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덕산기의 소설가 강기희(61)씨가 지난 81일 오전2시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족 : 자 강승범, 처 유영숙

빈소 : 정선군립병원 장례식장 (사북읍 지장천로 72)

발인 및 영결식: 2023.8.3 (목)10:00
장지 : 동해 승화원, 덕산기 선산 
문의 : 전상현(010. 3331. 0059)
 
강기희는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나 강원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했다. 1998년 『문학21』 신인상으로 등단한 이후 장편소설로 『아담과 아담 이브와 이브』(1999), 『동강에는 쉬리가 있다』(1999), 『은옥이 1, 2』(2001), 『도둑고양이』(2001), 『개 같은 인생들』(2006), 『연산-대왕을 꿈꾼 조선의 왕』(2012), 『원숭이 그림자』(2016), 『위험한 특종-김달삼 찾기』(2018), 『연산의 아들, 이황-김팔발의 난』(2020), 『이번 청춘은 망했다』(2020) 등을 출간했다.
한국 최초 전자책 전문업체인 '바로북닷컴'이 주최한 ‘5천만원 고료 제1회 디지털문학대상’을 수상하였고, 200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문예창작기금을 수혜하였다. 민족작가연합 공동대표와 한국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며, 오지 마을인 정선 덕산계곡에서 창작 활동과 함께 ‘숲속책방’을 운영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아래는 고인의 생전 모습입니다.

지난 사진을 돌아보며 고인을 추모해 주십시요.

 

 

 

지난 23일은 정선 만지산 불난 집터 측량하는 날이었다.

아산의 김선우씨가 일주일 전부터 신청해 둔 측량이라, 모처럼 정동지와 함께 정선 간 것이다,

 

오전10시에 출발했는데, 차를 교체한 후 첫 장거리 운행이었다.

‘투싼’은 승차감도 좋았지만, 확 터인 시야라 지난 번 ‘크루즈’보다 훨씬 편했다.

양평을 경유하여 네 시간 만에 도착했는데, 측량시간이 오후2시라 한 시간 정도 남았더라.

 

불난 집터만 보면 속이 뒤집어져 창수네 집부터 올라갔다.

집에 아무도 없어 전화를 걸었더니, 밭에서 옻나무를 자르고 있었다.

부지런함은 여전한데, 일을 마무리하며 그동안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친정 식구들이 몰려와 몇 날 며칠 동안 술파티를 벌였다는 이야기에서부터

큰아들 창수가 속 썩인 일까지 구절구절 풀어댔다.

 

지난 해에는 고추농사는 짓지 않고 고사리 농사에만 공을 들여 팔백만원이나 벌었고,

다른 집에서 일 해주고 받은 품삯도 오백만원이 넘었는데, 

자식이 사고를 쳐 한 입에 털어 넣고 말았다는 것이다.

 

큰 아들 창수가 갑자기 정신 장애를 일으켜 큰 사고를 냈다고 한다.

 보상해 준 돈만도 만만찮은데, 카드로 주문한 책이 산더미처럼 왔다는 것이다.

조금만 관심가면 모두 구입한 것 같은데, 책 값만 몇 백만원이 된다고 했다.

대부분 필요 없는 책이라 새 책을 폐품으로 파는 어이없는 일도 있었단다.

“자슥 놈이 웬수야! 웬수~”라는 창수 엄마의 하소연에 한이 맺혔다.

 

농막에서 커피 한 잔 얻어 마시는데, 아산에서 출발한 김선우씨가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집터 측량하러 왔다는 말에 창수엄마도 따라 나섰는데,

측량기사도 네 분이나 왔지만, 김선우씨는 김창복씨와 함께 왔더라.

 

아산의 김창복씨는 농지에 관한 행정이나 농막 관례에 해박한 전문가로

지난 해 불 난 직후에도 모시고 와 도움을 받았는데, 송구스럽기 그지없었다.

하루 종일 차 속에 시달릴 걸 생각하면, 자기 일이라도 쉽게 나서지 못할 일이 아니던가?

 

측량 기사들은 측량하느라 왔다 갔다 했지만,

선우씨 일행을 비롯한 동네사람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웅성거렸지만, 불 낸 옆집에서는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

 

측량 결과가 나왔는데, 20년 전 측량한 것과는 많이 달라졌다.

우리 집터에서 동쪽으로 2미터 정도 밀려 난 것 외에도

북쪽에서도 2미터 정도 남쪽으로 내려와 창수네 밭의 상당부분을 차지했다.

지켜보던 창수엄마의 낯빛이 편치 않아보였다.

 

그 땅은 창수가 아무 일을 못해 둘째 아들 용순이를 집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용순이 집터로 정한 땅이라며 난처해했다.

오죽하면, 다시 측량하게 되면 위쪽으로 올라 갈 것이라고 했을까?

 

그런데, 아산 김창복씨가 문제점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옆집과 경계를 이룬 남쪽지점과 북쪽 지점에 눈금을 대 보고는

옆집에서 지은 농막이 집과 집사이의 5미터 틈을 두지 않았고,

한 쪽 지붕 끝이 이쪽 땅을 침범했다고 한다.

새로 지은 농막을 보호하기 위해 이쪽 땅에 돌 턱을 쌓은 것도 잘 못이란다.

 

이 문제는 우리가 관여할 일은 아니지만, 농막 규모도 여섯평을 한참 초과했고

집도 한 채가 아니라 대형 저장고까지 세동이나 되었다.

