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도 촌장 정중근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동자동에서 술 한 잔 할 수 있냐고 물었지만, 인사동 ‘유목민’에서 만나자고 했다.
요즘같이 푹푹 찌는 쪽방에서 손님 맞으려면 힘들어서다. 다들 벗고 사는데...

퇴근시간대의 지하철은 만원이었으나, 객실은 시원하여 견딜만했다.
종로3가에서 내려 인사동 길로 들어서니, 거리에 유난히 한복 입은 젊은이들이 많았다.
전통의 멋을 내는 것이 대견스럽기는 하나, 이 더위에 어떻게 견딜까 걱정되었다.
젊으면 덥지도 않을까?





‘유목민’에 들어서니 약속한 정중근씨를 비롯하여 소리꾼 조수빈씨도 와 있었다.
술시가 일러 그런지 술집을 전세 내어 맥주에 사이다를 타 마시고 있었다.
갈증을 풀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겠으나, 통풍환자라 맥주를 못 마시니 어쩌랴.
시원한 실내라 더위를 말끔히 씻었는데, 술벗에다 명창의 소리까지 따라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뒤늦게는 언론인 정경호씨도 합류했다.


애절한 ‘진주난봉가’에 이어, 나를 위해 ‘정선아리랑’까지 불러주었는데,
무대에서 앵무새 소리처럼 들어 온 '정선아리랑'과는 감이 달랐다.
역시 우리 소리는 많은 관객을 두고 부르는 틀에 박힌 노래보다,
오붓한 술자리가 훨씬 좋았다.






박자에 끌려다니지 않는, 진득한 삶의 감정이 묻어나니 감동이 백배 천배다.
옛 선비들이 정자에 술상 차려놓고 듣는 그 풍류를 알 것 같았다.
짜증을 내어서 무엇하나로 시작되는 다소 짜증스러운 태평가도 완전히 다르게 불렀다.
다들 소리에 빠져 눈을 지그시 감고, 술 마시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안주로 나온 전복 데침이나 가지찜도 ‘유목민’에서 개발한 별미였는데,
모든 게 독창적인 것이 대세다.
오랜만에 맛보는 신선놀음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짜증을 내어서 무엇 하나 성화를 받치어 무엇 하나
속상한 일이 하도 많으니 놀기도 하면서 살아가세
니나노~ 닐리리야 늴리리야 니나노~”

사진, 글 / 조문호









































이 사람

대 끼가 철철 흐르는 최성월씨

고추모종을 심으며 정선아리랑을 부르던, 15년 전의 최성월씨 모습

 

 

최성월씨는 동강변 귤암리에 사는, 동네 소리꾼이다.

집에 있으면 스트레스가 쌓여, 시장에 나와 춤추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고 한다.

 

15년 전 ‘동강 백성들’이란 제목의 전시와 출판 프로젝트를 진행할 무렵,

하귤화 마을의 밭이랑에서 고추모종 심는 최씨를 처음 만난 것이다.

그 날 일하며 불러 준 최씨의 구성진 ‘정선아리랑’ 노래 소리에 귀가 번쩍 띄었다.

그동안 들었던 ‘정선아리랑’에서는 잘 느껴지지 않았던 삶의 애환이 그의 소리에 배어있었다.

스스로의 삶을 담아 풀어내는 가사의 진솔함도 너무 좋았다.

 

‘동강 백성들’ 작업을 마무리한 몇 년 후, 귤암리 ‘사진굿당’에서 ‘서낭당축제’를 가진 적이 있었다.

저녁 무렵 예정되었던 최성월씨 순서 전에, 음악인들이 록음악을 연주할 때였다.

그 신나는 음악에 가만있지 못하고, 최씨가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에서 내려 온 예술인들과 관람객들은 눈이 휘둥그레져 입을 다물지 못했다.

 

로보캅과 공옥진 문둥이 춤을 접목시킨 듯, 짧은 변화를 주는 춤동작에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으나,

시종일관 굳은 표정을 한 그의 모습에 차마 웃을 수도 없었다. 연주가 끝나자 우레 같은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그 박수는 뮤지션들에게 보내는 박수가 아니라 최성월씨에게 보내는 박수였다.

