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신 작가의 철칙은 장터에서 절대 카메라를 안 꺼내고, 항상 반나절은 할머니들과 이야기 나누고 사귀는 데 공들인다는 것이다. 사투리를 써서 외지사람이 아닌 것처럼 다가가는 것이 그 비법이라고 했다. 할머니가 바닥에 앉아 있으면 자신도 바닥에 앉아 눈높이를 맞추고 할머니 말씀을 귀담아 들어 배우러 온 아랫사람임을 온몸으로 표현한다고 했다. 그렇게 다가가니 할머니들은 하나만 물어봐도 아주 상세하게 알려준다고 했다.

 

 

오일장 600곳 농촌여성의 삶 사진에 담다

어르신 우울증·치매 예방하는 장터의 순기능

고령사회, 귀농귀촌인과 농촌공동체 되살려야

 

정영신

농촌 할머니 희로애락 카메라에 담다

1958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난 정영신 작가는 어려서부터 소설가를 꿈꿨다. 신춘문예에 도전했지만 고배를 마시면서, 많은 사람을 관찰할 수 있고 토속적인 말을 들을 수 있는 우리나라의 600여 개 오일장을 찾아다녔다.

“카메라가방에 사탕과 담배만 넣어 다녔어요. 사탕과 담배만 있으면 장터 사람 모두와 친구가 됐죠. 장터에서 무슨 물건 팔고, 어디 구역 사람이 담배를 좋아하는지 사탕을 좋아하는지 알게 됐죠.”

정영신씨는 장터에 가면 할머니들에게 살갑게 다가가 말을 걸고, 점심을 먹고 있으면 음식을 같이 먹으면서 인연을 만들어나간다고 했다. 할머니들과 친해지면 농장과 집에 놀러가면서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다양한 정보를 수집한다고 했다.

“할머니 얼굴에는 희로애락이 다 담겨 있어요. 대화해보면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살아온 이야기를 하고 자식자랑, 동네자랑을 해주시죠. 삶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들어있는 말속에는 할머니들의 지혜가 들어있습니다.”

장터사람들을 사귀어 놓고 나중에서야 카메라로 사진을 촬영하니 정영신씨의 사진들은 하나 같이 인물의 표정과 행동이 자연스럽다. 지난 9월 정영신씨는 장터에서의 기록을 모아 ‘어머니의 땅’ 사진전을 개최하고 동명의 사진집을 냈다.

그러면서 정영신씨는 청년들이 도서관에서 공부만 하지 말고 동네 시장에 가서 할머니 손을 잡고 말을 붙여보는 것을 시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문학을 하기 위해 많은 할머니와 대화해본 결과, 책보다 더 많은 것을 할머니에게서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또 할머니들도 자신을 아는 척 하고, 모르는 사람이어도 다가와 관심 가져주면 참 좋아하더라고 정영신씨는 말했다.

장터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장소

1980년대 장터는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보다 구경 오는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한다.

“장 중에 장인 난장을 많이 찾아다녔어요, 마을에서 농사짓는 할머니가 하루 팔아서 재밌을 양 만큼만, 버스 타고 이동할 수 있는 무게만큼만 보따리에 갖고 온답니다. 욕심 없이 장에 오니까 한 번에 많이 파는 것도 싫어해요. 사람이 그리워 장에 나왔는데 좌판에 아무것도 없이 어떻게 앉아 있냐고 그래요. 뭐라도 펴놔야 사람들이 구경하고 당신도 사람 구경하지 않겠냐 하십니다.”

할머니들은 집에만 있으면 다른 생각 들고, 텔레비전만 보게 되면 병나겠어서 적은 돈을 벌어도 장터에서 물건 파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고 한다.

“장터는 농촌여성들이 왕이에요. 남자들은 차 안에만 들어가 있죠. 그래서 할머니들이 장에 나오는 걸 더 좋아하는 것 아닐까요? 집에만 있으면 남편 군소리만 듣는데, 장터에 나오면 내 세상이 되니까요.”

