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너무 바빠 불알에 요령소리가 날 지경이다.

전시 치루느라 정신 차릴 겨를도 없었는데, 또 다시 전시 아닌 전쟁을 치루어야 할 판이다.

여기 저기 바쁘게 쫓아 다니다보니 반가운 사람도 많이 만났다.

 

어제는 '눈빛출판사' 예술산책으로 교정보러 갔는데, 사진평론 하는 진동선씨가 와 있었다.

둘 다 부산에서 올라 온 처지라 어찌 사는지 항상 궁금했는데,

한동안 병원에서 고생하다 살아났다는 뜻밖의 소식도 전해주었다.

사진평론집 출판을 위해 왔다는데, 반갑기 그지없었다.

 

나 역시 사진집이 나와 전시까지 준비해야 할 처지가 되어버렸다.

16일부터 정영신의 ‘장날’전이 '돈화문박물관마을'에서 열리기도 하지만,

24일부터 나의 '인사동 이야기'도 '나무화랑'에서 열린다.

 

얼마전 노광래씨가 추진한 ‘인사동 이야기’ 복간이 생각보다 늦어졌기 때문이다.

‘노숙인, 길에서 살다’현수막 전시 때 싸 잡아 출판 기념회까지 열 작정이었는데,

한 분이라도 더 찍어 제대로 된 개정판을 만들려는 욕심이 문제였다.

 

사진원고가 지체된데다 책 만드는 ‘눈빛출판사’까지 요즘 일손이 모자란다.

출판사 운영이 어려워 파주로 옮긴 후로 이대표 혼자 살림 살아가며 책을 만들어야하니

날짜 맞추기가 힘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달 하순경 책이 나온다는데,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는가?

전시 소리만 들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만,

적자를 무릅쓰고 내주는 출판사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가 아니겠는가?

사진은 못 팔아도, 책이라도 한 권 팔려는 속셈에서다.

 

문제는 전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전시에 들어 갈 경비야 차지하고라도, 요즘 몸이 말이 아니다.

보름동안 전시 치루느라 퍼마신 술병 후유증으로 빌빌거리며 돌아다니는데,

죽지 못해 움직이는 산송장에 가깝다.

 

그렇다고 정동지 돕는 걸 포기할 수도 없지만, 아는 분들 행사도 어찌 모른척 할 수 있겠나?

근 한달 가까이 돌아 다니며 찍은 사진이 첩첩이 쌓였지만 그대로 처박아 둔 것이다.

이미 시기를 놓쳐 포스팅할 필요도 없는 것이 태반이라 정리하고 싶은 생각도 없어졌다.

이 포스팅도 근 열흘 동안의 사진과 이야기를 짜집기 한 것이다.

 

며칠 전 정동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전시할 '장날' 사진을 프린트하니 좀 옮겨 달라는 기별이었다.

'스마트협동조합'으로 가보니, 때 마침 김문호씨가 와 있었다.

예술인 등록하는 일이 까다로워 도움받으러 왔다는 것이다.

짐부터 옮겨놓고, 서인형이사장과 어울려 전으로 시작해 전으로 끝나는

전집에서 시작된 술자리는 녹번동 정동지 집으로 이어졌다.

 

김문호씨는 나를 처음 만난 오래된 이야기를 꺼냈다.

부산에 계셨던 사진가 최민식선생을 만나러 갔더니, '서울에 있는 조문호를 만나 보라' 했단다.

그래서 이석필, 안해룡, 김봉규, 추연공, 이한구씨등 여러명이 규합하여 ‘사진집단 사실’이란

동아리를 만들었고, 김문호씨와는 충무로에서 같은 사무실을 사용한 인연도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이튿날은 아산에서 ‘공유공간 마임’을 운영하는 김선우씨가 녹번동 집으로 찾아왔다.

정동지가 ‘장날’전을 보조할 장터 소품 좀 알아보라 부탁한 모양인데,

어디에서 구했는지 바리바리 싸 들고 왔더라.

골동 가게에서도 구하기 힘든 물건이 있어 깜짝 놀란 것이다.

 

옛날 아리랑 성냥각에서 부터 손저울, 됫박, 체 등 귀한 것들만 챙겨왔다.

김선우씨는 안 되는 게 없는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다. 무조건 밀어부치는데는 선수다.

늦도록 노닥거리다 아산으로 돌아갔는데, 자정이 넘어서야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난 주말에는 정영신씨와 가을 나들이 겸 장터 촬영을 떠났다.

모처럼 호젓한 시간을 가졌으나, 머리는 온통 눈 앞에 닥친 전시 걱정뿐이었다.

전시할 마음을 먹었다가 취소하기를 여러차례 번복하니,

정동지가 ‘나무화랑’ 김진하 관장께 전화 걸어 전시할 날을 잡아버린 것이다.

이제 날자가 정해졌으니, 죽기 살기로 매달릴 수밖에 없다.

 

있는 사진 골라 전시하는 건 어려울 것 없으나, 무슨 말을 하느냐가 문제다.

조그만 전시장이지만 인사동 정체성도 말하고 싶고, 흘러간 풍류도 되새기고 싶고,

암울한 인사동 현실을 보여주고 싶은 생각 등 온갖 욕심만 난무했다.

전체적인 내용은 내년에 마무리할 ‘인사동 풍류 40년’ 출판전 때 하기로 하고,

며칠 동안 한가지에 집중해 사진을 찾아 보기로 했다.

 

지난 5일은 아침부터 연이어 연락이 왔다.

제일 먼저 케이비에스 이석재 피디 였는데, 오늘 만날 수 없냐는 것이다.

