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을 유달리 좋아했던 사업가 강선화씨가

지난 28일 돌아가셨다는 안타까운 부고를 접했습니다.

고인의 극락왕생을 기원합니다.

 

상주 : 김진규(아들)

빈소 : 서울성모장례식장23호실

발인 : 2021년 12월30일

 

지난 날을 추억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세요.

아래는 인사동에서 찍은 생전의 모습과

‘인사동이야기’ 사진집에 게재한 강선화씨 글입니다.

 

 

"인사동에서 만난 두 사람"

 

인사동은 친정집 같은 포근함이 있다. 숱한 세월 드나들며 많은 예술가들을 만났지만,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사람은 화가 박광호씨와 사진작가 조문호씨를 꼽을 수 있다. 애잔하고 즐거운 두 사람의 상반된 기억이 너무나 뚜렷하기 때문이다.

 

박광호씨의 그림과 그의 삶은 너무 애잔하다. 전람회장에서 만난 그의 삶도 기구하지만 벽에 걸린 그림들이 마음을 적셨다. 생선뼈만 그려진 그의 그림을 구입했는데, 볼 때마다 애잔한 감상에 빠져 내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조문호씨는 인사동 ‘풍류사랑’에서 소설가 배평모씨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 몸 바쳐 최선을 다하겠다는 충성서약 같은 첫 인사로 어리둥절하게 하더니, 갑자기 술상 밑을 기어 내 앞으로 나와 놀라게 하기도 했다. 시종일관 개구쟁이처럼 좌중을 웃기는 그의 모습이 너무 신비스러웠다. 그의 절창 ‘봄날은 간다’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사람의 감정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한번은 ‘천포문학회’ 모임을 영월에서 가진 적이 있다. 시 낭송회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결정판은 아침에 찍은 기념촬영이었다. 참석한 삼십 여명이 사진을 찍기 위해 뜰 앞으로 모였는데, 대뜸 조문호씨가 “무슨 졸업사진 찍냐?”며 바지 지프를 내려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눈 깜짝할 순간에 모든 상황은 끝났다. 그 많은 사람의 표정이 천태만상인데, 내 생애 찍은 기념사진으로는 최고의 걸작이었다.

 

글 / 강선화

 




기다리던 쥐띠부인은 기어이 나타나지 않았다.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블로그에 올려놓고 날자와 장소만 알려주면 찾으러 가겠다고 했으나,

정작 날자와 장소를 올렸더니 애매한 글을 올려놓았다.






“[쥐띠부인-조문호] 네사진은 갖고 싶지 않다. 박광호 까마귀 그림과 맞바꿀 것이다
까마귀 그림 없이 네 사진 받을 생각 말아라
날 모욕 명예혜손 건으로 고소한 댓가는 내가 혹독하게 치루 게 할 것이다“






이런 글이 다시 올랐지만, 세발 까마귀 그림에 집착한 것으로 보아 올 것으로 생각했다.
약속한 날은 동강할미꽃 축제가 열리는 날이라, 혹시 길이 엇갈릴 수도 있겠다 싶어 집에 메모까지 해 두었다.
아무리 화가 났지만, 막상 얼굴 보면 옛날 생각나 사진과 그림을 모두 주려고 했다.
무슨 철천지 원수진 것도 아닌데다, 병석에 누운 박광호를 생각해서다.






그러나 내 기대는 빗나갔다. 약속한 29일의 해가 저물어도 쥐띠부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날 밤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며, 그림을 태울 것인가 아니면 더 두고 볼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 입에 두말 할 수도 없지만, 불길한 기운이 감도는 그림은 태우는 게 상책인 것 같았다.





태울려면 군불 지피는 아궁이에 집어 넣어버리면 간단할 것이나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박광호 까마귀그림을 3월30일 오전9시에 정선 윗만지산길 56-5 소재에서 태운다’고 못 박기도 했지만,

박광호를 생각해서라도 푸닥거리는 해 주고 싶었다. 돈만 있었다면 정선에 있는 무당도 불렀을 것이다.






