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인연의 끈을 내려놓지 못하는 곳이 동자동과 인사동이다.

한 곳은 삶의 전쟁터고 한 곳은 마음의 고향이다.

동자동도 인사동도 빨간불이 켜진지 오래지만, 어쩌겠는가?

세월 따라 변하는 것이 세상 이치인 것을...

 

지난 수요일은 동자동 빈민들 생수 나누어 주는 날이었다.

쪽방 더위를 견딜수만 있다면, 한 시간 쯤 땡볕에서 줄 서는 것이야 할수도 있다.

더위에 지친 이들의 갈증에 불만도 따랐으나, 고마운 배려였다.

 

사소한 일로 목소리가 높아진 두 젊은이는 죽일 듯 주먹을 치켜세웠다.

 "씨발놈아~", "오로새끼!"만 서로 반복하며, 주먹은 계속 허공을 맴돌았다.

매값을 훤히 알고 있으니, 어찌 성질대로 하겠는가?

 

지루함을 메워주는 퍼포먼스처럼 한참을 싸우더니,

물이 도착하니 약속이라도 한듯 싸움을 끝냈다.

 

작은 생수 스무 병 묶음이 일사불란하게 분배되었다.

삼백 명 한정이라 외출을 하지 않는 늙은이는 몰라서도 못 얻지만,

힘없는 노인들은 높은 곳까지 들고 가기도 힘들다.

가난한 사람 중에서도 매번 늙고 힘없는 사람만 소외된다.

 

 '공정'이란 말을 혁명 공약처럼 내 세우는 분들이시여!

제발 밑바닥 인생, 작은 것부터 공정하게 해 주세요.

 

오후 늦게는 모처럼 인사동 나갈 일이 생겼다.

한때 인사동에서 작은 뜨락을 운영한 노인자씨가 추억이나 까먹자는 연락이 와서다.

 

먼저 인사동 골목부터 돌아보았다.

죽을 때가 되면 이곳 저곳 돌아본다던데, 죽을 때가 되었을까?

콧수염으로 불리던 사진가 김영수씨가 오르내리던 작업실 골목도 갔다.

 

깐죽대던 강용대가 김영수의 군화발에 차여 처박힌 곳에서부터,

10원짜리 동전을 펼쳐 놓고 일원 짜리와 바꾸어주는 돈장사 퍼포먼스에 이르기까지,

화가 강용대 유적지가 가장 많이 떠올랐.

금방이라도 머리를 풀어 헤친 까딱이가 고개를 까딱이며 나타날 것 같았다.

 

실비대학’으로 불린 '실비식당'은 개털의 소굴이었다.

물주 기다리다 잠든 어디엔들 머물 곳이 없으랴의 땡초시인 적음도,

유일한 물주였던 한국일보 사진기자 김종구도 이제 모두 저세상 사람들이다.

 

노동자시인 김신용의 '조빠하'란 시어가 안주가 되던 그런 시절이었다.

알몸으로 난장판 된 실비대학 결혼식 뒤풀이 등

끊어지고 뒤엉킨 추억의 실타래를 되 감는다.

 

소설가 배평모를 만나 이박 삼일동안 한자리에서 죽쳤던 레떼도 생각났다.

죽이 맞은 술친구보다, 주모 이점숙의 갈까보다’ 노래가 발목 잡았다.

 

사진쟁이들이 많이 들락거린 꽃나라흑백현상소보다

그들과 어울려 술잔 나누던  뚱뚱이 삼겹살 집이 더 그립더라.

 

천상병시인의 아지트였던 귀천만 자리를 옮겨 살아남았을 뿐,

‘실비집'에서 부터 ‘누님칼국수’, 수희재',  '하가', '춘원', '평화만들기' 등

많은 주막과 찻집이 종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때 이야기를 아는 분도 별로 없겠지만,

세대 따라 인사동에 대한 추억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40대의 한 분처럼 추운 겨울날 호떡 하나 사 먹기 위해

한 시간 가까이 떨며 기다리다 호떡을 사고보니 입이 얼어 호떡 맛을 알 수 없었다는 분에서 부터,

 쌈지에 대한 추억이 많은 30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른 추억을 떠올린다.