며칠 전 만난 자리에서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는 대신 다른 방면으로 협조할 것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한 시간 분량의 연말 특집이라는데, 시달리는 시간보다 빈민들 내세워 잘 난채 하는게 쪽팔려서다.

동자동 사는 동안 여러 매체에서 요청해 온 인터뷰를 번번이 거절하는 것도 일이었다.

 

그렇지만 당면한 재개발문제에서부터 고통받는 빈민들의 현실을 알려

개선하는 일 또한 소홀할 수 없는 일이라 ‘동자동사랑방’ 선동수 간사장을 추천했다.

필요하다면 노숙인이나 쪽방 빈민 중에 힘든 사람을 연결시켜 주거나

그동안 찍은 스틸사진은 제공해 주겠다고 약속하며 일단락 지은 것이다.

 

전화 온 바로는 일전에 말한 노숙인 소개도 받고 싶고,

‘노숙인, 길에서 살다’ 책을 샀는데, 사인도 받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눈빛출판사' 이대표 약속이 내정되어 있어 월요일 오전으로 미루었다.

두 번째는 부산의 함창호씨가 오후 세시경 서울역에 도착한다지만,

그 또한 저녁 시간으로 미루었다.

 

녹번동에 들려 정동지를 태우고 경인선 책거리부터 갔더니,

생각지도 못한 진동선씨가 이규상대표와 함께 있는 것이었다.

 

이대표가 파주에서 챙겨 온 교정본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는데,

더러 이름과 사진이 바뀐 것도 있으나 초판보다 편집디자인이나 내용이 새롭고 알찼다.

인사동에서 50년 동안 리어카 끈 이방웅씨와

‘그림마당민’에서 잔뼈가 굵은 미술평론가 곽대원씨 사진까지 넘겨주고 마무리했다.

 

마지막 교정은 메일로 하기로 하고, 함창호씨가 기다리는 인사동으로 갔는데,

함창호씨는 짐 내려 놓고 온다며 좀 늦겠다고 했다.

'유목민'에는 장경호씨와 이기정, 한상진씨 등 반가운 분이 여럿 있었다.

골목에 앉아 술 마시다 보니, 벽치기 골목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정동용시인을 필두로 박건, 김수길, 백승호, 정영철, 황경애, 이인섭선생까지 줄줄이였다.

오랜만에 맛보는 인사동 주막 골목의 진미였다.

 

드디어 기다리던 함창호씨가 나타났다.

인사 나눈 뒤, 자리를 옮겨 사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 작업하는 주제는 사라지기 직전의 농촌가옥과 사람이었다.

농민들 사진은 입상사진이 주종을 이루었는데, 기존 사진과의 차별화가 난제였다.

 

그렇지만, 마지막 남은 농촌 옛모습은 곧 사라질 우리의 유산임에 틀림없다.

나 역시 한 때 '두메산골 사람들' 사진을 찍어사진집을 출판한바 있지만,

20년이 가까워지니 당시의 풍경은 모두 바뀌었고, 사람도 세상 떠난 사람이 더 많다.

내가 찍은 사진이 흑백사진인 반면 함창호씨 사진은 컬러사진이었다.

 

사실적인 측면에서는 컬러사진의 리얼리티가 더 강하다.

나 역시 예전에는 흑백사진만 고집했으나, 지금은 컬러사진의 생생함을 더 즐긴다.

함창호씨가 페북에 틈틈이 올리는 사진을 보아 왔는데,

자연이 주는 녹색의 푸르름과 따뜻한 황토색이 가슴에 와 닿았다.

 

무엇보다 틀에 갇히지 않고, 정제되지 않은 화면 자체가 마음에 들었다.

얽메이지 않고 자유롭게 작업하다보면 자기만의 틀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늦게 사진 세계에 빠져들었다지만, 기존 아마추어 사진과는 달리

자신이 좋아하는 한 분야에 빠져들어 나름의 가치를 찾아내고 있었다.

 

머지않아 농촌에 대한 그만의 사진세계가 확립되리라 기대되었다.

 

그나저나,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마시다 보니 주량을 초과해 버렸다.

마침 장경호씨와 함창호씨가 비슷한 연배인데다 둘다 경남고등학교 출신이라

두 사람을 붙여놓고 줄행랑 친 것이다.

 

거지 팔자에 대리기사까지 불러 뒷자리에서 비스듬히 누워 편하게 돌아왔다.

바쁘게 쫓아 다닌 하루였지만, 반가운 분들 만나 기분 좋은 날이었다.

'인천의 성냥공장'이 입에 달삭거렸지만 허벅지를 꼬집어 가며 참았다.

 

사진, 글 / 조문호

 

 

 

 

어떤 책은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큰 감동을 선사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합니다.

‘책 속 명문장’ 코너는 그러한 문장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입니다.

[독서신문 전진호 기자]

내가 어릴 적에 장(場)이 열리는 날이면 온 마을 사람들은 잔칫날처럼 들썩거렸다. 안동 아재의 소달구지가 동구 밖에 이르면 깨순이 엄마 보따리가 제일 먼저 실렸다. 뒤이어 마을 사람들 보따리가 하나둘 올라가면 사방이 초록으로 덮인 신작로 길을 빠져나갈 때까지 뒤따라가다가 돌아왔다. 봄이면 들판에 앉아 있던 자연도 덩달아 장에 나와 그 지역만의 삶의 이야기를 초록빛으로 품어냈다. 후미진 장 골목에서는 갈퀴와 도리깨, 체와 쟁기를 만들었고, 정월 보름을 앞두고 농악놀이에 쓸 짚신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팔았다.

