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마가 주최하는 제2FNK PHOTOGRAPHY AWARD 순수부문 수상자 초대전인

손은영의 밤의 집2’가 지난 12일 평창동 금보성아트센터에서 개막되었다.

 

오후 여섯시에 시상식이 있다기에 사람들을 피해 한 시간이나 빨리 갔는데,

일찍부터 사진가들이 여럿 와 있었다.

 

작가 손은영을 비롯하여 주최측인 '포토마' 하춘근대표, '갤러리 브레송' 김남진관장,

사진가 엄상빈, 정영신, 김영호, 곽명우씨 정도는 알겠는데,

다들 마스크 때문에 잘 모르겠더라.

 

빨리 빠져 나오려고 사진부터 돌아보았는데,

지난 번 보여 준 밤의 집보다 좀 더 정형화 된 것 같았다.

 

어둠이 깃든 집의 구조가 마치 집들의 초상사진처럼 존재를 드러냈다.

이전에는 어렴풋이나마 집에서 인적, 즉 사람의 체취가 감지되었으나,

이번에는 자로 잰 듯 수평과 수직으로 그려 진 구조물이

독특한 저마다의 색깔에 의해 마치 무대세트처럼 다가왔다.

 

의도된 작위였다.

점점 각박해지고 규격화되어가는 현대인들의 삶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촬영할 때부터 모든 것이 계산되어 있었다.

마땅한 집을 찾아내어 화면 구성에서 색조에 이르기까지...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받은 손은영씨, (손은영씨 페북에서 옮겼다)

촬영 후 후보정을 통해 또 다른 분위기의 집으로 바꾼 것이다.

사진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다시 말해 기록의 예술에서 표현의 예술로 재탄생한 것이다.

 

이번에 발행된 손은영의 '밤 의집2' 사진집 표지 (손은영씨 페북에서 옮겼다)

우리전통가옥은 초가 능선처럼 어딘가 곡선이 있으나

서구의 건축들은 대개 직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령 같은 수직의 아파트가 점령한 현실에서 본 집의 형태는

옛날 달동네 집이나 마찬가지다.

 

포근한 인간의 정서가 풍기는 달동네를 대신하여

경제성장으로 발전한 삭막한 오늘의 달동네인 것이다.

시대성이 담긴 주택사의 한 단면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적인 기록의 가치보다

작가의 주관에 따라 예술사진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 예술사진 또한 시대적 달동네를 조명하는 기록의 한 축이기도 하겠다.

 

작가는 오랜 나날을 밤에는 찍고 낯에는 후보정하며 올빼미처럼 작업했다.

다시 말해 밤에는 사진 찍고 낯에는 그림을 그린 것이다.

색의 조화는 물론 창에 백열등 불빛을 삽입하는 등 미적 요소까지 끌어들였다.

 

사진들은 도식적이면서도 서정적이었다.

도식적인 형태가 정형화되긴 했으나

포근한 색감과 직선의 미가 어울려 관능적으로 다가왔다.

 

사진 속은 잠잠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 날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미에 대한 작가의 감수성과 조형감각이 돋보였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듯, 21일까지 열리니 구경 한 번 하시라.

 

사진, / 조문호

 




‘아트스페이스 애니꼴’ 초대전으로 열린 엄상빈의 ‘두만강을 건너간 사람들’이
지난 12일 오후3시 일산 ‘애니꼴’에서 개막되었다.



사진가 엄상빈씨를 닮았다. 20여 년 후의 모습같다.



일산인데다 첫길이라 정영신씨 똥차를 끌고 갔더니, 고급 승용차 속에 끼어들기 남세스러웠다.
전시장엔 축하객이 얼마나 많은지, 갤러리 개관 후 최고의 관객동원이 아닌가 싶었다.





반가운 사진인들과 인사를 나누며 작품을 살펴보니, 마치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졌다.
정치 이데올로기에 희생되어 온 한민족에 대한 울분이 치밀었기 때문이다.






동포들의 얼굴에 억측 서럽게 살아 온 흔적이 역역했지만, 따뜻한 인간애가 흘렀다.
문명 이기에 물든 우리들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순박한 모습이었다.
물론, 오래된 사진들이라 지금은 생활상이 다소 바뀌었겠지만,
달아빠진 서울사람들 같이 빤질거리진 않을 게다.






난, 사진을 돌아보며 우물 안 개구리라는 걸 다시 절감했다.
남한바닥이야 구석구석 안 가본 데가 없으나, 연변은커녕 삼팔선도 넘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북녘 땅을 밟지 못한 자가 나 뿐은 아니지만. 한 민족이 서로 나 몰라라 사는 현실이 통탄스러울 뿐이다.






하기야! 요즘은 개인주의가 극에 달해 가까이 사는 이웃끼리도 닫고 사는 현실이니, 더 무슨 말을 하랴!






난, 사진가 엄상빈씨가 두만강 변을 기록해 온 걸 전혀 몰랐다.
지인들 전시회나 경조사에는 빠지지 않고 들리는 바쁜 분이 언제 저렇게 귀중한 사진을 찍어 놓았는지 존경감이 일었다.
그동안 속초 아바이마을 사람을 비롯하여 동해안 비무장지대 등 분단과 통일문제에 천착해 온 줄은 알았으나,

연변의 조선족 기록은 짐작도 못했다.






그는 2001년 속초에서 취항한 동춘호를 타고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처음 방문했다고 한다.
그 이후 수차례 연변을 방문하며 연변의 시장과 농촌마을 그리고 조선족 학교를 담아왔단다.





그의 눈에 인상 깊게 박힌 것은 차창 밖으로 힐끗힐끗 보이는 두만강이었다고 한다.
엄상빈씨에게 보인 두만강은 민족 분단의 상처를 안고 흐르는 슬픈 강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에게는 유행가 제목처럼 ‘눈물 젖은 두만강’으로만 각인되어 있다.
얼마나 우리 동포의 한이 서린 강이었으면, 눈물에 젖었겠는가?
삶의 터전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연변 동포의 애환이 절절이 배인 강이다.





그가 보여 주는 두만강은 우리민족의 비애가 흘렀다.
그렇지만, 그의 시선이 머문 사물 하나하나가 모두 정겨웠고, 사람들 표정마다 살가웠다.
동포를 대하는 사진가의 애착과 따뜻한 감성이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었다.






그 사진들을 보며 든 생각은 오로지 통일뿐이었다.
더 이상 민족을 갈라 놓을 수 없다는 절박감이 치밀어 올랐다.

