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을 헤집고 다니는 장돌뱅이 사진가 정영신씨도 모르는 장이 있었다. 전국장터 목록에도 빠진 아산 둔포장을 김선우씨로부터 알아낸 것이다.

 

 

 

지난 12일 동자동에서 열렸던 정의당 공공개발 현장간담회 끝나기 무섭게 정동지와 함께 아산 둔포로 내려갔다.

 

 

 

네비 안내 따라 정오 무렵 둔포 장에 도착했는데, 아마 대한민국에서 제일 작은 장이 아닌가 싶었다. 고정 상가라고는 식당뿐이고, 잘동뱅이 열 한 팀이 자리 잡은 조그만 장인데. 손님이라고는 30여분 동안 일곱 명 밖에 보지 못했다. 품목도 야채모종이나 과일, 옷 등 몇 가지뿐이라 사라져가는 오일장의 마지막 풍경 같았다.

 

 

 

장터는 보잘 것 없으나 먹을 복은 있는지 식당은 근사했다.

아산 ‘공유공간 마인’의 김선우씨를 만나 보리밥집에 들어갔는데, 음식이 정갈하고 푸짐했다.

 

 

 

시골에서 9천 원짜리 비빔밥이면 비싼 편이지만, 수육까지 나왔다.

 

 

 

맛있게 얻어먹고 김선유씨 안내에 따라 ‘백암길185 미술관’ 터가 있다는 염치면 백암리로 갔다.

 

 

 

 

현충사 둘레길이라는 현장에 도착해 보니, 한적한 길가에 자리잡은 시골 집 이었다; 가난한 목수와 딸이 살다 떠난 집이라는데, 곳곳에 부녀의 체취가 남아 있었다. 작은 문으로 빠져 나가지 못해 가동된다는 냉장고만 버틴, 천장 낮은 아담한 공간이었다. 벌써 날씨가 더위지기 시작해 마당에 퍼져 앉았는데, 김선우씨가 냉장고에 넣어 둔 수박을 가져왔다. 

 

 

김선우사진 스크랩

 

'공유공간 마인'에 이어 두 번째 준비하는 ‘백암길185 미술관’이 어떠한 모습으로 변신 할지 기대된다. 현충사 둘레 길 모퉁이에 자리 잡은 ‘백암길185 미술관이 또 다른 아산의 문화아지트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진, 글 / 조문호

 

 

정여사의 취미생활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일 년에 한 차례씩

방에 있는 물건들을 바꾸어 옮겨가며 주거공간을 바꾸는 일이다.

집이란 게 콧구멍만한 12평짜리 연립이라 옮겨 보았자 그게 그거지만, 기어이 일을 치러야 직성이 풀린다.

이것저것 재고 짜 맞추느라 시간이 오래 걸려 주로 내가 없을 때 해 치우는데,

뒤늦게 정리해 놓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 크고 무거운 짐들을 여자의 힘으로 어떻게 옮겼는지 몰라서다.

책장 옮기는 것은 다반사고 심지어 가구까지 위치가 바뀌어 있을 때가 많았다.

 

그 연립주택은 24년 전 오천만원 주고 산 집인데, 열두 평이지만 아래층 차고 위의

서너평 되는 다락방이 평수에 없는 공간이라 혼자 살기에는 전혀 불편함이 없는 집이다.

그러나 내가 들락거리며 서로 걸리적거릴 때가 많고 일하기도 불편해

빨리 동자동 쪽방으로 가라는 말을 밥 먹듯이 해댄다.

조금만 더 넓은 곳으로 이사 가고 싶다는 불만도 털어놓지만,

여사님께 딱 맞는 집이라며, 욕심 부리지 말라고 입을 틀어 막아왔다.

 

얼마 전 옆집이 팔천만원에 팔렸다며, 삼천만원 오른 것을 좋아했다.

삼천만원이 적은 돈은 아니지만, 24년 만에 집값이 삼천만원 올랐다면 개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

아파트 한 채가 몇 십억씩 하는 미친놈의 서울 땅에 팔천 만원짜리 집이 어디 있겠는가?

그 돈으로 전세방도 제대로 얻지 못한다.

더구나 지하철 역촌역이 집에서 1-2백 미터 거리에 있고, 은평공원이 지척에 있지 않은가?

최고의 교통조건과 쾌적한 환경이라 복중의 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시각적 변화를 찾고자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짐을 옮기는 대소동을 벌인다.

얼마 전에는 내가 있을 때 일을 벌여 도와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옮길 자리도 없거니와 어떻게 바꿀지 감이 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침대 아래쪽 코너에 있던 책장과 오디오를 꺼내기 시작했다.