그래도 부족한지 빈터에 건축자재를 잔뜩 쌓아 놓았더라.

우리 집터는 오래전부터 옆집의 주차장이고 자재 보관소였다.

문제점을 따지고 싶었으나, 사람이 나오지 않아 민원을 제기할 수 밖에 없었다.

 

불난지 1년이 지났건만 보험회사는 물론, 불 낸 사람도 전화 한 통 없다.

‘굴러들어 온 돌이 박힌 돌 뺀다’는 속담처럼, 상대를 열 받게 해 스스로 나가길 바랄까? 

솔직이 사람이 보기 싫으니, 정선 만지산에 대한 애착도 사라졌다.

 

군청에 가서 알아보자는 손님 말씀도 있었지만, 읍내 나가 밥부터 먹어야 했다.

군청과 읍사무소에 들렸다가 시장 곤드레 밥으로 허기를 메웠다.

차 한 잔 나누며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선에서 못 살것 같았다.

홧병으로 목숨을 재촉할 것아 다른 곳에 집터 알아보라고

모든 일을 정동지와 김선우씨에게 넘겨버렸다.

 

사실은 6년 전 정영신씨와 이혼할 때, 위자료조로 정선 집을 준다고 했으니 정동지 집이다.

집터 압류가 풀리지 않아 명의 이전을 못하고 서약서만 남겼으니,

내가 결정할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도움주신 분들과 함께 사용할 에술창고를 만들겠다는 약속은 지켜야 해

어디든 적당한 부지를 찾아보라는 부탁은 했다.

매사가 분명치 못하니 김선우씨가 모든 일을 해결해 주는데,

그 많은 도움을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선 만지산은 25년 동안 정들었던 제2의 고향이었다.

자연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나 많은 것이 바뀌었다.

순박했던 동강 원주민들이 더러 세상을 떠나기도 했지만,

산골까지 파고든 물질문명으로 인심이 예전 같지 않다.

 

정선과의 인연을 끝내려니, 한 마디로 시원섭섭하다.

“잘 있거라. 정선아! .”

 

사진, 글 / 조문호

 

 

25년 동안 기록한 작업들을 돌아 보며 정리해 둔다

 

-축제-

동강변 주민들을 위한 굿마당 2000, 9 / 구 귤암분교

제1회 만지산 서낭당 축제 2007, 10 / 만지산 사진굿당

제2회 만지산 서낭당 축제 2008, 9 / 만지산 사진굿당

 

-전시-

동강환경사진전, 1999. 10 / 서울, 충무로 갤러리

‘동강백성들’사진전, 2001, 11 / 서울, 충무로 지하철역과 혜화역 지하철 전시장

‘두메산골 사람들’ 사진전, 2004, 12 / 서울, ‘덕원갤러리’

찾아가는 예술여행 ‘두메산골 사람들’전 2005 / 정선, 평창, 영월 산골마을 분교 10곳

‘신명’ 설치 사진전, 2005, 9 / 만지산 사진굿당

강원다큐멘터리 특별전, 2005, 7 / ‘동강사진박물관’

‘산을 지우다’ 사진전, 2008, 9 / 서울, ‘통인옥션갤러리’

‘산골 사람들’ 사진전, 2018, 5 / 정선, G갤러리

 

 

-출판-

‘동강백성들’ 포토에세이 발간 / 2000, 9 /도서출판 명상

‘동강’환경사진집(한국환경사진가회) 2000, / 도서출판 포토뉴스

‘두메산골사람들’ 사진집 발간 / 2004, 12 / 눈빛출판사

 

 

“아! 너무 허무하다.” 모든 게 한 순간이구나.

 

어제 오전 7시 무렵, 녹번동 정영신씨로 부터 전화를 받았다.

정선 만지산 집에 불이 나 모든 게 타 버렸다는 비보였다.

 

그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설마, 누군가 빨리 오라는 장난 전화를 했겠지”라고 위안했으나

부리나케 정동지를 만나 정선으로 떠난 것이다.

 

연락에 의하면 밤1시 40분 경 옆집에서 불이 나

우리 집으로 옮겨 붙었는데, 원인은 누전이란다.

옆집 한씨가 전기기술자인데, 누전으로 불났다는 건 이해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 집은 동강 변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옛집이 아니던가?

동강 댐이 무산되어 주민들에게 주택건설비를 지원할 때

동강 변에 있던 집들은 모두 헐려나가며 국적불명의 주택이 들어섰다.

 

집만 아니라 그 안에는 동강 사람들의 삶의 변천사가 담긴 자료는 물론,

긴 세월 수집해둔 소중한 사진자료들이 차곡차곡 보관되어 있었다.

한 달에 두 번씩 정선 갈 때마다 새로 생긴 자료들을 챙겨가

정선 집은 자료 창고나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부엌 헛간을 개조해 암실과 작은방까지 만들어 두었으나

방은 물론 암실 기자재 위에도 숱한 짐이 쌓여 창고가 되어버린 것이다.

 

가장 큰 걱정거리는 그 곳에 남겨 둔 필름 박스였다.

필름 박스 두 개 중 한 개는 스캔받기 위해 녹번동으로 옮겼지만,

한 개는 만지산 집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자동에 들어 간 이후 몇 년 동안 필름박스를 손도 대지 못했다.