'어머니의 땅' 사진집 표지/ 눈빛출판사/ 가격35,000원

 

농촌여성 이름 알려 성평등 의식 높여야

할머니들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서비스 마인드도 남성에 비해 어렵지 않게 표현한다. 손님들에게는 남성보다는 아직 여성에게 친절을 기대하고, 물건을 사고 싶은 심리가 깔려있다는 것이다. 장터에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사람도 여성이고, 농촌에서도 농사일을 연결해주는 사람은 여성인데 어째서 여성의 지위는 남성과 공평하지 않은지 정영신씨는 의문을 품었다.

농촌 현실이 바뀌려면 정영신씨는 농사일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농촌여성들이 당당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자신의 물건을 자신 있게 판매할 때 구매하는 손님도 즐겁다고 했다.

“장터에 직접 도토리묵을 쒀서 판매하는 자매 할머니를 만났어요. 가져오자마자 순식간에 동이 나더라고요. 도토리묵 이름은 뭐냐고 물었더니 그냥 우리가 만들었다 말하고 끝이었어요. 맛이 좋으니까 인기리에 팔리는 건데, 두 사람의 이름 붙여서 도토리묵으로 팔면 손님들도 호칭 생겨서 더 애정을 가질 거라고 말했어요. 농사에 가치를 높이려면 자신만의 브랜드가 있어야 진정한 자신의 상품이 되는 거니까요.”

정영신씨는 장터에서 농산물 팔 때도 지역명, 농장이름 붙이지 말고, 꼭 자신의 이름을 붙여야 더 즐겁게 동력을 얻을 수 있다고 방법을 소개했다.

귀농귀촌인과 소통해 농촌 고령화 극복해야

정영신씨는 앞으로는 과학이 농업에 접목되면서 농사짓는 사람이 최고인 세상이 될 거라고 봤다.

“귀농하는 사람들은 더 여유 있게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농촌으로 옵니다. 귀농인들은 농사지으면서도 사람들 불러서 팜파티 열고 세미나 갖고 시낭송을 해요. 기존 농사짓던 원주민들은 바깥사람들과 자유롭게 소통하는 농촌의 변화를 버거워 해요. 여러 이유가 갈등이 돼 귀농귀촌인을 배척합니다.”

자연 속에 살면서 농산물을 가꾸는 농업인들이 왜 행복하다는 말 대신 농사가 힘들고 사는 게 어렵다는 말을 많이 하는지, 행복하다고 말하는 농업인은 없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농업인의 목소리가 장터에서 자주 들려온다고 했다.

“옛날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농장에 가서 일손 보태며 두레로, 품앗이로 농사지으면서 시름을 잊었죠. 요즘은 할머니들이 혼자 농사짓고 혼자 논다고 말하세요. 농촌이 단절돼 갈수록 남편만 찾고, 자녀들에게 볼멘소리를 하게 되는 환경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정영신씨는 농촌이 고령화 되면서 전통시장이 위기라고 했다. 읍면에서 열리는 장터에 가면 할머니들이 “우리 죽으면 장도 없어질 것”이라고 걱정한다고 했다.

대형마트 확산에 전통시장 지키려면…

농촌의 문제는 산적해있지만 그럼에도 전통시장은 계속 이어져야한다고 정영신씨는 말했다.

“사람들은 편리하다는 이유로 대형마트만 이용해서 장터에 갈 때마다 할머니들은 마트가 생겨서 우리 같은 사람들은 장사를 못한다고 하소연하세요.”

1만 원 어치만 사도 배송을 해주는데 할머니들은 물건을 어떻게 팔아야 되나 고민이 많다고 했다.

“그럼에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이뤄지는 거래를 장터는 끝까지 지키려고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1000원짜리 머리빗을 사도 장터에 단골집만 찾는 손님을 맞이할 때, 하나를 사더라도 찾아오는 손님이 있는데 할머니들은 어떻게 장을 안 나오겠냐며 말하세요. 자본주의 사회여도 장터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정이 흐르는 장소로, 물건만 바뀔 뿐 장터를 이용하는 마음은 변치 않을 겁니다.”

