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송 기획전,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아홉 번째 강제욱論이 지난 21일 ‘갤러리 브레송’에서 개막되었다.
김남진 관장이 기획한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는 '우리 시대의 다큐멘터리 사진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지난해 8월 양승우씨를 그 첫 번째 사진가로 내세우며 시작되었다.
사진비평가 이광수 교수가 작가론을 쓴 본 기획전에는 양승우씨를 비롯하여 강재구, 김동진, 김은주, 서준영, 최치권, 모지웅, 박찬호, 강제욱씨 등 모두 아홉 명이 선정되었다. 매월 한 차례씩 한 작가의 지난 사진에서 부터 현재 작업에 이르기까지 전체 작품을 재조명하는 전시다.
시대의 목격자로서 인간 중심이라는 기본적인 정신을 계승하며 사회 부조리와 인간관계의 불합리와 모순에 분노할 줄 아는 사진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마지막 작가로 참여한 강제욱씨는 ‘The Lost Land’, ’‘민국(民國) 100년’, ‘The Wall’, ‘The Planet’, ‘Thinguniverse’ 등 20여 년 동안의 작업을 주제별로 보여주었다.
사진가 김영호씨의 사회로 시작된 강제욱論 개막식에는 부산에서 올라 온 이광수교수의시원한 사진비평이 있었다.
“강제욱은 역사를 우주의 시간 속에서 찾는다. 이성과 논리가 아닌 우연과 감성의 시간 속에서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미 지나 버린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 역사를 사진의 시간 속에서 재현하고 있다.” 명쾌한 이교수의 강의는 귀머거리에 가까운 내 귀에도 속속 들어왔다.
강의가 끝날 무렵, 사진가 김문호씨가 이번 기획전에 대한 전체 평가를 물었더니,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사진을 점검할 좋은 기회였다며,
사진이 너무 자극적이고 독한 사진이 많았다고 한다. 관객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변사가 우는 격이라고 말했다.
한바탕 웃고 넘어갔으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
밋밋한 화면에 변화를 주어 시선을 끌기 위한 방법이겠으나, 마치 유행처럼 너도 나도 어둡고 자극적인 분위기로 몰아가는 것은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만의 어법에 고민하며, 진정성 있는 접근이 우선돼야 할 것 같다.
이어 강제욱 작가가 작업에 대한 과정과 앞으로의 지향점을 들려주었고, 기획전을 마무리하는 김남진 관장의 소회도 들었다.
아무튼,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기획전은 우리나라 다큐멘터리사진의 얼개를 살펴볼 수 있는 장이었고,
왕성하게 활동하는 현역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두루 돌아보는 좋은 전시였다.
내가 보기로는 첫 전시였던 양승우론과 두번째 강재구론, 그리고 마지막 전시인 강제욱론이 인상적이었다.
이 전시는 4월30일까지 열리니, 시간나면 한 번 가보시라.
전시를 추진한 김남진 관장의 노고야 말할 것도 없지만, 시종일관 작가론을 써가며 먼 길을 오간 이광수 교수의 노고와 열의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정말, 열정적인 분으로우리나라 사진계에 보석 같은 존재다.
지난 2016년에는 매달 두 차례씩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국내 주요 사진가를 인터뷰하여 작가론을 쓰고 전시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이듬해 결과물로 한국현대사진가 열두 명의 작가론을 묶은 ”카메라는 칼이다“를 ‘눈빛출판사’에 펴내기도 했다.
”카메라는 칼이다” 제1부는 ‘시대와 시간을 기록하다’로 강정효, 권 철, 신동필, 최영진이 참여했고, 제2부 ‘사람과 역사를 바라보다’는 김문호, 김보섭, 문진우, 이재갑, 이영욱, 조문호가, 제3부인 파인아트 에는 고정남, 이수철의 사진을 논했다.
그 외에도 인도 사진가 일곱 명과 최민식선생을 비롯한 한영수, 김기찬, 이주용, 이재갑, 노순택, 조문호 등 국내 사진가 일곱 명의 논문을 마무리하여, 곧 두 권의 논문집도 출판한단다.