"오! 통일이여~어서오라"






사진평론가 최연화씨 사회로 시작된 개막식에서는

연변에서 온 오인철 기자가 엄상빈씨에게 축하패를 전달하기도 했다.





'두만강변 사람들'사진집에 서문을 쓴 인류학자 한상복씨와
사진집을 출판한 ‘눈빛출판사’ 이규상대표도 차례대로 축사를 했다.






사진집 제목도 전시명 처럼 ‘두만강을 건너간 사람들’이라 정했으나 탈북자를 연상시켜

‘두만강변 사람들’로 갑자기 제목을 바꾸게 되었다는 뒷얘기도 들려주었다.






애니꼴 정인영실장의 갤러리 소개에 이어 작가 엄상빈씨의 인사말이 이어졌다.


"두만강 변을 드나 던지 길게는 20여년의 여정이고, 짧게는 4박5일에 불과했지만,
자신에게는 애환이 담긴 훈춘이었다며, 간절한 통일의 염원을 사진에 담았다"고 했다. 



 

이 날 참석한 분은 김보섭, 박찬원, 이기명, 박찬호, 강제훈, 김봉규, 양시영, 남 준, 오현경,
제이안 리, 김용철, 장경석, 김지연, 한선영, 임성호, 양시영, 곽명우, 장 숙, 김 원, 김유리, 권 홍
안미숙, 정영신, 성윤미씨 등 성함도 잘 기억나지 않는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사진, 글 / 조문호




두만강변 사람들 / 엄상빈 사진집
-연변 조선족 동포와 두만강의 20년 전과 후
 눈빛 / 180쪽 / 값 2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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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보성아트센터’ 신년 초대전으로 박찬원씨의 ‘돼지가 우리를 본다’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지난 1월3일 오후5시에 개막된 이 전시는 사진평론가 최연하씨가 기획하고, 송호철씨가 설치를 맡았다.





개막식이 열리기 전에 들렸는데, 2개층의 전시장은 온통 돼지들로 가득했다.
중앙무대 벽에는 고사상에나 올라가는 돼지머리 연작 사진들이 인간을 조롱하듯 웃고 있었다.
오로지 고기로 태어나 인간들에게 몸을 내맡기며, 죽어서도 웃고 있는 형상에 섬뜩한 생각마저 들었다.
우매한 돼지가 아니라 신 같았다.






탯줄을 달고 있는 갓 난 돼지에서부터 발정에 헐떡거리는 돼지에 이르기까지 천태만상이었다.

아래층은 조립식 비계를 사용해 돼지우리처럼 꾸몄는데,
한쪽에선 꿀꿀거리는 돼지 소리와 함께 돼지들의 동영상이 돌아가고 있었다.






난, 사진가 박찬원씨를 지난 년말 곽명우씨 소장전에서 처음 인사를 나누었지만,
이 사진들은 2년 전 ‘류가헌’ 전시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왜 하필이면 돼지에 집착할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떻게 보면 악의 무리인 인간보다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박찬원씨와 돼지와의 인연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인 것 같았다.
어릴 적 별명도 돼지였다지만, 소년시절 교지에 써 올린 ‘돼지’에 관한 수필도 있었다.
사진뿐만 아니라 돼지를 그린 수채화도 있었는데, 글과 사진, 그림 등 다재다능했다.





그리고 지난 전시 때 관람객들이 그려 놓은 돼지 그림에서부터
집안 어르신이 썼다는 시조도 걸려 있었다.
시조에는 이런 글귀가 있었다. '작은 눈 지그시 감고 액귀를 쫓는구나.'






나 역시 돼지띠기도 하지만, 돼지고기를 유별나게 좋아해 돼지와의 인연은 남다르다.
그런데, 왜 인간들은 돼지를 마치 돈의 상징처럼 보았을까? 돈, 돈, 돈, 이름이 닮아 그럴까?
그냥 복덩이로 보면 좋을 걸, 그 더러운 돈과 연결 지어 돼지들도 기분 더러울 것이다,
돼지 꿈만 꾸면 복권부터 사는 데, 돈이 인간을 병들게 하는 걸 정작 모르는 걸까?






전시된 사진들은 원주의 한 양돈장에서 100일간 촬영한 사진이라고 했다.
난 여지 것 돼지우리에서 키우는 한두 마리의 돼지만 보았지,
이처럼 닭이나 소처럼 집단 사육되는 것도 처음 보았다. 가축이 아니라 먹이 공장이었다.
고기만 처먹을 줄 알았지, 정말 우물 안 개구리였다.




-금보성아트센터 사진자료-



전시장에서 반가운 분도 여럿 만났다.
금보성 관장은 입구에서 주차관리에 여념 없었고, 전시장에서 작가 박찬원씨와 최병관씨를 만났다.
최병관씨는 오랜만의 회우였다.






전시를 기획한 최연하씨를 비롯하여 엄상빈, 장 숙씨도 있었다.
그러나 인사동에서 약속이 있어, 개막식도 보지 못한 채 자리를 떠야 했다.
얌체 같지만, 개막식 사진은 ‘금보성아트센터’에서 올린 사진 다섯 장을 스크랩했다.




-금보성아트센터 사진자료-



'돼지가 우리를 본다'전은 오는 12일까지 열린다.
새해의 복덩어리 만나러 평창동 ‘금보성아트센터’(02-396-8744)로 가자.



사진, 글 / 조문호




-금보성아트센터 사진자료-

-금보성아트센터 사진자료-

-금보성아트센터 사진자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일부 유명작가의 사진집이야 다른 곳에서도 나왔겠지만, 많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의 작품들이 빛도 보지 못한 채 사장될 뿐 했다.

그것은 한국사진 역사이기 전에 우리나라의 역사가 아니던가?



 


사진관련 출판을 전문으로 하는 눈빛출판사가 태어 난지가 올해로 30주년이 되었다.

창립 30주년 기념전 및 북 페어가 지난 7일부터 오는 20일까지

지하철 강남역 일번출구에 있는 미진프라자 빌딩 스페이스 22’에서 열리고 있다.



   


 

이 전시는 그동안 '눈빛출판사'가 출간한 사진 책과 사진가들의 작품, 그리고 눈빛아카이브가 컬렉션한 사진들이 전시된다.

격동의 한국 50년을 기록한 구와바라 시세이, 이한열 열사의 주검을 포착한 정태원, 아바이마을을 찍은 엄상빈,

서울을 기록한 전민조씨 등 눈빛사진집 표지로 쓰인 20인의 사진과 대표작 1점씩이 전시되고,

미군정기의 외국인이 찍은 코다크롬 컬러사진 10점도 전시되었다



 

 


특히 창립 30주년을 기념해 지금까지의 사진-한국사진의 작은 역사 1945-2018’ (이규상 엮음·사진)도 펴냈다.

