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학생돕기 자선전인 함께 맞는 비가 지난 921, 오후4인사동 마루아트센터3층 그랜드관에서 개막되었다.

 

화가, 조각가, 만화가, 사진가, 도예가등 40여 명의 예술가가 참여하는 함비전

비장애인이 어려운 장애아의 눈이 되고 귀가 되어, 우산을 같이 쓰며 함께 비를 맞는 아름다운 행사다.

 

이날 개막식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두렵기까지 했다.

 

주홍수, 유준, 박성남, 강레아, 조풍류, 정영신, 조명환, 조신호, 임동은, 김수길, 박복신,

김발렌티노, 이한복, 공윤희, 전활철 씨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누군지도 모르겠더라.

 

운영위원과 출품작가를 비롯하여 관람객까지 더해 넓은 전시장을 가득 메웠다.

발 디딜 틈이 없어 작품감상에 지장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함비전에 대한 일반인의 지대한 관심은 장애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청신호가 아니던가?

 

이 자선전은 많은 분의 참여를 이끌기 위해 작품가격도 기존 가격보다 대폭 낮추어 판매한다.

 

유명 작가의 작품을 저렴하게 소장할 좋은 기회다.

많은 분의 동참을 부탁드린다.

 

부디 첫 함비전이 오색 단풍처럼 아름답게 물들어, 그 소중한 마음을 모아 좋은 결실로 이어지길 바란다.

이 전시는 27일까지 계속된다.

 

공윤희, 정영신, 김수길씨와 전시장을 먼저 빠져나와

인사아트센터4층 부산갤러리에서 열리는 여성현대미술작가회원전에 갔다.

 

참여작가인 양계선씨를 축하해주기 위해서였다.

 

인사동 늘마중에서 막걸리로 목을 축인 후

식사를 예약해 두었다는 베이징 코아로 자리를 옮겼다.

 

베이징 코아는 예전에도 그랬지만,

주 메뉴인 오리구이보다 마지막에 나온 짜장면이 압권이었다.

오리고기 맛을 몰라 그런지 모르지만, 잘 삶은 삼겹살보다 못했다.

 

촌놈에게는 비싼 중국요리보다 오로지 짜장면이다.

양파 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먹어 치웠다.

오리고기 가격이 만만치 않으나, 짜장면 먹으러 다시 가고 싶다.

 

사진, / 조문호

 

 

인사동을 사랑한 황명걸 시인께서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셨다.

암으로 위중하다는 소식을 들어 예견은 했지만,

날아 온 선생의 부음은 더 이상 방구석을 뒤척일 수 없게 만들었다.

 

황명걸선생은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문이기에 앞서, 인사동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인사동에 일만 생기면 노구를 끌고 달려오시던 따뜻한 마음도 이제 그리움으로 묻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무엇보다 인사동에서 선생을 지켜본 20여 년의 세월을 잊을 수가 없다.

 

선생은 평양에서 태어나 해방과 함께 월남하여 서울에서 성장하셨다.

서울대 불어불문학과를 중퇴한 뒤 1962'자유문학''이 봄의 미아'로 등단했다.

1963년 시 동인지 '현실' 동인으로 참여하며 '요일연습', '한국의 아이', '삼한사온인생', '서울 19755' 등을 발표했다.

 

주부생활등 잡지사 편집자로 일하다 1967년 '동아일보'에 입사했으나, 1975년 자유언론 운동으로 해직되었다.

그 후 LG그룹 사보 편집장으로 일하다 북한 강변의 갤러리 카페 무너미를 운영하기도 했다.

 

1970년대 대표 리얼리즘 시인으로 꼽히는 황명걸 시인의 첫 시집은 판매금지 수난을 겪은 '한국의 아이'(1976).

그 외에도 '내 마음의 솔밭'(1996), '흰 저고리 검정 치마'(2004)가 있고, 2016년에는 그동안 발표한 시와 신작을 묶어 정리한 시선집 '저희를 사랑하기에 내가'가 있다.