대장간 앞에는 날이 무뎌진 호미와 낫을 벼르려고 노부부가 앉아 있었고, 텃밭에서 뜯어온 채소와 농로에서 잡은 미꾸라지를 가지고 나온 박씨 아짐은 생산자이면서 판매자였다. 또한 장터 끝 골목에는 엄마 따라온 삼식이가 새끼 돼지가 도망갈까 봐 새끼줄을 붙들고 동그마니 앉아 있었고, 털북숭이 복숭아를 머리에 이고 온 순덕이, 소금물에 우린 감을 베어 먹던 주근깨투성이 깨순이도 있었다.

이렇게 장은 자연과 흙과 나무에서 흘러나온 푸르디푸른 이야기가 살아 있어 움직이는 박물관이 됐다. 지금 장은 예전과 많이 다르다. 그러나 땅과 더불어 살아가는 농민들이 지역 농산물로 만들어가는 농민 장터가 살아야 한다. 장은 단순히 뭔가를 사고파는 장소를 뛰어넘어 인간의 삶과 정이 생생히 살아 있는 공간으로 새롭게 해석돼야 한다. 장을 통해 소통하는 백성의 삶은 수천 년 전부터 이어져 왔으나 시대가 변하면서 오일장은 점점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34년째 장터를 돌아다니면서 장터를 장터답게 만들 계기는 무엇일까 숱하게 고민했다. 사진 한 컷 촬영하지 못하고 파장 무렵까지 장꾼들과 장에 나온 농민들과 이야기만 하다 돌아오기도 했다. 장터에서 만난 사람들도 자신이 사는 곳에 어떤 보물이 숨어 있는지 책이나 텔레비전에 소개된 것 말고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했다. (중략)

이 책은 내가 이전 책들에서 다룬 적이 없었던 장터와 지역 문화재를 찾아다니며 작업한 결과물이다. 그러나 여기 소개한 장 말고도 지금 작업 중인 장이 열 곳이 넘는다. 30여년 전 흑백필름으로 작업했던 예전 장터 모습과 요즘 모습을 비교해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30년 세월이 많은 것을 바꿔놓았으나 장에 오는 사람들이나 장에서 파는 물건들은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더 크게 말하자면 장에 오는 사람들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불과 55년 전인 1965년에는 버스비가 1원이었고, 쌀 한 말 값이 360원이었다. 우리 사회가 근대화 이후 엄청나게 발전했음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나는 지금도 장터에 가면 고향 냄새와 맛, 소리와 감촉을 느끼고 싶어 구경하러 나온 사람처럼 장을 몇 바퀴나 돌며 헤집고 다닌다. 어떤 물건이 새로 나왔는지, 난전에서 무엇을 파는지 알고 싶다. 계절 따라 파는 물건이 다르기에 사계절 모두 장에 가봐야만 그 생리를 알 수 있다.

겨울철 구례 산동장에 가면 산수유 열매로 장 안이 온통 새빨갛다. 이처럼 장터는 그 지역의 삶이 그대로 펼쳐진 한 폭의 풍속도다. 치열한 삶의 현장이면서도 인정 넘치는 백성의 문화 공간이다. 내게 남은 숙제는 지역마다 서로 다른 장의 특색을 잘 살려낼 고유한 문화를 찾아내는 일이다. 우리네 시골장은 선조들의 역사이고 우리의 현재이자 아이들의 미래다. <5~7쪽>

『장에 가자』

정영신 지음│이숲 펴냄│248쪽│18,000원

출처 : 독서신문(http://www.readersnews.com)

정영신 작가의 철칙은 장터에서 절대 카메라를 안 꺼내고, 항상 반나절은 할머니들과 이야기 나누고 사귀는 데 공들인다는 것이다. 사투리를 써서 외지사람이 아닌 것처럼 다가가는 것이 그 비법이라고 했다. 할머니가 바닥에 앉아 있으면 자신도 바닥에 앉아 눈높이를 맞추고 할머니 말씀을 귀담아 들어 배우러 온 아랫사람임을 온몸으로 표현한다고 했다. 그렇게 다가가니 할머니들은 하나만 물어봐도 아주 상세하게 알려준다고 했다.

 

 

오일장 600곳 농촌여성의 삶 사진에 담다

어르신 우울증·치매 예방하는 장터의 순기능

고령사회, 귀농귀촌인과 농촌공동체 되살려야

 

정영신

농촌 할머니 희로애락 카메라에 담다

1958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난 정영신 작가는 어려서부터 소설가를 꿈꿨다. 신춘문예에 도전했지만 고배를 마시면서, 많은 사람을 관찰할 수 있고 토속적인 말을 들을 수 있는 우리나라의 600여 개 오일장을 찾아다녔다.

“카메라가방에 사탕과 담배만 넣어 다녔어요. 사탕과 담배만 있으면 장터 사람 모두와 친구가 됐죠. 장터에서 무슨 물건 팔고, 어디 구역 사람이 담배를 좋아하는지 사탕을 좋아하는지 알게 됐죠.”

정영신씨는 장터에 가면 할머니들에게 살갑게 다가가 말을 걸고, 점심을 먹고 있으면 음식을 같이 먹으면서 인연을 만들어나간다고 했다. 할머니들과 친해지면 농장과 집에 놀러가면서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다양한 정보를 수집한다고 했다.

“할머니 얼굴에는 희로애락이 다 담겨 있어요. 대화해보면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살아온 이야기를 하고 자식자랑, 동네자랑을 해주시죠. 삶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들어있는 말속에는 할머니들의 지혜가 들어있습니다.”