한국사진사에 대한 개요조차 없었던 시절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80여 명의 작품과 작가를 소개하며,

한국 현대사진의 경향과 흐름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발행한 책이다.



    

 

눈빛출판사는 그동안 700여권의 사진관련 서적을 펴냈다.

2014년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58종을 발행한 '눈빛사진가선'은 기성, 신인 구분 없이 사진 완성도 중심으로 제작된

한국사진의 오늘을 보여주는 대표 사진집 시리즈다.






그리고 '눈빛아카이브'로는 격동한국50’, ‘개화기와 대한제국’, ‘골목안 풍경전집, ‘꿈의 공장‘, ’내 마음 속의 한국‘,

노무라 리포트 청계천변 판자촌 사람들‘, ’미군정 3년사‘, ’북아메리카 인디언‘, ’사진이 다 말해주었다‘. ’신동삼 컬렉션‘,

일제 강점기‘, ’정미소와 작은 유산들‘, ’판문점과 비무장지대‘, ’한국의 보도사진‘, ’한국의 장터‘, ’한국전쟁‘,

휴먼선집 최민식사진집등이 있다.

   


 



출판된 책들은 대부분 팔리지 않고 제작비만 많이 들어가는 사진집이다.

그것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다큐멘터리 사진집 중심으로 책을 만들어 왔는데, 이규상씨가 돈 많은 독지가도 아니다.

30년 동안 뼈 빠지게 일했으나, 아직까지 조그만 사무실에서 월급 주는 직원이라고는 성윤미씨 한 사람 뿐이다.

그의 아내인 편집장 안미숙씨와 딸 이솔 양이 직원의 전부다.

거의 가내공업 수준에서 평균 한 달에 두 권의 책을 만들어 왔다는 것은 소명의식에 의한 투지만으로는 결코 해낼 수 없는 일이다.

사진에 맥락을 부여해 세상에 소개하는 보람으로 견뎌낸 것 같다.



 


그것도 내달라고 기다리는 사진이 아니라, 숨어있는 사진을 일일이 찾아내어 사진의 역사를 정리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 역시 가정을 꾸려가며 먹고 살아야 할 것 아닌가? 한 권 만들어 팔면 다음 책에 몽땅 쏟아 부었으니, 사는 형편이야 보나 마나다.

책 낼 돈이 없어 장인께 가계수표를 빌렸다는 이규상씨 회고담은 듣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팔리지 않는 줄을 알면서도 좋은 사진만 보면 그냥 넘기지 못하는 그의 열정과 집념이 이루어 낸 억척스러운 결과다.

창고에 쌓여있는 사진집 보관료도 여간 아닐 것이다.



 


돈 많은 사진가들이야 자비로 책을 만들 수도 있겠으나, 가난한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어찌 사진집을 만들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눈빛출판사가 없었다면 이름 없이 사라졌을 사진가들은 물론, 쓰레기로 태워진 필름도 수두룩할 것이다.



   



그런데, 일반인이야 그렇다치고 사진인 조차 사진집을 사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가끔 사진가들의 서재를 들여다보면, 외국사진가들의 수입 서적은 잔뜩 꽂혀 있으나,

국내에서 출판된 사진집은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이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

자칫 우리사진보다 외국 사진을 더 좋아하는 사대주의로 비칠 수도 있는데, 우리를 모르고 어찌 남을 알 수 있겠는가?

그러니 우리사진의 정체성을 잃고, 외국 사진 흉내나 내는 지경이 된 것이다.



 


이규상 대표의 청년시절은 문창과를 나온 문학도 였다는데, 출판도 중요하다는 선생의 말에 따라 열화당에 들어갔다고 한다.

미술서적을 많이 내던 그곳에서 서서히 시각예술에 눈을 뜨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조세희의 사진 산문집 침묵의 뿌리도 한 몫 했다고 한다.

한국 사진이 아름다운 풍경이나 찾아다니던 시기에, 삶의 어둠을 조명하는 사진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열화당을 그만 둔 이규상씨가 정진국, 여균동, 이영준 씨와 어울려, 1988년 무렵 광화문에 출판사를 차렸는데,

 첫 출판물이 프랑스 사진가 크리스 마커가 기록한 '북녘 사람들' 사진집이었다.

이어 미군정기, 한국전쟁, 민주화운동, 분단문제 등 격동의 한국현대사를 기록한 국내외 사진을 발굴 수집하기 시작했는데,

이경모, 성두경, 이형록, 김천길, 김기찬, 최민식, 황규태씨'눈빛'을 거치지 않은 국내 사진가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창립 30주년 기념전 및 북페어가 개막된 지난 7일에는 김지연씨의 사회에 따라 구와바라 시세이, 윤주영, 정태원, 박현수씨가

차례대로 나와 축사를 했고, ‘눈빛출판사안미숙 편집장과 이규상대표도 인사말을 했다.

마지막에 나온 엄상빈씨가 출품작가의 양해를 받아 냈다며, 전시된 작품 일체를 눈빛출판사에 기증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 날 참석한 분은 전민조, 오상조, 김보섭, 김남진, 성남훈, 구본창, 김문호, 안해룡, 강제훈, 김봉규, 이주영, 아레아 박, 이한구,

박종우, 이순심, 한금선, 정영신, 이재갑, 장 숙, 이규철, 제이안 리, 김영호, 정진호, 이은숙, 박성태, 마동욱, 곽명우, 하지권, 남 준,

김 헌, 한선영, 곽대원, 김경수, 정명식, 김유리씨 등 이름도 알 수 없는 많은 사진인 들이 '눈빛출판사'의 창립30주년을 축하했다.


    

 



그러나 사정이 있어 참석치 못한 분도 있겠지만보이지 않는 사진가들이 너무 많았다.

 출판사를 운영하면서도, 잘 못되어가는 사진계를 향해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았으니, 마음 꼬인 사람도 많을 것이다.

원로 분들까지 눈치만 보며, 아무도 탓하지 않으니, 어찌 그냥 볼 수 있었겠는가?



 


이 날은 사정상 뒤풀이를 생략한다고 밝혔으나, 어찌 그냥 헤어질 수 있겠는가?

아무도 말하지 않았으나, 한 사람 두 사람 술집 북촌으로 모여 들었다.

"부어라~ 마시어라~ 눈빛이 살아야 우리가 산다!"