그 때 현장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은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춤추던 그 분은 어떻게 지내냐?”며

그의 안부를 묻곤 한다. 신들린 듯 추는 그의 춤을 놓고 “본래 무당이 될 팔자”라고도 말했다.

 

 

 

 

그 뒤 정선아리랑시장에서 황기막걸리 출시를 기념하는 공연 단막극에 나와 그의 정선아리랑을 부르기도 했는데,

나를 만나기만 하면 “영감이 시장에 못나게 하니 말 좀 해달라”는 것이다.

어느 남편이 마누라가 시장바닥에서 춤추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있겠냐마는 참 안스러웠다.

농사일이 바쁘면 어쩔 수 없지만, 장날만 되면 이 핑계 저 핑계 둘러대고 나와 춤을 춘단다.

 

 지난 22일, 정선아리랑시장 문화장터에서 춤추는 최씨를 만났다.

만난 김에 인터뷰를 시도했는데, 홑겹의 한복만 입은 채 추워 떨고 계셨다.

“날씨도 쌀쌀한데, 내복이라도 입고 나오시지 그랬냐?”고 했더니 대뜸 내복을 입으면

폼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에! “지금 연세가 몇인데, 폼만 찾냐?”고 나무랐지만, 춤꾼으로서의 프로기질도 갖고 계셨다.

그리고는 남이 들을까봐 내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시장에 아는 사람 있으면 부탁 좀 해달라는 것이었다. ”약간의 수고비만 받아 가면 영감도 끽소리 하지 않을 거라“며...,

“아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그런 부탁할 처지는 아니다”고 둘러댔지만 마음이 짠했다.

 

 

 

최씨는 정선 윗만지골에서 태어나 18살 무렵 개바우골의 이한옥(75세)씨에게 시집왔다.

개바우골에서 8대째 살아 온 이씨와의 사이에 4남 3녀를 두었으나 지금은 모두 객지에 나가 산다.

시집왔던 어려운 시절엔 먹을 것이 없어 끼니때만 되면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고 한다.

시집 온지 3년 만에 남편이 군에 입대했을 때, 군대도 산골처럼 먹을 것이 없어 고생스러운 줄 알았던

그는 늘 남편 걱정에 애태웠단다. 동내에 잔치라도 있어 떡이라도 얻게 되면 휴가 때 주려고 장롱 속에 숨겨 두다

번번이 썩혀 애석해 했다는 등, 어려운 시절 이야기들을 말 했다.

살아 온 게 한이 되어 부르기 시작했다는, 그 때 부른 최씨의 아라리 가락은 지금도 귓전에 생생하다.

 

“꽃이라도 낙화하면

오던 나비 돌아가고,

비단 옷도 떨어지면

물걸레로 돌아가네.

좋은 음식 쉬어지면

수채 구녕 찾아간다.“

 

사진,글 / 조문호

 

 

 

 

 

 

 

 

지난 22일의 정선아리랑시장은 간헐적으로 가랑비가 내리는 제법 쌀쌀한 날씨였습니다.
난장에서 화롯불을 에워싸고 이야기를 나누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정겨웠답니다.

요즘은 김장철이라 배추가 많이 나와야 하는데, 정선장에는 배추가 보이지 않습니다.
특산물이 나는 장에 특산물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지요. 대추로 유명한 보은장에 대추가 나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그 지역에서는 흔한 농산품이라 모두 외지로 빠져 나가기 때문인데, 정선의 배추도 그런 경우가 아닌가 합니다.
관광객들이 대부분인 정선장에 배추가 팔릴 리가 있겠습니까?

장터 공연장에는 주연보다 조연이 더 빛나는 하루였습니다.
군립아리랑예술단의 정선아리랑 공연에 나와 춤을 춘 최성월씨가 더 돋보였기 때문입니다.

귀로는 구성진 정선아리랑을 듣고, 눈으로는 최성월씨의 춤에 흠뻑 빠졌습니다.
로봇 춤과 공옥진씨의 문둥이 춤을 접목시킨 최성월씨만의 독창적인 춤에 입을 다물지 못했답니다.