그 이튿날 아침에 그림 태울 준비를 했다.
생각한 장소는 십 일년전 ‘만지산서낭당축제’ 때 여러 작가들이 작품을 내걸었던 밭 이였다.
당시 그 그림도 함께 걸었기에, 그 곳이 좋을 것 같았다.
산이라 불이 옮겨 붙을 수가 있어 가마솥 화덕을 옮기려니, 돌 계단이 무너져 오를 수가 없었다.
야외에서 삼겹살 구울 때 사용하는 가마솥 화덕의 무게가 보통은 아니었다.






하는 수 없어 돌계단 아래 자리를 잡은 것이다.
먼저 사진부터 찍어두기 위해 액자 유리를 제거했더니, 아련한 향수가 밀려왔다.
20여 년 동안 쌓인 겹겹의 세월 먼지도 먼지지만, 어렵게 살아 온 박광호의 지난날이 떠올라서다.
캔버스 살 돈이 없었던지, 세발 까마귀는 종이 위에 그려져 있었다.





디테일도 없이 덧칠한 검은 까마귀가 전면을 가득 차치하고 있었다.

세발로 버둥되는 까마귀의 기형적인 모습은 불구로 몸부림치는 화가의 자화상 같았다.

그래, 무거운 짐 다 내려놓고 훨훨 날아가거라.





마침 ‘전시장 가는 길’이라 쓰인 표석 옆에 진달래도 피어 있었다.
처음엔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아 세발까마귀 그림 화형식 퍼포먼스를 하려했으나 다 부질없는 짓이다 싶었다.

그냥 조용히 날려 보내기로 했다.






각목 세 개를 맞대어 고정시키고, 철사 줄로 액자를 매달았다.
화약처럼 마른 장작더미에 불을 붙이니 금세 세발까마귀에 불길이 옮겨 붙었다.
마치 불새처럼 허둥대는 까마귀 형상이 카메라 파인더에 들어왔다.






박광호 내외를 괴롭히는 악귀도 나를 괴롭히는 악귀도 모두 물러가라며 주문을 외웠다.



사진, 글 / 조문호



































이석필사진



올해도 변함없이 귤암리 벼랑에 동강할미꽃이 수줍게 고개 내밀었습니다
열세 번째 맞는 ‘정선동강할미꽃축제’가 오는 3월29일(금)부터 3월31일(일)까지
정선읍 귤암리 ‘동강생태체험학습장’에서 열립니다.

그리고 박광호 까마귀그림은 3월30일 오전9시 무렵 태울 작정입니다.
장소는 정선군 정선읍 윗만지산길 56-5 소재, 저의 작업실 마당입니다.


쥐띠부인이 그 그림을 가져가려면 3월29일까지 찾아와 정중한 사과와 함께

내 사진을 돌려줘야 찾아갈 수 있습니다.

태울 것이 두려워 명예훼손으로 고소장을 접수시킨 모양인데, 어림없습니다.




토요일 저녁 무렵, 인사동 ‘유목민’으로 낭인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글쟁이 조준영이가 몸 아픈 김상현을 위해 불러냈는데,
다들 대가리 컷 다고 말을 잘 안 듣는다.
기껏 광대 이명희와 장돌뱅이 정영신, 점쟁이 신단수가 전부다.





일단, 주인공 딴따라 몸이 좋아져 기분이 좋았다.
기가 살아 3월14일부터 신사동 ‘뮤아트’에서 벌리는 축제에 오라 했고,
이명희는 3월20일부터 뮤지컬 기타리스트 공연한다는 소식도 주었다.
찍사만 졸라 바빠지게 생겼다.






점쟁이 신단수는 요즘 잘 나간다.

신단수는 필명이고 본명은 김효성인데, 바로 인사동 '아라아트' 김명성이 친동생이 아니던가.
‘매일경제’와 ‘제주신문’ 두 군데에, 오늘의 운세에다 정치인 운세까지 풀어대니,

얼마나 바쁘겠는가? 문전성시다.
그 날도 정치꾼들 팔자를 불어대기 시작하는데, 약 좀 팔더라.
오죽 잘 나가면, 복채를 내야 할, 내가 받았겠는가?