그 일만 끝냈다면 나머지 것과 바꾸어 필름 이미지는 건졌을 것이다.

 

그 집에는 동강자료 뿐만 아니라 나는 물론 정영신씨가 전시한

수 많은 사진 작품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스캔된 이미지야 다시 만들면 되겠지만 사라진 이미지는 어쩌냐?

 

그리고 둘 만의 작품만 아니라 다른 작가들의 그림이나 도자도 있었다.

강용대 그림에서부터 초창기의 강찬모 그림과

수안스님, 최울가, 이존수, 신동여, 이청운작가 등 십여 점이 보관되어 있었고

나를 그려 준 박재동선생 그림을 비롯한 초상화도 여러 점 있었다.

그리고 통도사에 계신 수안스님께서 방문하여 ‘몽암’이라는 현판까지 달아주셨다.

꿈의 암자라고 이름 지었는데, 결국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정선 만지산에 도착하니, 옆 집 두 채와 우리 집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포크레인만 불탄 현장을 지킬 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화재 규명은 물론 불탄 필름 흔적이나 피해 자료를 찾아야 하는데,

왜 포크레인이 현장에 들어 와 헤집어 놓았을까?

한 쪽에선 불씨가 남았는지 연기가 피어오르고, 굶주려 지친 개들만 여기 저기 퍼져 있었다.

 

불탄 잔해를 살펴보니 그동안 아무리 찾아도 없었던

90년도 만든 ‘전농동588번지’ 전시 팜프렛 잔해도 보였다.

그렇지만 건져낼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윗만지 창수네 집으로 올라갔다.

고사리 꺾던 이선녀씨는 하던 일을 제쳐두고 술상부터 차렸다.

마음을 위안해 줄 게 술 밖에 더 있겠는가?

 

막걸리가 몇 잔 들어가니 한결 마음이 편하더라.

들려준 바에 의하면 동네사람들이 밤잠을 설쳤고, 소방차가 일곱 대나 동원되었단다.

다들 산으로 번지지 않도록 막았을 뿐, 속수무책이었다고 한다.

 

누전이란 것은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더니, 아니란다.

어제 손님 네 분이 윤인숙씨 집에 와 묵었는데, 늦도록 고기 구워 술을 마셨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은 불씨가 살아나 옮겨 붙은 것으로 추정한단다.

 

불난 집 이야기에서 웃기는 이야기로 불이 옮겨 붙었다.

살러 온 색시마다 도망쳤다는 뱃사공 유춘식씨 이야기에서부터

한 밤중 일 치던 내외가 석유병을 들기름으로 착각해

거시기에 불이 붙은 비화 등 배꼽 잡을 옛날 이야기들이 나왔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이선녀씨가 따 놓은 두릅을 두 보따리나 챙겨주었다.

두릅 값으로 신사임당 한 장을 꺼내주었더니, 감동적인 말을 했다.

“인정을 돈으로 계산하지 말자”는 거다.

 

마을 이장 처럼 항상 보살펴주는 최연규씨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다들 불난 집에 와 있단다.

 

 

내려 가보니, 동내 사람들이 술 한 잔 마시며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이야기했다.

나야 보험이라고는 자동차 보험 밖에 없지만, 옆집도 화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요즘 집 공사 중이라 현금을 칠백만원이나 두었는데, 그 것까지 홀랑 태웠다는 것이다.

보상 받기 위해 잿더미를 뒤적거려 이백만 원 정도의 흔적은 찾았다고 한다.

 

자칫했으면 생사람 잡을 뻔 했더라.

숨이 막혀 일어나니 연기가 차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돈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팬티 바람으로 튀 쳐 나갈 수밖에 없었단다.

천만다행인 것은 그날 밤 바람이 한 점도 없었다는 점이다.

불이 산으로 옮겨 붙었다면 대형 산불로 번질 가능성이 많았다.

동원된 소방관들도 불이 윗쪽으로 번질 것을 대비해 포진했지만,

일방통행인 만지산 길에 물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진화가 더 더뎠다고 한다.

 

늦게 불붙은 우리 집은 소방관들이 조금만 빨리 출동했어도 옮겨 붙지 않았을 거고,

물 공급만 원활했어도 자료의 반이라도 건져낼 수 있었다고 한다.

산불이나 마찬가진데, 소방헬기는 왜 동원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동강 댐으로 시끄러울 때 왔으니, 어언 이십 오년의 세월이 훌쩍 넘었다.

환경 사진가들이 만지산에 둥지 틀고 물고기나 곤충, 들꽃 등 각자 전문분야를 기록했는데,

난, 동강 변에서 살아 온 사람들의 삶을 기록한 것이다.

지금 불탄 집이 그 당시 캠프로 사용했던 집이다.

 

2000년, 동강 사람들의 눈물겨운 이야기를 담은 ‘동강 백성들’ 사진 산문집과

조해인시인의 ‘어라연 뱃사공 이해수씨’라는 동강 시집이 나올 무렵에는

‘동강주민을 위한 굿마당’을 옛 귤암분교에서 열기도 했다.

 

김명성씨가 주동이 된 ‘창예헌’ 예술가들이 버스 몇 대에 나누어 타고 찾아 와

밤늦도록 주민들과 어울렸는데, 이원창 사또 나리께서 늦게 나타나는 바람에

좁은 도로가 마비되는 등 조용했던 동네에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다.