어디다 갖다 놓을 거냐고 물었더니, 다 생각이 있다는 거다.

책상 옆에 있는 책장을 비우기 시작해 그 책은 어쩔거냐고 물었더니, 잔소리 말고 큰 짐만 옮겨달란다.

결국 다락방 책장에서 버릴 책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바꿀 때마다 죽어나는 건 죄 없는 책 뿐이다.

한 때는 버리기가 아까워 ‘동자동 사랑방’에 갖다 주기도 하고 더러는 고물상에 갖다 팔았다.

 

그런데, 다락방 모퉁이에 쌓아 둔 액자들이 문제였다.

‘장에 가자’전시를 끝낸 후 정선으로 옮겨야 했지만, 깜빡 잊어버린 것이다.

만약 정선에 가져갔다면 이마저 화재의 불쏘시개가 되지 않았겠나?

옆집 주려고 만들어 둔 만지산 사진 액자도 집이 불타 없는데, 어디다 걸어 준단 말인가?

하여튼 정여사의 지시대로 많은 책이 버려졌고, 오디오는 책상 옆 수납장으로 옮겨졌다.

 

이제 마무리 할 일만 남았다.

몇 년 동안 거들떠보지도 않던 곳을 비웠으니, 장판도 이어 깔아야 하고 도배도 해야 했다.

도배야 예전부터 잘하는 일이라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 오죽하면 조풀칠이란 아호까지 얻었겠는가.

도배지래야 장터사진전 포스터 몇 장이면 충분하고 장판은 다이소에서 산 조각 장판으로 간단히 끝냈다.

 그 좁은공간을 어떻게 사용할지 궁금했는데, 그 곳에 의자를 갖다놓고 책 읽는 공간으로 만든 것이다.

죽은 공간을 살려 낸 기 막힌 변화인데, 오디오도 눈에 띄는 공간에 옮겨 놓으니 음악듣기도 한결 쉬워졌다.

 

긴 세월동안 반복되어 온 정영신의 돌려치기 공사로는 최고의 공간 활용이며 최고의 취미생활이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일요일은 아산의 문화 공유공간 ‘마인’으로 전시 보러 가는 날이었다.

 정영신씨와 오래 전 약속한 일인데, 가는 길에 미술평론가 최석태씨를 태웠다.

 

그런데, 구로에서 그를 만나고 부터 차 안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앉자마자 시작된 구라는 도착할 때까지 잠간도 쉬지 않았다.

아는 게 많고, 하는 일이 강의라 달변가인 줄이야 알았지만, 이 정도인지는 몰랐다.

재벌 집안의 더러운 내막에서부터 모르는 게 없었다.

이야기에 빠져 고속도로에서 뒷걸음질 치기까지 했다.

 

이 정도면 조선 최고의 구라로 꼽을 만 했다.

여지 것 백기완, 방동규, 황석영선생을 조선의 3대 구라로 꼽았는데,

얼마 전 백기완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시지 않았는가?

그 빈자리에 추천해도 전혀 손색없는 조선 최고의 구라였다.

 

듣다보니, 금세 아산에 도착했는데,

김선우씨를 비롯하여 김온 군과 양햇살 양이 반겨주었다.

전시장은 오밀 조밀 정겹게 꾸며 놓았더라.

 

쉬거나 일하며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좋은 공간이었다.

책장에는 ‘눈빛’의 예술산책 서고를 옮겨 놓은 듯 반가운 책이 많았다.

 

오히려 벽에 걸린 모듬전 스타일의 내 사진이 챙피했다.

물론 내가 정한 사진이 아니라 정해 준 사진을 만들어 보냈지만,

다양한 사진이라 잡화상 같았는데, 공감할지 모르겠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에게 조언하던 최석태씨 지적도 따랐다.

이런 사진보다 정영신의 아산장 같은 사진이

지역민에게 더 친숙하다는 것이다. 옳은 지적이었다.

그 외에도 문화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런데, 젊은 친구들이 깜짝 이벤트를 준비했단다.

숨겨 둔 캐잌과 오래된 함지와 재봉틀을 가져왔다.

 

축하받아야 할 자리는 아니지만, 졸지에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정영신씨에게는 함지와 재봉틀을 주는 등, 송구스럽기만 했다.

 

아산 온천동 상가 1층에 있는 ‘마인’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유공간인데,

여지 것 여러 차례 공간을 빌려 주었는데, 반응이 좋았단다.

시일과 시간만 예약해 둔다면 저렴한 비용으로

같이 일하거나 어울릴 수 있는 좋은 장소였다.