장터사람들을 사귀어 놓고 나중에서야 카메라로 사진을 촬영하니 정영신씨의 사진들은 하나 같이 인물의 표정과 행동이 자연스럽다. 지난 9월 정영신씨는 장터에서의 기록을 모아 ‘어머니의 땅’ 사진전을 개최하고 동명의 사진집을 냈다.

그러면서 정영신씨는 청년들이 도서관에서 공부만 하지 말고 동네 시장에 가서 할머니 손을 잡고 말을 붙여보는 것을 시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문학을 하기 위해 많은 할머니와 대화해본 결과, 책보다 더 많은 것을 할머니에게서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또 할머니들도 자신을 아는 척 하고, 모르는 사람이어도 다가와 관심 가져주면 참 좋아하더라고 정영신씨는 말했다.

장터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장소

1980년대 장터는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보다 구경 오는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한다.

“장 중에 장인 난장을 많이 찾아다녔어요, 마을에서 농사짓는 할머니가 하루 팔아서 재밌을 양 만큼만, 버스 타고 이동할 수 있는 무게만큼만 보따리에 갖고 온답니다. 욕심 없이 장에 오니까 한 번에 많이 파는 것도 싫어해요. 사람이 그리워 장에 나왔는데 좌판에 아무것도 없이 어떻게 앉아 있냐고 그래요. 뭐라도 펴놔야 사람들이 구경하고 당신도 사람 구경하지 않겠냐 하십니다.”

할머니들은 집에만 있으면 다른 생각 들고, 텔레비전만 보게 되면 병나겠어서 적은 돈을 벌어도 장터에서 물건 파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고 한다.

“장터는 농촌여성들이 왕이에요. 남자들은 차 안에만 들어가 있죠. 그래서 할머니들이 장에 나오는 걸 더 좋아하는 것 아닐까요? 집에만 있으면 남편 군소리만 듣는데, 장터에 나오면 내 세상이 되니까요.”

'어머니의 땅' 사진집 표지/ 눈빛출판사/ 가격35,000원

 

농촌여성 이름 알려 성평등 의식 높여야

할머니들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서비스 마인드도 남성에 비해 어렵지 않게 표현한다. 손님들에게는 남성보다는 아직 여성에게 친절을 기대하고, 물건을 사고 싶은 심리가 깔려있다는 것이다. 장터에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사람도 여성이고, 농촌에서도 농사일을 연결해주는 사람은 여성인데 어째서 여성의 지위는 남성과 공평하지 않은지 정영신씨는 의문을 품었다.

농촌 현실이 바뀌려면 정영신씨는 농사일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농촌여성들이 당당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자신의 물건을 자신 있게 판매할 때 구매하는 손님도 즐겁다고 했다.

“장터에 직접 도토리묵을 쒀서 판매하는 자매 할머니를 만났어요. 가져오자마자 순식간에 동이 나더라고요. 도토리묵 이름은 뭐냐고 물었더니 그냥 우리가 만들었다 말하고 끝이었어요. 맛이 좋으니까 인기리에 팔리는 건데, 두 사람의 이름 붙여서 도토리묵으로 팔면 손님들도 호칭 생겨서 더 애정을 가질 거라고 말했어요. 농사에 가치를 높이려면 자신만의 브랜드가 있어야 진정한 자신의 상품이 되는 거니까요.”

정영신씨는 장터에서 농산물 팔 때도 지역명, 농장이름 붙이지 말고, 꼭 자신의 이름을 붙여야 더 즐겁게 동력을 얻을 수 있다고 방법을 소개했다.

귀농귀촌인과 소통해 농촌 고령화 극복해야

정영신씨는 앞으로는 과학이 농업에 접목되면서 농사짓는 사람이 최고인 세상이 될 거라고 봤다.

“귀농하는 사람들은 더 여유 있게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농촌으로 옵니다. 귀농인들은 농사지으면서도 사람들 불러서 팜파티 열고 세미나 갖고 시낭송을 해요. 기존 농사짓던 원주민들은 바깥사람들과 자유롭게 소통하는 농촌의 변화를 버거워 해요. 여러 이유가 갈등이 돼 귀농귀촌인을 배척합니다.”

자연 속에 살면서 농산물을 가꾸는 농업인들이 왜 행복하다는 말 대신 농사가 힘들고 사는 게 어렵다는 말을 많이 하는지, 행복하다고 말하는 농업인은 없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농업인의 목소리가 장터에서 자주 들려온다고 했다.

“옛날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농장에 가서 일손 보태며 두레로, 품앗이로 농사지으면서 시름을 잊었죠. 요즘은 할머니들이 혼자 농사짓고 혼자 논다고 말하세요. 농촌이 단절돼 갈수록 남편만 찾고, 자녀들에게 볼멘소리를 하게 되는 환경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정영신씨는 농촌이 고령화 되면서 전통시장이 위기라고 했다. 읍면에서 열리는 장터에 가면 할머니들이 “우리 죽으면 장도 없어질 것”이라고 걱정한다고 했다.

대형마트 확산에 전통시장 지키려면…

농촌의 문제는 산적해있지만 그럼에도 전통시장은 계속 이어져야한다고 정영신씨는 말했다.

“사람들은 편리하다는 이유로 대형마트만 이용해서 장터에 갈 때마다 할머니들은 마트가 생겨서 우리 같은 사람들은 장사를 못한다고 하소연하세요.”

1만 원 어치만 사도 배송을 해주는데 할머니들은 물건을 어떻게 팔아야 되나 고민이 많다고 했다.