 

 노인자씨가 운영한 작은 뜨락도 한 때는 인사동 참새들의 방앗간이었다.

마신 만큼 자진 납부하는 콧구멍한 대폿집이라 매상도 신통찮은데다,

그마저 외상 하는 골패들이 늘렸으니, 어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약속장소인 유목민 본래의 카페도 떠올랐다.

그땐 ’이란 카페였는데, 착 가라앉은 술집 분위기가 연애걸기 딱 좋았다.

그곳에서 들었던 킹크림슨의 아일랜드‘가 아직까지 귓가에 맴돈다.

 

유목민에는 이대훈, 노인자 내외와 정영신 동지가 기다리고 있었고,

안쪽에는 화가 유준씨를 비롯한 많은 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두 내외를 몇 년 만에 만났는데, 노보살은 살이 포동포동한데 반해 이대감은 나처럼 비쩍 말라 있었다.

 

노보살만 드시고 이대감은 굶겼을까도 생각했는데,

진짜 단식원에 집어넣어 모질게 십키로나 살을 뺏다고 한다.

그러고도 술과 인연을 끊지 못해 빨간딱지나 찾고 있으니. 이 일을 어쩌랴!

 

주거니 받거니 하는 '유목민' 주인장 역시 술은 독약이지만,

술을 너무 사랑해 목숨 걸고 마시는 것이다.

 

 오늘도 술에 절어 '미워도 다시 한번'을 곱씹는다.

 

인사동은 마음의 고향이 아니라 술의 고향이던가?

 

사진,  / 조문호

 

 

 

 

2021.10.5

보름 동안의 전쟁이 마무리되었다.

연이은 술 폭탄에도 살아남은 걸 보니 목숨이 질기긴 질기다.

전시를 축하해 주고 격려해 주신 많은 분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정영신씨 전시에 빌붙어 나팔 분 일이 힘은 들었지만 보람은 있었다.

언제 그분들을 다시 만나 회포를 풀 수 있겠는가?

반가운 분들과 지난날을 돌이켜 본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몸이 마음 같지 않았다.

술에 절어 뵙지 못한 분도 많았고, 매일 올리던 일기도 쓰지 못했다.

카메라에 남은 이미지를 살피며 며칠간의 기억을 더듬었는데,

어떤 분은 성함이 기억나지 않아 블로그를 뒤지기도 하고

어떤 분은 취중의 실수가 생각나 쩔쩔매기도 했다.

모든 실수를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길 바란다.

 

지난 31일은 좀 늦게 나갔더니,

태국에서 온 고영준씨가 다녀가며 축의금을 맡겨 두었더라.

전화번호를 몰라 연락을 하지 못했는데, 무슨 급한 일이 있었을까?

그날은 노인자, 이대훈씨 내외를 비롯하여 추대희, 김지영, 송춘애, 손민광,

송주원, 이동환, 김미란, 이경지, 유근오씨 등 많은 분이 다녀갔지만,

술자리에 퍼져 앉아 사진을 못 남긴 분이 많았다.

 

그런데, 술자리에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노숙인에 대한 편견이었다.

일하기 싫어하는 불량한 사람으로 구제할 수 없다는 편견 말이다.

물론, 일하는 것보다 술 마시는 것을 더 좋아하고 더러 나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질고 착한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대부분 지병이 있어 병원에서 치료받아야 할 환자들이다.

엄밀히 말해 알콜 중독자도 환자에 다름아니다.

병원에 강제수용하더라도 병부터 고쳐주고 일을 하게 하거나

나이가 많은 사람은 기초생활수급 혜택도 주어야 한다.

 

그들은 돈이 좌우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패배자일 뿐이다.

부도덕한 몇몇 노숙인 때문에 선한 사람들까지 함께 몰 수는 없는 것이다.

악한 것으로 친다면 권력 가진 정치인이나 재벌에 비길 수 있겠나?

