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일은 예술인 '스마트협동조합' 정기총회 날이었다.

대의원은 아니지만, 술 냄새를 맡아 달라 붙은 것이다.

 

그날이 바로 코로나 감옥에서 해방된 날이 아니던가?

총회 끝날 시간에 맞추어 뒤풀이 집에 갔더니, 반가운 분들이 많았다.

 

서인형 이사장, 황경하 사무국장, 박권주, 김성은, 송수아씨 등

상근하는 분 외에도 최석태, 장경호, 김이하, 정영신, 민정기,

박태종, 이미경, 김은엽, 이영경, 이명신씨 등 많은 분 들이

총회를 끝내고 여기저기 모여 있었다.

 

다들 몸 사리는 코로나 시국임에도 40명이나 참석했다고 한다.

전체 조합원 십 분의 일이 참석했다면 많이 나온 편이다.

 

스마트협동조합은 창립 삼 년 만에 괄목할만한 성장을 했다.

음악연습실 운영 등 사업도 확대되었지만, 조합원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나 역시 가난한 예술인들이 받을 수 있는 여러 지원을 받았는데,

코로나로 힘 들어 하는 가난한 예술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여태 예총이나 민예총’같은 예술단체 어디에서도 회원들 생계를 위해

도움 준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도움은커녕 회원들 갉아먹는 구조가 아니던가?

 

빈손으로 시작한 '스마트협동조합'이 불과 삼 년 만에 자리 잡은 것은

조합원들의 협력도 따랐지만, 서인형 이사장의 기획력과

황경하 국장의 추진력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찰떡궁합이었다.

 

올해는 음반 사업에 이어 출판 사업도 시작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스마트협동조합' 인터넷신문도 창간 준비 중이란다.

 성장하는 '스마트협동조합'을 보니 마음이 든든했다.

 

아직 가입하지 못한 예술가들도 참여하여 함께 만들어 가자.

예술인들의 권익을 지키려면 힘을 모아야 한다.

 

이제 가난한 예술가들이 의지할 곳이 생겼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오늘 쪽방 격리에서 해방된 날인데, 이게 얼마 만이던가?

 

귀는 어두운데다 목소리까지 막혀 통하지도 않지만,

못난 사람은 보기만 해도 기분 좋더라.

 

그런데 소주가 달달한 게 술술 넘어갔다.

술잔 주고받을 것도 없이 혼자 홀짝홀짝 마시며

사진 찍고 놀다 결국 맛이 가고 말았다.

 

성악하는 민정기, 박태종씨는 쩌렁쩌렁 좌중을 압도했고,

김이하 시인은 구수하게 축가를 불러 박수갈채를 받는 판에

감히 어찌 끼어들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서너 개 남은 이빨 사이로 튜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목구멍은 막혀 파리 방귀 소리보다 작은 주제에 말이다.

술이 취하면 간이 커진다는 말이 딱 맞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이란 구겨진 첫 구절부터 슬프게 만들었다.

아마 그건 노래가 아니라 벙어리 몸부림에 가깝다.

조지 피면 가치 웃고 조지 지면 가치 울던, 알뜰한 그 맹서에 봄날은 간다

마지막 대목에서 결국 눈물을 짤아내고 말았다.

 

그 이쁜 처자들 많은 자리에서, 팔릴것도 없는 쪽을 다 판 것이다.

그렇게, 그렇게 오바 하지 않으려고 다짐에 다짐을 해도 술만 취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지 버릇 개 못 준다. 아마 죽어야 철들 것 같다.

 

사진, / 조문호

 

 

 

 

요리 조리 코로나를 피해 다니다 기어이 덜미 잡혀버렸다.

정동지가 먼저 걸려, 뒷바라지 하다 보니 나까지 걸린 것이다.

병원에서 처방받아 녹번동 정동지 집에 함께 격리되었는데,

뼈마디가 쑤시는 고통보다 호흡기가 나빠 숨이 가빠 죽겠더라.

 

금주 금연에다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죽 뿐이고,

둘 다 환자라 덜 아픈 사람이 일할 수밖에 없는 비상사태였다.

좁은 공간에서 몇 날 며칠을 붙어 지내는 호사도 소용없었다.

몸 아픈 것 보다 대선 결과의 실망감과 죄책감에 더 죽을 맛이었다.