사진,글 / 조문호

 

 

 

 

 

 

 

 

 

 

 

 

 

 

 

 

 

 

 

 

 

 

 

 

 

 

 

 

 

 

 

 

 

 

 

 



정선아리랑시장의 볼거리가 또 하나 늘었습니다.
바로 시장협동조합원으로 구성한, 상인 공연단이 불러주는 '정선아리랑'입니다.

기존 팀들이 불렀던 '정선아리랑' 노래 소리는 꾀꼬리처럼 감미롭긴 하지만 감정이 제대로 묻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새로이 구성한 상인공연단의 '정선아리랑'은 가사에서 드러나는 정선사람들의 한과 애환이 서린, 그 감정이 묻어나고 있었습니다. 공연의 속성상 남에게 보여주고 들려주기 위한 한계에 부딪치지만, 이들이 부른 '정선아리랑'은 마치 삶의 현장에서 일하다 부르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감정을 풀어내고 있었습니다.

지난 5월18일에 있었던 주말장 공연에 나온 사회자가 공연단이 결성 된지 오래지 않았다지만, 오래된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오래되면 관성이 붙어, 매번 감정을 끌어내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특히 안정자씨와 김갑순씨의 한 맺힌 노래 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을 휘어잡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정선아리랑의 맛이고 최고 가치입니다. 상인공연단의 성공적인 출범을 축하드리며, 부디 초심을 잃지 마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상인공연단 명단
안정자, 김갑순, 맹경숙, 최숙녀, 신옥화, 신애선, 안선자, 정정식, 유돈학, 변의애

 

 

 

 

 

 

 

 

 

 

 

 

 

 

 

 

 

 

 

 

 

 

 

 

 

 

 

        이 시냇물은 영월ㆍ상동을 지나 정선 고을로 들어간다. 고을 앞 임계 서쪽에 있는 산기슭 남쪽이 정선 여량촌(餘糧村)이고,

우통수 물이 북쪽에서 여량촌을 둘러 남쪽으로 흘러간다. 양쪽 기슭이 제법 넓고 언덕 위에는 키 큰 소나무와 흰모래가

맑은 물결을 가리고 비추기 때문에 참으로 은자(隱者)가 살 만한 곳이다.

다만 전지(田地)가 없는 것이 한스러우나 마을 백성은 모두 자급자족하여 넉넉하다.

 

 

『택리지』에 기록된 내용이다. 정선은 산 깊은 골짜기인지라 사는 것이 쉽지 않은 고을이었던 모양이다.

이곳을 찾았던 허소유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땅이 궁벽하니 누구인들 쉽사리 갈 수 있으랴
온 종일 몰아 달려서 강성(江城)을 택했네
개 어금니처럼 울퉁불퉁하여 고르지 않은 험한 길에 당했으니 고단(高丹, 땅 이름)이 멀고
여자의 눈썹처럼 공중에 떴으니 태백산이 가로질렀네
냉담(冷淡)한 것으로 즐거움을 삼으니 세속의 취미 어긋나고
평안하고 한가로움으로 스스로 즐기는 것이 나의 장점이네
토지는 메마르고 무거워서 유리(流離)해 도망한 백성이 많으니
집집마다 석청(石淸, 돌 사이에 모은 벌꿀)을 뽑아 바치는 것을 차마 못 보겠네

 

 

임계천을 받아들인 골지천은 구미정(九美亭)을 지나 정선군 북면 여량리, 즉 아우라지1)에서 송천을 받아들인다.

아우라지는 정선군 북면 여량리 한강 상류에 있는 나루터로, 평창군 대관령면의 황병산과 구절리에서 흘러내린 송천,

동쪽에서 흘러온 임계천이 합류하는 곳이다.

 

아우라지 섶다리

 

이 아우라지의 뱃사공이 부르던 노래가 바로 「정선아리랑」이다. 「정선아리랑」, 즉 「정선아라리」가 처음 불리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기부터였다고 한다.

고려 왕조를 섬기고 벼슬에 올랐던 사람들 중 일곱 선비(전오륜, 고천우, 김충한, 변귀수, 김한, 이수생, 신안)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성을 다짐하면서

개성의 깊은 산골 두문동에 은신하다가 지금의 정선군 남면 낙동리 거칠현동으로 옮겨와 살면서 지난날 섬기던 임금을 사모하고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였다.