“그럼에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이뤄지는 거래를 장터는 끝까지 지키려고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1000원짜리 머리빗을 사도 장터에 단골집만 찾는 손님을 맞이할 때, 하나를 사더라도 찾아오는 손님이 있는데 할머니들은 어떻게 장을 안 나오겠냐며 말하세요. 자본주의 사회여도 장터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정이 흐르는 장소로, 물건만 바뀔 뿐 장터를 이용하는 마음은 변치 않을 겁니다.”

 

농촌여성신문 / 민동주기자

 

'코리안 타임스' '어머니의 땅' 인터뷰 기사

[출처] 인터뷰 – 정영신 사진작가 “장터는 사람과 정이 흐르는 삶의 현장”|작성자 인사동 이야기

인터넷에 떠도는 작가 미상의 1950년대 장터 주막이다

정영신의 ‘한국의 장터’ 사진전이 돈의문박물관마을에서

오는 11 9일부터 1231일까지 열리는데,

한 달 더 연장될 수도 있단다.

 

정영신사진, 1990년 순창장

 

얼마전 인사동에서 열린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전시장에

눈빛출판사이규상대표와 돈의문박물관마을전시팀장 전영주씨가 오셨더라.

'돈의문박물관마을'에서 정영신의 한국의 장터사진전을 두 달간 열고 싶다는데,

작가 출품비까지 준다기에 귀가 번쩍 띄었다.

 

그런데, 도대체 돈의문박물관마을이 어디 있는 곳인가?

그동안 어지간히 졸랑거리며 다녔는데, 모른다는 게 남세스러웠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돈의문박물관마을은 한양도성 서쪽 성문 안 첫 동네로

역사적 가치와 흘러간 근현대 서울의 삶과 기억들을 고스란히 품은 곳이었다.

서울형 도시재생 방식으로 재탄생한 도심 속 마을의 역사적 문화공간이라는 것이다.

 

돈의문박물관마을은 이웃한 종로구 교남동 일대와 더불어 

2003 '돈의문 뉴타운지역으로 선정되면서

기존의 건물을 모두 허물어 근린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울시는 한양도성 서쪽 성문 안 첫 동네로서

새문안 동네의 역사적 가치를 알리고 마을의 삶과 기억이 보존된 작은 마을 그 자체를

박물관마을로 남겨 시민의 문화 자산으로 조성하고자 했다

마을 건물은 최대한 살려 리모델링 했으나 

일부 집을 허문 자리에는 넓은 마당을 만들었다

 

근현대 건축물 및 도시형 한옥, 100년의 역사를 지닌 골목길 등

정겨운 마을의 모습을 그 자리에 남겼다.

많은 시민이 즐기고 체험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의 장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박원순 시장 재임 시 만들었으나 홍보가 미흡했는지

아직 서울시민에게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현재 돈의문박물관마을은 ‘근현대 100기억의 보관소’ 컨셉으로

새롭게 단장을 마쳐 시민들을 맞이한 것이다.

40개 동의 기존 건물은 그대로 두면서 본래 조성 취지인 

'살아있는 박물관마을'이라는 정체성을 되살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일 년 내내 전시체험공연마켓 등이 열리는 '참여형공간으로 채워

전면 재정비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찾아가는 길은 정동길 따라 올라가면 '경향신문사'가 있고

그 건너편 큰길 건너에 '강북삼성병원'이 보인다.
'강북삼성병원' 바로 옆행촌동 넘어가는 좁은 골목길 건너편이 돈의문박물관마을이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이전까지는 서대문이었던 돈의문이 있던 자리였다.
현재 강북삼성병원 자리는 1920년대 세워진 초기 유한양행 자리였고,

그곳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사셨던 경교장이 있던 곳으로

지금도 강북삼성병원뒤쪽 주차장 입구에 초라하게 남아있다.

경교장은 1968년 고려병원(강북삼성병원의 전신)이 그곳에 터를 잡았고

이후 2014그 일대는 돈의문 뉴타운이 건설되면서 재개발을 하게 된다.

 

돈의문박물관마을자리는 원래 근린공원 부지였으나

개발 계획이 바뀌어 박물관마을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돈의문은 새문이라는 별칭이 붙었고,

돈의문 안쪽 동네는 새문안동네로 불렸다고 한다.

 

네비의 안내에 따라 가보았더니,

주말이 아니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었다.

 

문득 북촌한옥마을이 떠 올랐는데, '돈의문 박물관' 마을 전체가 박물관이었다.

오래된 주택과 좁은 골목가파른 계단이 같은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마을 여기저기에는 잊혀진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목마가 반겼고, 간첩을 신고하는 딱지가 보였고,

한 번쯤 들려본 것 같은 극장간판도 보였다.

 

그리고 이곳에는 어린이 하면 생각나는 인물, 방정환 선생님에 대한 스토리도 볼 수 있는 곳이다.

방정환 선생님이 태어난 곳과 생애 마지막을 보낸 곳은 돈의문 박물관에서 매우 가깝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 '돈의문 박물관 마을'에는 '돈의문 역사관'이 자리 잡고 있다.

역사관은 하나의 건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네 개 건물로 분산되어 있었다.

그리고 돈의문박물관마을은 월요일이 휴관이란 걸 잊지 마시라.

 

돈의문 박물관 전시장을 찾아가니, 전시팀장 전영주씨가 반겼다.

전시 공간은 작가들 전시장으로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여러 가지 정보를 주고받으며 효과적으로 우리 장터를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로 했다.