 

농촌여성신문 / 민동주기자

 

'코리안 타임스' '어머니의 땅' 인터뷰 기사

[출처] 인터뷰 – 정영신 사진작가 “장터는 사람과 정이 흐르는 삶의 현장”|작성자 인사동 이야기

전국의 오일장 풍경 담는 ‘장돌뱅이 사진가’ 정영신씨

 

[경향신문] 문주영 기자 mooni@kyunghyang.com

 

34년간 시골장을 취재해온 사진작가 정영신씨는 “시골장은 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온 소중한 문화유산”이라고 말했다. 김창길 기자

 

 

희로애락 고스란히 담긴 박물관
그 매력에 빠져 ‘34년 한 우물’
지역 유산·풍속사 등 곁들여
문화관광의 허브 가능성 타진

 

담양장에는 대나무로 만든 의자부터 침대까지 100가지가 넘는 죽물(竹物)이 넘쳐난다. 김장철이면 토굴 새우젓이 유명한 홍성 광천장으로 전국에서 인파가 몰려들고, 겨울철 구례 산동장엔 산수유 열매로 장 안이 온통 새빨갛다.

스스로를 ‘장돌뱅이 사진가’라고 칭한 정영신씨(62)는 “서로 다른 모습의 시골장은 사람들의 삶을 진열하는 창”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지난 34년간 오로지 시골장터만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글을 써온 작가다. 그의 발길이 닿은 전국의 장터만 640여개에 이른다. 전작 <시골 장터이야기> <한국의 장터> 등으로 주목받았던 정씨가 최근 저서 <장에 가자: 시골장터에서 문화유산으로>(이숲)를 출간했다

 

 

<장에 가자>의 책표지.

 

 

지난 2일 서울 인사동에서 만난 그는 “전작들이 시골장에 대해서만 다뤘다면 이번 책은 23곳의 시골장들을 그 지역의 문화유산·유적과 함께 소개하는 한편 장터가 문화관광의 허브가 될 가능성을 타진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정씨가 오일장이라고 불리는 시골장에 매료된 것은 1986년 즈음이다. 소설가를 꿈꿨던 그는 신춘문예에 몇 차례 응모했다가 고배를 마신 뒤 인간사를 연구하고자 시골장을 찾았다.

1년간 장터를 돌아다닌 후 장터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너무 재밌어 그 변화를 사진으로 기록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정씨는 말했다.

 

 

2011년 충남 예산장

 

 

“당시는 우리나라 경제가 급속도로 변화하면서 장도 엄청나게 변화를 겪던 시기였어요. 장터의 일상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니 시대상의 변화가 읽혀지고 인류사의 풍경이 보였어요. 이때부터 장터의 매력에 빠져 한 우물만 팠습니다.”

전남 함평에서 태어난 그에게 시골장은 ‘그리움’과 ‘따뜻함’이었다고 한다. 어릴 적 장날이면 장에서 친구들과 고무줄놀이를 하고, 신기한 동물들을 구경하고, 밥집을 하는 친구네로 놀러가곤 했다.

전국 장터를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엄마들을 만나고 헤어졌다. 10여년간 알고 지낸 충북 영동장의 ‘엄마’는 2008년 다시 그곳을 찾았을 때 더 이상 안 계셨다. 정씨는 “그날 사진 한 장 못 찍고 온종일 울다가 집으로 돌아왔다”고 회상했다.

 

 

2012년 경남 김해 장유장

 

 

아울러 시골장은 ‘희로애락’과 ‘숭고함’이다. 정씨는 “아흔이 넘은 할매가 아픈 남편을 리어카에 싣고 와 옆에서 간병하면서 장사하는 모습 등을 보면 삶의 위대함마저 느껴졌다”고 말했다.

시골장에서 문화유산의 흔적을 찾아보려는 시도는 공교롭게도 시골장의 쇠락 때문이다. 유통산업의 변화와 농촌사회의 고령화 등으로 시골장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정씨는 “시골장은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며 “시장의 현대화 개선도 필요하지만 장터에 그 지역 문화유산과 풍속사를 곁들여서 문화의 옷을 입혀주면 장터를 찾는 사람들이 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2012년 전남 곡성 옥과장

 

 

선조의 거울이자 아이들의 미래
코로나에 밀려 더 빨리 사라질까
마음도 발길도 급해집니다

 

그는 향후 기회가 되면 시골장들을 지역별로 묶어 책으로 내고 싶다고 밝혔다. 전남 강진 등 시골 농가에서 농부들과 함께 거주하면서 봄부터 가을까지 농작물이 재배돼 장터에 나오는 일련의 과정을 기록하는 작업도 현재 진행 중이다.