할 일은 많았지만 몸이 아프니 컴퓨터도 켜기 싫었다,

 

불쌍하게 보였는지 정동지가 냉동실에 숨겨 둔 대마 나물을 꺼내 볶아 주었다.

반찬 씹는 것 조차 거슬려 대마 나물을 죽에 넣었더니, 맛도 있고 몸도 덜 아팠다.

중요한 것은 하루종일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정동지는 책에 파묻혀 힘들게 견뎠으나, 난 자성의 시간을 가지며 여유롭게 지낸 것이다.

 

아픈지 일주일만에 약속이라도 한 듯, 둘 다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출감 기념으로 첫 나들이 한 곳은 연신내 ‘사비나미술관’이었다.

그 곳에서 안창홍씨의 ‘유령패션’이 열리고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 듯 안창홍씨를 비롯하여 이명옥관장 등 여러명이

에콰도르 대사 일행에게 작품을 설명하고 있었다.

얼마 전 에콰도르에서 초대한 안창홍 '유령패션'전에 대한 답례 형식의 방문인 것 같았다.

 

삼개 층에 나누어 전시된 안창홍씨의 수많은 작품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바로 물질문명에 병들어 유령처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자화상이었다.

코로나에 죽어 가는 오늘의 현실같기도 했다.

 

전시장에서 나와 모처럼 ‘음암동 돈까스’에 들려 외식하는 시간도 가졌다.

죽다 살아난 정동지를 밝은 곳에서 보았더니, 화색이 진달레처럼 피어났다.

죽을 때가 가까워 헛것이 보이는 줄 알고 눈을 비벼보았으나 사실이었다.

아파 누운동안 얼굴에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더니, 피부가 살아난다는 것이다.

코로나로 힘든 시간이었지만, 전화위복의 기회가 된 것 같다

 

대마는 마약이 아니라 약이다.

하루속히 대마를 합법화해 필요한 사람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하라.

모두 치료하고 행복할 권리가 있다.

 

사진, 글 / 조문호

 

 

 

 

 

 

 

 

 

 

 

 

 

 

 

 

 

 

 

 

 

 

 

 

 

 

 

 

 

 

 

 

 

 

 

 

 

 

 

 

 

 

 

 

 

 

 

 

 

 

 

 

 

 

 

 

 

 

 

 

 

 

 

 

 

 

 

 

 

 

 

 

 

 

 

 

 

 

 

 

 

 

 

 

 

 

 

 

 

 

 

 

 

 

 

 

 

 

 

 

 

 

 

 

 

 

 

 

 

 

 

 

 

 

 

 

 

 

 

 

 

 

 

 

 

 

 

 

 

 

 

 

 

 

 

 

 

 

 

 

 

 

 

 

 

 

 

 

 

 

 

 

 

 

 

 

 

 

 

 

 

 

 

 

 

 

 

 

 

 

 

 

 

 

 

 

 

 

 

 

 

 

 

 

 

 

 

 

 

 

 

 

 

 

 

 

 

 

 

 

 

 

 

 

 

 

 

 

 

 

 

 

 

 

 

 

 

 

 

 

 

 



담양의 옛 공간과 시간의 기억들을 불러 모은 ‘담양뎐_ 기억의 시간’이

지난 3월1일부터 4월30일까지 담양 ‘담빛예술창고’에서 열리고 있다.

 

‘담빛예술창고’와 사진전문지 ‘포토닷’ 공동 기획으로 마련된 이번 전시는

담양의 역사와 자연을 담은 다섯 명의 사진가가 찍은 120여 점을 선보인다.

 

지역 작가로는 故 이해섭 선생이 수집한 담양 100년사 사진아카이브를 비롯하여

전오남, 라규채, 송창근씨가 기록한 담양의 삶의 기억을 보여준다.

그리고 장터사진가 정영신씨가 기록한 80년대 담양죽물시장도 한 몫 했다.

 

잔잔한 삶의 풍경에서부터 고고한 선비의 멋이 전시장을 풍미한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다섯 작가의 기억이 세월에 의해 재해석되었다.

풍경에 관람자의 기억이 더해져 보는 사람의 감회도 달라진다.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담양 장터의 시끌벅적한 장마당이나,

선비의 멋이 서려있는 소쇄원 풍경도 정겹다.

 

아래는 전시를 기획한 박이찬씨의 전시서문 앞부분이다.

 

“사람의 기억은 마법 같은 특징이 있다.