중요한 것은 그동안 제대로 된 국내 사진가론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사진학자들이 잘 알려진 외국 사진가들만 반복해가며 짜깁기하지만, 정작 국내 사진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대주의에 빠지지 않았다면, 밑천이 짧아 그런걸까?
이광수씨는 ‘부산외국어대학’에서 인도사를 연구하는 교수로 정년을 일 년 가까이 남겨두고 있다. 전공인 인도사는 물론 정치평론에서 사진 비평에 이르기까지 팔방미인인데, 사진으로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사진 비평에 힘을 쏟고 있다.
그의 그침 없는 바른 말에 주눅 들어, 이단아처럼 기피하는 기득권 세력도 있다. 끼리끼리 사진판을 좌지우지해 온 그 자들의 짓거리가 더 웃긴다.
강제욱론 전시 개막식에 함께한 사진가는 김문호씨를 비롯하여이윤기, 정영신, 김영호, 정윤배, 나인석, 김동진, 서준영, 모지웅, 최치권, 오철민, 고옥룡씨 등 많은 분이 참석하여 전시를 축하했다.
이광수씨는 인도사 유튜브 강의 동영상을 찍기 위해 일찍부터 왔다는데, 일이 끝난 후 나에게 페북 메시지를 보내왔으나, 또 뒷북을 쳤다.
페북은 컴퓨터에서만 볼 수 있어 밖에서는 볼 수가 없었다.
뒤풀이는 충무로 ‘김삼보’에서 했는데, 모처럼 반갑고 즐거운 술자리가 되었다.
이교주의 통쾌한 구라에 술이 술술 넘어갔다.
술자리에서 최민식선생 아카이빙을 위한 프로젝트를 맡았다는 반가운 소식도 전해 주었다.
모처럼 최민식 선생의 지난 일들을 회상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번에 마무리한 내 사진 논문은 철학자 ‘니체’와 관련이 있다는 말도 했다.
‘니체’라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거나‘신은 죽었다’ 정도밖에 모를 정도로 무식한데,
어떻게 관련 있는지 공부 좀 해야겠다.
무려 2년에 걸쳐 논문을 썼다는데, 이 원수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부산행 열차를 타기 위해 밤 열시 무렵에야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몇몇은 맥주집으로 이차를 간단다.
매번 아무런 대가도 없이 먼 길을 달려와 애쓰시는 모습이 너무 고맙고, 안 서러웠다.
술이 취해 집으로 돌아와 습관적으로 컴퓨터를 열어보니, 페북에 글이 올라왔다.
부산 가면서 취중에 올린 글 걑은데, “진짜 내가 오래 살아야 한다.”란 열한 자가 적혀 있었다.
지난 15일 정영신씨와 함께 세상을 떠난 창원 김의권씨의 장례식장에서 황성건, 변형주씨를 만나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눈 후 인근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튿날 발인을 지켜본 후 양산장에 가기 위해서다.
울산에서 온 황성건씨와 동행했는데, 양산장에는 공윤희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정동지는 장터 촬영을 왔는지, 장보러 왔는지 모를 정도로 농산물을 바리바리 사들고 왔다. 온 김에 오세필씨도 만나보기 위해 남창에 있는 ‘동광기와’를 찾아간 것이다.
남창에 있는 기와 골 사무실은 열려 있으나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사무실에는 나무로 만든 다양한 모골(기와모형 틀)이 진열되어 있었다. 작업장에는 귀면기와와 용두 같은 미완의 기와들이 어지럽게 놓여있었는데, 마치 귀신 나올 듯 으스스 했다.
문 닫힌 기와공장에는 반구대 암각화를 형상화한 전돌이 전면을 장식하고 있었는데, 두꺼비굴이라 불리는 재래식 기왓굴과 달랐다. 노장들의 증언에 의하면 한국 전래의 기왓 가마는 쌍굴이었고 원주에서 발견된 경우는 산언덕을 깎고 굴을 뚫었다. 부여근교에서 발굴된 백제 와요는 강둑에 굴을 파고 바닥에 구들장까지 놓았다고 한다.