“장터는 우리 선조의 거울이자 박물관이고 아이들의 미래예요. 스러져가는 시골장들이 코로나19 대유행 때문에 더 빨리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이어서 제 마음이 더 다급해집니다.”

 

오는 11~20일 서울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사진전 ‘장에 가자’가 열린다. 정씨가 찍은 77점의 장터 사진들이 전시된다.


[농민신문 /2019.4.22]





필자는 전라도 땅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촌사람이다. 어렸을 적 장날만 되면 온 동네가 잔칫날처럼 들썩거렸다. 삼식이 아버지 소달구지가 동구 밖에 다다르면 장에 갈 여인네들이 이고 나온 보따리가 하나둘 실렸다. 장에 갈 때는 가장 좋은 옷을 찾아 입었다. 장날은 귀한 날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안동 아재가 사방이 초록색으로 뒤덮인 길을 휘적휘적 걸어가던 모습은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내 기억 속에 아련히 남아 있다.

장터는 지역경제의 모세혈관이다. 사람과 사람, 지역과 지역, 정보와 정보가 이어지는 소통의 공간이다. 또 우리네 가치관과 풍속이 만들어지고 시간과 공간이 살아 있는 현장이자 농촌문화가 생동하는 고향이 바로 장터다. 지금도 시골장터에 가면 고향의 냄새와 맛, 소리와 감촉까지 느낄 수 있다.

오일장은 농산물 유통과 지역민들의 정을 잇는 기다림의 틀이기도 하다. 사람과 사람, 공간과 공간을 하나로 묶는 끈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예전엔 이웃이나 일가가 만나는 장소였고 동네 축제를 여는 마당이었다. 물건을 사고파는 유통이라는 기본적인 기능은 물론이다. 대중 집회를 통해 민중의 여론을 형성하기도 했다.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인문학의 보고였던 셈이다.

우리나라 시장의 역사를 보면 고려시대까지는 교통의 요충지에서 물자를 교환하고 정보를 나누는 곳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사교·오락, 정치적 기능과 함께 농촌을 계몽하는 역할까지 했다. 이에 따라 장터는 민초들의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농민들의 소득증대에도 큰 도움을 줬다. 일제강점기 에는 독립운동을 위한 정치적 집회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렇듯 장터는 역사적인 장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을 뿐만 아니라 볼거리·즐길거리·먹거리가 함께 어우러진 지역문화의 소통공간이었다.

이런 장터가 최근 쇠퇴해가고 있어 아쉬움이 앞선다. 장터문화에 활력을 불어넣으려면 해당 지역의 고유문화를 앞세워 사람과 사람을 잇는 고리를 만들어야 한다. 여태껏 장마당에서의 활력은 그 지역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왔다. 장터의 주인은 농민이다. 농민들의 생계수단으로서의 장터를 넘어 생산하는 농산품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하는 환경변화가 우선돼야 한다. 그리고 지역별 농산물은 그곳의 장터를 가야 좋은 걸 구입할 수 있다는 신뢰를 심어줘야 한다.

시골장터에는 이 시대 마지막 역사의 혼이 살아 있다. 따라서 시골장터는 두꺼운 책처럼 지혜가 들어 있는 살아 있는 박물관이며, 선조가 살아온 삶의 거울이다. 앞으로 장터는 인정이 거래되는 텃밭이 돼야 하고, 장날은 지역문화를 꽃피우는 축젯날이 돼야 한다. 인정을 꽃피우는 난장에서 농민들이 애지중지 기른 농산물을 사고파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정영신 사진가는…
1958년 전남 함평 출생의 사진가이자 소설가. 30년 넘도록 전국의 시골장터를 기록해오고 있다. 펴낸 책으로는 <시골 장터 이야기>(2002, 진선출판사), <한국의 장터>(2012, 눈빛), <전국 5일장 순례기>(2015, 눈빛) 등이 있다.



 

할 일 없이 인터넷에 기웃거리다 눈이 번쩍 뜨이는 사진을 만났다.

페이스북 ‘Designersparty’에 올라온 구한말 사진들인데,

그 중에는 장시의 원조로 볼 수 있는 장터사진들이 있었다.

    


 



그동안 장터 사진가 정영신씨 따라 다니다보니,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장터 풍정에 속이 뒤집혔다.