우리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싶어 하고 그 기억을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 기억을 통해 우리는 행복해지기도 때로는 슬퍼지기도 한다.

이처럼 기억은 경험하는 것들을 공유하고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작은 기억의 조각들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우리의 관계를 연결해주고

또, 연결되기를 원하며 기억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기억이 사라진다는 가정은 인생의 길을 잃은 것과 같이 이해하기 때문이다.”

 

정자 사진을 선보인 라규채씨는 비움과 무욕, 절제를 주제로 했다.

선비 문화의 산실인 담양 정자들을 매개로 자연의 ‘비움’,

선비들의 삶의 ‘절제’, 자연과 함께하는 선비들의 자연관을 담았다

 

송창근씨는 비 온 다음날에는 어김없이 소쇄원을 찾았다고 한다.

대봉대에 발을 올려 사방을 둘러보면 광풍각이 지척이고 제월당이 저만큼 있었단다.

담장 밑을 뚫고 흐르는 물은 높직한 바위를 가로질러 한 필의 비단 폭포란다.

 

전오남씨는 죽물을 이거나 짊어지고 가는 행렬에서부터

쌍교 밑 소하천 모래 속에서 찜질하는 할머니들의 모습에 이르기 까지

아스라하게 잊혀 진 삶의 풍경을 소환하며 기억의 늪으로 빠져들게 한다. 

 

정영신씨의 담양장은 담양만의 정취를 물씬 풍기는 장마당 풍경이다.

눈 오는 새벽녘, 대나무소쿠리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정담 나누는 모습은 이제 풍경이 되었다.

 

수 십 년 동안 장터를 떠돌아다닌 사진가 정영신씨가 말한다.

“수많은 얘깃거리가 장바닥에 쏟아졌고, 국밥집에서는 막걸리잔 위로 농사 이야기를 부려놓았어요.

이제 시끌벅적한 장마당은 보이지 않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장꾼도,

아이들의 시선을 붙들던 약장수도 없다"며 아쉬워했다.

 

이 전시의 백미는 고 이해섭선생께서 수집한 담양 100년 사진아카이브였다.

 

사진 수집을 위해 40여년동안 애써왔으며, ‘사진으로 본 담양 백년사’를 펴내기도 했다.

누구의 사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담양의 소중한 역사적 사료였다.

 

담빛예술창고는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며

전시는 화~일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지난 2일 정영신씨와 담양 ‘담빛예술창고’에 사진전 보러 갔다.

오후세시 무렵 도착했는데, 서울에서 곽명우씨가 먼저 와 있었다.

 

전시를 기획한 박이찬씨가 반갑게 맞아주었는데,

별관에는 고 이해섭선생이 수집한 담양 100년 사진아카이브전이 열렸다.

 

기획자 박이찬, 참여 작가 라규채, 정영신, 사진가 곽명우와 어울려 차도 한잔 했다.

고맙게도 ‘죽녹원’ 팬션 예향당에서 하루 묵었다.

또 다른 담양의 기억을 만든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3일은 정선 만지산 불난 집터 측량하는 날이었다.

아산의 김선우씨가 일주일 전부터 신청해 둔 측량이라, 모처럼 정동지와 함께 정선 간 것이다,

 

오전10시에 출발했는데, 차를 교체한 후 첫 장거리 운행이었다.

‘투싼’은 승차감도 좋았지만, 확 터인 시야라 지난 번 ‘크루즈’보다 훨씬 편했다.

양평을 경유하여 네 시간 만에 도착했는데, 측량시간이 오후2시라 한 시간 정도 남았더라.

 

불난 집터만 보면 속이 뒤집어져 창수네 집부터 올라갔다.

집에 아무도 없어 전화를 걸었더니, 밭에서 옻나무를 자르고 있었다.

부지런함은 여전한데, 일을 마무리하며 그동안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친정 식구들이 몰려와 몇 날 며칠 동안 술파티를 벌였다는 이야기에서부터

큰아들 창수가 속 썩인 일까지 구절구절 풀어댔다.

 

지난 해에는 고추농사는 짓지 않고 고사리 농사에만 공을 들여 팔백만원이나 벌었고,

다른 집에서 일 해주고 받은 품삯도 오백만원이 넘었는데, 

자식이 사고를 쳐 한 입에 털어 넣고 말았다는 것이다.

 

큰 아들 창수가 갑자기 정신 장애를 일으켜 큰 사고를 냈다고 한다.

