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지 한글 문자만을 소재로 작업을 이어 온 금보성씨가 또 다시 인사동에 큰 그림판을 벌였다.

 

그동안 62회의 개인전을 가진바 있는 금보성씨의 ‘한글’전은

지난 2월 3일부터 16일까지 인사아트프라자 갤러리 1층 그랜드관에서 열리고 있다.

 

금보성씨는 문자를 회화에 끌어들여 절제된 색과 구도로 그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한 화가다.

한글 자음과 모음을 풀어 색면과 결합시킨 추상회화를 꾸준히 발표해 왔는데,

작가는 '현대판 문자도' 라고도 소개한다.

 

그의 작업들은 단순한 미적 표현에 그치기보다

설치나 글쓰기의 문학적 의미가 결합된 미술 형태의 소통언어이기도 하다.

그래서 금보성의 한글 회화는 때로 문자와 디자인 방식이 결합한

훌륭한 조형적 가치를 지닌 독창적 언어로 평가된다.

 

인사동에서 첫 개인전을 한지 35년 만에 또 다시 150호 대작 22점을 내 걸었는데,

웅장한 스케일은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했다.

 

이번 전시작의 특징은 기하학적인 자음이 이루어 낸 도형 속에 마스킹테이프가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작업방법을 알리기에 앞서 테이프가 문자로 변신해 가는 추상도 같았다.

 

자음을 윷놀이하듯 화폭에 던져놓았는데, 마치 문자의 리듬감이 화면 위에서 너울너울 춤추는 것 같았다.

금보성씨의 작업은 2차원의 평면에 그치지 않고,

조형과 설치 등 다양한 장르로 확장시키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해 왔다.

 

한글을 예술로 승화시키려는 그의 치열한 노력과 실험정신은

문자의 예술적 조형미를 찿아 낸 것이다.

디자인이 결합된 자음의 날렵함에서 경쾌한 에너지까지 느낄 수 있었다.

 

금보성 작가는 지난 연말 아트코리아 회화부분 작가로 선정된바있다.

그동안 한글 회화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미국을 비롯한 해외 전시도 꾸준히 추진해 왔다.

그리고 한글 회화에 담겨 있는 한민족의 정신을 표출하기 위해

아리랑에 착안한 윷놀이 형식의 자유로운 구성을 취하기도 했다.

 

그는 놀라우리 만큼 부지런한 작가다.

그동안 쉼 없는 작업으로 엄청난 분량의 작품을 탄생시키기도 했지만 

금보성아트센터’ 관장으로 유망한 작가를 발굴하거나 소개하는데도 크게 이바지했다.

 

금보성씨는 한글이 문자로서만 활용될 것이 아니라 산업으로 확대되어 미래 산업의 자원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한글은 조상들이 물려준 미래자원이다, 우리민족은 문화DNA 혈통을 타고 났다. 시를 쓰던 내게 한글은 매우 익숙한 소재였다. 그러나 시를 쓰는 것만으로는 한글의 소멸을 막을 수 없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그러던 중 자음과 모음의 형태에서 고유한 추상적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한글을 디자인적 서체, 예술적 서체, 손 글씨 등으로 변화시키는 시도는 있어 왔지만, 회화 자체의 소재로 사용하는 경우는 없었다. 한글 자체의 조형미를 그림으로 표현해 한글의 문화유산으로 남기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인사아트프라자 갤러리 초대전을 계기로 국내 순회전도 기획하고 있다.

경북 예천의 ‘신풍미술관’은 3월에 예정돼 있다.

 

"한글회화를 시작한 지 35년이라는 시간이 제게는 코로나와 한파 처럼 녹록지 않은 시간”이라며

“35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작업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거 같다”며 겸손해 했다.

 

미술평론가 김종근씨는 “금보성 작가는 문자를 회화로 옮겨 놓는 아주 독특한 표현 양식을 가지고 있는 작가라고 볼 수 있다"고 했다. 특히 "크고 작은 기억 이나 니은처럼 자음의 형태를 색채와 잘 조형화시켜 만들어 내는 그런 우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회화에서 남관이나 이응노 처럼 한글을 회화로 조형화시켜내는 그런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문자를 가지고 그림으로 옮겨 놓는 사냥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금보성 작가의 특징이자 독창성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전시는 오는 16일까지 이어진다. 설날 연휴에도 열리니 인사동에 전시구경 가자.

(인사아트프라자 1층 그랜드관 / 전화02-736-6347)

 

사진, 글 / 조문호

 

‘민족미술인협회’가 주최하는 김윤수선생 2주기 추모전 ‘이 시대의 리얼리즘을 위하여’가

지난 25일 인사동 인사아트프라자 1층갤러리에서 개막되었다.