 

사진, / 조문호



 


눈빛출판사 창립 30주년을 기념하는 북 페어는 한국 현대사를 읽을 수 있는 소중한 사진집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다,

최고50%에서 20%까지 활인 판매가 되고 있으니 사진집을 소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그리고 아래는 전시기간 중 대안미술 공간 스페이스22’에서 열리는 강연 일정이오니,

많은 사진인 들의 관심과 참여를 바란다.





1110()

오후 2- 330/ '대항매체로서의 다큐멘터리 사진' / 김성민 경주대 교수

오후 4- 530/ 내가 바라본 격동한국 반세기 / 일본 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

 

1113()

오후 4- 450/ 나와 아바이 마을 30/ 사진가 엄상빈

오후 5- 550/ 세계 속의 한국 사진 / 사진평론가 최연하

 

1115()

오후 4- 420/ AP통신 사진기자 김천길선생 추모행사

오후 430- 520/ 역사의 현장에 선 사진가 / 사진가 정태원

오후 530- 620/ 오늘의 기념사진 / 사진가 전민조

 

1117()

오후 2- 330/ 눈빛과 한국현대사진 30/ 사진평론가 진동선

오후 4- 530/ 인문학으로서의 한국사진의 지평 / 사진평론가 이광수

































































































정영신사진


























 

 





지난 30일 황규태선생께서 점심을 산다는 연락을 받았다.
‘동강사진상’을 받아 한 턱 쏘는 것 같았으나,
이러다 신용카드 구멍 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상금도 사진계 발전을 위해 주최 측에 희사하셨는데,
돈을 너무 많이 쓰는 것 같아 내심 걱정되었다.
시상식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오면서도 엄상빈씨와 이한구씨에게 전화해
남아있는 후배들을 위해 충분히 대접하고, 영수증만 달라하지 않았던가.






약속장소인 ‘한일관’에는 황규태선생을 비롯하여
한정식선생, 엄상빈, 이한구, 이규상, 이창남, 곽명우씨가 나왔다.


‘눈빛출판사’ 이규상씨는 따끈따끈한 김용철씨의 ‘경의선’ 사진집을 가져 왔더라.

오랜 추억으로 끌어들이는 좋은 사진이었다.


황규태선생께서 맛있는 갈비에다 냉면, 그리고 소주까지 사 주셨다.
그 날의 화제는 단연 ‘동강사진상’이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로 기절초풍할 일이 많더라.






몇년 전 노순택씨가 수상할 때 티셔츠 차림으로 참석했단다.
그런데 시상식에 참석한 사진가 윤주영선생께서
‘수상자 차림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셨단다.


그래서 영월장에 가서 촌놈 가다마이를 사 입고 상을 받은 것이다.
이번에도 오셨다면, 황규태선생도 영월장에 가실 뻔 했다.
황규태선생도 청바치에 티셔쳐만 걸치고 오셨으니 말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강홍구씨가 상을 받을 때의 일이다.
수상자가 결정된 후, 주최 측에서 작가에게 연락했더니,
강운구씨를 잘 못 알고 전화하지 않았느냐고 되물었단다.


나 역시 받을 군번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전혀 예상하지 못할 일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심사위원들의 귀띔도 없었을까 의뭉스러웠다.






또 하나는 작년에 수상한 정동석씨 일이다.
당시 병원에 있어 상도 아들이 대신 받았다는데,
문제는 수상자전이 끝난 후, 반송하는 과정하서 작품이 손상된 것이다.
작가가 문제를 제기했으면, 배상하거나 사과해야 할 텐데,
운영위원장이 병원에 찾아와 오히려 작가를 나무랐단다.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아, 법정에 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참 별일들이 많다.
사진박물관에서 작가들의 작품을 허술하게 다룬다는 것도 그렇지만,
상이 도대체 무엇인지 되 씹는 시간이 되었다.
사진상을 심사하는 기준은 무엇이며,
얼마나 전지전능하신 신의 심사위원인지도 궁금했다.






이제 상의 운영규정을 이원화해야 한다.
문제되는 것은 다 돈 때문이다.

더 이상 사진가들이 반목하는 일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상금은 가난한 젊은 작가들의 창작지원금으로 주고,
사진에 대한 가치나 공적을 높이사는 상은 명예만 주어야 한다.






그 날 이규상씨도 말했다.
일찍 황규태선생께서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께 상을 거절하라고 말리려했으나, 시기를 놓쳤다는 것이다.





황규태선생께서는 진작 상을 받아야 할 분이었으니, 마지막 좋은 선례로 남기자,
어차피 상금도 받지 않았으니까....
더 이상 상 때문에 사진인들 조롱거리를 만들지 마라.

더러운 꼴 그만 보고 싶은데, 목숨이 너무 질기다.

사진, 글 / 조문호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사진집표지]


사진가 마동욱씨의 하늘에서 본 영암사진전이 지난 21일 오후 5, 남대문 벤로갤러리에서 개막되었다.

그는 1996년부터 고향 장흥을 꾸준히 기록해온 향토사진가다.

고향에 대한 지극한 애착은 탐진강의 속살’ ‘고향의 사계’, ‘하늘에서 본 장흥등 여러 권의 사진집을 출판하며 장흥을 기록해 왔다.

그러나 이젠 고향인 장흥을 넘어 영암의 전 마을을 기록하여 전시와 사진집을 출판하게 된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미 강진군 작업도 끝낸 상태인데다 계속 다른 곳으로 작업 반경을 확대해 가고 있다.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만이 아니라 드론을 띄워 곳곳의 도면 같은 부감사진을 찍어 신판 대동여지도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발품 팔아 전국을 누벼 만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화가 김 억씨의 목판화 작품을 비견할 수 있으나,

드론으로 기록한 마동욱씨의 사진은 정확도에서 이에 비할 수 가 없는 것이다.


 

일관된 대상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집념이 다큐멘터리사진의 소중한 덕목이 아니던가?

그는 곁눈질 하지 않는 사람이며, 예술사진 한다며 폼 잡지도 않는다.

잘 살지도 못하는 형편에 숱한 돈을 작업에 쏟아 부으며 전전긍긍하는데, 사실 이런 공익적인 기록은 정부에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던가?

그 뿐 아니다. 지인들의 전시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 축하해 주고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다.

서울 사는 나도 그처럼 찾아다니지 못하는데, 사람이 너무 좋아 탈인 것이다.

잔재주 좀 부린다고 온갖 똥 폼 다 잡으며, 인간성이라고는 전당포에 맡긴 덜 떨어진 사진가들이 얼마나 많은가?

예술에 앞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어느 원로 예술인의 말에 무릎을 칠 그런 사진가다.


 

그동안 얼마나 남을 도와주었으면, 얼마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단다.