그들이 멀리 두고 온 고향의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본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애달픈 모습을 보고 한시로 지어 읊은 것이

정선아리랑」의 시원이 되었다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쌓이지
사시사철 임 그리워 나는 못 살겠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옛날 여량리에 사는 처녀와 아우라지 건너편 유천리에 사는 총각이 연애를 하였다.

그들은 동백을 따러 간다는 구실로 유천리에 있는 싸리골에서 서로 만나곤 하였다.

그러나 어느 가을에 큰 홍수가 나서 아우라지에 나룻배가 다닐 수 없게 되자 그 처녀는 총각을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정선아리랑」 가락에 실어 부르게 된 것이다.

 

 

눈이 오려나 비가 오려나 억수장마 지려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
명사십리가 아니라면은 해당화는 왜 피나
모춘삼월이 아니라면은 두견새는 왜 우나
(······)
정선읍내 일백오십 호 몽땅 잠들여놓고서
이호장네 맏며느리 데리고 성마령을 넘자

 

 

그러나 「정선아라리」는 사회적, 시대적 흐름에 따라 새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반달 같은 우리 오빠는 대동아전쟁 갔는데 샛별 같은 우리 올케는 독수공방 지키네”라거나, “사발그릇은 깨어지면은 세네 쪽이 나고 삼팔선이 깨어지면은 한 덩어리로 뭉치네”라고 분단 상황을 노래하기도 하였으며, “아우라지 건너갈 때는 아우라지더니 가물재 넘어갈 때는 가물감실하네”라고 날 가문 날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동면같이 경치 좋은 곳에 놀러 한번 오세요. 용산소, 폭포수 물 밑에도 해당화만 핍니다. 산천이 고와서 뒤돌아다봤소. 정든 곳이라서 뒤돌아다봤지”라는 구절도 있고, “겉눈은 슬쩍 감구야. 속눈으로 보니, 대관령 서낭님두 돈 시구 가잔다. 연감은 할멈 치고, 할멈은 아 치고, 아는 개 치고, 개는 꼬리치고, 꼬리는 마당 치고, 마당 가역에 수양버들은 바람을 받아 치는데, 우리 집 그대는 낮잠만 자느냐”라고 노래하기도 하였다.

성마령(星摩嶺)은 정선군과 평창군 사이에 있는 고개로 지금은 잘 쓰이지 않지만 옛날에는 이 고을의 관문이었다. 어찌나 높은지 그 마루에 서면 별을 만질 수가 있을 듯하다는 뜻에서 성마령이라고 불렀다 한다.

정선군 북면 유천리 양짓말에서 갓거리로 넘어가는 가물재는 몹시 가팔라서 재 밑을 내려다보면 정신이 가물거린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고, 자족령이라고도 부르는 칠족령은 신동면 제장에서 평창군 미탄면 마사리 뇌룬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꽃베리는 강릉에서 정선읍으로 오려면 반드시 지나야 했던 베리, 곧 벼루(벼랑)였다. 조선시대에 어느 관리가 가마를 타고 지나면서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자 가마꾼에게 얼마나 더 가야 되느냐고 몇 차례를 물었는데, 그때마다 가마꾼들이 곧 베리가 끝난다고 했던 데서 ‘곧베리’가 되었다가 나중에 ‘꽃베리’로 바뀌었다고 한다.

마전치는 정선읍 광하리 마전에서 평창군 미탄면 백운리로 넘어가는 재로, 고개가 하도 높아서 마치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비행고개라고도 부른다.

 

 

 

 

 한편 조선시대에 이곳 여량리에는 여량역이 있었다. 큰 말 2마리, 짐 싣는 말 4마리,

역리 84명, 역조 77명, 역비 12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피곤에 지친 말은 실처럼 가는 길 뚫고 가기 주저하는데
삐죽삐죽 산봉우리는 깎아지른 듯 겹쳐진 성과 같네
바람은 바위틈에서 나오니 대포 실은 수레가 구르는 듯하고
물은 마을 터 안고 흐르니 한 필의 비단 가로놓인 듯
내 신세 백년을 살며 양쪽 귀밑머리만 희어지고
강산 천리 길로 벼슬살이하러 다니는 심정이여
난간에 기대 앉아 동쪽 산에 떠오르는 달 기다리는데
고요한 밤 시를 짓고 싶은 마음 오래될수록 더욱 맑아져

 

용재 성현의 시가 흐르는 듯한 아우라지를 지난 강물은 나진을 지나고 한반도 지형을 빼닮은 상장산 자락을 지나 정선에 이른다. 여기부터가 동강이다.