 

김윤수선생의 리얼리즘 미술에 대한 학문적 업적을 기리고,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마련된 추모전에는

민족미술인 100여명이 참여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민미협’ 이사장 두시영씨는 “85년 민미협의 탄생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민미협’을 아끼고 사랑하신 김윤수선생의 뜻을 마음에 세기고

이 시대의 문화예술적 공헌을 높이 기념하고자 전시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지난 25일 오후4시 무렵, 전시가 열리는 ‘인사아트프라자’를 찾았다.

전시장 입구의 박재동화백 작업실부터 들렸는데,

요즘 경기신문에 연재하는 박재동의 ‘손바닥 아트’ 마감시간이 임박했는지,

열심히 작업에만 몰두하는 박재동씨를 만나 뵐 수 있었다.

 

개막식에 많은 분들이 몰릴 것을 예상하여 한 시간 당겨 들렸다.

다행스럽게 전시장에는 두시영이사장, 김윤수선생 미망인 김정업여사, 박흥순,

변대섭씨를 비롯하여 손병주, 고 헌, 성기준씨 등 몇 몇 분이 전시를 관람하고 있었다.

 

전시공간에 비해 작품이 너무 많아 아쉬웠으나,

손장섭, 주재환씨 등 원로에서부터 신학철, 임옥상, 민정기, 박재동, 황재형, 권용택,

류연복, 김천일, 박진화, 박흥순, 박불똥, 이인철, 이재민, 이종구, 최병수, 류충렬,

김재홍, 나종희, 두시영, 박영균, 박은태, 변대섭, 양상용, 이명복, 최연택, 정세학씨 등

많은 분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 전시는 오는 12월 1일까지 이어진다.

 

사진, 글 / 조문호

 

시사만화의 대부로 불리는 박재동화백이 인사동 ‘거리 화가’로 나섰다.

박 화백의 ‘오픈 스튜디오’가 '인사아트프라자'(인사동길 34-1)

건물 초입에 인사동 복덕방 처럼 둥치 튼 것이다.

 

인사동이 예술가 아지트로서 구심점을 잃어가는 현실이라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어디 있겠는가?

 

인사동에 70년대 김상옥시인의 '아자방'이 있었다면, 80년대는 천상병시인의 ‘귀천’이 있었다.

문영태를 비롯한 여러 전사들이 꾸려간 민중미술의 요람 '그림마당 민'도 있었다.

정동용시인의 ‘시인대학’. 흑백 사진만 뽑던 신작가의 '꽃나라', 전유성씨의 ‘학교종이 땡땡땡’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끼리끼리 어울리던 아지트들이 있었다.

예술가들이 모이는 점포가 상징처럼 인사동에 똬리 틀어, 가교 역할을 한 것이다.

 

'인사아트프라자'의 배려로 캐리커처 공간 임대료를 내지 않는다니,

문 닫을 염려야 없겠지만, 노장의 체력이 버텨줄지 모르겠다.

 

그동안 가짜 미투에 걸려  얼마나 곤욕스러운 시간을 보냈는가?

진위야 밝혀졌지만, 땅에 떨어진 작가의 명예는 어떻게 되찾겠나?

더 이상 미투가 정적을 제거하는 도구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결국은 순진한 박원순시장의 목숨까지 앗아가지 않았던가?

미투운동이 여성의 인권을 신장시키는데는 큰 몫을 했지만,

억울하게 이용 당한 남성의 인권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박화백의 대중 소통을 위한 접근은 권위적이고 물질적인 미술을 인본주의로 돌려놓았다.

미술작품이 가진 자들의 욕망에 컴컴한 수장고에 갇혀 잠자는 것이 좋겠는가?

살아가는 공간 가까이에서 볼 때마다 눈웃음 짖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어디서, 재료값에 불과한 돈으로 박화백의 초상화를 받을 수 있겠는가?

그건 대중을 껴 안고자하는 박화백의 따뜻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쩌면 수행의 한 방편도 될 수 있고, 이보다 더 치열한 작업도 없겠다 싶다.

 

박화백이 인사동에 ‘오픈 스튜디오’를 차렸다는 반가운 소식은

보름 전 페북에서 보았는데, 한 번 찾아가 기록해 둔다는 게 영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박화백은 목, 금, 토요일만 나오는데다, 난 정선에서 화요일만 나오니 날자가 엇갈렸다.

 

지난 금요일에서야 시간을 낼 수 있었는데, 마침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그런데, 옆 자리에 영화평론가 강익모씨가 앉아 있었다.

“아! 이 얼마만인가?” 강교수와 소식 끊긴지가 10년은 된 것 같았다.

 

아직 사년 정도의 임기를 남겨두고 교수직에서 퇴임했다는 소식과

부친께서 지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슬픈 소식도 전해 주었다.