 보상해 준 돈만도 만만찮은데, 카드로 주문한 책이 산더미처럼 왔다는 것이다.

조금만 관심가면 모두 구입한 것 같은데, 책 값만 몇 백만원이 된다고 했다.

대부분 필요 없는 책이라 새 책을 폐품으로 파는 어이없는 일도 있었단다.

“자슥 놈이 웬수야! 웬수~”라는 창수 엄마의 하소연에 한이 맺혔다.

 

농막에서 커피 한 잔 얻어 마시는데, 아산에서 출발한 김선우씨가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집터 측량하러 왔다는 말에 창수엄마도 따라 나섰는데,

측량기사도 네 분이나 왔지만, 김선우씨는 김창복씨와 함께 왔더라.

 

아산의 김창복씨는 농지에 관한 행정이나 농막 관례에 해박한 전문가로

지난 해 불 난 직후에도 모시고 와 도움을 받았는데, 송구스럽기 그지없었다.

하루 종일 차 속에 시달릴 걸 생각하면, 자기 일이라도 쉽게 나서지 못할 일이 아니던가?

 

측량 기사들은 측량하느라 왔다 갔다 했지만,

선우씨 일행을 비롯한 동네사람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웅성거렸지만, 불 낸 옆집에서는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

 

측량 결과가 나왔는데, 20년 전 측량한 것과는 많이 달라졌다.

우리 집터에서 동쪽으로 2미터 정도 밀려 난 것 외에도

북쪽에서도 2미터 정도 남쪽으로 내려와 창수네 밭의 상당부분을 차지했다.

지켜보던 창수엄마의 낯빛이 편치 않아보였다.

 

그 땅은 창수가 아무 일을 못해 둘째 아들 용순이를 집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용순이 집터로 정한 땅이라며 난처해했다.

오죽하면, 다시 측량하게 되면 위쪽으로 올라 갈 것이라고 했을까?

 

그런데, 아산 김창복씨가 문제점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옆집과 경계를 이룬 남쪽지점과 북쪽 지점에 눈금을 대 보고는

옆집에서 지은 농막이 집과 집사이의 5미터 틈을 두지 않았고,

한 쪽 지붕 끝이 이쪽 땅을 침범했다고 한다.

새로 지은 농막을 보호하기 위해 이쪽 땅에 돌 턱을 쌓은 것도 잘 못이란다.

 

이 문제는 우리가 관여할 일은 아니지만, 농막 규모도 여섯평을 한참 초과했고

집도 한 채가 아니라 대형 저장고까지 세동이나 되었다.

그래도 부족한지 빈터에 건축자재를 잔뜩 쌓아 놓았더라.

우리 집터는 오래전부터 옆집의 주차장이고 자재 보관소였다.

문제점을 따지고 싶었으나, 사람이 나오지 않아 민원을 제기할 수 밖에 없었다.

 

불난지 1년이 지났건만 보험회사는 물론, 불 낸 사람도 전화 한 통 없다.

‘굴러들어 온 돌이 박힌 돌 뺀다’는 속담처럼, 상대를 열 받게 해 스스로 나가길 바랄까? 

솔직이 사람이 보기 싫으니, 정선 만지산에 대한 애착도 사라졌다.

 

군청에 가서 알아보자는 손님 말씀도 있었지만, 읍내 나가 밥부터 먹어야 했다.

군청과 읍사무소에 들렸다가 시장 곤드레 밥으로 허기를 메웠다.

차 한 잔 나누며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선에서 못 살것 같았다.

홧병으로 목숨을 재촉할 것아 다른 곳에 집터 알아보라고

모든 일을 정동지와 김선우씨에게 넘겨버렸다.

 

사실은 6년 전 정영신씨와 이혼할 때, 위자료조로 정선 집을 준다고 했으니 정동지 집이다.

집터 압류가 풀리지 않아 명의 이전을 못하고 서약서만 남겼으니,

내가 결정할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도움주신 분들과 함께 사용할 에술창고를 만들겠다는 약속은 지켜야 해

어디든 적당한 부지를 찾아보라는 부탁은 했다.

매사가 분명치 못하니 김선우씨가 모든 일을 해결해 주는데,

그 많은 도움을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선 만지산은 25년 동안 정들었던 제2의 고향이었다.

자연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나 많은 것이 바뀌었다.

순박했던 동강 원주민들이 더러 세상을 떠나기도 했지만,

산골까지 파고든 물질문명으로 인심이 예전 같지 않다.