 

사진집이나 좋은 책들을 골라 볼 수 있고 커피도 내려 마실 수 있었다.

음식을 조리하는 주방도 있어 모든 걸 한 자리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구입할 책은 무인시스템으로 결제되도록 만들어 놓았다.

업무 협력은 말할 것도 없고, 친구들 끼리 생일잔치 하기도 좋았다.

 

개방전 마지막 날이라 전시 보러 온 김종우선생을 만나기도 했다.

오찬으로 육회비빔밥도 얻어먹었는데, 돈만 있다면 내가 사고 싶었다.

 돈도 없고 쓸 곳도 없지만, 돈은 이럴 때 필요한 것이다.

어찌 지역문화를 위해 애쓰는 젊은이들에게 밥 한 끼 사주지 못할망정, 주머니를 털게 한단 말인가?

 

그 곳에서 기획, 추진하는 일이 또 있다고 했다.

사람 사는 따뜻한 이야기가 있는 동네잡지도 만든단다.

공중파나 주류언론에서 다루지 않는 이야기,

인문적 사유와 삶의 철학이 담긴 이야기로 꾸민다고 한다.

머지않아 ‘마인’에서 하는 일이 전국적으로 확대될 것이 점쳐졌다.

 

아쉽지만,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최석태씨도 할 일이 있지만,

아산으로 이사 간 신학철 선생 댁을 방문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아내를 떠나보내고 아산으로 이사 간지 일 년이 넘었으나

그동안 한 번도 찾아뵙지 못했기 때문이다.

코로나를 핑계 삼았지만, 마음 한 구석은 늘 걱정이었다.

더구나 낯선 동내에 지은 큰 작업실이 얼마나 허전하겠는가?

 

최석태씨의 안내로 꼬불꼬불 시골 길로 들어갔는데,

동네 사람들은 새로 지은 집이 공장 같다지만, 내가 볼 땐 박물관 같았다.

신학철 선생은 지난 번 백기완선생 장례식장에서 뵌 후 처음이었다.

 

그런데, 반가운 소식부터 전해주었다.

옆에서 수족처럼 도와주는 분이라고 소개했는데,

‘동학혁명실천시민행동’ 대표로 계신 이요상씨였다. 너무 고맙고 반가웠다.

십 여년 아내 간병으로 혼자 끓여 먹는 것이 생활화되긴 했지만,

제대로 음식을 만들어 드실 수 있었겠는가? 이제 한 시름 놓게 되었다.

 

작업실에는 신학철선생 작품 DB작업 하러‘나무아트’ 김진하관장도 있었다.

그런데, 작업 중인 작품의 위용에 압도되었다.

아직 미완성이지만 전체적인 메시지가 강열했다.

 

그동안 팔려 나간 작품을 찍어둔 조그만 사진도 펼쳐 놓았고,

옛날 교편 잡던 시절의 제자 작품도 보여주었다.

작업 진척이 늦어 전시를 일 년 연기했다는 말씀도 하셨다.

 

서고와 작업실 곳곳을 보여 주었는데, 이전 아파트와는 비교도 못 할 작업장이었다.

이젠 천장이 높아 대작 그리는데 전혀 지장이 없겠더라.

 

밖으로 나가 옥상으로 올라갔는데, 사방이 전원 이었다.

위쪽에는 낮은 산능선이 병풍처럼 둘러 싸 있었는데,

집 가까이 밭은 신학철 선생께서 일구는 텃밭이라 했다.

이웃사람들이 거들어 할 일이 없다지만, 그래도 농사는 농사다.

 

이요상선생게서 서울 갈 약속이 있다기에 먼저 일어났지만,

남은 여생이나마 행복했으면 좋겠다.

 

코로나 끝나는 날, 제대로 된 집들이 한 번 해야지...

부디 훌륭한 대작이 태어날 산실이 되길 바랍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십 년 전에 심은 만지산 집 살구나무,

살구 좋아하신 장모님 나무다.

열리라는 살구는 열리지 않고

꽃만 흐드러지게 피는 살구나무

꽃 무게에 넘어질까 지팡이도 짚었다.

지천에 온갖 꽃이 다 피어도

살구꽃처럼 예쁜 꽃은 없다.

살구 맛도 못 보고 가신 우리 장모님

꽃이라도 보실지 모르겠다.

늙은 이내 가슴 다 녹는다.

 

지난 주말 정선 만지산에 파종하러 갔다.

모처럼 정영신씨와 나선 걸음이라 자동차도 신 났다.

 

만지산엔 온갖 꽃이 만발했다.

살구꽃을 비롯하여 진달래, 철쭉이 반겼고,

옆 마당의 벚꽃은 하늘을 뒤덮었다.