요즘 쥐띠부인이란 미친년한테 좆 물려 내 정신이 아니다.
점쟁이 신단수는 쥐띠부인 수를 훤히 깨고 있었다.






어저께 페북에 ‘쥐띠부인은 미친년인가? 나쁜년인가?“라는 글을 올렸지만,
너 정말 잘 못 물었다. 니 죽고 내 살기로 뽄때를 한 번 보여 줄란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던, 몰캉몰캉한 옛날 껄득이가 아니다.





불길한 까마귀그림에 눈깔이 뒤집어진 모양인데,

그게 탐나면 그냥 달라하지, 왜 병문안 핑계로 미친 척 쇼를 하냐?






페친인 광대나 딴따라는 그 사건을 잘 알았으나, 글쟁이는 몰랐다.
장돌뱅이가 핸드폰으로 보여주니, 제목이 찝찝하단다.






다들 정선 귤암리에서 벌릴 동강할미꽃 축제날 오라고 나발 불었다.
박광호 까마귀그림 화형식 퍼포먼스에서 한 판 놀자는 거다.
“한 자락 뽑을라카마, 목아지를 위해 날계란이라도 좀 묵어둬야 겠다.
봄바람에 연봉홍 치마나 한번 날릴까 보다.

그 날 잘하면 미친년 신도 내려줄 수 있는데...




 


뒤늦게 청계광장에서 518망언자 구속시키라고 데모한 정영철, 최명철, 김이하 등

데모꾼들이 나타나 주막이 흥청대기 시작했다.  
김이하는 양놈 좆 같은 대포를 들이대고 사정없이 박아 재켰다.






아무리 술 마시기 바빠도, 노래 한 곡 없어서야 되겠나?
딴따라 더러 한곡만 뽑으라고 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불렀다.
‘떠날 때는 말없이’라며 청성 스럽게...






“그 날 밤 그 자리에 둘이서 붙었을 때
똑같은 그 순간에 똑 같은 마음이
달빛에 젖은 채 밤새도록 즐거웠죠
아~ 그 밤이 꿈이었나 비 오는데
두고두고 못 다한 말 가슴에 새기면서
떠날 때는 말없이, 말없이 가오리다."

사진: 정영신,조문호 / 글 : 조문호






주연: 김상현, 조준영, 이명희, 정영신
조연: 전활철, 신단수, 정영철, 최명철, 김이하
엑스트라: 이인섭, 윤승길, 김교서, 이필립, 이용우, 김택규, 박완규 등등

촬영: 조문호

















































전활철이가 드디어 민예문구사업을 시작했다네.






좌로부터 쥐띠부인과 박광호



불운의 화가 박광호가 불쌍하다.

한 평생 가난하게 살다 희귀병에 걸렸는데, 쥐띠부인을 만나며 마음 고생이 너무 심했다.

그 불 같은 성격에 다 참고 견디며, 아들 둘 데리고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가?

그런데, 박광호가 요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들었다.



박광호작 [지구촌 영상문학 카페에서 스크랩]



그는 앙상한 생선뼈를 그려 온 화가로, 만난 지 40년이 된 동생 같은 후배다.

생명이 도려내 진 물고기 뼈를 통해 인간의 가학성과 소외문제로 절규했으나,

때로는 꽃이나 새 같은 서정적인 내면 풍경을 그리기도 했다.




박광호작 [꽈꼴다원 카페에서 스크랩]



물고기 뼈로 그 만의 조형언어를 그려 낸 그림들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은 작업이다.

물고기 뼈를 통해 소외된 자들의 고통을 담아왔는데, 그의 초창기 그림들은 너무 처절했다.