담장처럼 쌓아 둔 기와더미를 보니, 사양길에 접어든 기와의 암울한 현실을 읽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각 지방마다 특색 있는 기와를 만들어 왔으나 콘크리트로 지은 슬라브집이 대세를 이루는데다 양기와와 슬레이트 등 새로운 지붕재료의 보급으로, 명맥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가상한 일이다. 지금은전통기와의 수요가 점차 줄어 둘어 이곳 울산 남창과 전라도 장흥군 안양면에서만 만들어진다고 한다.
오세필씨가 운영하는 ‘동광기와’는 선조인 오호영옹이 1900년대부터 시작하여 4대째 이어지는 긴 역사를 가졌다. 3대째인 부친 오성환씨가 ‘동광기와’라는 이름으로 확장시켰고, 4대째인 오세필씨가 이어받으며 문화재관리국 등록1호가 되었다고 한다.
오세필씨는 황금기와를 개발하여 구인사 '대조사전'에 올리기도 했다. 구인사가 돈도 많으면서 콘크리트 절만 만든다는 비판을 받자 제대로 된 ‘대조사전’을 건립한 것이다. 신흥수대목장이 도편수가 되고 오세필 제와장이 기와를 맡는 등 전통건축의 장인들을 불러 모아 지어졌는데, 안쪽은 한 층이지만 겉으로는 3층이라법주사팔상전의 구조와 비슷하다. 그 '대조사전'은 1992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2000년에 완공되었는데, 오세필씨의 금빛 기와는 도금이나 단청이 아니라 유약을 발라 구운 기와라 시간이 지나도 빛이 바래지 않는다고 한다.
기와는 암기와와 숫기와로 구분되는데, 아래에서 받쳐주는 넓적한 기와가 암기와고, 위에서 덮어 지붕의 골을 만드는 둥근 기와가 숫기와다. 또한 암막새와 수막새, 귀면기와(도깨비 얼굴을 새긴 기와), 치미(전통 건물의 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얹는 기와), 용두(용머리를 표현한 기와), 망와(지붕의 마루 끝에 세우는 기와) 등 부속장식 기와도 다채롭게 만들어져 사용되었다.
전통 기와는 흙과 물로 만들기 때문에 습기가 많은 우기와 한랭한 계절을 피해 봄과 가을에 제작된다. 첫 작업은 질 좋은 원토를 채취하는 것이다. 검은 흙, 누런 흙, 붉은 흙 등 세 종류의 흙이 고루 배합돼야 좋은 기와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기와를 만드는 공정은 찰진 진흙으로 된 점토를 물과 반죽하여 흙 사이에 기포가 생기지 않도록 밟고 짓이기는 작업을 반복하며 나무로 만든 모골(模骨)이란 틀에 넣는다. 모골의 외부에 마포나 무명천을 깔고 반죽한 진흙을 다져 점토판 위에다 씌워 방망이 같은 판으로 두들긴다.
그런 다음 와도(瓦刀)로 2등분하거나 또는 3, 4등분하여 자른 다음장방형으로 재단한 진흙을 한 조각씩 떼어 와통 둘레에 붙인다. 와통은 진흙을 성형하는 데 쓰이는 원통형의 나무통이다. 성형 작업 중에도 진흙 판을 계속 두드리는데, 이는 흙 사이에 기공이 생기면 나중에 굽는 과정에서 기와가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양이 잡힌 뒤에는 대나무칼 등으로 선을 긋고 건조 과정을 거친 뒤 각각의 낱 기와로 분리해 다시 말린다.
최종 단계는 가마 작업이다. 말린 기와를 화기가 고루 통하도록 가마에 차곡차곡 쌓은 뒤 사흘간 불길을 조절하며 섭씨 1000도가 넘는 고온에서 구워낸다. 은은한 검은색이나 은회색이 되면 제대로 구워진 것이다. 이렇게 한 장의 기와가 탄생하기까지 40일 가까이 흙과 물, 그리고 불 속에서 서른 가지가 넘는 까다로운 공정을 거쳐야 한다.