어느 사진가의 전시회 뒤풀이에서 한 후배가 모자를 벗어 술값을 거두었다고 한다.

막상 거두고보니 실제 술값에 미치지 못하는 적은 액수였단다.

그렇다면 거둔 돈을 전시 작가에게 전해주어 계산하게 해야 하는데, 거둔 돈을 마동욱씨에게 주어 나머지를 계산하게 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너무 좋으니, 그를 무슨 호구로 보는 것이다.

왜 이 이야기를 새삼 꺼내느냐 하면 그렇게 도움 받았던 많은 사진가들이 정작 그의 전시 개막식에는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사진판에 싸가지 없는 사진가들이 너무 많다.

인사 받으려고 전시장에서 사진 찍어 블로그에 올리고, 전시리뷰 만들어 신문사에 투고한 것은 아니지만,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행여 잘못이라도 지적하면 두고두고 씹어 돌린다.

그 욕이 돌고 돌아 내 귀에까지 전달되는데, 그런 인간을 위해 일한 게 후회막급일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물론 신문사에서 월급 받는 정식기자거나 원고료 받기 위해 일 한다면 인사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은 가난한 신문사를 돕는 뜻도 있지만, 오직 전시 작가에 대한 배려였다.

그것도 괜찮은 전시라면 간단한 일이겠지만, 안면 때문에 전시 가치도 없는 글을 쓸 때는 얼마나 머리 아픈지 모른다.

남에 대한 배려라고는 파리 뭐 만큼도 없는 사진인들이 도처에 늘려있다.


 

얼마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일본서 활동하는 양승우씨의 초대전이 인디프레스에서 열린 날이다.

양승우 전시리뷰를 작성하기 위해 전시장을 찾았는데, 그날따라 보조 건전지가 없어 카메라가 작동되지 않았다.

마침 그의 전시에 사진 찍어주고 전시리뷰까지 써준 후배사진가가 옆에 있어 작가 프로필사진을 한 장 찍어 달라고 부탁하며

사진 보낼 이메일을 건네주었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감감소식이었다.

사진을 전해주기 싫었다면 처음부터 거절했으면 다른 분에게 부탁할 수도 있었는데, 정말 난감했다.

대관절 무슨 이유일까? 감히 예술사진가에게 신문에 게재할 프로필 사진이나 부탁해서 일까

아니면 원고료가 없어서일까? 그렇다면 입은 두었다가 어디에 쓸까?


 

이런 저런 일로 사진하는 사람들에게 실망을 많이 해 이젠 특별한 관계가 아니면 사진전엔 잘 들리지도 않는다.

그랬더니 나보다 더 바쁜 정영신씨가 그 일을 대신해 주고 있다.

정영신씨도 마동욱씨 처럼 사람이 좋으니, 아는 분들의 전시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 같은데,

아무튼 마음의 상처라도 입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진판의 문제를 거론하다보니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는데, 다시 마동욱씨가 전시하는 하늘에서 본 영암으로 돌아간다.

이번에 펴낸 사진집을 살펴보면 영암읍 뿐 아니라 삼호읍, 덕진면, 금정면 등 11개 읍면 소재지 마을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사진에는 시골 논두렁, 밭두렁에서 집으로 연결되는 아기자기한 길들이 사방으로 뻗어 있는데,

주민들이나 그곳이 고향인 분들의 입장에서는 더 없이 소중한 사진으로 얼마나 많은 추억이 담긴 장면 장면이겠는가?

수십 년을 살았어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고향산천을 훨훨 나는 새의 눈으로 구석 구석 볼 수 있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눈빛출판사에서 펴낸 하늘에서 본 영암600여 개의 영암 마을 모두를 드론으로 촬영한 컬러사진 600여 장을 수록하고 있다.

자연경관이 수려한 국립공원 월출산과 영산강하굿둑을 중심으로 펼쳐진 영암군의 전형적인 취락구조와

자연생태를 보여주는 상공지리지인 것이다.

     


 75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에는 영암군의 4계를 담은 컬러 사진 50여 점이

영암 특산품이 담기는 여러 가지 농산물 박스위에도 펼쳐져, 고향에 대한 정취를 더욱 더 일깨워 주고 있.


 

마동욱이 기록한 고향마을 사진은 이 땅의 모습과 생태가 어떠한 변모 과정을 거쳐 왔고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도 암시해 준다.

고향이 그리운 분은 고향 앨범처럼 펼쳐놓은 마동욱씨의 영암 사진전을 꼭 한번 관람하기 바란다


 

사진전 개막식에는 작가 마동욱씨의 내빈 소개에 이어 전남도의원 우승희씨와 무영스님,

눈빛출판사 이규상대표, 사진가 엄상빈씨가 차례대로 축사를 하였으며,

사진가로는 전민조, 김보섭, 김문호, 정영신, 남 준, 박찬호, 곽명우씨가 참석하여 전시를 축하했다.

 

사진, / 조문호



























































 

 





잃어버린 카메라를 가까운 지인들 도움으로 한 달 만에 구하게 되었다.
카메라가 없으니 동자동과 인사동 기록은 물론 꼭 필요한 사진조차 놓칠 경우가 많았는데, 너무 고마웠다.

후배 사진가 하재은씨가 선물한 ‘라이카’도 있지만,

그 카메라는 행사 사진이나 부탁받은 촬영에만 사용하지, 일반적인 생활사 기록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잃어버린 Nikon Coolpix P310 카메라는 휴대하기 편한 컴펙트 카메라라 술상에 젓가락 놓듯 항상 같이 놀 수도 있지만.

손바닥에 쏙 들어가 상대방이 의식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찍을 수 있는 편리한 카메라다.

그런데도 기능마저 탁월해 큰 카메라에 전혀 손색 없다.

이 카메라는 5년 전 정영신씨가 38만원에 구입해 물려 받아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지난 년 말 노숙인과 놀다 잃어버려, 다시 구하려니 단종 되고 없었다.

기가 수만 좀 높아졌지 바뀐 게 전혀 없는 새 제품으로 둔갑해 58만원에 출시되어 있었다.

도둑놈이라 욕할 수도 없는 건, 그들은 돈에 영혼을 판 장사꾼이 아니던가.

카메라를 잃어버린 후, 중고 카메라를 구입하려 카메라점마다 돌아 다녔으나 도무지 구할 수가 없었다.

휴대폰처럼 사용하다 버리는 카메라인지,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새 모델을 살 수도 있지만, 그들의 상술에 끌려가는 것 같아 싫었다.






사실상, 살 돈도 없었다.

진즉부터 카메라를 잃어버린 것을 알게 된 김명성씨가 여러 사람에게 거두어 30만원을 만들어 주었으나, 사지 못했다.