박광호작 [유카리화랑 카페에서 스크랩]



지금은 없어진 인사동 ‘실내악’에 걸린 그림 한 점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외상 술값으로 그려 준 그 그림은 빈 접시에 앙상한 생선뼈만 그렸는데, 마치 불행한 박광호 자화상 같았다.

그런데, 그 이후 그림부터 상형문자처럼 조형화, 도식화되어 아쉬운 감도 들었다,



박광호작 [숲속의 음악세상 카페에서 스크랩]




그와의 인연은 70년대 부산 남포동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꾸려가던 ‘한마당’이란 국악주점 단골로 드나들 때, 얽힌 사연이 만만찮다.

허구한 날 돈 없이 마시고는, 그 자리에 엎드려 잤다.

그는 술만 마시면 끝장을 보는 체질이라 같이 자기도 여러차례 잤다,

사진에 미쳐 다 말아 먹고, 서울 올라오며 한 동안 박광호를 잊고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인사동 포장마차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는데,

시국사범으로 광주교도소에서 일 년 넘게 살았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들었다.



박광호작 [꽈꼴다원 카페에서 스크랩]




그 때부터 그와의 인연이 다시 이어졌다. 그를 볼 때마다 고난받는 예수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쥐띠부인을 만난 후로는 개봉동과 강메, 행신동으로 옮겨 다녔는데, 사는 게 순탄치 않았다.

개봉동 집 부근에 카페를 운영할 때는 가게에 불을 지러기도 했다. 

강메에서는 철거될 빈집에 들어가 2년가량 살았는데, 억새풀이 어우러져 분위기는 좋았다.

그런데, 거기서도 불을 질러, 사는 꼴을 가까이서 안보니 속은 편했다.

뒤늦게 찾아가 타다 남은 작품을 찍기도 했는데, 그의 강직한 성격은 아무도 못 말린다.




박광호작 [유카리화랑 카페에서 스크랩]




그 이후 다행히 행신동 임대주택에 살게되어 잘 됐다고 좋아했는데,

그 때부터 근이양증이란 희귀병이 찾아와 앉은뱅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쥐띠부인 정신병까지 생겨 불운이 겹친 것이다.

술만 마시면 넘치는 쥐띠부인의 극성스러운 성격에 너무 힘들어 했다.



1993년 의정부, 천상병선생  장례식장에서, 좌로부터 세번째가 박광호다



그래도 가끔 술을 사들고 행신동 아파트로 찾아 갔으나,  쥐띠부인 못 마시게 하려고 박광호가 술을 끊어버렸다.

때로는 쥐띠부인의 정신병 증세가 심해져 병원에 입원시키기도 했는데,

일어서지도 못하는 장애인이  밥 해먹는다는 것을 한 번 생각해보라.




오른쪽이 박광호며 안 쪽에 김용문씨도 보인다. 1990년 인사동 여관방에서,..



어느 날 그의 집에 가 보니, 작품 중에 별난 작품이 한 점 눈에 띄었다.

전면에 까마귀 한 마리가 버둥대는 형상을 크로즈 업 하였는데, 왠지 불길했다.

평소 그림과는 달라 유심히 쳐다보았더니, “형! 그 그림 맘에 들면 가져가”라며 싸 주었다.



2011년 천상병선생 의정부 묘지에서, 좌측 전강호씨와 차안은 박광호씨



남의 작품을 탐내거나 손 벌린 적이 한 번도 없으나, 그의 성의를 거절할 수 없었다.

오래 전 신세진 게 마음이 걸려 작품이라도 한 점 주고 싶은 것 같아 그냥 받아왔다.

그 그림을 정선에 가져다 놓은 지가 벌써 20여 년이 되었는데,

그림만 보면 불길한 예감이 들어 한 번도 벽에 걸지 못하고 모퉁이에 세워 두었다.

불길한 예감에 마음이 편치 않았으나, 버릴 수도 없었다.

좌우지간, 그 그림을 갖다놓은 뒤 부터 풀리는 일이 없었다.