 

정선과의 인연을 끝내려니, 한 마디로 시원섭섭하다.

“잘 있거라. 정선아! .”

 

사진, 글 / 조문호

 

 

25년 동안 기록한 작업들을 돌아 보며 정리해 둔다

 

-축제-

동강변 주민들을 위한 굿마당 2000, 9 / 구 귤암분교

제1회 만지산 서낭당 축제 2007, 10 / 만지산 사진굿당

제2회 만지산 서낭당 축제 2008, 9 / 만지산 사진굿당

 

-전시-

동강환경사진전, 1999. 10 / 서울, 충무로 갤러리

‘동강백성들’사진전, 2001, 11 / 서울, 충무로 지하철역과 혜화역 지하철 전시장

‘두메산골 사람들’ 사진전, 2004, 12 / 서울, ‘덕원갤러리’

찾아가는 예술여행 ‘두메산골 사람들’전 2005 / 정선, 평창, 영월 산골마을 분교 10곳

‘신명’ 설치 사진전, 2005, 9 / 만지산 사진굿당

강원다큐멘터리 특별전, 2005, 7 / ‘동강사진박물관’

‘산을 지우다’ 사진전, 2008, 9 / 서울, ‘통인옥션갤러리’

‘산골 사람들’ 사진전, 2018, 5 / 정선, G갤러리

 

 

-출판-

‘동강백성들’ 포토에세이 발간 / 2000, 9 /도서출판 명상

‘동강’환경사진집(한국환경사진가회) 2000, / 도서출판 포토뉴스

‘두메산골사람들’ 사진집 발간 / 2004, 12 / 눈빛출판사

 

 

일이 겹쳐 바쁜 하루를 보낸 것은 괜찮으나, 복에 없는 차를 바꾸게 되었다.

지난 8일은 ‘돈의문박물관마을’에서 열린 정영신의 ‘장날’전도 철수해야 하고,

예약해둔 자동차 검사를 받는 등 할 일이 많은데, 마지막 일이 순탄치 않았다.

전시철수야 일사불란하게 마무리했으나, 자동차검사에 불합격한 것이다.

그것도 간단한 정비로 끝날 게 아니라, 폐차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다시 중고차를 구해야 하는데, 죽기 전에 폐차 장의사 신세는 면키 어려울 것 같다.

 

그 날은 준비할게 많아 일찍부터 서둘렀다.

녹번동으로 가기 위해 짐을 챙기는데, 요쿠르트 아줌마가 왔다.

인사 건 낼 틈도 없이 돌아서는데, 설날 지난지도 며칠 되지 않아 선물 받아 둔 과자라도 준 것이다.

뜻밖의 선물에 반색 하지만, 선물이란 받는 것 보다는 주는 게 더 기분 좋다.

 

이 분은 매주 한 번씩 요구르트를 세 개씩 갖다 주는데, 난 3년째 받아 먹는다.

독거노인에게 요구르트를 전해주는 일은 10년이나 된 지자체의 복지사업이다.

늘어나는 노인들의 고독사를 막기 위한 방편이지만, 좀 더 세심한 관심이 요구된다.

현재 동자동에 주는 분이 80여명이라는데,

몸이 불편하거나 외부와 소통이 많지 않은 분들은 대부분 빠졌기 때문이다.

 

녹번동에 차 가지러 가기 위해 지하철로 내려가니,

양말도 없는 노숙인의 맨발이 눈에 밟혔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런 노숙인 보면 할 말을 잃어버린다.

 

정동지를 차에 태워 '돈의문박물관마을' 전시부터 철수하러 갔다.

사진을 포장하여 차에 옮겨 실었는데, 비좁은 공간에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80일간 수고해 주신 '돈의문박물관마을' 큐레이트 전영주씨에게

조그만 소품 한 점 선물하며 마지막 기념사진으로 마무리했다.

 

그나저나 그 많은 액자를 들여놓을 곳이 마땅찮았다.

지난 년 말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네 차례의 전시를 치렀으니 보통 짐이 아니다.

예전 같으면 정선으로 옮겨 보관했으나 집이 불탔으니 가져갈 수 없었다.

비좁은 녹번동 집 방 하나가 창고로 변한지 오래되었는데,

그 사정을 아는 아산의 김선우씨가 보관해 주기로 한 것이다.