세월 따라 바뀌는 것이야 어쩔 수 없으나.

불과 20-30년 전의 장옥조차 볼 수 없게 되었다.



 


정부의 장터 살리자는 태풍에 순식간에 다 날아 가버린 것이다.

최소한 한 곳은 남겨야 하는데, 씨를 말려버렸다.

이젠 오래된 장터풍경은 정영신씨 사진으로만 볼 수 있게 되었다.

장터박물관이라도 만들어, 한 군데라도 본래의 기능을 이어 가야 한다.



    

 

머지않아 사람 만나 물건 사고 파는 시대는 끝날 것 같다.

이미 인터넷으로 돈과 물건만 오가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정은 커녕, 사람조차 만나지 않게 되었으니, 삭막할 뿐이다.

재미없는 세상일수록, 그 때가 그리울 것이다.



 


퍼 옮긴 사진들을 한 번 살펴보라.

밥집 툇마루에 앉아 밥 먹는 아낙네도 보이고,

갓 만드는 사람보다, 사진기 처다 보는 애들 눈길이 더 낯설다.





소등에 쌓아 올린 장작더미나, 옹기장수 등짐은 조각 작품처럼 멋지다.

다들 가난은 몸에 베었으나, 정은 흘러 넘쳤을 것 같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그리움에 배가 고프다.



 

 

남대문시장의 전신인 ‘창내장과 광화문 비각 앞의 장작 시장도 있고, 대구장, 통영장, 함흥 장터 등 대개가 1898년도부터 1937년 사이에 기록된 장터풍경이다. 그러나 대부분 기록한 사진가가 밝혀지지 않았다. 그 중에는 사진가 게리 스티븐스를 비롯하여 호주 크리스찬리뷰 발행인 권순형씨, 그리고 캐나다 출신의 Macrae DM 선교사. George Rose 선교사가 찍은 사진은 네 장 뿐이다.

이 사진은 Designersparty에서 스크랩했으나, 포토샵에서 조금 다듬었다.

 
















오랜만에 정영신씨와 함께 34일의 장터 여행길에 나섰다.

동자동에 들어 간 후로 숙박을 동반한 여행은 처음이니, 일 년도 더 된 여행이다.

정영신씨는 그동안 대중교통으로 가는 당일치기로 다녔다.

서로 바삐 살아 시간 맞추기도 어려웠지만, 솔직히 경제적 여력이 없는 것도 한몫했다.


얼마 전 황규태선생께서 동자동에서 고생하는 것을 걱정해 침낭 사라며 주셨는데,

필요 없는 침낭보다 여행경비가 더 절실했다.

한편으론 송구스럽지만 염려하신 것처럼 몸도 마음도 춥지 않으니 염려마시길 바라고,

스스로를 충전할 수 있는 여행이 필요했으니, 양해해 주시리라 믿는다.



돌이켜보니, 10여년이 넘도록 장터를 엄청 쫓아 다녔다.

한 번 떠나면 34일이나 45일 일정으로 떠났으니, 필요경비도 만만찮았다.

하루 밥 한 끼와 군것질로 때우고 싸구려 여관을 전전하며 장돌뱅이 노릇을 했는데,

제일 두려운 것이 기름 값과 통행료였다.

한 참 다닐 때만 해도 경유 값은 또 얼마나 뛰는지, 기름 싼 집 찾느라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녔다.

벌이도 없는 둘이서 길에 돈을 뿌리고 다녔으니, 신용불량자 딱지를 면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사라지기 직전의 장터는 많이 기록해 두었으니, 후회는 없다.


 

둘이서 주구장천 떠 돌아다녔으나, 신기하게도 의견마찰이나 다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생각이 같고 목적이 같으니, 감정의 불씨 같은 건 끼일 틈이 없었다.

그때 다진 동료애가 부부로서의 애정보다 더한 신뢰감을 갖게 된 동기일 것이다.

그토록 금실이 돈독했으나, 난데없는 이혼 소동을 벌여 욕도 많이 얻어먹었다

우리에겐 법적인 부부관계 보다 일이 더 중요했으나, 다들 용납하지 않았다.

합의 이혼에 도장 찍을 때만해도 서로 동의했으나,

주위의 입방아에 정영신씨 마음을 많이 다쳤던 것 같다.