 

그다음 날인 10월 2일은 일찍부터 함평 출신의 사진가들이 모였다.

정영신, 이 민, 김기수, 박상문씨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좀 있으니 관악주민 사진반을 지도하는 양시영씨와 김진옥 반이정, 전영순씨가 오셨다.

몇 가지 사진에 관한 질문에 답 했는데, 흡족한 답을 하지 못한것 같다.

 

‘눈빛출판사’ 이규상씨는 ‘돈의문박물관마을’ 전시팀장 전영주씨와 오셨더라.

돈의문에서 정영신씨 ‘한국의 장터’ 전시를 제안해 와 다음 달부터 진행하기로 했다.

 

뒤이어 박흥순씨가 산에서 주웠다는 밤을 삶아 와 맛있게 나누어 먹었다.

정복수, 나떠구, 박영선, 류국헌, 박종규, 최유진, 김혜련씨도 오셨다.

 

오후에는 20여 년 만에 반가운 분을 만났다.

‘삼성카메라클럽’이라는 조직에서 일할 때 함께 했던 신상덕씨였다.

최근 페친으로 연결되어 찾아왔는데, 처음엔 마스크를 쓰고 있어 몰라보았다.

지난 이야기에 모처럼 웃음꽃을 피웠다.

 

밤늦게는 정복수, 박건씨와 술을 마시다 우이동 박건씨 집으로 쳐들어갔다.

 

덕분에 혼자 살아가는 공산품 예술공장도 볼 수 있었고.

사랑한 어머니를 비롯한 살아 온 지난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지난 개천절에는 인사동에서 성조기를 흔드는 정신 나간 놈도 있었다.

 

‘나무화랑’에는 정영신씨와 동향인 심재상, 김문수씨를 비롯하여

김준권, 이태호, 김곤선, 양정애, 오현주, 김순남,

김일하, 김밝은씨 등 많은 분이 찾아주셨다.

 

‘유목민’에는 지리산에 들어간 임헌갑씨가 찾아왔다.

 

전시 기획자인 김곤선씨가 첫 술자리를 만들어 주었으나, 카메라가 사라져버렸다.

한동안 사진을 찍지 못해 안절부절했으나, 차 안에 두고 찾은 것이다.

김곤선씨로 부터 정암사 전시프로젝트에 관한 근황을 들었다.

 

안해룡씨를 비롯하여 유병용, 박찬호, 임동은, 이휘경,

안지현, 김문기씨 등 반가운 손님이 줄줄이 찾아왔다.

 

페북에서만 보아 온 소녀 같은 임동은씨 부인의 실제 모습도 보았다.

보기드문 잉꼬부부였다.

 

어둠이 몰리기 시작하니 장경호, 노광래, 헨리윤, 배성일, 우문명,

최석태, 황경애, 현기영, 이미례, 신상철 씨 등 많은 분이 오셨으나,

너무 취해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처음으로 뒷자리에 누워 차에 실려 갔다.

 

전시를 철수하는 마지막 날은 술이 덜 깨 그런지 온종일 비실거렸다.

전시장은 조명숙, 김태인, 이만주씨가 다녀갔더라.

정영신씨 전시를 취재하러 오신 김문경, 운현선씨와

‘툇마루’에서 마신 해장술 몇 잔에 전날로 되 돌아간 것이다.

 

김문경씨와 마시던 술자리는 ‘유목민‘으로 이어졌는데,

지나가던 김발렌티노와도 잘 아는 사이였다.

 

초장부터 술이 취해 실수라도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제정신이 아닌지라 그 뒤로는 찍은 사진조차 없었다.

아무리 취해도 카메라는 놓지 않는데, 맛이 가도 완전히 간 것 같았다.

 

아산에서 김선우, 양햇살, 김온 군이 찾아와 전시를 철수했으나,

전시장을 오르내리긴 했으나 사진 찍는 일조차 잊었다.

다들 끝내고 식사하러 갔지만, 차에 들어가 뻗어버렸다.