 

그 무렵은 다들 동강 댐 찬성하는 주민들을 나쁜 놈으로 몰아세웠다.

댐을 만들라는 목소리를 낼 수 밖에 없는 속 사정은 일언반구도 없이

여론몰이 하는 형태는 지금의 기레기나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환경운동연합’과도 반대의견을 낸 것은 사람이 살아야 동강도 살수 있다는 말이다.

 

빚에 쪼들려 물에 투신하거나 농약먹고 자살하는 등

동강 사람들이 여럿 죽어나가자 주민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

명동성당 앞에 진을 쳤는데, 날씨마저 얼마나 추웠는지 모른다.

그 당시 충무로에 있던 ‘현대사진가회’ 강의실을 비워 귤암리 노인들을 모셔놓고

밤 세워 전단지 만들고 보도자료 보내느라, 사진단체 사무실이 동강사람들 전진기지가 되었다.

이틀 날 ‘문화일보’ 사회면에 동강주민 살리라는 사회면 특집기사가 실린 것이다.

 

주민대표 이영석씨를 비롯한 몇 명이 김대중 대통령 호출로 청와대에 불려갔다.

피해주민에게 주택자금 지원과 부대시설을 지원하기로 약속받는 등 난제를 해결했다.

그 때 출판한 ‘동강환경사진집’과 ‘동강 백성들’ 산문집으로 환경단체 프로젝트는 끝났지만, 

두메산골사람들’과 '산'을 주제로 사람과 자연 환경을 찍으며 혼자 눌러 앉았다.

 

그 곳은 자연 환경도 아름답지만, 절처럼 마음이 편안해 떠나기 싫었다. 

몇 년 지난 후 프로젝트에 같이 참여한 사우가 그 집을 자기가 사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울며 겨자 먹기로 빚내어 사게 된 것이다.

그 많은 짐을 옮길 곳도 없었지만, 하던 작업이 끝나지 않아서다.

오죽했으면 역마살이 끼어 한군데 오래 정착하지 못하는 버릇을 알아

돌아가신 어머니까지 만지산에 묻었겠는가?

 

20년 전 평당 팔만원에 400평을 샀다.

당시의 시세가 평당 만원정도 했으니, 바가지도 그런 바가지가 없었다.

 집도 밭에다 지은 무허가 농가였다.

문제는 한 집이었던 옆집을 다른 사람에게 잘라 팔며 절집 같이 고요한 만지산의 낙원도 끝나버렸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거나 지나치는 사람들로 정동지가 정선 집에 가기 싫어했다.

욕실도 없고 화장실도 멀리 떨어져 있어 밖에서 목욕을 하거나 소변을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예 우리 집 마당을 주차장으로 사용하며 들락거리니, 나 역시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옆 집은 한 때 대학로에서 카페를 운영 했다는 박진기씨가 살았으나

땅 살 형편이 못 되자 미국 사는 친구를 끌어들여 사도록 부추긴 것이다.

옛 말을 믿을 수는 없으나, 그 집에 우환이 생긴 원인은 집 구렁이 때문이 아닌가도 추정된다.

 

2002년 여름, 우리 집 모퉁이에 팔뚝 굵기의 능구렁이가 똬리 틀고 있었다.

최종대씨가 얼른 잡아 옆집 부엌의 빈 장독 속에 넣어둔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옆집은 최종대씨 장인인 이관옥씨가 오가면 사용한 집인데,

이튿 날 뱀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고 한다.

집 구렁이를 잡아서 안 된다는 옛말이 생각나 늘 마음이 꺼림직 했다.

 

이번에 불난 발화지점이나 사람 죽은 방도 그 부근이었다.

비록 그 일 때문은 아니겠지만, 우환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 집을 산 성수씨가 어느 날 술이 취해 부얶 방에 들어가다 깨진 방문 유리에

동맥이 찔려 죽는 변을 당하는가하면, 처음 잠깐 살았던 박진기씨도 아내와의 불화로

집에서 석유를 몸에 붓고 불을 붙여 자살한 것이다.

 

성수씨가 갑작스런 변을 당하자 아내가 무서워 못살겠다며,

이사 가려고 급히 집을 내놓았는데, 그 집을 산사람이 이번에 불 난 윤인숙씨다.

세상을 하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구렁이를 잡은 최종대씨도 나이에 비해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어지는 우환이 우연치고는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우리 집은 일찍부터 ‘사진 굿당’이란 이름을 내걸고 여러 가지 일을 벌였다.

산삼 심는 ‘농심마니’ 팀들을 초대하여 만지산에 산삼을 심었고,

사진굿당 앞 서낭당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때로는 굿당 축제에 무세중씨나 정선 무당을 모셔 와

밤 세도록 징소리 울리며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굿판을 벌이기도 했다.

 

일 년에 한 번씩 축제를 연 것도 동강사람들 자료관으로 자리잡기 위해서였다. 

타지의 예술인들을 불러 모아 수시로 놀이판을 만들어 문화적 역량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동강과 사람들에 대한 숱한 자료들을 모아 왔으나, 그 꿈은 순식간 화마에 휩쓸려가고 말았다.

 

우연치고는 근래에 생긴 일들도 예사롭지 않았다.

여지 것 그 집을 전혀 손대지 않았던 것은 돈도 없지만,

집 자체를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불편함을 토로하는 정동지의 불만을 깔아뭉갠 것이 미안할 뿐이다.