 

지난 번 봉우리 맺혔던 목련은 처참하게 떨어졌다.

그렇지만, 꽃구경할 겨를이 없다.

당일 떠나려면 일을 서둘러야 하기 때문이다.

 

정동지는 야채모종 심느라 바빴고,

나는 땅 고르고 씨 뿌리기 바빴다.

 

옆집의 한순식씨는 집수리부터 하란다.

천막 떨어져 나간 자리에 공사판에서 챙겨 온 아크릴 차양을 달란다.

 

주는 것도 고마운데, 두 내외가 더 설쳤다.

발가락 부러진 윤인숙씨는 깁스까지 했으나

비닐봉지로 감싼 채 물청소를 하고,

한순식씨는 차양 다느라 애썼다.

 

이젠 우리 집도 신식 차양을 달았다

한 때 동강 댐 보상 턱으로 집 지어줄 때,

동강변 일대의 헌집은 모두 헐려 나갔다.

 

우리 집이 동네에서 유일한 헌집인데,

아직 석면 스레트 지붕을 달고 산다.

읍사무소에서 무상으로 교체해 주었으나

우리 집만 잔재를 그대로 남겼다.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미련하게 보이겠나?

돈이 없어 새집을 짓지 못했지만,

어찌 보면 동강 변의 유일한 옛집이라

주택 변천의 자료적 가치는 있을거다.

 

새집이야 돈만 있으면 언제나 지을 수 있지만,

헌 집은 허물면 다시 볼 수 없지 않겠는가?

 

살기가 불편해 정동지 마저 정선가길 싫어한다.

나야 어디서나 지내는 야생의 습성을 지녔지만.

따뜻한 물은커녕 씻을 곳조차 마땅찮은 시골집에

어느 여인네가 가고 싶겠는가?

 

돈 생기면 조립식 주택이라도 옮겨주겠다고

둘러 댄지가 10여 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그런 처지에 비 피할 수 있는 차양이라도 올렸으니

공사 중의 공사고 경사 중의 경사가 아닐 수 없다.

 

달아 준 것만도 황송하기 그지없는데,

부침개까지 부쳐 술상까지 차려 주었다.

상낭식이 아니라 차양식이 된 셈이다.

아랫집 김익수씨와 윗동네 두 내외도 합류했다.

 

그나저나 보답을 해야 하는데, 돈이 십 만원 밖에 없었다.

윤인숙씨께 수고비로 털어 드리고,

사진 작품 하나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물었더니, 만지산 사진을 택했다.

 

운전 때문에 술 한 잔 못 마셨지만, 기분은 째지더라.

차양을 달아서보다 정동지가 좋아하니까...

 

어두워지기 전에 마무리 할 일만 남았다.

서두러느라 대마씨는 제대로 뿌려졌는지 모르겠다.

힘들지만 이게 산골 사는 재미가 아니겠는가?

올 여름엔 지인들 불러 잔치 한 번 벌일까보다.

 

사진, 글 / 조문호

 

녹번동 정영신씨가 치과에서 대수술을 받았다.

며칠 동안 식사를 못해, 간병 차 대기하기로 했다.

 

지난 일요일 오전에는 ‘유목민’의 전활철씨가 방문했다.

시장 갔다 오는 길에 들렸는데, 두릅을 사왔더라.

김수길씨가 주더라며, 내가 좋아하는 떡도 가져왔다.

정동지로서는 보고도 못 먹는 장떡에 불과하지만, 두릅을 맛있게 데쳐 주었다.

이른 시간부터 두릅을 안주로 ‘대마불사주’ 한 잔 했다.

 

그런데, 너무 슬픈 소식을 전해주었다.

화가 최민화가 낭패를 당했단다.

아무리 좋은 술과 안주지만, 독주가 되어버렸다.

 

활철씨가 떠난 뒤, 벚꽃 구경 시켜주겠다고 정동지를 꼬셨다.

몸이 편치않아 위안하려 했으나, 술이 취해 바로 떠날 수는 없었다.

정동지 역시 비실거려, 두 시간만 자고 가기로 했다.

그러나 잠을 너무 많이 자버렸다.

이미 어둠이 몰려오고 있었는데, 밤 벚꽃도 괜찮단다.

 

여의도 윤중로에는 벚꽃이 봄비에 젖어 한물갔더라.

화려한 꽃잎이 길바닥을 수놓고 있었다.

 

이 나이에 새삼, 한강 야경에 빠져들었다.

인생 말년의 소소한 행복이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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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 동지로부터  원주 새벽시장 촬영 떠난다는 지령이 떨어졌다.