신경림시인은 은백양 또는 자작나무처럼 가을 들판에서 허연 흉터를 스스로 드러내며 저녁노을을 향해 서 있는 그의 시들은 서러울만큼 아름답다고 말했다.

 

유족으로는 사모님 서상실씨를 비롯하여 아들 황요한씨와 딸 황서정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순천향대학병원 장례식장 6호실에 마련되었고, 발인은 15일 오전 630분이다.

장지는 마석 모란공원 예술인 묘역이다.

 

장례식장에 문상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순천향병원'은 동자동에서 먼 거리가 아닌지라 정동지는 장례식장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입구에서 줄담배를 피워가며 기다렸는데, 늦게 사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먼저 들어가 기다릴 수도 있지만, 빈손으로 고인을 뵐 수야 없지 않겠는가?

 

장례식장에 들어가니 아는 분이라고는 미망인이신 사모님과 조준영시인 내외뿐이었다.

앞서 구중서선생과 장경호, 노광래씨가 다녀갔다지만, 생각보다 아는 분이 적었다.

 

장례식장 입구에는 발디딜 틈없이 조화가 들어찼다.

이제 허례허식을 버릴 때도 되었건만, 도무지 고쳐지지 않는 장례문화다.

 

좀 있으니 건축가 임태종씨가 조문을 왔다.

아는 분들과 어울려 소주잔을 주고 받는 거야 좋지만, 술이 들어가니 지난 이야기로 말이 많아졌다.

더 이상 사람을 미워하는 악업을 쌓지 않으려면 이승의 삶을 끝내야 하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죽고 사는 문제다. 돌아가신 선생님이 부럽다.

 

선생님! 부디 극락왕생하시길 빕니다.

 

, 사진 / 조문호

 

 

 

지긋지긋한 더위가 한풀 꺾여, 이제야 한 숨 돌릴 것 같다.

쪽방에서의 여름나기는 고행의 연속이었다.

수행자처럼 버텨내지만, 허리 협착증까지 도져 죽는 게 편하겠더라.

 

일기처럼 쓰던 주변 잡기에서부터 전시리뷰에 이르기 까지 모든 일을 중단했다.

주제넘은 이야기로 욕 먹는 일도 지겨웠지만, 죽기 전에 마무리해야 할 일이 많았.

사진 정리가 되지 않아 사진 한 장 찾으려면 온종일을 허덕여야 한다.

 

얼마 전에는 돌아가신 한정식선생과 찍은 기념사진 한 장 보내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원본 찾느라 몇시간을 헤매다 결국 포기하고 말았는데, 늦게 사진을 정리하려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오래된 필름 찾아 스캔 받는 일은 손도 대지 못했다. 

 

여름 내내 전시장 방문은 물론, 사람 만나는 일까지 피해 가며

컴퓨터와 씨름하였으나 도무지 일의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오죽하면 정선 집 불났을 때, 남은 짐까지 모두 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겠는가?

죽고 나면 아무 소용없는 일에 매달리는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이 사진들은 한 달 전에 인사동에서 찍은 사진이다.

 

지난 7월 27일, 양산의 공윤희씨가 온다는 연락을 받아 모처럼 정동지를 만나 인사동에 나갔다. 

쌈지 담벼락에는 궁녀가 임금 기다리다 죽었다는 설화의 꽃, 능소화가 피었더라.

 

약속했던 ‘풍류사랑 낭만에는 공윤희씨 외에 김수길씨도 왔더라.

용태씨 미망인 박영애여사는 민어에다 홍어, 돼지 수육까지, 그득하게 상을 차려주었다.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만나 이야기 나누기 보다 음식 먹느라 정신없었다.

사실, 귀가 어두워 소통이 안 되니 술이 약인 것이다.

 

인사동 지킴이로 알려진 공윤희씨는 퇴역한지가 수십년이 되었으나 아직까지 공대위로 불린다.

몇십 년동안 인사동에서 일 하며 살았으나, 장가는 못 간게 아니고 안 갔다.

요즘은 먹고살기 위해 양산에서 학교 일을 돕는다는데, 여름휴가를 받은 것 같았다.