 

그런데, 보름 전 느닷없이 옆집에서 우리 집에 신식차양을 달아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호의를 거절할 수도 없었지만, 좋아하는 정동지를 보며 어찌 반대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다음 주에 정선군청에 들어갈 작정으로 구체적인 기획안까지 만들어 두었다.

그 집에 보관된 동강자료는 물론 집 자체를 정선군에 넘겨주기 위해

실무자를 만나 손 털 계산을 한 것이다.

 

또 하나는 인사동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기 위해 몇 년 동안 손대지 않고

쳐 박아 둔 녹번동 필름박스를 정리하기로 작정했다는 점이다.

그 필름을 스캔 받은 후 정선 필름과 바꾸어왔다면 이미지는 살아남지 않았겠는가?.

한꺼번에 일어난 이 일련의 갑작스런 변수들이 화재와 연관은 없었을까?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 지 걱정이 태산 같다.

아무래도 윗만지산의 마지막 우환은 내 차례가 될 것 같다.

이년 쯤 후에는 동자동 쪽방 일도 마무리 될 것으로 여겨진다.

재건축이 끝나 다들 한 곳에 머물게 되면 더 이상 할 일은 없다.

그 때쯤 집터에 오두막 지어 살다 만지산에 뼛가루를 뿌리게 할 예정인데, 뜻대로 될지 모르겠다.

 

동네 주민들이 위로 차 여럿이 모여 술잔을 돌렸으나

예전부터 살던 주민은 최연규 내외와 김순배씨 뿐이었다.

 

다들 낯설거나 안면 정도 있었는데, 술 마시는 분위기가 무거워 노래 한 곡 불렀다.

그런데, 웃기려 불렀던 성냥공장 노래마저 노동가처럼 비장감이 뚝뚝 흘렀다.

 

“만지산 성냥공장

성냥 만드는 아저씨

하루에 한 갑 두 갑

낱 갑이 열두 갑

바지 밑에 감추고서

정문을 나오다

바지 밑에 불이 붙어

자지털이 다 탔네

만지산 성냥공장

아저씨는 백자지 백자지“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십 년 전에 심은 만지산 집 살구나무,

살구 좋아하신 장모님 나무다.

열리라는 살구는 열리지 않고

꽃만 흐드러지게 피는 살구나무

꽃 무게에 넘어질까 지팡이도 짚었다.

지천에 온갖 꽃이 다 피어도

살구꽃처럼 예쁜 꽃은 없다.

살구 맛도 못 보고 가신 우리 장모님

꽃이라도 보실지 모르겠다.

늙은 이내 가슴 다 녹는다.

 

지난 주말 정선 만지산에 파종하러 갔다.

모처럼 정영신씨와 나선 걸음이라 자동차도 신 났다.

 

만지산엔 온갖 꽃이 만발했다.

살구꽃을 비롯하여 진달래, 철쭉이 반겼고,

옆 마당의 벚꽃은 하늘을 뒤덮었다.

 

지난 번 봉우리 맺혔던 목련은 처참하게 떨어졌다.

그렇지만, 꽃구경할 겨를이 없다.

당일 떠나려면 일을 서둘러야 하기 때문이다.

 

정동지는 야채모종 심느라 바빴고,

나는 땅 고르고 씨 뿌리기 바빴다.

 

옆집의 한순식씨는 집수리부터 하란다.

천막 떨어져 나간 자리에 공사판에서 챙겨 온 아크릴 차양을 달란다.

 

주는 것도 고마운데, 두 내외가 더 설쳤다.

발가락 부러진 윤인숙씨는 깁스까지 했으나

비닐봉지로 감싼 채 물청소를 하고,

한순식씨는 차양 다느라 애썼다.

 

이젠 우리 집도 신식 차양을 달았다

한 때 동강 댐 보상 턱으로 집 지어줄 때,

동강변 일대의 헌집은 모두 헐려 나갔다.

 

우리 집이 동네에서 유일한 헌집인데,

아직 석면 스레트 지붕을 달고 산다.

읍사무소에서 무상으로 교체해 주었으나

우리 집만 잔재를 그대로 남겼다.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미련하게 보이겠나?

돈이 없어 새집을 짓지 못했지만,

어찌 보면 동강 변의 유일한 옛집이라

주택 변천의 자료적 가치는 있을거다.

 

새집이야 돈만 있으면 언제나 지을 수 있지만,

헌 집은 허물면 다시 볼 수 없지 않겠는가?

 

살기가 불편해 정동지 마저 정선가길 싫어한다.

나야 어디서나 지내는 야생의 습성을 지녔지만.

따뜻한 물은커녕 씻을 곳조차 마땅찮은 시골집에

어느 여인네가 가고 싶겠는가?

 

돈 생기면 조립식 주택이라도 옮겨주겠다고

둘러 댄지가 10여 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그런 처지에 비 피할 수 있는 차양이라도 올렸으니

공사 중의 공사고 경사 중의 경사가 아닐 수 없다.

 

달아 준 것만도 황송하기 그지없는데,

부침개까지 부쳐 술상까지 차려 주었다.

상낭식이 아니라 차양식이 된 셈이다.

아랫집 김익수씨와 윗동네 두 내외도 합류했다.

 

그나저나 보답을 해야 하는데, 돈이 십 만원 밖에 없었다.