전통 기와는 기계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자연스러운 곡선미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수분 흡수율과 통기성도 이른바 ‘공장 기와’가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옛 기와를 두고 흔히 “살아 숨쉰다”고 표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전에는 시골 여행을 하다 보면 곧잘 눈에 띄던 것이 흙으로 두둑하게 쌓은 두꺼비굴이 있었는데, 요즘에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워낙 영세한 시골의 기와공장 인데다 인력 의존도가 높은데 비해 값이 싼 제품이라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곳저곳 살펴보며 전통기와의 우월성과 창의성에 감복하고 있으니, 제와장 오세필씨가 나타났다. 손님 접대를 위해 횟집에 회 사러 간 것 같았다. 오세필, 정영신, 황성건, 공윤희씨 등 다섯 명이 회를 싸들고 오세필씨 형님이 운영하는 고깃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식당은 여러 차례 가보았지만, 소고기 육질이 좋아 입에 찰싹 달라붙었다. 소고기에다 생선회가 어울리지 않는 궁합이지만, 회를 좋아하는 정동지를 위한 특별한 배려였다.
그리고 식당 벽에도 오세필씨의 기와 골에서 구워낸 전돌이 장식하고 있었다. 장식적 효용성만 아니라 전돌이 고기냄새를 흡수하는 이점도 있다고 한다. 아무튼, 오세필씨 덕에 맛있게 잘 먹었다.
식당에서 나와 보지 못했던 와당 전시장을 둘러보았는데, 마치 기와 박물관에 온 것 같았다. 백제기와에서부터 신라기와에 이르기까지 연대별로 전시되어 있었는데, 입이 쩍 벌어졌다. 심지어는 오래된 기왓장 조각까지 바리바리 모아 두었다.나라마다 기와의 특징이 뚜렷했다. 고구려의 기와는 힘차고 날카로운 모습을 보였고, 백제의 기와는 간소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다. 백제기와의 보드라운 촉감에서 특유의 조형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또 통일신라 때의 섬세한 문양은 무르익은 미의식의 화음이 느껴졌다. 신라의 기와는 처음에는 소박했으나 차츰 화려해지고 무늬가 다양하게 나타났다.
제와장 오세필씨의 설명으로는 우리 기와가 삼국시대에 꽃을 피웠다고 한다. 고구려와 백제가 각기 수준 높은 조와 기술을 가지고 있었는데, 통일신라에는 독자적인 기와를 구워내어 완성의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심지어 녹유 기와와 전돌이 그러하려니와 무늬에 있어서도 다양하고 정교하다. 그런데 고려이후의 무늬와 종류는 한계점에 달했음을 보게 된다. 청자로 구운 기와까지 나왔음에도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12세기로 한 고비를 그었다. ‘얼굴 무늬 수막새’는 자연스러운 미소를 간직한, 신라의 대표적 기와 유물로 꼽힌다. 그리고 강진에서 구워진 모란당초 무늬의 청자기와는 얼마나 기발한 착상인가.
옛 유물에 나타난 기와의 종류는 무려 20여종에 달했다. 평와로서 암기와와 숫기와는 물론, 숫기와로서 미구기와와 토수기와가 더 있었다. 막새는 평기와에 낙수의 드림새를 붙인 것이고 망새 (망와)는 용마루나 내림마루 끝에 다는 바래기를 말한다. 옛것에는 귓기와, 곱새기와, 기왓골수새 등 갖가지 기와가 있었다고 한다. 치미, 용두, 잡상, 토수 같은 것은 궁궐이나 큰 사찰용이라 흔치 않았다.
정영신씨는 이곳에서 구웠다는 달항아리 한 점과 오래된 숫기와 한 점을 선물 받았다. 숫기와에 핀 세월의 꽃은 어느 조각품도 따를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나저나, 문화재청에서 전통기와를 전승하고 보존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 같다.
전통기와를 배우려는 사람도 없거니와타산이 맞지 않아 더 이상 만들 수가 없다는 말에귀가 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