 

휴가를 받았으면 바다나 산으로 갈 것이지, 인사동에는 무슨 미련이 남아 왔는가?

 

이차로 유목민’에 갔더니, 골목에는 장경호씨와 한상진씨가 있었고,

안쪽에는 전활철, 안원규, 유 준, 발렌티노김 등 아는 분이 많았다.

 

만나 반가운 시간은 잠깐이었다.

소통이 되지 않아 술만 빨다 정량 차면 일어나니,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파장 인생의 설움이다.

 

사진, / 조문호

 

 

 

원로 사진가 한정식(86)선생께서 지난 723일 오전6시 무렵 운명하셨습니다.

‘’서초요양병원에서 치료받던 중 폐렴 증상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40일전 병문안 갔을 때만 해도 댁으로 돌아가 사모님 곁에서 눈을 감고 싶다던 선생께서

기어이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돌아가셔서 더 가슴 아픕니다.

 

선생께서 인사동 ’SK오피스텔에 계실 때는 인사동 사람들(전 창예헌)‘고문으로 함께하며

인사동을 무척이나 좋아하며 사랑하셨습니다.

사진으로서 만이 아니라 사진 교육자로서 후진 양성에도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사진가들은 물론 인사동 사람들도 고인의 명복을 빌어 주시기 바랍니다.

 

선생의 극락왕생을 빕니다.

 

배우자 : 숭수연

아들 : 한계영, 한계륜, 한계림

며느리 : 이종희, 박소영, 정보라

손주 : 한동운, 한세운, 한채운, 한사다운, 한빛다운

 

빈소 : 삼성서울병원장례식장 17

발인 : 2022725(월요일) 오전930

장지 : 서울추모공원

 

고 한정식선생 약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과 졸업

일본대학 예술학부 예술연구소 수료(사진전공)

동국대학교 대학원 연극영화학과 졸업

서울, 보성, 휘문고 교사역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사진학과 교수, 대구예술대학교 석좌교수 역임

 중앙대학교 및 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개인전)

1977 "나무" 니콘살롱, 일본동경

1988 "나무" 공간화랑, 서울

1988 "거울" 스즈키야화랑, 일본동경

1986 "한정식 사진전" 서울갤러리, 서울

1992 "" 한가람미술관, 예술의전당 서울

1997 "풍경론" 한가람미술관, 예술의전당 서울

1999 "한정식 사진전" camera Obscura갤러리, 프랑스 파리

2002 "고요" 금호미술관, 서울

2007 "이렇게 들었사오니"초대전, 동강사진박물관. 영월

2008 "고요" 초대전, 고은미술관, 부산

2017 “고요과천 국립현대미술관

2022 ’고요서울 '스페이스22' , 'KP갤러리'

 

(사진집)

"나무" 열화당, 1990

"" 사진예술사, 1992

"풍경론" 눈빛, 1997

"고요" 열화당, 2002

"흔적" 눈빛" 2006

고요2‘ 한스그라픽 2013

고요3‘ 눈빛 2015

한정식국립현대미술관 2017

마구간 옆 고속도로눈빛 2020

가을에서 겨울로눈빛 2021

 

(저서)

"사진예술개론" 열화당, 1986. 4개정판, 눈빛, 2004

"사진의 변모" 1996. 개정판

"사진- 시간의 아름다운 풍경" 열화당, 1999

사진과 현실" 눈빛, 2003

현대사진을 보는 눈" 눈빛, 2004

예술로서의 사진눈빛

"사진, 예술로 가는길" 눈빛, 2006

"사진 산책" 눈빛, 2007

 

사진계의 큰 별이 떨어졌습니다.

지난 23일 한정식선생께서 운명하셨다는 부고를 받으며,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습니다.

언젠가는 가야하는 것이 인생이지만, 산다는 게 너무 허무할 뿐입니다.

정영신씨를  만나 강남 '삼성서울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장례식장에는 유족과 이일우씨가 조문객을 맞고 있었는데,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사진가 전민조씨만 와 계셨습니다.