두 번째 '준비하는 공유공간 '마인' ‘백암길185 미술관’에 보관한다지만,

그 곳 또한 문을 열게 되면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 판이다.

 

그 날 김선우씨가 사진을 실어가기로 했으나 일이 생겨 예정보다 늦어 진 것이다.

자동차검사 예약시간이 임박해, 짐을 내려놓고 '성산자동차검사소'부터 갔다.

예전에는 예약 없이 검사받으러 다녔으나 절차가 많이 바뀌었더라.

며칠 전 검사받으러 왔다가 허탕치고 예약 해 둔 것이다.

순서가 돌아와 검사가 진행되었는데,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검사에 통과하려면 정비비용만 80여 만원이 소요되는데,

엔진에 문제가 많아 고쳐도 오래타지 못한단다.

 

문제의 디젤 ‘크루즈’는 제 작년 여름 300만원에 구입했는데,

일 년 육 개월 동안 33,000km 타고 폐차하기에 이른 애물단지가 되어버렸다.

그동안 힘이 딸려 오르막에서 시동이 꺼지는 등 애를 많이 먹였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녹번동으로 끌고 가야 했다.

 

마침 아산의 김선우씨가 도착해 있었다.

자동차 사정을 듣고는 폐차가 답이라며 아산에서 쓸 만한 중고차를 알아 보겠단다,

싫은 기색 한 번 하지 않고 방에 쌓아둔 액자를 옮겨 싣고 아산으로 내려갔다.

그 다음 날 선우씨가 만사를 제쳐두고 중고차 보러 다닌 것 같았다.

수시로 쓸 만한 차의 정보를 보내주었는데, 그 중 가격이 싸고 쓸 만한 차가 현대 투싼이었다.

 

다음 날 오후1시 무렵, 아산에서 선우씨를 만났다.

구입한 '투싼'은 178,500km 운행한 차인데 190만원이란다.

그 날 차량 명의변경과 폐차를 한꺼번에 처리할 준비해 두었는데, 일이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자동차보험이전에서부터 차량압류해제 등 모든 걸 전화로 해결하는데, 일을 똑 소리 나게 처리했다.

 

새로 구입한 현대 ‘투싼’을 점검하기 위해 잘 아는 정비소에 데리고 갔다.

아산에서 ‘월드자동차공업사’를 운영하는 송계석씨를 찾아 간 것이다.

시운전을 해 보며 부속들을 꼼꼼히 점검해 주는데,

엔진이나 다른 곳은 이상이 없으나 하체 부식이 심하다고 했다.

비포장 도로나 도로 턱을 조심해 운행하면 삼 년 쯤은 무난히 탈 수 있겠단다.

자동차기능이나 주의해야 점을 꼼꼼하게 설명해 주어 고맙기 그지없었다.

좌우지간 선우씨는 마당발이기도 하지만, 인간관계가 진득했다.

 

새로 구입한 투싼은 차체의 중량감도 있지만, 자동이라 운전하기가 편했다.

인사동에서 오후 다섯시에 열리는 박재동 화백 시사만평전, ‘한판 붙자!’에 갈 생각이었지만,

일이 지체된 되다 차까지 밀려 다음 날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 머리 아픈 일들을 마무리해 날아갈 듯 발길은 가벼웠다.

 

그런데, 다음 날부터 내버려 둔 정선문제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농사철이 오기 전에 다시 측량하여 콘테이너 박스부터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적공사에 전화해 측량할 날자 까지 잡아놓고 같이 자자는 전화가 왔다.

허구한 날 지극정성으로 도와주는데, 어떻게 보답해야 할 지 모르겠다.

지은 복이 어디 가겠냐마는 올해도 좋은 일 많기를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건축가 임태종씨가 '인사동 이야기' 사진과 ‘어머니의 땅’ 사진을 여러 점 사 주었다.

이 어려운 시기에 한 점도 아니고 네 점이나 사겠다기에, 고마움에 앞서 마음의 짐이 되었다.

정해준 사진을 프린트하여 액자까지 만들어두었으나 전할 방법이 마땅찮아,

구정연휴가 시작되는 1월30일 강남 사무실에 갖다 주기로 한 것이다.

그 날이 노는 날이지만 사무실 나갈 일이 있어 같이 차 한잔 하자고 했다.

 

그동안 임태종씨 사무실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는데,

선릉 옆의 그 길은 오래전 삼성카메라에서 일할 때 자주 들렸던 눈 익은 곳이었다.