「정선아리랑」을 연구하는 진용선은 “옛 문헌을 보면 우리 선조들은 아우라지에서부터 동강이라는 말을 썼고, 표기도 지금의 ‘동녘 동(東)’이 아니라 ‘오동나무 동(桐)’을 썼다”라고 말한다. 영월읍을 중심으로 동쪽은 동강, 서쪽은 서강이라고 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였다는 것이다.

 

 

 

  

서강 강원도 영월군 서면에서 만난 평창강과 주천강이 영월읍 서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동강과 합류할 때까지의 강을 서강이라 한다.

 

 

동강에는 열두 곳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다. 여울과 소, 절벽, 섶다리, 마을 풍경이 그것들이다. 1경은 가수리 느티나무와 마을 풍경이고,

2경은 신동읍 운치리의 수동 섶다리다. 3경은 나리소와 바리소(신동읍 고성리~운치리),

4경은 백운산(고성리~운치리)과 칠족령(덕천리 소골~제장마을), 5경은 고성리 산성(고성리 고방마을)과 주변 조망,

6경은 바새마을 앞 뼝대, 7경은 연포마을과 홍토 담배 건조막, 8경은 백룡동굴(평창군 미탄면 마하리), 9경은 황새여울과 바위들,

10경은 두꺼비바위와 어우러진 자갈, 모래톱과 뼝대(영월읍 문산리 그무마을), 11경은 어라연(거운리), 12경은 된꼬까리 여울과 만지나루(거운리) 등이다.

산은 높고 골은 깊은 정선군에서 흘러내린 물이 골지천, 오대천, 지랑천, 용탄천, 어천, 임계천 같은 여러 내를 이루며 흘러내리다가 조양강이 되고 다시 더 내려가 동강이 된다.

정선은 고구려 때 잉매현(仍買縣)이었다가 신라의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 때 군으로 승격되어 조선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고려 때 사람인 곽충룡은 이곳 정선을 두고 “풍속은 순박하고 백성들은 송사를 벌이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역시 고려 때의 문장가인 이색은

 “일천 산엔 겹겹 푸름이 가로놓였으니 한 가닥 길은 푸른 공중으로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곽충룡은 이어서 “일백 번 굽이져 흐르는 냇물은

멀리 바다로 향하고 천 층으로 층계 진 절벽은 하늘에 의지해 가로질렀네”라고 하였다. 이렇듯 산이 높고 물이 깊은 정선군을 일컬어

고려 때의 문인 한철충은 그의 시에서 “벼랑을 따라 보일 듯 말 듯 가느다란 길이 있구나. 옛 읍이 산을 의지하였는데 산은 성을 이루었네.

산중에 숨어 살고자 하나 참으로 방도가 없구나. 비록 벼슬을 그만두겠다고 말하나 진정(眞情)이 아닌 것만 같네”라고 하였다.

정추는 “하늘 모양은 작은 것이 우물 속에 비쳐서 보이는 것 같고, 산의 푸름은 멀리 구름 위에 가로놓였다. 다섯 동혈(洞穴)은 차고 서늘하여서 능히 뼛속까지 시리게 하고, 한 시냇물은 목메어 울어 순정(純情)을 호소하는 것 같다”라고 노래하였다. 그래서 이 근래에도 정선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장을 두고 “하늘이 세 뼘밖에 되지 않는다”라거나 “앞산과 뒷산을 이어서 빨랫줄을 맬 수 있는 곳” 또는 “닭이 울면 그 소리가 온 고을을 메울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한 안축은 그의 시에서 “산마을에 돼지의 배부름은 반드시 새벽에 물 먹인 것이 아니요, 이웃집 닭이 살져도 날마다 훔쳐가는 자가 없다”라고 하였다.
정선 관아의 북쪽에는 봉서루라는 이름의 정자가 있었다. 그 정자를 두고 안축은 다음의 시를 남겼다.