일이 끝나 긴장감이 풀리니 갑자기 녹초가 된 것 같았다.

 

아무튼 여러분의 격려와 도움으로 살아남았고, 전시도 잘 마쳤다.

찾아주신 모든 분에게 거듭 감사 인사 드린다.

항상 좋은 일 많으시고 편안하시길...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늦은 오후 무렵, 일산 사는 노인자, 이대훈 부부가 우리 집을 찾아왔다.

저녁 술자리를 어디서 만들까 망설이자, 대뜸 ‘은평해물탕’이 맛있다고 했다.
우리 집 옆의 ‘은평해물탕’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몇일 전, 친구가 그 곳에서 해물찜을 먹었는데, 너무 맛있어 싸 왔다더라고 말했다.
우린 긴 세월 그 집 앞을 지나치고 다녔으나, 한 번도 가보지 못했는데 말이다.
그 때서야 “맞아! 그 집 해물탕 맛있다는 소문 들었어”라며 아내가 맞장구 쳤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옛 말처럼 난 왜 그걸 여태 몰랐을까?
식당에 들어가 주인아주머니를 보니, 지나치다 자주 본 분이라 안면이 많았다.
해물찜을 시킬까? 아구찜을 시킬까? 망설이다. 해물찜으로 낙찰했다.
둘 다 먹고 싶었으나 가격이 45,000원이라 한 가지 밖에 시킬 수 없었다.
해물 찜은 너무 맛있어 소주가 술술 넘어갔다.

그런데, 노인자씨가 요즘 너무 바쁘다고 말했다.
오래 전부터 태극권이란 운동 배우러 강남으로 다닌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이젠 강사로 불려 다니느라 바쁘다는 것이다.
심지어, 일산에서 세 시간이나 걸려 용문까지 가르치러 간다는 것이다.
쥐꼬리 만한 강사료 받아가며...

“아~ 돈 많은 사모님께서 말년에 뭔 고생을 사서 하신단가?
이대감, 하루 종일 고생하고 돌아오면 따뜻한 저녁상이라도 좀 차려주지..“
이 말 하려다 그만 쑥 들어갔다. 세상물정 모르는 원시인 소리 들을게 뻔하기 때문이다.
여성상위시대라 여성이 배위에서 노는 세상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정이 그런기 아닌기라...

두 내외가 떠나고 나니 슬슬 장난기가 도졌다.
무더운 날씨에 술이 취하니, 온 몸이 쩔쩔 끌었다.
옷을 홀딱 벗고, 좁은 방에서 스트립 쇼를 해댔다.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아내가 권총을 꺼내 들이댔다.
마침, 선풍기 바람이 커텐을 날려줘서 다행이지, 자칫하면 큰 일 날 뻔 했다.
거시기만 나왔다면, 음란서생에 찍혀 쪽팔려 다니겠는가?

“폐친 여러분! 전, 본디 퇴폐적인 인간이오니 널리 양지 하시옵소서”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이대훈, 노인자씨 내외가 모처럼 우리 집을 방문했다.
가끔 들려 술을 사 주어, 이번엔 우리가 한 잔 대접키로 한 것이다.
없는 살림에 술집으로 모실 수 없어, 참치 두 마리로 안주 삼았다.

코 구멍만한 집이지만, 네 사람이 술 마시는대는 지장없었다.

술상은 초라하지만, 분위기는 더 오붓했다.
아! 그런데 통풍으로 술을 마시지 못하니 미칠 지경이었다.
장사집이 아니니, 한 잔하며 노래 한 자락 뽑을 수 있었는데..
이대감은 내 술까지 다 마셨으니, 이튿날 속께나 쓰릴게다.










 

지난 주말, 일산 사는 노인자, 이대훈씨 부부가 녹번동을 방문했다.


오랜만에 두 내외분을 만나 ‘할머니 추어탕’에서 반주를 곁들인 오붓한 시간을 가졌다.
그날따라 소주도 입에 짝짝 달라붙었지만, 대화마저 잊을 수 없는 추억담이라 사탕처럼 달콤했다.