이 곳 저곳 알아보았으나 카메라 자체가 없는데다, 돈이란 호주머니에 넣어두면 없어지는 요물이나 마찬가지다.

오랜만에 만난 조카 녀석들 용돈도 주고, 모자라는 술값을 보태는 등 야금야금 썼더니, 핫바지 방귀 새 듯 사라지고 없었다.

걱정에 걱정을 머리에 이고 살았는데, 몇 일전 원로사진가 한정식선생의 오찬장에서 또 다시 구세주를 만난 것이다.

디지털카메라를 잘 아는 김생수선생께 행여 구 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더니,

옆에 있던 엄상빈씨가 인터넷 중고시장에 검색하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뜸 최경자씨가 5만원을 내 놓으며 시동을 걸어 주었고, 엄상빈, 정영신씨가 각각 5만원씩 부담한 것이다,

모자라는 돈은 그 자리에도 없던 마동욱씨까지 합세하여 돈을 마련해 주었다.

이번엔 정영신씨가 직접 돈을 맡아 인터넷에서 찾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리 뒤져도 중고 카메라는 없었다는데, 이월 상품 하나가 나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즉각 돈을 보냈다고 한다.

신품인데도, 처음 나올 때의 정품보다 싼 25만원에 구입했다니, 횡재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정선 고드름축제장으로 떠나야 하는데, 주문한 카메라가 오지 않았다.

이번에 떠나면 축제가 끝나는 25일경에나 돌아 올 수 있으니, 마음이 다급했다. 

동자동에 카메라를 인수할 사람도 없는데다, 축제 사진도 찍어야 하니 그냥 출발할 수 없었다.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어 택배회사까지 찾아가 어렵사리 카메라를 인수받아 정선으로 떠나게 되었다.

오랜만에 만져보는 카메라에 기분이 충천했다.

이 카메라는 엄상빈씨를 비롯한 네 분의 사진가들이 사주었지만,

그 이전부터 김명성씨를 비롯한 인사동 사람들의 마음까지 담겨 예사 카메라가 아니다. 


이 조그만 카메라에 십 여 명의 정성이 담겨 있으니, 그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 분들의 마음에 보답하는 길은 정신 바짝 차려 좋은 사진을 찍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좋은 사진이란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사진에 앞서, 사람답게 사는 세상에 이바지하는 사진이고 싶다.





이런 저런 일로 좀 늦게 정선으로 출발했는데, 정선에 도착하니 오후 네 시쯤 되었다.

전시장으로 만든 콘테이너 박스가 준비되어 있었으나, 좁은 면적에 그 많은 사진을 어떻게 걸어야 할지도 난감했다.

늦어도 디피를 끝내고 싶었으나, 전기 연결이 잘못 되었는지 불도 켜지지 않았다.

정영신씨와 의논하여 대충 자리만 잡아두고 나올 수밖에 없었는데, 숙소가 마땅찮았다,






만지산 집은 추운 겨울에는 살 수 없는 집이다.

군불을 때면 바닥은 따뜻하지만, 산중의 찬바람이 바로 들어오는 집이라, 방안에 있어도 입김이 피어 오른다.

그래서 보온텐트를 방에 치려 했으나, 모든 매장에서 제품을 철수하고 없었다. 이젠 봄 상품을 준비한다나...






하는 수 없이 인터넷으로 주문하고 내려 왔는데, 그 때까지 텐트가 도착하지 않았다.

10여 년 전에도 정선 읍내 일보러 나왔다가, 쏟아지는 폭우에 강물이 불어 이틀 동안 여관에 머문 적이 있지만,

이번에도 여관신세를 질 수 밖에 없었다.


 



먼저 ‘동호장’에 방이 있는지 전화를 걸었더니, 오늘은 방 하나에 5만원이지만, 내일부터 10만원이라는 것이다.

평창올림픽을 기화로 바가지 씌울 생각부터 하는 돈벌레라는 생각이 드니, 두 번 다시 돌아보기도 싫었다.

'그림모텔'에서 4만원에 잤는데, 생각 외로 괜찮은 여관이었다.

모든 게 다 좋았으나, 욕실 벽의 누드 타일이 좀 야하더라.

 

정영신씨와 모처럼 티브이를 같이 보는 시간도 가졌다.

둘 다 티브이가 없기도 하지만, 그 중독성에 이미 쐬기를 박은지 오래기 때문이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 채, 바뀌는 화면만 쳐다보다 잠들어버렸다.




 

정선 고드름 축제 개막식이 있는, 그 이틀 날은 더 추웠다.

축제장에서 정선군청에 근무하는 전상현씨를 만났으나, 전시준비에 정신이 없어 한가하게 인사 나눌 틈도 없었다.

전시 벽이 액자 무게를 지탱할 수 없을 것 같아 각목과 전기드릴이 필요했다.

어렵사리 구하여 디피를 마무리할 수 있었는데, 전시공간이 좁으니 유치원생 사생대회전이 연상되었다.


    

 



그 때서야 고드름으로 장식한 조양강 축제장 모습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둘 다 전시장은 비워두고 어린애처럼 구경하러 돌아다녔는데,

마침 취재 중이던 엠비시 황지웅 피디와 노기환 엠씨를 얼음동굴에서 만난 것이다.

정영신씨의 장터에서 백 만 가지 표정을 담다.’사진전이 열리는 전시장으로 안내했는데,

배고픈 줄을 어떻게 알았는지, 맛있는 음식을 가져다 주었다.

겨울송어낚시 행사장에서 노기환씨가 직접 잡았다는 송어를 회쳐 왔는데, 너무 맛있었다.

야전의 식사는 이럴 수도 있다며, 둘 다 손가락으로 허급지급 먹어 치웠다.



 


오후 두시 무렵 열린 개막식장에서 전정환 정선군수를 비롯하여 반가운 분들을 여럿 만났으나. 귤암리 주민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 추운 날씨라 나올 엄두를 내지 못한 것 같았다.

축제의 열기는 고드름을 녹일 정도로 후끈했다.



    

 

썰매장에서 열리는 어린이들의 경기를 구경하다보니, 올림픽 성화 봉송팀이 도착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정선은 알파인스키활강과 슈퍼대회전, 복합 종목이 열리는 2018 평창동계올림픽대회 개최지가 아니던가.


올핌픽 개막을 이틀 남긴 시점의 성화봉송은 구절리와 아우라지를 잇는 레일바이크와 풍경열차를 타기도 했고,

배우 김보성씨는 병방치의 짚와이어를 타고 내려오기도 했다.