 

 이일우씨로 부터 그간의 경위를 들어보니, 일찍부터 돌아가실 준비를 하신 것 같습니다.

한정식선생의 모든 사진 관리는 제자인 이일우씨에게 위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앙대에서 퇴임할 즈음 사진가들로 부터 사들인 작품은

모두 한미미술관에 기증하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 숫자가 무려 800여 점이나 된다네요.

 

뒤 따라 사진가 최광호씨가 딸과 함께 조문을 왔습니다.

최광호씨로부터 육명심 선생의 근황도, 돌아가신 이완교선생의 몰랐던 사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육명심 선생은 의사소통이 되지 않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고,

이완교 선생은 항암치료가 너무 힘들어 스스로 모든 의료 기구를 걷어냈다고 합니다.

유서에 최광호, 진동선씨 등 사진가 몇 명을 거론하며, 모든 사진은 그분에게 맡기라고 쓰셨답니다.

사진을 모르는 가족들이 당사자가 돌아가시면, 모든 걸 폐기하는 현실을 우려한 것 같습니다.

 

정부가 사료를 수집 관리하지 못한다면 민간단체라도 관리하는 곳이 빨리 만들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나 마찬가지인 귀중한 사진 자료들이 가족들의 무지로 사라지는 현실입니다.

 

뒤늦게는 동강사진축제에 다녀오신 사진가 구자호씨도 만날 수 있었는데,

'동강사진상'을 수상한 김녕만씨 작품만이 아니라 구자호, 고명진, 최재영씨 등의 보도사진도

함께 전시 된답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관람 바랍니다.

 

고인의 마지막 떠나는 길을 배웅해 드리며 명복을 빌어 주시기 바랍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아래 사진은 한정식선생의 지난 기념사진을 무작위로 모았습니다.

사진이 너무 많지만, 선생의 지난 날을 돌아보며 추억해 주십시요.

 

사진 / 정영신. 조문호

지난 토요일 인사동에 나갔다.

 

인사아트프라자앞에서 열리는 '우크라이나 난민 어린이 자선 공연'에 들리기 위해서다.

 

보름 전에 사진은 찍어 올렸으나, 그때 돈이 없어 모금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 자선 공연은 열리지 않았다.

 

더 이상 나설 뮤지션이 없었을까?

아니면 모금이 신통찮아 그만두었을까? 별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나 자선음악회가 있다고 나팔 분 것이 문제였다.

행여 그 글을 보고 나왔다면 얼마나 원망하고, 실없는 사람으로 보겠는가?

주최 측에 재확인하지 못한 탓이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헛걸음 한 모든 분에게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몇 푼 되지 않는 후원금은 후원계좌를 찾아 보내기로 하고,

비참한 심정을 달래려 벽치기 골목으로 들어갔다.

 

벽치기 딱 좋은 좁은 골목을 들어서니, 반대편에서 장춘씨가 걸어왔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유목민에는 전활철씨 3-40년전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에는 안면 있는 분도 여럿 있었는데, 술 장사에 찌든 활철씨가 제일 많이 삭았더라.

 

다행히 그날부터 유목민에 새 지배인이 들어와 활철씨도 편하게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전활철씨의 해방인지, 아니면 사장에서 회장으로 승진한건지 분간 안 간다.

 

담배 피우기 딱 좋은 술집 입구에 술상을 차렸는데,

장춘씨에 이어 강남에 전시 보러 간다던 정동지도 돌아오고,

갤러리시네노광래 관장과 불화가 이인섭선생 등 줄줄이었다.

 

덕분에 정성진, 안지현씨 등 미녀들도 알현할 수 있었다.

 

노관장은 전시 중인 “Funny Art, Money Art’ 리플렛 한 장 내놓았다.

 

719일까지 열리는 이번 기획전에는 돌아가신 민병산, 김구림, 변우식, 임창렬,

이존수, 강용대, 김지하시인에서 부터 요즘 잘 나가는 최울가, 강찬모에 이르기까지

22명의 작품을 모은 전시로 소품 위주라 마음에 들면 소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생각지도 못한 술자리가 만들어져 술은 취했으나, 씁쓸함은 지워지지 않았다.