오래 전부터 원주 김진열씨가 원주장 오는 길에 한번 들리라는 말을 했지만 못갔다.

일정이 맞지 않아 미루어 왔는데, 드디어 갈 기회가 생긴 것이다.

 

새벽시장을 보기 위해 일찍 출발하느라 잠을 설쳤다.

오전 다섯시 무렵 출발했지만, 정확한 정보가 없어 허탕쳤다.

원주 새벽시장은 봄 야채가 나오는 4월부터 선단다.

 

화가 김진열씨는 정오 무렵 만나기로 약속해 원주 인근의 유적부터 돌아보았다.

문막 반계리에 있는 은행나무 부터 찾아 갔는데, 수령이 800년이나 되었지만 건강했다.

 

땅에서 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서는 2∼3m 높이에서 다시 갈라져

가지가 사방으로 고루 퍼졌는데, 그 웅장한 자태가 장관을 이루었다.

마을사람들은 이 나무를 신목으로 섬긴다고 한다.

 

은행나무 주변 빈터에 돋아 난 쑥을 캐, 다음 날 쑥국을 끊였으나 향기가 없었다.

요즘 시중에 나오는 쑥들이 왜 쑥의 고유한 향기가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다음에는 주포리 미륵산에 있는 미륵불을 찾아 나섰다.

미륵산 자락에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경천묘가 있고,

황산사 터에는 삼층석탑도 있는데, 이 지역이 원주팔경에 들어간다.

 

 

경순왕은 정권을 이양한 뒤 전국의 명산을 두루 다니다가

미륵산 경관에 반해 이 곳에 미륵불상을 조성하여 의탁했다고 한다.

미륵산은 경순왕의 애환이 서린 산이라고 전해진다.

 

경천묘를 지나야 황산사터가 나온다는데,

사지는 어딘지? 미륵불은 어디 있는지? 안내판이 없어 알 수가 없었다.

조금 더 올라가니 부도 탑이 나왔는데, 사방을 둘러 싼 돌탑이 정겨웠다.

 

한참을 올라가니 고려시대 석탑으로 추정되는 3층 석탑이 나왔다.

두꺼운 지붕돌의 처마 받침을 3단으로 나눈 삼층석탑이었다.

몸돌이 가늘고 높아 전체적으로 길쭉한 느낌을 주었다.

 

그런데, 그 곳에도 미륵불은 보이지 않았다.

옆에 있는 이정표에 1km를 더 가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시간이 촉박했으나 돌아 갈 수는 없었다.

아무런 등산준비도 없이 여기까지 왔는데, 어찌 그냥 갈 수 있겠는가?

 

정동지는 경마장 가는지 부츠를 신었고, 난 쪽방 촌에서 얻은 운동화를 신었는데,

신발이 맞지 않아 수시로 벗겨졌지만.포기할 수 없었다.

정동지 더러 석탑에서 기다리라 말하고 혼자 서둘러 올라갔다.

 

급경사가 많아 숨이 점차 가빠지기 시작했는데, 가파른 산길 1km는 만만치 않았다.

석불이 산봉우리에 있었다면 아예 올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벗겨지는 신발을 묶기 위해 줄을 찿았으나, 칡능쿨조차 보이지 않았다.

 

도중에 포기할 수 없도록 확실한 목표를 정해 버렸다.

미륵불을 만나 소원을 빌지 않는다면 눈앞에 닥친 일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며,

미륵불이 나를 시험한다고 못 박은 것이다.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라도 그 소원은 꼭 이루어져야 했다.

동자동 재건축이 계획대로 추진되어 쪽방주민들이 한 곳에 입주하는 일이다.

 

쪽방에서 벗어나 모처럼 사람답게 살 수 있겠다고 다들 위안하고 있다.

남은 것이라고는 수십년 동안 쌓아 온 이웃 뿐인데,

가진자들 논리로 여기 저기 내 쫒아 외롭도록 만들어야 하겠는가?

 

정부의 동자동 재개발 사업을 이어 갈 사람은 박영선후보가 적임이라는 생각이다.

건물주들은 재건축을 반대한다며 골목 골목 붉은 깃발을 꽂아 저항하고 있는데,

한 패나 마찬가지인 보수 권력의 시장이 된다면 그 사업에 협력하겠는가? 

그 일을 위해 박영선후보가 되도록 기도하려는 것이다.

 

확실한 목표가 생기니, 그 때부터 발길도 빨라졌고 힘도 덜 들었다.

 

철계단이 나오기에 다 온 줄 알았더니,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로프를 사용해 가며 철계단을 세 번이나 거쳐야 했다.