 

 

가파른 언덕을 빙빙 돌아 말을 급히 몰아가니
뽕나무와 삼[마(麻)]이 십 리를 이은 옛 성터
거친 땅엔 자갈만 삐죽삐죽 규전(圭田)도 적고
비좁은 산허리에 가로질러진 실낱같이 가는 길
빗소리 들으니 나그네 시름 더하고
구름 보니 어버이 그리는 마음 참기 어렵네
바람 바위 물구멍은 사람 세상 아니로세
티끌 흔적 씻어내니 뼛속까지 시원하네

 

 

한편 이곳 정선에서 거두어들인 전세(田稅)는 무명이 1동(同) 19필이었고 『여지도서』에 그 이동 경로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3월에 거두어들여 4월에 바친다. 처음에는 육로로 실어 날라 사흘이면 충주 목계강에 도착한다. 배에 싣고 출발해 자진포, 두무포를 거쳐 경강의 뚝섬에 도착한다. 순풍을 만나면 이틀 반이면 호조에 바칠 수 있다. 대동과 균세도 이와 같다.

 

두메산골이었던 정선이 새롭게 변모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정선 오일장의 부활이다. 5월에서 가을까지 2일과 7일에 서는 정선 오일장에는 서울에서 관광차 오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정선읍내의 오일장에는 정선군 일대에서 채취된 산나물이 다 쏟아져 나온다. 참취, 곰취, 며느리취, 나물취, 참나물, 누롯대, 참두릅, 개두릅, 더덕, 고비, 도라지, 곤드레 등 나물도 좋지만 무엇보다 정선 여행의 별미인 콧등치기와 올챙이국수를 맛볼 수 있어 더욱 좋다. 콧등치기는 일종의 메밀국수다. 메밀을 반죽하여 국수를 만든 것인데 올챙이국수에 비해 끈기가 있고 단단하여 국숫발이 물에 쉽게 풀어지지 않는다. 육수에 된장을 살짝 풀고 깨소금 양념을 하여 먹는데 맛이 좋아 급히 빨아들이다 보면 국숫발이 살아 있는 듯 콧등을 친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

올챙이국수는 찰옥수수를 갈아서 묽게 반죽하여 나무로 만든 굵은 체에 내려 만든 것이다. 찰기가 적어서 국숫발이 부슬부슬 끊어지는데, 갖은 양념을 하여 묵처럼 말아서 숟갈로 떠먹는다. 하지만 옛 시절 정선의 명물이었던 꿩꼬치산적 같은 음식은 아쉽게도 찾아볼 수가 없다.

태백에서 시작된 남한강이 유장하게 흐르는 영서지방을 두고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영의 오른쪽은 영서(嶺西)라고 한다. 모든 물이 서쪽으로 흘러 한강과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가는데, 물이 적은 데는 거룻배가 다닐 수 있고, 물이 많은 데는 큰 배가 다닐 수 있다.

이익이 생존했던 18세기 중엽만 해도 남한강엔 수없이 많은 배들이 오르내렸지만 오늘날엔 큰 배는커녕 고깃배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정암사

 
 

이곳 정선군 고한읍에 자장율사가 세운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의 하나인 정암사가 있다. 신라의 큰 스님이었던 자장율사가 태백산 서쪽 기슭에 정암사를 창건한 것은 선덕여왕 14년이었다. ‘숲과 골짜기는 해를 가리고 멀리 세속의 티끌이 끊어져 정결하기 짝이 없다’는 의미에서 정암사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이 절은 오대산의 상원사, 양산의 통도사, 영월의 법흥사, 설악산의 봉정암과 더불어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다. 정암사의 창건 설화와 문수보살을 만난 자장율사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정암사 적멸보궁 태백산 서쪽 기슭에 자리한 정암사는 신라의 큰스님이었던 자장율사가 선덕여왕 14년에 창건한 절이다.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다.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불교의 융성에 힘쓰던 자장율사는 진덕왕 때 대국통의 자리에서 물러나 강릉에 수다사를 세우고 살았다. 어느 날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말했다. “내일 너를 대송정에서 보리라.” 놀라 깨어난 자장이 대송정에 이르자 문수보살이 나타나 “태백의 갈반지에서 만나자” 하고 말한 뒤 다시 사라져버렸다. 그 말을 따라 태백산에 들어가 갈반지를 찾아 헤매던 자장은 큰 구렁이들이 나무 아래 서로 얽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그곳이 문수보살이 말한 갈반지라 여겨 ‘석남원(石南院, 곧 정암사)’이라는 절을 지었다.