 

그러나 한 해를 지나며 모든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함께 생활할 때 보다 궁핍함도 좀 덜었지만, 동자동 작업까지 진척이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어차피 한 사람은 장터에서 죽고, 한 사람은 쪽방에서 죽을 팔자지만,

살아있는 동안 서로 협력하니, 부부연이나 서로의 일에 하등의 문제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장터여행 이야기도 산더미 같은데, 사적인 이바구가 너무 길어버렸다.


 

지난 4일 출발한 장터여행의 첫 목적지는 함안 군북장이었다.

그 많은 장에서 하필이면 군북장을 제일 먼저 택한 것은, 몇 년 전 남았던 아쉬움도 있지만,

그날 저녁 마산에서 환경사진가 조성제씨의 전시개막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군복장에는 오후 세시 쯤 도착했는데, 이미 파장이 되어 있었다.


 

장돌뱅이 세 사람만 남아 짐을 싸는  흔한 풍경이지만, 여기도 파리만 날린 장인 것 같다.

보따리 보따리에 싼 짐이 몇 십개나 되지만,내일을 기약하는 듯 했다.

옷 파는 박씨에게 얼마나 팔았냐고 물었더니, 다섯 사람 받아 사만원 어치 팔았단다.

사만원 모두 남아도 두 내외 점심값에 기름 값 제하면 아무 것도 없겠지만, 안달하지 않았다.

실속 없는 행상이지만, 행여 단골손님들 헛걸음시킬까 걱정되어 나올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한편으론 부초처럼 떠도는 장돌뱅이 삶 자체에 대한 애착인 듯 여겨지기도 했으나,

이것이 사라져가는 오일장의 현실인 것을 어쩌랴!



 

차를 몰아 조성제씨 전시가 열리는 마산 경남은행 본점의 갤러리로 옮겼더니,

축하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전시장에는 한경호 경남도지사 권한대행에서부터

교육감 등 내노라 하는 명사들과 기업인들로 가득했는데, 좀 의외였다.

전시 축하하러 누군들 못 오겠냐마는, 마치 세과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개막식이 끝나고 숙소에서 만난 조성제씨의 이야기를 들으니, 한 편으로 이해가 되었다.

경남은행 갤러리의 큐레이터가 조성제씨 초대전을 추진할 때,

은행의 높은 분들께서 어찌 사진을 초대전으로 하느냐며 문제를 삼았다고 한다.

사진을 우습게 보는데 따른 홧김에, 아는 분들을 대거 초대하였고,

최상의 사진 퀄리티를 만들기 위해 돈도 많이 들었다고 했다.


 

아침 일찍 진해 마천장을 돌아, 내 고향인 창녕 영산장을 찾아갔다.

볼 품 없는 작은 장이지만 어릴 적 추억 따라 구석구석을 찾아 보았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예전 장 모습과는 딴판이었지만,

어린시절의 장터 추억을 더듬어 볼 수 있었다.



애들은 가라~ 일단 한 번 자셔보세요. 소변 보면 변기 나프타린이 튕겨나옵니다

너스레를 떨어대던 약장사 자리도 가보았고,

아버지 심부름에 개장국 사러 다닌 장국밥집이 있던 곳도 가보았다.

국밥집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국 쏟을까 조심스레 걷던 골목길의 정취는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기억을 선명하게 한 것은 넓은 싸전 입구에 선 종대로 불리는 철탑이었다.

한 때 싸이렌을 울리기도 했던 종대의 녹슨 형상만이 옛날 장의 상징인 냥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내 머리에 인식된 장터의 규모보다 훨씬 작게 느껴지는 것은

장터에 빼곡하게 늘어 선 자동차 때문인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들린 고향인지라 영축산 중턱에 있는 대암골 산소에도 가보았다,

제실이 무너져 사라지고 없었는데, 무덤에 계신 아버지의 노여움이 들리는 것 같았다,

몇 년 만에 성묘하는 불효막심에 큰 절 올리며 사죄했다.


 

그 다음에 찾은 장은 합천 초계장이었다.

이 장을 잊을 수 없는 것은, 몇 년 전 병든 남편을 리어커로 모셔 와 장사한 할머니가 궁금해서다.