정선 고드름 축제가 열리는 조양강변 일원을 지날 즈음정선군청 앞에 마련된 무대에서는 축하공연이 펼쳐졌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화가 김형구씨를 비롯한 많은 군민들이 정선군청 앞을 메웠다.

많은 공연이 있었지만, 정선군립 아리랑예술단의 아리랑 별곡은 언제 들어도 정겹다.

평창동계올림픽 개막 축하공연이 끝나자 전정환 정선군수의 환영사와 김옥휘 정선군의회의장의 축사도 이어졌다.



 


그러나 그 날은 축하공연 때문인지 정선시내에 빈 방이 없었다.

결국은 증산에 있는 리브사이드모텔까지 찾아 가야 했다.

정선에서 승용차로 30분 정도 소요되지만, 요금도 4만원인데다 침구도 깨끗했다.

그동안 인터넷에 글을 올리기는 커녕 컴퓨터 구경도 할 수 없었으나,

그 날 저녁만은 컴퓨터에서 필요한 정보를 찾는 눈팅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 이틀 날은 보온 텐트가 도착하여 귤암리 만지산에서 잘 수 있었지만, 결코 녹녹치 않았다.

얼마나 추운지, 두 사람이 양쪽 아궁이에 나누어 앉아 군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 아닌가 생각된다.

추위도 녹일 수 있는데다, 바짝 마른 장작에서 타 오르는 불길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불에 파묻혀 있다보니, 방에서 연기가 새어 나왔다.


깜작 놀라 들어가 보니, 이불에 불이 붙은 것이다.

불을 너무 많이 지피기도 했지만, 아랫목 시멘트 갈라진 틈으로 불길이 올라와 붙은 것 같았다.

일찍 발견하여 큰 탈은 없었으나, 자칫했으면 큰 산불로 옮겨 갈 수도 있는 여건이라 아찔했다.



 


주변을 정리하고 텐트 안에 들어가 누우니, 마치 산행에 나선 기분이었다.

바닥이 따뜻해 그리 춥지는 않았으나 텐트 밑으로 기어 들어오는 한기에 잠을 설쳐야 했다.

가마솥에서 밤새 끓은 물로 세수는 할 수 있었으나, 식사는 불가능 했다.

언제, 아침 식사라고 정해두고 먹은 지도 없었기에, 전시장으로 바로 나왔다.


그러나 급히 나오느라 빠트린 것이 있어 정영신씨만 전시장에 내려주고 다시 만지산으로 돌아가야 했다

가는 길에 어머니 계신 묘소에 들려 술 한 잔 올렸는데, 어머니께서 뭣에 삐쳤는지, 가는 길을 막아버렸다.





내리막으로 꺾어지는 산길에서 핸들을 돌렸는데, 내려가는 길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후진은커녕 질질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핸들만 마음대로 움직여 준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결국은 벼랑으로 떨어져 소나무에 꽝 부딪힌 것이다. 충격의 순간은 얼마나 놀랐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마침 백열등을 갈기 위해 전구를 사서 앞자리에 놓았는데, 그게 팅겨나가 유리창을 치며 터진 것이다.

한동안 멍청하게 앉아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다친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운전석 문이 나무에 끼어 열수가 없어 옆 좌석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는데, 터진 유리조각부터 치워야 했다.

간신히 기어 나왔으나 걱정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 곳은 도저히 견인차가 진입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일단 그 곳에서 제일 가까운 아랫만지 골의 최연규씨 댁으로 내려갔다.

이 친구는 소를 50마리나 키우는데, 자동 물 공급기가 얼어 우사마다 돌아다니며 물을 주고 있었다.

차량 견인에 일가견이 있는 그에게 사정을 이야기를 했더니, 서둘러 따라 나서 주었다

사고현장을 보더니, 견인차로는 불가능하니 내일 포크레인을 불러 끌어내자는 것이다.

그럴려면 눈부터 녹혀야 하니, 염화칼슘 열 포와 모래부터 실어와 뿌려 두어야 일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오늘 밤에 서울 다녀오기로 한 계획은 이미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정영신씨에게 버스 편으로 혼자 다녀오라는 전화를 했으나 걱정스럽기 짝이 없었다.

만지산도 차가 없으면 꼼짝할 수 없지만, 정영신씨도 조양강변 행사장에서 나오려면 제법 걸어야 했다.


마침 최연규씨 트럭타고 정선 읍내에 열화칼슘과 모래를 가지러 가는 길에

전시장에 잠깐 들렸다가 정영신를 태워 귤암리로 들어 와버린 것이다.

서울행을 하루 연기 한 것은 피차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영신씨가 지켜보는 가운데, 신승철씨까지 합세하여 모래와 염화칼슘을 뿌렸다,

뒤늦게 소문 듣고 온 김익수, 윤인숙씨 등 여러명이 함께 어울려 술도 한 잔했다.

최연규씨 부인은 허리관절에 문제가 생겨 일어서지도 못하는 환자가 되어 있었는데,

최연규씨가 직접 두부찌개를 끓였으나 음식솜씨가 제법이었다.


그 자리에서 속이 후련한 반가운 소식도 전해 들었다.

2년동안 이어진 지루했던 만지산의 물싸움이 정선군청의 개입으로 종지부를 찍었다는 것이다.

김익수씨 노래로 술자리를 마무리하고, 윗방에서 하룻 밤 신세졌다.



    

 

그 이튿날 정영신씨는 윤인숙씨의 도움으로 전시장에 나가고, 난 포크레인 기사의 연락에 사고현장으로 올라갔다.

언 땅은 녹았으나, 내리막 시멘트 길이라 포크레인도 별 힘을 쓰지 못했다.

마을의 최종대, 나병연, 송용삼씨가 와서 보더니, 체인을 감아 끌어 올리더라도 견인차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견인차와 동내 주민들이 합세한 애마 구출작전이 펼쳐 진 것이다.


사람이 많으니 눈도 금새 치워지고, 내려 갈 길에 모래를 뿌리는 등,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난, 차가 끌려 나올 때 다칠세라 주변의 나뭇가지를 톱으로 자르기도 했는데,

두 사람이 당겨 감는 체인에 조금 식 조금 식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뼘만 움직이면 돌을 괴기를 반복한 결과 억측 서럽게 버티던 자동차도 결국은 끌려 나오고 말았다.

동네사람들의 지혜와 견인기사의 협력이 이루어 낸 결과였다.





차가 파손된 부분이라고는 앞 범퍼와 운전석의 백 밀러, 그리고 유리창 빗물막이 뿐이었다.