바로 10여 년 전 노인자씨가 인사동 골목에 차렸던 술집, ‘작은 뜨락’이야기였다.

아쉽게도 일 년 남짓에 문 닫고 말았지만, 그 곳은 인사동 풍류객들이 참새 방앗간처럼 들락거렸던 추억의 대폿집이었다.

‘실비집’을 비롯하여 ‘시인통신’, ‘하가’, ‘누님칼국수’, ‘레떼’, ‘평화만들기’, ‘귀천’, ‘수희제’ 등의

사라진 업소들이 인사동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듯이, ‘작은 뜨락’도 빠지지 않는 이름이다.

그만큼 이야기거리를 많이 만들어 낸 추억의 공간이기 때문이리라.

원래 건물 옆의 쓸모없는 골목에 천막으로 위를 가리고, 건물 벽에 좁은 선반 식 테이블을 붙여

폭 1미터에 길이 5미터 남짓한 공간을 마련했는데, 서양식으로는 스탠드바이고 우리식으로는 그냥 포장마차다.

폭이 너무 좁아 겨우 엉덩이를 걸칠 만한 간이의자만 놓았는데,

이 집에서 술 한 잔 하려면 한껏 몸을 웅크리고 벽을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재미있는 낙서나 그림들이 벽에 덕지덕지 붙어 볼거리를 더했다. 

 

기억자로 된 작은 목로주점 안쪽으로 들어가려면 길게 앉아있는 사람들과 일일이 눈인사를 주고받아야 했다.

가까운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내 가깝게 되어버리는,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정겨운 술집이었다.

그 곳으로 고양이가 생선냄새 맡듯 인사동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툇마루’ 바깥주인이었던 박중식시인, 전설의 노동자시인 김신용씨, 관훈미술관장으로 일했던 서양화가 장경호씨,

‘작가폐업’이란 카페를 운영하다 풍기로 떠나버린 소설가 배평모씨, 서양화가 김진두씨와 그에게 그림 배웠던 헨리 윤,

인사동에 목맨 김명성시인, 임진각에 바람개비 날린 설치미술가 김언경씨, 막사발 전도사 김용문씨,

천연염색 한다며 술에 염색된 이명선씨 등 인사동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인사동예술가들의 아지트로 변한 것이다.

그런데 대폿집을 차린 노인자씨는 술장사만 처음 한 것이 아니라 돈벌이 자체를 처음 해본 것이라고 했다.

일찍이 큰스님을 모신 포교사 노릇으로 세계 곳 곳을 돌아다녔다는데,

봉사활동으로 아프리카를 종단하며 굶주린 원주민들을 위해 가진 돈을 모두 써버렸단다.

오히려 돈 버는 일보다 쓰는데 이력이 붙은 여자였다.

그런 사람이 술장사를 하니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손님이 “얼마요?”하면 “몰라요. 먹은 만큼 알아서 주세요.”가 대답이고

술꾼들의 취향을 몰라 손님이 시키는 대로 음식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어리석 하게 장사를 하니 인사동 예술가들이 ‘작은 뜨락’을 돕고 나선 것이다.

 

이를테면 돈을 제대로 못 받는 주인을 대신해 모자를 돌려 돈을 거두기도 했고,

원가가 적게 드는 입맛에 맞는 안주를 개발해내기도 했다.

그리고 주인이 있든 없든 하루에 한 두 번은 꼭꼭 들려 ‘작은 뜨락’을 연락처로 삼았다.

그런데 그토록 정들었던 ‘작은 뜨락’이 갑자기 문을 닫게되어, 모두들 길 잃은 나그네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손님이 없는 것도 아닌데다 취객들의 주벽도 그리 심하지않아, 폐업한 동기가 늘 궁금했다.

아마 단골 중에 보기 싫은 사람이 생겼을 것 같다. 보기 싫어도 차마 말 못하는 주인의 성정을 잘 아니까...