아픈 사람을 혼자 집에 둘 수 없어 장에서 병 수발들며 장사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돌아가셨는지 걱정되어 인근의 장꾼에게 물었더니, 요즘은 병이 깊어 모셔오지 못하고,

할머니 혼자 나와 한 두 시간만 장사하고 일찍 가셨다고 했다.

장꾼들만 모여 잡담을 날리는 쓸쓸한 장바닥을 돌아보며 자리를 옮겨야 했다.


 

돌고 돌아 찾아간 곳은 전라도 해남이었다.

이장은 큰 읍장이지만, 새벽에 서는 고도리장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해남에 도착하니 어두워져 식당부터 들려야 했는데,

정영신씨가 오래전의 기억을 더듬어 천일식당으로 가자고 했다.

떡갈비로 유명한 집이라지만, 밥값이 장난이 아니었다.

일인당 28,000원이라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몇 일 후에 있을 자신의 생일을 앞당기자는 말에 퍼져 않았다.


 

복에 없는 과분한 식사를 한 덕에 잠은 싸구려 여관에서 자야했다.

두 노인이 운영하는 여관이었는데,

청소한지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방바닥은 머리카락 투성이고,

또 여름용 홑이불은 얼마나 지저분한지 얼굴에 닿을까 염려되었다.


 

그 이튿날은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 고도리장으로 나갔으나

추운 겨울이라 좀 늦게 선다기에, 해남시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장마당은 이른 아침부터 몰려나온 장꾼들로 시끌벅적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장꾼들의 모습에,

전쟁터인지 장터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자리다툼에 욕지걸이를 퍼 부어며 싸우는 모습에 정신이 번쩍들었다.

도대체 그 놈의 돈이 무슨 요물인지, 억장이 무너졌.

돈에 눈이 멀어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이게 과연 사람 사는 것인가?


 

바닷가에 있는 장흥 회진장으로 이동하였는데, 해변은 조그만 항구로 변해있었다.

관광객을 염두에 둔 듯한 공연장과 낯선 건물이 들어서 있었지만,

손님이라고는 동네사람들 뿐이었다.



그런데 정영신씨가 팔다 남은 병어와 조기새끼를 엄청 싸게 사는 횡재를 했다.

직접 잡은 큰 생선은 경매에 넘기고 잔챙이만 팔았는데, 삼 만원에 한 광주리였다.

동네 사람이 사러왔으나, 자네는 다음에 줄 테니 서울손님부터 드리자며 아이스박스에 담아주었다.

새끼지만 병어고 조기가 아니던가 한 달 반찬거리는 해결할 듯싶었다.


 

그 이튿날은 장흥 용산장에 들렸다.

말이 장이지 장꾼 두 사람만 나온 썰렁한 장터로 머지않아 사라질 것 같았다.

지난 세월의 이야기나 듣기 위해 장터식당에 들렸다.

식당 주인 백외자씨는 김장하느라 양념을 잔뜩 해두었고,

옆자리는 동네 노인 세분이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나와 비슷한 연배인 것 같아 연세가 어떻게 되었는지 물었더니,

신옥성씨란 분의 나이가 여든 하나란다. 얼굴은 나보다 젊게 보였지만, 열 살이나 많았다.

그러면서 나이란 아무 소용없다며 이웃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06세 된 할머니는 멀쩡한데. 치매 걸려 누워있는 아들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이가 들수록 세월이 총알처럼 빠르다며, 인생은 뜬구름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


 

백반으로 아침 겸 점심식사를 했는데, 밥상은 온통 김치잔치였다.

백김치, 물김치, 갓김치 등 김치만 네 가지가 나왔는데,

금방 버무린 김장김치도 맛있지만, 갓김치가 너무 맛있었다.

식당주인인 백외자씨는 김치가 맛있다는 칭찬에

엄마가 자식에게 싸 주듯 김장김치와 갓김치를 바리바리 싸 주었다.

이걸 어떻게 그냥 가져갈 수 있단 말인가? 문득 두어 달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입맛이 없어 후암시장에 반찬 사러 간 적이 한 번 있었는데,

할머니 한 분이 갓김치를 버무려 팔고 있었다.

맛이나 보게 삼천원치만 달라고 했더니, 오천원 어치도 팔 수 없다며 퇴박 주던 야멸찬 모습이 떠올라서다.