백밀러만 끈으로 묶어 고정시키니, 운행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남의 일이지만, 자신의 일처럼 도와주는 주민들의 따뜻한 마음이 고마울 뿐이었다.


마침, 함평에서 농사지은 쌀을 정선에서 먹기 위해 20킬로 실고 왔는데, 그 것이라도 최연규씨에게 사례했다.

동내 분들은 서울 갔다 와서 술자리 한 번 만들겠다고 약속하고, 정영신씨가 기다리는 전시장으로 차를 몰았다.

일요일 하루만 전시장을 다른 분에게 맡겨두고, 서울로 돌아 온 것이다.

정영신씨는 군청에 보내 줄 서류도 만들어야 하고, ‘서울문화투데이에 송고할 정선고드름축제기사 작성하느라 바빴다. 

나도 몇 일 동안 밀린 일기를 한꺼번에 쓰게 되었는데, 이야기도 길지만, 빠진 내용도 많은 것 같다.



    



월요일 아침 여섯시에 정선으로 출발해 다시 전시장을 지켜야 하는데, 날씨라도 춥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차피 25일까지 전쟁을 치루어야 하지만, 더 이상의 시련이라도 없었으면 좋겠다


추운 날씨였지만, 벗들과 이웃의 따뜻한 온정에 봄날 처럼 훈훈한 시간이었다.

동자동으로 복귀할 수 있는 날이되면, 그 땐 진짜 봄이겠구나.

 

사진, / 조문호






















 


강남 스페이스22’에서 열리는 김남진의 이태원의 밤, 호모나이트쿠스’전시가 오는 816일까지 열린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말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향락과 욕정은 밤에 꿈틀댔다.

통금이 있던 시절에도 외국인을 위한 호텔 나이트클럽까지 가서 주머니를 털지 않았던가.

술과 음악 섹스, 그것이 자유를 추구하는 젊은이들의 유일한 해방구처럼 설쳤다.

‘나이트’와 요즘의 ‘클럽’은 술과 음악과 춤, 이성이 어울린다는 점은 같지만, 그 섞이는 방식은 다르다.

나이트는 술 마시며 이야기 나누는 곳과 춤 추는 스테이지가 따로 있지만, 클럽은 그 경계가 모호하다.

테이블이 있긴 하지만 잠깐 앉아 쉬는 자리이지 그곳에서 몇 시간 동안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순 없다.

남녀가 만나는 방식도 다르다. 나이트의 핵심은 남녀 손님을 짝 지어주는 웨이터였다.

그런데 요즘 클럽은 웨이터도 부킹도 없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직접 가서 말을 걸어야 한다.

공간적 차이와 더불어, 더 개방적이고 주체적이며 평등한 방향으로 변했다.





그런데, 사진가 김남진씨가 ‘이태원의 밤’ 2탄으로 ‘호모나이트쿠스’전시를 열었다.
처음 전시를 연 80년대는 ‘현실과 발언’이란 사회 저항성 문화운동이 일던 때라, 김남진의 현실비판적인 사진도 한 몫 했다.

그 당시 사진판에선 흔치않은 작업이기도 했지만, 일단 반향을 일으킨 전시였다.

그 이후엔 사진관련 기획자로 교육자로 갤러리 관장 등으로 활동해 다큐 사진가로서의 기억은 잊어버렸다,

그런데, 느닷없이 30여년이 지난 오늘의 이태원을 다시 들고 나온 것이다.

이제 환갑을 맞은 사진가가 향락가를 기웃거리며 20대 젊은이와 어울려 사진 찍기가 그리 쉬웠겠는가?






난, 이태원의 퀴퀴한 술집 분위기는 좋아하지 않는다,

젊은 시절에는 음악에 미쳐 결혼 첫날부터 신혼여행으로 이태원에 간적이 있었다.

레코드 사러 간 김에 클럽에 들어갔으나, 외국인들 체취에 좀 질려버렸다,

그 뒤 한 두 차례 갔으나 연이 맞지 않았는지 갈 때마다 사고를 쳤다.

본래 춤추며 노는 것 보다 음악 들으며 조용히 술 마시는 걸 더 좋아해 클럽 체질은 아니다.


김남진씨 역시 이태원이 좋아서 찍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다.

80년대 발표한 사진들은 찍을 때의 두려움도 엿보였지만, 이성적이고 아웃사이더적인 사진이었다.

시대적 변화에 따랐겠지만, 세월이 지난 오늘의 작업은 전혀 달랐다. 두려움이 사라졌고, 이성적이기보다 감성적인 사진이었다.

흑백으로 보여 준 ‘이태원의 밤’과는 달리 강렬한 색이 주는 원색적인 분위기가 사뭇 감촉적이다.

디지털사진이 주는 강한 색으로 욕망과 열정을 극대화했다. 도발적인 이태원의 밤이 뿜어내는 열기는 절정에 달했고,

욕망에서 비롯되는 허망함까지 드러나고 있었다. 정적인 사진에서 동적인 사진으로 바뀐 것이다.

이태원에서 만난 젊은이와 외국인, 그리고 성 소수자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메시지도 전해주었다.






지난 26일 오후6시 ‘스페이스22’에서 열린 전시 오프닝에 갔는데, 마치 클럽에 간 것 같았다.

“놀 준비되셨습니까?”라는 특별한 파티였는데, 전시장에 조명과 음악은 물론 칵테일까지 준비해 놓았다.

함께 즐기며 작업해 왔던 이태원 클럽 분위기를 전시장에 끌어들인 것이다.

DJ가 틀어주는 음악과 바텐더가 만들어 주는 칵테일, 그리고 입구에서 찍어주는 팔목 스탬프까지 이태원클럽 그대로였다.

사진가들이 언제 전시장에서 함께 어울리며 춤추고 놀아본 적 있는가?


작가 김남진씨를 비롯하여 한설희, 구자호, 김석종, 김문호, 강제욱, 김광수, 고정남, 곽명우, 김보섭, 이규철, 박찬호, 

정영신, 서준영, 김영호, 한금선, 김봉규, 남 준, 최연하 이은숙, 마동욱, 이일우등 많은 사진가들이 신판 클럽을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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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를 축하하기 위해 양승우씨가 일본에서 오기도 했고, 사회는 이정환씨가 보았다.

그러나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았던지 음악이 있어도 춤추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음악은 약했으나 칵테일 맛은 좋았다.

홀짝 홀짝 받아 마시다 ‘북촌’으로 옮겨 와 소주를 마셨더니, 술이 받지않았는지, 어지러웠다.

결국 술집에서 뻗어버려, 쪽팔리게 김남진씨가 불러준 택시에 실려 와야 했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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