계단도 말이 계단이지 사다리나 마찬가지였다.

등산이란 말만 들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놈이 제대로 걸린 것이다.

그래도 그런 절경을 어디서 볼 것이며, 이런 체험을 언제 해 볼 것인가?

 

드디어 정상에 다 올랐다. 펼쳐진 자연풍광에 가슴이 뻥 뚫렸다.

미륵산 정상 가파른 절벽 동쪽을 향해 대형 미륵불을 새겨놓았는데,

가까이는 그 모양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고 멀리서 보아야만 형체를 알 수 있었다.

 

미륵불 앞에 엎드려 박영선후보가 당선되도록 빌었다.

난생처음 주머니를 털어 시주까지 했다.

오래전부터 불교유적을 찾아 전국 사찰을 다 다녔지만, 시주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돈도 없었지만, 돈에 눈 먼 중이 싫어서다.

 

미륵상을 담기 위해 주변을 돌아보았으나, 위치가 마땅치 않았다.

미륵상이 다 나오려면 멀리 떨어져야 하는데, 허공에서 찍어야 했다.

드론이 아니고는 정면 촬영이 안 되는지라, 부득이 원주시청 홍보사진에서 한 컷 옮겼다.

 

드론으로 정면에서 촬영한 미륵불상 / 사진, 원주시청

내려오려고 발길을 돌리니, 멀리 정동지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함지 같은 엉덩이를 휘젓고 올라오는데, 미칠 지경이었다.

하기야! 600여 곳이 넘는 전국 장터를 모두 찾아다닌 악바리가 아니던가?

그 역시 포기할 줄 모르는 동지다.

 

목적을 이루고 나니 갑자기 마음이 바빠졌다.

가기로 한 '보문사 청석탑'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김진열씨와 약속한 정오가 훨씬 지나버렸기 때문이다.

좀 늦겠다는 전화는 했으나 예삿일이 아니었다.

 

배도 고프고 목이 말라 허급지급 내려왔다.

약속한 ‘원주복추어탕’집에 도착하니, 오후 두시가 되었다.

미륵불 찾아 온 산을 헤매다 왔는데, 진짜 생불은 추어탕 집에 앉아 계셨다.

너무 반가워, 미안한 생각도 잊어버렸다.

 

추어탕을 시켜 놓았는데, 얼마나 맛있는지 밥 알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이 비웠다.

시장기도 한 몫 했지만, 추어탕이 너무 맛있고 밑 반찬도 정갈했다.

배를 채우고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여유가 생겼다.

 

옛날 장터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는지, 옛날 장바구니 이야기를 꺼냈다.

오래 전에는 군용 삐삐선으로 엮은 장바구니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나도 어렴풋이 생각났다. 갑자기 재미있는 기획안이 떠올랐다.

옛날 장터의 기억을 찾아 내는 여러 작가들의 장터 향수전 같은...

 

김진열씨가 상지영서대학 총장으로 있는 줄 알았는데,

정년 퇴임한지가 한 참 되었다고 했다. 세월이 너무 빨랐다.

그리고 한반도지형이 있는 영월군 선암길에 작업실을 만들기 위해

부지를 마련했다는 소식도 전해 주었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지만, 김진열씨 안내로 원주 풍물시장에 들렸다.

마땅히 찍을 것도 없는데다, 옆에서 기다리는 것도 마음에 걸려

서둘러 다음 갈 곳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원주 흥업면에 있는 원주천주교 대안리공소로 갔는데,

안내하는 김진열씨 조차 한 참을 헤매었다.

가본지가 10년이 되었다는데,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 않던가?

대안리공소 위가 산이라 아무 것도 없었다는데,

산을 개간하여 많은 전원주택들이 들어 서 있었다.

 

천주교 대안리공소는 목조 여섯 칸 한옥 건물인데, 참 아담했다.

원주지역에 유일하게 남은 공소로 1900~1906년 사이 뮈텔 주교가 건립했단다.

한국 전쟁시에는 인민군 막사로 사용되기도 했고,

전쟁 후에는 미군 구호물자 보급소로 활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지역 교회사적 가치가 높은 건축물이었다.

 

비 맞아가며 돌아다닐 처지가 아닌지라, 아쉽지만 헤어져야 했다.

차나 한 잔 하자며 문막의 ‘애뜰리’란 찻집으로 안내했다.

벽난로에 장작불까지 지펴놓았는데, 젖은 옷 말리기 딱 좋았다.

 

찻집이 제법 넓은 공간인데, 천장이 낮으니 아늑했다.

그걸 보니 전시장이 무조건 높아야 할 것은 아니었다.