그 김치에 비하면 오만원어치는 족히 될 만한 량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고맙게 생각하고 끝날 일이지만, 야박한 현실에서는 그 자체만으로 감동이다.

김치가 연이 되어 정영신씨와 전화번호를 주고받는 친구사이가 되어버렸다.


 

인근에 있는 장흥 장평장으로 발길을 돌렸는데, 이곳도 장터의 기능을 잃어가고 있었다.

폐가들이 줄지어 있는 걸 보니, 이곳에 곧 토목공사가 벌어질 것 같았다.

사람이 없는 장터에 뭘 만든다고 될리 있겠는가?

괜히 나라 돈 축내어 공무원이나 업자들 잇속 챙기는 일만 만들고 있다.

사라져가는 장터의 종말을 보는 것 같은 안타까움에 촬영여행을 끝냈다.



여기까지 왔으니, 땅끝 마을에 가 보자는 정영신씨의 제안에 또 다른 여행길에 올랐다.

땅끝 마을에 닫기 전에 미황사부터 들렸다.

남해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달마산 서족에 자리한 이 절은

20여 년 전 전국의 절 찍을 때 들린 적이 있으나, 그 때보다 요사채가 많이 늘어난 것 같았다.


 

이절의 창건설화도 재미있다.

돌로 된 배가 포구에 왔는데, 사람들이 다가가면 멀어지고 물러나면 가까이 다가오는 일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의조가 목욕재계하고 맞으니 비로소 배가 포구에 도착했는데,

배에 올라보니 큰 상자 안에 경전과 비로자나불상, 문수보살상, 보현보살상, 나한, 불화 등이 꽉 차 있고,

배 안에 있던 바위를 깨니 검은 황소가 나왔단다.



그날 밤 의조의 꿈에 금의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금강산에 봉안하고자 경전과 불상을 싣고 왔으나 금강산에 절이 가득해 새 절터가 없어 돌아가던 중이라고 했다.

이곳의 지형이 금강산과 비슷하다며, 소 등에 불상과 경전을 싣고 가다 소가 머무는 곳에 절을 지으라" 했단다.

그래서 다음날 소 등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길을 떠났는데, 한 곳에 이르러 소가 크게 울고 드러눕자

그곳에 통교사라는 절을 짓고, 소가 다시 일어나 가다가 마지막으로 머문 곳에 지은 절이 바로 이 절인데,

소의 울음소리가 아름답고, 황금으로 번쩍거리던 금의인의 모습을 기리기 위해 미황사라 했단다.



감로수 한 바가지로 목을 축인 후, 땅끝 마을로 향했다.

몇 년 전 땅끝 마을에 있는 송지장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눈을 맞았던 기억에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땅끝 마을은 백두대간의 시작이자 끝으로 한반도의 기가 가장 많이 뭉친 곳이라

기 좀 받을까 하는 기대도 했다.

마지막 여행지라 정영신씨와 호젓하게 바닷가를 거니는 데이트코스로 정했으나

추위가 분위기를 앞질러 서둘러 끝내야 했다.

서울 돌아 갈 일이 아찔하였으나, 차안에서 데이트한다고 생각하니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았다.


 

땅끝 마을에서 기를 받았는지, 추위 속의 강행군에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맛보는 행복한 여행에 어디 피곤 따위가 감히 넘 볼수 있겠는가?

아무튼, 행복한 장터 여행을 만들어 주신 황규태선생께 감사드린다.

나흘간의 지루한 일기를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게도 감사드리고...

 

사진 : 정영신, 조문호/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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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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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장 기 살리기 운동인 ‘장에 가자’ 인사동 전람회가 이제 후반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동안 우리시장을 사랑하는 관람객들에게 초상사진을 찍어 이메일로 보내드리기로 했으나
작업량이 많아 계속 지연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정리할 틈도 없지만,

찍힌 분들의 성함이 헷갈려 계속 혼돈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인상착의를 대충 기록해 두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네요.

부득이 지난 2일부터 앱숀 휴대용 프린트를 준비해 두고 현장에서 직접 뽑아드리는데,
사진을 받은 모든 분들이 너무 좋아하셔서 일하는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오는 17일까지 이어지는 ‘장에 가자’ 전람회에 들려 좋은 추억을 남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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