기레기나 다를 게 뭐 있나?

 

덕분에 반가운 분들 만나 잘 마셨다.

인사동에서 그리운 분들 만나 전시 보아가며 좋은 시간 만들자.

남는 건 그리움의 추억뿐이다.

 

사진, / 조문호

 

 

 

좌로부터 정주영 아들 김희중, 외손자 김동훈, 사위 김상균, 정주영 본인, 딸 김현아, 김소연, 언니 정영신, 사위 이성표

 

정주영 (62세)은 정영신동지의 친동생이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자식들 키우느라 죽을 고생을 했다.

그녀의 지난한 삶은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이었다.

 

얼마나 살길이 막막했으면 백일도 되지 않은 아들을 안고 6개월 동안 울었을까?

 

그러나 왈순아지매처럼 억척스럽게 자식 셋을 잘 키워 낸 것이다.

다들 대학을 졸업한 후 딸은 간호사로 아들은 직업군인이 되었다.

 

소현이와 현아 두 딸 모두 결혼식도 코로나 시국에 치루었다.

하필 하객 초청도 못할 시절에 식을 올려 부모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자식들을 위해 축의금 적금 든 돈이 얼만데...

 

이제 두 딸 모두 시집을 보내 한시름 덜었지만,

텅 빈 집에 홀로 남아야 하는 외로움은 어떻게 감당할지 모르겠다.

 

둘째 사위 김상균과 김현아의 결혼 날이 어저께 같은데, 삼 개월 전에 옥동자를 낳았다고 한다.

 

손자를 보았다는 소식만 들었지, 딸네 집에 가볼 수도 없었다고 한다.

코로나에 발목 잡혀 친정어머니까지 갈 수 없었으니, 얼마나 답답했겠나?

백일이 지나도록 손자 한 번 안아보지 못했으니... 

 

그러나 현아가 찍어 보내 준 손자 옹알거리는 사진을 들고 동내방내 자랑하며 신바람 난 것이다.

 

이제 혼자 남을 수밖에 없는 살림이라 연신내에서 불광동으로 줄여 이사했는데,

처음으로 가족들이 이사한 불광동 집에 다 모인 것이다.

 

아들 김희중은 휴가받아 나왔고, 큰딸 소현이와 큰사위 이성표,

둘째 딸 현아와 둘째 사위 김상균까지 온 가족이 모였는데,

거기다 복덩이 손자 동훈이까지 안고 왔으니, 완전 봄 사건 난 거지.

 

이제 덤직한 사위들과 달덩이 같은 손자까지 생겼으니, 얼마나 든든하겠나.

사위들 먹이려고 진수성찬을 차려놓았는데,

정 동지 따라 나까지 달라붙어 음식을 축냈다.

 

시종일관 손자 재롱에 푹 빠진 모습에서 첫 손자 본 할머니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아릿다운 아낙이 할머니로 변한 모습에서 세월의 빠름도 실감했다.

 

이것이 평범한 어머니의 자식 사랑이고, 이름 없는 소시민의 성공담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제 남은 생을 즐겁게 가꿔, 늘 행복하길 바랍니다.

 

사진, / 조문호

 

 

 

 

며칠전 녹번동에서 뜻밖의 술자리가 만들어졌다.

 

오래 전, 정동지의 ‘어머니의 땅’ 전시 때, 김남선씨가 준 선물을 찾아 낸 것이다.

‘수정방’이라는 중국술인데, 50도가 넘는 독주였다.

 

둘다 몸이 아파 마시면 안 되지만 '죽어도 고'를 외쳤다.

좋아하는 음악 들어가며 재미있게 보낸 분위기 탓일 수도 있겠으나

너무 행복해 눈물을 흘리게 한 것이다.

 쪽 팔려 평생을 말 못한 '사랑한다'는 말까지 하며...

 

그 날밤에 찍힌 사진을 보니, 아무래도 간이 배 밖에 나온 것 같다.