 

그러나 문제점으로 남은 것은 주말마다 작가가 나와

엽서에 서명해주는 시간을 만들려 했으나 코로나 때문에 서울시와 협의를 해야 하고.

장터 사진집은 물론, 이야기 그림책조차 판매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 말라면 안 하면 되지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운영자들의 생각이 안타까웠다.

 

아무튼, 전시 기간에는 사진인 보다 부모들이 자식들 손 잡고 와 주시면,

자식들에게 엄마 아빠가 살았던 예전 모습을 자식들에게 전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기대하시라!

사라져 가는 장터의 추억을...

 

사진, / 조문호

 

 

보름 동안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과 노숙인 현수막전 치르느라 곤죽이 되었다.

매일 반가운 분들 만나 졸라 퍼 마시고도 살아남은 것이 용 타 싶다.

전시가 끝나자마자 신학철 선생 전시까지 이어졌는데, 이러다 알콜 중독자 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그동안 전시를 하면 힘들고 돈만 까먹는 일이라 피해 왔으나

사진집이 나오면 전시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팔리지 않는 책을 어렵사리 만들어 주었는데,

전시라도 해서 책이라도 좀 팔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번 정영신씨는 책만 아니라 작품도 제법 팔렸다.

큰 작품이 세 점이나 팔렸고, 소품은 30여 점이나 팔았다.

십만 원 하는 소품은 제작비와 갤러리 마진 제하면 몇 푼 남지 않지만,

보리 흉년에 이게 어딘가?

 

그나저나 다시 사진을 만들어 포장하고 배달하는 일도 만만찮았다.

그동안 전시 때문에 보지 못한 류연복씨 전시 보러 가다가 차가 밀려 진을 빼기도 했고,

미루어 둔 일 하느라 낑낑거리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지난 11일은 미처 철수하지 못한 노숙인 현수막 거두러 인사동 나갔다.

판매 작품 중 ‘나무화랑’에 맡길 사진도 있지만, 현수막은 빨리 거둬야 했다.

그냥 두어도 오가는 사람들이 보면 홍보야 되겠지만,

자기 들어간 현수막 사진 받으려고 기다리는 노숙인들 때문이다.

그리고 햇볕을 오래 받으면 탈색할 염려도 되었다.

 

며칠 만에 나간 인사동 거리는 월요일인데도 나들이한 사람들이 많았다.

액자를 갖고 ‘나무화랑’에 올라갔더니, 생각하지도 못한 류연복씨가 반겼다.

어제 안성 전시장에서 만났는데, 또 만난 것이다.

안성은 월요일이 휴관일이라 모처럼 짬 내어 신학철선생 전시 보러 왔단다.

 

사진을 전해주고 다들 유목민 골목으로 옮겼는데,

골목 어귀에 문 닫은 포도나무집을 보니 지난날이 생각났다.

돌아가신 강민 선생의 단골집으로 추억이 많은 주막이었다.

폐가처럼 창을 가린 대나무 잎이 강민 선생의 넋 인양 스산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 옆에는 거리 아티스트 이태호씨의 김수영시인 판화가 붙어있었다.

낡은 가스 배관 틈에 붙었는데, 그 밑에는 재떨이와 종이컵까지 놓여 있었다.

마치 김수영시인 100주년을 기념하는 제단 같았다.

큰길에서는 볼 수 없는 인사동 풍류 잔재다.

 

류연복씨 도움으로 현수막 철수는 간단히 끝냈으나, 그냥 헤어질 순 없잖아.

‘유목민’의 별미 감자전을 안주로 막걸리 한잔했다.

어제는 게장 집에서 밥은 얻어먹었지만, 차 때문에 술 한잔 못했다.

 

그런데, ‘유목민’ 전활철씨와는 같은 홍대 미대 출신이지만 서로 몰랐다.

전활철씨가 삼 년 선배라는데, 군 복무하느라 서로 마주치지 못한 것 같았다.

서로 안면도 터고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며 시간 보냈다.

 

류연복씨도 갈 길이 바쁘지만, 나도 동대문시장 가야 했다.

현수막을 사진 별로 재단하여 올이 빠지지 않도록 박아야 했다.

막걸리 세 병으로 끝낸 아쉬운 술자리였지만,

우연히 만나는 이런 맛에 인사동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달은 고생했으니, 사모님께서 보너스라도 좀 주실지 모르겠다.

야무진 꿈이라도 꾸어 보는 희망도 없다면야 무슨 재미겠는가?

 

사진, 글 / 조문호

 

 

2021.10.1

지난 28일은 많은 화가들이 방문해 주셨다.

원주에서 김진열씨가 올라와 김진하, 이태호, 김정헌씨가 모여 역적모의 하는 ‘이모집’으로 안내했다.

 

그 자리는 김수영시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그림전을 협의하는 오찬 자리였다.

‘흐린 세상 건너기’로 건너가 차 한잔하고 전시장에 돌아오니, 사진가 최정균씨가 와 계셨다.

 

이 분은 나와 동갑인데 무슨 비결이 있는지, 나보다 10년은 젊어 보인다.

그리고 전시장 올 때마다 봉투를 내 놓으며, 좋은 전시를 어찌 그냥 볼 수 있냐고 하신다.

그 보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뒤이어 류연복, 박진화, 손기환, 이인철, 정복수, 박문종씨 등 화가들이 전시장을 방문해 주셨다.

 

그날은 학고재에서 개막된 박영균의 ‘보라색 언덕 너머’와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정비파의 ‘한라에서 백두까지’ 목판화 전시까지 겹쳐

겸사겸사 서울 나들이를 하신 것 같은데, 다들 그리웠던 얼굴이었다.