마중 나온 임태종씨 따라 간 사무실은 쾌적하고 아늑했다.

흡연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사무실엔 넓직한 테라스가 있었다.

 

그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선능이 한 눈에 쏙 들어왔다.

누구의 작품인지 모르지만 책장 위에 돈통을 들고있는 목각인형도 눈길을 끌었다.

한때는 이곳에 친구들 불러 모아 바베큐 파티도 종종 열었으나, 일이 지긋지긋해 그만두었단다.

파티를 준비하는 과정도 만만찮지만 이튿날 청소하는 직원들 눈치가 보였다고 한다.

 

사실, 초대받는 입장에서야 좋을지 모르지만, 준비하는 사람은 예삿일이 아닐 것이다.

오래 전 정선 만지산에서 서낭당 축제를 열어보아 그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안다.

돌이켜 생각하니, 없는 주머니 털어가며 누굴 위해 그토록 정성을 쏟아부었는지 모르겠다.

국 쏟고 뭐 데인다는 말처럼, 돈잃고 고생만 한 것이 아니라, 돌아서서 욕하는 사람도 있었다.

 

축제의 의도와 상관없이, 왜 돈들여가며 쓸데없는 짓을 벌이냐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긍정적으로 보지 못하고, 사사건건 부정적으로 생각할까?

 

그리고 정선 집을 흔적도 없이 태워 버린 옆집에서는 땅을 다시 측량했다며

남의 집터에 걸쳐 자기네 집만 지어 올렸다.

보상에 대해서는 일체의 언급이 없는 것을 보니 어무래도 사람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것 같다.

이젠 이웃에 대한 정이 완전히 사라져, 법적 소송을 해서라도 기어히 손해배상을 받아 낼 것이다.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으나, 임태종씨 덕에 선능 사무실 구경한 번 잘 했다.

전해 준 사진이 어떤 용도로 어디에 걸릴지는 모르지만,

영감을 일깨우는 작품적 기능에 앞서 복 짓는 부적으로서의 역할도 충실히 할 것으로 믿는다.

부디 새해에는 복 많이 받으시길...

 

사진, 글 / 조문호

 

 

명절이 가까워 오면 정영신씨 따라 대목장 보러 다닌 지도 꽤 오래되었다.

올해도 설날을 며칠 남겨두고 김포장을 비롯하여 칠곡 동명장 등 몇몇 장을 돌아다녔다.

삼년 째 이어지는 전염병에 주눅들어 수도권의 장을 제외한 면소지 장들은

장사꾼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장보러 온 주민은 보이지도 않았다.

 

노인들만 지키는 시골 오일장들이 기능을 서서히 잃어간 지는 오래되었으나,

거리두기로 노인들 발길마저 끊기니, 문 닫기 직전에 있다.

 

어디 세상 이치 따라 바뀌지 않는 것이 있겠냐마는,

정겨운 시골오일장 풍정은 빛바랜 사진처럼 기억 속에서나 남아 있다.

 

사람 없는 장보다 인근 사찰이나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김포장에서는 덕포진에 들리고, 선산에서는 도리사와 구미 문화마을을 돌아보고,

칠곡에서는 동화사를 돌아보는 등 한가로운 시간을 가졌다.

 

직지사 말사인 도리사는 아도화상이 창건한 신라 최초의 절로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8대 적멸보궁이다, 

가끔 선산에 오거나 이 지역을 경유할 때면 30년 전에 보았던 .도리사가 생각났는데,

절집의 구성이나 다른 것들은 기억나지 않는데, 도리사 석탑만 선명하게 떠올랐다.

 

모전석탑 처럼 돌을 쌓아 올린 탑의 조형이 특이해서일 것이다.

도리사 석탑은 우리나라 석탑 가운데 같은 유형을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식이다.

석탑의 높이는 4.5m인데, 얕은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장대석을 세워 기단을 만들었다.

판석으로 갑석을 덮고 갑석 위에 방형의 작은 석재를 3층으로 쌓아 탑신을 세웠다.

맨 위층 정상에는 노반이 있고 연꽃이 조각된 보주가 있다.

 

태조선원 맞은 편 나무에는 색색의 작은 등이 과일처럼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도리사에서 구미 일선리 문화재마을로 발길을 옮겼다.

이곳은 1987년 안동 임하댐 건설로 수몰지역에 들어갔던  전주 류씨 양반세거지인데,

이 곳 해평 일선리로 옮겨온 것이다.