정선 만지산 작업실 모서리에 세워 둔 박광호작품



2013년 10월,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남극과 북극을 오가다’란 글을 올리며

만지산 작업실 일부분을 찍은 위의 사진을 올렸는데, 아마 그 그림을 알아 본 듯했다.

마치 악의 그림 같은 걸 뒤늦게 보았으니, 신들린 여자 눈에는 꽂혔는지 모르겠다.

작품이 탐나면 그냥 필요하다며 달라하지, 왜 병문안 핑계로 미친 척 쇼를 하냐?



2014, 박광호



한 동안은 박광호가 안부 전화를 걸어 왔으나, 일 년 전부터 소식이 끊겨 버렸다.

‘쥐띠부인’이란 별명으로 인터넷에 들락거리며 신이 내린 무당이라는 등

여기 저기 휘젓고 다녀 아예 소통 자체를 끊어버렸다.

안부를 묻고 싶어도, 극성스러운 그녀와 말 섞기조차 싫었다.



병원에 입원 중에 참석했던, 일산에서 열린 단체전에서 찍은 사진으로 뒤에는 아들이다.



뒤늦게 요양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화가 전강호씨로 부터 전해 들었다.

인사동 ‘유목민’ 모임에서 함께 병문안 가자는 이야기도 했으나,

환자가 목에 호스를 꽂아 통화를 할 수 없는데다, 아무도 요양원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쥐띠부인의 극성스럽고 악랄한 처세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멀어져 버린 것이다.

다들 쥐띠부인을 만나는 것은 물론, 통화조차 꺼려해 미루어 왔다.



2003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박광호전 개막식에서, 그 때만 해도 많은 벗들이 모였다,



늘 마음의 짐이 되어 기회만 기다렸는데,

느닷없이 ‘쥐뛰부인‘으로 부터 놀라 자빠 질 문자메시지를 받은 것이다.

“조문호, 박광호가 1년간 요양병원에 입원 중인데 전화도 없고 병문안도 오지 않는 게 도리냐?

박광호가 그린 세발까마귀 그림 아래 주소로 보내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신1동 샘터마을 222동 404호, 바로 부쳐라”



2013, 인사동 ;아라아트'개관 전에서



그 불길한 그림을 돌려달라니 반갑기도 하지만,

평소에 '오라버니~'라고 아양 떨며 꼬리 치던 여자가, 손 위 사람에게 보낸 막말 메시지에 속이 뒤집혔다.

전화가 계속 울렸으나 받게되면 쌍욕부터 튀어 나올 것 같아 참고 있는데, 두 번째 메시지가 왔다.

‘너 내 전화 좋은 말로 할 때 받어!’

결국 연결 되지 않으니, 정영신씨께 전화해, 나더러 개 새끼라고 욕을 해대며,

그 그림은 짓게 될 박광호박물관에 들어 갈 작품이라는 등 헛소리를 해대며, 빨리 보내라는 것이다.

그렇게 막말할 군번도 아니지만, 너무 돌변스러운 행동에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막막했다.



녹번동 '풍년식당'에서 정영신, 조준영씨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마침 ‘인사동 사람들’ 맴버인 조준영시인이 녹번동으로 온다기에 함께 자리했다.

정영신씨 집을 방문해 인근 식당으로 밥 먹으러 갔는데, 또 다시 메시지가 온 것이다.

“너 내가 어물 적 넘어갈 줄 알면 큰코다쳐! 좋은 말 할 때 박광호 세발 까마귀그림 택배로 부쳐!“





조준영시인은 쥐띠부인을 본 적이 있어, 사연을 설명하며 전화 메시지를 보여 주었다.

메시지를 본 조준영씨가 “그 그림 보내 줘 버려요”라고 잘라 말했지만, 그렇게 간단히 처리할 문제는 아니었다.

이젠 행동을 제지하는 남편마져 병석에 누워 꼼짝할 수 없으니,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듯하다. 

지리산으로 내려 간 박한웅씨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도 여럿 곤욕을 치루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와 페이스북을 더나들며 인사동 소식은 물론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훤히 꿰고 있었는데,

병문안 못 간 것에 화가 났다면, 내가 입원하거나 길흉사가 있을 땐, 왜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나?