천장이 높아야 작품 설치도 용이하고 시각적인 존재감도 높여주지만, 다 그럴 필요는 없는 것이다.

때로는 이처럼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는 천장 낮은 전시장이 효과적인 작품도 많다. 

 

김진열씨는 교육자고 화가였지만, 농사꾼이기도 했다.

나야 정선에서 텃밭 좀 일구면서도 난리를 치는데, 제법 많은 농사를 짓는단다.

농군답게 촉촉하게 내리는 봄비는 단비라 했다.

심어 둔 감자가 잘 자라겠다며 흐뭇해했다.

 

그 모습이 바로 생불이었다.

사람도 진국이지만, 그림도 죽인다.

내가 좋아하는 우리나라 생존화가 다섯 손가락에 꼽는 한 사람이다.

그의 그림은 거칠다.

임꺽정 같은 격정의 힘과 분노가 치솟는다.

 

새벽시장에서 바람맞아 미륵산을 헤매는 시련은 있었지만, 오늘 일진은 대통이다.

미륵불에 기도 올리고, 생불만나 기 받았으니, 이보다 더 좋은 날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간곡히 부탁드릴 일도 있습니다.

 빈민들의 소원을 이룰 수 있도록 박영선후보를 지지해주세요.

 

박영선후보가 내세운 공약은 오세훈후보가 내세운 민간주도 재개발도 아니고

정부 여당이 내 세운 공영주도와도 다소 결이 다른 안을 내 놓았다.

공공주도원칙에서 공공민간참여형으로 전환하겠다는 공약이다.

건물주 반대로 무산될 수도 있는 재건축을 함께 협력하여 풀어가겠다는 의지로 잃힌다.

 

여러분! 다시 부패한 정치로 되돌릴 수야 없지 않습니까?

문정부가 내세운 '사람이 먼저다'는 깃발을 세울 수 있도록 기회 한 번 줍시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오랜만에 정영신 동지의 고향인 함평 장을 찾았다

놀부 집처럼 들어섰던 옛 장옥은 오간데 없고,

박람회장 같은 새 장옥이 들어섰더라.

 

노점상 자리는 뚝 아래로 몰아 그런지,

상인도 손님도 별로 없는 황량한 장마당이었다.

 

장옥 한 모퉁이에 할머니 장터를 만들어놓았는데,

십여 명의 할머니가 옹기종기 앉아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억지춘향 격이지만, 유일하게 장터 맛을 풍기는 정경이었다.

 

장 보러 나온 할머니는 장바구니에 가득 사 담았는데,

바구니 한 쪽 구석에 연분홍 꽃잎이 배시시 얼굴을 내밀었다.

‘늙어도 춘정은 살았다’고 말하는 것 같더라.

 

연고 있는 함평장은 다른 장에 비해 자주 간 편인데,

이제 한 물 간 것 같았다.

 

이번 촬영 길은 정동지가 추진하고 있는 길 위의 인문학

‘어머니의 땅’을 위한 인터뷰 자리였다.

 

한 평생 땅에 몸 부비며 살아온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기위해,

사진가 이민씨가 동네 사는 할머니 한 분을 소개해 준 것이다.

 

정오 무렵, 이민씨를 함평장에서 만나 ‘화랑육회비빔밥’집에 갔다.

함평만 오면 이 집에서 비빔밥을 먹었는데,

워낙 맛있어 다른 음식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식당 앞에는 대기 손님들이 기다렸으나, 그냥 갈 순 없었다.

 

며칠 전 서울 평창동 북악정에서 육회비빔밥을 먹어보았는데,

가격은 함평보다 곱으로 비쌌지만 화랑식당 맛을 따라 갈 수 없었다.

왜 달랐는지, 이번에 먹어보니 감이 오더라.

평창동 육회 비빔밥은 푸성귀가 너무 많았다.

순이 죽지 않은 야채가 육회 특유의 맛을 가리는 것 같았다.

 

이민씨 안내로 함평군 나산면 우치마을로 자리를 옮겼다.

나산은 안타까운 기억이 남은 장터였다.

오래된 함석집 장옥이 몇 동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져버렸다.

한 푼 없는 주제에 장터박물관 만들어 옮겨야 한다며 탐을 냈으나 욕심일 뿐이었다.

사람들이 뭐가 중요한지를 잘 모른다.

뒤늦게 후회해봤자 무슨 소용 있겠는가?

 

우치마을에 도착하여 차안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할머니 인터뷰 자리에 따라가 보았자, 피차 도움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잠깐 자고 일어나보니, 어느 집에 들어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텅 빈 마을을 무작정 돌아 다니며 구경했는데,

직접 지었다는 이민씨 집 같은 새집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폐가나 다름없는 낡은 정미소와 허물어지기 직전의 기와집이나 토담에 눈길이 갔다.