 

인사동 건물 옥상에서 영화를 상영하던 이야기에서부터

옛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박재동 화백의 강한 시선이 느껴졌다.

 

스케치하는 눈빛이 내 마음을 뚫어 보는 것처럼 강렬했다.

마치 점쟁이가 사주 보듯 말이다.

 

여지 것 찻집에서나 술집에서 박화백을 뵐 때마다

항상 스켓치북에 누군가를 그리고 있었다.

 

내가 카메라를 놓지 못하듯이 항상 그의 손에는 붓이 잡혀 있었다.

나 역시 여러 차례 모델이 되기도 했는데, 

작품 값은 고사하고 수고비도 드리지 못하고 챙겨 둔 초상화가 석장이나 된다.

포인트만 잡으면 척척 그려가는 솜씨가 가히 경지에 이른 것 같다.

 

그날도 짧은 시간에 두 장이나 그렸는데, 징그러운 늙은이를 귀여운 늙은이로 둔갑시켜 놓았더라.

영감탱이의 엉큼한 심보가 뽀록 나도록 그렸는데, 화가인지 점쟁인지 도통 분간이 안 된다.

 

한 장은 사 와야 하는데, 큰 그림이라 솔직히 돈이 좀 부족했다.

돈 생기면 살 생각으로 어물쩍 넘겼는데, 거지 손님을 잘 못 골란 죄도 있다.

 

강익모 촬영

 

박재동선생 사진 찍으러 갔다가 도리어 내가 모델이 된 셈이다.

어쨋던, 박화백이 인사동 거리의 화가로 등장해 너무 기분좋다.

지난 달 ‘현실과 발언’ 창립 40주년을 맞아 열린 '학고제' 현장 작업과 바로 연결된 것 같다.

 

그의 초상화는 언제보아도 정겹다. 그림에 사람의 따듯한 체온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박재동 화백의 숨겨진 얼굴 그리기 프로젝트의 따뜻함으로 인사동에 온기를 불어넣었으면 좋겠다.

 

박재동 화백만 보면 ‘한겨레신문’에 실렸던 시사만평 '한겨레 그림판'부터 떠오른다.

1980년대 후반에는 민주화 세대의 진보의식을 대변하는 '만화운동가'로 활동하지 않았던가?

권력의 본질을 예리한 메스로 파헤친 그의 만평은 시대 고발에 앞서 우리의 마음을 두드렸다.

 

그가 보여준 시사만화 세계는 독창적이며 독보적이었다.

신문 만평을 독자들이 가장 먼저 찾는 기사의 핵심으로 만들었고,

‘권력 앞에서도 당당한 시사만화’의 진면목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조그만 사각 속에 국민들의 슬픔과 분노, 고민과 아픔을 웃음과 눈물로 버무렸다.

 

두 번째가 ‘한예종’교수로 일하며 후진을 양성한 시기라면,

이 '숨겨진 얼굴 그리기 프로젝트'는 세 번째의 대변신인 것이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의 초상화는 인사동 명물로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요즘은 코로나란 사회적 거리두기로 손님이 많지 않아

오히려 한가하게 이야기 나누며 자기 모습을 남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닌가도 싶다.

박재동 화백의 붓 끝에 탄생한 당신의 초상화가 인사동 문화에 불을 지핀다.

 

인사동 나가는 걸음에 자신의 초상화 한 장 그려 두자.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의 대표적 작가로 꼽을 수 있는 강찬모씨 초대전이 9월 4일부터 17일까지 ‘인사아트프라자’3층 특별관에서 열리고 있다.




어느 작가인들 인사동을 드나들지 않는 작가가 있겠나마는
강찬모씨를 인사동 작가로 지칭하는 것은 젊은 시절 창작의 허기를 인사동에서 메우며 길을 모색했기 때문이다.
인사동 사람들도 인사동에 거주해서가 아니라 군을 이루어 인사동 골목골목의 대폿집에서 낭만을 구가한 사람들을 일컫는다.




다들 뿔뿔이 흩어져 살지만, 정신적 뿌리를 인사동에 둔 작가들이다.
이미 세상을 등진 작가들로는 강용대, 김용태, 김영수, 문영태, 여 운, 이존수씨 등을 떠올릴 수 있겠다.




60년대 명동에서 관철동으로, 관철동에서 인사동으로 아지트를 옮겨 온 민병산, 박이엽, 천상병씨 등 문인들이 첫발을 디뎠지만,

그 뒤를 이어 많은 작가들이 인사동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지금의 인사동이 삭막해진 것은 층을 이룬 다양한 작가 군이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그들이 풍미했던 낭만이 인사동의 풍류요, 인사동의 정체성이 아니던가?