윤인숙씨께 수고비로 털어 드리고,

사진 작품 하나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물었더니, 만지산 사진을 택했다.

 

운전 때문에 술 한 잔 못 마셨지만, 기분은 째지더라.

차양을 달아서보다 정동지가 좋아하니까...

 

어두워지기 전에 마무리 할 일만 남았다.

서두러느라 대마씨는 제대로 뿌려졌는지 모르겠다.

힘들지만 이게 산골 사는 재미가 아니겠는가?

올 여름엔 지인들 불러 잔치 한 번 벌일까보다.

 

사진, 글 / 조문호

 

정선가는 길은 언제나 아름답다.

양수리 물안개를 밟고 구불구불 구름을 넘어

조양강에 이르면 만지산 살팔봉이 반긴다.

 

가을걷이로 정영신씨까지 대동했으나, 별로 거둘 것도 없다.

어머니께 내년에 오겠다는 인사나 마찬가지다.

 

농사란 공들인 만큼 돌아오는데, 나그네처럼 집 떠날 때가 더 많으니 될 리가 없다.

남은 거라고는 무와 들깨 조금이고. 산소에 핀 들국화 따는 일이 고작이다.

 

만지산에 도착하니, 현영애감독을 비롯한 손님들이 먼저 와 있었다.

울 엄마 무덤에도 갔다 오고, ‘대마불사주’도 자랑했다.

아직 좀 일렀지만, 술은 잘 익어가고 있었다.

 

손님 접대할 음식이 아무 것도 없어 현감독 일행과 읍내에 나가야 했다.

‘정선아리랑시장'에서 곤드레 밥에다 모듬전까지 시켜 먹었다.

맛있게 먹었으나, 밥값을 손님이 계산해버렸네.

 

식당에서 일어났으나, 일하러가기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아무래도 만지산에 다시 한 번 와야 할 것 같았다.

모처럼 정영신씨도 왔는데, 힘들게 할 수야 없지 않은가?

시름시름 운전해 녹번동에 도착하니, 오후 아홉시가 가까웠다.

 

그런데, 짐 내리러 자동차 트렁크를 열어보니 술 냄새가 진동을 한다.

술 항아리가 넘어져 굴러 다니다, 숨구멍이 열려버린 것이다.

한 말이나 되는 술을 다 쏟아냈는데, 진한 술 냄새에 어질 어질했다.

 

정영신씨가 어디서 소독약 냄새가 난다고 한 이유를 알겠더라.

차가 취했는지, 차도 왔다 갔다 했다는 증언도 뒤따랐다.

그 술에 들어 간 공력이 얼마며, 또 돈은 얼마나 들어갔나?

 

보조타이어 탱크에도 흥건히 고여 있어, 퍼 마시고 싶더라니까.

나야 안 마시면 그만이지만 맛보여주겠다고 떠벌린 약속은 어쩔거냐?

정영신씨는 새 술로 우려내라지만, 꼴도 보기 싫었다.

 

술만 버렸으면 모르겠으나, 수확한 농작물까지 술에 취해 버렸다.

모든 걸 자제하라는 계시로 받아들였으나, 기분 좆 같았다.

내년에는 일체의 농사를 짓지 않고 땅에 휴식년을 줄 생각이다.

 

길에 쏟아 붓는 기름 값도 만만찮지만, 더 이상 힘들어 못 다니겠다.

하는 일에나 집중해야겠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새벽길을 나서다보면 가끔 꿈길 같은 아름다운 풍경과 부딪히게 된다.

 

이십 여 년 동안 정선 갈 때마다 양평으로 가는 국도만 이용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고속도로 통행료를 아끼려는 생각도 있지만, 주변 풍경과 대면하는 즐거움이 더 크다.

 

기온이 갑자기 내려가는 날엔 양수리쯤에서 만나는 물안개가 장관을 이룬다.

안흥 매화산 능선 따라 몰려다니는 구름은 가보지 못한 무릉도원을 무색케 한다.

 

절경의 마지막 코스는 정선 광하리에서 귤암리로 들어가는 강변길이다.

구불구불 조양강변과 만지산 수리봉은 빼 놓을 수 없는 절경이다.

 

자연이 연출한 뜻밖의 비경들은 보는 것만도 감격스럽다.

날씨의 변화가 클수록 행복의 선물 보따리도 늘어난다.

 

혼자 보기 아까워 카메라를 꺼내지만, 위험할 때도 있다.

음주운전보다 더 위험한 줄 알지만, 잘 안 고쳐진다.

 

만지산으로 접어더니 길가의 코스모스가 하늘하늘 반겨준다.

 

가을만 되면 우리 집 마당을 뒤덮었던 코스모스는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

강가에는 없던 코스모스가 핀 걸보니, 물이 그리워 도망쳐 왔나보다.

 

사진, 글 / 조문호

 

정선 만지산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간밤의 폭우로 강물이 넘쳐 다리가 물에 잠겨버렸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잠수교라 비가 조금만 많이 와도 다리를 건너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높은 다리를 만든 다음부터는 다리가 잠겨 고립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은 일이다.

 

10년 전에는 정선 읍내 장 보러 갔다 오니, 그 사이에 강변길이 침수되어

이틀 동안 정선읍내 여관에서 물 빠지기만 기다렸던 때도 있었다.