그리고 메시지를 잘도 보내면서 박광호가 입원했다는 메시지는 보낼 수 없었나?

순리대로 정중히 메시지를 보냈다면, 당장 정선 갈 수야 없지만, '동강할미꽃 축제' 때 까지만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2014 '아람누리미술관'에서 열린 '일산미술회' 단체전에서....



이제 박광호와의 인연을 끊던지, 이번 기회에 불운의 씨앗을 불태우던지, 결정해야 겠다.



“‘쥐띠부인에게 전하니, 단단히 새겨들어라.

오는 3월 하순 정선 귤암리에서 열리는 동강할미꽃 축제가 끝나는 날,

그 불길한 까마귀 그림을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태울 것이다,

그 그림이 필요하다면, 태우기 전에 찾아와 정중히 사과하면 주겠다.

그렇지만 액운을 다시 끌고 가니, 박광호와의 인연은 끝이다.

그 대신 '인사동, 그 기억의 풍경' 전시가 끝난 2007년도에 갖다 준, 사진작품을 가져오라.

액운의 까마귀 그림대신, 그 사진액자를 태우며, 살아서의 인연을 끝내겠다.“



박광호, 2014 '아람누리미술관'에서 열린 '일산미술회' 단체전에서



“광호야! 미안하다.

그동안 참고 산다고 욕 봤다. 쥐띠부인 없는 저승에서 만나자.”



사진, 글 / 조문호















조준영 시인으로부터 인사동에서 대포 한 잔 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지난 5일 약속장소인 ‘유목민’에는 일찍부터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골목 술상에는 조준영씨를 비롯하여 강경석, 유진오, 김상현,

이명희, 전강호,, 공윤희씨 등 반가운 사람들이 많았다.
안 쪽에는 화가 김 구, 김 억, 한상진씨가 있었고,
뒤늦게는 김명성, 윤승길, 김수길, 신상철, 이미례씨가 줄줄이 나타났다.





이 모임에는 술값으로 만원을 받고 있는데, 
그마저 70세 넘는 노인은 면제니, 보나 마나 적자다.

인사동을 드나드는 예술가들이 다들 가난하니, 어쩌겠는가?





예전에는 대부분의 술값을 김명성 시인이 부담하였으나,
조준영 시인이 소집하면서 부터 작은 돈이지만 회비를 받게되었다.
십시일반 조금씩이라도 모아 모임의 자립성을 꾀하려하나,
모자라는 대부분을 대학에서 교편 잡는 조준영 시인이 부담할 수 밖에 없다.






이날 모임에서 은평구의원에 출마한 조햇님에 대한 인사를 많이 받았다.
달세 방에서 노모와 외할머니까지 모시며 사는 가난한 형편에
불평등의 벽을 없애겠다며 정치판에 뛰어들었으니, 다들 대견스러운 것 같았다.
그 고마운 마음을 답하는 길은 기어이 당선되어 잘못을 바꾸는 길 뿐이다.






그리고 화가 박광호씨가 요양병원에 입원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생선뼈만 줄 창 그렸던 박광호씨는 불운의 화가다.
장애가 깊어진 후로 인사동은 커녕 방안에서만 지내지 않았던가.






오랫동안 연락되지 않아 걱정했는데, 화가 전강호씨로 부터 안부를 전해들은 것이다.
목에 호스를 꽂아 통화가 불가능하다기에 병문안이라도 한 번 가야할 것 같다.
전강호씨가 입원한 병원을 알아내어 연락해 주면,
다들 찾아가 그의 손이라도 한 번 잡아주고 재기를 기원하자.





가난한 인사동 사람들이지만, 인정마저 없다면 무슨 소용이랴?