 

사라져가는 세월의 흔적에 대한 애잔한 슬픔에 앞서,

늙어 사라진다는 동질감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젊은이들은 객지로 나가고 늙은이들이 지키는 조그만 촌락이지만,

이 나쁜 놈의 코로나 때문에 경로당마저 막아 놓았다.

 

거짓말 좀 보태 사람 만나기는 하늘의 별따기 였다.

그래서 마을을 지키며 사는 이민씨가 대견한 것이다.

 

젊어선 꿈을 먹고 살았는데, 늙어지니 추억을 먹고 산다.

 

사진, 글 / 조문호

 

 

나이가 먹어가니 몸이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다.

어저께는 정영신 동지가 치과에 수술 받으러 갔으나 퇴자 맞았다.

혈압이 높아 수술이 안 되니 내과부터 다녀오라는 것이다.

협압이 187이나 되는 고혈압인데, 본인은 전혀 몰랐다고 한다.

오래전부터 눈에 열이 많았지만, 눈병인줄 알아 안약만 넣었다나...

 

내과에서 검사를 받아보니 고혈압에다 당뇨까지 있어 비상이 걸렸다.

약으로 위기는 넘겼지만, 자칫하면 목숨도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평소 병원을 멀리한 탓인데, 이젠 좋아하는 음식도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체중 관리는 열심히 하면서, 왜 그리 건강관리에 무심했는지 모르겠다,

모르는 게 약이라던 미련이 병을 키웠는데, 사돈 남 말 하는 격이다.

 

정동지만 나무랄 일이 아니라 하루 사이 나도 비슷한 일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틀 동안 머리가 아팠으나 별일 아닌 줄 알았는데, 갑자기 정신 줄을 놓는 이변을 당했다.

아침에 일어나 컴퓨터를 열었는데,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며 정신이 끊겨 버린 것이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렸으나, 처음 당한 일이라 당혹스러웠다.

죽어도 이처럼 편하게 눈을 감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얼마 후 정동지와 함께한 자리에서 내가 당한 이야기를 꺼냈다.

운전하는 도중 그런 상황이 온다면 예삿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정동지가 나보다 더 놀란 것 같다.

정동지도 몇 년 전 화장실에서 의식을 잃고 넘어진 적이 있었으니까...

 

‘스마트협동조합’에서 서인형씨에게 그 이야기를 꺼낸 모양인데, 당장 병원 가야한다며 전화가 빗발쳤다.

동자동 갈 채비를 하는 중에, 박건주씨를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병원에 검진 받으러 가자며 건주씨 차에 타라는데, 빼도 박도 못해 끌려가듯 병원에 갔다.

실려 간 병원은 ‘스마트 협동조합’과 협약을 맺은 ‘녹색병원’이었다.

 

병원에서 진료 일정이 맞지 않아 다음 날로 검진날짜를 미루자,

하루라도 늦출 수 없다는 정동지 고집에 응급실에 들어간 것이다.

갑자기 환자가 되어 병상에 드러누웠는데, 의사가 묻는 말만 답하고,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간호원이 피를 빼거나 혈압을 재는 등 바쁘게 움직였으나 모른 체했다..

여기 저기 끌고 다니면서 시티촬영에다 갖가지 검사를 하는 것 같았다.

 

간호원과 조무사가 소근 대는 밀어에서부터 다른 환자의 신음소리까지

귀에 들려 모든 소리가 저승에서 들리는 소리처럼 생소하게 느껴졌다.

검사결과가 나올 때 까지 잡혀 있었으니, 한 시간은 더 걸린 것 같았다.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을 세 사람이 붙들려 아무 일도 못 본 것이다.

 

그 이튿날 검사는 MRI검사라는데, 대형 세탁기 같은 곳에 머리를 집어넣어 돌리는데, 정신이 없었다.

무려 한 시간 가까이 시끄러운 소음에 시달려야 했는데, 오래 살다보니 별 검사를 다 받아 보았다.

그런데, 뇌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진단이 나왔다. 문제는 저혈압에 의한 증상이라고 했다.

정동지는 고혈압이고 나는 저혈압이니 섞어버리면 둘 다 정상이 될 것 같은 엉뚱한 생각도 해 보았다.

사형선고 아닌 집행유예선고를 받아 저승에서 이승으로 걸어 나온 것이다.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아프지 않고 편안히 눈감았으면 좋겠다.

 

사진: 정영신 / 글: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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