 가는 길에

전시장에 잠깐 들렸다가 정영신를 태워 귤암리로 들어 와버린 것이다.

서울행을 하루 연기 한 것은 피차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영신씨가 지켜보는 가운데, 신승철씨까지 합세하여 모래와 염화칼슘을 뿌렸다,

뒤늦게 소문 듣고 온 김익수, 윤인숙씨 등 여러명이 함께 어울려 술도 한 잔했다.

최연규씨 부인은 허리관절에 문제가 생겨 일어서지도 못하는 환자가 되어 있었는데,

최연규씨가 직접 두부찌개를 끓였으나 음식솜씨가 제법이었다.


그 자리에서 속이 후련한 반가운 소식도 전해 들었다.

2년동안 이어진 지루했던 만지산의 물싸움이 정선군청의 개입으로 종지부를 찍었다는 것이다.

김익수씨 노래로 술자리를 마무리하고, 윗방에서 하룻 밤 신세졌다.



    

 

그 이튿날 정영신씨는 윤인숙씨의 도움으로 전시장에 나가고, 난 포크레인 기사의 연락에 사고현장으로 올라갔다.

언 땅은 녹았으나, 내리막 시멘트 길이라 포크레인도 별 힘을 쓰지 못했다.

마을의 최종대, 나병연, 송용삼씨가 와서 보더니, 체인을 감아 끌어 올리더라도 견인차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견인차와 동내 주민들이 합세한 애마 구출작전이 펼쳐 진 것이다.


사람이 많으니 눈도 금새 치워지고, 내려 갈 길에 모래를 뿌리는 등,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난, 차가 끌려 나올 때 다칠세라 주변의 나뭇가지를 톱으로 자르기도 했는데,

두 사람이 당겨 감는 체인에 조금 식 조금 식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뼘만 움직이면 돌을 괴기를 반복한 결과 억측 서럽게 버티던 자동차도 결국은 끌려 나오고 말았다.

동네사람들의 지혜와 견인기사의 협력이 이루어 낸 결과였다.





차가 파손된 부분이라고는 앞 범퍼와 운전석의 백 밀러, 그리고 유리창 빗물막이 뿐이었다.

백밀러만 끈으로 묶어 고정시키니, 운행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남의 일이지만, 자신의 일처럼 도와주는 주민들의 따뜻한 마음이 고마울 뿐이었다.


마침, 함평에서 농사지은 쌀을 정선에서 먹기 위해 20킬로 실고 왔는데, 그 것이라도 최연규씨에게 사례했다.

동내 분들은 서울 갔다 와서 술자리 한 번 만들겠다고 약속하고, 정영신씨가 기다리는 전시장으로 차를 몰았다.

일요일 하루만 전시장을 다른 분에게 맡겨두고, 서울로 돌아 온 것이다.

정영신씨는 군청에 보내 줄 서류도 만들어야 하고, ‘서울문화투데이에 송고할 정선고드름축제기사 작성하느라 바빴다. 

나도 몇 일 동안 밀린 일기를 한꺼번에 쓰게 되었는데, 이야기도 길지만, 빠진 내용도 많은 것 같다.



    



월요일 아침 여섯시에 정선으로 출발해 다시 전시장을 지켜야 하는데, 날씨라도 춥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차피 25일까지 전쟁을 치루어야 하지만, 더 이상의 시련이라도 없었으면 좋겠다


추운 날씨였지만, 벗들과 이웃의 따뜻한 온정에 봄날 처럼 훈훈한 시간이었다.

동자동으로 복귀할 수 있는 날이되면, 그 땐 진짜 봄이겠구나.

 

사진, /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