물가에 산다는 것이 결코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오래전에는 옛 귤암분교를 빌려 레프팅업을 운영하던 외지인이 갑자기 물이 불어나자

 서둘러 다리를 건너다 차가 물에 떠밀려 가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

 산길로 돌아 갈 수도 있었는데, 무엇이 급해 목숨까지 버렸는지 모르겠다.

 

나 역시 물이 빠지도록 집에서 기다리면 되겠지만,

이튿날이 생일이라 아침식사를 같이 하자는 정영신씨의 약속을 지켜야 했다.

이틀 전부터 구름이 오락가락하며 뜸을 들이더니, 엄청난 폭우를 쏟아 부었다.

 

윗만지산 중턱에 있는 우리 집은 사방이 산으로 가려있어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다.

20여 년 동안 살며 한 번도 폭우나 태풍 피해를 입은 적이 없었다.

 

2002년 8월 태풍 루사가 몰아 닥쳤을 땐, 이변도 있었다.

한 밤 중에 산에서 돌이 굴러 부딪히는 소리가 대포 터지는 소리를 방불케 했다.

무서워 꼼짝도 못하고 밤을 지샜는데, 새벽에 나가보니

서낭당 앞 공터가 폭격을 맞은 듯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돌덩이가 개울과 도로 따라 굴러 우리 집 주변은 아무 피해가 없었다.

 

10년 전에는 스님 한 분이 찾아와 집 터에 절을 짓겠다며 땅을 팔라고 종용한 적도 있었다.

풍수지리적 여건이 자기가 찾던 곳이라지만, 살고 있는 집을 팔수야 없지 않은가?

아마 명당인 것을 알아본 듯 했다.

 

첫날은 비 때문에 일을 못하고, 둘째 날은 땅이 질퍽거려 일을 못했다.

방안에서 혼자 노닥거리려니 무료해 미칠 지경이었다.

만지산에는 티브이도 인터넷도 없어 책 볼일 밖에 없는데,

요즘은 시력에 문제가 생겨, 책도 오래보지 못한다.

 

무료한 마음을 아는듯, 아랫만지 사는 최연규씨가 찾아왔다.

집에 술안주가 없는 것을 눈치 챘는지, 윤인숙씨가 사는 옆집으로 오라고 했다.

술 마시러 온 것이 아니라, 술꾼을 모으러 온 것 같았다.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자기 집으로 가자는 것이다.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차를 타고 아랫만지로 넘어갔다.

아랫만지 가는 도로도 물에 잠겼으나 사륜구동이라 산길을 넘어갈 수 있었다.

아랫만지 아낙들이 물 구경하느라 입구까지 나와 있었다.

 

최연규씨 댁은 농지가 많은 대농이라 일반 농작물만 아니라 사과나 배 등 과일도 없는 것이 없다.

소도 여러 마리 키우는데, 그 많은 일을 두 내외가 맡아, 농사철에는 한가하게 만나기도 쉽지 않다.

얼마나 부지런한지 모든 농작물이 풍작이었다. 고추도 과일도 주렁주렁 달렸다.

 

그 날 아낙들은 깻잎을 땄지만, 남정네는 냉동실에 있는 홍어를 안주로 술을 마셨다.

홍어가 부족한지, 이번엔 매운탕 끓인다며 물고기 잡으러 가자는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물이 넘쳐 고립되면 항상 즐기는 놀이지만, 대개 조그만 피라미들만 잡힌다.

그물 채를 급조하여 물가로 나가보니, 아까보다는 물이 많이 빠져 있었다.

강변길 일부가 모습을 드러냈으나, 다리는 그 때까지 형체도 보이지 않았다.

 

길가에 심어 둔 농작물들은 휩쓸렸고, 떠내려 온 쓰레기들만 나무에 엉켜 붙어 있었다.

쓰레기 더미에는 고구마가 능쿨채 떠내려 와 걸려 있기도 했다.

밤 늦게는 물이 빠져 다리를 건널 수 있을 것 같아, 자리를 슬쩍 피해버렸다.

고기를 잡은 후 계속 술을 마신다면 나중에 출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술을 깨기 위해 밭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옆집의 윤인숙씨가 데리러 왔다. .

손사래를 친 후, 밤 열시쯤 출발해 보니 길가의 물은 빠졌으나 진흙 투성이었다.

 미끄러운 길을 힘들게 뚫고 나갔으나, 다리가 막혀있었다.

 

다리에 물은 남았지만 갈 수는 있었는데, 떠내려 온 나무둥치가 다리 중턱을 가로막았다.

늦은 시간이라 이웃의 도움은 물론 기계 톱도 빌릴 수 없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정영신씨에게 전화 걸어 아침 약속을 저녁약속으로 바꾸어야 했다.

 

그러나 돌아 오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진흙에 바퀴가 빠져 계속 헛바퀴를 돌렸다.

핸들을 돌려가며 계속 페달을 밟았더니,

차가 앞으로 가지 않고 옆으로 미끄러지며, 뒷 범퍼가 돌벽을 치고 빠져 나왔다.

범퍼 부딪히는 소리가 가볍기에 확인해 보지도 않고 돌아 와 버렸다.

 

그 이튿 날은 새벽부터 일어나 열무도 솎아내고

지난번에 수확하고 남겨 둔 옥수수대와 무성한 잡초들도 제거했다.

마른 땅이라면 옥수수뿌리는 괭이로 캐야 겠지만, 땅이 질어 손으로 뽑기 시작했는데,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새벽부터 시작한 일이 점심 때가 지나서야 끝났다.