 

문 닫은 전시장에서 숨겨 둔 와인으로 마시는 술맛은 더 좋았다.

발동 걸린 술자리가 ‘사랑채’로 이어졌는데,

술안주로 내놓은 나물에 취했는지 한 사람 한 사람 쓰러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김진열씨가 어지럽다며 일어나더니, 류연복, 이인철씨까지 다락방에 더러 누웠다.

 

화단의 술 판을 휩쓸던 역전의 용사들이 차례대로 무너진 사건은 오랫동안 구설수에 오를 것이 틀림없다.

그 와중에 정복수씨는 내 초상화까지 그렸는데, 마치 지명수배된 범죄자 형상이었다.

 

그 다음 날인 29일에는 일찍부터 구중서선생을 비롯하여 장봉숙, 서정란 시인이 오셨다.

어려운 걸음을 하신 구중서 선생께서 식사하러 가자는데, 어찌 나 몰라라 하겠는가?

 

더구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나온데다 전시장에서 만나기로 한 선약까지 있었다.

대전의 이석필씨에게 연락받은 김문호씨가 먼저 전시장으로 올라왔지만,

잠시 기다리게 하고 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다.

 

두 분 식사하는 자리에 끼어 술만 홀짝홀짝 마셔야 했다.

그런데, 밥 값 내려고 따라 나섰는데 구중서 선생께서 계산해 버렸다.

그렇다면 차라도 대접해야 하지만 기다리는 사람이 마음에 걸려 찻집은 따라갈 수 없었다.

그나저나 술을 급하게 마셨더니 일찍부터 취해버렸다.

 

헐떡이며 4층까지 올라갔는데, 다들 식사하러 가고 없었다.

‘마중’에 갔다던 이석필씨와 김문호씨는 간판을 잘못 보았다며 개성만두집에 앉아 있었다.

 

이차로 자리 잡은 ‘유목민’ 골목에서는 조명환, 기국서, 장 춘씨가 합석했고,

김기덕, 유진오, 김발렌티노도 만났다.

 

30일엔 사진가 하재은씨를 비롯하여 김문경, 윤현선, 김석철씨가 찾아오셨다.

운현선씨가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 동영상을 만들어 보여 주는데, 너무 멋지더라.

‘유목민’ 골목에서는 사진가 권양수, 박윤호씨를 만났는데, 외국에 나갔던 안애경씨도 오셨다.

 

뒤늦게는 화가 강지현, 이현숙씨와 어울려 술 한잔했다.

강지현씨는 이현숙씨 초상화를 그려 오셨더라. 다들 페이스북에서 가까워진 사이 같았다.

 

노재학, 임경일씨가 차례대로 오가기도 했고, 김이하 이승철씨는 맞은 편에 자리 잡았다.

 

이틀 만에 올리던 보고서가 삼일만에 올리게 된것은

술로 점차 기력이 쇠진해가는 징표이오니 널리 양해해 주시길 바란다.

아무튼 전시장을 찾아 주신 많은 분에게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진, 글 / 조문호

 

 

2021.9.27

사진 찍는 일보다 사진을 떠벌리는 일이 더 힘들다.

두 번 다시 전시는 안 하겠다고 맹세를 했건만,

어렵사리 책 만들어 준 출판사를 어찌 나 몰라라 하겠는가?

전시를 해야 책이라도 한 권 팔 것 아니겠는가?

 

며칠동안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이 열리는 인사동 ‘나무아트’와

‘노숙인, 길에서 살다’ 현수막 전을 하는 ‘유목민’ 담벼락을 오가느라 곤죽이 되었다.

허리 협착증이 도져 4층까지 오르내린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직 전시가 열흘이나 남았는데 벌써 빌빌거려 걱정이 태산 같다.

 

술 마시기 딱 좋은 술집 앞에 전을 펼쳐 놓았으니

어찌, 참새가 방앗간을 못 본 척하겠는가?

전시가 시작된 첫날부터 고주망태가 되었으니 그다음 날은 보나 마나다.

속이 쓰려 죽을 지경이었지만 어쩌랴!

 

골목 전시장엔 퍼져 앉기만 하면 술을 안 마실 수가 없었다.

난, 알콜 중독자는 아니라고 큰소리치지만

남이 마시는 술을 못 본채하지 못하니 장담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당장은 좋아도 그다음 날은 더 죽어나지만 어짜겠는가?

 

지난 24일도 서둘러 나갔으나 손님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모처럼 인사동 나들이 하신 신신자씨는 ‘나무 아트’에서 기다리고,

이강산씨는 ‘유목민’ 골목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다들 멀리서 오신 분들인데,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 날은 이강산씨를 비롯하여 신신자, 권 홍, 김이하,

장우원, 이영숙, 박옥수, 한공주, 안현수, 정성진, 오진향,

음현정, 이현정, 정재원, 임춘희씨가 찾아 주셨다.

양쪽을 오가느라 길이 엇갈려 이민씨와 김창주씨는 보지도 못했다.

 

다들 마스크를 써 알아보기도 힘들지만,

페이스북 친구들은 내가 누구라고 밝히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어떤 분은 적어 놓은 방명록을 보고 뒤늦게 결례한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둘째 날은 첫 날 마신 후유증으로 아예 골목 전시장엔 앉지를 않았다.

김이하씨 일행은 일찍부터 ‘유목민’에 자리 잡은 걸 알았지만 갈 수가 없었다.

앉기만 하면 술잔에 손이 갈 것이고, 한 잔만 마셔도 발동이 걸리기 때문이다.