지금의 강찬모씨는 술과 고기를 멀리하는 스님처럼 살지만, 그도 한 때는 두주불사였다.
인사동을 풍미했던 그의 기행은 전설이 되어 인사동을 떠돌 뿐이다.



각설하고, 강찬모씨의 작품을 가만히 쳐다보면 마음에 밀려오는 뭉클함이 있다.
억겁의 세월을 흘러온 설산의 세계는 마음이 거울처럼 맑아진다.
선연한 블루의 하늘과 히말라야 설산의 깊은 풍경에서
자연의 근원적 순수함과 생명의 숨결, 그리고 강인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그는 채색화를 전공한 화가답게 색의 마술사다.
한지에 전통채색 방식으로 그린 대작들은 눈부시도록 아름답다.
짙푸른 청색이 주는 신비로움은 자연 속으로 푹 빠져들게 한다.




작가는 자신의 영적 체험으로 얻어 낸 기운을 화폭에 쏟아내고 있다.
그의 명상이 물감으로 번지며 드러낸 설산은 차가운 한기가 아니라 따뜻한 온기다.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따뜻한 사랑의 빛에 휩싸이게 하는 것이다.




“하늘과 가까운 높은 곳에서 '히밀라야 블루'를 발견했어요. 그 푸름에 뭔가 간절함이 느껴지지 않나요?
'히말라야 블루'는 영원을 향하는 소망, 무한한 사랑을 향한 날카로운 기도입니다”
그의 말처럼 그림에 나타난 것은 무한한 사랑에 의한 기도이니, 이미 선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강찬모씨 그림을 본 프랑스 평론가 Jean-Louis Poitevin의 말을 들어보자.
“우주의 하늘이 사유의 하늘을 만난다. 깨달음의 색채가 인간의 기다림 위로 열리고 둘이 새로운 차원으로 우리를 이끌며
시각적으로 탐미적인 여정에 초대하는 것이다. 무관심으로 단절된 사람과 사람, 하늘과 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끝이 난다.
강 찬모의 그림 세계는 절대적인 체험으로 향하는 문을 연다. 사람들이 화폭을 마주하고 눈물을 떨구는 까닭이다.
인상적인 것은 색과 형 등의 시각적 요소들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화가의 철학적이고 심오하며 인간적인 우주의 통찰에 있다.
강 찬모는 하늘이 우리 가까이 있고, 내면의 눈이 외면의 눈을 통하여 화폭으로 다가가 무한을 경험할 수 있음을 이해한 독보적인 화가다”




강찬모씨는 요즘 뜨는 작가에 속한다.
수시로 초대전이 열리고, 프랑스 루브르 국립살롱전을 비롯한 해외 전시회도 여러 차례 참가했다.
해외 아트페어 에서 전 작품이 완판 되는 이변도 보였으며, 2013년에는 프랑스 보가드성 박물관 살롱전에서 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개막식이 열린 9월 4일은 내가 태어 난 날이 아니던가.
강찬모씨 전시 오프닝 상차림을 생일 상으로 여기며, 오후 6시 무렵 찾아갔다. 
전시 작가를 비롯하여 김명성, 조준영, 정복수, 송일봉, 박미산, 신성준, 조명환, 고중록, 김영국씨 등 많은 분들이 축하하러 왔더라.
돌아오는 길에 벽치기 골목에 들려 조해인, 김수길씨도 만났으나, 갑자기 쏟아지는 빗줄기에 혼비백산 도망쳤다.


이 전시는 오는 17일까지 '인사아트프라자'(02-736-6347)에서 열린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에서 올 추석에 공연된 효 뮤지컬 ‘이순신의 바다’가 오는 10월부터 연말까지 앵콜공연에 들어간다.
공연을 기획한 뮤지컬 컴퍼니 에이 측에 따르면 ‘이순신의 바다’는 추석연휴 3일동안 만석을 기록했다고 한다.

호응에 따라 오는 10월 12일부터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 4회 공연을 하고,

11월부터는 공연 횟수를 주 3회로 늘려 연말까지 공연할 계획이다.
이번 공연을 연출하고, 어머니 역으로 출현한 정다미씨는 “효 뮤지컬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생각보다 컸다”며
“이순신의 충과 효를 더욱더 극적으로 표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뮤지컬 ‘이순신의 바다’는 지난해 7월부터 서울과 거제, 밀양, 사천, 하동, 양평 등 8개 시군에서 공연되었고,
내년에는 전국 15개 시도로 공연이 확대될 전망이다.
특히 내년의 경우, 이순신의 백의종군로와 전적지를 중심으로 공연할 계획이어서 지역주민들에게 호응을 받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순신 역을 맡은 배우 정도원은 “이순신의 충과 효를 보여주는 작품의 성격 때문에
배우들도 혼신의 힘을 다해 본인의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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