 

그 때사 시장기가 몰려오기 시작했는데, 허리가 아파 일어서지도 못하겠더라.

한번 일에 빠지면 힘든 것조차 잊어버리는, 고질병이 아닐 수 없다.

정선만 갔다 오면 그 다음 날 곤욕을 치루지만 잘 고쳐지지 않는다.

 

라면으로 허기를 메운 뒤, 수확한 농작물과 짐을 싣다보니, 차가 엉망진창이었다. 

간밤에 진흙탕에서 씨름하였으니 깨끗할리야 없지만, 뒷 범퍼 모서리가 쩍 벌어져 있었다.

 

얼마 전에도 문짝이 망가져 중고 문짝을 60만원이나 들여 교체했는데,

차주인 정영신씨에게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기초생활수급비 받아, 정선 오가는 기름 값과 차 유지비에 대부분 소모하는 편인데,

더 이상 수리할 여력이 없어 난감했다.

 

부득이 내년에는 땅도 쉴 겸, 농사를 짓지 않을 생각을 했다.

길에 돈 뿌려가며 농사 지어도 모종 값과 비료 값이면 사먹고도 남는다.

 

정선 만지산에서 출발한 시간은 오후1시 무렵이었느데,

언제 물난리가 났느냐는 듯, 도로와 다리는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너무 무리하게 일해 손가락은 깨졌고 팔목은 삐었지만, 운전을 마다 할 수 없었다.

 

오다보니, 강변 도로에 아스팔트 조각들이 떠 내려와 쌓여 있었다.

몇 달 전에 시멘트 포장이 된 산길을 모두 아스팔트로 덧 입혔더라.

낭비가 심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좋아하는 주민도 있어 입을 다물었는데,

이게 토목업자와 군의원의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멀쩡한 포장길에 왜 날림공사 하느라 돈을 쏟아 붓는지 모르겠다.

정선군은 돈이 남아돌아 탈이다.

 

매번 정선 갈 때는 새벽에 출발하고, 올 때는 한 밤중에 출발한다.

그래서 자동차가 정체를 한 번도 겪지 않았는데,

이 날은 하는 수 없이 한 낮에 출발하여 엄청난 곤욕을 치루었다.

양평을 경유하는 국도는 늦어도 네 시간이면 충분한데, 이 날은 일곱시간 걸렸다.

 

양평부터 밀리기 시작하더니, 퇴근 시간과 마주친 서울에서는 다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저녁식사를 일찍하는 정영신씨가 기다려줄지 걱정했으나 기우에 불과했다. 

밥상은 차려 놓고, 아들 햇님이 내외와 손녀 하랑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좀 있으니 가족들이 나타났는데, 예쁜 하랑이 덕분에 지친 피로도 잊어버렸다.

생일케익까지 사와 복에 없는 생일잔치까지 열게 된 것이다.

 

생일밥 먹기가 이리 힘들다면, 다시는 생일을 맞지 않으리...

 

사진, 글 / 조문호

 

역병으로 사람 만나지 말라는 엄포에 만지산에 격리되었다.

말 안 듣기로 소문난 놈이 무서워서 격리된 게 아니라 그냥 쉬고 싶었다.

정선 집은 인터넷이 되지 않아 이참에 마약 같은 페북도 들락거리지 않을 생각이다.

단지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는 정선 읍내 피시방에 들려 가끔 소식이나 전할 작정이다.

 

그래도 동자동에서 하는 일이 있어 매주 화요일은 서울나들이를 해야 하기에,

그 때 사모님께 문안드리기로 했다. 사모님께서 부르면 언제나 달려 갈 기사의 각오는 되어있다.

확실한 유배도 격리도 아닌, 길거리에 돈만 뿌리게 된 셈이다.

머지않아 정선 집을 정리할 생각으로, 긴 세월의 아쉬움이 한 몫 한 것이다.

 

이번에는 지난 금요일에 들어 와 이틀 동안 밀린 일하느라 똥오줌을 못 가렸다.

지루한 장마가 계속된 한 달 넘게 못 왔더니 집구석이 엉망진창이었다.

농작물인지 잡초인지 도저히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긴 장마로 방안이 눅눅해 군불을 좀 지폈더니 완전 찜질방이 되어버렸다.

방문을 열어놓은 채 발가벗고 잤더니 새벽녘에는 추워서 오들오들 떨어야 했다.

콧물이 쉼 없이 나오는 걸 보니 개도 걸리지 않는다는 여름 감기에 단단히 걸린 것 같다.

 

장보러 정선 읍내 갔다 오는 길에 ‘귤암리캠핑장’에 잠시 들렸다.

그 앞을 수시로 들락거렸지만, 20년 만에 처음 들린다면 믿겠는가?

 

옛 ‘귤암분교’ 자리인 그곳에서 ‘동강변 주민을 위한 굿마당’을 연 후 처음인데 많이 바뀌었더라.

성수기인데도 캠핑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코로나 때문인지 장마 때문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하루 이용료가 4만-5만원이란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날씨마저 흐렸다 개였다 내 마음처럼 변덕을 부렸다.

내일이 화요일이라 사모님께 상납할 옥수수도 따고 호박도 몇 덩이 차에 실었다.

더 중요한 것은 따끈따끈한 오빠의 마음을 실었다는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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