 

본래 일선리는 태조산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가 낙동강으로 너르게 퍼진 구릉 산지였다.

‘밤이면 흙을 던지며 사람을 해친다는 개골강지가 출몰하는 외지고 무서운 산골’이었다고 한다.

 

일선리에 안동 전주 류씨 양반세거지가 옮겨오며 약 80여개의 집이 반듯하게 들어서게 되었는데,

그중 70여 채가 유씨 양반의 가옥이란다.

그 중에는 문화재급 고택도 10여 채나 있어, 기왓장과 기둥 하나 빠트리지 않고 고스란히 옮겨왔다고 한다.

 

박실마을 전주 유씨를 이끌었던 수남위 종택과 용와종택, 침간정, 마령의 호고와 종택,

무실마을의 근암고택과 임하택, 그리고 만령초당, 삼간정, 동암정, 대야정 등의 누정들이 그것이다.

 

높다란 옹벽위에 기와를 얹은 흙돌담이 기다랗게 뻗어있다.

대개의 고택마을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많으나 이 곳은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다.

 

다음 행선지는 칠곡의 동명장이었다.

오후라 그런지 좌판을 벌인 할머니 몇 분만 지키고 있었다.

 

텅빈 장터에는 ‘동명장터이야기’로 시작되는 벽화를 그려놓았다.

봇짐이나 등짐에서 손수레로 바뀌듯이 장터 풍정도 서서히 바뀌는 것이다.

 

머지않아 오래된 장터의 풍정은

정영신의 사진집 속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다.

 

칠곡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동화사를 찾아 나섰다.

조계종 제9교구의 본사인 동화사는 통일신라시대의 절로

금산사, 법주사 와 함께 법상종 3대 사찰의 하나이다.

 

임진왜란으로 동화사 전체가 불타버린 후 여러 차례의 중창을 거쳤는데,

조선 영조 때 중건된 대웅전과 극락전을 비롯하여 20여 채의 건물이 남아 있다.

 

보물로 지정된 당간지주와 금당암3층석탑,·비로암3층석탑,·비로암석조비로자나불좌상,·

동화사입구마애불좌상,·석조부도군 등 가볼 곳이 한 두 곳이 아니었으나, 시간이 없었다.

 

해가 넘어가기 직전의 동화사 경내는 고요한 적막에 휩쌓여 있었다.

빵처럼 앙증맞게 생긴 꽃창살을 살펴보며 대웅전을 기웃거리는데,

저녁 불경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성불하여 모든 중생을 구제하라는 저녁종성을 뒤로하며 발길 돌렸다.

 

사진, 글 / 조문호

 

해마다 명절이 가까워오면 대목장을 보러 곳곳의 장터를 찾아다닌다.

지난 28일은 경기도 광주에 있는 경안시장을 찾아갔다.

 

광주 경안시장은 오일장과 상설시장이 함께 서는 장으로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오래된 전통시장이다.

강원도와 충청도,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으로 시장이 크게 번성 했다고 한다.

 

그러나 강화도조약 이후 개항과 함께 외국 물건들이 들어오고,

철도의 부설과 새로운 도로가 생겨나며 오래된 지리적 이점은 잃었으나,

1914년 광주 지역의 중심이 남한산성에서 경안리로 옮겨지며

경안시장이 광주 지역의 중심 시장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경안시장은 경안천 천변에 있는 광주종합버스터미널에서 서쪽 방향에 있는데,

코로나에 주눅 들어 한산한 시골장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몰려 나왔다.

농산물을 비롯하여 수산물, 축산물, 의류, 잡화 등 거래품목은 여느 장터와 똑 같았다.

 

설날을 며칠 남긴 터라 인근에 있는 용인 천주교 성당묘지도 들리기로 했다.

미리 예정된 성묘가 아니라 시장 온 걸음에 들리다보니 미처 음식을 준비하지 못했다.

생전에 어머니가 좋아하신 음식을 장에서 사 가지고 찾아 나선 것이다.

 

용인 천주교 성당묘지는 찾아 온 성묘객이 없어 한적했다.

 

그 곳에는 정영신씨의 어머니 고 김덕순씨와

언니 고 정정숙씨 유골함이 아래위로 나란히 모셔져 있다.

챙겨간 국화와 음식을 영전에 놓고 모두의 안녕을 빌었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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