 

둘째 날은 술 한잔 마시지 않고 잘 참아냈으나, 다음 날은 온종일 마셔야 했다.

토요일은 ‘노숙인, 길에서 살다’ 사인회가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이숲’출판사 김문영대표와 이나무씨가 책을 가져오셨다.

 

그날은 양산에서 올라 온 공윤희씨를 비롯하여 박찬원, 강경구, 김남진, 김영호,

양재문, 노광래, 김명성, 이 성, 오현경, 이한복, 나매례, 이재민, 유순영, 온새미,

정세학, 김상배, 이오연, 홍현구, 박상문, 홍유경씨 등 많은 분이 찾아 주셨고,

부산에서 상경한 정남준씨를 비롯하여 손은영, 최인기, 김수길, 이봉희씨는

유목민 골목에서 일찍부터 자리 잡았다.

 

전강호씨와 시작한 술자리는 사인회가 끝나는 시간까지 이어졌으니

어찌 취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찝쩍거려 실수라도 안 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낼 수가 없었다.

저녁 늦게는 김상현씨 초대 파티가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오후 일곱 시 무렵 정영신, 김명성씨와 함께 이태원 ‘뮤아트’로 찾아갔다.

재즈가 차분하게 분위기를 가라앉힌 ‘뮤아트’에는 김상현, 임성익, 하양수씨가 있었다.

그런데, 분위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광어회와 전어회를 준비해 두었더라.

너무 과분한 접대에 미안했으나 어쩌겠는가?

 

취기에 고마운 마음도 감추고 축하 음악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 날 초빙한 연주팀은 처음 본 젊은이었다.

보컬에 유혜린, 드럼에 김소희, 콘트라베이스에 김민욱, 피아노에 박종현씨로,

요즘 젊은이들이 너무 잘하더라.

 

잘 모르는 곡이지만, 유혜린씨의 음색에 깜짝 놀란 것이다.

앳된 소녀의 목에서 어쩌면 저렇게 농익은 소리가 나는지...

마치 수십 년 동안 알콜과 담배에 절은 베테랑 재즈 가수의 목소리 같았다.

아무튼, 축하의 자리를 만들어 준 김상현씨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내일의 전쟁 준비를 위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천지신명님이시여~

제발 전시가 끝나는 날까지라도 목숨을 보존하여 주십시오.”

 

사진, 글 / 조문호

 

 

 

2021.9,23

지난 23일 인사동 ‘나무아트’에서 정영신씨의 ‘어머니의 땅’사진전이 막을 올렸다.

‘노숙인, 길에서 살다’ 현수막도 ‘유목민’ 담벼락에 내 걸어, 옛말처럼 떡 본 김에 제사지낸 것이다.

현수막전은 서울역이나 동자동에서 해야하지만 책을 팔기 위한 이벤트였다.

 

연휴가 끝나자마자 시작된 전시였으나 허리 통증이 심해 병원부터 들렸는데,

환자들이 많은데다 물리치료까지 받느라 시간이 지체되어버렸다.

핸드폰을 두고 와 정영신씨와 연락을 할 수 없었는데, 끝나고 가니 떠나고 없었다.

 

부리나케 전시장으로 달려갔더니, 아산 공유공간 ‘마인’ 김선우씨와 양햇살, 김온 군이 와 있었다.

사진가 전제훈씨는 일찍부터 왔으나 문이 잠겨 한 참을 기다렸단다.

마침 사진집을 가져온 ‘눈빛출판사’ 이규상대표도 와 계셨다.

 

아산 팀의 도움을 받아 ‘유목민‘ 담벼락에 현수막부터 설치했다.

아침 식사를 못해 전제훈씨와 '툇마루'에 갔다 오니, 그때부터 손님들이 오기 시작했다.

정영신씨 전시 보러 오신 분들이 현수막 전에도 들려 ‘유목민’ 골목은 일찍부터 술판이 벌어졌다.

 

코로나로 거리두기를 해야 할 즈음이라 송구스럽기 그지없었다.

방동규선생을 비롯하여 김신용, 조해인, 김이하, 김명성, 김상현, 함창호, 조준영, 노광래

김문호, 장경호, 김수길, 김발렌티노, 최인기, 김종준, 윤 관, 이택근, 강기식, 조경석, 이두엽, 한상진,

김 구, 나종희, 노영미, 이상근, 이광군, 임경일, 최명철, 김효성, 서인형, 김성은, 김재홍,

이인섭, 김진하, 이창수, 이한복, 김영진, 곽명우씨 등 많은 분들이 찾아 주셨다.

 

난처하게도 ‘뮤아트’ 김상현, 김병수씨 일행은 악기를 가져 와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정영신씨 전시를 축하 한다지만 옆에 노숙인 사진이 걸려 있는데...

생의 기로에 선 사람들을 내세워 잔치 벌이는 꼴이 된 셈이다.

흥겨운 음악이 아니라 애잔한 슬픔이 깔린 음율이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신경이 곤두서 그런지 술을 마셔도 취하지도 않았다.

 

아무튼 반가운 분들 만나 즐거운시간을 보냈는데, 끝난 후 나온 술 값이 한 달 생활비가 넘었다.

허구한 날 얻어먹기만 했으니 이참에 술 한 잔 대접한 것이다.

그나저나 술집 앞에서 열리는 전시라 끝나는 날까지 살아 남을지 모르겠다.

 

멀리서 와 주신 전제훈, 함창호씨를 비롯해 온 종일 일을 도와 준 아산 '마인'팀,

그리고 전시를 축하해 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사진, 글 / 조문호

 

김선우촬영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