자장율사가 석남원에 머물며 문수보살이 나타나기를 몹시 기다리던 어느 날 다 떨어진 가사를 걸친 초라한 늙은이가 죽은 개를 삼태기에 싸들고 와서 “자장을 보러 왔다”라고 하는 게 아닌가. 자장율사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 언짢았던 자장의 시중이 “어디서 온 누구인가?” 하고 호통을 치자, 그 늙은이는 천연덕스럽게 “자장에게 전해라. 그래야 갈 것이다”라고만 대꾸하였다.

자장율사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 늙은이를 쫓아내게 하였다. 그러자 늙은이는 “아상이 있는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으리오” 하고 탄식하면서 가지고 온 삼태기를 뒤집으니 죽은 강아지가 푸른 사자로 변하였다. 늙은이는 그 사자를 타고 빛을 뿌리며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다. 알고 보니 바로 그 노인이 문수보살이었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자장이 곧바로 뒤를 쫓아갔으나, 이미 문수보살은 떠나가버린 뒤였다. 자장은 몸을 남겨두고 떠나며 “석 달 뒤에 돌아오마. 몸뚱이를 태워버리지 말고 기다려라” 하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한 스님이 와서 오래도록 다비하지 않음을 크게 나무란 뒤 자장의 몸뚱이를 태워버렸다. 석 달 뒤 자장이 돌아왔으나 이미 몸이 없어진 뒤였다. 자장은 “의탁할 몸이 없으니 끝이로구나! 어찌하겠는가. 내 유골을 석혈(石穴)에 안치하라” 하는 부탁을 하고 사라져버렸다.

한편 자장은 사북리의 산꼭대기에 사리탑을 세우려 하였으나 세울 때마다 계속 쓰러졌다. 간절히 기도하였더니 하룻밤 사이에 칡 세 줄기가 눈 위로 뻗어 지금의 수마노탑, 적멸보궁, 사찰 터에서 멈추었으므로 그 자리에 탑과 법당과 본당을 짓고 그 절의 이름을 갈래사(葛來寺)라고 하였다. 그래서 고한읍에는 갈래라는 마을의 이름과 함께 갈래초등학교가 있고, 상갈래ㆍ하갈래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정암사는 숙종 39년(1713)에 중수되었으나 낙뢰로 부서져 6년 뒤 다시 중건되었고, 1771년과 1872년 그리고 지난 1972년에 다시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정선읍 귤암리에 거주하는 최성월(74세)씨는 정선아리랑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평생을 일하며 불러 온 그의 아라리는 꾀꼬리처럼 부르는 기능보유자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만의 질박하고 구수한 정선아라리 노래 속에는 민초들의 애환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씨의 독특한 춤사위도 일품인데, 타계한 공옥진여사의 문둥이 춤을 연상케한다. 

이 춤을 추게 된 사연도 재미있다. 수십 년 전 제주도에 관광여행을 떠난 적이 있는데,

머무는 숙소 지하의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끌려 나이트클럽으로 내려갔단다.

거기서 젊은이들이 추는 춤을 보고 연습한 결과 지금의 춤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앞으로 손을 뻗었다 굽히는 등의 독특한 그의 춤사위도 이채롭지만,

시종일관 무표정한 모습으로 춤을 추는 그를 지켜보면 웃음이 절로 터져 나온다.

 

춤과 마찬가지로 구성지게 부르는 아라리 노래 가사들도 대부분이 그의 삶에서 비롯된 내용으로 직접 붙이는데,

모든 것을 자기만의 것으로 만들어 내는 독창성과 광대적 기질이 남다른 분이다. 

 

   글.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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