이 세상 어느 곳에 '작은 뜨락'처럼 정겨운 목로주점이 다시 생겨 날 수 있을까?
눈 뜨고 코 베이는 세상에, 조그만 바구니 하나가 손님 스스로 먹은 만큼만 내라고 기다려주는

이런 촌스러운 술집이 말이다.

예술을 알고 인사동 낭만을 체득한 사람들도, 사람보다는 돈을 더 반기는 야박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인사동의 낭만과 멋도 그대로 머물지 않고, 멋 자체가 상품처럼 넘실댄다면 그건 이미 멋이 아니다.

멋들어짐이 지나치면 곧 바로 건들거리는 법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인사동 거리가 죄다 사람 냄새를 잃은 채 건들거리고 있는 것이다.

인사동의 낭만과 인정이 점점 메말라가는 요즘 들어 부쩍 ‘작은 뜨락’이 그리워진다.

가끔은 술 취한 도공 김용문씨가 부르는 '돌아가는 삼각지'도 듣고싶다.

사진,글 / 조문호

 

 

 

 


지난 17일 우리시장 기살리는 '장에 가자' 전람회가 한 달간의 일정을 마무리하였습니다.

 

그동안 많은 관람객들이 본 프로젝트에 동참하였고, 1,216명의 초상사진을 촬영해 드렸습니다.
전시 첫 날에는 개막행사로 인해 참석하신 많은 분들을 촬영해드리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KBS다큐 촬영에 의해 정선으로 떠난  2일에는 사진가 곽명우씨가 수고해 주셨고,
전시 마지막 날에는 누님 장례 치루느라 약속을 못 지켜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4월부터 전국 장터를 순회하며 힘을 결집할 생각입니다.
캠페인에 함께 해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리며, 지속적인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도예가 김용문씨

 

철학자 채현국선생

 

원로 언론인 임재경선생

 

가정주부 장봉숙씨

 

사업가 이대훈씨

 

아프리카 봉사활동가 노인자씨

 

장봉숙, 심우성, 강송림시인

 

포항MBC 편성국장 최부식씨 부자

 

미래촌 김만수 동장

 

클라라, 사업가 김영재씨

 

2018평창동계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유승근 인력물자부장

 

서양화가 서길원씨

 

회사원 김기훈씨

 

사업가 권영진씨

 

시인 강송림씨

 

소설가 김정례씨

 

도예가 황예숙씨

 

문화기획가 홍명도, 이상철부부

 

사업가 김욱수씨

 

영화배우 양희경씨

 

사진가 이기명씨

 

회사원 심지윤씨

 

회사원 김중호씨

 

경기도미술관장 최효준씨

 

사업가 김택호씨

 

가정주부 조근숙씨

 

 

 

 

 

 

 

 

 

 

 

 

 

 

 

 

 

 

 

 

 

 

 

 


지난 일요일, 조계사앞에서 열린 연등회에 갔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건물입구에 예쁜 연등이 하나 걸려 있었어요.

연등 꼬리표에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창조하는 것이니 지금 한 생각을 잘하라"는 대행선사법어가 적혀 있었습니다.

누가 걸어 놓았을까? 궁금해 하며 올라 왔는데, 조금 후에 노인자씨가 그 연등을 들고 방문했어요.

뒤늦게 나오신 이대훈씨로 부터 '대청마루'에서 맛있는 음식도 얻어 먹었답니다.

'닮은 사람들'로 옮겨 전활철씨와 '사과나무'에 있던 김명성씨까지 합류하였습니다.

건너편 좌석에는 김대웅씨가 이지연씨와 있었고, 옆자리에는 실천예술가 두 눈님 일행이 있었어요.

뒤늦게 문학평론가 구중서씨와 서양화가 주재환씨도 오셨는데. 여기 저기 오가느라 혼자 바빴답니다.

인사동 거리를 찍다 행위예술가 박미루씨 커플과 '해와 달'을 운영하는 양귀비씨도 만났어요.

 

2012.5.21

 

 

 

 

 

 

 

 

 

 

 

 

 

 

 

 

 

 

 

 

 

 

 


인사동문화를 사랑하는 사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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