사진, 글 / 조문호






































박광호씨가 일산에서 그룹전 한다는 소식이 '인사동연가' 카페 글방에 올랐다.
개막 한 시간 전에서야 알게 되어, 하던 일을 제켜놓고 일산 '아람누리 미술관'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광호씨는 몸이 불편해 외출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럴 때 만나지 않으면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 전시하는 '일산미술인회'는 15년전 서양화가 이목일씨와 지금의 회장이 주도하여 만든 미술인모임으로 알고 있다.

그 당시는 미협지부의 실력 없는 화가들이 득세하여 새로운 모임을 만들었다는데,

작가들을 선별해 가입시켜서인지 전시작들의 수준이 보통은 넘었다.
박광호씨 외에도 아는 작가가 두 분 더 있었지만, 건망증이 많아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데다,

전시작들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가 없어 이야기를 꺼낼 형편이 아니다.

반평생동안 생선뼈만 그려 온 박광호씨의 최근작은 늘 궁금했는데,

아쉽지만 오늘 걸린 작품으로 대략의 흐름은 가늠하게 되었다.

한 때는 생선 뼈가 상형문자처럼 너무 도식적이어 약간 회의감을 가진 적도 있지만,

오늘 걸린 작품에서 그 형상의 꿈틀거림을 보게 되어 또 다른 기대를 하게된 것이다.

언제 열릴지 모르지만 벌써 그의 개인전이 기다려진다.

회원전 개막식을 끝내고 모두 뒤풀이에 갔으나, 우리만 남아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진 고생 끝이지만, 두 아들 잘 키워 어엿한 사회인으로 내놓았다기에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광호씨의 처 신경희씨가 4년전 자유문학으로 등단해 시를 연재하는 것은 알고 있지만,

다음달 중국 청도 청우림갤러리에서 그림전시회까지 갖는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두 내외가 그림 그리며 잘 살아주는 것만도 고마운데, 기름 넣으라며 돈까지 주니 기가 막혔다.

그를 알게 된 지도 어언 40여년의 세월이 지났다.
내가 부산 남포동에서 '한마당'이란 국악주점 할 때, 단골손님으로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가난하지만 세상에 굴하지 않고 그림그리는 모습이 늘 의연했지만, 때로는 애잔하기도 했다.

술이 취해 술집의자에서 꼬부려자기도 했으나 어찌 보면 둘 다 그 때가 행복한 시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잘난 사진 때문에 장사 팽개치고, 서울로 야반도주하여 지긋지긋한 제2막이 시작된 것이다.
성북동 외딴 곳에 달세방 하나 얻어 놓고 '월간사진'이란 잡지사에서 일할 무렵이다.
인사동에서 술 마시다 자정이 가까워 버스 타러 가는데, 포장마차에서 "형"하며 부르기에 돌아보니 광호씨였다.

죽었던 친구 살아온 듯 반가웠으나, 불러놓고는 술이 취해 그 자리에 뻗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극적으로 이산가족 만나듯이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그 세월이 30년이 되었건만 아직 둘 다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겁지급 살아가는데,

그는 몹쓸 병에 걸려 걸을 수 조차 없으니 더 안타까운 것이다.
스스로 만든 팔자이긴 하나 죽는 날까지 좋아하는 그림 그리고, 사진 찍으며 사니 더 이상 바랄 것은 없구나.

죽으면 돈 싸 가지고 가지는 않으니까...

"제발 성질 좀 죽이고, 고생한 도화엄마 잘 다독여 주거라"

 

 

 

 

 

 

 

 

 

 

 

 

 

 

 

 

 

 

 

 

 

 



서양화가 박광호씨가 참여하는 2011 고양초대작가전 오프닝이
지난 5월 20일 오후 5시 일산의 고양아람누리 갤러리누리에서 있었습니다.
김옥례, 안병철, 황영자, 전희정, 최승호, 이지훈, 이진원씨가 함께하는 이 전시는
6월 26일까지 열리오니 많은 관람바랍니다.

본 회에서는 채현국, 신성준, 조경석, 조문호, 전강호, 노광래씨가 개막식에 참여하였습니다.

관람시간 : 오전 10시- 오후 6시 / 박광호씨 전화 : 010-8359-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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