집에서 안되는 담배까지 피우고 있었다.

 

기어아 술병 바닥을 보고서야 쓰러졌는데, 

취하여 기분좋게 죽자고 명세에 명세를 했건만, 그만 잠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너무 가뿐했다.

그 정도 마셨으면 속이라도 쓰릴 텐데, 아무렇지도 않았다.

 

처음 맛본 '수정방', 정말 쥑이더라.

"고맙게 잘 마셨어요. 남선씨!"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지난 30일은 예술인 '스마트협동조합' 정기총회 날이었다.

대의원은 아니지만, 술 냄새를 맡아 달라 붙은 것이다.

 

그날이 바로 코로나 감옥에서 해방된 날이 아니던가?

총회 끝날 시간에 맞추어 뒤풀이 집에 갔더니, 반가운 분들이 많았다.

 

서인형 이사장, 황경하 사무국장, 박권주, 김성은, 송수아씨 등

상근하는 분 외에도 최석태, 장경호, 김이하, 정영신, 민정기,

박태종, 이미경, 김은엽, 이영경, 이명신씨 등 많은 분 들이

총회를 끝내고 여기저기 모여 있었다.

 

다들 몸 사리는 코로나 시국임에도 40명이나 참석했다고 한다.

전체 조합원 십 분의 일이 참석했다면 많이 나온 편이다.

 

스마트협동조합은 창립 삼 년 만에 괄목할만한 성장을 했다.

음악연습실 운영 등 사업도 확대되었지만, 조합원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나 역시 가난한 예술인들이 받을 수 있는 여러 지원을 받았는데,

코로나로 힘 들어 하는 가난한 예술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여태 예총이나 민예총’같은 예술단체 어디에서도 회원들 생계를 위해

도움 준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도움은커녕 회원들 갉아먹는 구조가 아니던가?

 

빈손으로 시작한 '스마트협동조합'이 불과 삼 년 만에 자리 잡은 것은

조합원들의 협력도 따랐지만, 서인형 이사장의 기획력과

황경하 국장의 추진력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찰떡궁합이었다.

 

올해는 음반 사업에 이어 출판 사업도 시작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스마트협동조합' 인터넷신문도 창간 준비 중이란다.

 성장하는 '스마트협동조합'을 보니 마음이 든든했다.

 

아직 가입하지 못한 예술가들도 참여하여 함께 만들어 가자.

예술인들의 권익을 지키려면 힘을 모아야 한다.

 

이제 가난한 예술가들이 의지할 곳이 생겼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오늘 쪽방 격리에서 해방된 날인데, 이게 얼마 만이던가?

 

귀는 어두운데다 목소리까지 막혀 통하지도 않지만,

못난 사람은 보기만 해도 기분 좋더라.

 

그런데 소주가 달달한 게 술술 넘어갔다.

술잔 주고받을 것도 없이 혼자 홀짝홀짝 마시며

사진 찍고 놀다 결국 맛이 가고 말았다.

 

성악하는 민정기, 박태종씨는 쩌렁쩌렁 좌중을 압도했고,

김이하 시인은 구수하게 축가를 불러 박수갈채를 받는 판에

감히 어찌 끼어들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서너 개 남은 이빨 사이로 튜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목구멍은 막혀 파리 방귀 소리보다 작은 주제에 말이다.

술이 취하면 간이 커진다는 말이 딱 맞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이란 구겨진 첫 구절부터 슬프게 만들었다.

아마 그건 노래가 아니라 벙어리 몸부림에 가깝다.

조지 피면 가치 웃고 조지 지면 가치 울던, 알뜰한 그 맹서에 봄날은 간다

마지막 대목에서 결국 눈물을 짤아내고 말았다.

 

그 이쁜 처자들 많은 자리에서, 팔릴것도 없는 쪽을 다 판 것이다.

그렇게, 그렇게 오바 하지 않으려고 다짐에 다짐을 해도 술만 취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지 버릇 개 못 준다. 아마 죽어야 철들 것 같다.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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